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릉(恭讓王陵)
삼척시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7번 국도를 따라
17km 정도 남쪽으로 내려가 고개를 넘으면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의 낮은 야산의 양지바른 언덕에
몇 기의 봉긋한 무덤이 눈에 띄는데,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 3부자가 묻혀 있는
공양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고개의 이름은 공양왕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하여 지금도 ‘살해재’로 불리고 있다.
또한 궁촌리 해수욕장으로도 잘 알려진 이곳 궁촌마을은
왕이 피신해 머물던 곳이라는 뜻이니 지명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우왕 14년이던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는 우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를
모두 왕씨의 후손이 아니고
신씨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내쫓고,
개국하기 전까지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해 줄 사람으로
고려 신종의 7세손인 왕요를 찾아냈다.
자신이 이성계에게 이용만 달할 것이라고 눈치챈 왕요는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이성계는 억지로 왕에 오르게 하였다.
이성계는 왕요를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공양왕 4년(1392) 덕이 없다는 구실을 붙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마침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강원도 간성에서
두 아들과 함께 2년간 유배생활을 시켰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1394년(태조 3년) 3부자를 삼척 궁촌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한 달 뒤에 이성계가 보낸 사람에 의해
목이 졸려 목숨을 잃는데, 이때 공양왕의 나이 45세였다.
죽임을 당한 지 22년 후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태종 16년(1416)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삼척의 이 무덤이 공양왕과 그 아들의 것이라는 주장에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이곳 주민들은 그렇게 믿어 왔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의 ‘안성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고양시에 있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양왕을 해친 자들이 살해했다는 증거로
목을 잘라가 보인 뒤 고양에 묻고
몸은 삼척에 남겨둔 것이라는 주장과,
공양왕이 삼척에서 죽어 묻혀 있다가
태종 때 복위가 되자 고양으로 이장하면서
삼척의 봉분은 그대로 남겨 두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