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정씨(長鬐鄭氏)
▶시조(始祖)
시조(始祖) 자여(子與, 시호는 문경)는 고려 현종(高麗顯宗) 때의 추충진국공신(推忠鎭國功臣)이며, 태자태사(太子太師, 종1품),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정2품),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정2품) 등 요직을 역임하고 장기백에 봉해졌으며, 식읍을 하사받아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을 장기로 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에 있다.
* 장기정씨의 선대(先代)는 경주정씨(慶州鄭氏)이며 그 이후 영일정씨(迎日鄭氏)에서 분파한 성씨임
가문을 빛낸 조상님들은 정자여(鄭子與의 아들 정극겸(鄭克兼)이 직학사(直學士)를 지냈고, 손자 정희경(鄭希景)은 순검사(巡檢使)를, 증손자 정구(鄭球)는 낭중(郎中)을 지냈다. 직제학(直提學)에 오른 정천룡(鄭天龍)과 봉산군(蓬山君)에 봉해진 정천봉(鄭天鳳)은 사간(司諫)을 지낸 정수(鄭需)의 아들로, 6세손 정승주(鄭承周)와 함께 가문을 빛냈다. 학자로 이름을 날린 정규한(鄭奎漢)은, 조선 정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화산집(華山集)"을 저술하였다. 그 밖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정동엽(鄭東燁), 별제(別提)를 지낸 정습 등이 가문을 빛냈다.
파별로 살펴본 장기정씨는 <사직공파(司直公派)>, <선전관공파(宣傳官公派)>, <죽포공파(竹圃公派)>, <통덕랑(通德郞公派)>, <별제(別提公派)>, <호군(護軍公派)>, <첨지(僉知公派)>, <첨정(僉正公派)>가 있다
201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장기정씨는 전국에 4,705명(서울 956명, 부산 46명, 대구 27명, 인천 226명, 광주 5명, 대전 998명, 울산 57명, 세종 60명, 경기 1,055명, 강원 46명, 충북 397명, 충남 618명, 전북 61명, 전남 18명, 경북 70명, 경남 59명, 제주 6명) 조사 되었고,
집성촌으로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금대리에 118가구, 충남 논산시 벌곡면 한삼천리와 양산리 등에 36가구, 충남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 일원에 31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대전시 일원에 65가구, 서울 경기 일원에 80가구가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장기정씨(長鬐鄭氏) 연원(淵源)> 장기정씨시조(長鬐鄭氏 始祖)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조에 진사에 입격(入格)하고 국가에 발탁(拔擢)되어 많은 공을 세워 품계(品階)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고 태자(太子) 태사(太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판추밀원사(板樞密院事) 등을 역임하고 추충진국공신(推忠鎭國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장기정씨(長鬐鄭氏)는 성관사실(姓貫事實)에 의하면 장기정씨 시조(始祖) 정자여(鄭子輿)는 영일정씨(迎日鄭氏)의 후손(後孫으로 고려(高麗)에 출사(出仕)하여 공신(功臣)이 되고 장기백(長鬐伯)으로 피봉(皮封)되어 후손(後孫)들은 그곳에 정착(定着)하여 세거(世居)하면서 장기(長鬐)를 관향(貫鄕)으로 삼사 세계(世系)을 이어오고 있다. 장기(長鬐)는 경상북도 동쪽에 위치한 영일군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신라 때는 지답현(只沓縣)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기립현(鬐立縣)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초에 장기현(長鬐縣)으로 고쳐 경주(慶州)에 딸리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장기군(長鬐郡)으로 승격(昇格)하였으나 1914년 주군현(州郡縣) 폐합(廢合)시 군이 폐지되고 내서(內西), 양남(陽南)은 경주군(慶州郡)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영일군에 편입(編入)되어 장기면이(長鬐面) 되었다. <대표적 인물> 장기 정씨(長鬐 鄭氏)는 고려 때 시조 이하 수대에 걸쳐 등과(登科)하여 벼슬을 했고, 고려말에 이르러 7세손 정천룡(鄭天龍)이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고 천룡의 자 을덕이 신호위 중낭장을 역임했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建國)하자 고려(高麗)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켜 관직(官職)에 불사(不仕)하고 생(生)을 마쳤다. 그 후 11세 세영(世榮)이 수원(水原) 정송리(貞松里)*로 이거(移居)하여 12세 정승주(鄭昇周)는 사마시(司馬試) 4등에 입격(入格)하고 7년 후에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등과(登科)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한 후 김제 군수(金堤 郡守) 로 제수(除授)되고 재직(在職) 중(中)에 사망하였다. * 정송리(貞松里)는 현재 화성시 정남면(예전 남곡면-정남면은 정림면과 남곡면이 통합) 백리로 추정 정승주(鄭承周)는 형(兄)인 정거주(鄭巨周)가 살고 있던 수원 (水原) 정송리(貞松里)를 떠나 공주(公州) 정천(鄭川 : 현 공주시 계룡면 금대리)으로 이거(移居)하여 그곳에 정착(定着)해 480여 년을 국가와 지역사회(地域社會)에 공헌(貢獻)했고 종족(宗族)의 번성(繁盛)으로 연면(連綿)히 이어 왔다.
[출처] 장기정씨 선전관공파(長鬐鄭氏 宣傳官公派)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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