베를린 올림픽과 안익태
생애 : 1906-1965 년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여관을 경영하는 중류가정의 셋째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는 6세때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렸고 그후 집안 몰래 교회에 나가 찬송가를 부르기로 했고 특히 교회에서 풍금을 만져 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인생을 결정짓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자 교장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탄복한 나머지 곧 바로 관현악단에 입단시켰고 2학년 때는 음악 부장이 되어 매주 한 번씩 집에 있는 축음기를 학교로 가져가 음악감상회를 여는 등 음악활동은 열도를 더해갔다. 이러한 안익태의 음악적 재능을 본 형은 첼로를 사다주어 여름방학이면 서울로 올라와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의 주법을 익혀 첼로까지 연주하게 되자 그의 인기는 대단해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가를 연주하는 등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안익태는 어릴때부터 자존심과 정의감이 강해 숭실학교에서는 당시 친일 교사를 배척하는 주동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장학처분을 받게 되자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나서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일본경찰의 쫓김을 받게 되었고 결국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마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여 일단 위기를 넘긴후 다시 박사의 주선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영국의 민요 '올드랭사인'의 곡조에 부쳐 노래한 애국가를 처음 접한 것이 바로 3.1운동때였고 이때의 감동이 후일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형님과 함께 기거하면서 중학교에 편입하고자 했으나 요주의 인물이란 딱지가 붙은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사설 강습소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1년에야 비로소 동경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이 되었다. 중학교 5학년을 마친 안익태는 동경 국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전념케 되었는데 동창생으로는 김원복 홍성유 등이 있었다. 음악학교 재학중에는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일본 각지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졌고 이독주회는 그로하여금 첼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했을뿐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어도 훌륭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게했다. 예과1학년 여름방학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평양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독주회를 개최했고 이 독주회를 통해 그는 당시 서울과 평양을 YMCA총무로 활약하던 이상재 조만식 선생과 알게 되어 이들의 뜨거운 애국심은 일생을 두고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1928년 본과 2학년이 될 무렵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기울었고 학비를 염출할 길이 없게 되자 밤이면 동경화관이라는 양식집에 나가 첼로를 연주하여 돈을 버는 생활을 1년동안 계속했다. 그가 국립음악학교 본과를 졸업하게 되었을때도 수업료가 밀려 졸업이 보류되었으나 뒤늦게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업료를 납부하여 1인 후기 졸업식을 거행했고 졸업 후가진 독주회는 악단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당시 안익태가 연주한 곡은 하이든의 '협주곡'과 R.슈트라우스의 '소나타'였는데 장래가 촉망되는 첼로의 귀재라는 평을받기도 했다.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리던 조국은 일제의 학정이 점점 심해져 숨쉴곳도 없었고 평양에서 가려지던 독주회마저도 일본경찰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자 1930년 조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로부터 안익태는 조국을 잃은 보헤미안이 되었고 실제로 1961년 국제 음악제를 주도한 후 자신에 관한 모함을 듣고는 "세계는 나를 환영하는데 왜 조국에는 내가 설 땅이 없단 말인가. 애국가를 잘못 작곡에서 인가?"하고 한탄하기도 했다. 미국에 도착한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를 먼저 찾았고 일제의 억압속에 신음하고 있는 조국을 멀리하고 이역땅에 와 국기 계양대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처음 보았을때 실로 벅차오르는 감격을 말을잊게 했다. 태극기에의 감격은 애국가를 생각케 했고 언젠가는 애국가를 작곡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다시 한번 가져보는 것이었다. 특히 한인교회에서 예배가 끝난후에 부르는 애국가를 듣고나서 애국가의 가사를 잘 배껴 소중히 보관후 신시내티로 향했다. 신시내티에 도착한 안익태는 음악대학에 입학해서 더욱 깊이있는 음악 예술에 몰입하고 되었고 2학년이 되어서는 신시내티시립관혁악단의 첼로 주자로 입단하는 한편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 독주회를 개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의 평을 보면 "안씨가 연주한 첼로의 '라단조 협주곡'은 놀란랄 만한 기교와 세련된 소리를 가지고 청중을 도취시켰다"라고 개제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순회연주를 마치면서도 그는 첼로로 대성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던지 선배인 박윤정과 의논 끝에 다시 템플대학교의 단과 대학인 필라델피아음악대학으로 편입해 작곡과 지휘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가 신시내티를 떠나던 1932년 신시내티교향악단은 고별 야외연주회를 열었고 이 연주회에서 안익태는 랄로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필라델피아 음대 재학중에는 유명하기로 익히 알려진 필라델피아관현악단과의 연주를 통해 교향악의 진미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의 지도하에 연습단원으로 입단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휘공부에 박차를 가하면서 또다시 작곡공부를 위해 커티스 음악학교에 적을 두게 되었고 시카고 교향악단을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끌어올린 불멸의 지휘자'프리츠 라이너'로부터 작곡을 사사받게 되었다. 이 두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를 완전한 음악적 토대위에 올려 놓았고 훗날 그의 음악활동에 큰힘이 되었다. 1935년 필라델피아음악대학을 졸업한 그는 하숙비가 없어 하숙집에서 쫓겨 나면서도 뉴옥교향음악단이 주최하는 작곡 콩쿠르에 응모하기 위한 '한국 환상곡'의 작곡에 착수했다. '한국 환상곡'은 후에 애국가의 선율을 마지막 악장에 삽입했고 동양적인 신비와 우리 고유의 가락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그의 작품으로 세계도처에서 연주되었으며 한국의 얼을 심어준 명곡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악단에 실망한 안익태는 고전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쪽으로 마음이 쏠리기 시작 결국은 1936년 독일의 베를린에 도착한 그는 당시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자 불현듯 조국에 대한 애착심과 애국가를 작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6년전 미국에서 적어준 가사를 펴놓고 감격속에서 애국가의 선율를 완성하니 1936년6월은 우리의 애국가가 이역만리 독일에서 그것도 히틀러의 독재하에서 탄생한 역사적인 해가 되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그해 8월1 일 베를린에서는 올림픽이 열렸다. 바로 이 올림픽에는 비록일장기를 달기는 했지만 마라톤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7명의 한국선수가 참가하고 있었다. 안익태는 입상식이 끝나자 마자 이들을 찾아가 애국가의 악보를 내놓고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응원가라고 하며 함께 부르니 우리의 애국가가 불리워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타임머신을 타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폐막 전 메인 스타디움으로 가보자 마라톤 경기장으로 한 동양인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들어온다. 손기정이다 1등으로 들어온다. 경기장에는 우뢰 같은 박수 함성이 들린다 그 소리 한편으로 한쪽의 스탠드에서는 돌연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서너 명의 동양인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또 한명의 동양인이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흔들며 지휘하고 노래를 부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바로 그 울면서 미치광이처럼 지휘를 하고 노래하는 한 젊음이 그가 안익태, 지금의 애국가의 곡을 만든 장본인 안익태 선생 이었다. 안익태의 작곡이 되기 전 노래말 가사는 여전히 같았지만 그 곡은 아일랜드의 슬픈민요 '올드 랭싸인(auld langsyne)'을 차용했던 것이다. 안익태는 우리의 곡으로 우리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것이다. 그러나 이미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후 그 애국가 마저도 쉽게 부르지 못했던 것이다. 더우기 일본 국가대표선수로 나온 우리의 조선선수들 이들에게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노래 였다. 그래서 그 애국가의 우리 노래를 안익태선생은 불러 주고 싶었다. 이억만리 타국 땅에 나라 없는 슬픈 마라토너가 아니라 조선의 장한 아들인 손기정과 우리선수라고 목청 껏 불러 주고 싶었다. 꼭 보름 전 1936년 8월 1일 나치 치하의 개막식이 끝나고 일장기를 단 한국사람 김용식, 장이진, 이규환, 손기정, 남승룡 등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갑자기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머나먼 독일 땅에 자기도 조선인이라고 찾아 왔다.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조선응원가”를 불러주겠다면서 구깃구깃한 악보를 하나 꺼내들고 손짓, 발짓, 고개 짓 장단을 하며 지금의 애국가를 힘차게 불러준다. 일장기를 단 우리선수들은 아무 할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안익태! 그리고 보름 후 손기정과 남승룡이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가난한 슬픈 민족의 나라 없는 우리 선수를 위해 미친 듯 손을 흔들며 목이 다 쉬도록 조선응원가 애국가를 불러 주었다. 시상식에 오른 손기정은 보름 전 재독 조선청년 그 안익태가 부르고 간 조선 응원가 애국가를 생각 했을까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일본이 아니라고 고개를 숙이며 기미가요 대신 우리 조선응원가 “애국가”를 가슴으로 슬픈 미소를 지으며 부르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을 때 올림픽 스타디움 한쪽에서 한 외국인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서양 할머니가 우리 애국가를 들으며 울까? 바로 그녀가 안익태 선생의 미망인 스페인 국적의 “롤리타 탈라베라 안 이었다. 애국가를 완성한 안익태는 사본을 만들어 미국에 있는 교민회를 보냈고 '한국 환상곡'의 종악장에 합창으로 애국가의 선율을 삽입해 드디어 '한국 환상곡'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그의 활동은 유럽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는데 당시 스승으로는 지휘자'바인가르트너'와 헝가리 출신의 작곡가 '코다이''도흐나니'등이 있다. 민족의 혼이 담긴 '한국환상곡'을 미국에서 연주하다 실패한 안익태는 드디어 1937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감격적인 초연을 하게 되었고 더욱이 합창 부분의 가사를 한국말 그대로 부르게 했으니 안익태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후에도 계속되어 어디를 가나 합창은 반드시 한국말로 하게 했던 것이다. 초연을 성공리에 끝낸 그는 세계최대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사사받기 위해다시 독일로 건너가 우여곡절끝에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느 슈트라우스의 뒷받침으로 지휘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한국 환상곡' 을 연주해 조국은 일제의 압제하에 있었으나 애국가는 계속해서 세계 도처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1938년 비창 교향곡과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를 레퍼토리로 한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 지휘는 또 다시 성공을 거두었고 슈트라우스는 몸이 쇠잔해지자 안익태를 대신 보내 드디어 유럽에서 유명한 지휘자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로부터 스페인으로 피난하기까지 안익태가 지휘한 중요 교향악단을 살펴보면 부다페스트교향악단을 비롯해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교향악단 불가리아 국립교향악단 로마 교향악단 벨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 마드리드 필하모니 파리 프랑스라디오 교향악단등이 망라되어 있다. 어쨌든 1959년 5월까지 그가 지휘한 횟수가 2백32회에 달하고 있어 그가 얼마나 바쁜 지휘자의 생활을 했는지 알수 있다. 그가 어떤 지휘자였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처럼 세계의 유명 교향악단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초청한 것을 보면 그가 확실히 능력있는 지휘자였음에 틀림이없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안익태는 독일을 떠나 친지의 소개로 스페인으로 가게 되었고 스페인에서 그곳 귀족의 딸인 롤리타와 결혼하게 되었을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가정을 꾸민 안익태는 안식처를 찾아 지중해의 연안에 있는 피서지 '마요르카'에 안착했고 '마요르카'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를 마자 마요르카교향악단이 창단되니 1941년 창단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상임 지휘자로 있었다. 1955년 조국을 떠난지 25년 만에 쉬국해서 이승만 박사 탄신 80주년을 기념연주를 지휘했으나 그를 시기하는 일부 인사들의 모함으로 슬픈 가슴을 안고 한국을 떠났고 5.16후인 1961년 다시 귀국, 국제 음악제를 창설 2회까지 지휘봉을 들기도 했다. 작품목록에도 있지만 작곡가로서의 안익태는 지휘자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우선 작품수로 보더라도 10곡이 채 안될 뿐아니라 '애국가'를 제외하면 '한국 환상곡'이 국내에서 연주되고 있을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곡가로서의 안익태를 논할때는 여기 '애국가'와'한국 환상곡'이 중심으로 될수밖에 없다.어쨋든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이 중심이 될수밖에 없다.어쨌든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은 우리나라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남을 것이며 한국인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 특별한 감동을 갖게 되리라 믿는다. 특히 '한국 환상곡'에 대한 안익태의 열정은 대단하여 그가 지휘할때마나 가능한한 이곡을 무대에 올렸고 후반부에 '애국가'부분을 꼭 한국어로 부르게 함으로써 이곡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1945년 해방하기 전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과 울분은 '한국환상곡'으로 승화되었고 그자신도 이곡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계속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던것이다. '한국환상곡'을 크게 나뉘어 네 부분으로 분류할수있는데 처음부분은 한국의 민족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이며 두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담한 모습이고 세번째는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맛보는 애국가의 합창부분 그리고 네번째는 6.25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1965년안익태는 영국의 뉴필하모니 교향악단을 지휘하기 위해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영국에 건너가 자신의 작품인 '논개'와'비창'교향곡을 성공리에 지휘했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급히 마요르카로 돌아왔지만 병세는 끝내 호전되지 않아 1965년 9월16일3시15분쓸쓸히 눈을 감으니 그의 나이 59세였다. 1948년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하면서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기 시작했고 안익태 작곡가의 애국가는 지금도 국가로 가슴속에 나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있다. 그런데 십여년전 음악계의 일각에서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불라리아 민요를 표절한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결국 이문제는 음악적 기법이라든가 또 당시 안익태가 아직 불가리아로 여행하기 이전에 이미 애국가가 작곡된 점 등으로 보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따지고 보면 국가란 음악적 완성도를 따지기 보다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감격소게 이를 부를수 있으면 되는 것이고 특히 잊을수 없는 아픈 역사의 응어리를 안고있는 우리의 애국가는 이제 영원히 태극기와 더불어 대한민국과 함께 살아 남으리라 믿는다. 안익태의 유해는 그후 조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