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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 여행 6 - 동방의 문에서 지하철을 타고 옛 운하 마을인 싼탕지에(산당가)에 가다!
2023년 10월 25일 쑤저우역 (苏州火车站 소주화차참)에서 지하철을 타고 무두 (木渎 목독) 에 도착해
4km 교외에 있는 오래된 수향 마을 무두구전 (木渎古镇 목독고진) 을 보고 다시 무두로 돌아옵니다.
지하철을 타고는 동쪽으로 17 정거장 떨어진 동방지문 东方之门 Gate of the Orient 에 내려서
진지호 (金鸡湖) 호반에 조성된 공업원구(工业园区) 중에서도 특이한 간축물인
높이 302m 에 66층 규모의 마천루인 동양의 문 ( 东方之门 과 진지호(金鸡湖) 호수를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동방지문 东方之门 지하철역으로 내려가 자동발매기 기계에서 3위안에
표를 끊어 1호선 지하철 을 타고 8정거장 광지난루 (广济南路 광제남로) 역에 내립니다.
통로를 걸어서 지하철 2호선(적색) 을 환승하는데.... 1정거장 시루(石路 석로) 에 내려 걸을까 망설이는 중에
지하철이 출발하는 바람에 2정거장 샨탕졔(싼탕지에) shāntángjiē 山塘街(산당가) 역 까지 가서 내립니다.
만약에 처음 계획한 대로 시루(石路 석로) 역에 내렸더라면 소주국전중심 (苏州国展中心) -
북쪽으로 1블록 Jinmen Road 金门路(금문로) - 南新桥(남신교) - 동쪽
外城河(외성하) - 북쪽으로 1블록 - 산탕로 山塘路 Santang Rd 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싼탕지에(산당가) 역에서 나오니 조그만 옛날 집들이 늘어섰는데.... 어느 가게에 사람들이
엄청 긴 줄 을 섰기로 다가가서 보니 상호는 잘 안쓰는 어려운 한자라 읽을수
없어 귀국해서 판독을 시작해 보니 蟹(해)( )皇(황) 인데 가운데 글자는 끝내 읽지 못합니다.
가운데 글자는 선비 사(士) 와 집 멱(冖) 과 사람다리 인(儿) 의 합자인 팔 매(賣) 의 약자(略字) 인
(売) 인 것도 같으니..... 그렇다면 이 글자는 사서 재어둔 물건을 내다 판다는 뜻이니
얼추 맞지 싶지만, 하지만 매(賣) 자의 간체자는 매(卖) 이니 전혀 달라서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래서 뭘 파는 집 인데 이렇게 줄이 엄청나게 길게 섰을까? 하도 궁금해서
바짝 다가가서 살펴보니 무슨 고기 만두 를 파는 집이 아니지 모르겠습니다?
그라고는 바로 그 옆에 울 마눌이 반색 을 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있으니 빡센 여행이 심신이 다
지쳐 파김치 가 되어도 여기만 발견하면 눈에 생기가 돌고 힘이 나는 곳이니 바로 재래 시장 입니다.
마눌을 따라서 좀 어두운 재래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참으로 큰 채소 및 과일 시장
인데 주부들이 엄청 몰려와서 활기를 띄는 곳이니 물건도 싱싱하고 값도 싸니
많이 팔리는데.... 여기 衣发新民桥市场 (의발신민교시장) 에서 감자와 콩나물 을 삽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 조금 걸어내려 오니 운하 옆 거리 에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 인데.... 우린 도로를
건너 칠리산당 특별전시구역 이라는 커다란 입석 간판을 지나 산당 경구 30m 간판을 따라 내려
가니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데, 운하 양쪽에 검은색 기와에 벽을 흰색 으로 칠한 집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많은 가정집들이 운하쪽으로 돌계단 이 나 있으니.... 그럼 베네치아 처럼
예전에는 자기 집에서 바로 배를 타고 운하 를 통해서 다른 도시로 이동했는가 봅니다.
강남지방의 운하 지역은 예로부터 수천년간 주민들의 주된 이동수단은 운하를 운행하는 배 였는데
세월이 흐르고 근대화, 현대화가 되다 보니 이제는 차량이 대신하게 된 것이지요? 검은색
옷을 입고 베레모 를 쓴 여인이 운하를 넋을 잃고 바람 보는 뒷 모습은 한폭의 수채화 이지 싶습니다!
그러고는 운하 뒤편에 골목길 을 걸어가는데... 중국이야 인구가 많으니 어딜 가든 복잡하지 않은 곳이
없다지만 정말 이 거리는 관광객 홍수 로 넘쳐 흐릅니다. 운하에는 관광객을 태운 배가 보이니
조금 전에 무두고진에서 본 사공이 노를 젓는 나룻배는 아니고..... 모터로 운행하는 배 인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내려가니 작은 홍예교 다리 가 보이는데..... 배가 그 아래를
통과 해야 하는지라 당연히 가운데 부분을 높게 반원형 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모든 집들의 벽이 흰색 페인트로 칠했는데...... 저 흰색은 특히 운하 같은
물가에 또 음식 가게들이 밀집한 거리에서는 때를 많이 타니 다른 색으로 칠할만도
한데 한결같이 휘주 양식인 흰색 인 것을 보면.... 무슨 제약 이 있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리 위에서 운하 를 내려다보니 높은 곳이라 그런지 잘 보이는게 풍광이 좋은데, 운하를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 보다가 문득 1500여년 전에 이 운하를 거쳐갔을 대가야 사신들 의 모습니 떠오릅니다.
479년 대가야 하지왕 은 중국 남조의 제나라(南薺)에 사신 을 보냈으니 남제를 세운 황제 소도성(蕭道成) 의
등극을 축하하고, 상호교류의 물꼬를 틔우기 위해 난징으로 향했던 것이니 섬진강 하구 를 통해 남해로
나온 사신들은 해안선을 따라 서해(黃海)안으로 올라간 뒤 태안반도 인근에서 중국 대륙으로 직항했습니다.
황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산둥반도의 청산지아오 (成山角)에 도착한후 다시 동쪽 해안선을 타고 내려가서
양쯔강(揚子江) 하구 를 통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 여기 쑤저우를 거쳐 난징 으로 들어갔는데 쑤저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딴양(丹陽)시 는 남제(南薺) 황제인 샤오(蕭 소)씨 들의 고향이자 이들이 묻힌 지역입니다.
그러나 남제는 주로 백제 와 교류했으니.... 난징대 역사학과 장 교수는 남조와 백제 무덤의 공통점으로 횡혈식
(橫穴式) 돌방(石室)등 무덤 양식, 벽체의 직렬 축조와 등잔(燈盞)을 놓는 자리 , 연꽃(蓮花) 문양이 그려진
벽화 등을 꼽았는데 대가야 후기 무덤도 중국의 영향 을 받은 것으로 보이니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등 입니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 에 쓰인 안료 는 한반도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중국 호남성과 귀주성
에서 나오는 것으로 중국으로 부터 직접 들여온 문물로 보이는데..... 대가야는
한차례, 백제는 10여차례 그리고 고구려는 30여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책봉 을 받았습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동아일보에 “ ‘대국’ 꿈꿨으나 외교력 맹신에 몰락한 대가야”
라는 글을 썼으니 고려 중엽인 1145년 김부식이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사기를
쓴데 대해서.... 학계 일각에서는 삼국시대론을 비판 하며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론 을 주장합니다.
대가야, 소가야, 금관가야, 아라가야 등 가야 여러나라가 6세기 무렵까지 엄연히 존재했고, 대가야 경우 국제적
외교 무대에서 활약 했으니 대가야가 두각을 나타낸 시점은 5세기 후반인데, 그 무렵 백제가 고구려의 침공
을 받아 위험에 빠지자 대가야는 백제의 후방을 공격해서 섬진강 및 금강 상류 지역을 차지 했고 그 여세
를 몰아, 금관가야가 400년에 고구려에 망해 왜국으로 도주한 탓도 있고 해서 가야 맹주의 지위 를 차지합니다.
강국이 되려던 대가야 꿈 은 한세대가 지나지 않아 위기를 맞았으니 백제와 신라가 대가야를 견제 하며 공세를
펴자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니 (마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가 폴란드를 3차례에 걸쳐 사이좋게 찢어서 나눠 먹은 것과 유사합니다), 대가야의 꿈도 물거품
이 되었는데..... 다만 근래 발굴되는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만이 사라진 왕국의 안타까운 이야기 를 전해줍니다.
고령 지산동 32호분 에서 출토된 대가야 양식 금동관 을 보면 대가야 지배층도 신라나 백제 처럼 위세를 드러
내기 위해 귀금속 장신구를 만들었음을 보여주는데.... 5세기후 대가야는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연맹 을
이끌게 되니, 구원(舊怨)이 있던 백제와 신라가 국혼을 통해 동맹을 맺음에 따라 백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가야도 신라와 가까워졌으니 5세기초 가야 고분에서 백제와 신라에서 들여온 귀중품이 쏟아집니다.
475년에 이르러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평화를 깨는 전쟁이 벌어졌으니 고구려 장수왕의 대군이 백제의 왕도
한성을 공격해 함락 시킨 것으로 신라는 군사 1만을 보내 구원하였지만, 대가야는 그기에 동참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했으니..... 남원 운봉고원을 차지한데 이어 무주, 진안, 장수 등 금강 상류로 진출했는데,
대가야 영역에 편입된 전북 동부지역 곳곳에 큰 고분군 이 만들어지고 대가야양식 물품이 다량으로 묻힙니다.
대가야는 평소 눈독을 들이던 섬진강 하구 를 장악하니 국제무대로 나아가기 위해 항구 를 손아귀에 넣은 것
인데, 여수 고락산성, 순천 운평리 고분군 등에서 고령산 토기와 함께 현지에서 만들어진 대가야 양식 토기
가 다량 출토되는데.... 자신감을 얻은 대가야는 중국 남제(南齊) 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보국장군본국왕
(輔國將軍本國王)’ 이라는 작호를 받는등 위세를 떨치니 그때 수입한 남제 청자가 가야 유적에서 발굴됐습니다.
하지만 대가야의 위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6세기 초 왕위에 오른 백제 무령왕과 신라 법흥왕 은 대가야
를 가만히 두지 않았으니.... 무령왕은 5세기 후반 상실한 백제의 옛 땅을 수복 했고, 법흥왕은 낙동강을
건너 가야 여러나라를 복속 시켰으니 두 나라의 공세에 가야 연맹은 동요했고 대가야의 위상은 흔들렸습니다.
다급한건 함안의 아라가야 였으니 신라의 공세가 강해지자 외교를 통해 자구책 을 마련하려 했고 529년 함안
에서 개최된 안라회의(安羅會議) 인데, 아라가야는 백제와 倭國(왜국) 의 힘 을 빌려 신라를 압박했지만
기대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려져 있지않으나 대가야는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신라의 팽창을 우려한 백제 성왕 은 541년과 544년에 가야 각국의 유력자들과 倭國(왜국)
의 사신을 수도 사비성 으로 불러 회의를 진행했지만 각 나라마다 생각이 달랐기에
회의는 큰 성과 없이 끝났는데, 2020년 부여 쌍북리에서 발굴된 백제 대형 건물지에서
대가야 토기 조각 여러점이 출토되었으니 사비 회의때 대가야 사람들이 남긴 흔적 일 수 있습니다.
백제 성왕이 전사 하는 554년 7월 관상성 전투 에 보면 백제 왕세자 부여창은 대가야군과 모노노베노
마가무와 츠쿠시노 쿠니노미야츠코가 이끄는 왜군 을 포함해 3만 대군을 동원해 충북
옥천의 신라 관산성을 공격했는데 성왕이 이를 격려하기 위해 가다가 매복한 신라군에게 죽게됩니다.
신라는 대가야에 앙심 을 품게 되었고..... 결국 562년 9월 진흥왕은 대가야가 신라를 배반 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사부에게 공격을 명했으니, 화랑 사다함 이 5,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가야 왕성의 문으로 달려가 흰색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고 이사부가 군사 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했다고 합니다.
한때 한반도 남부를 주름잡으며 스스로 大王(대왕) 이라고 칭한 ‘큰 가야’ 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신라군의 위세에 눌려 항복 한 것이니 최후의 날에 보여준 대가야 모습은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 보다 외교력에 의존하여 생존하려 한 잘못된 판단 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지산동 산정의 거대한 무덤들은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대가야의 왕궁도 폐허로 변했습니다.
1992년 동해 추암동 신라 고분군 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 가 나왔고, 2003년 삼척 갈야산 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
가 발굴됐으니 동해와 삼척에서 대가야 양식 토기가 발굴된건 대가야 유민의 ‘강제 이주’ 에서 찾습니다.
우리나라는 5천개 성씨 중에 상위 30개 성이 전체 인구의 50% 를 차지하며 나머지 4,970개 성이 50%
로 일부 성씨에 편중된 특이한 구조인데, 신라계가 대부분이고 김해김씨등 가야계가 일부 있으니...
고구려가 망하고 주민 대부분이 중국에 잡혀간 탓에 오늘날 한국의 성씨 30개 대성 중에 고구려계는
진주 강씨 하나이고 그외 신천 강씨와 횡성 고씨등 서너개에 불과하니 亡國(망국) 이란 그런 것 입니다!
다른 성씨들이 1~5만에 불과한데 비해 97만으로 대성인 진주 강씨(晉州姜氏) 의 시조는 고구려 영양왕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으로, 후손 강진이 진양후에 봉해져 관향을 진주로 삼은데서
기인한다는데....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니 실존여부가 논란이 되는데, 강씨
족보에는 주(周) 나라를 세운 강태공의 자손 천수강씨(天水姜氏) 의 지파 광동강씨(廣東姜氏) 라 합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한후 사비성과 웅진성의 백제 왕족과 귀족에 상류층 1만 3천 을 붙잡아간데 이어
고구려인들도 1차로 이적이 20만명 을 잡아가니 장안까지 끌고가 일부는 신하들에게 노비 로 주고
3만호(15만명) 는 실크로드 오르도스 에 추방했으며, 또 일부는 전쟁에 참가한 거란족에게 전리품
으로 주니 영주 로 잡혀갔고, 나머지는 강남의 숲속에 처박아 농노 로 부렸는데..... 훗날 중국이
혼란에 빠지니 일부가 남쪽으로 도망쳐 미얀마 국경에 라후족과 아카족에 이수족이 아닌가 봅니다.
로마가 카르타고 를 함락한후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은 모두 국제 노예시장 에 팔아버렸으며,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후 10개 부족 을 시리아와 터키땅으로 잡아가 후손은 없어졌고, 신바빌로니아
도 유대를 멸망시킨 후에 그들을 메소포타미아 로 잡아 갔는데, 현지에 주민들을 남겨두면 먼 훗날
반란 을 일으킬까 염려가 되는지라 망국의 백성들은 연고가 없는 먼 곳으로 강제 이주 를 시키는 것 입니다.
이때 선녀 옷 처럼 생긴.... 그러니까 아마도 송나라시대의 의복 이지 싶은데 아주 하늘하늘하게
얇은 천으로 만 듯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는데 근처에 옷을 빌려주는 집 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러고는 조금 더 운하 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이제 상점들은 없어지고 그냥 조용한
주택가 가 나타나는데..... 그냥 주민이지 싶은 학생들 대여섯명이 올라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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