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3일, 연안을 출발했던 조선의용군 김태준이 서울에 도착했다.
1905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김태준은 식민지시대 가장 뛰어난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였다. 그는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재학 시절 「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를 68회에 걸쳐 연재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조선 최고의 소장문학자였으며 '조선소설사'는 근대적 소설 개념에 입각하여 쓰여진 최초의 한국소설사였다.(아직도 판매되고 있다)
1931년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는 조윤제 · 이희승 · 김재철등과 더불어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하여 한국 문학사 연구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1934년에는 역대 고전가요를 취사하여 편집한 <조선가요집성>을 출간했다. 이 책은 신라향가편, 백제고가편, 고려가사편, 이조가사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에도 우리나라 시가 연구의 기초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1939년 김태준은 모교인 경성제대 조선어문학 강좌의 책임강사로 임명되었다.1940년 여름,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연구가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의 존재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훈민정음의 행방을 애타게 기다려온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천 원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 원을 지불했다. 당시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로 인하여 해례본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 책의 존재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 한글 창제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학자로서 김태준의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회주의자인 이현상의 소개로 1940년 비밀사회주의 단체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검거되어 1941년부터 4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 사이 그의 노모와 아내, 아이가 모두 사망했다.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태준은 무장 항일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재혼한 아내 박진홍과 함께 1944년 11월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고 있던 연안(옌안)으로 떠났다. 기차로 가는 것이 위험해 걸어서 출발한 그들은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해서 조선의용군에 합세했다.
박진홍은 조선 항일운동가 중 가장 긴 수감생활을 한 여성사회주의자였다. 박진홍의 남편은 현재 '당대 최고의 혁명가', '3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 신화적 존재'로 인정받는 이재유였다.(이재유의 평전: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 50년 동안 제가 읽은 전기와 평전 가운데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인물의 이야기) 그는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추수했던 박헌영과 달리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독립운동에 활용한 혁명가였다.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서 지식인 주도의 사상과 이념운동이 아닌,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박진홍 역시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연행되어 31세 되던 1944년 출옥하여 도합 10년에 걸친 감옥생활을 마감하였지만 남편 이재유는 일제의 고문으로 박진홍 출소 19일 후 옥중 사망하였다. 박진홍은 출소 직후 김태준을 만나 재혼하였다.
1941년 1월 10일 중국공산당 팔로군 전방총사령부 소재지인 산시성 태행산에서 중국공산당 지원 아래 중국의 항일전에 참가하고 있던 조선대표들이 모여 김두봉, 최창익이 지도하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총사령관 김무정이 지도하는 조선의용군을 당군(黨軍)으로 두었고 이들은 1943년 말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으로 이동하여 일제와 무장투쟁을 지속하였다.
1940년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명목상 독립운동 단체를 대표하는 단체였다면 규모의 측면에서 가장 큰 단체는 조선독립동맹이었다. 임정의 광복군 규모가 500여 명이었던데 반해 조선독립동맹 휘하의 조선의용군은 8,000여 명이었다. 일본의 위협이 적은 곳에서 활동한 임정과 달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에서 지하활동과 유격활동을 하며 투쟁하였다.
김태준과 박진홍은 연안에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독립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들은 1945년 9월 연안을 출발해서 12월 3일 서울에 도착한 것이었다.
연안에서 활동했기에 '연안파'로 불리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수뇌부는 모두 북한으로 귀환했다.(그들은 이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김태준에 의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이 남한에 널리 알려지고, 비록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한 기간이 짧았지만 조선독립동맹의 이름으로 귀국한 김태준은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의 반격으로 힘을 잃어가던 박헌영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귀국한 김태준은 12월 좌익 계열 조교와 직원들의 힘으로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현 서울대학) 초대 총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총장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1946년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되었으나 1949년 이른바 빨치산 9월 총공세를 앞두고 지리산 문화공작대로 파견되었다. 그는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 빨치산에 합류하여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의 정식 명칭)의 사상교육을 맡았다. 그러나 입산 직후인 1949년 7월 전북 남원에서 국군토벌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9월 사형이 선고되었고 11월 서울 수색 형장에서 총살되었다.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실린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에서 김태준은 이렇게 썼다.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인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문학연구, 역사연구, 언어연구 방면의 서적을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고' 지리산을 헤맸던 천재학자는 사형을 선고받기 전 "상아탑에서 고전만 연구하고 싶다" 고 최후진술하였다.
첫댓글 오늘이 12월 3일이니 이 시리즈도 28번 남았네요. 시간이 참 빨리 흐릅니다.
덕분에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해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게요
참 빨리도 시간이갑니다--
얼마남지 않았지만
항상 건강유의하시고
12월말일까지 아쉽습니다
감사드립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