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와
저자(著者)왕수초(王秀楚)
글 김광한
1970년대에 우리나라 독서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온것은 다름아닌 문고판(文庫版) 발행이었습니다.정음사(正音社)와 을유문화사 (乙酉文化史)그리고 삼중당(三中堂) 등에서 내놓은 손바닥 크기의 문고판 책이 가뜩이나 열악한 책읽는 독자들의 주머니 사정을 완화시켰던 것이지요.을유문화사의 사장인 정진숙 선생이나 삼중당 사장인 서재수 선생, 그리고 동아출판사 사장이었던 김상만 선생 같은 분은 책을 발행아여 이득을 얻는 출판업자라기 보다 무지한 국민을 깨우치려는 것을 목적으로둔 선각자이자 애국자였습니다.
그 당시 삼중당에서 발행한 문고본이 수백 권에 달했는데 여기에 국내의 유수한 학자들을 동원해서 원고료를 지불하고 제작한 값진 우리 정신적 문화유산으로 남이 있습니다.그리고 이어서 작가이자 발행인인 고정일(高正一)선생의 동서문화에서 나온 국판으로 된 저가(低價)의 여러 책들,윤형두 선생의 범우사(凡友社)에서 나온 것들 등 지식의 욕구에 허덕이는 독자들에게 갈증을 해소 시켰던 것이지요. 범우사에서 나온 문고판에 처음으로 법정스님의 무소유(無所有)가 소개 되엇고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문고판에 중국의 작가 주자청(朱自淸)의 뒷모습을 허세욱(許世旭)선생이 번역해 소개해놓았어요.저는 당시 이 문고판을 돈이 생기는 대로 사 모았지요.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남은 책들이 아직 몇권 있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라는 서술체(敍述體) 글이 있었는데 그 책이 없어져서 헌책방을 돌아다니거나 발행사인 삼중당에 연락했으나 삼중당이 없어졌다는 거에요.왜 제가 이 글을 찾았는가 하면 왜놈들이 저지른 난징(南京) 대학살과 캄보디아 폴포트의 국민대학살과 같은 역사적인 범법자를 응징하고 우리 시대에 아직도 종북 좌익 빨갱이들의 만행과 이들을 찬양하는 자들에게 경각심과 함게 국가관을 각인(刻印)시켜주기 위해서였지요. 또 그런 글을 써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연하게 어느 인터넷에 양주 십일기라는 내용의 전체 글이 올라와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양주십일기는 일기체인데 당시의 학살 현장에 잇었던 주인공이 목격한 사실을 일기체로 써 둔 글입니다.
주인공이자 저자인 왕수초(王秀楚)의 이 일기(日記)는 청나라 왕조 시대엔 失傳(실전)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淸왕조에 의해 禁書(금서)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청나라 말기, 일본에 유학 간 중국 유학생이 일본 무슨 도서관에서 ‘발굴’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淸왕조에 대한 反感(반감) 및 공화혁명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습니다.
-일기 형식의 본 글은 청나라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한지 대략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645년 봄에, 중국 양주성(揚州城)에서 열흘 동안 일어난 일의 기록입니다.일기의 필자 왕수초(王秀楚)는, 그당시 그곳 양주사람입니다.
-‘양주십일(揚州十日)’은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더불어, 청나라가 중원을 접수한 후 저지른 각종 학살 사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사건입니다. 전체의 글이 길어서 앞글과 중간 그리고 말미의 중요한 대목만 소개를 하겠습니다.
왕수초(王秀楚) 1645년 順治(순치)2년 己酉(기유)년 夏(하) 4월14일(음력임), 督鎭(독진;관직명 ≒사령관) 사가법(史可法)이 백양하(白洋河) 방어전에 실패, 황급히 퇴각하여 양주(揚州)에 도착. 즉시 성문을 굳게 닫고 양주성 결사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뒤이어 적이 도착하였고, 城을 공격하였으나 4월24일이 되도록 城을 깨뜨리지 못하였다. 이때의 양주성 안은, 수비는 삼엄하고, 각 성문은 모두 수비병이 있었다.
우리집은 西城(서성 ;성곽도시라 西門 일대 지역을 西城이라 불렀다?)에 있었는데, 楊(양)씨 성의 장교 관할이었고, (우리집 부근에는) 그의 手下의 관원 병졸 등이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집) 전후좌우에 병졸이 좍 깔렸는데, 우리집에도 병사 둘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법도랄 것이 추호도 없어서, 마구 유린하고 손해를 끼치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다. 나는 매일 천 냥이 넘는 돈을 바쳐야 했다. 계속 이러기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쩔 수없이 左右 옆집과 상의하여, 세 집 공동으로 그들의 楊장교를 술을 곁들인 식사에 초대하였다.
술자리에서, 나는 억지로 공경을 다하며, 거나하게 대접하며 비위를 맞추었다. 楊장교는 기분이 좋아졌고, 그들 병사 몇에게 여기에서 멀리 옮기고 더는 소란을 부리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楊장교는 보아하니 음률을 좋아하고, 비파도 튕길 줄 아는 듯했다. 그는 우리에게, 양주 현지의 名妓(명기)를 수배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드러냈는데, 군무 중 한가할 때 쉬면서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그가 답례로 나(와 일행)를 초대하였고 함께 술을 마셨다. 원래 나는 작정을 하고 실컷 놀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督鎭(독진) 사가법이 보낸 쪽지가 술자리에 전해졌고, 楊장교는 펴보더니, 낯빛이 확 변해서, 급히 몸을 일으켜 城으로 올라갔다(민간인 집에서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우리 일행 또한 흩어졌다.
이튿날 아침(25일 ;10日 중 첫날)이 지나, 督鎭(독진) 사가법의 말씀패(牌諭패유)가 전해졌는데 그 안에는, ‘나 한 사람이 감당한다. 백성은 연루시키지 않는다’란 말이 적혀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자 감격하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또, 순찰 돌던 아군이 적군에게 가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얼굴이 펴졌고, 서로 축하했다.
오후에, 나의 처갓집사람 하나가, 적에게 투항해 반란군이 된 興平伯(흥평백 ;칭호)고걸(高杰)의 패잔병을 피하여, 과주(瓜州)에서 양주로 우리집까지 왔는데(흥평백고걸은 적에게 투항하여 반란군이 되었고, 사가법이 방을 붙여 그를 수배하였으며, 때문에 양주에서 멀리 도망쳤다), 나의 아내는 이 친정붙이와 헤어진 지 오래라, 두 사람은 만나자 탄식을 그치지 못했다.
중략(中略)
우리집 後廳(후청)은 바로 성벽을 마주한다, 창틈으로 밖을 엿보니, 城 위에 병사들이 남쪽에서 서쪽으로 행진하는 것이 보이는데, 보무가 엄정한 것이, 설령 폭우 속이라 한들 조금도 어지러워지지 않을 듯했다. 속으로 짐작하기를, 기강이 엄하고 절도 있는 군대구나. 조금 안심되었다.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웃사람이, 우리 의논하여 壇(단)을 차려 향을 살라서 王師(왕사 ;王의 군대)의 도착을 영접하자, 감히 대항하지 않음을 보이자는 것이었다. 비록 그렇게 한들 별 소용없음을 내 알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론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예예 일단 따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모여서 목을 빼고 군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군대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또 집 후청으로 가서 창문으로 성벽을 엿보았는데, 만주군 행렬이 좀전보다 조금 드물어졌고, 행렬이 가다 서다 했다. 돌연 눈에 띄는 것이, 만주군 병사들이 부녀자들을 에워싸고 어울려 가는데, 부녀자들의 옷차림을 보니, 모두가 양주 현지 풍속이었다. 이제 나는 크게 놀라게 되었고, 고개를 돌려 마누라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입성하였으니, 만약 무슨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은 스스로 끝을 내어(자살하여 치욕을 면해)야 할 것이오.” 아내는 말하기를 :좋아요! 그리고 목이 메어 말하기를 :제가 이전에 주머닛돈을 좀 모았어요, 지금 당신에게 드리니 알아서 처리하세요,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는데, 이런 재물을 남겨서 어디다 쓰겠어요? 그리곤 울면서 돈을 다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이때, 누군가 들어와서 급하게 고함을 쳤다 :왔소! 왔소! 나는 급히 뛰어나갔다. 저 멀리 북에서 오는 기마 몇 기가 보이는데, 고삐를 살며시 잡고 천천히 다가왔고, 王師(왕사 ;왕의 군대)를 맞이하는 자들과 맞닥뜨렸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이때에, 全 양주성 사람들은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왕래가 끊어졌으며, 그래서 지척지간에도 숨소리 하나 안 들렸다.
그들이 더 가까이와서야, 결국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집집을 돌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게 되면, 더 캐묻지 않고 그만두었으며, 간혹 불응하는 자가 있다 해도, 비록 칼을 휘둘려 위협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해하진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누군가 헌금 만 냥을 바쳤는데, 그럼에도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고, 이는 양주 현지인 내통자가 초래한 일이라 한다. 우리집 차례가 되었을 때, 만주군 기병 하나가 나를 콕 집어 가리키며 뒤쪽의 기병에게 말하기를 :“이 쪽빛 옷을 입은 사람에게 돈을 받아내 가져오라.” 뒤쪽 기병이 막 말에서 내렸을 때, 이미 나는 잽싸게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는 나를 포기하고 말에 올라 가버렸다. 나는 속으로 따져보기를 :“내 옷차림이 남루해서 시골뜨기 같은데, 왜 하필 나에게 그러지?”때마침 아우가 왔고 큰형님 또한 왔기에, 함께 의논하기를 :“제가 사는 집 좌우가 모두 富商(부상)이라, 그들이 저까지 富商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어떡하지요?”모두들 초조 불안하였고,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하기로 결정, 그리하여 큰형님이 집안 부녀자 등을 이끌고 외진 좁은 길로 비를 무릅쓰고 둘째형님 집으로 가게끔 맡겼다. 둘째형님이 사는 곳은 何씨가문묘지 뒤로서, 좌우가 모두 가난뱅이 주거지라, 더 안전할 것이다. 나는 뒤에 혼자 남아 동정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큰형님이 와서 말하기를 :“大路 상에는 이미 만주군이 도륙을 시작했다, 여기에 남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리 형제들은 함께 있자, 태어남과 죽음을 함께 하면, 비록 다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先祖(선조)의 神主(신주)를 모시고 큰형님과 함께 둘째형님 집에 도착하였다. 당시 큰형님과 아우, (둘째)형수 및 조카, 또 집사람과 아들, 두 처제, 처남 하나, 총 12인이 둘째형님 집에 피난 중이었다.(12人 =11人+뱃속아이)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고, 적군이 사람 죽이는 소리가 문밖에 울려퍼졌다. 놀란 집안사람들은 도저히 집안에 있지 못하고 지붕으로 피해 올라갔다. 비가 갈수록 세차졌고, 십여 人이 뭉쳐서 담요 한 장을 같이 덮었고, 온몸이 빗물에 폭삭 젖었다. 바깥의 애통한 비명소리는 머리카락이 쭈삣하도록 파고들며, 혼백이 나가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차츰 조용해졌고, 그때서야 처마를 붙들고 내려와, 돌을 두드려 불을 피워 밥을 지었다.
이때, 城 곳곳에 불이 났는데, 가깝게는 십여 곳, 멀게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붉은 색 火光이 서로 비추는 것이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듯했고, 타닥 타다닥 소리가 끊임없이 귀를 울렸다. 거기다 공격당해 부상 입은 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끊어지다 이어지다 하는 애처로이 돌보는 소리들, 그 처참함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밥이 익었으되, 사람들은 서로 멀뚱멀뚱, 겁에 질려 누구 하나 젓가락을 못 들었고, 아무도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내 아내가, 저번에 나에게 주었던 주머닛돈을 가져가서, 네 뭉치로 나누었고, 형제들이 각기 하나씩 숨겼는데, 상투며 신발이며 허리띠에 챙겼다. 아내는 또 헤진 옷과 낡은 신발을 찾아서 나를 가난뱅이로 변장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은 뜬눈으로 밤을 샜고, 아침을 맞았다.
그날밤에, 기괴한 새들이 공중에서 마치 생황(笙簧, 피리 종류) 같은 울음소리를 내었고, 또는 으아 어린애 울음 비슷한 소리도 내고, 죄다 사람과 들짐승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인 듯했다. 후에 물으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들었다 한다.
26일(10日 중 이틀째), 城 내 불길이 급속히 약해졌다. 하늘이 차츰 개었다. 우리들은 다시 지붕으로 기어올라가 숨었고, 이미 십여 사람이 지붕과 지붕 사이의 배수통 안에 엎드려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돌연, 동쪽채에서 사람 하나가 벽을 기어 집 위로 올라 내뺐다, 병사 하나가 칼을 들고 바짝 쫓는데, 마치 나는 듯했다, 그러다 멀리 우리들을 발견하고, 쫓던 사람은 팽개치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놀라고 당황하여, 즉각 지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큰형과 둘째형이 뒤를 이었고, 아우 또한 뒤를 이었다. 우리들은 백여 걸음을 달린 후에야 멈추었다. 이리하여 처자식과 헤어졌고, 그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교활한 병사들이, 사람들이 다들 숨어버릴까 걱정하여 거짓으로 소리쳐 사람들을 속이기를, 순순히 나오는 자에겐 安民符節(안민부절 ;부절이란 일종의 증표)을 주고 건드리지 않는다, 더 이상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그러자 숨어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튀어나와 그들을 따라가는데, 다 모이니 오륙십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 부녀자가 반이었다. 둘째형님이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고작 네 사람이니, 만약 흉폭한 병사라도 만나게 되면, 요행을 얻기 어려울 터, 저 사람들 떼에 묻어감이 낫다. 그러다 보면 도망치기도 더 쉬울 것이고, 설사 불행을 당한다 해도, 우리(형제)가 생사를 같이 함이니, 한스러울 것이 없으리라.”
이 당시, 우리는 죄다 마음이 어지러워져, 그 외의 목숨을 구할 좋은 방책을 찾을 수 없었고, 예예 다들 동의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도 나와서 사람들을 따라갔다. 우리를 호령하는 사람은 세 만주병이었다. 이들은 먼저 모든 사람들의 재물부터 뺐었다. 나의 형제들은 죄다 탈탈 털렸고, 나 한 사람만 (그들이 빼먹어서) 수색을 면했다. 갑자기 부인네 중에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나의 친구 주서(朱書)兄의 두 첩실이었다. 나는 급히 그들을 제지했다. 두 첩실은 모두 머리카락이 흩어졌고, 살이 밖으로 드러났고, 발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무릎이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중 한 첩실은 女아기 하나를 그때까지도 안고 있는데, 만주병이 발각하고서, 채찍을 휘둘러 아기를 때리고는 뺏어서 진흙탕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그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병사 하나가 칼을 빼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병사 하나는 긴 창을 가로쥐고서 뒤에서 몰고, 병사 하나는 중간에 자리잡고 사람이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십 사람을 마치 양떼를 몰 듯, 조금이라도 주춤대면, 즉각 채찍질이요, 혹은 바로 죽여버렸다. 부녀자들은 긴 밧줄에 목이 매이어 줄줄이 구슬이 꿰어진 듯하고, (발이 작으므로) 한 발 걷고 한 번 넘어지고, 온 몸이 진흙투성이였다. 거리에는 온통 버려진 아기들 천지인데, 혹은 말굽에 짓밟히거나 혹은 사람 발에 밟히거나 하여, 肝腦(간뇌)가 쏟아져 온 땅을 덮을 지경이고, 울음소리가 온 들을 가득 채웠다. 개울 하나와 못 하나를 지나는데, 그 안에 시체가 쌓였고, 팔다리가 서로 포개졌고, 핏물이 흘러들어가 물빛이 울긋불긋 대여섯 갈래가 되었고, 못은 시체로 메워져 평평해졌다.
사람들은 어느 집 대문 앞에 이르렀는데, 원래 정위(廷尉) 영언요(永言姚)公의 거처였다. 후문으로 들어가니, 저택 깊숙하니 곳곳마다 시체가 있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구나. 구불구불 더 나아가 앞채에 도착하여, 도로로 나가서 다른 주택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서양상인 교승망(喬承望)의 저택이었다. 이곳이 바로 세 병사의 소굴이었다.
문을 들어가니, 병사 하나가 보이는데, 미모의 여자 몇을 지키면서 광주리에 산처럼 쌓인 색무늬비단 의복을 뒤적이다가, 세 병사의 도착을 보고는 으하하! 웃었고, 우리들 수십 명 남자를 몰아 후청으로 갔다. 부녀자들은 곁방에 남겨졌다. 그 방에는 탁자 두 개가 있고, 옷 匠人(장인) 셋과 중년 부인 한 사람이 옷 만드는 중이었다. 이 부인은 양주사람이었는데, 짙은 화장을 곱게 하고, 산뜻한 색의 옷이며 화려한 장식에, 웃는 말로 지휘하는 것이, 자못 득의양양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값나가는 물건이 나올 때마다, 병사에게 애걸하여 수중에 넣는데, 갖은 아양을 떠는 것이, 수치를 몰랐다. 나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이 요사스런 물건을 베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여기 병사가 훗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고려를 정복할 때에, 고려 부녀자 수만을 포로로 잡았는데, 몸을 내맡기는 자 한 명도 없었다. 어찌하여 당당 중국이, 수치를 모르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나?” 오호라, 이게 바로 중국이 大亂(대란)을 당하는 이유이다.
해설(解說)
몽고족이 중국을 정복하던 원나라 시절에 원나라는 고려의 처녀들을 징발해서 데려갔다.그리고 전쟁을 일으켜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수의 고려 여성들을 원나라의 귀족의 첩실로 만들기 위해 데려갔으나 대부분의 고려 여성들은 몸맡기기를 거부한채 자결로 항거를 했다. 몇년후 이들 고려 여성들이 고향에 돌아왔을때 이들을 일컬어서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년이라고 멸시를 했다.
나라의 힘이 약하면 상대방 국가의 침략을 받게 되고 침략을 받은 약소민족은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창녀로 팔려나가게 된다.그것은 이제까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얼마 후, 병사 하나가 한 여자를 끼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침대 위에서 여자를 강간하려 했다. 여자는 처음엔 한사코 반항하였으나, 병사의 폭압에 못 이겨 나중에는 굴복하고 말았다. 일이 끝난 후에 여자가 말하기를 :“이곳은 큰길에 가까워서 남 눈에 띄기 쉬워요. 오래 머무를 곳이 못 돼요.”병사가 여자를 데리고 다시 나갔다. 그동안 난 하마터면 발각될 뻔했다.
내가 누운 옆쪽으로 대나무자리로 만든 차폐층이 있는데, 사람 무게를 견디지는 못할 듯했다. 하지만 그걸 따라가서 들보를 잡을 수 있었고, 두 손으로 들보 위 도리를 붙잡고 기어올라, 두 발은 들보를 밟고 자리를 잡았다. 아래는 대자리가 가려주니, 들보 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잠시 후 병사 하나가 들어오더니, 창을 위로 이리저리 찔러보고는, 허공뿐임을 알고, 위에 아무도 없구나 생각하는 듯했다. 이후로 온종일 병사 한 사람도 맞닥뜨리지 않았다. 헌데 지상에선 칼에 맞는 자 그 얼마인지? 대로에 兵馬(병마) 몇이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수십 남녀의 애통한 울음소리가 뒤따랐다.
이날 비는 안 왔지만, 해도 뜨지 않았다. (칠흑 속이라)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이 되어 兵馬가 다소 줄고, 좌우로 사람들 슬피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형제들 중 이미 절반이 해를 입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큰형님은 또 생사조차 점 칠 수가 없고, 아내와 자식놈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래 찾아보자, 어쩌면 한번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형님 아우가 죽음을 당했음을 알려줘야지.
그래서 들보를 따라 천천히 내려와, 살금살금 앞거리로 갔다. 길에는 시체가 이리저리 포개져 널려 있었다. 날은 저물어 누가 누구 시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시체더미에 고개를 숙여 불러보았으나, 대답하는 자 하나도 없고 적막만 흘렀다. 멀리 남수(南首 ;지명)쪽을 보니 횃불 여러 개가 떼지어 몰려왔다. 나는 급히 자리를 피해, 성벽을 따라 달렸다. 성벽 아래에는 시체가 물고기 비늘만큼이나 빽빽이 쌓여 있었다. 몇 번을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시체에 부딪쳤다. 발 둘 곳이 없어, 넙죽 엎드려 손을 발로 대신했다. 조그만 낌새에 놀랄 때마다, 시체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한참을 그렇게 기어간 후에야 (다시) 대로에 당도할 수 있었다.
대로에는 앞 뒤 곳곳에 횃불 든 자가 대낮처럼 비추고 있었다. 나는 여러차례 멈칫멈칫 기회를 찾다가, 틈을 보아 대로를 가로질러 소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소로를 가는데 캄캄한 밤이라, 누군가와 부딪칠 때마다 서로 간에 깜짝 놀라곤 하며, 백 걸음도 안 되는 길을, 酉(유)시에 시작하여 亥(해)시가 되어서야(4시간 걸려) 둘째형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문이 닫혔고 감히 즉각 두드리진 못하는데, 돌연 부인네 음성이 들려왔다. (둘째)형수임을 알고 그때서야 문을 가볍게 두드리니, 문을 여는 자가 바로 나의 아내였다. 큰형님이 이미 돌아왔고, 아내와 자식놈이 다 있었다. 나와 큰형님은 부여잡고 통곡했다. 헌데 아직은 감히 둘째형님과 넷째의 죽음을 알려줄 수 없었다. (둘째)형수가 나에게 물었고, 나는 거짓으로 답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떻게 다행히 화를 면했는가 물었다. 아내는 말하기를 :“그 당시 병사가 쫓아올 때에, 당신이 먼저 튀고, 뒤이어 다들 튀고 나서 저만 남았어요. 저는 팽아(彭兒)를 안고 지붕 밑으로 뛰어내렸는데 다행히 죽지 않았어요. 제 여동생은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병사는 우리 둘은 데리고 어느 집에 들어갔어요. 집안에는 굴비처럼 묶인 남녀 수십 사람이 있었어요. 병사는 저를 (감시 임무를 맡은) 몇 부인네에게 맡기며 당부하기를 : ‘잘 지켜. 도망가게 하면 안 돼.’그리곤 칼을 들고 나가버렸어요. 잠시 후 또 병사 하나가 들어왔어요. 내 여동생을 끌고 갔어요. 한참이 지났어요. 그동안 안 보이던 아까 그 병사가 왔어요. 여러 부인네들을 나가게 했어요. 나와서 바로 홍(洪)할머니를 만났어요. 서로 붙잡고 여기로 왔지요. 그래서 요행히 화를 면했지요.”洪할머니는 큰형님의 처가붙이이다. 아내가 나에게 경과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주었고, 둘이 한참을 탄식했다. 洪할머니가 남은 밥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목이 메어 넘어가지 않았다.
밖에서는 또다시 도처에서 불이 나고 있었는데, 어젯밤의 갑절이었다. 나는 마음이 안정이 되지가 않아, 살그머니 집밖으로 나갔다. 근처 밭에 시체가 이리저리 포개졌는데, 아직 숨이 붙어 헐떡이는 소리도 없지 않았다. 멀리 何씨가문묘지가 보이는데, 수목이 으스스하니, 곡소리가 숲소리에 섞이고, 아비가 아들을 부르는 소리며, 지아비가 처를 찾는 소리며, 으아으아 아이 우는 소리며, 풀숲가며 시냇가며, 구석구석, 그 참혹함이 듣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둘째형님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일에, 죽음만 있을 뿐이니, 때가 되거든 제가 먼저 죽게 놔두어, 절대 당신은 연루되지 마세요. 팽아가 있으니, 당신은 앞으로 잘 처신하셔야 해요!” 나는 아내가 과단성이 있어 생사에 연연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生死 이별 앞이라, 밤새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동이 텄다.
마지막 날의 일기
초삼일(10日 중 여드레째), 양곡 창고를 열어 난민 구제에 나선다는 布告가 떴다. 나는 洪할머니와 함께 결구관(缺口關 ;地名 또는 00)으로 가서 쌀을 받았다. 쌀은 독진(督鎭 ;총사령관 사가법)이 비축했던 군량미였고,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러나 이 수천 석 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싹 없어졌다. 헌데 쌀을 지고 오가는 자 하나같이 얼굴이 엉망이고, 팔이 잘린 자 다리가 부러진 자, 온몸에 칼자국이고, 핏물이 젖어 엉겨 붙었으며, 얼굴이 온통 촛농 자국 같은 것이 줄줄 그려졌고, 옷은 너덜너덜 누더기이고, 비린내 더런내가 코를 찔렀다. 허다한 사람들이 작대기를 짚고 풀 포대를 옆에 끼고, 딱 신묘 안에 지옥에서 뛰쳐나온 원귀 꼴인데 :그나마 조금 보기 괜찮은 자라고 해도 거지꼴에 지나지 않았다. 쌀을 받다 서로 빼앗는데, 이때는 친척이고 친구고 상관하지 않으며, 강자는 받고 갔다가 다시 와서 또 받아가고, 약자는 온종일 한 되도 얻지 못했다.
초4일(10日 중 아흐레째),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도로에 쌓인 시체들이 빗물에 젖어 불기 시작했다. 시퍼런 살가죽은 몽고북 가죽처럼 되었으며, 속의 혈육 또한 썩어들어갔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거기다 햇빛에 굽히자,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전후좌우 곳곳에 시체를 불살랐고, 그 연기로 실내까지 자욱해져 안개가 낀 듯했으며, 비린내가 100리까지 뻗어갔다. 이곳 백만 생명이, 하루아침에 횡사를 하니, 아마 설령 천지 귀신이라도,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초5일(10日 중 10日째), 깊숙이 숨었던 사람들이 드디어 살그머니 나오기 시작하니, 매 상봉마다, 죄다 눈물 흘리며 한마디 말도 하지 못 했다. 우리 다섯 사람은 설령 조금 안정을 되찾긴 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집 안에 오래 있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일찌감치 밥을 먹고, 바로 야외로 나갔다. 옷차림과 꾸민 행색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난리 틈을 타 오가며 양식을 터는 자, 아마도 수십 패거리 아래는 아닐 것이다. 비록 창칼만 안 들었지, 공갈 협박하고, 재물을 갈취하고, 그때마다 몽둥이에 맞아 죽는 자가 생기곤 했다. 어쩌다 부녀자를 만나면, 희롱하고 강탈하고 겁탈을 하곤 하니, 처음엔 이것이 청나라 군대인지 양주성 방어병인지 난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날, 큰형님이 결국 부상이 심하여서, 칼에 베인 상처가 터져서 죽었다. 비통!하구나. 말할 수 없이 괴롭다. 돌이켜보니, 우리가 처음 피난할 당시에, 형님 아우 조카 나 아내 자식놈 모두 여덟 사람, 지금 고작 세 사람이 남았다. 처제들은 셈에 넣지도 않았다. 양주사람 중에 우리집 같은 집이 도대체 몇이던가? 여러 번을 죽을 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다행이겠건만 죽지를 않았다. 나와 아내처럼 요행히 살아남은 자 극소수이리라. 그러나 이 백만 천만 고뇌를 어이하리!
4월25일부터 시작하여 5월5일까지, 총 10일. 그동안 직접 겪은 바를, 직접 눈으로 본 바를, 고대로 이렇게 붓 가는 대로 적는다. 멀리 풍문에 들려오는 소리는 적지 않았음이라. 후세 사람이 다행히 태평세월에 태어나, 난리 걱정 없이 사는 복을 누린다면 ;스스로 갈고 성찰하지 아니하고, 무턱대고 삶을 낭비하는 자, 이것을 읽고 마땅히 두렵게 여겨 경계할지라!
결미(結尾)
역성(易姓) 혁명을 일으켜 왕씨(王氏)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씨 조선을 세웠을 때 많은 수의 왕씨들은 이셩계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왕씨성을 가진 귀족들을 없애 버리고 그 자손까지 숙청당할까봐 많은 수의 왕씨들은 성갈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지금의 전(田)씨와 옥(玉氏) 전(全)씨 등이 그러했다.
같은 민족끼리도 이러했을지언데 중국과 같은 이민족으로 이뤄진 나라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왜놈들이 중국의 난징을 점령했을때 보인 중국인 대학살은 눈을 뜨고 그 참상을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들이 만일 일본인이었다면 과연 그러했을까?그러나 유독 북괴의 김씨 세부자들은 동족을 학살하면서 그 피를 빨아들이는 이종(異種)흡혈귀(吸血鬼)들이 아닐 수 없다.이놈들도 악마이지만 이놈들을 추종하는 남한내의 종북 야당과 이들을 감싸주는 종교계, 언론계 사법계 등 많은 지식인들의 행태는 가히 악질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국민들은 각성해서 이런 자들을 퇴출시키지 않으면 어떤 화가 닥칠지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