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난 입술을 꼭 깨물고 어느새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찬희에 전화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
이제… 마지막… 이 번호만 누르면…
그리고 10분 후이면… 너와 나… 모든 게 끝이 되겠지?
난 이 생각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핸드폰 폴더를 닫아 버렸다.
탁- 하고 닫힌 핸드폰. 눈물 때문에,
자꾸만 점차 점차 퍼져 가는 눈물 때문에
핸드폰도 잘 볼 수 없어
두 눈을 재빨리 훔쳐 비벼 내고 핸드폰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다시 열고 다시 꾹꾹꾹 번호를 누르기 시작하다가…
또 다시 마지막… 그 번호만 누르면 되는데…
내 손은 움직이질 않고
마지막 번호 주위만을 서성이고 있다.
"……."
그러다가… 그 서성임에 끝이 보였다.
"나야."
찬희가 받자마자 나인걸 알리고
반대편에선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찬희야, 우리 헤어지자."
내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면…
난 그 눈물을 닦고, 침을 꿀꺽 삼킨다.
자꾸 입 밖으로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단속에 들어간다.
나… 너랑 헤어지기 싫어. 너랑 헤어지겠단 이 말…
다 거짓말이야. 너랑 헤어지기 싫어….
"……어딘지 말해. 내가 갈게."
오늘따라 찬희의 목소리가
유난히 따뜻하고 달콤하다.
내 두 귀가 간질간질 거린다.
"나 너… 싫어…."
"어딘지 말하면 내가 당장 갈 테니까,
어딘지 말해."
"싫어졌어… 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있는 곳 말하라고."
앞으로 더 싫어 질 거야.
너 나 많이 싫어 질 거야.
그래도 난 살아가겠지.
그 고통을 참아 내며….
"너… 싫증나."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니야. 너 안 그래. 너… 아니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
이 모든 말… 다 거짓이야. 다 거짓말이야.
난 이렇게 또 찬희는 듣지 못할,
찬희에게는 전해 지지 못할 말을 속으로
되내이고 있다. 바보처럼.
"나 싫어하는 거, 싫증나는 거…
내가 다 이해할게. 그놈이랑 같이 있는 거…
내가 다 이해할게. 지금 너… 울고 있는 거…
내가 다 이해할게. 그러니까 지금 네가 있는 곳만 말해.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지금 네가 이러는거…
내가 다 이해할 테니까… 그만 하자.
이런 말들… 지금… 어디야?"
울먹이는 거 티 안 내려고 말 할 때 빼곤
입도 뻥끗 안 했는데… 숨도 크게 안 쉬었는데…
어떻게 내가 우는걸 알아?
너 그거 넘겨짚은 거지? 그런 거지? 하…
그래도 나… 그런 네가 너무 좋다.
자그마한 내 변화에도 신경 써 주는 네가 좋아.
"그러니까 헤어지자."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정신 없이 닦아 내고…
자꾸만 가파져 오는 숨을 다독이고…
자꾸만 상처가 나는 내 심장을 부여잡고…
그렇게 나 지금 버텨 내고….
"……너 자꾸 이러면 나 화낸다?
나 화나면 무서운 거 알잖아.
너 왜 그래. 왜 자꾸…."
"나 유천이랑 같이 있어.
유천이랑 나 다시 시작해."
"내가 다 이해한다고.
너 이러는거 다 내가 이해한다고. 그러니까…
말하라고. 네가 있는곳이 어딘지.
그새끼… 있는데 어딘지… 빨리 말해. 빨리."
"우리 다시… 사귀기로 했… 어…
나… 유천이가… 다시 좋…아졌어."
"그래. 나도 너 좋아해. 아주 미치도록 좋아해.
네가 나 미치도록 좋아하는만큼,
나도 너 미치도록 좋아해."
"넌…."
이제… 끝….
"유천이에… 대신일… 뿐이었어….
유천일 잊으려…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구."
하늘은 알겠지? 내 마음… 내 진심….
"유천이… 못 잊겠어. 그래서… 유천이한테 다시…
내가 사귀자고 했어. 그랬더니… 유천이도 나 좋데…
유천이도… 그 동안 나 많이 그리워했데."
그랬을까? 유천이…
그 동안… 나 많이 그리워했을까?
"그 동안 나 많이… 좋아해줘서 고마웠구,
그 동안 즐거웠구… 행복했어."
앞으로도 네 옆에서 행복하고 싶어.
"좋은 여자 만나."
다른 여자 만나지마… 내가 너만 그리워하듯…
너도 나만 그리워 해줘. 이런 거… 다 내 이기심일 뿐일까?
"안녕…."
안녕… 하지마….
끝내… 찬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난 눈에 보이는, 손에 집히는,
방에 들어가서 엉엉 울어 버렸다.
잘못한건 나인데… 왜… 자기가 다 이해한데?
왜… 자기가 다 이해한데… 내가 잘못한 건데…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데….
★ 개학. 1주일 후.
유천이와 나란히 학교에 등교를 한다.
그러면 우리 둘을 보고 수근거리는
학생들에 수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수업 끝나고 보자."
"응. 유천아."
유천이가 먼저 반으로 들어가고
나도 반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틀었을 때
내쪽으로 오는 하나와 두나… 그리고 사랑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순간 흐르다가 서로 그냥 지나쳤다.
반에 도착해서 사물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또 다시 소근거림이 들려 왔다.
"이사랑, 쟤, 진짜 뻔뻔하다."
"은유천이랑 깨졌다며?"
"쟤 옆에 항상 붙어다니는 김하나, 김두나도 꼴보기 싫어."
"맞어."
그 소근거림에 내용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이사랑이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차효주 불쌍해. 우리는 못두 모르고
이사랑이 퍼트린 소문에 차효주랑
말도 안하고 막 피해 다녔었잖아."
"이제는 그러지 말자!"
"그래!"
"차효주한테 말 걸어 볼까?"
"그래, 그러자!"
아무 것도 안 들은 척하며 사물함 정리를 하고 있는데…
내게 다가오는 4명에 반친구들.
난 이러한 것들이 적응이 잘 안되서
머뭇거리며 아이들을 대하고 있다.
"같은 반인데 그 동안 대화 한 번안해 본 것 같다!"
"앞으론 친하게 지내자."
"근데 비연이랑은 같이 안 왔니?"
"그러게. 안 보이네?"
나랑 함께 다니던 비연이가 보이지 않는다며
내 주위를 살피는 아이들이었다.
"응. 먼저 온 줄 알았는데 학교 와 보니까 없네.
곧 올거야. 그리고 말 걸어줘서 고마워."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들은
서로들 꺄륵꺄륵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한다.
"고맙긴.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니?"
"앞으로 우리가 너에 친구가 되어 줄게."
"이사랑이 또 괴롭히면 우리한테 말해!"
"우리가 같이 싸워 줄게!"
진심이 묻어 나왔다.
정말 사랑이가 날 또 괴롭히면 두 팔을 걷어 붇히고
내편을 들어 줄 것만 같다.
비연이… 찬희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후부터…
비연이가 날 피한다.
내가 비연이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고
아마 진하나 다히에게서 전해들은 것 같았다.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먼저 알아 버렸다.
비연이 너만큼은… 날 믿어 줄 것 같았고,
내 곁에 서 줄 것만 같았는데…
다른 사람이 모두 내게 등을 돌려도
너만 내 옆에 있어 준다면 난 언제나 든든했는데…
너랑 나랑 이렇게 되니까 너무 힘들어. 숨이 막혀.
# 77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하도 답답해서
옥상에 올라와 혼자 하늘을 보고 있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완전히 혼자가 됐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그전엔 비연이가 있어 외롭지 않았는데… 외로워.
"……."
유천이가 망가뜨린 내 핸드폰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고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핸드폰은 유천이가
새로 사준 핸드폰이었다.
그것도 유천이랑 같은 핸드폰…
때마침 유천이에게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았다.
"끝나고 병원 같이 가자."
"병원? 응. 알았어."
웬일로 먼저 다 병원에 가겠다고 이러는거지?
맨날 병원 가기 싫어서 억지로 달래서 병원에 끌고 갔었는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응? 응. 졸다가 받은거라서 목소리가 이렇네?"
순간 긴장이 풀렸던 몸에 긴장이 확 됐다.
내 목소리가 듣기에 이상했나 보다.
"조례 시간에 졸았냐?"
"응."
아무런 감정도 투입하지 않고 그냥 '응'이라 말하고.
"수업 시작하겠다! 끊을게. 좀 있다 봐."
수업은 무슨… 그냥 빨리 끊고 싶었다.
"여기가 교실이야?"
"…!"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니 비연이가 서있었다.
싸늘한 모습의 비연이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못 올 곳 왔니?"
내 옆에 앉으며 말하는 비연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예전에 우리 같아.
"왜 이렇게 됐니."
"…."
"왜 이렇게 틀어졌어. 너 행복하다고 했잖아.
얼마전까지만해도 행복하다고 그랬잖아.
근데 지금은 왜 이런 모습인데?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건데?
정말 애들 말대로… 너 찬희… 갖…고 논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
이 말… 어떻게 주워담으려고 그래. 차효주.
차효주… 정신차려.
"응, 나 너 믿을게. 나 너 믿을래.
너 그런애 아니잖아."
그런애.
찬희 갖고 놀다 버린애.
"…저번에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힘이 들었어. 헤어진다는 게 아팠어.
내가 찬 건데… 내가… 내가 찬 건데…
왜 내가 이렇게 아프니? 나 왜 아픈 거야?"
우는 나를 안아 주는 비연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바보야!"
"응… 나 정말 바보 같지… 흐흑흡…."
"응. 넌 욕먹어도 싸.
모두 다 너 욕하고 있어.
나쁘데, 나쁜년이래. 너."
"…그 중에서 네가 나 외면할 때가 가장 아팠어, 나, 으허헝!"
그렇게 비연이에 품에 안겨서 크게 울어 버렸다.
"나도 너 미워, 너 진짜 밉다. 진하까지 힘들게 하면서
그 사랑한 건데 왜 까진 건지…
네들 왜 깨진 건지 나 이해 안가.
너 미워. 찬희 찬… 너 밉다구."
나도 내가 미워. 찬희…랑 헤어진… 헤어져 버린 내가 밉다구.
근데 어떻게… 현실이 이렇게 되어 버린걸.
"왜 찬희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데, 응?"
비연이 품에서 빠져 나와 눈물을 닦으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만 알아. 그거….
그리고 종이 쳤다. 수업을 알리는 종.
"비연아. 수업 시작하겠다. 수업 들어가자."
염치도 없게… 불쑥 내민 내 손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연이.
내 소중한 친구. 이 세상에 이런 친구는 둘도 없을… 내 친구.
비연이. 구비연….
너한테까지 모든 걸 다 털어 내지 못하는 날 이해해줄래?
이런 날… 너는 이해해줘. 너만은 이해해줘. 그래줘 비연아.
"왜 헤어진거냐니까?
하지만 비연이 마저도 날 이해하기엔… 너무 벅찬가보다.
"나한테도 말 못하는거야?"
"…미안해. 비연아."
"너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비연아, 비연아!"
그 말을 내게 하고 옥상을 뛰어 내려가는 비연이었다.
그 후 수업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청소시간에도…
우리 사이엔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
교문 앞에 서있는 유천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난 조금은 오버스러운 표정과 행동을 취해가며
유천이에게 달려갔다.
그러면 유천이는 제일 먼저 내 손을 잡는다.
"병원 갔다 가 어디 갈까?
오늘따라 설레이는 말투,
설레이는 행동을 내게 보이는 유천이다.
"네가 가고 싶은곳."
유천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음- 밥 먹을까?"
"응."
"뭐 먹을래?"
"아무 거나."
유천이에겐 미안하지만…
이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
예전에 같은 활력은 없다.
"파스타 먹을까. 파스타 어때?"
"응. 좋아."
"그럼, 오늘 저녁은 파스타다!"
"응."
빵이 있다. 한쪽은 행복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다,
한쪽은 무료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다.
그 중… 난 무료함이란 잼이 잔뜩 묻어 있는 빵이겠지.
텁텁한 빵….
★
식사를 하기 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일어섰다.
"어디가?"
"응.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디 간다고?"
"화. 장. 실. 좀. 갔. 다. 올. 게."
"어?"
"……."
잘 알아듣지 못하는 유천에게 핸드폰 문자로 내가 한말을 적었다.
그리고 보여 주었다.
이 문자를 본 유천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갔다 와."
"응. 먼저 먹고 있어."
"어?"
"……."
평소에는 괜찮다가 가끔 이렇게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 가면 서로 대화를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럴 때… 유천이가 못 알아들을 때… 가슴이 아프다.
먼저 먹고 있으라고 문자에 적어 보여 주었다.
"아, 응."
"응."
"올 때까지 기다릴게. 같이 먹자."
유천이에 그 말에…
순간 울컥해서 빨리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화장실 빈칸에 들어가 운다.
이제는 음에 높낮이가 굉장히 차이가 나고,
가까이에서 얘기할땐 아무 문제 없이 잘 알아듣다가,
멀리서 말하면 못 알아듣고…
그런 유천이에 모습이 안타깝고 슬프다.
그리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동정이란걸… 나는 알아 버렸다. 나는… 느껴 버렸다.
★
저녁을 먹고 유천이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집에 들어와서 씻으려고 하는데 집으로 전화가 왔다. 비연이었다.
"전화 했는데 계속 안 받더라…
나 지금 너네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인데 잠깐 나와라.
대화 좀 하자."
"너 통금시간…."
아슬아슬 하잖아.
"오늘은 미리 엄마한테 말씀 드렸어.
늦을지도 모르겠다구. 빨리 나와.
기다리고 있을게."
"응."
전화를 끊고 바로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네에 앉아 그네를 타고 있는
비연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비연아."
비연이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전까지만해도 축 쳐져 있던 내 기분이 좋아졌다.
"왔어? 앉아."
"응."
그네에 앉은 후에… 한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난 흙장난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 흙장난 진짜 재밌었는데.
"있지."
"저기."
둘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조용해서. 잠이 쏟아질 것 같아서….
"네가 먼저 말해."
"응? 응."
내가 먼저 말을 하게 되었다.
"찬희… 요즘 어떻게 지내? 밥 잘 챙겨 먹지?
학교도 잘 다니지? 애들이랑도 잘 놀고 하지?
찬희… 잘 지내지?"
몇 일을… 몇 번이고… 물어 보고 싶었던… 그 물음들…
비연이에게… 물었다.
비연이라면 할 수 있었다.
비연이에겐… 물어 볼 수 있었다.
비연이 너는… 찬희랑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잖아.
그게 1분이라도…
근데 난 그게 허락이 안돼.
내겐… 허락 될 수 없는 일이야.
요즘… 찬희…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잘 웃고, 잘 있지?
나처럼… 아파하진 않지?
혹시 다른 여자애가 추근덕 거리지는 않나?
그럼… 싫은데.
찬희한테 다른 여자친구가 생기는 거 나 싫은데…
하… 나 참 이기적이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런 바램을 품는지…
내가 찬희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찬희한테 어떻게 했는데…
찬희… 많이 아프게 했는데…
이럼 안되는건데… 찬희… 보고 싶어…
찬희 보고 싶어 죽겠어. 비연아….
# 78
"아니. 별로. 저번에 진하 만날 때 봤었는데
많이 힘들어 하는 것 같았어.
요즘 술도 많이 먹고 다니고,
싸움도 하고 다니고… 애가 망가졌더라."
애써 침착하려 애쓰지만 손이 덜덜 떨린다.
"나 되게 못됐다. 그지?"
또 다시 시작된 새빨간 거짓말….
"나는 막 밥도 잘 먹고, 학교 생활도 잘하고,
밤에 잘도 잘자. 나는… 평소랑 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나 되게 못됐다."
찬희는 그렇게 힘들어 하는데…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 말할 수 밖에 없어.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어.
"거짓말 하지마. 효주야.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러지마.
너랑 나 그런 사이 아니잖아."
비연이에 그 말에 미끄럼틀에 시선을 두었다.
괜히 눈물이 날것 같아서…
그래서 애꿏은 미끄럼틀만 계속 보고 있다.
"울어 그냥. 괜히 딴데 보고 있지 말구."
내 마음을, 내 상태를 읽은 비연이는
오늘 옥상에서처럼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준다.
그냥 울라구. 괜히 딴짓하지 말고 울라구.
"나… 힘들어."
"알아. 너 힘든 거."
"밥도 억지로 먹고, 학교에서도…
그 수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도 모르겠고,
밤에 잠도 잘 못자. 찬희가 자꾸 생각나서…
찬희 힘들어하는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찬희가 생각날 때마다 찬희 보고 싶어서
찬희에게로 갈까 봐 나 불안했어.
어쩌면 좋아… 나 이제 어쩌면 좋아."
네 말대로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간단한 거 아니야? 찬희한테로."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
"그건 안돼. 그럼 안돼."
이젠 안돼. 너무- 늦었어. 늦어 버렸어.
"왜? 찬희가 너 안받아 줄까 봐?
찬희가 이제 너 싫다고 할까 봐?"
"응. 내가 얼마나 모질게 끊었는데.
내가 찬희 얼마나 아프게 했는데."
"괜찮아, 너희 둘… 지금도 서로 좋아하잖아.
지금 조금 떨어져 있어도 서로 좋아하고 있잖아.
다시 돌아가. 찬희한테로."
비연아. 난 안돼. 난… 안돼.
내가 어떤 얼굴로 찬희를 다시 보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찬희를 대하니…
앞으로 나 어떻게 해야 하니.
"너 슬퍼 보여. 불행해 보여.
하나도 안 행복해 보여."
"………."
"가, 찬희한테."
"비연아…."
"왜, 혼자 못 가겠어? 내가 같이 가 줄까?
그래, 내가 같이 가 줄게.
일어나. 일어나, 가자! 찬희한테."
"….아니. 안 갈래."
못 가. 돌아가지 못해.
다시는 찬희 곁으로 돌아가지 못해.
"왜 못 가. 왜 안 된다고 해. 너 정말 이럴 거야?"
비연이는 나를 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왜 못 간다고 하냐고.
왜 안 된다고 하냐고. 너… 정말… 이럴거냐고.
응. 나 안가. 안 갈 거야.
나 계속 이럴 거야. 계속… 유천이 곁에 있어야 해.
"나… 찬희한테 못 가… 나… 못 가. 비연아."
울면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찬희 이름만 입에 담아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왔으니까.
류찬희란 이름이
어느새 나에게 가장 예민한 이름으로 다가와 있었으니까.
"왜, 왜 못 가겠다는 건데?"
"비연아, 나 먼저 들어갈게. 춥고 많이 늦었어.
감기 걸릴 것 같아. 너도 빨리 들어가.
감기 걸릴지도 모르잖아."
비연이가 다 알아들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보이자 나를 돌려 세워 놓고
두 눈을 마주하고 보게 하는 비연이다.
그러면 난 다시 미끄럼틀에 시선을 둔다.
"너 똑바로 말해봐. 사실대로 말해봐.
너… 은유천 때문에 그러는 거지?
너 은유천이 너한테 협박한 거지?
그런 거지? 찬희랑 헤어지자고 한 거지? 그런 거지?"
그 말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고개를 아래위로 천천히 흔드니까 눈물이 한꺼번에 툭툭 떨어진다.
응… 유천이 때문에 나 못 가. 유천이 때문에… 나 찬희한테 못 가.
"응… 유천이 때문에 나 못 가. 은유천… 유천이 많이 아파.
그래서 나 못 가. 나 찬희한테 가고 싶은데 못 가…
힘들어, 비연아. 아파, 비연아.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찬희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주저앉아 버리자 밤 공기로 인해
차가워진 모래가 내 몸에 닿았다.
추웠다. 오늘… 춥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나쁜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지금 은유천 어딨어! 은유천 어딨냐구!"
"비연아…."
"근데 은유천이 아프다니? 어디가?
어디가 얼마나 아프기에 네가 이렇게 옴짝달싹 못하는 건데?
그 놈 내일 곧 죽는데? 뭐, 그 정도래? 그 정도로 아픈 거냐구!"
흥분한 비연이는 나를 흔들며 물었다.
그럴 정도로 아픈거냐구. 내일 곧 죽을 정도로 아픈거냐구.
나는 그렇게 묻는 비연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유천이 많이 아파. 지금 많이 아파서… 힘들어 하고 있어.
내겐 티 안내지만 많이 힘들어 하고 있어.
유천이 집에… 쓰레기통에…
유천이가 아끼던 악보집이… 하나 가득 차 있어.
그렇게 유천이는 힘들어 하고 있어.
피아노가 잘 안쳐진데.
지금 자기가 뭘 치고 있는 건지 모르겠데.
뭘 연주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데. 답답해 죽겠데.
"유천이 귀가 안 들린데."
"뭐?"
"그래서 유천이 피아노 못 쳐. 잘 못 들어서…
가까이에서 말하면 곧잘 알아듣는데 조금만 멀리서
말하면 잘 못 들어. 유천이 못 들어."
"은유천이 귀에 이상있는거랑 너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
"네가 은유천 귀 망가뜨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응."
내가… 유천이를 그렇게 만들었어.
"뭐?"
"응. 나 때문에 유천이 귀 그렇게 된 거고,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 거야. 내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보이는 비연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다.
처음에 내가 할아버지께 이 사실을 모두 전해 들었을 때처럼…
그 때에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비연이다.
너도 많이 황당하지? 나도 그 때 많이 황당했어. 믿을 수가 없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왜 네 잘못이라는 거야? 그게 말이돼?"
"그 때 기억해? 찬희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이사랑이 복도에서 나 곤란하게 했던 날…
은유천한테 나 뺨 맞은 날."
그러고 보니 그 때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일기라도 좀 써둘걸…
물론 그러한 것들을 기록하고 싶진 않지만…
이제는 이러한 고통이 지속되다 보니까
일기까지 써놓자고 농담까지 하는 내 모습을 보니 기가막혔다.
"응. 그 날 기억해."
비연이 너도 기억하는구나.
"그 때 생긴 상처래. 그 상처."
"네가 걔를 때렸어?"
난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그런 건 아니지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나만 아니었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야.
결국은 내 탓인 거야. 모든 게 내 탓…."
"그게 왜 네탓 이라는 거야? 넌 아무런 잘못이 없어."
애써 나를 위로하려는 비연이었다. 내겐 잘못이 없다며…
내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내가 유천이 귀에 상처를 낸 것도 아닌데
왜 유천이 곁에 있는거냐며…
그렇게 애써 나를 위로하는 비연이다.
"비연아, 근데 나 변한 것 같아."
"뭐가?"
"나… 유천이 좋아하지 않아.
유천이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어."
나에 가장 큰 변화… 난 유천이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마음을… 내게서 찾아 볼 수가 없어. 이젠… 이제는…
"그건 당연한거구. 지금 넌 찬희를 좋아하고 있잖아."
맞아. 근데 나 착각하고 있었어.
나… 유천이를 좋아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었어.
저번에 찬희한테 했던 말…
조금은 사실이었어.
유천이를 잊으려고 찬희를 만났던 거… 그건 사실이었어.
근데… 그게 아니었어. 난… 유천이를 잊으려고
찬희를 만났던 게 아니였어. 찬희 자체를 좋아했던 거였어.
"근데 유천이 보면 가슴이 아프고 유천이 곁을 떠나지 못할 것 같고,
자꾸 신경 쓰이고, 안쓰럽고 그래. 유천이만 보면 가슴이 아파."
"……."
"예전에는 유천이가 내 남자친구란 사실이 멋지고
뿌듯하고 자랑스러웠어.
근데 지금은 그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워."
"……."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뭘까 했는데…
그건 바로… 동정이었던 거야. 동정."
동정…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어 따뜻한 마음을 보내고,
그 아픔을 이해해 주는 것.
지금 내가 유천이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 동정.
"그 애가 불쌍했던 거였어. 예전에 느꼈던 사랑이라는 것과는
차원이 틀린 거였어. 비연아, 나 어떻게 해야 해?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그래서 미쳐 버릴 것 같아. 비연아."
"괜찮아… 괜찮아… 효주야…."
# 79
아침에 눈을 뜨니 조금은 속이 시원했다.
어제 비연이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은 내 기분은… 상쾌 했달까?
무언가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 진 것 같은 기분으로 지냈는데,
이제는 그 짐을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렇게 내 기분은 좋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에 오늘 하루가 설레였다.
학교에 등교를 하니 비연이가 먼저 와 있었다.
비연이가 학교에 등교한 나를 발견하고 나를 보며 웃었다.
"왔어?"
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갑게 맞이하는 비연이었다.
"응."
"아침 먹었어?"
"아니, 아직. 너는?"
"나도 오늘은 늦잠을 자서… 우리 매점 갈까?"
"그래!"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착각에 휩싸이는 나였다.
"차효주, 잠깐 나 좀 볼래?"
비연이와 매점으로 가려고 하는데
문 앞에 서서 우릴 보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비연아, 조금만 기다려. 빨리 갔다 올게."
"조심해, 효주야. 이사랑이 뭔 짓 하려고
하면 나한테 전화해. 알겠지?"
난 비연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랑이에 뒤를 따랐다.
사랑이… 머리 많이 자랐구나.
"너 이래도 되는 거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옥상에 도달했을때쯤
사랑이가 내게 말했다.
"무슨 말이야?"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줘.
"내가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는데 이래도 되는거냐구. 차효주."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은유천 건들지 말라고 했지?
근데 왜 자꾸 건들여!
왜 다시 은유천 옆에 네가 있는 거냐구!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 줄… 네가 아냐구!"
나는 사랑이를 향해 한 번 웃어 주었다.
그러면 사랑이는 씩씩 거리다가 머리를 헝큰다.
"그런 얘기라면 더 이상 너랑 할 얘기는 없는 것 같아.
내려갈게, 이사랑."
너한테 이런 저런 얘기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너한테 말해서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아.
"거기서. 어딜 가겠다는거야?
너랑 나 대화 아직 안 끝났어. 거기서."
"할 말이 더 남았니?"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사랑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랑이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술까지 질끈 물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피가 베어 나올 것 같았다.
"……!"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그러니까 네가…."
내게 무릎을 꿇으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나한테… 무릎을 꿇을만큼…
유천이는 사랑이에게 커다란 존재였는가보다.
"일어나.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너의 입에서 유천이를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기 전엔…
안 일어나. 제발… 유천이를 포기해줘. 유천이를 나한테 줘."
사랑이에 이 말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사랑이 마음이 나랑 비슷하겠지?
나도 유천이 앞에 무릎 꿇고 말하고 싶어.
그런 행동이 내게 허락된다면 나 그러고 싶어.
찬희에게 보내 달라고… 너에 곁에서 풀어 달라고…
그러고 싶어. 근데 내가 그러면…
유천이 죽어 버릴 것 같단 말이야. 유천이… 저렇게 다시 살려고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데…
나 그럴 수는 없어. 나 그렇게까지…는 못할 것 같아.
"그만해. 이사랑.
유천이랑 나 헤어지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제발…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이번엔 날 붙들고 애원하듯 말하는 이사랑이었다.
너 정말 왜 이래… 이사랑…. 너 정말….
"사랑아, 나는 네가 불쌍해."
"………."
"너는 정말 불쌍한 애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는 거야?
네가 나에 대해 알기나 해?"
"지금은 이래도 너랑 나랑… 우린… 친구였어."
나, 비연이, 너… 우리 이렇게 친구였어. 우린 친구였잖아.
"친구? 웃기지마. 누구랑 누가 친구였단 거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그것까진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금 또 씩씩대며 내 앞에 화난 표정으로 선다.
"많이 외로웠구나. 이사랑."
사랑이가 흠칫했다.
"부모님이 모두 바빴고 너는 혼자여서 늘 외로웠을 거야.
관심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넌 그 방법을 몰라서
그래서 남들과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고 부자연스러웠던 거야."
"그만해!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러는거야!"
"사랑아. 그건 집착이야. 사랑이 아니야. 사랑아."
"너 혼자만 아는 척 하지마. 그런 네 모습 꼴도 보기 싫단 말이야!"
"사랑아… 미안해."
"너 정말 왜 이래?"
사랑이에 두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사랑아 미안해…
은유천 옆에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나라서…
너 일 수 없는 거…. 유천이 옆에… 있을 수 없는 거… 미안해.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는 사랑이를 와락 안아 버렸다.
그러면 사랑이는 바둥거리다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만다.
내 품에서… 그러기를 10초. 그러다가 팍하고 나를 밀쳐 내고
나를 아까처럼 노려본다. 그리고 말했다.
"너 혼자 착한척 하지마! 너 혼자 착한척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사랑이었다.
그 눈물을 훔치고 옥상을 내려가 버리는 사랑이었다.
나쁜 여자… 악녀… 악녀도 여자였다.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그런 여자. 우는 모습이 아름다운 악녀.
"사랑아… 유천이 사랑해줘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내 대신…
유천이에게 커다란 사랑 줘서… 고마워.
정말로 고마워.
★
"괜찮아?"
"괜찮냐니."
"이사랑이 무슨 짓 하진 않았어? 괜찮은거야?"
"사랑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비연아."
"……."
나를 가자미눈으로 쳐다본다.
사랑이한테 맞고 와서는 안 맞은척 하는 거 아니냐는 눈초리다.
"사랑이…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
사랑이가 나쁜 게 아니야.
사랑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던 부모님들… 어른들…
그리고 우리…
우리 모두가 사랑이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야.
사랑이도 여자였어.
사랑받고 싶었던 여자.
근데 사랑이는 방법을 몰랐던 거야.
사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사랑이가 나쁜 게 아니야. 사랑이는…
사랑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야. 그래. 그런 것 뿐이야.
# 80
학교 수업이 끝나고 유천이랑 만나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데 어딘가에서 투닥거리는…
싸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봤더니… 구석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 쪽으로 가는 방향이라서 유천이와 걸어가고 있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 눈에 보여지는… 것은… 다른 아닌… 찬희였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진하와 두경이… 한솔이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우리쪽이 밀리고 있었고 많이 맞아서인지
모두들 상태가 안 좋았다.
이걸 본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뛰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유천이었다. 은유천.
"왜, 어디 가려고."
알면서 묻는 표정, 말투.
"놔…."
"어디가냐고, 너."
"놔… 제발…."
저렇게 두면… 안된단 말이야.
내 시선은 여전히 맞고 있는 찬희에게로 향해 있었다.
계속 맞고 있는 찬희에게로….
"어디가냐고!"
자꾸 찬희에게 가려는 나를 자기쪽으로 끌어 세우는 유천이다.
"찬희한테."
한차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내게서 이런 용기가 나오다니…
유천이 앞에서… 찬희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다니…
흔들리는 유천에 두 눈.
"찬희한테 가야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유천을 보면 유천은 나를 한 번 보았다가
다른 곳을 보았다가 다시 나를 또 본다.
"너 그거 아냐?"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내 두 어깨를 붙들고 협박조로 말하는 유천이었다.
"…….뭘?"
모르겠단 표정으로 유천이를 보면.
"처음이야."
이런 엉뚱한 말을 던져 놓는 유천이었다.
"네가 나 이렇게 본 거 처음이라고.
오늘 너랑 나 이렇게 두 눈 마주친 게 이게 처음이라고."
그…랬었나? 하… 맞아. 하루 종일… 다른 곳만 보고 다녔어.
유천이는 쳐다도 안 봤어.
난 아까처럼 다른 곳으로 시선을 고쳐 둔다.
이걸 본 유천이는 내 어깨를 붙잡은 두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한다.
"너 나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냐?"
하….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했는데?"
나도… 참을만큼 참았고… 내 감정… 너한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근데… 내가 널 얼마나 비참하게 했다고 이러는거야?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했는데!
나는 너… 내 말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서 조심했다구.
지금 한 번이야. 지금 딱 한 번이라고.
너한테… 내 속마음 비친 거… 이번이 처음이라구.
근데… 그걸… 그걸 하나 이해 못해? 그래서 지금 이래?
나도 모르게 자꾸만 빗나가고 있다.
은유천에게서 빗나가려고 한다.
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너한테… 나는… 뭐냐?"
"…은유천."
"너한테 나는… 은유천. 그 세글자… 그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냐?"
나 너한테 뭐라고 대답해야 하니.
"정말… 그래? 그게… 다야? 그래?"
나는 피식 웃고 만다.
"너의 눈에… 저게 어떻게 보여?"
열심히 맞고 있는 찬희를 가르키며 물었다.
열심히 터지고 있는…
피까지 흘리며 터지고 있는 찬희를 가르키며 말했다.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은유천에 손에서 풀려 나면 찬희에게로…
맞고 있는 찬희에게로 달려갈 수 있는데…
내가 대신… 맞아 줄 수 있는데. 아니…
내가 대신 맞을 건데. 찬희 때리지 말라고 소리칠 건데…
너는… 왜 이런 순간에도 날 막아?
그럼 이쪽 길로 오지 말던가.
내가 맞고 있는 저 사람이 류찬희였다는걸!
알지 못했던 순간에 나 이쪽 길로 들어서게 하지 말지.
내가 맞고 있는 저 사람이 찬희란걸 알면…
이런 반응 보일거란거 뻔히 알면서… 너 왜 그랬는데?
이런 순간에도 네 옆에 있어 주길… 원했니?
"그냥 패싸움으로 보이겠지. 패싸움… 그 세글자.
그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
네 눈엔… 그렇게 보일거야. 그래, 그럴거야. 패싸움."
"………."
"그래. 지금 나한테 너는 그래. 너는… 패싸움. 그 세글자…
은유천이라는… 그 세글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유천에 손을 강하게 뿌리치고 찬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나다.
그런… 나를… 또 다시 붙드는 유천이다.
"어떻게 하면되?"
유천을 향해 뒤돌아 서면…
애처로운 눈빛으로 날보고 있는 유천이가 있다.
"어떻게 하면… 나… 너한테…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내가 널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너도 나… 하… 그렇게는 안되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그러면… 나 그럴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네가 하란 대로… 할 수 있는데."
"그럼 이거 놓고 넌 집으로 가."
그럼 돼. 그럼 저번처럼, 내가 네 옆으로 돌아갔을때처럼
나 너한테 특별한 사람 할게. 특별한 사람 되어줄게.
그래 줄게. 물론 내 마음은 여전히 찬희에게 가 있겠지만.
"그럼 너는."
"그냥 가. 그냥 가 줘."
"내가 집으로 가면 넌 어디로 갈 건데?"
그 물음에 답은… 내 심장만이 알겠지.
내 심장이 향하는 곳이 그 물음에 답이야. 유천아.
"류찬희."
천천히 대답했다. 그 물음에 답.
심장이 향해 있는 곳. 그 곳은… 류찬희.
"나 찬희한테 갈 거야."
"……."
"찬희한테 가야돼."
찬희… 그 이름에 나 이렇게 행복한데…
나… 어떻게…
지금 가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 것 같은 데… 나 어떻게.
"내가 류찬희 저기서 꺼내 오면 너 나 아까처럼 봐줄래?"
"………."
"지금 네가 류찬희 보는 것처럼…
나 봐줄래? 나도 좀… 봐줄래?"
"………."
"그렇게… 나 좀 봐줄래?"
그렇게 말해버리고… 찬희가 있는곳으로 가는 유천이다.
찬희를 때리고 있는 사람을 집중으로 공격하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찬희에게 나는 다가갔다.
찬희는 아직 나인 줄 모르고 그냥 고통스러워한다.
난 축 늘어진 찬희를 힘겹게 부축하며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찬희를 택시에 태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창 밖엔… 한두 차례 서로 주먹이 오고 가다가…
끝내는 유천이가 맞게 되는 상황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 상황에 두 눈을 꽉 감아 버렸고
택시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찬희가 숨이 더 가파르게 쌕쌕 거린다.
조금만 더 있으면 병원이야. 찬희야… 조금만 더 참아.
★
응급치료를 받고자 병원에 들렸지만 무슨 일인지 입원을 요구 받았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고 찬희를 입원 시켰다.
찬희가 응급치료를 받고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것을 확인하고
옷과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
화장실에 갔다 오니
피와 먼지가 잔뜩 묻어 있는 교복을 입고 병실에 있는 진하 두경이,
한솔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
근데… 굉장히 아픈 얼굴을 하고 있다.
얘들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해.
하지만… 진하는 나를 쳐다도 안 봤고,
두경이는 나를 봤다가 다시 찬희를 보고,
한솔이는 눈 주위를 손으로 문지르고 있다.
한솔이… 너… 울어?
"귀 병신된 은유천만 보이고,
손 병신된 류찬희는 눈에도 안 보이냐?"
두경이었다.
"류찬희… 너한테 뭐였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병신 같다고 해도… 너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
"…두경아."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짜증나거든?"
싸늘한 두경이다.
"김두경, 그만해."
진하.
"이진하, 넌 화도 안나냐? 류찬희 이렇게 만들어 놓은… 차효주…
짜증나지도 않아?
류찬희 병신 만들어 놓고
은유천 없애서 웃고 있는 차효주… 얄밉지도 않냐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네가 은유천 귀 아프다는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갑작스런 두경에 말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 두경이가 했던 말과 지금 두경이가 한 말을 조합시켜 보았더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찬희가 왜… 손 병신이라는건지…
또 유천이 귀가 아프단걸…
두경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비연한테 들었는데 듣고
화나서 은유천 패 버리고 싶었던 거
간신히 참았거든? 여기 그러고 있지 말고 좀 꺼지지?"
알아. 내가… 잘 못 한 거… 찬희한테…
몹쓸짓 했단거… 알아… 나도 알아.
"네 남자친구이기 이전에 내 소중한 친구라고.
내 친구 더 이상 아프게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상처 주지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은유천… 그리고 은유천 옆에 있던 너도 마음에 안 들었어.
이게 내 속마음이야. 네들이랑 가까이 하지 말았어야 했어.
차효주 너 하나 때문에 지금 여러 사람 피해보고 있는 거 안 보여?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
틀리네… 전혀… 학교에서… 욕 먹을때랑…
두경이 너한테 욕 먹을때랑 틀려. 가끔 상상하곤 했었어.
어쩌다 너희들과 마주쳤을 때… 나 욕먹으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그 땐… 학교에서 욕 먹는거랑 같겠지,
그거랑 비슷하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야.
지금이 더 고통스러워. 더 힘들어.
"류찬희… 수술 시기 놓쳐서 저렇게 됐어.
네가 헤어지자고 안 말했으면 손목 수술도 하고 회복도 되어 가고 있었을거야.
왜 그 때 말했냐? 왜 하필 굳이 그 때! 왜 그 때였냐!"
"김두경!"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 달려들어 말하는 두경이를 붙잡고 선 진하다.
난 깜짝 놀라 두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그리고 들었다. 찬희… 수술… 이야기… 손목… 수술?
"하루만 참지… 하루만… 뭐가 그렇게 급해서 그 날 했냐?"
그러게 말이야…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너 걱정할까 봐… 우리한테 얼마나 신싱당부를 했는데!
수술하고 나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 모습…
아직도 난 잊혀지지가 않는다."
고개를 떨구고 말하는 두경이었다.
"차효주, 뭐라고 말 좀 해 봐."
멍해 있는 나를 붙잡고 흔드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솔이가 보인다.
한솔이… 너 정말… 울고 있었구나. 울고 있었어.
"찬희 이제 그림 못 그린데. 이제… 못 그리게 됐데.
너만큼이나 소중했던… 찬희한테는 그랬던… 그림이었는데…
그림 그릴 때 찬희 정말 행복해 했는데.
너 만나는 것만큼이나 행복해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데. 이제는…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됬데."
"미안해… 미안해."
이제는 모든 것이 설명이 됐다. 찬희가 손을 떨었던 이유…
술을 먹고 나면 떨린다는거… 그런 버릇 있다는거…
그거 다 거짓말 이었단거.
또 찬희에 생일날 펼쳐 보았던 스케치북도…
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그림체가 변하고 기초를 연습한 흔적이 있었다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설명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왜… 그랬던 것인지… 다 설명이 됐다.
찬희… 손목에 이상이 있었던 것이었다.
찬희… 많이 아팠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난 아픈 찬희에게…
더 큰 아픔을 안겨 주었고 수술도 받지 못하게…
방해를 해 버린 것이었다.
나 정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해…
앞으로…. 어떻게 찬희를 봐야해?
"찬희 저렇게 된 것도 은유천 때문이란 말이야!"
한솔이가…. 말했다…
찬희… 저렇게 된 게… 은유천… 때문이라고?
"한솔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한솔이에게 다가가서 묻자.
"오늘은 그냥 가라."
진하가 나를 막아섰다.
"한솔아… 그게 무슨 말이냐구… 그게… 무슨 말이야?
유천이가… 유천이 때문에… 찬희가 저렇게 된 거라구?
한솔아… 한솔아… 말 좀 해 봐…. 말 좀 해줘."
"너 구하러 갔을 때 농구공에 손목 쳐 맞았대."
딱딱한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두경이었다.
순간 난 할말을 잃어버렸다.
"너 양호실에서 쿨쿨 잠자고 있을 때,
찬희는 체육관에서 농구공으로 쳐 맞고 있었댄다.
그냥 쳐 맞았으면 덜 쪽팔린데…
근데… 잘못 쳐 맞은거야. 진짜 재수도 없지.
정말… 재수 완전 없는 새끼."
"김두경 너 자꾸 그딴 식으로 말해라?"
"이진하. 넌 화나지도 않냐? 나는 처음에 그거 알았을 때
은유천 죽이러 가자고 할 새끼가 너일 것 같았어.
네가 먼저 죽이러 가자고 그럴 것 같았다고.
근데 너 뭐냐? 너 우리 뜯어 말렸잖아! 이 씹새끼야!"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차며 진하에 멱살을 움켜잡은 두경이었다.
난 방금 두경이가 한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차가운 병원 바닥에 앉아 버렸다.
그 날… 유천이만 아팠던 게 아니었다. 찬희도… 아팠었다.
그 때부터 아프기 시작한 둘이었다.
근데… 난… 왜 유천이만 아프다고 생각했던 거지?
난… 왜 유천이 곁에 있었던 거지?
혼자 아파하고 있을… 찬희는 왜 생각하지 못햇던거지?
아무리 모르고 있었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였잖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한 두경이와 진하, 이 둘을 말리던 한솔이.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
우리 모두에 시선을 모은 건…
문 앞에 서있는 비연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다히도 있었다.
"김두경 네가 뭘 알아! 너만 힘들어?
너만… 너만 힘드니? 왜 이렇게 잔인해.
너희들 왜 이렇게 잔인한 거냐구!"
"비연아, 하지마. 다 내 잘 못이야."
찬희도 나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까?
나를 만나서 저렇게 되버린 걸까?
# 81
"류찬희가 너희들한테 끔찍한만큼
효주도 나한테 끔찍해!
효주, 웃는 거 본 거… 효주 웃게 해 준 찬희… 너무 좋았어.
너무 고마웠어. 미안할 정도로…
처음에 나도 그랬어. 찬희 왜 찬 건지…
찬희를 찬 효주가 미웠어.
근데… 이제는 효주가 불쌍해. 불쌍하더라…
지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데도
그 사람 곁으로 갈 수 없다는 게,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게, 안쓰러웠어. 효주…
저 혼자 아파서 끙끙 앓는 효주 보는 거 지겨울만큼 싫더라.
하… 너희들이 너무 미워. 가자, 효주야."
내 손을 거칠게 부여잡고 병실을 빠져나가는 비연이다.
그럼 난 비연이에 손에 이끌려 찬희 병실에서 나오고
우리 둘을 쳐다보는 다히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히야… 두경이 좀 부탁해.
나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있어.
나 때문에… 나 하나 때문에… 모두 아파하고 있어. 미안해. 모두….
"많이 아프지. 많이 아프지?"
"…응… 비연아."
"응. 나도 아파."
"응. 흐흡…."
"그리고 애들도 많이 아플거야. 우리만큼 아플거야."
★
혼자 견디기 힘들면 엄마한테 두들겨 맞는 한이 있더라도
새벽에 우리 집으로 달려오겠다고 한 비연이.
정말 네가 없었다면,
네가 내 친구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순간을 참기 힘들어서, 버티기 힘들어서
주저 앉았을거야.
정말 고마워, 비연아. 내곁에 있어 줘서.
찬희 병원에서 찬희 곁에 있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때문에 그냥 집으로 왔다.
"맞아… 유천이."
병원에서 받은 충격 때문에… 유천이를 잊고 있었다.
찬희를 데리고 택시를 탔을 때 유천이는 많이 맞고 있는 상황이었고
유천이는 지금 환자였다.
왜… 잊고 있었지? 유천이… 유천이.
난 유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유천이가 있는곳을 알아야 했다.
옷을 주섬주섬 바꿔 입으며 유천이에게 전화를 거는중이다.
"유천아, 지금 어디야?"
"아, 혹시 이 학생 친구?"
"네?"
"빨리 와 봐! 지금 이 학생 심각해!
남의 악기 다 때려부수고!
왜 피에 떡이 되서 와서는 남의 가게 문 닫게 하려고 이래!"
"네?"
"지금은 지쳐서 뻗어 있긴 하지만
언제 또 깨어나서 날뛸지 몰라! 아이고!
망했네, 망했어! 우리 가게 망했네!"
"거기가 어디에요?"
"신영 악기점! 빨리, 빨리 와 봐! 무서워 죽겠네!"
악기점 아저씨는 겁에 질려 계셨다.
난 바로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와 신영 악기점으로 향했다.
신영 악기점이라면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유명한 악기점이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정도의 유명한 악기점…
그런 악기점을 박살내고 있다는 아저씨의 말씀에…
난 빨리 신영 악기점으로 뛰어가야 했다.
뛰어가는 도중 응급실 병원 차량을 보았다.
교통 사고가 났는지 바닥이며 신호등 기둥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건 유천이었다.
응급실 병원 차량을 스치고 신영 악기점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그 곳을 서성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악기점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깨진 유리며 부서진 악기들을 쓰레기통에 주워담고 계셨다.
"유천아!"
그리고 내 눈에 보인… 쇼파에 길게 뻗어 누워 있는 유천이었다.
생각 보다 상처는 대단했고 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유천이에게 달려가 유천이를 흔들었다.
하지만 유천이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유천아! 유천아!
"유천아, 은유천!"
"……."
"나 너무 힘들어. 아파. 막 숨이 막혀.
슬퍼… 제발… 일어나. 일어나… 은유천…."
하지만 여전히 유천이는 말이 없다.
약간 꿈틀 거리기만 할뿐이었다.
그것으로도 만족했다.
유천이에 생명이 그렇게 위급한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나 이제 어떻게 해야돼?
나 네 옆에서 숨 쉴 수 없어… 네 옆에서 살아갈… 자신 없…."
어.
철썩-
정신 없이 유천이를 흔들어 깨우고 있는 나를
일으켜 싸대기를 때리는 한 사람.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굉장히 화가 난 모습으로 내 앞에 서있다.
방금 집에서 뛰쳐 나온 건지
실내복 차림으로 내 앞에 서있는 사랑이었다.
"너 정말 못 됐어! 어떻게 이래?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구!"
"네가 여긴 어떻게…."
"아빠가 와 보랬어. 됐어?"
"……."
"유천이도 아프단 말이야!
너만 아픈 거 아니란 말이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알아. 유천이 아프다는거."
난 사랑이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아는데 왜 이래? 왜 이러는건데!"
"찬희도 아파…."
"그게 무슨 상관인데?"
하… 맞아. 찬희 아픈 게… 유천이랑 너한테…
무슨 상관이겠니?
그냥 아무 일도 아니겠지.
너희들한테는.
"너 못 가. 너 안 보내! 유천이 옆에 있어!
내가 너 안 보내! 너 안 보낼 거야! 너 아무대도 못 가!"
"이사랑!"
"나도 미치겠어! 돌아 버리겠다구!
너 아니면 안되겠다는데! 너 아니면 안된데!
네가 유천이 곁에 있어 주면… 안 되는 거야?"
"사랑아, 나는…."
찬희한테 가야해.
찬희한테 돌아가야 해.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순 없어.
"류찬희 뿐이라는거 아는데… 그러지 말아 줘. 제발…
유천이 좀 붙잡아 줘. 유천이…
너 아니면 안된단 말이야.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내가 빌게… 이렇게 빌게."
옥상에서처럼 내 앞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말하는 사랑이었다.
그 모습에 난 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있잖아."
"……."
"네가 유천이 옆에 있어 주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하지만 난…."
"유천이 많이 좋아하잖아.
지금 너 유천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잖아."
내 이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사랑이었다.
"근데 나는 유천이 사랑안해."
"그럼, 왜 여태껏 유천이 옆에 있었던거야?"
"미안했어. 그리고…."
"……."
"불쌍했어."
나를 노려보다 허탈한 한숨을 내쉰다.
그래… 네가 봐도 나… 이해 안되지?
나… 바보 같지?
나도 그래.
나도 나 이해 안되고 이런 나 바보 같아.
"그래서 유천이 옆에 있었던거야.
근데 이건 아니잖아.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유천이가 아닌 찬희인걸."
어렵게 어렵게 사랑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사랑이와 눈을 마주치고 말을 이어 갔다.
"나…."
돌아가야 해.
하지만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유천아!"
유천이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가 유천이 곁으로 뛰어가고
나도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유천이 곁으로 다가갔다.
"네가 여긴 어떻게."
유천이가 사랑이를 보고 물었다.
"많이 다친 것 같아. 병원가자. 유천아."
사랑이에 말에 입안에 고인 피와
침을 바닥에 내뱉는 유천이다.
"괜…찮아?"
내 이 말에 고개를 푹 숙여 버리는 유천이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
"가… 가라."
"……."
"류찬희한테 가라고."
뭐?
"은유천…."
"빨리 가. 내 생각 바뀌기 전에…."
난 믿을 수 없었다. 가라니… 찬희에게로 가라니…
유천이가 나를… 놓아주려고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유천이에 이 말을 난 믿을 수 없었다.
"울지마."
"………."
"다시는."
"………."
"… 차효주… 행복해라…."
"………."
"평생."
나는 두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리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 곧… 미국 간다."
"뭐?"
"미국 가려고."
"…………."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유천이가 입을 떼었다.
"너 그거 아냐?"
"……?"
"류찬희 옆에 있을때의 넌…
내 옆에 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행복해 한다는거.
행복에… 취해 있다는거…
내 옆에 있을땐…. 그런 표정 찾을 수 없어…
찾아 볼 수 없더라."
무언가 목을 자꾸 매우는지 꾸역꾸역 말하는 유천이었다.
힘겹게 내게 말하는 유천이었다.
하…. 어떻게… 어떻게 해…
유천이 이렇게 아파하며 날 보내는데…
난 유천이에 상처도 보듬어 줄 수 없이
찬희에게 가고 싶어.
지금 당장 유천이 이대로 내버려 두고
찬희에게로 달려가 버리고 싶어…
나 진짜 못된 거 같아.
너 이렇게 아프게 하고…
나만 행복해지려고해.
나 정말 이기적이야.
"가."
"………."
"나 다시… 너 붙잡고… 싶어지기 전에……… 가…."
"……유천아."
미안해.
"나… 한 번만…… 너… 안아 보면…
안되나? …하 …무리인가?"
옆구리가 아픈지 옆구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는 유천이었다.
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유천이에게 다가가 유천이를 안아 주었다.
유천이는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고…
난… 유천이를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사랑이는 이 광경이 보기 힘든지 다른 곳을 보며 울고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유천아…."
"내가 더… 울게만해서… 미안하다… 차효주…."
"흐흡…."
"가서… 행복해야돼…. 차효주…."
"응… 흐흡…."
그렇게 마지막으로 유천이를 안고 울어 버렸다.
유천이만에 향기를 맡으며 그렇게 목놓아 울어 버렸다.
나 행복할게. 찬희 곁에서 행복할게.
내가 악기점을 빠져 나왔을 때 혼자 울고 있는 사랑이를…
유천이가 다가가 안아 주었다.
그리고 유천이가 사랑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혼자… 있게… 해서… 미… 안… 해…
혼자… 사랑… 하게… 해서… 미… 안… 하… 다…."
라고.
★
난 신발까지 벗겨져 가며 찬희에 병원으로 찾아갔다.
나 이젠… 찬희랑… 함께 할 수 있어.
물론… 찬희가 많이 아파하고
나 자꾸만 밀어 낼지도 몰라.
이제는 찬희가 나 싫어할지도 몰라.
근데… 나 찬희 마음 돌릴거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게…
나 찬희 마음 나를 향해 돌릴거야.
내 비틀어졌던 심장…
다시 찬희를 향해 바로 서고 뛰는 것처럼.
"응급 환자입니다! 비키세요! 양보해 주세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옆을 지나가는 의사와
피를 철철 흘리며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
의사와 사람들 사이에 묻혀 환자의 얼굴은 확인 할 수 없었다.
"……피."
그리고 환자와 잠시 스친
내 손등에 묻은 피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땡!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저기… 안 타세요?"
"네? 네… 타요. 타요."
문이 열렸는데… 타면 되는데…
난 왜 그 자리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던 거지?
손등에 묻은 피를 휴지로 훔쳐내면 되는데…
왜 난 머뭇거리고 있었던 거지?
"찬희야!"
찬희에 병실 문을 열고 큰소리로 찬희에 이름을 불렀다.
나 너에게 돌아왔어! 나 이제 아무 데도 안가!
너한테만! 너한테만 있을거야!
우리 앞으로 이제… 영원히 함께야!
"……."
하지만….
찬희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찬희는… 침대에 없었다.
"혹… 류찬희 환자분 보호자 되시는가요?"
"네?"
흠칫하며 뒤를 돌아다보니 간호사가 서있었다.
난 간호사 언니에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찬희 보호자가 내게 맞다고.
"네… 그런데요… 찬희 어디 갔어요?
씻으러 갔나요? 주사 맞으러 갔어요?"
괜시레 느껴져 오는 불안감에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매점… 갔나?
"이상하네…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간 거지?
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 지금 류찬희 환자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실려 왔습니다."
"네? 응…급실…이요?"
# 82 (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을 전해 받고…
간호사 언니를 따라 응급실로 내려가니…
진하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난 간호사 언니를 따라 가다가… 진하에게 갔다.
그리고 진하에게 물었다. 하… 진하.
네가 왜… 네가 왜 환자복을 입고 있는 거야? 네가 왜?
진하는 찬희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찬희에 환자복을… 네가 왜.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이 환자복은 또 뭐야? 응?"
"내 생각이 짧았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그게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말해봐!"
다짜고짜 진하에게 뭐라고 퍼붓는 나.
이러면 안되는건데…
진하에게 뭐라고 하면 안되는건데…
그냥 이 상황이 답답해서…
어떻게든 이 상황에 설명을 빨리 듣고 싶어서…
진하에게… 재촉한다. 지금 이 상황이 다 어떻게 된 거냐며.
"옷을 바꿔 입는 게 아니었는데…
병원을 못 빠져나가게 했어야 했는데."
"무슨 말이야, 그게!"
나는 흥분하며 진하를 붙들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구…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너한테 가야겠데… 너한테 가서 묻고 싶었데. 정말…
은유천을 사랑하냐고. 자기는 왜 안 되는 거냐고.
자기가 은유천의… 빈…자리일 뿐이었냐고.
정말 그것 뿐이였냐구. 우리… 정말… 끝인 거냐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왜 몰라… 왜 몰라… 내 진심을… 왜 모르는 건데.
"확답을 듣고 싶었데. 그래서 나랑 옷을 바꿔 입자고 해서…
바꿔 입고… 병원에서 나갔는데… 그만… 사고가…
나 버리고 말았어…
너한테 가는 길 도중에… 사고가… 교통사고가."
나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집에 오는 길에… 사고가 나 버렸다는 찬희…
그리고 문득 내 기억을 스쳐 간…
방금 전 상황에 기억… 짧은 기억.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 짧디 짧은 기억.
그 기억. 그 기억에… 존재하고 있었던건…
바로… 찬희였었나보다.
신호등과 도로에 피… 그리고 응급실 병원 차량에…
사람들에 웅성거림… 차디찬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고 있었던 찬희. 나에게 오려다가…
그 밤중에… 진하랑 옷까지 바꿔입고…
나에게 오려다가… 그만 사고가 나버린 것.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지금 이 모든 게… 현실인 거야?
"아니야. 아닐거야… 찬희 지금… 병실에 있지?
지금 너네 나한테 장난치고 있는 거지?
응? 너희들… 나한테… 장난 잘 치잖아…
나한테 장난 잘치잖아. 평소에도… 잘 쳤었잖아.
이거 내기지? 나 누가 빨리 울리나 내기한 거지?
그런 거지? 응?"
내 이 말에… 이 울부짖음에… 진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옆… 침대에서…
촤르륵 소리가 나며 커튼이 걷혀지고…
내 눈 앞에 보인… 충격적인… 장면…
하얀 침대가 붉은 피로 물들여 있었고,
하얀… 찬희에 얼굴에… 또한…
붉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찬희야!"
진하는 찬희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꼭 붙들었다.
산소호흡기를 매달고 있는 찬희…
의사들에 곤란에 찬 표정들…
점점 떨어져 가는 심장박동수…
그리고 일제히 찬희에게 달려들어
찬희 가슴팍을 일정한 속도와 간격으로 눌러 대는… 의사들.
"……안돼… 안돼요…."
삐…
삐…
삐…
삐…
심장박동수가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
제로가 되어버린… 심장박동수…
멎어 버린… 심장…
찬희에 심장…
멈춰 버린 심장….
"안돼! 안돼요!"
나는 진하를 뿌리치고 피로 물든 찬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안 된다고…
찬희… 이렇게 보낼 수 없다고…
"사망하셨습니다."
그 말에… 난… 정신 없이 소리쳤다.
안 된다고… 안돼… 안돼… 안돼!
찬희야… 흐흑… 안돼…
이대로 내 곁을 떠나가 버리면… 안돼!
나 이제야 겨우 네 곁으로 돌아왔는데.
나 이제야 다시 네 곁에서 숨쉴 수 있게 되었는데…
근데 넌 왜 여기에 이렇게 누워 있는건데?
너는 왜 이렇게 아픈 모습으로… 이렇게 누워 있는건데?
지금 이거 다 장난이지?
나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올거 알고 그 기념으로 이벤트 열어주는거지?
앞으로 10초만 세면… 아니, 20초만 세면… 그러면 너 다시
벌떡 일어 나는거지? 절대로… 이렇게 가는거 아니지?
절대로 이렇게 내 곁을… 떠나는거… 아니지?
찬희야, 사랑해.
이 말 하고 싶었어.
이 말만 해주고 싶었어.
너 못봤던 그 시간동안 나 혼자 사랑해, 사랑해… 이 말만
계속 되뇌었다? 너한테 다시 돌아가면 그때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사랑한다는말.
나 그 말 너한테 꼭 해야해. 제발 눈을 떠… 제발….
★
"안돼!"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보이는 건 서로들 곤히 잠에 취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두경이 다히,
비연이 진하,
한솔이와 강아지,
그리고 나와…
내 옆엔 찬희…가?
난 찬희가 내 옆에 있다는거에 놀라서
찬희에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고
눈을 뒤집어 보기도 했으며
찬희에 심장에 손을 갖다 대어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는걸 느껴 보았다.
"찬희… 찬희야… 정말… 진짜… 찬희야…."
내 옆에 있는…
이… 찬희 모습을 한 이 사람은…
찬희가 맞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찬희.
난 믿을 수 없었다.
찬희… 죽었는데…
찬희 심장이 멎어 버렸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으음…."
내가 너무 찔러 대는 통에 잠에서 깼나보다.
"찬희야…."
"언제 깼어?"
"응. 바… 방금 깼어."
난 이게 혹시 꿈인가 해서 내 볼을 꼬집어 보았다.
"더 자. 바다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어."
바…다? 우리 지금… 바다에 가는 거야?
"바다?"
맞아.
우린 지금 바다로 향하고 있는 길이었지?
그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나보네. 나도 참….
"응. 우리 방학하면 바다 가기로 했었잖아."
"찬희야… 너 정말… 찬희 맞지? 그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나… 있지… 굉장히 슬픈 꿈을 꾸었어."
굉장히 현실 같은 꿈….
"슬픈 꿈?"
"응."
"어떤 꿈이었는데?"
"너랑 나 헤어지는 꿈…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는데…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이끌려…
이별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거야. 끔찍하지?
근데… 결국에는 서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만… 네가 죽어버리는 꿈."
내가 말을 하고도 소름이 끼쳐서 내 팔을 마구 문지르며
찬희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울음이 새어 나왔다.
"으허헝! 정말… 다행이야… 꿈…이어서… 으허헝!"
난 울음을 터트리며 찬희에 품에 안겼다.
그리고 느껴져 오는… 생생히 느껴져 오는…
찬희에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심장… 뛰는… 느낌… 아, 따뜻해. 포근해.
이대로 잠이 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아니야… 아니지… 잠들면…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꿀지도 몰라!
아니야. 나 안 잘 거야.
아무리 따뜻하고 포근해도…
나 안 잘 거야! 안자!
"그 꿈꾸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찬희야!"
정말… 네가 어떻게 되어 버리는 줄 알고…
나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괜찮아. 괜찮아… 모두 꿈이었을 뿐인걸."
응. 그저 꿈이었을 뿐인걸…
달콤 쌉싸래한… 한 여름날에 꿈이었을 뿐인걸…
난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넓은…
찬희에 품에 안기어 엉엉 울어 버렸다.
자꾸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파 와서…
슬퍼서… 그냥 울어 버렸다.
근데 난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이 겨울옷이었고,
기차 창 밖으로는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 때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 두달전.
찬희에 병원으로 급하게 달려가던 효주는
초록불 신호가 깜빡이다가
빨간불로 바뀌었는걸 못 본채
달려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효주는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차효주 환자분은 기억상실증에 걸리셨습니다.
지금 현재 기억되어 있는 기억은…. 그러니까…
여름쯤이겠네요.
환자분이 계속 기차 타고 바다에 여행을 가자고 했다며
바다로 떠나자고 하니…
흠… 그 때입니다.
지금 그 때에 기억에 멈춰 있어요.
그 뒤에 기억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겁니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영영 안돌아 올지도 모르죠.
그건 환자분에게 쥐어져 있는거랍니다.
환자분이 기억하고 싶으면 빠른 시일 내…
혹은 나중에라도 잃어버린 기억은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있었던 것이라면…
아마… 기억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우선… 차효주 이 환자분에겐 안정이 필요합니다."
의사에 말인즉슨
효주는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것.
기억하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언제가 되어도 찾을 수 없을거라는 말을 남긴채
효주의 병실을 빠져나가는 의사였다.
그랬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찬희가 아니라 효주였다.
찬희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효주가 만들어 낸 상상이었다.
바다로 향하는 기차에서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꾸었던 꿈…
유천이 효주를 보내 주었던 것 까지는 사실이지만
그 뒷부분부터는 효주가 만들어 낸 상상…
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단순한 꿈.
잠을 새근새근 자고 있는 효주에 이마에 찬희가 입맞춤을 하면…
잠자는 숲속에 공주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효주가 눈을 뜬다.
그리고 찬희를 와락 껴안으며…
"찬희야, 사랑해!"
"…………응."
"사랑해…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죽을만큼!"
"나도. 죽을만큼 널 사랑해."
"찬희 너만을… 너 하나만을 죽을만큼 사랑해. 사랑해."
"응. 나도."
찬희를 꽉 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효주다.
마치… 그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던 게 분했던 듯…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연이어 계속 하는 효주였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너 하나만 죽을만큼… 사랑해.
앞으로도 너만을… 너 하나만을… 영원히… 사랑할거야. 사랑해.
★ 기차 안.
"와! 죽이는데?"
휘파람을 물며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효주와 찬희에게 놀리듯 말하는 두경이!
"포즈 좀 취해봐! 예쁘게 찍어 줄게!"
어느새 디카를 꺼내 들고 촬영에 들어간 다히!
"와, 진짜 닭살!"
효주와 찬희에게 과자를 던지며 말하는 진하!
"뭐 어때! 진하야, 나도 좀 안아 줘!"
이 광경을 끔찍해 하는 진하에게 안아 달라고 조르는 비연이!
"뽀뽀야, 오빠랑 뽀뽀할까?"
안고 있는 강아지에게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뽀뽀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솔이!
"멍멍!"
느끼한 한솔이를 은근히 피하는듯한 한솔이 강아지인 뽀뽀!
"효주야, 사랑해!"
효주를 더욱 꼭 껴안으며 말하는 찬희!
"나도! 찬희만 사랑해!"
찬희에 품에 안기어 행복한 목소릴 말하는 효주!
☆
혹시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빨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1초 후에 예기치 않은 '오해'로 인해 '믿음'이 깨져 버려 '이별'을 할 수도 있거든요.
사랑은 '믿음' 하나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믿음이 깨져 버리면- '사랑'이 깨져 버리고 말아요.
그렇게 깨져 버린 '사랑'은- 두 쪽으로 갈라져 버린 '사랑'은-
다시 '하나'로 만들기엔- 너무 힘들고 오래 걸리거든요.
영영 '하나'가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가능한 빨리 많이 말하세요!
지금 당신 곁에 있는 당신에 반쪽에게!
사랑한다고. 죽을만큼 사랑한다고. 너 하나만 사랑한다고.
- The End -
※ 출처 : 요조숙녀s 팬카페〃
온새미로 ★ http://cafe.daum.net/totoro009 ※
그동안 춤예 읽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첫댓글 우와...........정말재미 있네요...
꺄~ 드디어결말..........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