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6일 임시정부의 제2차 국무회의가 죽첨장에서 열렸다.
3일에 열린 1차회의가 임정요인 전원 귀국을 알리고 임정의 공식활동 시작을 표시한 형식이었다면, 2차회의는 정책과 사안에 대한 실질적 논의가 시작되는 첫 회의였다. 신문은 이날의 국무회의 개최에 대해서 대서특필했지만, 그러나 임정의 첫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2진으로 도착한 각료들의 1진 요인에 대한 불만으로 회의는 한 가지 안건도 상정하지 못하고 산회되고 말았다.
회의 기록을 위해 참석했던 장준하는 후일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라면서, "이 난국에 온 국민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 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기록했다.
장준하의 한탄처럼 오랫동안 임정을 괴롭혀 온 문제는 고질적인 내분이었다. 일제 시기 항일투쟁을 하던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분열상에 대한 어느 외국 기자의 견해는 과장된 것일지라도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너무나 까다로웠고 자기 아집에만 얽매여 있었다. 그들에겐 연합전선 구축이나 일관된 주장을 펼쳐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말은 심지어 국제사회주의운동 세력들 사이에서조차 '파벌주의'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있었다."
미군정도 임정의 파벌주의에 주목했다. 미군정의 보고서는 "임정의 문제점은 정책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분파와 개별 인물들 간의 파쟁에 있다"며, "이는 이들 망명한 애국자들이 지난 26년 간 먹고 살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으로 혁명적 지도자로 행세하기 위해 투쟁하던 데에 그 뿌리가 있다"고 진단했다. "이 기간 내내 이들에게는 어떤 서방 민주국가의 지원도 없었다. 수년간 그들은 미국, 멕시코의 한인 조직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기부금은 부정기적이었고...이런 조건(경제적 고통과 불확실함)에서 의심과 반목은 거의 불가피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임정 요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이 너무 열악했던 것이다. 이역만리에서 민중의 기반도 없이 협소한 공간에서 활동하였다는 바로 그 점이 대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간신히 확보한 자금을 다른 세력과 나눠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통합이나 합작에 쉽게 대응하기도 힘들었다. 확보한 자기 세력을 통합의 와중에서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좌파는 우파의 청년세력을 빼앗아 갈 수 있었다. 충칭은 독립운동 인사가 몇백 명밖에 살지 않았지만 우파와 좌파는 거주지역을 전혀 달리하고 있었다. 이 당과 저 당은 서로 상대편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학병 탈출자 등 한국인 청년이 나타나기만 하면 포섭공작을 벌였다.
포섭공작이라고 해봐야 극진한 환대 정도였겠지만, 몇십 명만 어떤 정당에 가입하기만 하면 그 정당이 최대 정당이 되어 임정 내부의 패권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경쟁은 매우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장준하의 '폭탄선언'(8월 3일 글)도 이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1942년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세력과 무정부주의 계열이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1944년 개헌을 통해 이들이 내각과 임시의정원에 진입하면서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했다. 1945년 해방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군정이 임시정부의 정부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 내에서도 임정의 법통에 대하여 우파와 좌파 간에 결렬한 대립이 있었다. 8월 15일부터 좌파는 국내외 단체와 민중의 기초 위에서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한 반면, 한독당(임정의 여당) 측은 임시정부를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임정 요인들 가운데 특히 '법통'을 내세우던 이들은 김구, 조완구, 엄항섭 등 한국독립당 계열이었다. 반면 김규식, 김원봉, 장건상 같은 이들은 대체로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는 현실에서 더구나 국내외 각 정파가 서로 자기 목소리를 외치는 현실 아래 충칭 임정이 전민족적 의사를 집약,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김구 측의 주장이 우세해 정부 자격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귀국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임정의 내분은 귀국시 1,2진으로 나누는 기준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불이 붙었다. 미군정은 임정 내의 우익이 먼저 귀국하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도록 일부러 작은 비행기를 보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누가 먼저 귀국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임정 내부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었고 내부적 논란은 불가피했다. 결국 상하이의 장완 비행장에 소형 수송선이 도착했을 때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 젊은이들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 젊은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싸움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국무위원들이 먼저 가는 게 상식적이었다. 그러나 한독당 측은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과 일부 국무위원,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이 먼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민혁당을 비롯한 다른 당파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민혁당의 김원봉이 양보하여 한독당 측의 주장대로 되었지만, 누가 먼저 귀국하느냐 하는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김원봉은 임정 내에서 제2인자였지만 당시 국내 대중들은 충칭 임정의 내부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환국 후 김구, 이승만, 김규식에 이어 제4인자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먼저 귀국한 김구는 일련의 활동을 통해 '임정=김구'라는 등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민혁당과 김원봉은 가려졌던 것이다.
12월 1일 2진 임정요인들은 날씨 관계로 김포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 근처 옥구비행장으로 귀국하였다. 그들이 군산에서 자동차로 북상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대규모 임시정부 개선대회가 열렸다. 2진 요인들의 귀국을 코앞에 두고 김구가 이승만과 함께 군중의 환호를 받았다는 사실에 2진 요인들은 큰 불쾌함을 느꼈다. 그러나 다행히 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김구 등 제1진 요인들이 2진 요인들의 도착 전 정치적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으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처신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김구와 한독당은 2진 요인보다 9일 먼저 입국함으로써 '임정=한독당=김구'의 등식을 국내 민중의 뇌리에 심는 데 완전히 성공했다. 김원봉은 1948년 월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