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1월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은 친일경찰 출신 일색의 군정경찰에서 친일파 숙청을 요구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최능진은 10월 21일 발족한 경무부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 요직에 등용하는 것에 대하여 경무부장 조병옥과 대립하고 있었다.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신이 부유한 지주이긴 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의 두 형은 독립운동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전력이 있었다. 특히 큰형 최능현은 감옥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생명을 잃었다.
최능진은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을 거쳐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원 체육과를 졸업한 그는 워싱턴에서 YMCA 체육간사로 재직하면서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 참여했다. 흥사단에 가입한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치 행태-독립운동 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반(反) 이승만' 노선을 견지하게 되었다.
1929년 귀국해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최능진은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어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때, 후에 그의 공적(公敵)이 되는 조병옥 또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그의 감옥 동기가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최능진은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 가입했다. 그가 건준에 가입은 했지만 그의 성향은 우익 민족주의였다. 9월 유명 공산주의자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 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그는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월남했다. 월남 도중 해주에서 남한의 신문을 구해 읽다 남한 경찰 내에 친일파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최능진은 친일경찰 일소의 꿈을 안고 경찰에 투신했다. 능숙한 영어 솜씨를 활용해 미군정과 접촉한 그는 경찰관강습소의 한국인 소장으로 취임했다. 반일·반공 경력과 미국 유학 경험을 아울러 갖춘 최능진은 미군이 보기에 이상적인 '새 경찰인상'으로 여겨졌다.
최능진은 미군 당무자를 통해 10월 5일 신설된 경기도 경찰부 특무대에 평양에서 데리고 온 자신의 부하들을 채용했다. 특무대는 미군정 스털링 경찰부장의 특명사건을 전담 수사하면서 악질 일본인 경찰 10여 명에 대한 보복작전도 은밀히 추진했다. 대표적인 악질 고등경찰관 사이가에 대한 암살도 특무대원 김혁의 작전이었다.
10월 21일 미군정이 경무부를 창설하자 최능진은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설된 경무부의 부장은 그의 옛동지인 조병옥이었다. 반공주의자 조병옥은 효율적인 좌파 척결의 명분 아래 일제시대의 경찰을 다시 채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좌익이 주도하는 건준 산하에 치안대, 학도대, 청년대 등이 조직되고 8월 말까지 162개의 치안 단체가 설립되어 지역에서 실질적인 치안권을 행사했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 9월 9일에는 학병동맹이 종로서 접수에 성공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조선학도대 연희전문중대는 성북경찰서를 습격해 교전을 벌여 사상자를 냈다. 이런 사태를 지켜 보며 경무부장에 취임한 조병옥은 한국 경찰의 첫 번째 임무를 좌익 척결로 내세우고 일제하 경찰 경력자와 경찰을 도운 우익 청년들을 채용해 경찰의 덩치를 키워갔다.
아버지와 형이 3.1만세운동을 지휘하다 3년간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 집안 출신인 조병옥은 자신도 항일운동을 하다 두 번이나 옥고를 겪고 창씨개명도 하지 않은 '무결점 항일운동가'였지만 좌익과는 악연이 깊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했지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순탁, 백남운 등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돌입하자 좌익에 의해 배후 인물로 지목돼 불명예 퇴직하였다. 좌우합작 대중조직인 '신간회' 간부를 맡으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신간회가 해소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조병옥은 "공산주의자들의 비열함"을 절감했다.
조병옥이 이처럼 "군정 경찰을 친일 경찰"로 만들어 나가자 최능진은 이에 강력 반발하였다.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년에 발생한 대구10.1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실제로 소련군정의 최고책임자인 스티코프의 일기에 의하면 10.1대구 폭동 기간 중 소련군 자금이 지원되고 행동지침이 지시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최능진은 "이 사건이 조선공산당에 의해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이러한 사태를 제공한 1차적 원인과 원흉은 우리 경찰에게도 1차적 책임이 있다"며 조병옥을 겨냥해서 비난하였고, 군정경찰로 재고용된 친일파 출신들을 질타했다. 이에 따라 결국 하지 중장은 "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거나 파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파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최능진을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 최능진은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결국 사직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을 떠난 최능진은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선언하고 반민특위법에 반대하자 반(反)이승만 운동을 결심했다. 그는 김구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론'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나 단독선거는 강행됐고, 1948년 5.10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최능진은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측은 온갖 방법으로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방해했고, 결국 그의 후보 등록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취소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최능진은 단단히 이승만 눈 밖에 나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다. 한 달 보름 후 최능진은 체포되었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이었는데, 최능진이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최능진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10월 19일에는 공교롭게도 여순사건이 터졌고,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북한군에 의해 출옥되었고 서울이 수복된 후 10월 자수하였다.
최능진은 1950년 7월 경 북한군 점령 하에 있던 서울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즉각 정전, 평화호소대회’를 추진했으나 김일성의 반대로 개최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는데, 군법회의는 최능진의 이 활동을 국방경비법위반에 해당한다며 기소하였다. 그를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최능진은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2015년 8월 재판부는 최능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을 재심하고 이적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