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서울 냉천동 감리교 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가 개설되었다. 군사영어학교는 통역관과 장차 군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주로 영어를 가르쳤으므로 군사영어학교라고 하였다.
미군정은 한국군 창설을 앞두고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장교 생활을 경험한 한국인 군경력자를 대상으로 영어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을 장차 한국군의 간부로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영어에 능통했던 만주군 출신의 원용덕에게 부탁하였다. 원용덕은 군사영어학교 1기생 60 명을 선발하기로 하고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 일본군 출신 20 명으로 각각 안배하였다. 원용덕은 11월 20일 일본육사를 졸업한, 일본군 출신 중 가장 고급장교였던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아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물론이고 만주군과 팔로군 출신의 중국군까지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계획에 대하여 광복군 출신자들은 이를 대단한 모욕으로 생각했다. 자신들만이 국군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는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좌익계도 제안에 거부한다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출신 원용덕과 일본육사 출신 이응준 두 사람이 면접을 보아 군사영어학교생도를 뽑아야 했다. 그러므로 군사영어학교 1기 60 명의 대다수는 일본군과 만주군으로 채워졌다.
초대교장은 육군 중령 그린이었으나 개교 후 5개월 사이 4번이나 교장이 바뀌는 바람에 실질적인 학교 운영자는 부교장 원용덕이었다. 원용덕은 군사영어학교의 부교장이었음에도 특이하게 스스로를 생도로 등록해 군번을 배정받기도 했다.
1946년 1월 15일 우리나라 국군의 모체가 되는 '국방경비대'가 태릉에서 창설되면서 2월 27일 군사영어학교도 국방경비대 제1연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경비대가 몸집을 불리면서 군사영어학교로는 당장 필요한 장교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었다. 결국 군사영어학교는 설립 5개월 만인 1946년 4월 30일 폐교되었고, 폐교 다음 날인 1946년 5월 1일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이때 군사영어학교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경비사관학교의 1기생으로 전입하여 육군의 간부 양성을 책임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이다.
5 개월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군사영어학교는 110 명의 교육수료자를 배출했다. 이 가운데 87 명은 일본군 출신이었고(일본육사 13명, 학병 68명, 지원병 6명) 21명은 만주군 출신, 광복군 출신은 단 두 명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학생이 이미 장교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개개인의 경력과 영어 실력에 따라 짧게는 며칠 간의 교육으로 임관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건군기에 졸업한 이들은 고위장교가 없는 한국군의 당시 특성상 아주 빠르게 진급했기 때문에 한국 전쟁 당시에 대령으로 사단장을 하기도 했고 30대에 중장을 달기도 했다. 졸업생 110명 중에 68명이 장군으로 진급하였고 대장까지 오른 이가 8명이었고 참모총장도 13명을 배출하였다.
군사영어학교가 배출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13명은 이형근, 채병덕, 정일권, 최경록, 민기식, 김종오, 김계원, 최영희, 백선엽, 김용배, 장도영, 송요찬, 이응준이었으며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7명(이형근, 정일권, 유재흥, 백선엽, 최영희, 김종오, 장창국)도 배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5.16 군사 쿠데타로 군문을 떠나게 되지만 이후 박정희 밑에서 잘보이면 국방부장관, 국회의원, 국무총리, 공기업 사장으로 한자리씩 받았고, 밉보여도 외국대사 한 자리씩은 받아 외국으로 쫓겨났다.
군사영어학교가 폐교되고 국방경비사관학교가 정식으로 설치되었지만 생도의 대다수는 여전히 만주군과 일본군의 이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에 이응준은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동열에게 "임시정부의 법통을 우리나라 군대로 하여금 계승하게 해달라"고 말하며 광복군의 사관학교 참가를 설득하였다. 1946년 9월 유동열이 '미군정 과도정부 남조선 국방부장관'에 위촉되면서 광복군들도 국방경비사관학교 입교를 시작하였다.
1946년 5월 1일 개교한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는 군사영어학교에서 임관하지 못한 학생 60명과 국방경비대 각 연대의 사병 중에서 2~3명씩 선발된 28명 등 모두 88명을 제1기생으로 하여 개교하였으며 6기까지 있었다. 1,2기는 군 경력자, 3,4,6기는 조선경비대 하사관중 추천자, 5기는 민간인이었다. 총 1,511명이 입교해 1,255명이 임관하여 6.25전쟁 중 366명이 전사하고 257명이 장성을 달았다. 이들은 군사영어학교생과는 경력이 비슷할 지라도 임관일의 차이 때문에 승진 속도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됨에 따라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도 같은날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경비사관학교는 9월 5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명명되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요약 한 줄 : 군사영어학교(넘사벽) ㅡ>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 ㅡ>조선경비사관학교 ㅡ>육군사관학교
첫댓글 이런 초창기 혼란은 몇년후 50 m 전력 달리기 대회같은 진급 아수라장을 야기합니다.스타트가 약간이라도 빠른 출신들은 한국전을 겪으며 전력질주 진급.
전후에 이른바 육사 8기생 JP 기수 중령들과 장군들과의 나이차가 별로 안났을겁니다. 5.16 의 숨겨진 뒷배경이기도 하죠.
오늘도 제 댓글은 줄을 잘서야 한다.! 에 수렴합니다.
저는 한번도 줄을 잘 선 적이 없어서 뭐라 ...
심지어 텐인텐에서조차 줄을 엉망으로 선 지라ㅋㅋ
냉천동이면 천연동 이군요. 독립문 옆에 재래시장 골목에 먹을것 많습니다.
요 댓글이 눈에 확 띄네요. 독립문 옆 재래시장이라면 안산 산책하고 내려와서 들른 그 시장 같은데요..
@슈 렉 네. 그 시장 맞습니다. 안산에서 구름다리 건너 인왕산으로 하산하면 통인 시장도 나옵니다.
그에 반해 한국전 당시 미군 장군들은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직업이 전쟁이었던 사람들이었으니 한국군을 신뢰할수 없었겠죠.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자료 찾아서 정리한 건데 익숙하지 않으니 쉽지 않아서 평소 글의 양보다 적어요. 모든 글의 양이 비슷하게 정해져 있는데 이건 양을 채울 수가 없을 정도로 지식이 전무한 분야;;
요즘 화제의 영화 주인공 전두광 기수는 ( 저는 이 영화 볼 계획이 없지만 , 아들에겐 권했습니다)
정규 4년제 1기라는 이유로 한국전 참전을 면제받고 ( 그 앞의 기수는 거의 전사)
월남전은 중령,대령급으로 참전해서 목숨 걸일은 별로 없는 참전을 한 기수.
아, 그렇군요.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슈 렉 그 앞의 기수는 생도대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여 거의 전사합니다. 전두광 어휴~ 난 내돈 내고 열받기 싫어서 안 볼랍니다.다 지나간 이야기...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고 알것도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