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날의 반가사유/박숙경-
봄의 꼬리엔 몇 개의 시샘이 따라다닌다
다 부러워서 그러는 것
눈앞이 뿌연 것도
바람이 갈지자로 걷는 것도
동진강 물결이 반짝이는 영농조합법인 앞마당
색색깔 옷을 입은 몇 대의 트랙터
나란히 가부좌를 틀고 꽃과 눈을 맞추고 있다
저 덩치들을 불러낸 것도
떠받치고 있는 것도
연두가 밀어올린 노랑이려니
냉이꽃이 돌멩이를 떠받치고
유채꽃은 트랙터를 떠받치고
세상을 떠받치는 힘이 작고 여린 것에서 나온다는
아주 시적인 순간을 사적으로 지나가는 유혈목이
멈칫 물러선 걸음 위로
참새 몇 마리 포르르,
보리밭 쪽으로 날아가고
<2>-이월/박숙경-
청머리오리 수컷이 물속으로 부리를 꽂고 궁둥이를 치켜든다
앞발은 물속을 뒷발로는 바깥을 휘젓는다
artistic swimming
허공이 잠시 흔들린다
한 바퀴 돌 때마다 태어나는 파문의 자세는
butterfly
아름답다, 라는 말은 절실한 순간에 태어난다
돌 위에서 볕을 쬐던 흐린 갈색의 암컷이 뛰어든다
솔로에서 듀엣으로 종목이 바뀐다
바람의 노래는 크레셴도 데크레셴도
우아함을 유지하면서 점점 난이도를 높인다
우수(雨水) 근방에서 물구나무선 저들의 자세
간절함이 자라면 경건함이 될까
살얼음판 위에 벗어둔 하루 위로 고단한 바람이 지나간다
<3>-절룩/박숙경-
절룩절룩 책 부치고 오는 길
접질렸던 왼발에 무게가 더 실려요
시든 장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요
쌍둥이 중 한 아기가 손가락을 빨아요
나의 절룩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엔 결핍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공원 벤치에 노인 몇 나란히 앉아
폭염보다 더 뜨거운 고독을 뜯어내는 중이에요
고독은 삼각형, 꼭짓점은 무엇이든 끌어당겨요
어디선가 달려온 소낙비 한줄기 넘어지고
절룩이 모여 여름을 견디는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면
절룩을 감추고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걸어요
아직 꺼내놓을 용기가 내겐 없는 거죠
절룩을 앓기 전엔 누구의 절룩도 보이질 않았어요
나의 절룩을 내가 읽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절룩이라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걸
수많은 절룩 속에서 깨닫는 오후예요
화단의 치자꽃이 마지막 향기를 토해요
잠시 절룩을 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요
<4>-행운권 추첨/박숙경-
꽃이라는 말 ⃰이 왔다
갈기도 없는 푸른 말을 타고 달리면
꽃이 입이고 입이 꽃인 어떤 말을 만날까
맥주를 마시는 이들과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섞여 있다
인연이 되고 안 되고는 별일이 아닌 어스름을
어둑하게 바꾸는 사람들, 그러므로 함께
주머니 속 별을 꺼내 상화나무 ⃰ ⃰ 가지 끝에 매단다
기타 소리 노랫소리를 뚫고 스미는 이 막막함은 무엇일까
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馬과 말言사이
관계와는 먼 사람들의 말이 둥둥 떠다니는 밤
나 같으면 골든벨 울리겠다는 말
눈치는 또 빨라서 얼른 그 말을 주워 든다
오늘의 행운 값을 지불한 셈이다
매천시장역 입구에서 달무리에 든 초승달과 마주쳤다
곧 봄비 드시겠다
* 유건상 조각가의 작품
** 상화 생가터 라일락뜨락1956에 있는 이백 살 넘은 라일락 나무
<5>-그리하여, 숲이라 말하는/박숙경-
고물상들이 떠나간 후 그곳이 되었다
하늘은 유월 장마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가지를 옮겨 다니는 직박구리 목청이 경쾌해지자
특별한 바람이 등 뒤로 지나간다
오솔길이 넓은 길로 바뀌고부터
길은 심심하다는 말을 잊어버린 듯했고
길 가장자리에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는 습관이 사람들에게 생겼다
맨발로 걷는 일이 의식 같고 고해성사 같다
나도 어떤 무게인가를 벗어 저들처럼 얌전히 놓고
그늘과 햇살을 골고루 밟으며 걷는다
쥐며느리가 죽은 쥐며느리를 흘깃 보며 지나가는 일
발에 닿은 성질대로 순하기도 까칠하기도 한
이런 기분들을 신 대신 신어보는 일
사람들이 오래된 표정을 벗은 것처럼 걷는다
넝쿨장미 향기와 까치 발자국과 줄지은 개미와 떨어져 밟힌 오디는
서로 수혈을 하는 중이다
함지산 기슭에서 건너온 검은등뻐꾸기 소리와
직선으로 꽂히는 햇살이 함께 흔들어보는 나뭇가지
줄사철 아래 메꽃은 며칠에 하나씩 연분홍 식구를 늘이고
<6>-어깨너머/박숙경-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등잔불처럼 구석에서 가물거리는 말
가만히 있어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깨
그 너머에 약간의 다정함
또는 친절함
아이들 어깨너머로 컴퓨터를 익혔다
어깨너머, 물렁한 말들을 좋아해서
자주 물렁해졌다
불린 쌀을 꼭꼭 씹어 막냇동생 입에 넣어주던 할머니의
어깨너머를 배워 할머니의 손발톱을 깎아드렸다 딱딱해진
것들이 밖으로 자라는 것 같았다
돌부리를 차 시커멓던 발톱이 빠졌던 유년이 내 어깨너머
일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하나씩 물어보며 워드를 익히던 일은 아이들
유년의 어깨너머일 것이다
되짚어가는 일이 더 많아
돌아보면 늘 거기에 서 있는 사람
어깨너머일 것이다
푹풍전야, 지금은
오늘의 어깨너머가 깨질 듯이 고요하다
<7>- 살구가 떨어져/박숙경-
하늘이 가벼워진 이유는
늙은 별을 내려놓듯 밤새
볼이 불콰한 살구 몇을 버렸기 때문
밤이 툭툭 터지는 바람에
놀란 쥐똥나무 꽃이 가득 뛰쳐나온 길을 걷다 보면
고향 집 뒤꼍으로 이어질 듯
참한 살구나무가
장독대 건반의 도, 레, 미를 손가락 끝으로 짚을 때마다
반음씩 굵어지던 살구
살구가 시큼 달콤 구르고 굴러 새끼들 입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할머니의 채근은 아침으로 바뀌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떨어져 애틋한 살구를 굽어보는 오월은 다정합니다
양손 가득 공손히
모셔온 살구는 할머니와 항렬이 같고요
시큰둥해지면 어디 에이드에 댈까요
잘 친 사기처럼 뺀질뺀질하게 최대한 말랑말랑하게
그러다 보면 몇 알의 달콤한 문장이 살구를 따라 발효
되고요
바람 없이도 때가 되면 살구가
나뭇가지를 건너오듯이
나를 건너온 한 편의 시가
또 다른 나를 불러 다정하더라는 것, 요즘 알아가는 중
이에요
<8>-감포종점/박숙경-
추령재를 지나면서부터야
포구에 닿으면
나머지 몸무게 절반이 또 사라지지
온 바다가 내 것인 양 풍선처럼 들떠 읍내를 통과해야
하네
감포종점은 그렇게 있지, 문득
막 고개를 돌리면 거의 지나쳤음을 아는 곳
밤이 깊어야 했지만 분명 한낮이었고
나도 모르게 마포 종점이 입술을 빠져나왔네
있을 리 만무한, 갈 곳 없는 밤 전차를 호출하는 사이
바쁜 자동차들은 녹슨 간판이 걸린 다방 거리를 지나쳐
가네
불행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 눈에 담긴 무수한 기다림도 읽지 못했네
차들은 수평선 쪽으로 자꾸 달아나네
― 이다음 내가 지나가는 사람이 되면 궂은비 정도는
내려주겠지
포구 맞은편,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 구석진 자리 물 날
린 비로드 의자 위에 쓸데없이 명랑해지는 엉덩이를 주저
앉히고 퀴퀴한 냄새 따윈 모른 체하며 늙은 마담의 주름
진 손으로 건네는 칡차나 마시면서 연락선 뱃고동 소리가
얼마나 서글픈지 들어보고 싶었네*
우연히 눈에 든 종점을 생각하면
첫사랑 하나쯤은 있어야 될 것만 같았네
어디서 나처럼 늙어가지 싶은,
*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변용
<9>-비산동 그, 집/박숙경-
왼쪽 머리카락이 몽땅 잘린 딸아이가 돌아왔다
웃다가 들킨 낮달 혼자만 바깥에 세워두고
문고리도 없는 미닫이문을 닫고서
집주인도 아닌, 내가 서러워 괜한 말을 마구 쏟아냈다
화난 엄마가 처음인 듯
아이는 다섯 살처럼 울었고
울던 울음을 낚아채고 주인집 여자가 자기 딸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집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집에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돌보며 마늘을 까거나 알밤
을 깎거나 우산을 꿰매거나, 가만히 놀지는 않았다
비산동이지만 가난했고 날개가 없었지만 자주 모여 밥
을 비벼먹기도 했다
가끔은 없는 사람의 뒷말들이 귀신처럼 골목을 기웃거리
기도 했지만
온여름 혈서만 쓰다가 열매 하나 매달지 못한 석류나
무가 작은 마당을 지키던 집, 연탄아궁이 하나에 찬장 하
나가 전부였던 부엌, 연탄재를 들고 청소차를 따라가다
엎어졌는데 아픈 곳 하나 없는 기억, 마당 수돗가에서 비
맞으며 설거지와 빨래를 해도 손 시리지 않던, 지금은 희
미해진 동네가 있었다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이제 겨우 미안하기도 한
<10>-폭염의 나날/박숙경-
합동 조사 결과는 늘 사실을 재확인하는 정도
두루뭉술, 새로울 것 없는 뉴스를 생산한다
벚나무 가지의 매미 같거나
다시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척하거나
사람이어서 미안할 때가 많다
서로가 납득할 수 없는
이전과 이후
'묻지마'를 단 사건들이 줄지어 태어난다
그럴 때마다 탄생하는 수많은 미봉책들
긴 장마와 유례없는 폭염을 주범으로 지목할 뿐
떨어지는 땀방울 위에 둥둥
떠다녀볼까, 함께 미쳐갈까
죽으라는 법만큼이나 뜨거웠던 날들이
달력의 입추라는 작은 글자에 잠시 기댄다
태풍도 가끔은 북쪽에서 온 바람에 막힌다
젖어 퉁퉁 분 마음을 난간에 널어 말려야겠다
<11>-여름 저녁/박숙경-
마른 화분에 물을 주다가
문득 내다본 바깥이
해거름일 때
엄마 손에 잡혀 들어가는 아이의 눈빛이
그네의 시간을 흔들 때
텅 빈 그네가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을 때
어디든 상관없이 해거름처럼 버는 괭이밥에 괜히 신경
이 쓰일 때
태복산 쪽 하늘이 먼저 붉게 글썽인다
텔레비전은 마침맞게 경포대 저녁놀을 배경으로 깔고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김창완을 내놓는다
기타를 치며 부르는 너의 의미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참 대단해 작사 작곡 노래에 기타
까지
그러던 참인데 윤도현이
나의 하루를 가만히 닫아주는 너
옷을 여민다
소낙비 같다
<12>-소만과 망종 사이/박숙경-
센트럴파크와 더 휴 사이
숲길
바닥이 가맣다
물러터진 기억과 숲길을 걸으면
고치를 팔아서 밀린 공납금을 내던 젖은 발자국이 찍힌다
직박구리가 발자국을 물어다
칠엽수 가지 끝에 올려놓은 것을 볼 땐 이슬비가 내린다
한입 가득 오디를 머금으면 몸으로 번지던 노린재 냄새
어느새, 흩어진 기억의 발치에 서 있는 여름
쥐똥나무와 넝쿨 장미 사이에서
아주 먼 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본다
한쪽으로 더 기울어진 세상에서
비스듬히 바칠 추억 하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어
시간을 뭉개어 발자국으로 쓰고 있다
<13>-해국/박숙경-
날도 추워지는데
그 자리에 그냥 앉혀두고 왔습니다
입술 깨물던 모습 밟혀 아픈데
차마 손목 붙잡고 돌아오질 못했네요
파랑이니 격랑이니 하는 것들이 떠오르고
아득히 먼 돌밭길과 가시넝쿨 보여도
신발 한 짝 벗어 주질 못했습니다
해파랑길,
울컥이는 그녀 곁에 쪼그리고 앉아
눈시울 붉어진 얼굴만 종일 들여다보고 싶다는 말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돌아왔지요
때로는 출렁거림보다는 고요라는 말이
마음 구석구석 물살을 일으키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 물살에 떠밀려 주춤거리기만 할 뿐입니다
눈을 감아도 수평선이 보이고
귀를 닫아도 바다의 노래가 들리는
당신의 나라가 늘 궁금할 것 같습니다
<14>-오월이 저리 푸르다/박숙경-
밤 깊어 세상 사물들 잠이 들면
무논을 빠져나온 개구리 울음
추억이란 말은
논둑처럼 그리움을 가둔 울타리이기도 해서
서러움의 또 다른 울음보로 부풀곤 해서
모두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울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그리움으로 간절해서
밤하늘엔 별 뜨고 달은 또 저리 밝아서
<15>-사문진 일몰/박숙경-
손닿을 수 없는 저기쯤에
사무치는 이름 하나
붉게 글썽이면
하루의 파문을 접은 물새들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경, 그저 아득하기만 해서
오늘은 사문진에서만 해가 저문다
<16>-꽃샘/박숙경-
빨래를 널다 말고,
막 벙글어지는
봉오리를 직박구리가
쫀다, 안돼!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있다
느닷없는, 목구멍에 걸린 나는
꽃 편에 서야 하나
새 편에 서야 하나
가지에 앉은 새까지 목련이라 쳐줄까
어디는 폭설이라는데
오는 둥 마는 둥 찔끔거리는 저, 비까지도
폭설을 품은 목련이라고 불러줄까
애타지 않으면 봄이 아니지
저 멀리 비로봉 이마가 희끗하다
우산 든 손끝이
목련 봉오리처럼 시리다
<17>-독거/박숙경-
동명항 낚시 집 앞
졸린 눈 비비고 나온 마알간 햇살 한 줌
텅 빈 어깨에 소리 없이 앉는다
발그레, 플라스틱 의자가 웃는다
무릎 위 앉은 비둘기 깃털을 만지는 노인
파랑의 시간을 쓰다듬는 떨리는 손가락 사이로
불쑥 치미는 그리움들
짙푸른 바다가 동공 속 얼룩을 흔든다
목 쉬었던 기억과 삶의 해진 문장을
자꾸 던져놓고 달아나는 파도
접었다가 펼쳤다가
듣거나 말거나 찔끔찔끔 지난날이 새어나오거나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옷깃을 여미는 사람을
음이월바람이 슬프게 지나간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파도들이
입 안 가득 갇혀 있다
<18>-그래서, 내가 있습니다/박숙경-
물고기가 자라납니다
팔거천은 어제보다 오늘 더 자랐습니다
어린 새가 나뭇가지를 건너다니며 지저귈 때마다
꽃은 피고 세상은 더 환해집니다
한 뼘씩 그늘을 넓혀가는 칠엽수를 안은 햇살을 사랑합니다
건듯 건듯 어깨를 지나는 바람을 사랑합니다
오후 볕을 핥는 열여덟 살 고양이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범람이면 팬데믹을 건널 수 있을까요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간절함처럼
별빛을 당겨오는 일도 오래도록 간절해서
늘, 우리를 꿈꿉니다
기다림이란 말에 이미 익숙하지만
꽃 울고 새 피면 다시 주저앉고 싶어져서
더 그래서, 뜨거워지는 가슴으로
낯선 길엔 내가 있기도 가끔은 사라지기도 합니다
돌담에 기대어 가물거리는 산 너울을 보면 눈물이 나서
이화우(梨花雨) 흩날리는 돌배나무 그늘이 하 좋아서
오늘도 어느 골목길 모퉁이에 나는 있습니다
<<박숙경 시인 약력>>
*1962년 경북 군위 출생.
*2015년 계간 《동리목월》 여름호 신인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2016년 대구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2021년 대구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시집 『날아라 캥거루』,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현재 〈시하늘〉편집 운영위원, 대구시인협회 회원, 은시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