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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전사,무기관련 스크랩 한민족이 낳은 전쟁영웅”김영옥(19)
베스 추천 0 조회 189 17.01.29 18: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로 다른 두 중령 ⑴

영옥, 유엔군 총반격 앞두고 31연대 작전참모에


기사사진과 설명
#

#

영옥은 1951년 5월 하순 유엔군 3차 반격이 시작될 때 미 육군 31연대 1대대를 사실상 지휘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6·25전쟁 때
 한국 서남해역에 있는 미 해군항공모함 ‘필리핀 시(Philippine Sea)’ 호에서 출격을 준비하는 ‘코세어(Corsair)’ 전투기들.

 이때부터 영옥은 31연대 정보참모로 있으면서 사실상 연대 작전참모도 겸하게 됐다. 연대든 사단이든 군단이든, 전시에는 가장 중요한 두 참모가 작전참모와 정보참모였다. 유색인 대위가 백인연대의 정보참모로서 작전참모까지 겸한다는 것은 미군을 통틀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맥캐프리 연대장이 영옥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신임은 통념을 뛰어넘어 절대적이었다.

 영옥은 연대장의 지시대로 클락 소령의 작전 수립을 돕기 시작했다. 연대장으로부터 무슨 얘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 듯 두 사람이 협의해서 작전을 짜는 것이 아니라 주로 영옥이 말을 하면 클락 소령이 내용을 문서로 만드는 식이었다. 클락 소령은 곧 방식을 바꿔 매일 저녁 연대장에게 설명하기도 전에 아예 작전문서로 만들기 시작했다. 영옥이 이유를 묻자 클락 소령이 웃으며 답했다.

 “뭐 기다릴 필요가 있나? 며칠 지켜 보니 네 생각을 연대장님이 고치는 경우가 거의 없더군. 있다 해도 지엽적이고. 그러니 괜히 시간만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곧 직함 문제도 해결하겠다던 연대장은 17일자로 영옥을 연대 작전참모 직무대행으로 공식발령을 냈다. 곧 유엔군의 대대적인 총반격이 실시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연대장이 결전을 앞두고 영옥을 연대 작전참모로 쓰기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날 31연대는 미 해병5연대의 작전지역을 인수하면서 해병대가 보유하고 있던 탄약까지 인수했다. 19일이 되자 사단본부로부터 내일 새벽 5시를 기해 공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7사단은 5월 20일 새벽 5시를 기해 일제히 다시 공격에 나서기로 돼 있었다. 31연대로서는 장진호 전투 이후 사실상 첫 대규모 전투였기 때문에 영옥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연대는 한 달 전 회심의 일전을 위해 칼을 갈며 소양강을 건넜지만, 중공군 춘계공세로 전 유엔군 부대에 후퇴명령이 떨어지면서 한 달을 더 기다렸던 참이다.

 영옥은 전날 밤 10시 30분 각 대대에 연락해 공격에 따른 세부지침을 재확인했다.

 “1대대는 B중대 수색에 반드시 탱크를 동원할 것, 2대대는 현 위치를 고수하면서 3대대의 공격 지원에 만전을 기할 것, 3대대는 I 중대를 선두로 정각 5시부터 2대대 지역을 통과해 공격을 개시할 것….”

 영옥은 공식적으로는 작전참모 직무대행이었으나 작전참모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직접 공격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이날 공격은 1대대에 배속된 한국인 편의대원 2명이 아군 지뢰밭에 잘못 들어가 부상을 입었을 뿐 순조롭게 진행됐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22일 공격은 1대대가 선봉에 서기로 돼 있었다. 이날 아침 맥캐프리 연대장은 갑작스레 사단본부의 연락을 받고 사단으로 들어갔고 부연대장과 작전참모는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본으로 단기휴가를 떠나고 없어 영옥이 연대의 전투를 총괄해야 했다.

 문제는 1대대의 선봉에 섰던 A중대가 엉뚱한 곳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A중대 2소대장 존 코백 중위는 어제 봤던 장면을 아직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 채 중대장 해롤드 윌리키 대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A중대는 북한강 북쪽에 있는 돌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계곡에는 초가집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아직 몇몇 집에 농부들이 살고 있었다. 코백 중위로서는 인천상륙작전 이래 지금까지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지역이나 군대가 진주하면 민간인은 소개했으나 이곳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A중대는 탱크들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탱크들은 마치 탱크 포만으로 전쟁을 끝내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포를 쏘며 앞으로 갔다. 잠시 후 병사들이 계곡을 건너자 참호를 파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코백 중위가 소대원들을 데리고 참호를 파기 위해 열심히 삽질하다가 허리를 펴는 순간 주민으로 보이는 한국인이 소년 한 명을 가슴에 안고 지나갔다. 농부의 가슴에 안긴 소년은 열 살쯤 돼 보였는데 아버지인 듯한 한국인의 일그러진 얼굴에 번져 있는 고통은 참으로 보기에도 가슴 아팠다. 코백 중위는 왠지 그 소년이 미군이 쏜 탱크 포에 맞아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중공군의 포격에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후 윌리키 대위로부터 무전이 왔다.

 “오늘 공격 목표는 337고지다. 2소대를 데리고 어제 건넜던 계곡을 다시 건너 길을 돌아 337고지 앞에 있는 고지를 먼저 점령하라.”

 중대장이 먼저 점령하라고 명령한 고지는 코백 중위가 있던 곳으로부터 1㎞ 정도 북쪽에 있었다. 윌리키 대위는 사람도 좋고 용감한 장교였지만 지도를 읽는 데는 빵점이었고 코백 중위는 자기 상관의 이런 문제점을 잘 아는 터라 소대를 이끌고 목표지점으로 움직이기에 앞서 지형을 외우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소대를 이끌고 이동한 코백 중위는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윌리키 대위가 명령했던 고지를 점령했다. 마침 대대본부에서 도착한 참모 한 명도 2소대가 점령한 곳이 윌리키 대위가 지시했던 곳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11시가 되자 윌리키 대위가 나머지 중대를 이끌고 나타나더니 다짜고짜 “2소대는 중대 후미에 붙어라”라고 하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름의 문턱에 선 중부전선은 울창한 숲으로 덮이기 시작해 중대의 행군 대열은 곧 숲 속으로 사라졌다.

 30분 넘게 중대를 이끌고 가던 윌리키 대위가 갑자기 행군을 멈추더니 소대장들을 소집시켰다. 포병 관측장교 스티브 포켄베리 중위, 1소대장 탐 워커 중위, 2소대장 존 코백 중위, 3소대장 워드 소위까지 모두 모이자 윌리키 대위가 선언했다.

 “눈앞에 보이는 산이 337고지다. 먼저 포격을 가한 후 곧바로 공격에 돌입한다.”

 중대장이 목표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코백 중위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윌리키 대위는 코백 중위의 말을 일축한 채 포병 관측장교인 포켄베리 중위에게 337고지를 포격해 보라고 지시했다. 포켄베리 중위가 지도를 꺼내 좌표를 읽으며 포격 지시를 보내자 곧이어 105㎜ 곡사포 네 발이 오른쪽에 있는 다른 산으로 떨어졌다. 중대장이 공격하겠다는 산은 337고지가 아닌 것이 더 분명해졌다.

 그래도 윌리키 대위는 포켄베리 중위가 좌표를 잘못 불렀다며 앞에 있는 산으로 포격을 유도하라고 명령했다. 앞에 있는 산으로 포격을 유도하는 데만 30분이 더 흘러갔다.

 포격에 이어 A중대는 공격에 들어갔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잘못된 목표를 점령한 윌리키 대위는 대대본부를 호출하더니 “337고지를 점령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재앙의 시작이었다.


서로 다른 두 중령 ⑵

영옥 `한 수 아래' 미군 지휘관 때문에 골머리


기사사진과 설명
제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한껏 우쭐해 있던 미군은 엉겁결에 6·25전쟁을 맞았고, 그 와중에 한국에 파병된 미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수준 이하도 있었다. 커밋 메이슨 중령도 그런 부류였다. 사진은 전쟁 발발 열흘 만인 1950년 7월 5일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미군들.#

제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한껏 우쭐해 있던 미군은 엉겁결에 6·25전쟁을 맞았고, 그 와중에 한국에 파병된 미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수준 이하도 있었다. 커밋 메이슨 중령도 그런 부류였다. 사진은 전쟁 발발 열흘 만인 1950년 7월 5일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미군들.#

  제2차 세계대전 승전으로 한껏 우쭐해 있던 미군은 엉겁결에 6·25전쟁을 맞았고, 그 와중에 한국에 파병된 미군 지휘관들
 가운데는 수준 이하도 있었다. 커밋 메이슨 중령도 그런 부류였다. 사진은 전쟁 발발 열흘 만인 1950년 7월 5일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미군들.

 미군 31연대 A중대가 엉뚱한 고지를 중공군이 있는 337고지로 착각하고 공격하는 동안 A중대와 함께 337고지 협공에 나섰던 B중대는 공격에 실패하고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차에 A중대가 337고지를 점령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은 대대본부는 B중대를 불러 “A중대가 고지를 점령했으니 그곳으로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아군이 점령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 놓고 337고지로 다시 오르던 B중대는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중대장이 중상을 입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C중대 역시 포격을 받고 있었는데 아군의 포격이었다.

 영옥은 연대본부로 들어오는 전황보고를 믿을 수 없었다.

 “A중대 통신두절… B중대 중공군 매복으로 고전… C중대 아군 포격 받는 중….”

 영옥은 무전기로 1대대장을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1대대 작전참모였던 조 칸미 대위를 무전으로 불렀다. 칸미 대위는 얼마 전까지 연대본부에 있으면서 함께 카드도 하고 같이 지내다가 이번 작전을 앞두고 1대대 작전참모로 내려갔기 때문에 영옥도 잘 알고 있었다. 2차대전 때 유럽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던 영옥과 칸미 대위는 그 며칠 사이에 아주 가까워져 있었다. 칸미 대위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칸미 대위와도 교신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영옥은 즉시 연대본부를 떠났다. 길이 좋지 않기 때문에 대대본부까지 도착하는 데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대본부와 대대본부 사이에는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조차 없었다.

 1대대가 전방지휘소로 사용하는 텐트에 도착한 영옥은 대대장 커밋 메이슨 중령을 찾았지만, 메이슨 중령은 없었다. 영옥이 계속 대대장의 소재를 다그치자 처음에는 말을 않던 대대 참모들도 결국 털어놨다.

 “대대장은 전투가 시작될 때 샤워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영옥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졌는데 대대장이 샤워하려고 자리를 비우다니… 샤워장은 30㎞나 후방에 있는데….’

 대대본부는 그때까지도 A·B·C중대의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보병대대는 3개 소총중대와 1개 중화기중대로 구성됐으니 소총중대가 전부 실종됐다는 의미였다. 전투 중에 이런 경우가 생기면 최악의 시나리오는 3개 중대가 이미 전멸 또는 와해했거나 그렇게 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이때 칸미 대위가 전방에서 지프를 몰고 나타났다. 칸미 대위는 머리와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치명적 중상은 아니지만, 경상도 아니었다. 영옥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지금 337고지에서 오는 길이다. A중대가 점령했다고 윌리키 중대장이 보고했던 곳인데 A중대는 없었고 나도 놈들의 총격을 받아 이 꼴이 됐다.”

 “내가 연대를 떠나면서 탱크중대를 총출동시켰으니 곧 도착할 거다. 탱크 16대가 있으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야. 당장 중대들을 찾아야 해.”

 영옥이 칸미 대위에게 중대들의 위치 파악을 종용하고 있는데 텐트 뒤쪽에서 지프 소리가 났다. 메이슨 중령이었다.

 메이슨 중령은 밖에 세워진 영옥의 지프 번호를 보고 영옥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텐트로 뛰어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냐? 김 대위가 왜 내 대대본부에 와 있어?”

 “1대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연대본부로 들어온 보고만 보면 1대대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A·B·C중대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습니다. 대대장님의 소총중대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가 너한테 그런 얘기를 해줘야 할 이유가 없어.”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 계시다 오는 길입니까? 대대의 공격개시 시각이 오전 9시였지요? 지금이 오후 3시입니다. 그 6시간 동안 어디서 뭐 하고 계셨습니까? 대대가 전투를 벌이는데 대대장이 자리를 뜨다니, 직무유기 아닙니까!”

 “네가 뭔데 직무유기니 뭐니 하는 거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샤워하러 가셨다면서요?”

 “….”

 “지금부터 제가 소총중대들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부대를 모두 찾아야 합니다.”

 영옥은 메이슨 중령에게 지금까지 파악된 상황을 설명했다.

 “네가 잘못 생각한 거야. 1대대는 아무 문제가 없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 문제도 없는데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있는 거지.”

 “대대장님은 A중대를 찾으십시오.”

 “야, 너 대위 주제에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그렇게는 못 해. 연대장님은 돌아오셨나?”

 “어디 계신지 아직 모릅니다. 제가 연대를 떠나는 순간까지 무전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영옥은 칸미 대위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조, 부상당했다는 것은 알지만 아주 심하지는 않잖아. 대대 작전참모인 네가 누구보다 이곳 지형을 잘 알 테니 네가 C중대를 찾아라. B중대는 내가 찾지.”

 “그렇게 하지.”

 “C중대는 옆에 있는 우리 해병대와 그 앞에 있는 중공군 사이, 여기 어딘가 있을 거야.” 

 영옥은 지도를 가리키며 칸미 대위에게 설명했다. C중대가 아군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염두에 둔 계산이었다. 1대대 작전지역으로 아군 포격이 있었다면 연대 오른쪽에 있는 미 해병대일 가능성이 제일 컸다. 영옥이 다시 메이슨 중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대장님은 A중대를 찾으십시오. A중대가 목표를 잘못 알고 337고지를 점령했다고 보고를 해 왔다면 A중대는 지금 그리 위험하지 않은 곳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안 해!”

 영옥 자신이 B중대를 찾겠다고 했던 것은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고된 B중대를 찾는 것이 제일 위험했기 때문이다. 아군 포격을 받은 것으로 보고된 C중대를 찾는 일이 그다음으로 위험했기에 칸미 대위에게 C중대를 찾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도 메이슨 중령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영옥이 텐트를 나와 지프를 2~3미터쯤 움직였을 때 메이슨 중령이 뛰어나오더니 다시 소리쳤다.

 “너 어디 가는 거야?”

 “방금 얘기했던 대로 하는 것입니다.”

 “야, 나는 중령이고 이것은 내 대대야! 내가 대대장이란 말이야! 네가 뭔데 콩 놔라 팥 놔라 하는 거야. 너 지금 당장 여기를 떠나! 이건 명령이야! 말 안 들으면 군법회의에 넘길 거야!” 


서로 다른 두 중령 ⑶

공황상태의 병사들 심리적 안정위해 혼신


영옥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에서 위기를 겪은 병사들은 먼저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사기도 빨리 회복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사사진과 설명
영옥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에서 위기를 겪은 병사들은 먼저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사기도 빨리 회복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은 1944년 12월 독일군의 급습으로 시작된 발지전투로 위기에 처한 미군 병사들이 길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

영옥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경험에서 위기를 겪은 병사들은 먼저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사기도 빨리 회복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은 1944년 12월 독일군의 급습으로 시작된 발지전투로 위기에 처한 미군 병사들이 길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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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1944년 12월 독일군의 급습으로 시작된 발지전투로 위기에 처한 미군 병사들이 길가에 있는 예수상 앞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


 “네, 대대장님은 중령이고 저는 대위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연대 작전참모 직무대행으로 여기 와 있으며 연대장님 이름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대대가 수습되기 전까지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아까 이쪽으로 오실 때 계곡으로 탱크중대가 오는 것을 보셨지요? 제가 연대를 떠날 때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너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고 있지! 네가 증인이야!”

 메이슨 중령이 칸미 대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대대장님, 모든 게 엉망이 됐습니다. 이제 뭐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대대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됩니다. 저는 김 대위의 지시에 따를 것입니다. 제 눈에도 지금 김 대위는 연대장님을 대신해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칸미 대위는 대답하면서 벌써 영옥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칸미 대위까지 자기 지프에 몸을 싣자 메이슨 중령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기다려! 나도 A중대를 찾으러 가겠다!”

 영옥이 337고지 근처에서 B중대를 찾아냈을 때 병사들은 공포를 넘어 공황 상태에 있었다.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중대장 알프레드 앤더슨 중위가 중상을 입었다는 것까지만 알 뿐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후퇴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영옥은 장교 한 명을 찾아 지시했다.

 “두려워 마라. 곧 이쪽으로 탱크 16대가 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우리 탱크다. 5대는 이쪽으로 배치되고 나머지는 산 아래 평지를 가로질러 배치될 것이다. 병사들을 수습해 저쪽 남쪽 언덕에 진을 친 다음 무전으로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그쪽으로 모아라. 곧 A중대도 찾아 이쪽으로 데려오겠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6·25전쟁 때만 해도 통신기가 발달하지 않아 연대참모였던 영옥의 무전기로 위로는 사단본부와 아래로는 대대장과 대대 작전참모에게만 교신할 수 있을 뿐 중대장이나 소대장들에게는 교신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영옥은 B중대장이나 소대장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영옥이 말을 마칠 때쯤 산 아래쪽에서 요란한 굉음과 먼지가 일면서 탱크들이 일렬종대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어느 정도까지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었다. 연대가 보유한 탱크중대를 몽땅 한 곳에 투입하는 것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영옥은 2차대전 때의 경험에서 먼저 병사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돼야 빨리 사기를 회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근처 어딘가 중공군이 숨어 있겠지만 중공군도 16대나 되는 탱크를 상대로 무모한 전투를 걸어오지는 않을 것이었다. 영옥은 탱크중대장에게 탱크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1시간쯤 B중대와 함께하면서 중대를 수습한 영옥은 칸미 대위를 무전으로 불렀다.

 “C중대는 어떻게 됐나?”

 “찾았다. 네가 예측한 그곳에 있었다.”

 “지금 그쪽으로 가겠다. 탱크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나 그쪽으로 갈 테니 너도 C중대장을 데리고 그쪽으로 오라.”

 영옥이 탱크들을 반쯤 지날 무렵 반대쪽에서 칸미 대위가 C중대장 맥코이 대위를 데리고 나타났다. 영옥은 맥코이 대위에게 지시했다.

 “너희 중대의 행군 방향이 틀렸으니 모두 이쪽으로 데려와 여기 탱크들 옆에 참호를 파고 대기시켜라.”

 영옥이 맥코이 대위에게 후속 지시를 마칠 무렵 메이슨 중령으로부터 무전이 들어왔다.

 “메이슨 중령이다. A중대를 찾았다. 네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중이다.”

 밤이 너무 깊었다고 생각한 영옥은 A중대장 윌리키 대위와 계속 무전연락을 하면서 A중대의 배치 상황을 점검했다. 그 사이 C중대도 영옥이 있는 곳으로 와서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윌리키 대위로부터 무전연락이 왔다.

 “방금 B중대와 접촉했습니다.”

 다시 B중대에 연락해 A중대와 접촉했다는 것을 확인한 영옥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잠시 후 메이슨 중령도 칸미 대위와 영옥이 있는 곳으로 왔다. 셋은 대대본부로 돌아왔다. 텐트로 들어가자 메이슨 중령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김 대위, 미안하다. 아까 했던 얘기는 본의가 아니었다. 연대장님한테 오늘 일에 대해 함구해 준다면 나도 김 대위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대대를 지휘한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겠다.”

 “그러시지요. 어떤 일이 있었건 그건 연대장님과 대대장님 사이의 문제지 대대가 안전하기만 하면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영옥은 칸미 대위가 위생병으로부터 응급조치를 받는 것을 보면서 흘리듯 말했다. 칸미 대위에 대한 응급조치가 끝나고 위생병이 자리를 뜨자 영옥도 텐트를 나와 차에 올랐다.

 영옥의 운전병이 텐트를 향해 세워진 지프를 돌리려고 막 후진을 시작하는 순간, 뒤에서 다른 지프 한 대가 미친 듯이 다가오더니 귀청을 찢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부딪칠 듯 차를 세웠다. 깜짝 놀란 영옥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지프가 완전히 서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누군가 뛰어내렸다. 뒤차의 헤드라이트가 너무 강해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지만 뛰어내린 사람은 맥캐프리 연대장이었다.

 용수철처럼 뛰어내린 연대장은 텐트로 들어가면서 앞차에서 고개를 돌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영옥에게 말했다.

 “영, 따라 들어와라.”

 맥캐프리 연대장이 텐트로 뛰어들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사단본부에 있을 때 연대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아야겠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메이슨 중령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 일 없었으면 왜 김 대위가 여기 있어! 사단본부로 들어온 보고는 다 뭐야!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나? 사단에서도 연대에서도 보고를 받고 왔다. 그래도 너희들 입을 통해 직접 들어야겠다.”

 영옥이 낮에 연대본부에서 1대대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즉시 사단에 연락해 연대장을 찾아 보고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연대장은 보고를 받자마자 작전회의 중에 일어나 연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뭐, 얘기가 부풀려진 거지 사실은 별일 아닙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됐습니다.”

 메이슨 중령은 계속해서 사실을 은폐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다른 두 중령 ⑷

맥캐프리 중령 “영옥, 이제부터 대대를 지휘하라”


기사사진과 설명
영옥의 미 육군 31연대는 한국군 해병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서울 수복을 만천하에 알리는 한국군 해병대 모습. 왼쪽이 박정모 소위, 오른쪽은 최국방 견습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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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옥의 미 육군 31연대는 한국군 해병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서울 수복을 만천하에 알리는 한국군 해병대 모습. 왼쪽이 박정모 소위, 오른쪽은 최국방 견습해병. #

영옥의 미 육군 31연대는 한국군 해병대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공세에 박차를
 가했다.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서울 수복을 만천하
에 알리는 한국군 해병대 모습. 왼쪽이 박정모 소위, 오른쪽은 최국방 견습해병.

 메이슨 중령이 거짓말을 계속하자 연대장은 이번에는 칸미 대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맥캐프리 중령과 칸미 대위는 2차대전 때 유럽에서 함께 싸워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캔자스 주 출신으로 미국 본토에 있던 칸미 대위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장본인도 바로 맥캐프리 중령이었다. 맥캐프리 중령은 31연대를 맡으면서 전투 경험이 많은 2차대전 참전 장교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는데 칸미 대위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맥캐프리 중령은 칸미 대위가 도착하자 연대본부에 며칠 근무시키며 신속히 상황을 파악하도록 한 후 1대대 작전참모로 내보낸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습니다. 사실 저 역시 오늘 대대에 발생한 일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책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작전을 짠 장본인도 저였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도 제가 있는 동안에 발생했습니다.”

메이슨 중령 거짓말 계속

 칸미 대위는 모든 일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맥캐프리 연대장이 이번에는 영옥에게 물었다.

 “조의 설명이 모두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러자 연대장은 다시 메이슨 중령에게 물었다.

 “이들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모두 과장된 것이고 사실과 다릅니다.”

 메이슨 중령은 여전히 거짓말을 계속했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한 것이었다. 연대장이 마음만 먹으면 메이슨 중령은 군법회의 감이었다.

 “….”

 여러 사람과 대질심문을 계속하던 맥캐프리 연대장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대장은 머릿속으로 메이슨 중령과 처음 만나던 모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날은 맥캐프리가 연대장이 된 직후 1대대에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처음 명령했던 날이었다. 맥캐프리는 이동명령을 내린 후 1대대의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오후에 전선 시찰을 나갔다. 그때 장교 한 명이 모는 지프 한 대가 남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맥캐프리가 차를 세우고 물었다.

 “나는 신임 31연대장 맥캐프리 중령이다. 귀관은 누군가?”

 “1대대장 메이슨 중령입니다.”

 “뭐야? 대대가 지금 최전방에 나가 있는데 대대장이 부대를 비워? 지금 도대체 어디 가는 거야?”

 “샤워도 할 겸 자러 갑니다.”

 “뭐가 어째?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하라.”

 며칠 후 맥캐프리는 다시 1대대를 시찰했다. 아침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1대대의 공격 대기선으로 가 보니 병사들은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북쪽에서 기관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맥캐프리가 100m가량 뒤로 물러나는 순간 이날 아침 자기가 왔던 길로 지프 한 대가 달려왔다. 이번에도 지프에 타고 있는 사람은 1대대장 메이슨 중령이었다.

 “아니, 예정된 공격 시각에 맞춰 공격 대기선에 너의 소총중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왜 아무도 없나? 도대체 어찌된 건가?”

 “글쎄 저도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동을 하기는 한 것 같은데, 아무도 저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맥캐프리 중령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은 채 돌아서서 텐트를 나오며 영옥의 팔을 잡아끌었다.

 “영, 나를 따라와라.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자.”

 둘이 텐트 밖으로 나가자 연대장이 영옥에게 말했다.

 “영, 이건 너와 나 둘 사이만의 얘기다. 너는 지금부터 1대대 작전참모로 여기 남아라. 형식적으로 보면 연대 정보참모에서 대대 작전참모가 되니 좌천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영전이다. 내 마음속에서 네가 이제부터 대대장이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정각 6시부터 대대를 지휘하라. 단 1분 전이라도 안 된다. 정각 6시부터다.”

 “….”

 “그렇지만 네가 지금 대위라는 것이 문제다. 미 육군에서 대위는 대대장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신참 소령 한 명을 물색해 명목상 대대장으로 보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얼굴마담이고 진짜 대대장은 너다. 그에게도 모든 것을 주지시켜 놓겠다. 1대대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얼굴마담 없이 그냥 너를 대대장 직무대행으로 앉혀 놓으면 대대장 자리가 비어 있다는 소문이 날 거야. 어느 장군이라도 그것을 알게 되면 자기가 봐주고 싶은 소령 누군가를 대대장으로 심을 것이 뻔하다. 나는 너를 대대장으로 앉히고 싶다.”

 맥캐프리 연대장은 벌써 많은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인사규정에 따르면 전쟁터에서 대대장 노릇을 한 달만 한 소령은 자동적으로 중령으로 진급하게 돼 있었다. 누구든 전장에서 대과 없이 대대장을 지내면 대령까지 진급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장에서 연대장을 지낸 대령에게 별이 손바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대대장이나 연대장 자리가 비면 치열한 연줄 싸움이 벌어졌다. 출세를 좇는 인간의 속성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맥캐프리 중령은 출중하고 트인 인물이었다. 그는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영옥을 소령은 물론 중령까지 고속 진급을 시키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연대장이 다음날 아침 6시를 강조했던 이유는 모든 일을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옥, 정각 6시에 일어나 …

 맥캐프리 중령은 연대본부로 돌아가자마자 사단장 페렌보 소장과 부사단장 싱크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조치에 대해 납득을 구하고 얼굴마담 노릇을 할 소령 한 명을 찾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사이 영옥은 연대장의 지시대로 1대대에 그대로 남았다.

 맥캐프리 중령이 떠나자 메이슨 중령이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연대장한테 말하지 않은 데 대해 감사한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연대장 말이 김 대위가 대대를 지휘한다고 했으니 그리 되겠지. 어쨌든 내가 여기 있는 한 나는 중령이고 귀관은 대위지만 김 대위의 명령은 무엇이든 뒷받침하겠다.”

 다음날 미군 31연대는 한국군 해병대 작전지역을 인수하고 공세를 계속했다. 이날 1대대의 공격목표는 구만산이었다. 구만산은 홍천강 북쪽의 북방면 원수골에 있는 해발 332m인 산으로 거기서 15㎞만 더 북으로 가면 춘천이다.

 공격개시 시각은 아침 7시였다. 이미 5시에 잠을 깨 작전지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영옥은 시계가 정각 6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다른 두 중령 ⑸

영옥 지휘 1대대 첫 승전… 전사자 한 명 없어


기사사진과 설명
메이슨 중령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은성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그의 전공은 날조된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도 눈속임에 능한 인물이 있기는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육군7사단 장병들이 퇴각하는 모습.#

메이슨 중령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은성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그의 전공은 날조된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도 눈속임에 능한 인물이 있기는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육군7사단 장병들이 퇴각하는 모습.#

메이슨 중령은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은성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그의 전공은 날조된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도 눈속임에 능한 인물이 있기는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육군7사단 장병들이 퇴각하는 모습.

 영옥은 본부중대장 막사를 찾아 잠들어 있는 클로드 맥체스니 대위를 깨웠다. 갑자기 잠을 깬 맥체스니 대위가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누구야?”

 “김영옥 대위다. 연대장님 명령에 따라 지금부터 내가 대대를 지휘한다.”

 “무슨…. 먼저 대대장님한테 확인부터 해야겠습니다.”

 맥체스니 대위는 15분쯤 있다가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맞는 말 같군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최단시간 내에 중대를 소집시키고 서둘러 병사들에게 아침을 먹여라. 공격개시 시각이 7시란 말이야.”

 “벌써 6시가 넘었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도 알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

 “준비가 끝나면 12시는 될 겁니다.”

 “무슨 소리야? 훨씬 빨리 할 수 있어. 당장 나가 병사들을 소집하고 취사 준비도 시키면서 다른 장교들도 모아. 아침을 제대로 갖춰 먹어야 하나? 대충 때워!”

 영옥의 닦달에 대대는 부산하게 움직였고 선봉을 맡은 C중대가 공격대기선에서 대형을 갖췄다. 9시43분이었다. 연대로부터 하달된 공격개시 시각보다 2시간 43분이나 늦었다. 영옥은 무전기로 연대본부를 호출했다.

 “2분 후 공격에 돌입합니다.”

 영옥은 공격에 앞서 급한 대로 동원할 수 있는 야포와 박격포는 모두 동원해 실제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포격을 가하도록 했다.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날 아침에는 유달리 안개가 짙어 걱정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야도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영옥이 포격에 이어 공격에 나선 C중대의 공격 상황을 쌍안경으로 지켜보는 동안 누군가 조용히 곁에 다가와 앉았다. 메이슨 중령이었다.

 “어떻게 돼 가나?”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격이 예정보다 더디지만 공격 자체가 늦게 시작됐습니다. C중대는 곧 작전 1·2단계를 거쳐 2시간 정도 지나면 고지를 점령할 것입니다.”

 “….”

 “….”

 “영, 어제 일은 미안하게 됐다. 나도 연대장이 조만간 나를 직위 해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빠르면 오늘일 수도 있겠지. 언제가 되든 내가 대대장으로 있는 한 영의 전투지휘를 받쳐 주겠다.”

 “….”

 “솔직히 말하지만 영이 나 대신 이 일을 하고 있어 다행이다. 나는 일선 지휘관이 못 돼. 2차대전에 참전하긴 했지만 사단본부에서 서류만 만졌지 한 번도 일선에 있어 본 적이 없다. 6·25전쟁이 나로서는 사실상 첫 전투지. 북한에서의 나의 무용담은 모두 헛소리야. 전부 내가 조작한 거지.”

 영옥이 아무 대꾸 없이 쌍안경으로 C중대를 쫓는 동안 메이슨 중령은 고백을 계속했다.

 “영이 전투지휘에 바쁘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영을 얼마나 믿는지 보여주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대대본부로 돌아가 있겠다.”

 메이슨 중령은 이 말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영옥이 메이슨 중령을 본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잠시 후 연대장 맥캐프리 중령이 유선전화로 영옥을 찾았다.

 “수 분 내로 메이슨 중령의 직위를 해제할 것이다. 전투 경험은 전혀 없고 사람은 아주 좋은 소령 한 명을 찾았으니 곧 그를 대대장으로 보내겠다.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어제 말한 대로 그는 형식상 대대장이고 실질적 지휘는 네가 하는 것이다. 그에게도 그렇게 일러 놨다. 아마 내일이나 돼야 부임할 거다.”

 연대장이 말한 인물은 어빙 워든 소령이었다. 워든 소령은 부임하자마자 영옥을 찾았다.

 “연대장님으로부터 지시가 있었다. 모든 얘기를 들었으니 아무 부담 없이 대대를 이끌어라.”

 맥캐프리 연대장은 대대 작전참모였던 칸미 대위를 연대 정보참모로 불러들이고 영옥을 대대 작전참모로 발령함으로써 공식 인사를 마무리했다. 중상을 입고 후송된 B중대장에 대한 후속인사도 있었다. 어느 대대의 대대장, 대대 작전참모, 중대장 한 명을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미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대단히 과격한 인사였다.

 반격으로 전환하기는 했지만 유엔군도 내부적으로 그만큼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한국군도 군단 하나가 해체돼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게 된다. 한국군 3군단이 현리 일대에서 공격을 받고 힘없이 무너지면서 무질서하게 후퇴하자 화가 난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아예 군단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구만산 전투는 영옥의 예상대로 두 시간 정도 계속돼 정오 무렵 C중대가 구만산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영옥의 지휘 아래 들어온 1대대가 기록한 첫 승전이었다. 부상자가 8명 발생했지만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날 31연대는 정보수집 요원으로 중공군에 배치됐던 북한군 4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들은 15~22세로 “우리 또래인 남자 8명, 여자 5명이 중공군 4사단에 함께 배치됐다. 1개 중대에 한 달에 쌀 한 자루가 배급되며 마지막 배급은 꼭 한 달 전에 있었다. 중공군은 배가 고파 사기가 엉망”이라고 털어놨다.

 메이슨 중령과 맥캐프리 중령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장교로서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인물이었다.

 메이슨 중령은 이름이 커밋 메이슨이었지만 머리카락이 붉은 색이라 ‘레드’(Red)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장진호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것으로 돼 은성무공훈장까지 받았으나 사실 그의 전공은 날조된 것이었다. 어느 나라나 어느 사회나 무능하고 무책임하면서도 눈속임에 능한 인물이 있기 마련으로 미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부하의 안전이나 임무 같은 것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에만 관심이 있던 비겁한 거짓말쟁이였다.

 1대대 수습을 마친 맥캐프리 연대장은 메이슨 중령을 군법회의에 넘기려 했으나 사단장 페렌보 소장이 그를 본토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당시 미군은 지휘관이 부하들의 생명을 대거 희생시키지 않는 한 군법회의까지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종의 불문율로 삼고 있었다.

 메이슨 중령이 군법회의까지 가지 않았던 더 중요한 이유는 엉겁결에 6·25전쟁을 맞았던 미군도 그만큼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슨 중령이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그런 군인에게 은성무공훈장까지 주고 중령 진급에 대대장까지 시킨 사실을 두고 비난이 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미군으로서는 누워서 침 뱉기 꼴을 피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두 중령 ⑹

맥캐프리, 임관 6년만인 27살에 대령까지 진급


6·25전쟁에서 영옥과 인연을 맺은 후 평생 영옥의 후견인이 된 맥캐프리는 비상하고
 출중한 군인이었다.      그는 6·25전쟁에서 피란민 여성 3대 한 가족을 보고는 자기
지프로 후방에 데려다 줄 만큼 마음도 따뜻한 인물이었다. 사진은 중장 시절의 윌리엄
 맥캐프리.

 맥캐프리 중령은 2차대전이 일어나던 1939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임관 6년 만에 27살의 나이로 대령까지 초고속으로 진급했다가 종전 후 군축 과정에서 나이에 비해 계급이 너무 높다는 이유로 다시 중령으로 내려앉은 인물이었다. 당시 미군장교의 계급에는 임시계급과 영구계급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규정에 따라 임시계급은 언제나 영구계급으로 환원될 수 있었다. 맥캐프리의 경우는 임시계급은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영구계급은 중령이었던 것이다.

 맥캐프리 중령은 그의 경력이 말해 주듯 아주 비상한 인물이었다. 인종차별이 합법적이던 시절에 그가 유색인 대위 한 명을 얻기 위해 백인 소령 두 명을 내준 것이나 영옥에게 연대 정보참모와 연대 작전참모 직무대행을 겸임시킨 것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스스로도 유능할 뿐만 아니라 부하를 쓸 때도 통념을 뛰어넘어 오직 능력을 중시했다. 그는 31연대장 취임 직후 스스로 지프를 몰고 가다가 피란길에 나선 할머니·딸·손녀 등 한국여성 3대 한 가족을 만나자 자기 지프에 태워 안전하게 후방까지 데려다 주고 다시 부대로 귀대할 만큼 마음도 따뜻한 인물이었다.

아몬드의 ‘페어헤어드 보이’

 맥캐프리가 임관 6년 만에 대령까지 진급했던 것은 2차대전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있었지만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인천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한 장본인인 아몬드 장군의 배려에 힘입은 바 컸다. 아몬드 장군은 2차대전 당시 100대대·442연대가 독일군이 북이탈리아에 설정한 주방어선인 ‘고딕라인’(Gothic Line)을 돌파하던 바로 그때 역시 북이탈리아에 있던 92사단장으로 있었는데 이미 그때부터 맥캐프리를 총애해 그를 사단 부참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참모장 자리가 비자 곧바로 참모장에 임명했던 것이다. 사단 참모장은 대령 보직이었기 때문에 맥캐프리는 즉시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군들은 이처럼 누가 누구를 각별히 아끼고 보직관리까지 해줄 때 그렇게 아낌을 받는 사람을 ‘페어헤어드 보이’(fair-haired boy)라 부른다. 아몬드는 맥아더의 페어헤어드 보이였고 맥캐프리는 아몬드의 페어헤어드 보이였다. 영옥은 6·25전쟁에서 맥캐프리와 인연을 맺은 후 그의 페어헤어드 보이가 됐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군에서 그것도 전시에 중요한 작전을 결행할 때는 작전 자체를 치밀하게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적임자를 선정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결행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이를 수행할 부대로 일본에서 10군단을 급조하면서 참모장으로 데리고 있던 아몬드 소장을 10군단장에 임명했다. 맥아더는 아몬드에게 인천상륙작전을 맡기면서 군단참모든 예하 부대 지휘관이든 필요한 사람은 전 미군에서 아무나 데려다 쓰도록 했다.

 이때 아몬드 소장은 맥캐프리를 군단 부참모장으로 지목했다. 이로 인해 미국 본토에 있던 맥캐프리 중령은 인천상륙작전을 코앞에 두고 태평양을 날아와 가까스로 상륙작전에 합류했다. 27살에 대령까지 올라갔고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군을 줄이는 과정에서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다시 중령으로 내려앉았던 맥캐프리는 이때부터 다시 아몬드의 오른팔이 돼 함경도까지 갔다가 흥남철수 후 미군이 진용을 재편할 때 31연대장이 됐다.

 아몬드가 맥캐프리를 31연대장에 앉힌 것도 진급을 염두에 둔 보직관리가 커다란 이유였다. 당시 미군은 인사규정을 바꿔 군단장이라도 부하를 적당히 대령으로 진급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아몬드는 맥캐프리를 대령으로 진급도 시키고 앞으로 장군도 될 수 있도록 연대장이 되게 했던 것이다. 아몬드의 의도대로 맥캐프리는 영옥이 구만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던 날 다시 대령으로 진급했다.

 미군들이 말하는 페어헤어드 보이는 어느 사회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맥아더와 아몬드의 관계는 6·25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는 한국현대사를 바꿨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맥아더의 지나친 아몬드 총애는 한국으로서는 행운과 불행이 뒤범벅이 된 복잡한 운명의 씨앗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아몬드를 10군단장에 임명하면서도 극동사령부 참모장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그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군 총사령관은 8군사령관인 워커 중장이었다. 오늘날 서울에 있는 워커힐의 이름이 나오게 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이라는 테두리에서 보면 사령관인 워커 중장이 10군단장인 아몬드 소장의 상관이었으나 극동사령부라는 테두리에서는 참모장인 아몬드 소장이 워커 중장의 상관이었다.

 일사불란한 지휘체계가 생명인 군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명령 계통이었다. 이로 인해 워커 중장은 아몬드 소장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10군단에 대한 워커 중장의 지휘권에 문제가 생겼다. 5성 장군으로 미군에서는 황제로 군림하던 맥아더 장군의 페어헤어드 보이였던 아몬드 소장도 고분고분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6·25전쟁을 수행하는 유엔군의 3개 축인 미군 1, 9, 10군단이 상호 보완하며 유기적으로 작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상황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하면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비극으로 다가왔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미군 1, 9군단은 서부전선의 주축을 맡고 10군단은 동부전선의 주축을 맡으면서 그 사이에 한국군을 배치했다. 미군이 한국군에 비해 장비도 우수하고 기계화돼 있으므로 미군의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지만 미군이 험난한 산악지대를 기피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이유다.

 그리고 그 뒤에는 워커와 아몬드의 갈등이라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다. 두 미군 사이에 배치된 한국군은 워커와 아몬드가 직접 부딪치지 않도록 하는 완충지대였던 셈이다.

맥아더의 뼈아픈 군사실책

 이 점은 북진 당시 유엔군 지휘부가 저지른 가장 중대한 실책이었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 지휘부는 이 약점을 간파해 1950년 11월 2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밀어붙인 중공군의 제2차 공세에서 유엔군이 대패하고, 결국 38선 이남으로 다시 전선이 밀려 내려가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중공군은 2차 공세에서 무기나 훈련이 미군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던 한국군부터 집중 공격해 하룻밤에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을 제물로 삼고 전선을 동서로 가르며 밀고 내려왔다.

 이로 인해 6·25전쟁은 2년 반이나 더 계속되면서 끝없이 피를 요구했다. 유엔군의 북진 대형이 서해안에서 낭림산맥까지는 미군 1군단과 미군 9군단, 낭림산맥은 국군 2군단, 낭림산맥에서 동해안까지는 미군 10군단과 국군 1군단으로 짜인 것도 이 때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참으로 뼈아픈 맥아더의 실책이었다.

 이로 인해 두만강까지 올라갔던 미군 7사단도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가까스로 흥남을 거쳐 탈출했고 영옥이 합류했을 때만 해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구만산 전투를 하루 앞두고 1대대에서 발생했던 해프닝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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