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자 중앙신문에는 '배워야 할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사설이 실렸다.
"우리가 미국에서 배워야 할 거은 능률주의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그 하나는 '헐리우드 스타일'이다...'헐리우드 스타일은 미국이 낳은 것이다. 미국 문화의 본질이 그것에 그친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미국문화의 말초적 발현이오, 따라서 어디까지든지 말초적이다. 왜 이 문제를 여기서 제기하느냐 하면 벌써 본정통(충무로)을 중심으로 골목에서 보이는 광경은 미국이 가진 말초 문화의 유치한 모양이 너무나 노골히 보이는 까닭이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양의 문물, 생활양식, 의상 등이 물밀 듯 들어오고 미국식문화가 급격히 유입되었다. '남녀7세부동석' 식의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에 잠겨 있던 한국에서 그 중 특히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낸 것은 '춤바람'이었다. 춤바람은 미군의 댄스파티에서 시작되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각 곳에서 미군병사를 위로할 '댄스홀'이 생기고 댄스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댄스홀이 생기더니 남녀가 서로 끼고 빙빙 도는 사교댄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춤바람' 문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댄스홀은 모두 미군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곳이어서 미군과 함께가 아니면 들어가지 못했다. 서울 시내에는 호화스런 댄스홀이 여기저기 생겪는데 그중에서 규모가 큰 것은 정자옥 댄스홀(구 미도파백화점 5층)과 미츠코시 댄스홀(신세계 백화점 5층)이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경성에서 댄스홀은 금지되었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 댄스홀 열풍이 불었고 이에 따라 1930년대 초반 서울에서도 댄스홀을 개장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 있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만주사변으로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댄스홀은 어불성설일 뿐이라며 개장을 불허했다. 그로부터 6년 후, '대일본 레코드'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바 멕시코' 여급 김은희 등은 만주사변도 수습되었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으니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청원했다. 하지만 이 해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댄스홀을 설치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해졌다.
8.15 이후 전쟁 비축 물자가 풀리면서 가장 먼저 해방을 맞이한 분야는 유흥업계였다. 댄스홀도 해방의 감격 속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들을 보는 세간의 눈은 곱지 않았다. 해방된 지 채 두 달이 되기도 전 자유신문 10월 7일자에는 '범람하는 꼴불견'이라는 만화가 실렸다. "일본이 못 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나 다 한 번 해보고 싶은 까닭인지. 한 집 걸러 술집, 두 집 걸러 '딴스홀'. 재즈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 서울은 조선 서울이고, 외국 서울이 외국 서울이 아닐 텐데...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다가는 다리가 찢어질 걸!"
생산 설비의 상당수가 멈춰 섰고, 서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였지만, 서울의 환락가는 매일 밤 불야성을 이루었다. 해방 당시 10여 곳에 불과하던 서울 시내 고급 요릿집은 불과 1년 만에 31곳으로 늘어났다. 그밖에도 카바레 14곳, 바 59곳, 카페 12곳, 그릴 4곳 등이 성업 중이었다. 1946년 초,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은 유흥업소를 30%만 남기고 70%를 폐업시키겠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그 이듬해 허가받은 유흥업소는 술집 3225곳, 유곽 11곳, 댄스홀 4곳으로 급증했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기생이 631명, 창기가 682명, 그밖에 여급과 작부가 2556 명에 달했다. 미등록 유흥업소와 그 종사자는 그보다 몇 배는 많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미군이 유흥가의 큰손으로 떠오르자,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도 출현했다. 10월 23일자 자유신문은 "서울 거리를 더럽히는 국치랑(國恥娘 나라의 수치인 여성)들을 일소해 버리자는 소리"라는 제목 아래 격렬한 어조로 미군과 어울리는 여성과 이에 편승해 이권을 얻으려는 무리를 비판했다.
"연합군을 환영한다는 아름다운 핑계로 요사이 서울 거리의 풍기를 극도로 어지럽히던 유두분면(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의 해괴한 여인들이 출몰하여 서울 시민들을 격분시키고 있다. 이들은 민족 해방을 풍기 해방, 정조 해방으로 착각하였음인가. 백주에 큰길로 외국인과 끼고 다니는가 하면 그들의 자동차에 올라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달리고 있어 풍기 문제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사회문제로 화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권을 얻는 데 눈이 어두운 돈 있는 무리들이 이들을 이용하고 부채질하여 최근에는 더욱 심해 가고 있다. 소위 '바-'니 '카바레'니 하는 간판 단 집을 밀회 장소로 사용하게 하고, 그 값으로 이권을 얻으려는 무리가 많기 때문에 국욕(國辱) 여인 부대와 아울러 이들을 매장시켜 버리자는 소리가 높다."
유흥업소를 통해 이권을 얻으려는 무리와 국욕 여인 부대를 매장시켜 버리자는 과격한 주장을 하는 계층은 대체로 기성세대와 지식인층이었지만 유흥가의 향락객 또한 대개 그들이었다. 낮 동안 분단 극복 방식과 새로 수립될 정부의 성격을 두고 좌우로 갈라져 사생결단의 정치 투쟁을 벌이던 도시에 밤이 오면 유흥가에서는 음주가무와 유흥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사교문화는 유흥가에서만 유행한 게 아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우파 정치인들과 친분이 두텁던 모윤숙은 미군 고급장교, 외교관과 한국 정치인을 상대하는 사교클럽 '낙랑클럽'을 발족했다.
'낙랑클럽'이라는 명칭은 모임 구성원이 고구려 시대 낙랑공주와 같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여성들만이 선택되어 입회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시대 외국유학을 갔다 올 정도의 교육받은 사람들, 부유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집의 가정부인들 가운데 외모가 아름답고 영어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으며 교육도 받고 매너도 좋은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총재는 김활란이었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으로 150여 명 정도가 외국인들로 하여금 남한에 호의를 갖게 하는 사명을 띠고 조직된 비밀사교단체였다.
미군들은 파티를 열면 응당 낙랑클럽을 초대하였다. 파티는 대화로 시작되었지만 곧 음악과 춤이 곁들여졌다. 국제팬클럽 한국본부회장을 지낸 전숙희는 "댄스파티라는 게 처음에는 낙랑클럽과 미군들이 유행시킨 거죠"라고 썼다.
첫댓글 춤바람 하니 소설과 영화로도 유명했던 자유부인 있었죠
복혜숙이란 이름은 날렵한 제비안경끼고ᆢ털마고자 입고 나온 영화.그시절 엄마가 영화
좋아하셨는지 저를 많이델고 가셨던 기억이나네요
그리고 어릴때살던 인사동 익선동쪽에 유명한 요정이 많았는데
그런 담장긴 대궐?집들이 요정이었다는건 나중 커서 알게되었지요ᆢㅠ
슈렉님 긴글들 올리느라 애쓰시네요
따듯한 토마토 스프 한그릇 드세요 ᆢㅎ
주말에 식당에서 먹어봤는데 집에서 만들어볼까ᆢ
생각만 ㅎ
복혜숙은 일제시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꾸준히 영화에 출연한 장수 영화배우였다고 하네요.
이분이 운영한 비너스 찻집의 단골 중 한 사람이 여운형이라고 합니다~
토마토스프 비주얼이 끝내줍니다. 마침 집에 치즈스파게티해 먹으려고 사놓은 바질도 있어요. 시도해 봐야겠어요. 근데 양식 만든 경험이 별로 없어 제대로 될 지...
궁민해꾜 다닐때 생각이 납니다...
인천 송도 해수욕장 근처 솔밭에는
주말이면 미군들과 여인네들이
춤과 노래....그리고 술로
흥청망청 노는걸 보고
무척 흥미롭게 먼발치서 구경하던 일이...ㅠ
궁민해꾜라 하시니 연식이 있으신가 봅니다ㅋ
인천에서 자라셨나 봐요. 저는 부산의 공단 동네에서 자라 나이어린 여공들 출퇴근하는 모습을 매일 보며 해꾜 다닌 기억이...
@슈 렉
네..
지금은 신도시가 된
송도가 바다였을때
저녁마다 지겨주게 아름다운
낙조를 바라보며 컸습니다..
수십년만에 와보는 인천이
너무 변했습니다..
지난 일욜 능허대를 둘러보았지요..ㅎ
@슈 렉
얼마전엔
훌쩍
부산에 가서 쏘다니다 왔는데요..ㅎ
부산은 잘 모르지만
캐나다로 이민간 친구가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늘 부산을 그리워 하던데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