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세대 컴퓨터(IC)
PC의 서곡 - 전자계산기의 등장
가. IC의 탄생과 제3세대 컴퓨터
1959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의 잭 킬비가 게르마늄칩위의 최초의 게르마늄저항기와 축전기를 포함한 서너개의 중요부품을 집적하는데 성공했다. 킬비는 칩위의 부품들을 미세한 금선으로 상호연결 시켰는데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 직접회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밥 노이스는 여기에다 칩의 윗표면에 절연실리콘 산화물층을 입혔는데 이를 평면처리 라고 불렀다. 그 다음에는 사진처리 공정으로 산화물위에 가는 금속선을 프린트해 칩위의 부품들을 결합시키는 기술을 사용했다. 처음에 새로운 사진평면처리방식을 통해 단일 칩위에 2, 3개의 부품을 집적하는데 성공한 노이스와 동료기술자들은 그 수를 백여개에서 천여개로 점차 늘려 나갔다. 단 한개의 트랜지스터가 있던 면적에 오늘날에는 백만개 이상의 부품들이 들어차 있는데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회로가 복잡해진 역사를 살펴보면 노이스와 함께 인텔사를 창립했던 고든 무어가 실리콘에 집적시킨 트랜지스터의 수는 18개월마다 두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 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법칙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3세대 컴퓨터는 부품들이 소형화되었는데 각 부품들은 선을 사용해서 연결하기보다는 하나의 부품에 새겨 넣기 시작했으며, 수정 구조체가 진공관이나 트랜지스터를 대신하였다. 자기잉크 문자판독기(MICR : Magnetic Ink Character Reader), 광학문자 판독기, 그리고 보다 빠르고 대용량의 기억장치들이 이후 3세대 컴퓨터들로 하여금 데이타를 조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외에 제3세대에 개발된 중요한 발명품으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입출력을 가능하게 만든 통신채널의 사용과 이전에는 사람에 의해 조작되었던 여러 작업들이 자동화된 다양한 다용도의 소프트웨어들이 있다. 1960년대 중반의 컴퓨터 기술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는 집적회로(IC : Integrated Circuit)이다. 집적회로는 단일 부품으로 생산되었는데 그 안에 여러개의 부품을 모아 단일 품목으로 만든 것이다. 집적회로는 실리콘(Si)이나 게르마늄(Ge)에 얇은 막을 입힌 칩(chip)으로 생산되는데 골무만한 크기에 10만개를 집적시킨 것이다. 집적회로는 신뢰도가 매우 높은 반면에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쌌다. 초기의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컴퓨터들은 기술 면에서는 매우 발전하였으나 컴퓨터 상호간에 호환성이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한 종류의 컴퓨터를 사용하던 사용자는 기종이 바뀜에 따라 그들의 프로그램을 재작성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특정 컴퓨터를 위해 고안된 보조장치들은 다른 컴퓨터에서는 사용될 수 없었다. 사용자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보조 장치들이나 프로그램들을 상호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들의 모임으로서의 컴퓨터 시스템이다. 2차대전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의 발전에는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첫째로 무기의 대량생산과 아울러 정확한 무기의 필요성이 절박해졌고 정확성을 보장해 주는 고성능의 컴퓨터 개발은 어쩌면 당연한 요구라 할 수 있었다. IBM이 컴퓨터업계에서 줄곧 수위를 지켜 온 것은 특별히 IBM의 제품이 우수해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탁월한 marketing전략과 훌륭한 사후 service때문이었다. 그리고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선두자리를 지키도록 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IBM은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다 시장을 넓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필요가 있었다. 그 첫번째 조건은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 가격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IBM 360 System의 탄생
1961년 여름, IBM은 순조로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955년 이래 판매고는 연 16%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컴퓨터 산업전반에 걸친 문제들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커지고 있었다. 이는 컴퓨터 전문지식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기업체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컴퓨터 사용자와 기업들에게까지 불만이 커져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그 가격이 매우 비싸 구입보다는 임대형식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신뢰성이 떨어지며, 지나치게 비싸고, 미숙하기 짝이 없고, 경직되어 있으며, 유지가 어렵고, 재사용이 불가능이 불가능하다는 것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것이 더 많았다. 사용자가 결국 사용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으로는 매년 10여 개의 새로운 언어가 개발되었다. 이중에는 파스칼, C, 에이다(Ada) 등과 같은 표현능력이 탁월한 언어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라는 방식을 구현한 스몰토크, C++, 시뮬라 등이 그것이다. IBM 특유의 전략이 시작되었다. 회장 토마스 왓슨 2세와 빈센트 리어슨 신제품 개발담당이사는 IBM의 개발담당부서 담당자들에게 과제를 주었다. IBM 컴퓨터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전략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60일동안의 통제속에서 원자폭탄 개발비용의 2배나 되는 SYSTEM/360 개발 PROJECT가 그것이었다. SYSTEM/360의 원칙은 세가지이다. 첫째는 상업적 성공을 위해 가격이 충분히 저렴할 것, 둘째로 다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범용 컴퓨터일 것, 세째는 기존의 컴퓨터가 비호환성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964년 4월 7일 6가지 model의 SYSTEM/360이 공개되었다. 여기서 360이 의미하는 것은 360도 모든 방면에 뛰어난 컴퓨터라는 것이다. 3세대 컴퓨터의 출발이었다. System/360은 운영체제(OS : operating system)이라는 시스템 프로그램(system program) 개념을 도입하였다. 운영체제 작성에 참여한 브룩에 따르면 프로그램 완성을 앞당기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을 투입할수록, 오히려 작업 속도는 느려지는 다소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로서 종전에 하드웨어(HARD WARE)의 부속품 정도로 인식되던 소프트웨어(SOFT WARE)의 중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로서 소프트웨어 공학(SOFT WARE ENGINEERING)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개발된 SYSTEM/370도 SYSTEM/360에서 사용된 프로그램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어 한번 IBM의 고객이 된 사람이나 기업은 계속 IBM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4년 IBM은 그동안 자사가 개발한 모든 컴퓨터 기종인의 생산을 일시에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새로운 컴퓨터기종을 통해 과학자와 기업가 모두를 만족시켜 주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획기적인 선언속에 최초의 상호교환이 가능한 컴퓨터들로 이루어진 시스템 360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소형에서 대형에 이르는 여러 컴퓨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스템은 이 시대의 다른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집적회로를 사용하고 있다. 360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OS/360으로 이름 붙여진 OS에서도 여러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 나온 OS중에서 가장 포괄적이었으며, 전에 개발한 OS의 모든 특징을 짜 넣었으며, 앞으로 OS의 특징이 될 여러 기능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었다. OS/360은 일반적인 모든 주변 기기를 제어하기위한 명령어와 대중적인 고급 프로그래밍언어를 떠받쳐 줄 일련의 루틴들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특수 용도에 쓰는 부속시스템을 갖추어 능력이 한층 증대되었다. 유연성으로 인해, 기존의 IBM의 컴퓨터를 사용하던 기업들도 360으로 교체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고,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결국은 RCA와 GE(General Electric)같은 회사가 컴퓨터부문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 IBM의 경쟁자들
IBM의 독주는 경쟁이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래서 Plug-Compatible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발달하였다. IBM에서 생산해 내지 않는 주변기기를 생산해 파는 회사들이었다. 그러나 난공불락 같던 컴퓨터 업계에도 경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상대는 되지 않았지만 일곱 난쟁이로 불리운 경쟁상대들이 있었다. 그 중 IBM이 파고 들지 못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난쟁이가 있었다. 바로 DEC(Digital Equipment Cooperation)이다. MIT 출신이 모여 출발한 DEC가 공략한 분야는 미니 컴퓨터(MINI COMPUTER)였다. 먼저 과학실험 실습용의 컴퓨터 시장을 노렸다. 1960년 개인사용자를 위한 세계최초의 소형 컴퓨터인 PDP-1을 발표했으며 이같은 여세를 몰아, 1963년에는 현재 DEC의 주요제품이 되다시피한 세계 최초의 미니컴퓨터인 PDP-5를 선보였다. 그리고 1964년에 DEC는 세계최초의 대량생산 미니컴퓨터인 PDP-8을 발표한다. 특히 1965년에 개발된 PDP-8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PDP-11까지 계속된 PDP 시리이즈는 Data처리용의 가격대 성능의 비가 우수한 컴퓨터였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해 DEC는 IBM에 버금가는 회사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봄, LA에서 대륙횡단 비행기에 오른 IBM의 영업책임자 블레어 스미스의 옆좌석에 뜻밖에도 아메리칸 항공사의 스미스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아메리칸항공의 업무를 수작업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자동화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IBM과 아메리칸항공사의 8년간의 공동연구가 시작되었다. 1964년 첫선을 보인 컴퓨터에 의한 항공예약시스템인 SABRE(Semi-Automated Business Research Environment)를 탄생시켰다. SABRE의 중추는 트랜잭션 모니터와 데이타베이스 매니져로 구성된 ACP(Airline Control Program)라는 전문 OS로 두대의 7090으로 구축되었으며 미국 전역의 2,000여 예약창구직원과 연결되었다. 이와 같은 처리가 가능한 것은 병행처리(concurrent processing)라는 기술 때문이다. 사실 컴퓨터는 한 순간에 한가지 일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빠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구성과 OS의 적합한 설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컴퓨터의 빠른 처리시간을 이용해 동시에 처리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한 것이다. SABRE가 큰 성공을 거두자 델타항공사와 팬아메리카항공사도 이와 유사한 시스템의 개발을 의뢰해 왔다. 1965년 IBM은 자사의 360컴퓨터로 가동되는 일반 예약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PARS (Program Airline Reservation System)라고 알려진 이 새 상품은 1968년에 등장한다. 이 상품은 소규모 항공사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라. 최초의 OS들
이 무렵 또 다른 병렬처리 기법이 대학내에서 개발되고 있었다. 시분할(time-sharing)이라 불리운 이 방법은 대학 내의 본체 컴퓨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필요성을 절감한 대학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이 역시 앞의 항공예약시스템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컴퓨터 사용자에게 그 결과를 즉시 알려 주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차이도 있었다. 앞의 예는 많은 양의 단일한 데이타를 취급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반하여, 뒤의 예는 비교적 다양한 프로그램이 비교적 적은 양의 제한된 데이타를 취급하는 데에 있다. 시분할의 실질적인 개념은 1959년 MIT의 통신과학교수인 존 매카시가 초안을 잡아 동료교수들에게 보낸 쪽지에서 비롯된다. 매카시는 여기에서 한 문제를 컴퓨터가 처리하는데에 드는 시간을 눈에 띄게 줄이는 획기적인 운영체제를 주창했다. 그 후 매카시의 주도로 CTSS(Compatible Time Sharing System)가 개발되었다. CTSS를 위한 기라성 같은 프로그램들이 1961년 첫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업들이 시분할에 관심을 가지면서 컴퓨터 사용시간을 상품으로 팔기 시작한다. 매사추세츠주의 키데이타사(Keydata Corporation)는 소규모 도매업체와 소매상에게 회계 및 재고관리 온라인 서비스를 시분할의 방법을 통해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집적회로의 보급확대로 인한 컴퓨터의 급속한 가격하락으로 그 열기가 식어 갔다. 시분할과 병렬처리(concurrent processing)는 OLTP(On-line Transaction Processing)로 발전해 갔다. 기본적으로 OLTP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을 말한다. OLTP시스템의 성능향상이 없었다면 1961년 노스아메리칸 록웰(North American Rockwell)이 최초로 인간을 달로 보내는 아폴로계획의 주계약자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공장과 200만개 이상의 부품과 각 부품과 그 조립을 설명한 설계도 등을 포함하여 천문학적인 작업량이었다. 1965년 계약을 체결해 1968년 ICS(Information System)에서 IMS(Information Management System)으로 이름을 바꾸어 360시스템에서 작동하는 OLTP를 설계했다. 또한 코먼웰스 에디슨이라는 시카고 일대의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의 고객상담 온라인 시스템의 개발을 하였다. 이는 기존의 OLTP와는 다소 다른 면이 있었다. 즉 고객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인 것이다. 고객관리시스템(CIS:Customer Information system)으로 불리운 이 시스템은 200명이상의 직원이 250만명 고객의 정보를 관리하며, 고객의 전기요금 문의에 즉각적인 답변을 해주는 것이었다. 차츰 OLTP의 중요성이 증대되자 1968년 3월 IBM은 정보관리시스템(IMS :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상업용 버전을 발표하자 제조업체, 대형 소매점, 기타 회사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였다. 또 CIS 개조하여 고객정보관리시스템 (CICS : Customer Information Control System)의 상업용 버전이 발표되자 폭팔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 첫 고객은 의외로 뉴욕시 경찰국이었다. SPRINT라는 컴퓨터 통신시스템이었다. 가동식때 약간의 실수로 컴퓨터통신에 회의적이었던 일부 간부들은 고소해 했지만 곧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그러나 SPRINT는 어느 면에서는 SABRE와 비슷했다. SABRE의 고객은 SPRINT의 911전화를 거는 시민과 마찬가지였다. 고객의 요구사항에 맞는 항공기좌석을 예약하듯이 시민이 원하는 곳으로 경찰을 보낸다는 면에서 흡사한 면이 있었고 그 예외는 비교적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마. SW - IBM 중심의 메인프레임 시대
60년대 전기까지는 IBM의 704, 709, 7094 기종 등의 제어를 위한 FMS (FORTRAN Monitor System)가 운영체제로 자리잡게 된다. 이어서 60년대 후기까지 멀티 프로그래밍이 응용된 OS/360이 IBM/360을 제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PL/1, ALGOL, APL, BAISIC 등의 언어가 사용된다. 60년대 시스팀 역시 일괄처리 시스팀이지만 몇 개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시킴으로써 컴퓨터 자원을 보다 유익하게 사용하는 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카드 판독기 , 가트 천공기, 프린터, 테입드라이버, 디스크 드라이버 등 많은 주변장치를 포함한다. 대부분의 작업은 모든 컴퓨터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운영체제 설계자는 프로세서를 사용 중인 하나의 작업의 입출력 작용을 완료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동안 다른 작업이 이 대기중인 프로세서를 사용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하나의 작업이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동안 다른 작업은 입출력 장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사실상 다양한 작업을 혼합해 서 수행하는 것이 컴퓨터 사용을 최적화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운영체제의 설계자는 몇 개의 작업이 주기억 장소에 동시에 있게 하는 다중 프로그래밍의 개념을 개발했다. 즉 주변장치가 사용되는 동안 몇몇 다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프로세서는 작업들 간에 이동하게 된다. 사소한 실수가 있더라도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다시 실행시켜야 하는 환경이어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시기이다. 1964년 IBM 시스팀/360 계열이 발표됐는데, 여기에서는 하드웨어 호환, OS/360의 사용 사용자가 상위계열로 이동 등 더 큰 컴퓨터 자원을 제공하도록 '범용성' 있게 설계되었으며 수년에 걸쳐 360 설계는 370 계열에 이어 4300, 30X0 계열로 발전해 갔다.IBM 360은 바이트, 마이크로코드, 시스팀 프로그래밍 개념을 처음 도입한 제품이기도 했는데, 이는 시스팀 프로그래머들의 운영체제 코드 결함 제거를 가능케 해 시스팀 프로그램 개발 방식의 장르를 열기도 했다. 360과 370 환경용으로 개발된 많은 패키지들은 하드웨어나 개발자나 사용자가 직접 개발할 필요가 없이 특정 업무용으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패키지 시대를 열었다. 컬리넷 소프트웨어社의 IDMS DBMS는 굳리치에서 개발됐고, CICS는 유틸리티 업체를 위해 IBM이 개발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동시 다중 대화식 사용자를 위한 보다 진보된 운영체제가 개발됐으며, 대화식 사용자는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터미널을 통해 컴퓨터와 통신을 한다. 이렇게 사용자가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터미널을 통해 컴퓨터와 통신을 한다. 이렇게 사용자가 컴퓨터와 상호 작용을 하므로 컴퓨터는 사용자의 요구에 빨리 응답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용자의 생산성이 저하된다. 시분할 시스팀은 동시적인 대화식 사용자들의 다중 프로그램을 위해 개발됐다. 이 시대의 시분할 체제의 개발 노력이 MIT에서 개발된 CTSS(Compatible Time-Sharing System), IBM의 TSS(Time-Shared Operating System) 그리고 TSS 후속으로 MIT에서 개발된 Multics(Multiplexed Information and Computing Service) 시스팀, 캠브리지 과학센터에서 개발되어 IBM의 VM(Virtual Memory)으로 발전돼 CP/CMS에서 선보인다. CTSS의 후계로 개발된 Multics는 어셈블리어 대신 고급 언어로 작성된 최초의 주요 운영체제로 프로그램 개발 지원에서 시분할 시스팀의 가치를 중요성을 보여준 예이다. 또 TSS, Multics, CP/CMS는 프로그램이 실제로 일차적인 저장장소 로 제공된 기억장소보다 더 큰 주소를 지정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가상기억 개념을 도입했다. 60년대의 많은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데 있어 비능률적인 경험에 의해 좀 더 신뢰성 있고 이해하기 쉬우며, 유지하기 쉬운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으로서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분야도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69년에 벨연구소에서 켄 톰슨이 PDP 시스팀을 이용, 유닉스를 개발 하면서 소스코드가 연구기관 및 학계를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다.60년대 말까지 소프트웨어 산업은 규모 면이나 향후 성장에 대해서도 의심스러운 분야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69년 소프트웨어 업체들에게 있어 서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된다. IBM이 기존의 정책을 바꿔 소프트웨어*하드웨어*서비스 가격의 분리 책정을 선언하고 나섰고, 타 하드웨어 업체들도 이에 동조하기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이후 소프트업체들은 소프트웨어의 개발 빛 직접 판매를 통한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된다.
바. Mini Computer의 탄생
1960년대 이후 컴퓨터업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대형기종에만 의존해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업무마다 소형 컴퓨터를 설치하고 이를 통신망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아울러 대형 컴퓨터는 초대형인 슈퍼 컴퓨터로 발전해 나가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는 소프트웨어 분야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즉 IBM은 이 때부터 무료로 제공해 오던 소프트웨어의 공급을 중단한 일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IBM 사용자에게는 불편했지만, 결국 소프트웨어의 산업의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DEC이후 세계 굴지의 컴퓨터 업체들이 속속 미니 컴퓨터 시장에 참여하였다. 후지쓰는 1965년 FACOM 230-15를 발표하면서 미니컴 시장에 뛰어들었다. 후지쓰가 발표한 FACOM 230-15은 데스크 베이스의 OS인 SPIRAL로 코볼(COBOL)을 사용한 사무처리에 뛰어난 기능을 발휘,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 뒤를 이어 IBM은 S/3 소형시스템을 발표하게 됐다. 왕컴퓨터는 72년 2200시스템의 발표를 계기로 기본적 베이직(Basic) 언어뿐만 아니라 코볼이나 포트란(FORTRAN)과 같은 고급언어(high level language)로 응용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운용할 수 있는 VS계열 미니 컴퓨터를 발표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77년 왕컴퓨터의 2200 VS, VS 80이다. 후지쓰는 1975년을 전후하여 후지쓰의 소형컴퓨터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발전시키게 된다. 한가지는 법용 소형 컴퓨터로서 유저에 의한 개발, 운용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의 개발을 목표로, 기간 데이터 처리까지 가능하도록 하여 여러가지 비정형 업무도 유연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FACOM V시리이즈를 발표한다. 또 하나는 유저의 사용 목적에 알맞게 완성된 업무처리시스템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치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턴키베이스 개념을 도입하였다. 즉 유저측에 전산요원이 없이도 업무운용이 가능케 한다는 FACOM 시스템 80의 발표이다. 이렇게 해서 발표된 FACOM V시리즈와 FACOM 시스템 80시리즈는 각각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유저의 요구가 점차 다양해짐에 따라 두 시스템의 상호보완을 위한 통합화가 추진된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반도체의 집적도의 진보와 자기장치의 고밀도화에 따른 장치의 소형화, 퍼스널 처리장치의 인텔리전트 워크스테이션을 실현시킬 FACOM V 시리즈와 FACOM 시스템 80 시리즈를 통합한 FACOM K 시리즈가 1984년 발표됐다. FACOM K시리즈는 하드웨어의 기능을 강화시켜 86년 K시리즈 R모델 K-301R등 총 13개 기종을 발표하게 됐다. FACOM K시리즈 R모델은 CMOS LSI 8,000 - 20,000 게이트를 신규개발하여 구성 부품수를 종래 모델에 비해 1/4이하로 줄였고, 시스템 신뢰도를 비역적으로 높였을 뿐만 아니라 소형화, 저소비 전력화를 이루었다. 또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IPU(instruction proccess unit)의 고속화, 고속.대용량의 캐쉬 메모리를 탑재, 종래에 비해 1.5-2.3배의 성능을 실현시켰다. 특히 이 제품은 1칩 1메가 바이트의 다이나믹 램을 채용하여 컴팩트한 사이즈에서 대용량의 메모리 공간을 실현했다. 또한 소형, 대용량의 5인치 및 8인치의 마이크로디스크를 접속, 고속파일 채널을 채용함으로써 채널수의 확대 및 스피드의 확충을 꾀했다. 집적회로(IC)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더욱 중요한 역할을 점차 맡게 된 반도체는 가격이 상향 조정되었다. 71년 인텔의 테드 호프는 마침내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개발, 메모리 칩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컴퓨터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논리요소들이 포함된 칩이 바로 마이크로 프로세서인데 이는 최초의 프로그램 가능 장치로 여기에 몇몇 메모리칩과 지원(support)칩만 추가하면 진정한 의미의 컴퓨터가 탄생되는 것이다. 이의 개발은 실리콘밸리지역의 산업을 변모시켰다.
나. 도전과 시련
그러나 SUPER-COMPUTER 시장을 크레이가 독점할 수는 없었다. STAR-100으로 쓰라린 경험을 가진 CDC는 사이버(Cyber)203이라는 고속 COMPUTER를 만들어 해군기관에 설치를 했고, 이어 사이버205를 발표하여 크레이사에 도전했다. 나아가 ETA라는 SUPER-COM PUTER 전문제조 자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참여를 하였다. 사이버 205는 크레이사에 큰 위협이 되었으며, 태평양 넘어 일본의 3대COMPUTER회사인 후지쓰, 히타치, NEC가 연합하여 SUPER COMPUTER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미국 회사에는 내환도 겹쳤다. 1989년 CDC는 ETA를 완전히 페업하면서 5년동안 2억 4천만달러의 적자를 냈다고 공개해 버렸다. 크레이의 독점이 예견되었지만, 시모어 크레이 자신이 자금사용문제를 둘러싼 회사내의 분규 때문에 크레이 리서치를 그만둔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국 슈퍼컴퓨터 산업을 가일층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1981년 일본은 원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일본이 발표한 두가지 계획은 내셔날 SUPER SPEED PROJECT와 제5세대 COMPUER 개발PROJECT였다. SUPER- SPEED-PROJECT는 그 시대 최고의 COMPUER인 크레이-Ⅰ보다 60배나 빠른 초당 1백억회의 실수계산이 가능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제5세대 COMPUER는 더욱 엄청난 목표를 가진 것이었다. 일본의 추격이 시작된 것이다. 첫번째는 히타치였다. 히타치는 S810-20으로 명명된 이 COMPUER는 약 6백메가플롭스(초당 실수 계산을 6억번 수행)의 성능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연이어 후지쓰가 발표한 기종인 VP-400은 약 1천6백메가플롭스의 성능을 자랑했다. 이어 1985년말에 소개된 일본전기(NEC)의 SX-2는 VP-400보다 무려 10배나 빠른 1.3기가플롭스의 놀라운 속도였다. 이러한 일본의 추격은 크레이의 명성을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미국은 다른 방면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즉, 도대체 SUPER COMPUER에서 최고속도 경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속도가 빠른 속도보다는 실제 사용자의 요구에 만족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SUPER COMPUER의 성능을 측정하는 린팩(LINPACK)'이라고 명명된 PACKAGE가 그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성능을 비교하려면 자신에게 유리한 PROGRAM이나 PACKAGE가 아닌 린팩으로 성능을 검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린팩에서 우수한 성능이 증명되었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모든 PROGRAM.PACKAGE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휴스턴에 있는 어느 연구기관에서 SUPER-COMPUTER 공개입찰공고를 냈다. 행운은 SX-2에 돌아갔고 입찰에서 탈락한 회사들은 일본전기를 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그러나 이제소의 승자는 일본전기로 돌아갔다. 실제로 싼 가격과 풍부한 SOFT-WARE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SX-2가 획기적인 구조나 설계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때까지 개발된 병렬처리기술을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결합한 결과이다. SX-2의 선택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기술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다소 실망스러워 했다.
다. 고속처리의 한계
신경망컴퓨터는 지금까지의 컴퓨터가 지상목표라고 여겨 왔던 빠르고 정확한 연산과 대용량의 정보처리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초연한 태도는 속도와 용량에 있어 기존 컴퓨터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원하는 정도의 속도와 정확성을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남아 있으며, 게다가 이것들이 극히 중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의 포탄이 날아오는 시점과 낙하하는 지점을 1초의 몇 천분의 일까지도 계산할 수 있는 컴퓨터가 몇 개의 나무가지로 위장한 덩치 큰 탱크를 찾을 수 없다면 이건 분명 낭패스러운 일이다. 분명히 내가 그 중요하고 방대한 정보의 주인인데도 감기로 목이 좀 쉬었다고 컴퓨터가 나를 몰라 본다면 곤란하다. 게다가 왜 끊임없이 컴퓨터에 나를 맞추어야만 하는가. 왜 나만 자꾸 이 언어, 저 언어, 이런저런 소프트웨어까지 자구 외우고 익숙해 지려고 애서야 하고,컴퓨터는 내 언어를 이해하려고 조금도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기계 덕분에 편하자고 하는 일인지 기계 비위를 맞추는 일인지 모를 일이다. 기존의 컴퓨터가 보여 준 발전과 편리성 뒤에는 이러한 문제들이 놓여 있었으며, 이것은 단순히 더 참신한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신경망 연구는 기존의 컴퓨터와는 달리 계산이나 정보처리보다는 확인이나 판단, 자기 학습의 능력을 컴퓨터 연구의 주요한 한 과제라고 보는 연구 태도이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과학 분야에 적용해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는 말은 과학 분야에 적용해도 큰 어긋남이 없다. 지금 이게 왠 날벼락이야 싶게 새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은 나의 무지때문에 새로워 보일 뿐 실제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뉴턴 속에 이미 아인슈타인이 있고, 유클리드 속에 리만이 있듯이 과거없는 지식은 없는 것 같다. 갑자기 각광을 받고 새로운 기수처럼 나타난 신경망 연구 역시 아기자기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를 가지고 있다.
마. 퍼셉트론
1949년 캐나다의 생리, 심리학자인 헤브(Donald Hebb)는 인간 두뇌의 작용은 개별 신경세포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간의 연결세기로 정해진다는 연결주의(connectionism)를 주창하여, 우리의 두뇌가 신경망(neural networks)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설명하였다. 맥쿨로치와 피츠, 헤브에 뒤이어 컴퓨터 과학자 로젠브렛(Frank rosenblatt)은 기초적인 신경망이론을 이용한 인공 신경망을 실제로 구현하려고 애썼다. 1958년과 1962년에 발표한 논문들을 통해 로젠브렛은 시경세포와 유사하게 입력층과 출력층으로 이루어진 인식자(perceptron)를 제안하고 그 제작까지 연구를 이어갔다. 신경망컴퓨터의 출발이라고 평가되는 퍼셉트론은 신호를 받아들이는 소자들과 받아들인 신호의 특징을 검출하는 뉴런, 마지막으로 그 결과를 통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출력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다. 1960년대에 MIT의 민스키(Marvin Minsky)등은 이 퍼셉트론 이론을 전개하여 교사입력(teacher input)을 통한 도형 인식 등을 가능케 함으로써 신경망 컴퓨터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퍼셉트론은 학습처리와 병렬처리 기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뇌에 더욱 접근하는 성과를 얻었으나, 검출 뉴런을 필요한 신호만큼 준비해야 한다는 전제로 인하여 필요한 뉴런의 숫자를 천문학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었던 데다, 1969년 선형분리 이외에 여러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민스키와 페퍼트(Seymour Papert)의 지적으로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무렵 한 신경병리학자가 인공지능에 도전한다. 그는 전형적인 뉴욕인(New-Yorker)인 프랭크 로젠블렛이다. 그가 만든 퍼셉트론(Percetron)이라는 전자회로는 아주 간단한 뇌의 기능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이었다. 퍼셉트론은 당대의 최고 컴퓨터인 IBM704에서 시뮬레이션되었다. 실험은 서로 다른 형태의 사각형을 분류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한다면 눈깜짝 사이에 할 일들을 30분동안에, 그것도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하는 IBM704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이 광경은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퍼셉트론은 광전지로 만들어진 인공눈을 통해서 조금씩 굼틀거리기 시작했다. 퍼셉트론은 아무 프로그램없이 단지 스스로의 학습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화(Self-Organization)해 나갔다. 언론은 대서특필하였다. 모두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퍼셉트론을 빨리 훈련시키고, 도한 그 덩치를 커다랗게 만들것인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로젠블렛의 접근에 반기를 든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로젠블렛의 뉴욕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동창인 민스키(Marvin Minsky)였다. 1958년 민스키는 만아프리카 출신 수학자인 패퍼트(Papert)와 함께 퍼셉트론 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퍼셉트론이라고 했지만, 퍼셉트론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비판한 책이었다. 게다가 패퍼트의 수학 실력으로 이를 수학적으로 모두 증명하였다. 이후부터 인공지능은 하향식(top down) 방법을 선호하게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집적회로의 고안으로 활발히 진행되던 디지탈컴퓨터는 DARPA (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지원을 받았던 반면, 퍼셉트론의 문제와 한계에 직면한 1970년대의 신경망연구는 거의 관심 밖으로 몰려났다.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미국의 그로스버그(Stephen Grossbeg), 일본의 수니치 아마리, 핀란드의 코호넌(Teuvo Kohonen)등의 개인적인 연구업적이 눈에 띨 뿐이다.
가. Basic
베이식(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Instruction Code)은 구조가 간단해 배우기 쉽고 인터프리터방식을 채용한 대화형 프로그래밍 언어다.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발됨에 따라 현재는 다소 위축돼 있으나 개인용 컴퓨터가 소개되던 80∼90년대 초만 하더라도 베이식은 PC의 「베이식」으로 인식되던 핵심적인 언어였다. 베이식은 1964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의 존 케머니(John Kemeny)와 토마스 쿠르츠(Thomas Kurtz) 교수가 공동으로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다. 교육용으로 개발된 언어답게 구조가 간단하고 대화형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장점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베이식 프로그래밍 언어가 등장한 것은 지난 1975년 2월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마이크로소프트社(MS) 최초의 고객이었던 MITS에, 새로 개발한 베이식을 공급한 것에서 비롯했다. 그들이 개발한 베이식언어는 개인용 컴퓨터를 위해 개발된 최초의 컴퓨터 랭귀지 프로그램으로 기록되고 있다. MITS는 그해 7월 그들의 「알테어8800」 모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식2.0을 개발해 발표했다. 이후 베이식은 개인용 컴퓨터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MS는 인텔 프로세서가 발표될 때마다 프로그램을 잇달아 개발해 발표했으며 Q베이식이나 GW베이식 등의 유사제품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베이식을 개인용 PC에 적용하는 시도들도 크게 늘었다.
나. FORTRAN의 개발
진정한 의미의 프로그래밍언어는 포트란(FORTRAN)과 함께 시작된다. 1957년 웨스팅하우스 원자력 연구소에서 포트란 컴파일러는 성능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성공의 장본인은 존 배커스(John Backus)로서 그는 수많은 고등학교를 쫓겨났기 때문에 자신이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도 모르는 문제아였다. 그러나 2차대전후 제대한 배커스는 밥벌이를 위해 군사용 무선기술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배커스의 재능을 발견한 기술선생님에게 더 밀리다시피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해 수학석사를 마쳤다. 배커스는 졸업과 함께 IBM에 입사하여 스피드 코딩 번역기 작업에 참여했다. 배커스는 인간의 사용언어와 유사한 언어를 개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사용자로 하여금 기계어나 어셈블리어를 몰라도, 기계의 동작 과정을 몰라도 알수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프로그래밍언어는 사용자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 자체의 이해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포트란의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트란 언어의 특징을 몇가지 정했다. 대입문의 도입 Do 순환문 사용 등이 그것이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포트란 컴파일러가 1957년 개발되었다. 그러나 전문 프로그래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IBM은 꾀를 냈다. 모든 IBM705 사용자에게 무료로 보내 주었다. 반응이 좋자 IBM650을 위한 포트란도 개발했다. 사용자들이 늘어가자 점점 상위 버전이 개발되었다. 사용자의 반응도 다양해 지고 포트란 컴파일러도 여러 종류가 시중에 떠 돌게 되었다. 자신에 맞는 포트란 컴파일러를 개발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표준안의 제정이 시급해 지자 1977년 국제회의에서 포트란-77을 세계 표준으로 발표하였다. 포트란의 성공은 고급 언어의 개발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사용자가 늘어나자 불만도 증가하였다. 즉 과학기술 계산에는 적합했지만 사무용으로 부적당했다. 이의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혼란만 가중 시켰다. 그 누구도 객관적이지 못하고 자사의 아니면 개인의 이익에 우선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새로운 판정관을 찾았고, 컴퓨터업계의 최대 자금줄인 국방성이 판정관이 되었다. 왕년의 스타인 호퍼 여사도 문제의 심각성을 국방성를 방문해 지적했다.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CODASIL(Coference On Data S? Language)라 불렸다. 회의는 여러 위원회를 구성하고 의견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COBOL이라는 상업용 언어에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IBM이 반대하고 나서며 자신들이 개발한 커머셜트랜스?가 상업용언어로 채택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니웰이 속한 위원회에서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던 FACT (Fully Automatic ? techique)를 담합해 이로 코볼을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우여곡절속에서 코볼이 채택되었다.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코볼은 몇번의 개정을 거치면서도 꾸준히 살아 남았다.
다. ALGOL과 PL/1의 등장
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학자들은 언어에 대한 욕심을 알골(ALGOL, Algorithm Language)가 그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이는 신대륙(미국)에 대한 구대륙(유럽)의 반항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1958년 5월 28일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과학기술용 범용언어에 대한 회의(ACM/GAMM committee)가 열렸다. 배커스도 초청되었다. 그러나 소수점을 문장의 분리기호를 쓸것인가하는 문제로 격돌을 벌였다. 위원장인 웨그슈타인의 중재로 일단 격돌을 일으키는 부분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였다. 사소한 논쟁을 피하고 구조적인 측면을 중시한 언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 결과 포트란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이후에 나타날 현대적 언어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특히 배커스표준형식(Backus Normal Form, BNF)이 도입되어 이제 프로그래밍 언어는 하나의 언어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포트란 추종자들은 알골을 헐뜯었다. 입출력도 제대로 없다, 구조가 모호하다는 등 그러나 유럽인들은 알골을 아꼈고, 미국에서는 시들어 갔다. 호퍼여사는 알골을 기절할 정도로 절묘한 구조의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 조금 쓸쓸할 따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알골설계의 철학은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블럭구조, 자기호출기능(recursion), BNF형식에 의한 구문 정의가 그것으로 이 선물을 이어받은 파스칼은 포트란을 미국의 대학에서 몰아내고, 교육용 언어로서 자리를 굳혀갔다. 1960년대 이후 새로운 언어는 포트란과 코볼의 영화를 꿈꾸며 여기저기서 탄생했다. IBM은 야심적인 시스템/360을 계획하면서 새로운 언어개발을 아울러 추진했다. PL/1으로 명명된 이 고급언어는 포트란의 명료성과 속도, 코볼의 높은 가독성을 목표를 삼았다. PL/1은 시스템/360이 발표될 때까지 매끈하지는 못했지만 360의 후광 덕분에 10여년동안 많은 애용을 하게 되었다. 포트란이나 코볼에 익숙한 사람들은 곧 PL/1에 익숙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불만을 토로했다. 즉 어느것 하나 빠진 기능은 없지만 막상 구체적인 용도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PL/1은 공룡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다. 80년대 초부터 마이크로컴퓨터가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파스칼이나 C언어는 곧 소형컴퓨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PL/1은 배회할 수 밖에 없었다.
라. 특수 목적 언어
법용언어의 개발에 힘입어 특별한 목적에 적합한 언어의 개발도 활발해졌다. 그 최초의 언어는 APT(Automatically Programmed Tools)이었다. APT는 특별히 CAD(컴퓨터이용설계) 프로그램을 위해 만들어졌다. 특수목적언어로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은 존 매카시라는 인공지능학자에 의해 개발된 리스프(LISP)이다. 리스프는 리스트(list)라는 자료구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요한 특징은 괄호가 너무 많아서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공포심을 준다는 것과 프로그램과 data의 구별이 없다는 것으로 인공지능분야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결국 하나의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을 읽어들여 고칠수가 있었다. 이는 엄청난 양의 기억장치를 요구해 초창기에는 비현실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졌지만 기억장치의 가격이 저렴해짐에 따라 각광을 받게 되었다.
(1)LISP
LISP은 1960년대에 MIT의 한 그룹과 John McCathy에 의해 설계되고 구현된다. LISP은 특별히 인공지능을 포함한 컴퓨터과학분야의 연구에 폭넓게 쓰이고 있다. Lisp의 최초 정의는 1965년 McCathy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다. 그러나 Lisp은 표준안을 확립하기 위한 몇가지 제안이 나왔지만, 매우 다양한 version들이 나타난다. 그중에서 INTERLISP, Franz LISP, the Standard LISP proposal of Marti et al 등이 많이 쓰인다.리스프(LISP)는 60년 미국 MIT 연구소에서 존 매카시 등 프로그래머들이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다. 리스트 프로세싱(List Processing)의 준말로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모두 리스트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모든 프로그램이 이터처럼 취급돼 데이터나 프로그램 수정이 쉽다. LISP는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에서와 같이 특수한 표기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LISP는 컴파일러 개발과정에서 탄생했다. 58년 MIT에서는 인간의 언어를 기계어로 바꿔주는 컴파일러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서브루틴 링크와 자료구조에서 중요한 스택 핸들링, 삭제를 위한 방법으로서 기존의 것과는 다른 방식의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이 가능함을 인식하게 됐다. 몇몇 프로그래머들은 프로젝트의 주목적을 컴파일러에서 LISP개발로 전환해 60년 LISP 개발 프로젝트를 끝마쳤다. LISP의 개발 주역들은 다양한 함수를 어셈블리 언어로 컴파일링할 수 있고 이를 LISP 환경으로 이식하기 위한 서브루틴을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읽기와 프린트리스트 구조를 포함하는 특이한 형태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2)Prolog
리스프의 개발로 유럽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새로운 언어의 개발에 몰두했다. 이미 알골을 개발했었지만 알골은 엉거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1972년 마르세이유 공과대학의 알랭 콜메로어는 프롤로그(Prolog)라는 논리언어를 개발했다. 그 구조는 리스프만큼이나 단순했다. 특히 문제를 해결하는 절차를 적어야만 하는 절차적 언어(procedure language)와는 달리 단지 문제가 무엇이냐는 것만을 기술함으로서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프롤로그가 발표되자 미국의 리스프가 독주하고 있던 인공지능학계에 약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프롤로그의 우수성을 알리는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게다가 일본이 제5세대 컴퓨터의 전체 시스템 언어로서 프롤로그를 채택하자 인공지능학계의 판도가 변하는 듯했다. 리스프와 프롤로그간의 싸움이 일었고, 자신이 속한 지역(미국 또는 유럽)에 따라 아니면 학풍에 따라 양분되어 그 장단점을 쏟아내고 있다.1977년에 영국의 에딘버러대학에서 컴파일러를 갖춘 DEC 10-prolog가 나와 널리 보급되었다. Prolog의 프로그래밍은 지식데이타베이스의 구축이고, 프로그램의 실행은 이에 대한 조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 Prolog는 추론할 때 해당하는 답을 모두 찾아내는 기능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한 것이 백트랙으로 되돌림 이라는 의미에서 처리과정을 리프트하여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여 모든 답을 찾아낸다. 실제로 Prolog에는 이 외에도 리스트라는 데이타구조를 다루는 등 여러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다. 1988년부터는 ISO(국제표준화기구)에서 Prolog의 표준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표준화작업은 일반 문법을 다룬 레벨 1과 모듈화에 대한 레벨 2로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1992년 11월) 레벨 1의 표준안(커미티드래프트)의 투표가 행해지고 있다. 레벨 2에 대해서는 오는 93년에 가서 투표가 행해질 전망이다. 이러한 특수 목적언어가 전성기를 누릴 즈음, 범용언어 사이에서도 약간의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앞에서 알골의 재정과정에서의 문제를 언급했지만 그 논쟁은 계속되었다. 계속된 개량형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다들 알골의 사용을 역설했지만 이용은 하지 않았다. 유럽을 통틀어 알골68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영국 레이더 연구소 한곳 뿐이었다.
(3)SNOBOL 4
SNOBOL 4는 벨연구소에서 개발된 언어중에서 60년대에 마지막으로 구현된 언어이다. 제일 많이 쓰이는 분야는 자연언어와 같이, 많은 양의 문자열 데이타를 처리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 SNOBOL 4에 대한 최초의 묘사는 1971년 언어설계자인 Griswold가 했으며, 구현설계는 1972년에 이루어 진다. SNOBOL 4는 다른 언어와 매우 구별이 가는데 그 이유는 문자열 처리와 pattern-matching 연산에서의 개성으로 말미암아 매우 독특한 언어로 구분된다. 덧붙여 SNOBOL 4는 사용자 정의 데이타타입을 구현한 최초의 언어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LISP와는 유사한 점이 있다.
(4)APL
APL은 1962년에 Kenneth Iverson의 책 A Programming Language 에서 최초로 언급되고 있다. APL의 이름은 이책이 이름에서 유래한다. Iverson의 원래 목적은 사용하기 편리한 언어의 구현에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에 직접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그러나 리스트의 기록도 매우 어려운 언어가 되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개념상의 언어로 취급을 했으나 1964년 IBM 360에서 처음 구현된다. 현재의 APL은 1960년대 후반 IBM의 Iverson, Falkoff 등에 의해 구현된 APL/360이 그것이다. 이후에 나온 대부분의 APL은 APL/360의 변형이라할 수 있다.
가.레이저와 광섬유의 등장
(1)빛을 통한 통신의 시작
1970년 9월말 로버트 모러(Robert D Maurer)는 영국에서 개최된 유도전파를 이용한 트렁크통신회의에서 최초로 레이저를 이용한 대량 정보의 전송이 가능한 순수한 유리섬유의 개발을 발표했다. 이는 코닝유리사에서 그의 동료 도널드 케크, 피터 슐츠 등과 추진해온 연구였다. 그러나 광통신의 시조는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이었다. 뛰어난 창의력을 가진 이 통신의 천재는 임종에 이를 때까지도 스스로 광전자기기 라고 부른 그 장치가 자신의 이미 발명한 전화보다 더욱 훌륭한 발명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에 대해 강한 집념을 보였다. 그는 전화발명 특허를 얻은 직후에 광전자전화를 발명, 1880년 2월 워싱턴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에서 그 장치를 시연했다. 그는 햇빛의 강도를 크게 변환시키는 반사경의 진동을 이용해 음성을 전송했으며 수화기의 배터리에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셀레늄 봉(愼에 그 진동이 전달되게끔 했다. 벨은 당시로서는 최대의 가용 광원이었던 햇빛을 이용, 음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나 대기중의 여러 구성 요소들이 태양광선의 통과를 방해해 이의 실질적인 이용을 불가능하게 했다. 1880년대에 또 한사람의 영국인 찰스 버논 보이즈 역시 비록 그가 빛의 전송에 유리섬유를 이용할 의도는 전혀 없으나 최초로 가는 유리섬유를 만들어 냄으로써 섬유광학기술의 영역을 넓히는데 공헌했다. 그는 실크를 섬세하게 질긴 유리실로 대체할 수 있는 유리실을 발명하려고 시도한 끝에 원시적이긴 했지만 효과적으로 유리실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새로이 개발했다. 그는 석영을 녹여서 화살에 발라 긴 유리화살에 발라 긴 유리화살을 만든 다음 화살을 쏘았다. 그의 방법은 유리가 다양하고 다양하고 실용적인 용도의 섬유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2)다우코닝사의 참여
미국 표준연구소(Standard telecommunication Lab)의 찰스 카오(Charles K Kao)와 조지 호캄(George A Hockham)은 새로운 연구를 통해 통신용으로서의 광섬유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밝혀 냈다. 그들은 유리 자체보다도 거기에 섞여 있는 불순물이 빛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광도가 1km당 20데시벨 정도가 되게끔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비로서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리섬유가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은 빛이 1km를 이동한 후에 그 1%의 광도를 나타내는 상태를 말한다. 유리소비제품업체로 알려진 코닝유리사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으로 유리섬유분야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영국을 방문하고 있던 그 회사의 한 고학자가 영국 우체국의 연구요원들로부터 통신용광섬유를 제작하려다가 실패로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후 그는 그 정보를 곧 회사측에 알렸다. 이에 코닝사는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연구팀을 구성, 제품개발에 총력을 집중했고 결국 이것이 이 회사의 주력제품 이 되었다. 로버트 모러가 이 새로운 연구팀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통신매체로서의 유리를 연구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연구에 임했다. 연구과제에 관한 브리핑을 받은 모러와 동료과학자들은 필요한 자료를 수집한 다음 연구활동에 본격 착수했다. 우선 그들은 광섬유에 적합한 유리를 선정하는 생소한 작업부터 착수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연구소의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합성유리를 가장 적합한 광섬유재료로 지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합성유리는 다양한 종류의 유리로 구성되어 있어서 필요한 정도의 굴절률을 구할 수 있고 쉽게 용해돼 섬유로 전환시키는 과정이 단순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코닝사의 연구요원들은 기본적으로 유리의 순도를 추구하는데 더 역점을 두는 연구방법을 택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은 순도가 매우 높은 용융 석영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연구팀은 얼마 안가서 지름길로 판단하고 택한 방법이 잘못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융석영은 용해점이 높아 섬유로 전환시키기가 지극히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유리중에서 빛의 굴절률이 가장 낮았다. 그들은 빛을 전송하기에 충분한 굴절률을 가진 심에 적합한 유리가 필요했는데 순도높은 용융석영이 그 목적에 적합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를 전송하는 빛을 심안에 있도록 가두어 두는 외피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굴절률이 그보다 더욱 낮은 유리가 필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나 연구팀은 불리한 상황에서나마 그 안에서 최선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모러와 동료과학자들은 용융석영을 심으로 사용하려는 구상을 와전히 포기하든가 굴절률이 높은 유리를 선택한다는 생각대신 그 석영을 광섬유자체의 기본소재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광섬유의 심에 도펀트를 첨가해 굴절률을 높이는 한편 외피는 정상적인 상태로 놓아 두었다. 이 연구방법은 언뜻 보기에 복잡하고 비실용적으로 보이지만 빛을 유도하는 유리섬유를 개발하기 위해 오랫동안 추진해 온 여러 방법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모러와 동료 연구요원들은 독자적인 방법으로 용융석영을 이용, 섬유의 외피도관 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광섬유개발에 착수했다. 굴절률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거친 도펀트가 첨가된 여러 용융석영은 화학작용에 의하서 검댕 이 되어 도관내에 퇴적되었다. 유리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분자들은 가열되어 배열이 무너져 늘어나면서 섬유로 변했다. 그 기술은 효과가 있었다. 도펀트가 첨가된 내부의 석영은 바깥 부분을 감싸고 있는 외피보다 높은 굴절률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허를 받게 되는 코닝사의 이 기술은 내부의 증기침전으로 불렀고 훗날 상업적 목적으로 광섬유를 생산하는 다른 업체들에게도 표준 기술이 되었다. 모러가 개발한 초기의 섬유에 대한 실험은 만족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회사의 관심도 적었고, 회사의 지원도 없었다. 결국은 다른 프로젝트를 연구하면서 그 자금을 이용해 연구를 계속했다. 여름을 보내며 시간적 여유가 생겨 조금 더 많은 진척이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1970년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한다. 그들이 새롭게 만들어 낸 섬유는 실험에 사용된 헬륨-네온 레이저의 6백32.8나노미터 파장에서 km당 17데시벨의 손실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모러는 영국에서 열린 한 통신회의에 불안감을 가지고 통신회의에 참석했으나 자신들의 연구가 상당히 진전된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연구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즉 보다 다루기 쉬운 도펀트를 발견하는 것과 보다 적합한 크기의 심의 개발이 그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게르마늄이 입수하기 쉬웠던 이산화티타늄보다 보다 효율적인 도펀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코닝사는 초기단계의 섬유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내부 증기침전기술을 개발했다. 이것은 핵심물질이 외피를 형성하는 시동도관안에 쌓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 다음 코닝사는 외부증기침전(OVD) 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것은 유리그을음이 심축 주위에 쌓이게 한 다음 심축을 제거하고 쌓인 합성유리 원료를 다시 가열해서 광섬유로 추출하는 방식이다. 가장 실용적인 광섬유 심의 규격을 정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초기단계의 저손실섬유는 단일모드 디자인이기 때문에 빛의 한가지 도파모드만을 전달해 비실용적이었다. 심의 크기가 크면 많은 양의 빛을 통과 시킬 수 있지만 빛의 분산되는 성질을 생각하면 이 역시 좋은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머지 가능성인 경사형 광섬유개발은 일본의 니폰판유리사가 1969년에 시도한 일이 있었다. 코닝사는 이분야의 연구에 착수했다. 빛의 굴절은 심 자체내에서만 일어나므로 굴절률의 경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다량의 광파가 섬유를 통해 비슷한 비율로 전달된다. 따라서 광파의 확산현상은 줄어드는 반면 주파수의 범위는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코닝사의 래리 카펜터(Larry L Carpenter)는 일련의 유리층을 침전시켜 심을 형성해 내는데 초점을 맞춘 실험에 착수했다. 침전된 각 유리층은 점차 굴절률이 낮아져서 나중에는 그 형성물질이 가열됨에 따라 유리광섬유가 되었다. 카펜터는 1972년 드디어 저손실의 경사형광섬유를 제조했다. 다른 업체보다 앞서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연구개발의 성과가 소득을 가져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3)광섬유의 상업화 시작
코닝사는 이제 새로운 전환의 시기에 다가섰다. 즉 코닝은 광통신분야의 많은 획기적인 연구와 업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통신의 모든 분야를 소화해 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광케이블과 관련된 기술은 일본과 이탈리아회사에 라이센스를 제공해 주었다. 또 프랑스와 영국의 기업, 그리고 독일의 지멘스와 합작으로 시코르사를 설립한다. 레이저는 광통신에서 핵심적인 기술이다. 그러나 당시 2극관 레이저는 빔의 변조가 쉽고 크기가 작다는 점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쉽게 가열이 되고 이는 빔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어 새로운 연구를 요구하게 되었다. 후에 M A Com레이저 다이오우드 연구소로 개칭한 레이저 다이오우드 연구소는 75년 실온에서 1천시간동안 작동이 계속되는 반도체 레이저 장치를 개발한다. 2년후에는 1백만시간 또는 1백년가 계속 작동할 수 있는 반도체 레이저를 발표했다. 단거리나 제한된 주파수 영역에서 유용한 비간섭성 발광 다이오우드(LED)의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미국의 2대 통신기업인 AT&T와 GTE는 상업적 목적을 위한 광섬유통신의 실험에서 먼저 성공을 거두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 경쟁은 77년 봄 GTE의 시제품이 AT&T보다 조금 먼저 가동됨으로써 일단락됐으나 AT&T시스템의 시제품이 보다 우수한 성능을 나타냈다. AT&T의 시스템은 초당 45메가비트의 음성, 비디오 및 데이타를 시카고에서 1km 떨어진 거리에서 양방향으로 전송하는 성능을 발휘했다. 이것은 6백 72개 음성채널의 통신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GTE는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9km되는 지점으로 초당 1.5메가비트 데이타를 전송하는데 두개의 신호증폭기를 사용했던 것이다. 코닝사는 AT&T와 GTE 양측에 모두 광섬유를 공급했다. 이들 두회사는 2년간에 걸쳐 실시한 광통신시스템의 시험은 이를 기대하던 관련업계와 신문 등의 실용화시기를 앞당기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세계각국의 우편통신당국과 업계와 미국의 다른 통신 과련 업게에서도 앞다투어 광통신에 대한 연구와 실용화를 서두르기 시작한다. 이에 코닝사는 광통신 수용가 급격히 증가할 것을 예상하고 모든 시설을 완전가동하고 AT&T의 자회사와 특허 라이센스 협상을 벌인다.
일본과 캐나다의 정부기관들은 미국보다 먼저 설치한다. 일본의 통산성은 Hi-OVIS(고성능 상호작용 광학정보시스템)라는 양방향 케이블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AT&T와 GTE가 광통신시험을 실시하기 1년전인 76년이었다. 일본은 78년 7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1백 50가구를 대상으로 이 시스템의 서비스를 개시했다. 그 시스템은 비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가입자들이 각종 정보를 광범위하게 접하는 동시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도 전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경비도 많이 들고 고가의 기존 통신 시설이 쓸모없게 된다 하더라도 일본은 이 새로운 기술의 장래성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일본에서 Hi-OVIS가 운영되기 시작할 무렵, 캐나다는 일본과 유사하지만 그 보다는 조금 소극적인 케이블 구축사업을 추진했다. 캐나다는 통신부, 캐나다통신협회, 마니토바전화국 및 노던-텔리컴사 등의 공동사업으로 마니토바 지역의 한적한 소도시인 엘리와 스테-유스타체에서 광통신 시험을 실시한다. 이 지방의 기존 전화시설은 4개 이상의 가정이 한 회선을 공용할 정도로 낙후되어 현대화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한 유리섬유가 영하 40도의 겨울 기온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측정해 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 시험은 단방향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보다 적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각 가정마다 단독회선을 갖고 케이블TV, 스테레오FM라디오, 광범위한 정보를 공급하는 비디오텍스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처럼 70년대에는 실용화를 위한 선구적인 연구와 시험이 곳곳에서 이루어 지고 있어 80년대의 급속한 발전을 예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컴퓨터 통신의 시작
컴퓨터 신호를 이용한 장거리 전송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다. 1940년대까지도 컴퓨터의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오히려 멀리 떨어진 컴퓨터를 전화선을 이용해 사용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었다. 이런일에 뛰어든 사람이 조지 스티비츠라는 벨연구소의 젊은 수학자였다. 그는 복소수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그 성능이 뛰어나 건물내의 많은 수학자들이 텔레타이프로 이를 연결해 사용하였다. 스티비츠는 한 학술대회에서 아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복소수계산기에 전신을 통해서 직접해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2백50마일(약 402km)의 전용케이블을 설치하고, 보통의 전신회로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1940년 9월 11일의 시범은 많은 관중들 앞에서 성공적으로 마쳤다. 1958년 최초의 대규모 컴퓨터 네트워크인 SAGE (Semi Automatic Ground Environment) 시스템이 대공방어장치로서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전체를 통제하는 컴퓨터는 MIT의 리얼타임 컴퓨터가 채택되었다. SAGE는 1천 5백만 마일(약 2413km)이나 되는 거대한 통신선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 방어에 있어서 자료처리속도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관측된 자료를 중앙의 컴퓨터에 빨리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고속 모뎀의 개발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속도를 높일때 문제가 있었다. 지나치게 속도가 높아지다 보면, 각 비트간에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1964년 벨연구소의 럭키(Lucky)라는 연구원이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이는 전송하기전 선로의 상태를 점검해주는 1.2초동안 회선을 ? 시키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서 해결 되었다. 그 후 이 SAGE 시스템의 기술적 효과가 계기가 되어 1961년에 아메리카 에어라인사에서 여객기의 좌석 에약과 회사 업무를 종합적으로 처리하는 SABRE (Semi Automatic Business Research Environment) 시스템이 발표되었고, 1964년에 완성되었다. 또한 컴퓨터 시스템을 다수의 이용자가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분할시스템(TSS : Time Sharing System)의 개발에 주력하게 되었고, 이런 목적의 시스템으로 미국 MIT대학의 CTSS(Compatible Time Sharing System)을 들 수 있다.
가.컴퓨터 그래픽의 제2기
제2기는 60년대이다. 제1기의 대표적인 기종이 에니악임에 비하여 제2기의 대표기종은 IBM 7090, 7070 등이다. 60년 보잉사에서 CRT를 이용하여 제트 여객기 보잉 737의 설계를 만들었으며, 중반에는 컴퓨터 예술가들이 많이 나타났다. 벨연구소에 있던 K. 놀턴, 엘슈와르츠 등은 컴퓨터 누드 , 갈매기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사진을 기초로 한 구상형체를 문자나 기호의 농담으로 표현하고 이것을 플로터에 출력시킨 것이다. 또한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C. 크리스에 의해 제작된 플로터나 CRT를 사용한 화상에 의한 작품은 매우 훌륭하다. C. 크리스는 현재의 3차원 컴퓨터 애니메이션 원류의 하나라고 일컫는 ANIMA 11 의 제작자이다. 60년대에 실용화된 보잉사의 CRT에 의한 대화형 처리 시스템은 오늘날 캐드(CAD) 시스템의 원형으로서, 3차원의 공간 표시에 대한 몇 가지 접근은 시각에의 가능성을 넓혀 주었고 컴퓨터가 시각 통신(visual communication)에 중대한 역활을 할 것이라는 예견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와 같이 50년대 후반에 컴퓨터 출력에 의한 각종 장치들이 정비되고 60년대에는 이들 기기를 이용한 컴퓨터 예술이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컴퓨터 뿐만 아니라 전기기법에 의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여 키네틱 아트, 라이트 아트, 옵티칼 아트, 일렉트로닉스 뮤직 등이 성행하였다. 60년대에는 컴퓨터를 핵으로 하여 예술에 빛과 움직임, 소리를 가한 공간 예술의 시도가 여러 미디어를 통하여 실험되게 된 시기이다.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의 주요한 새 분야로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사건은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서덜랜드(Ivan E. Sutherland)의 brilliant논문이 1962년에 발표된 사건이다. 이 논문은 Sketchpad : A Man-Machine Graphical Communication System이란 제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대화식 컴퓨터 그래픽이 존재할 수 있으며 유용하고 매우 흥미있는 연구분야라고 깨우쳐 주었다. 60년대 중반에는 MIT, 벨 연구소, General Motors, Lockheed Aircraft 등에서 컴퓨터 그래픽에 관 한 큰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 중 이었다. 51년 세이지가 성공함에 따라 MIT는 그래픽기술을 중심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방에 사용된 그래픽은 이반 서덜랜드라는 젊은 공학자에 의해서 급진전되었다. 그는 완성될 프로그램의 이름을 스케치 패드(sketch pad)라고 불렀다. 즉 컴퓨터 화면에서 스케치 작업을 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초기에는 간단한 선 밖에 그릴 수 없었으나, 여러 다양한 도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스케치패드는 인간이 하기에는 너무 지루한 작업을 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예를 들어 6백개의 육각형 무늬를 그리려면 전문가라 할지라도, 사나흘이 걸리지만 스케치 패드는 불과 몇십분 만에 해결하였다. MIT는 이를 자랑거리로 여겨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지만, 기업가들의 반응은 작았다. 선견지명을 가진 기업도 있었다. GM은 서덜랜드보다 2년 앞서 자동차 설계에 컴퓨터를 도입하려 했었다. GM이 만든 DAC-1 시스템은 스케치 패드와 같이 소개되었다. GM의 그래픽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기업들의 반응을 자극했다. 항공화사인 록히드사도 컴퓨터 설계를 도입하였다. 특히 IBM이 IBM 2250에서 DAC-1을 지원해 주는 그래픽 전용 단말기를 부착해 줌으로서 그래픽 전문회사가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선두주자는 스케치 패드의 완성자인 서덜랜드와 UCLA의 교수인 데이비드 에반스가 공동으로 설립한 에반스 서덜랜드사이다. 그들은 텍트로닉스사(Textronix)가 개발한 DVST(direct view storage) 기술을 도입, IBM 2250의 그래픽 단말기를 선보여 시장을 석권했다.
나.가상현실(VR)
최근 영화 스크린에 자주 등장하는 가상현실(VR)은 글자 그대로 인간 감각의 착오를 유발시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 주는 기술을 말한다. 가상 실험이나 인간이 접근하기 어려운 건설현장의 시뮬레이션등 산업적용도외에 가상의료나 패션, 공상과학 영화에서 곧 잘 볼 수 있는 「사이버섹스」등 성적인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VR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3∼4년전부터 멀티미디어와 함께 소개되곤 했으나 사실 VR은 멀티미디어를 뛰어넘는 차세대 기술이다. 연구분야도 시각 의존도에서 벗어나 청각과 후각으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으나 아직까지는 개발의 여지가 많은 분야다. VR은 시각과 청각 촉각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특히 착시현상을 이용하는 시각분야의 VR은 구현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빠른 개발사를 가지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VR은 1962년 사진가이면서 영화작가였던 「모튼 하일리그 (Morton Heilig)」가 「센소라마(Sensorama)」기계를 고안했던것이 효시로 전해진다. 그가 개발한 센소라마는 컴퓨터를 이용한 기술이 아니고 몰입기술을 이용한 제품으로 영사화면에 따라 진동하는 의자를 이용, 가상체험을 할 수 있게 고안한 장비였다. 이후 1965년에는 「에반스 앤 서덜랜드」가 1833년 찰스 휘스턴(Charles Wheatstone)이 고안한 입체거울을 근간으로 현재의 헤드마운트디스플레이 (HMD)의 원조격인 디스플레이 장치를 개발하면서 본격화됐다.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가상현실기술은 영화분야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1937년 미국 헐리우드의 한 영화사는 적· 녹색 필터를 이용하는 입체 3차원영화인 「3차원 살인(Third Dimension Murder)」을 제작해 3차원 영화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특히 영화분야의 가상현실붐은 많은 제작비를 투자해야하는 영화분야의 속성상 컴퓨터와 게임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게임업체인 세가나 스테레오그래픽스는 적외선 송수신기를 이용해 모니터의 영상을 입체로 구현해 주는 입체안경을 개발, 무거운 HMD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이들 회사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입체영상을 보장해주는 제품을 개발해 시각분야의 가상현실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가상현실의 한 부분을 이루는 사운드분야는 1950년대 스테레오 음향이 발명되면서 구체화됐다. 스테레오 음향은 2개의 마이크로폰을 사용해 소리에 대한 지각을 감지할 수 있게 한 방식으로 최근에는 3차원 청각환경을 재생해 주는 저가의 장비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다.입력장치
(1)톰 소여의 모험
타이프 라이터를 최초로 사용해 소설을 쓴 사람은 마크 트웨인이었고, 작품은 톰소요의 모험 이다. 1714년 밀이라는 손재주가 좋은 기술자가 영국의 앤여왕은 글쓰는 노동에서 해방시켜줄 기계식 필기구를 만들어 보겠노라고 말했다. 기계가 글씨를 한자씩 직어내는 원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밀은 그 완성을 보지 못했다. 실패의 원인은 실제 제작을 뒷받침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백 50년이 지났다. 세상은 변해 신문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글을 써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위스콘신의 한 신문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인쇄소의 사장인 크리스토퍼 숄즈의 등장으로 자동필기기구를 개발했다. 1872년 숄즈와 그의 조수인 글라이든가 만든 자동필기 기구가 탄생한 것이다. 타이프 라이터(Type-Write)라는 이름도 붙였다. 숄즈는 자금의 부족으로 당시 총포류와 재봉틀로 유명한 레밍턴랜드와 손을 잡고 생산한 관계로, 최초의 타자기는 마치 재봉틀을 연상시켰으며 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재봉틀 발판과 같은 것을 발로 밟아야 했다. 몇가지 문제도 있었다. 몇 센트하던 깃털펜에 비해 1백 25달러나 하는 가격, 자신이 친 글씨를 알아 보려면 타자기의 윗부분을 들어 올려야 했고, 대문자만이 인쇄 되었다. 몇몇 사람에게는 호평을 주었고 그중의 한사람이 마크 트웨인이었다. 트웨인은 이 타자기를 이용해 소설을 썼으며, 이의 제조를 위해 30만 달러를 투자했으나, 투자한 돈을 고스란히 날리고 말았다.
(2)컴퓨터의 입출력
이 파산은 많은 사업가의 관심을 끌었다. 여러 사람이 숄즈의 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소문자가 모두 인쇄될 수 있도록 하고, typying하고 있는 글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 입출력기기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컴퓨터 자체에 대한 관심에 못지 않았다. 컴퓨터에 사용된 최초의 매체는 천공카드였다. 천공카드는 일찍이 영국의 수학자인 베비지에 의해 도입됐지만 그 시초는 프랑스의 직조공인 자카르이 아이디어에서 비롯된다. 천공카드는 이후 홀러리스의 응용으로 인해 성공적인 매체로 자리를 잡는다. 그보다 앞서 1939년 제2차대전중 독일의 기술자인 코라드 추제는 자신이 만든 Z2라는 기계에 35mm자리 필름을 이용했다. 펀치필름이었다. 1951년 유니백(Univac)사는 종이테이프 대신 금속릴테이프를 선보였다. 또 1년 뒤에는 IBM701에는 날카로운 금속테이프 대신 부드러운 플라스틱 테이프가 채택되어 속도의 향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에도 불구하고, 천공카드는 근본적인 단점이 있었다. 즉 쉽게 알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타자기의 개선으로 관심이 기울었다. 전동타자기에 처음으로 뛰어든 회사는 IBM이다. IBM은 일렉트릭메틱사를 인수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타지기를 준비했다. IBM이 이처럼 새로운 타자기에 대한 투자를 한 이유는 IBM보다 먼저 컴퓨터를 완성한 유니백 컴퓨터의 입출력장치는 당시 기술을 한단계 진보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니백의 고속프린터 개발부는 라인프린터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19세기 기계식 타자기가 한번에 한글자씩 인쇄한 것과는 달리 라인프린터는 1백 20자로 이루어진 한 행을 단 한번의 동작으로 인쇄하는 것이었다. 한 글자의 위치마다 한벌의 자판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기술은 프린터의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으며 당시 최고 속도를 자랑하던 IBM의 프린터에 비하면 4배나 빠른 속도였다. 유니백의 모델-I는 46대나 팔려 나갔는데 이 고속 라인프린터 덕분이었다. 일격을 당한 IBM은 셀렉트릭이란 볼타자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종래의 타자기 글쇄가 한글자식 분리되어 있었던데 비해, 모든 문자와 기호를 골프공처럼 생긴 뭉치에 양각시켜 놓은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글자를 수정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타이핑 속도도 2배 정도 증가 시켜 주었다. 셀렉트릭은 IBM의 회심의 역작인 스트레치 컴퓨터에 붙여졌는데 불행히도 2천만 달러를 날리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부속장치인 셀렉트릭은 1970년대초가지 프린터 시장을석권했다. 이렇게 뛰어난 기능을 IBM에서는 파워타이핑(Power-typing)이라 불렀으나, 힐퍼라는 독일인의 제안으로 워드프로세서(Word-Processor)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라.도트 프린터
IBM의 셀렉트릭의 쇠퇴는 새로운 새로운 출력기계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 중에서 데이지휠 프린터는 단연 돋보였다. 데이지휠 프린터는 바퀴살에 달린 활자들을 작은 망치로 전기충격을 가하여 먹끈으로 하여금 종이에 인쇄를 하도록 하는 프린트방식이다. 데이지휠 프린터가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센트로닉스라는 회사에서 보다 혁신적인 프린터가 나왔다. 보통 도트매트릭스(dot-matrix)방식으로 불리우는 이 방법은, 전기충격을 단지 몇개의 핀뭉치가 필요한 모양의 글자나 도형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도트매트릭스 방식의 실용화는 197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열풍에 힘입은 바가 크다. 데이지휠에 비해 글자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다양한 글씨체와 다양한 기호를 찍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데이지휠과 비교할 수 없었다. 도트매트릭스방식은 일본 세이코 계열의 일본 엡슨(Epson)사에 의해 주도되었다. 세이코의 발전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탁상용 전자게산기와 금전등록기에 EP-101이란 도트프린터가 사용되었다. 욕심이 생긴 세이코는 프린터 전문업체인 엡슨을 세우게 된다. 도트프린터도 몇개의 핀이 있는가에 인쇄문자의 품질이 다르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휠 프린터의 글자체만큼 모양을 만들 수는 없어 데이지휠 프린터도 없어지지는 않았다.
1946년 최초의 아날로그 계산기인 애니악이 개발된 이후 컴퓨터는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1969년 인텔은 현재의 인텔의 신화를 창조하는 첫걸음이 되는 4004를 개발한다. 이 칩은 인텔의 엔지니어인 테드 호프(Ted Hoff)와 페테리코 파긴(Federico Fagine)에 의해 설계 되었으며, 후에 당시 computer-on-a-chip 이라는 애칭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이칩은 잘 만들어진 탁상용 계산기에 쓰이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1969년 여름, 일본의 전자계산기 생산업체인 비지컴(Busicom)의 대표단이 대형 컴퓨터용 메모리 칩을 생산하는 미국의 인텔(Intel) 간부들과 캘리포니아에서 만났다. 비지컴은 새로운 계열의 업무, 과학용 전자계산기를 만들기로 결정했고, 이 신제품의 요체가 되는 전자부품을 인텔에서 공급해 줄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인텔은 집적회로 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얼마전 수백개의 트랜지스터와 그 밖의 전자부품은 이들을 연결하는 전선을 소형 실리콘웨이퍼 위에 설치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텔은 2천여개의 트랜지스터를 담은 획기적인 집적회로(IC)를 이제 막 생산한 터였다. 비지컴은 이 놀라운 소형화 기술을 메모리뿐만 아니라 다른 회로들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새 전자계산기를 위해 IC를 생산하도록 인텔을 설득했다. 인텔도 이를 수락했다.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거기에 관여한 사람들조차 깜짝 놀랐다. 인텔이 컴퓨터 이용의 차원을 한단계 끌어 올린 것이다. 이제 컴퓨터가 활용될 수 있는 그 광대무변한 공간을 감히 헤아려 볼 ㅜ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다. 인텔의 엔지니어들은 컴퓨터의 핵심 직접회로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발명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칩위에 얹힌 CPU였다. 처음에는 인텔안에서도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간편한 계산기의 제작이라는 당초 설계의도를 넘어서서 활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채 10년도 못되어, 빈틈없이 설계된 인텔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후예들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계산기 논리엔진으로 뿐만 아니라 신호등 통제장치로도 쓰였다. 사람들이 늘상 쓰는 가전제품 - 제봉틀,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에도 등장하여 거의 모든 사람을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탈바꿈 시켰다.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발명된 지 20년이 채 못되어 장난감은 컴퓨터 두뇌를 얻게 되었다. 가령 인형이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한다든지, 저녁이 되어 쌀쌀해지면 스웨터를 입혀 달라든지, 하기에 이르렀다. 대형 컴퓨터에 못지않은 정교한 기능을 제공해 주는 운영체제의 발달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전에 힘입어,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이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생산했을 때 시판되고 있던, 가장 큰 대형 컴퓨터보다, 성능이 뛰어나고 다양한 탁상용 컴퓨터를 탄생시켰다. 컴퓨터는 더 이상 돈 많고 힘 있는 회사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몇만원만 있어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컴퓨터는 대기업들이 사용하는 숫자를 빨리 처리해 주는 거대한 기계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1년 영국의 섬록 컴프토미터 (Sumlock Comptometer)사는 전자계산기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다. 이 계산기가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TI : Texas Instrument)와 그밖의 회사들이 내놓은 계산기들은 모두 기계식계산기의 기어를 임시기억장소와 영구적인 전선 논리회로로 만들었다. 비지컴은 각각 특정한 용도를 갖는 일련의 계산기들에 대한 전체 계획을 가지고 인텔에 접근했다. 인텔은 당시에 2천개의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IC에 집적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인텔은 이 계획에 관심을 가지고, 마시언 호프(Marcian E. Hoff)라는 유능하고 젊은 설계사를 비지컴 계획에 투입했다. 동료들 사이에 테드로 불린 그는 비지컴의 계획이 인텔의 기술에 비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계산기의 각 기능을 별도의 칩으로 구성하는 대신에 이를 하나의 칩으로 집적하는 데에 생각이 이르게 되었다. 이 IC는 2천개 미만의 트랜지스터를 포함함으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대형컴퓨터의 중앙처리 장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또 2천개의 숫자는 인텔로서 가능한 숫자였다.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이름도 테드와 그 동료 연구원들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래 비지컴의 설계에 따르면, 하나의 계산기에는 매우 복잡한 10여개의 칩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테드의 계획에 의하면 테드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3개의 칩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은 이를 통해 회로 설계와 디자인을 더욱 간단하고 산뜻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의 테드의 연구원들은 테드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으나 19969년 늦여름 테드의 계획이 한결 융통성이 있고, 경제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70년 인텔은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를 공개했다. 이러한 이름을 지은 이유는 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데이타를 4비트 단위의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비지컴은 그러나 오늘날의 전자계산기에 비하면 매우 불편했다. 즉 입력에서 출력까지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알고리즘을 입력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전의 그 어떤 컴퓨터보다 매우 단순해 이에 대한 불평은 거의 없었다.
● 제4세대 컴퓨터(LSI 사용)
O 마이크로 프로세서와 제 4세대 컴퓨터
O 본격화되는 PC시대
O 발전하는 컴퓨터 언어와 SW, 컴퓨터 통신
가.마이크로 프로세서의 탄생
1970년대 초반에 IBM은 그들의 컴퓨터 시스템을 370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와 같은 컴퓨터들과 다른 큰 컴퓨터회사들에 의해 제작된 컴퓨터들은 보다 더 정교하게 집적된 소재를 사용하게 되었다. 즉 이것이 대규모 집적회로(LSI : Large Scale IC)와 초대규모 집적회로(VLSI : Very Large Scale IC)이다. 초대규모 집적회로는 하나의 실리콘 조각에 수만개의 회로를 집적시킬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초소형의 회로는 마이크로 처리장치, 마이크로 컴퓨터, 기억장치, 또 다른 컴퓨터들이 다양한 작업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와 D램 칩을 개발함으로써 미츠(MITS)라는 이름의 컴퓨터 회사가 최초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 회사의 출범은 마이크로소프트사 창립의 자극제가 되었다. 프로그래머가 특정 하드웨어용 소프트웨어를 머릿속에서나 상상하게 하려면 우선 컴퓨터 하드웨어가 생겨나야 함은 물론이다. 같은 이치로 프로그래머 역시 컴퓨터가 없으면 소프트웨어를 작성할 수 없다. 하드웨어는 항상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유도하면서 산업을 주도해 왔다. 빌 게이츠 역시 1974년 미니 컴퓨터에서 자신의 관심의 초점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1979년도 말에 모토롤라(Motorola)는 6800개의 트랜지스터에 상당하는 것들을 포함하는 마이크로 처리장치인 MC 68000을 소개했다. 1981년에는 IBM이 72000항목을 저장할 수 있는 기억장치를 소개했다. 4세대 컴퓨터들의 견본품에는 IBM 4300, IBM 3033, Burroughs B6900, Honeywell Series 60, NCR 8500 Series, Control Data Corporation's Cyber 205, IBM Personal Computer, Radio Shack PC-2 컴퓨터들이 있다. SYSTEM/360으로 시작된 제3세대 컴퓨터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규모 직접회로(LSI, LARGE SCALE I.C.)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1년 인텔(INTEL)사에서 발표한 마이크로 프로세서(MICRO PROCESOR) 4004는 마이크로 컴퓨터(micro computer)의 주춧돌이 되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MICRO PROCESSOR)의 등장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프로세서의 가격을 급격히 하락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내린 가격 덕분에 모든 공업제품에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이다. 더구나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컴퓨터 소유에 있어서도 큰 혁명을 일으켰다. 그 장본인은 애플(APPLE) 컴퓨터이다. 컴퓨터가 가정에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AS/400의 탄생
IBM은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기능을 마이크로코드의 형태로 하드웨어화한 혁신적인 아키텍처를 갖춘 S/38을 1980년에 발표한다. 이 시스템은 당시 최신 테크놀리지인 LSI 논리회로를 채택했으며, RAM MOSFET와 바이폴라제어 메모리를 사용,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평가되었다. 그 뒤 IBM은 1988년 새로운 미래 지향적인 AS/400을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래머의 생산성, 네트워크 관리기능, 디스크를 포함한 재반 시스템자원의 관리를 시스템이 흡수, 자동화함은 물론 이미지, 보이스, ISDN네트워크 지원, IBM의 통신구조인 SNA이외에도 TCP/IP, OSI지원등의 여타 시스템과 통합운용이 가능한 기종이었다. 이로 인해 엔터프라이즈 시스템, 혹은 전략정보시스템(SIS : strategy information system) 구축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협력처리(cooperative processing)의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아키텍쳐인 시스템응용구조(SAA : System Application Architecture)등의 지원도 가능하게 됐다. 또한 AS/400의 다중배열구조(multi array structure), 단일기억역관리(single level storage), 객체지향시스템(object oriented system) 등은 48비트 어드레싱에 따른 거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등과 연합하여, 아직은 정수나 문자에 국한되어 있는 데이터의 기준이 보이스나 이미지, 혹은 인공지능 등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스템 자원을 필요로 할 미래의 업무를 포용할 용량을 갖고 있었다. 현재 이미지 플러스, Call Path/400등 이들 분야가 가시화된 AS/400용 제품들이 이미 발표되어 미국, 일본 등지에서는 실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니시스의 미니 컴퓨터는 1989년에 발표된 유닉스(UNIX) OS을 채택한 U6000 시리즈로 슈퍼 마이크로에서 슈퍼 미니급에 이르는 제품군이 있다. U6000/10, 31, 51, 55, 60, 70, 80 등의 기종이 있으며 전기종이 유니시스 시스템 V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같은 해 발표된 U600/70, 80시스템은 인텔 803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탑재한 최신의 조화병렬처리 시스템(symetrical multiprocessor system)으로 구현된 Tightly-Coupled 슈퍼 미니컴퓨터이다. 이 시스템은 유니시스 시스템 V3.2를 근간으로 다중처리(multi tasking)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여러개의 중앙처리장치(CPU : central processor unit)를 효과적으로 구성, CPU상호간의 간섭을 배제, CPU들은 메모리 사용을 위한 시스템버스(system bus)의 통제나 끼어들기(interrupt)에 대처하는 추가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것을 고유한 기능의 회로에서 담당하게 했다. 90년에 발표된 슈퍼 마이크로 U6000/60은 25MHz인 인텔804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기반으로 수치프로세서인 80387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어 강력한 계산기능이 제공된다. 또한 CPU의 게산 속도를 지원하기 위해 고속의 캐쉬메모리(Write back cache)를 64KB 지원하여 25MHz에서 메모리에 의한 시간 지연없이 처리되어 CPU의 처리속도를 향상시켰다. 특히 메모리의 장시간 사용시에 시스템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2가지 체크 방식을 지원한다. 기존의 패러티 체크 방식은 4MB를 기본으로 80MB까지 확장이 가능하며, ECC방식은 에러를 체크하고 정정하여 장기간 사용과 전압의 이상 변동에도 안정성을 준다.
다.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컴퓨터 업체들
왕컴퓨터는 1977년 데이타프로세서 기능과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통합한 최초의 VS 시스템을 발표한 이후 VS/1000에 이르는 다양한 기종을 선보였다. 모든 VS시스템은 32비트 CPU시스템으로 서로 호환성을 가지며 구성에 따라 255명(멀티 OS인 경우 928명)까지 사용할 수 있고, 주기억 장치는 64메가 바이트(256MB/4 OS)까지 확장할 수 있다. VS의 구조는 당시 VS를 설계할 무렵 8비트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처음으로 개발됨으로써 VS는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I/O를 관리하는 구조와 이에 적합하게 설계된 끼어들기(interrupt)기법, OS 및 지원도구들을 가지고 CPU를 구축하였다.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VS를 개발하는 동안 사용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VS시스템은 CPU와 I/O를 관리하는 훨신 더 간단한 별도의 처리기를 갖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출발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분산 I/O 처리설계는 VS의 구조적 장점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다. VS의 구조는 분산 3층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최상위 CPU는 실제로 계산이 되는 장소이며 시스템의 다른 모든 활동을 관리한다. 두번째는 VS의 핵심인 인텔리젼트 레벨은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모든 주변기기를 컨트롤한다. 세번째 레벨은 여러가지 지정된 작업을 수행하는 주변기기 레벨이다. 휴렛 팩커드(HP : Hewlett Packard)는 1972년 HP 3000 시리즈 CX 미니 컴퓨터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계속해서 1980년에 HP 3000시리즈 33, 30등을 발표한 이후 1990년 초 HP3000과 HP9000 계열로서 하위 기종에서부터 중간급 고위 기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델을 선보였다. 1990년 발표한 HP-PA제품들은 CMOS 칩기술을 기초로 한 고위기종의 다중처리체계(multi-processing system)도 포함, 종전의 메인프레임 수준의 성능을 필요로 하던 수준까지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에 발표한 HP3000시리즈 980/10과 980/200의 특성은 RISC 아키텍쳐와 새로운 CMOS 기술을 사용, 프로세서의 성능과 제품의 신뢰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공기냉각방식을 사용, 차지하는 공간과 전력소모를 줄였으며 시스템관리가 간편해졌다. 949, 955는 단일의 VLSI칩 프로세서를 이용하였다. 한편 HP9000 시리이즈는 기존의 고위기종에 비해 성능이 4배나 향상된 다중처리컴퓨터(multi processing computer)를 포함, HP-PA RISC 기술을 기본으로 했다. 특히 HP9000시리즈의 최하위기종으로 발표된 832S는 강력한 RISC( )프로세서를 내장했으며, 대용량 디스크와 테이프드라이버와 1.3GB용량의 DAT(digital audio tape)드라이버를 포함하고 있다. DEC는 1991년 야심의 알파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는 1991년 2월 알파칩의 개발로 대두되기 시작한 이 계획은 21세기의 네트워크컴퓨팅 환경에 중요한 가교역활을 맡을 DEC의 새로운 아키텍쳐이다. 이때에 개발된 알파칩 21064는 피크성능 3백MIPS, 동작주파수 1백 50MHz로 현재 나와 있는 64비트 리스크 마이크로프로세서 가운데 최고수준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다. 또 DEC는 최근 기존 기술제휴선인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와의 제휴관계를 보다 강화함으로써 새로운 윈도우즈 운용체계의 도입 및 응용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섰다. DEC가 이번에 IBM과 결별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음에 따라 미국 퍼스날 컴퓨터 및 워크스테이션 시장은 IBM-애플 과 DEC-마이크로소프트 양 진영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DEC가 세계 컴퓨터업체들의 연합체인 ACE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등 ACE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과 맞물려 그 위상을 한층 높일 것으로 예상된다.
라.탠덤
(1)멈추지 않는 컴퓨터
1974년 여름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탠덤 컴퓨터스(Tandom Computers)라는 신생기업은 새로운 컴퓨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 컴퓨터는 저렴한 경비로 고장에 대비할 수 있는 컴퓨터의 개발이 그들의 목표였다. 새로운 컴퓨터는 하드웨어 혹은 소프트웨어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포괄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개발이 그들의 목표였다. 설립자 짐 트레이빅(Jim Treybig)은 휴렛-패커드(Hewlett-Packard)에 미니컴퓨터 영업부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고, 그의 동료 기술자 역시 휴렛-패커드 출신이었다. 자금은 휴렛패커드에서 그를 채용했던 토머스 퍼킨스(휴렛패커드의 영업부문 총무 이사직을 끝으로 은퇴한뒤 벤쳐캐피탈 회사를 차리고 있었다)와 그의 동업자인 유진 클라이너(그는 실리콘밸리의 첨단 반도체회사인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의 창업주였다)였다. 5만달러로 시작한 회사는 휴렛패커드 출신 간부 출신인 잭 루스타누와 함께 사업 구상을 함께 하면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들 목표의 기본 방향은 고장방지능력, 온라인 수리, 모듈의 확장성 등 세 가지였다. 즉 어떤 한 부문이 고장 나더라도 컴퓨터는 전체적으로 이상없이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만족하는 컴퓨터를 위해서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만 했다. 기존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교환백업(back-up)이라고 부르는 방법밖에 없었다. 교환백업은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예비 컴퓨터를 준비하고 있다가 작동중인 컴퓨터가 고장이 나면, 준비중인 컴퓨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준비중인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콜드백업(cold back-up)이라 불렸다. 또 다른 하나는 예비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있다가 고장이 나면 신속하게 새로운 컴퓨터가 작업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핫백업(hot back-up)이라 불렸다. 그러나 두가지 방법 모두 작동이 멈춘 이후 새로운 컴퓨터가 작동할 때까지의 데이타에 대해서는 대책이 전혀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예비컴퓨터와 작동중인 컴퓨터 사이에 교신이 있어야 했다. 교신을 위해서는 운영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 물론 하드웨어에 대한 재검토도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어느 회사도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다. 탠덤-16으로 불리운 탠덤의 최초의 시스템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만들어졌다. 기본시스템은 두개의 독립된 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16개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운영체제는 탠덤 트랜잭션 오퍼레이팅 시스템(T/TOS:Tandom Transaction Operating System)로서 각 모듈에 심어져 있었다. 그들은 작업에 뛰어든 지 17개월만에 작업을 완료했다. 1975년 12월 비지니스위크지에 고장을 모르는 컴퓨터라는 제목으로 짤막하게 소개되었고 다음해 5월 뉴욕의 시티은행에 최초로 납품되었다. 이때 신제품의 이름은 논스톱시스템으로 운영체제는 가디언 오퍼레이팅 시스템으로 바뀐 상태였다. 탠덤은 은행이 논스톱시스템을 구입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유망한 고객이라고 생각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은행은 고객의 증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점포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으나, 인건비와 운영비의 증가로 인해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1970년대 초에 등장한 현금자동인출기(ATM)였다. 예금, 입금, 잔고확인 등의 비교적 단순하면서 많이 사용되는 업무를 자동화하여 한대의 기계로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즉 이를 지금과 같이 온라인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인출할 수 있는 액수는 제한되어 있었고, 그 처리결과는 매일 중앙컴퓨터에 보내져 갱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번거로움을 해결한 것이 OLT P(On-line Transaction Processing)시스템이다. 즉 ATM과 은행의 중앙 컴퓨터와 온라인으로 연결하면서 은행업무를 대행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중앙컴퓨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즉 만의 하나 중앙컴퓨터가 고장을 일으킨다든지, 아니면 ATM의 고장을 인한 데이타의 이상을 복구할 방법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은 실수라도 은행의 신용도를 결정적으로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것이 탠덤의 고장방지시스템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IBM의 제품을 대신해 무명기업의 컴퓨터로 교체하는 것을 기피했고 고장방지시스템을 구입한 기업도 이를 부수적인 업무에 한정해 쓸 뿐이었다. 그러나 신용카드회사의 신용조회 등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은행들이 앞다투어 고장방지시스템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1977년 퍼스트내셔날은행이 이를 본격적으로 도입했고 그 명성을 더해 주었다. 더불어 ATM도 생활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고장방지 시스템은 증권업계와 제조업체에도 고장방지시스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더해 가기 만 했다.
(2)무정지 컴퓨터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컴퓨터가 각 기업체에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컴퓨터의 구입이 늘어날수록 문제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즉 은행과 같은 기업의 OLTP(on-line transaction processor) 시스템이 정지하면 모든 업무가 정지하고 마는 것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컴퓨터 시설이 하드웨어의 고장이나 소프트웨어의 고장때문에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예기치 않게 작동을 멈추곤 하였다. 어떤 컴퓨터는 서너달에 한번씩 고장이 나기도 하는 것이었다.컴퓨터 고장이 빚는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백업(back up)을 위한 여분의 컴퓨터를 중복설치하는 것이다. 그것을 설치하려면 여러대의 컴퓨터를 사야하므로 많은 자금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특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주문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중복시스템을 설치하고 유지하는데에 1975년 기준으로 연간 2억달러에 달했으며, 그 지출은 해마다 35%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주 의 산타클라라에 있는 탠덤 컴퓨터(Tando m Computers)라는 한 신생기업에서 저렴한 경비로 컴퓨터 고장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중에 있었다. 비록 신생기업이기는 했지만 대표는 휼렛-패커드(Hewlett-Packard)의 미니컴퓨터 영업부장을 지낸 짐 트레이빅(Jim G Treybig)이었고, 고급 엔지니어와 핵심 간부도 휼렛-팩커드 출신이었다. 탠덤이전까지는 발생가능한 심각한 사고를 대비해 만들어진 시스템은 중소기업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비쌀 뿐 아니라, 문제를 피상적으로 밖에 해결하지 못했다. 어쨌든 사고를 대비한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여분의 컴퓨터를 마련해 두는 것으로 사고가 나지 않는 한 켜지지 않는다고 한데에서 콜드 백업(cold back up)이라고 한다. 주컴퓨터가 고장나면 오퍼레이터는 예비컴퓨터를 작동시켜 트랜잭션(transaction)을 처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예비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손실된 데이타의 복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보다 조금 더 개량된 방법은 예비 컴퓨터를 주 컴퓨터와 함께 작동시켜 두었다가 주 컴퓨터가 고장나면 오퍼레이터는 일련의 명령을 입력함으로 예비컴퓨터가 작동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핫 백업(hot back up)이라 불렀다. 이 과정은 단 몇분밖에 소요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의 데이타를 복구할 수 없기는 콜드 백업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두 컴퓨터의 종류가 다를 경우에는 데이타의 호한을 위해 운영체제 또는 해당 프로그램 등에서의 소프트웨어를 재설계해야 했다. 결국 핫백업시스템의 소프트웨어 가격은 일반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비싼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컴퓨터 업계에서는 단순한 일괄처리방법의 성능향상에만 주력하고 있었고 백업시스템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휼렛-팩커드에 입사한지 5년이 되는 트레이빅은 1973년 본격적인 백업시스템의 개발을 위해 사업을 시작했다. 트레이빅은 휼렛-팩커드 시절 상사였던 토머스 퍼킨스를 통해 자본을 조달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창업자 중에 하나였던 유진 클라이너 역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합류했다. 새로운 회사는 한 레이저회사의 공장 한 귀퉁이에 칸막이를 한 사무실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 5만달러와 두 설계자를 채용함으로써 새로운 사업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특징은 고장방지능력, 온라인 수리, 모듈의 확장 가능성 등 세가지이다. 즉 컴퓨터의 한부분이 고장이 나더라도 계속 가동된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설계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설계를 동시에 해나가기 시작했다. 최초의 시스템은 잠정적으로 탠덤-16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컴퓨터는 2개에서 16개의 독립모듈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
무정지(non stop)컴퓨터는 탠덤컴퓨터가 상표등록한 것으로 업계에서는 비상안전(fault tolerent)컴퓨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정지컴퓨터는 일반적으로 비상안전컴퓨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무정지컴퓨터의 아이디어를 창안하고 탠덤컴퓨터를 창업한 사람은 제임스 G 트레이빅이다. 41년생인 그는 HP에 근무하면서 이를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해 탠덤컴퓨터를 설립한다. 43년 33세때 일이다. 그는 76년 제1호를 뉴욕시의 시티뱅크에 납품해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논스톱컴퓨터의 이름을 드높인 사건이 블랙먼데이로 불린 87년 10월에 일어난다. 그때 통상의 3배나 되는 온라인트랜잭션이 몰려 시카고 등 각지의 컴퓨터가 고장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탠덤컴퓨터인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는 그야말로 무정지였다. 고장예비회로를 채택한 논스톱컴퓨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슈퍼 컴퓨터 지금까지 슈퍼컴퓨터는 파이프라인 자체의 클럭사이클을 단축하거나, 프로세서 내부의 파이프라인수를 복수화해 고속화를 이루어 왔으나, 앞으로는 병렬화 컴파일러의 개발과 함께 프로세서 자체의 병렬화가 진행되고 병렬도가 향상됨에 따라 메모리 공유형에서 크로바결합등의 상호결합형으로 이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수의 고속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똑같은 토폴로지에 의해 결합한 미니수퍼컴퓨터가 엔지니어링분야뿐만 아니라 각종 시뮬레이션용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범용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성능의 향상뿐만 아니라 주기억용량, 외부기억용량, 입출력성능, RAS(random access storage)기능, 자원보호기능의 향상으로 데이타베이스의 대규모고속화, 신뢰성의 향상, 보안기능의 강화 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범용컴퓨터의 CPU성능향상은 병렬화를 통해 단체성능 향상의 둔화를 보완하고 이와 함께 주기억, 확장기억의 대용량화가 진행될 것이다.
(1)논리 이론가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카네기멜론대학의 행정학교수인 사이먼은 쇼(Shaw)라는 조교의 도움으로 논리이론가 (logic Theologist)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사이먼은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쓴 수학의 원리 (Principia Mathmatica)를 읽으며, 전통적으로 사람의 고유한 일이라 생각했던 수학의 정리의 증명을 논리이론가에게 수행시켜 보기로 하였다. 수학의 원리를 읽은 논리이론가는 조잡하기는 해도 증명을 하기 시작했고, 어떤 것은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한 것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증명하기도 하였다. 기세가 등등해진 사이먼은 10년안에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길 수 있는 컴퓨터의 등장을 장담했다. 더구나, 작곡, 번역, 작시 등 인간의 공유한 영역이라 생각한 영역까지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사이먼은 계속해서 만능해결사 (General Problem Solve)라는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이 프로그램의 최종개발목표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근사하게 해결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만능해결사는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문제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아직도 체스 프로그램은 체스 챔피언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초기열기와는 달리 발전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화려하긴 하지만,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생각되지 않았던 문제점들이 계속 나타났고, 그때마다 연구자들은 보통 인간이 20여년동안 배우는 상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더구나 1950년대 초부터 거국적으로 시작된 자동번역(영어와 러시아어간)의 실패는 인공지능에 기대를 걸어온 여러 연구자들에게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주었다. 하버드 대학의 안소니 에팅거가 이끄는 자동번역팀은 언어의 번역에 얼마나 많은 부수적인 지식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번역, 추론과 증명, 물체인식 등에서 초기의 기대와 달리 실패한 이유는 너무도 광범위한 목표를 잡았기 때문이다.
2.본격화되는 PC시대
가.진전되는 가정용품의 컴퓨터화
비지컴의 전자계산기는 무수히 많은 가정용품의 컴퓨터화의 서곡에 불과했다. 다음 주자는 재봉틀이었다. 어쩌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재봉틀과 전자계산기는, 정밀기계공학의 결실이었다. 인텔이 4004를 내놓을 무렵 싱어라는 재봉틀회사의 도널드 커처 사장은 전자식 재봉틀을 만들어 보고자 결심했다.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금고제작 전문 회사에서 자동거래 단말기를 만들었던 존 라이즈를 이를 담당할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라이즈는 이를 위해 싱어가 자랑하는 푸투라(Futura) 모델을 가지고 직접 재봉을 하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푸투라는 그 바느질 솜씨에서는 나무랄데가 없었다. 그러나 재봉틀을 처음으로 돌릴때의 준비작업이 너무도 복잡했다. 다이얼과 레버는 무려 5천여가지의 재봉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 바느질의 시작 주기가 다소 불규칙했다. 1971년 8월 라이즈는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간편하게 조작할 수 있는 재봉틀을 8명의 연구원을 중심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개발의 실무지휘는 가전제품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가진 잭 워스트(Jack Wurst)라는 엔지니어가 맡았다. 그 외에도 전자공학에 열정을 가진 연구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리 상부에서 어떤 구체적인 지시조차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기본계획을 짜는 데에도 석달 가까이 걸렸다.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인텔의 4004를 사용했다. 3년뒤 아테나2000으로 이름 붙여진 재봉틀을 생산했다. 이는 25가지의 바느질을 간단한 스위치의 조작만으로 가능했다. 개발된 지 9개월후 부터는 주문을 가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후에 조금 더 개량된 제품들도 소개되었다. 그러나 70년대 말에 이르러 이 역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소비자는 더욱 사용이 편리한 재봉틀을 요구하였다. 1979년에 록웰 인터내셔날(rockwell International)사가 생산하는 8비트 프로세서에 의한 재봉틀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 새로운 재봉틀이 1981년 모델 2010이 상점에 나왔다. 이제품 역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1971년은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비지컴은 많은 경쟁사와의 경쟁을 위해 인텔에 가격을 낮추어 줄 것을 요청했고, 인텔은 이에 응하는 대신 비지컴의 독점권을 없앨 수 있었다. 비지컴은 가격을 낮출 수 있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다른 경쟁사들과 경쟁을 할 수 없었고 결국은 물러서고 말았다. 71년 11월 인텔은 내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자관련 잡지에 칩을 선전하는 광고를 실었다. 집적회로의 새시대 선언, 마이크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칩위의 컴퓨터! 라는 자신만만한 문구였다. 다음해 2월에 인텔은 개당 200달러인 4004를 8만 5천달러 어치나 팔았다.
나.최초의 PC들
최초의 PC에 대한 여러가지 의견이 있으나 아마도 1971년 미국의 불랭켄베이커가 만든 켄벅Ⅰ 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마이크로 프로세서인 인텔의 4004 를 채택한 이 컴퓨터는 불과 256자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며, 전자계산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컴퓨터는 불과 40대 만이 팔렸다. 이 무렵 컴퓨터 테크놀로지 코퍼레이션(Computer Technology Corporation)-나중에 데이타포인트(Datapoint)가 된다-이라는 회사로부터 좀더 성능이 좋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개발을 의뢰 받았다. 인텔은 인텔에 8비트 칩의 개발을 의뢰하였고 1972년 8비트칩인 8008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CTC는 이칩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인텔은 이칩을 4004보다 싼 120달러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8008을 제일 먼저 사간 사람중에는 조나단 티터스(Johnathan Titus)라는 전자기광이 있었다. 1973년 가을 이 칩을 사용해서 마크(Mark)-8이라고 이름붙인 컴퓨터를 만들었다. 내용물은 평범한 금속상자속에 8008 마이크로프로세서, 부속 사전배선 회로판 등을 포함하여 약 250달러가 소요되었다. <라디오 일렉트로닉스>지 1974년 7월호 소개되었고, 각각의 비트를 나타내는 스위치와 결과는 앞면에 있는 자그마한 역시 각각의 비트를 나타내는 전구에 나타나게 되어있는 이 불편한 기계를, 실제로 이를 만들어본 사람이 2,500명 가까이나 되었다.
다.PARC의 PC
1970년대 제록스 PARC의 컴퓨터과학 연구소(CSL : COMPUTER SCIENCE LABORTORY)는 가장 뛰어난 자취를 남긴 컴퓨터 연구의 산실 이었다. 그중에서도 PARC의 연구원 버틀러 랩슨과 척 랙커는 1972년-1973년에 알토를 설계하여 세계 최초의 퍼스날 컴퓨터 제작자가 되었다. 알토는 최초의 고속 컴퓨터 네트워크, 비트맵 화면과 마우스, 하드 디스크 데이터 저장장치 등을 갖추고 있던 컴퓨터 였지만 제록스는 이를 상품화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어쩌면 이는 현명한 결정이었는지 모른다. 뒤에 나올 애플은 비지칼크같은 소프트웨어가 있었지만, 알토에게는 그런 소프트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1)최초의 상업용 컴퓨터 키트 알테어 8088 : 1975년
사실 개인용 컴퓨터의 역사를 어느 기종으로 잡느냐는 데에는 사람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애플 II를 처음으로 잡는 사람도 있고 코모도어의 PET 기종이 먼저 나왔으므로 이를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키트의 형태로 만들었던 알테어 8088이라는 기종을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MITS사에서 만든 알테어 8088 기종은 인텔의 8088 CPU를 탑재했고 256바이트의 메모리 용량을 지녔다. 그 당시 판매 가격은 395달러였다고 한다. 그런데 흔히 개인용 컴퓨터라고 말할 때 연상되는 키보드나 모니터 부분이 없다. 그 외에 외부 저장 디바이스도 빠져있었다고 한다. 사용자들이 프로그래밍을 하기 위해서는 본체의 스위치를 조작하여 프로그래밍을 하였다고 하는데, 전자분야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들에게 인기가 높아 3주만에 개발사는 25만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이후에 이 기종의 호환기종인(최초의 호환기라 해야 할 것이다) IMSAI 8088과 68000을 CPU로 사용한 알테어 680, 그 외에도 키트 형태로 된 몇몇 기종들이 시장에 출시되었다. 애플사를 창립한 스티브 워즈니악도 회고하기를 애플 I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가 알테어 8088기종을 살 돈이 없어서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로 개인용 컴퓨터 역사상 매우 중요한 기종 중의 하나이다. 특히 미국의 마이크로 인스투르멘테이션 앤드 텔레메트리 시스템즈(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 try systems)사의 에드워드 로버츠(Edward Roberts)가 1975년에 알테어(Altair) 8800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PC의 역사는 그 어느 산업의 그 어떤 제품보다 발빠른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PC의 1세대인 알테어 8800은 인텔의 8080칩을 채택했으며,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확장슬롯의 개념이 도입되어 있었으나, 소프트웨어에는 상당히 미미하여 사용자가 일일이 프로그램을 작성해 주어야 했다. 또 오늘날과 같은 키보드도 모니터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이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폴랜은 미츠(MITS)사가 개발한 알테어 8800 마이크로컴퓨터를 소개한 파퓰러 일렉트로닉스 지가 1975년 1월호를 빌 게이츠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곧 퍼스널 컴퓨터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프로그램 언어가 절실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이는 MIT의 학생이었던 에디 로버트와 하버드의 학생인 빌 게이츠가 공동제작한 것이다. 또 빌 게이츠는 폴 알렌과 공동으로 개인용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식 언어를 처음으로 개발해 냈다. 이는 75년 컴퓨터 광처럼 고가의 알테어8800 컴퓨터를 살 수 없었던 게이츠와 알랜은 하버드 컴퓨터 연구실에 있던 PDP 10 미니컴퓨터로 알테어의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능을 모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그로부터 6주후 그들은 미니컴퓨터를 사용해서 모의 알테어 컴퓨터를 사용해서 모의 알테어 컴퓨터를 위한 베이식 프로그래밍언어를 작성했다. 이는 MITS 베이직 이라 불렀다.
라.2세대 PC (애플 Ⅱ)
(1)최초의 PC용 OS
그러나 이 새로운 유형의 컴퓨터가 성공하기위해서는, 좀더 쓸모가 많아야 하고 쓰기에도 편리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운영체제(OS : Operating System)가 없다는 것이었다. 대형 컴퓨터용으로는 GM/IO, SOS, OS/360 같은 운영체제가 개발되어 있었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위한 운영체제는 개발되어 있지 못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작회사는 운영체제의 설계를 컴퓨터 제작회사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회사마다 운영체제는 천차만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마이클 슈레이어(Michael Shrayer)는 자기의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자그만치 80번이나 고쳐 쓰는 수고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는 가장 많이 쓰이는 운영체제에 적합하게 몇가지 운영체제에만 적합하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결국 피해는 사용자에게 돌아가 아무리 유용한 프로그램이라도 자기의 컴퓨터의 운영체계와 다르면 그림의 떡일 수 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의 컴퓨터과학 교수인 게리 킬달(Gary Kildall)은 비교적 초기에 4004를 구입했다. 항법계산을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킬달은 엉뚱하게 4004의 내부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은 이를 개발한 인텔에게 계약직 직원으로 자신을 채용하도록 설득했다. 인텔에서의 첫번째 임무는 대형 컴퓨터용 언어인 PL/1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PL/M이라는 프로그래밍언어를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용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PL/1은 이미 과학용, 상업용, 컴퓨터 시스템용으로 폭넓게 사용되고 있었다. PL/M을 PL/1에 가장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는 PL/1이 쓰이고 있는 대형 컴퓨터와 유사한 운영체제하에서 설계해야 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킬달은 먼저 운영체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운영체계는 보조기억장치로 디스크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킬달은 디스크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 이어서 같은 학교의 존 토로드교수를 영입하여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주일만에 8080용의 새로운 운영체제인 CP/M을 만들었다. 원래에는 컨트롤 프로그램 모니터 (Control Program Monitor)를 듯했지만, 나중에 그 의미는 마이크로프로세서 제어프로그램(Control Program for Microprocessors)으로 바뀌었다. CP/M은 PL/M으로 프로그램을 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렇지 않았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CP/M은 대부분의 8080프로세서를 사용한 마이크로컴퓨터에는 잘 작동했지만, 일부의 마이크로컴퓨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킬달은 이를 위해 운영체제의 일부를 재편했다. CP/M은 결국 808마이크로프로세서 이외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한 업체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여기에서부터 소프트웨어는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2)애플II의 시작
애플이 잡스의 차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HP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워즈니악은 179달러나 되는 8080 CPU에 불만을 품고 보다 값싼 컴퓨터를 만들기를 마음먹고 애플 I을 개발하기에 이른다(그림 2). 알테어 기종과 달리 MOS 테크놀러지의 6502칩을 CPU로 사용했는데 불과 25달러에 판매되는 저렴한 칩이었다. 그리고 워즈니악은 보다 쉬운 컴퓨터의 사용을 위해서 키보드와 모니터를 연결할 수 있게 만들었다(그림 2). 하지만 이 기종은 사운드나 그래픽, 컬러가 지원되지 않았다. 맥 사용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워즈니악과 잡스는 ’76년 4월 1일 애플이라는 회사를 차린 후 근처의 바이트라는 컴퓨터 상점에 애플 I을 팔기 시작한다. 그 당시의 가격은 666달러였으며 모니터와 파워, 키보드는 구입자가 해결해야 했다. PC의 제2세대는 1977년 4월 애플Ⅱ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기원은 더욱 거슬러 올라간다. 알테어의 출현에 큰 자극을 받은 젊은이들이 1975년 캘리포니아의 한 차고에서 모였다. 그들은 다양한 신분과 처지를 가졌지만, 컴퓨터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고, 그 재능도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임의 명칭은 홈브루 컴퓨터 클럽 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일부 이름만 들어보아도, 이 모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과 넥스트의 스티븐 잡스, 애플의 스티브 워즈니악등이 있었다. 이중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자동차를 팔고, 전자계산기의 외판을 하며 자금을 모으고, 모험 자본가를 통해 애플컴퓨터를 차렸다. 1976년 4월의 일이었다. 애플Ⅰ은 이미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소개가 되었다. 애플Ⅱ라는 이름으로 1977년 4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제1회 웨스트 코스트 컴퓨터전시회에 소개되었고, 판매량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플Ⅱ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개인용 컴퓨터의 잠재수요를 이끌어 내고, 수 많은 프로그래머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잡스는 타임즈의 표지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 PC는 모토롤라의 M6800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CPU로 채택했고 소프트웨어는 비지칼크(VisiCalc)가 내장되어 사용되었다. 당시 이 PC는 세계 컴퓨터 업계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키며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급진전해 멀티플랜, 로터스 1.2.3.등이 발표됐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자부품 판매회사인 미국의 탠디사는 TRS-80을 발표했는데 CPU는 Z-80칩을 채택했다. 코모도어 인터내셔날에서는 애플Ⅱ와 비슷한 환경을 가진 PET라는 PC를 선보였다. 애플은 회사내에서 힘들여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애플사밖의 제작자를 활용하기 위하여 애플Ⅱ의 중요한 몇가지를 보완했다. 그 가운데에 하나는 1978년 6월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디스크Ⅱ라는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였다. 이 새 저장장치는 케이블로 본체와 연결되는 외부기억장치이다. 이러한 드라이브를 사용하는 당시의 PC는 탠디라디오사의 제품과 애플Ⅱ가 전부였다. 이외에도 당시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에게 큰 인기가 있던 프로그래밍언어인 파스칼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애플의 전략은 적절한 것으로 비지칼크 이외에도 워드 프로세서인 워드 스타 , 데이타베이스 프로그램인 d Base Ⅱ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의 탄생을 볼 수 있었고 아울러 이들 소프트웨어의 덕으로 더 많은 판매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장기전략으로 캘리포니아주의 각 학교에 한대씩의 애플Ⅱ를 기증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모든 프로그래머들이 애플Ⅱ만을 위한 프로그램개발에 전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장기적으로 회사에 직접적인 자산이 되었다. 그중의 하나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컴퓨터과학 대학원의 2년차 학생이었던 앤디 헤르츠펠드를 애플의 신봉자로 만든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프램그램을 개발해 무료로 나누어 주었으나, 곧 직업프로그래머로 변신했다. 첫작품은 당시 대문자만 나오던 애플Ⅱ의 단점을 해결해 준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후에 애플사에 입사해 매킨토시용 프로그램개발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게 되었다. 1979년엔 기존의 애플 II를 개량한 애플 II+가 발표되기에 이른다(그림 4). 이 기종은 국내 컴퓨터 사용자들에게도 낯선 기계가 아닌데, 한국 컴퓨터의 메카라고 불리었던 세운상가에서 조립된 애플 II+ 호환 기종들은 우리나라 컴퓨터 보급에 일조했었다. 애플 II+ 기종은 48KB 램 용량을 가지고 있었고 초창기에 탑재되었던 애플의 Integer Basic은 애플 소프트 베이직으로 교체되었다. 그 외에도 베이직 상태에서의 텍스트 에디팅 기능이 향상되었다. 애플 II에 비해 많은 부분이 향상된 Apple II+ 기종은 1천1백95달러에 판매되었다. ’79년도에는 최초의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인 비지캘크가 등장하였다. 마치 엑셀을 돌리기 위해 PC를 구입하는 것처럼 비지캘크는 애플 II+ 기종의 폭발적인 판매를 이끌게 된다. 애플 II+ 기종은 83년에 애플 IIe가 나오기까지 개인용 컴퓨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8비트 컴퓨터 중 하나였다. 애플 II 컴퓨터가 컬러와 그래픽과 같은 아기자기한 기능에 강점이 있었다면, TRS-80 기종은 그래픽은 지원되지 않았지만 자사의 TRS DOS를 일찍부터 지원했기 때문에 비즈니스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1980년 8월에 출시된 TRS-80 Model III는 경쟁사인 애플의 II+와 대응하기 위하여 롬을 16KB로 확장하였으며 램도 48KB까지로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자사의 TRS DOS를 사용하여 면당 160KB까지의 용량을 지원했다. 1979년 이후 애플은 개인용 컴퓨터의 리더 자리를 유지했다. 애플은 애플 II+의 후속 기종으로 애플 III를 ’80년 봄에 내놓기에 이른다. 애플 III는 기본 80컬럼 기능을 지원하는 비즈니스 머신으로 발표되었지만, 초기의 제품 불량, 제한된 확장성, 부족한 애플 II+ 에뮬레이션 기능, 전용 애플리케이션의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엄청난 손해를 가져왔다. 애플 III는 애플의 첫 실패작으로 기록된다.
(3)애플II의 경쟁자들
하지만 애플Ⅱ가 몰고올 엄청난 파장은 사실 HP가 그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워즈니악은 HP의 사원으로 애플Ⅰ을 생산할 것을 상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애플Ⅰ이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와 이미 HP도 유사한 제품개발에 뛰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이 제품은 과학용과 전문가용으로 80년에 완성되어 HP-85 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자사제품에서만이 사용가능한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때문에 일부의 사용자에게만 위력을 떨쳤다. 그러나 이무렵 PC시장은 애플Ⅱ 뿐 아니라, 코모도 PET, 라디오 색 TRS-80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애플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해 전혀 경험이 없던 브리클린이 개발할 프로그램을 독점 판매키로 하고 PC를 대여해 주었는데 이 PC가 애플이었다. 즉 브리클린에게는 PC에 대한 선호도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빌려온 PC가 애플이었을 뿐이다. 즉 1979년 하버드 대학원생이었던 댄 브리클린과 프로그래머인 보브 프랭크스턴이 회계사의 장부를 전산화한 프로그램을 애플Ⅱ에서 구현한 것이다. 비지칼크가 소개되고 1년동안 판매된 애플Ⅱ중 약 1/5이 비지칼크의 사용을 위해서 구입해 간것으로 보아 애플Ⅱ의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애플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코모도어의 PET는 애플과 같은 완제품의 형식으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저렴한 가격(598달러, 모니터, 카세트 레코드 포함)에도 불구하고 TRS-80이나 애플 II처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애플 II보다 약간 늦은 8월에 시판된 기종이었는데 애플이 매니아들을 위한 개인용 컴퓨터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에 라디오쉑의 TRS-80는 업무용에 중점을 둔 개인용 컴퓨터였다(그림 3). 최초의 모델은 Z80 CPU와 기본 사양으로 4KB의 램, 4KB의 롬을 가지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애플보다 앞서서 단면의 83KB 용량의 플로피디스크를 탑재하여 실용성을 높인 점이다. 아마 CP/M모델을 제외하고는 최초의 DOS(Disk Operati ng System; TRS-DOS)를 탑재한 컴퓨터라 할 수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베이직을 탑재했다. TRS 시리즈는 그 후에도 꾸준히 사양을 높여서 IBM PC가 나오기 전까지 업무용 PC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가격은 모니터와 카세트 레코더를 포함하여 600달러였다. 수많은 컴퓨터 회사가 혼전을 벌이는 정글과 같은 시기에 코모도어는 Commodore 64라는 모델을 발매하여 애플 II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한다(그림 8). 흔히 말하기를 8비트 시대에 세 개의 컴퓨터를 꼽으라면 애플 II와 TRS-80, 코모도 64를 들 정도로 성공한 기종이다. 그런데 엄격히 이야기하면 코모도어 64는 업무용이라기 보다는 가정용 컴퓨터로서 게임 및 그래픽에 나름대로의 강점을 지닌 기종이었다. 애플 II보다도 월등한 해상도, 다양한 컬러 지원, 64KB 메모리 등은 매력적이었고 SID라고 불리우는 사운드 칩을 최초로 채용하였다. 코모도어 64는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소프트웨어의 출시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수많은 기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각 기종들간의 호환성에는 문제가 있어 이기종간에 소프트웨어는 서로 교환할 수 없었다. 하나의 표준을 세우고 각 기종간의 호환성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MSX 프로젝트가 기획되었다. 최초의 주창자는 일본의 아스키이며 하드웨어 설계는 일본의 아스키사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가 담당했다. 사실 MSX의 취지는 매우 원대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가정용 컴퓨터로 개발되었고 NEC나 후지츠, 샤프 같은 일본의 메이저 컴퓨터 회사가 아닌 소니나 미쯔비시와 같은 가전업체가 주로 개발에 참여했다. ’84년부터 본격적인 발매가 시작된 MSX는 미국에서는 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한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지역, 브라질이나 칠레같은 남미, 네델란드와 같은 유럽지역, 구소련 등에서는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코나미나 남코와 같은 대형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MSX용 게임을 개발하여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기종이었다.
(4) 애플II의 후속 모델
’79~’82년까지 애플 II의 새로운 시리즈는 발표되지 않았는데 결국 애플에서 신경쓰고 있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와 별개로 애플 Iie 기종이 발매되기에 이른다. 약간의 마이너 체인지가 있었지만 애플 IIe 기종은 ’93년에야 단종되는 등 역대 애플사의 개인용 컴퓨터 중에서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우선 애플 IIe는 80컬럼 디스플레이 기능과 소문자 표시 기능을 제공했으며, 64KB 램과 뱅크 개념을 사용하여 128KB까지 램을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오픈 애플과 클로즈 애플키 등을 제공했고 보조슬롯(auxiliary slot)을 지원했다. 또한 키보드 역시 촉감이 좋은 키보드로 교체되었다. 그래서 한 달에 6만대 에서 7만 대씩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애플 II+ 기종보다 두 배나 많은 판매량이었다. 또한 많은 기대를 모았던 IBM PC jr이 예상외로 좋지 못했기 때문에 ’83년 크리스마스에 애플 IIe 기종은 경이적인 판매실적을 올리게 된다.
가.베이식의 발전
1977년 11월에는 애플이 MS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은 베이식을 기초로 플로팅 포인트 연산기능, 즉 소수점 이하 연산기능을 갖춘 베이식을 개발해 自社의 제품에 적용했다. 멀티미디어 기능이 탁월한 아미가로 유명한 코모도 역시 1982년에 64의 주메모리와 20의 롬을 장착한 自社의 「코모도 64」기종에 MS의 베이식을 포팅했다. 이같은 베이식 열풍은 80년대 들어 강력한 개발환경을 제공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등장과 함께 수그러드는 경향을 보였다. 구조가 간단하다는 것이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1년 5월에 MS는 윈도환경을 위한 비주얼 베이식을 개발함으로써 베이식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비주얼 베이식은 본격적으로 대두될 윈도시대에 각종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적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많은 프로그램 개발자들이 현업에서 프로그램 개발에 사용하고 있다.
나.파스칼과 Ada의 등장
FORTRAN, COBOL과 같은 기존의 언어에 회의를 느낀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1980년 튜링상을 수상한 옥스포드대학의 호어이고, 또 한 사람은 니콜라우스 비르트 교수였다. 먼저 비르트는 스탠포드대학의 객원교수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새로운 언어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최초의 계산기 제작자인 볼레르 파스칼의 이름을 따 파스칼로 불리운 이 언어는 단단하고 많지 않은 구문 규칙이 파스칼 언어의 기본 철학이었다. 입출력기능은 다소 약했지만 교육용으로 쓰기에는 적합했다.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연구소에서 파스칼 바람이 일었고 교육용으로 파스칼에 비길만한 언어가 없었다. 그러나 파스칼의 성공에는 괴짜 과학자 다익스트라가 있었다. 다익스트라는 이무렵 소프트웨어 위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소프트웨어의 개발 관리비용이 증가되는 것을 보고 이를 해결하는 한 방안으로 대형소프트웨어의 사후 관리를 용이하게 해 주는 구조적 프로그레밍기법을 소개했고, 그동안 아무 죄책감없이 써온 GOTO문장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파스칼은 구조적 프로그래밍이라는 흐름을 타고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에 이미 쓰이고 있거나 개발된 언어는 1천여종에 달했다.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언어가 바벨탑과 같이 될 무렵 HOLWG(High Order Language Working Group)위원회가 탄생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의 국방관련 연구소에서 쓸 통일된 언어를 위해 생겨난 것이다. 위원회는 여러 학자와 기업체에 한가지씩 시안을 보내줄것을 요청했고, 하니웰-볼 연합팀에게 새로운 언어의 설계가 주어졌다. 새로운 언어의 이름은 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어거스터 에이다의 이름을 따 Ada로 정해졌다. Ada는 국방관련 프로젝트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 적합하게 짜여졌다. 패키지 구조, 추상적 자료제공, 구조적 프로그래밍기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엄격한 기준과 2000여가지의 성능 테스트를 거쳐 Ada compiler가 개발되었다. 또한 미 국방부는 국방부에 납품하는 프로그램은 반드시 Ada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포트란이나 코볼 사용자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이 반발은 리스프 사용자보다는 못했다. 포트란이나 코볼 프로그램은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 쉽게 번역이 될 수 있었지만, 리스프는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번역할 수 밖에 없었다. 리스프 옹호론자들의 반발은 더욱 심해져 갔고, 국방부와 국립표준국(ANSI)도 조건부로 양보했다. 즉 리스프도 수많은 방언있었는데, 이의 표준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사실 언젠가는 필요한 작업이 요구된 것이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커먼 리스프(common lisp)이다. 국방부에 납품하는 프로그램은 크게 두가지 즉, 에이다와 리스프로 작성되도록 하였다.
PASCAL
PASCAL은 초기에 교육용과 COMPLIER와 같은 시스템소프트웨어의 구현을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최초의 정의와 구현은 1971년에 이루어진다. 1973년 새로운 정의가 내려지고, 현재는 1983년의 정의를 바탕으로 한 PASCAL이 쓰이고 있다.
PASCAL의 설계에는 ALGOL60이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반적인 구문의 형식과 블럭구조 뿐만 아니라 강조된 단순함과 우아?한 설계 등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ALGOL 60은 60년대 당시의 많은 언어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후에 많은 언어에 영향을 줄뿐 아니라 이론적인 연구를 하는데에도 매우 중요한 언어가 된다. PASCAL은 1970년대에 마치 60년대의 ALGOL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즉 교육용으로서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후에 개발되는 Ada, Euclid, Gypsy, CLU, Concurrent PASCAL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Ada
Ada는 프로그램 언어로서는 독득한 발전을 한다. 1970년대 초에 미국방성은 항공기나 군함, 통신 등에 사용할 프로그래밍 언어를 찾고 있었다. 여러 언어를 검토했지만 적합한 언어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언어를 국제 설계공모를 내기로 했다. 17개의 제안이 들어왔으나 그중 4개의 그룹에 예비 설계의 자격이 주어졌다. 4개의 언어 모두 PASCAL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두개의 안이 뽑혔다. 결국 1979년 Ada로 명명된 최종 언어가 선택되게 된다. 초기의 제안들은 상당히 PASCAL과 유사했지만 최종안은 수정을 거치면서 PASCAL과는 매우 달라진 모습을 드러냈다. 즉 Ada는 PASCAL에 비해 매우 복잡하고, 큰 언어가 되었다.
다.산업계의 표준 C언어
그러나 이러한 여러 언어가 개발되고 권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산업계에는 엉뚱한 언어가 애용되었다. 1972년 벨 연구소에서 만든 C언어가 그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허술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널리 쓰이는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물론 UNIX의 활발한 보급에 편승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될 수 없다. C언어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구문법이나 기절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원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 언어도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했지만, 대부분 실패로 끝난 언어들이 이를 나타내 주고 있다. C는 1970년대 초반에 Bell 연구소의 Dennis Ritchie가 개발했다. C의 선조는 하나의 설계 계보를 통해 추적할 수 있는데 그 계보는 Algol로부터 시작되었고 파스칼과 PL/1을 포함한다. C는 UNIX라는 새로운 운영체제에서 사용하기 위해 프로그래머의 언어로서 개발되었다. UNIX는 PDP-7에서 어셈블러 언어로 작성되었고 PDP-11에 이식되었다. C는 그 이전의 언어인 B는 Ken Thompson이 작성했고 BCPL로부터 나왔다. BCPL은 1969년 Martin Richards가 작성했는데 London대학과 Cambridge대학의 공동프로그래밍 언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었다. UNIX는 곧 C로 재작성되었는데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UNIX는 Bell 연구소 밖으로 처음 공개되었다. 이것은 어셈블리 언어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능력과 융통성이 있는 언어라면 운용체제를 성공적으로 작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뢰성을 주었다. 1978년 Brain Kernighan과 Dennis Ritchie는 the C Programming Language (Prentice-Hall사 출판)라는 책을 썼다. 내국인(미국인)에게는 하얀책 (역주 : 겉표지가 하얀색이기 때문에), 다른나라 사람들에게는 K&R 이라고 불리는 이 책은 C 언어의 표준 정의가 되었다. K&R 이 씌여졌을 무렵 C 컴파일러는 PDP-11, Interdata 8/12, 그리고 IBM 370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 수는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C 언어 재품들이 CP/M을 운영체제로 한 8080이나 Z80 계열 마이크로컴퓨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Scott Guthery와 Jim gibson은 Tiny-C를 개발해서 판매했는데 인터프리터 방식을 사용한 이 제품은 C언어의 일부분을 바탕으로 했으나 대성공작인 Microsoft BASIC과 비슷한 대화식 프로그래밍 환경을 가지고 있다. 1980년 Ron Cain은 CP/M과 8080하에서 운용되는 Small-C자체가 Small-C 자체로 작성되었다. Cain이 Small-C의 첫 버전을 Tiny-C 인터프리터로 작성했을 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일게 되었다. 그후 Cain과 다른 사람들이 개선된 Small-C를 컴파일하기 위하여 Small-C컴파일러를 사용하며 컴파일러의 기능을 추가시켰으므로 마치 진흙탕 속에 빠진 사람이 자신의 구두끈을 잡아당겨 빠져나온 것처럼 Small-C는 자기 스스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Small-C는 C로 작성된 원시코드를 공개했다. (역주 : A Small-C Compiler, Second Edition, 출판사 : Prentice Hall, 1990, 628쪽 이라는 책을 시중에서 구입해 볼 수 있다. Small-C 컴파일러의 원시 코드와 라이브러리 원시 코드도 함께 실려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Leor Zolman은 CP/M을 기본으로 한 BDS C 컴파일러를 소개했는데 이것은 C의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 컴파일러의 강점은 빠른 컴파일 속도와 재배치 가능 목적 모듈들(relocatable object modules)을 링크하여 실행가능 모듈(executable module)로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BDS C가 소개된 후 곧 C 전체를 지원할 수 있는 컴파일러를 CP/M 운영체제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C의 엄청난 영향이 시작되었고, 1981년 마이크로 컴퓨팅의 세계는 IBM이 PC를 발표함에 따라 거대한 도약을 했다.
PC의 영향이 커질 것이 명백해지자 곧 각종 C 컴파일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몇개는 8080용으로부터 개선된 것이었으며 대부분이 처음부터 PC시장을 겨냥해서 개발되었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17종 이상의 PC(DOS)용 C 컴파일러가 판매되고 있다. 1983년, 미 국립표준국(ANSI)은 X3J11 기술위원회를 구성하고 C언어의 표준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표준은 C 언어뿐만 아니라 컴파일러의 환경 및 표준 함수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위원들은 C에 관한 권위자들 뿐만 아니라 PC용을 포함한 주 C 컴파일러 공급회사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X3J11위원회의 활동은 컴퓨터 관련 매체의 많은 관심을 모았고 관심을 가진 모든 단체로 부터 의견을 듣기 위하여 제안된 표준이 공표되었다. PC용 컴파일러 공급자들은 X3J11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컴파일러 공급자들은 이 제안된 표준에 있는 수정 사항들을 반영한 새로운 버전의 컴파일러들을 내놓고 있다.
라.본격적인 SW시대의 도래
< 유닉스 태동기, DBMS 단초 >
70년대 시스팀은 주로 일괄처리, 시분할처리 실시간 처리를 지원하는 다중모드 시분할 시스팀이다. 70년대는 버추얼 스토리지 운영체제인 OS/VS와 OS/370이 IBM 시스팀/370을 관장하며, MVS/370이 뒤를 잇는다. 78년 버클리大의 VAX에서 운영된 유닉스 V7이 지금까지 많은 업체들의 유닉스 제품의 근간을 이루는 BSD 계열이 시발이었다. 한편 70년대 말부터 벨 연구소에 판매한 유닉스 코드를 AT&T를 비롯한 업체들에서 상품화하기 시작하면서 유닉스의 전파가 가속되었다. 유닉스는 보다 편리한 작업환경을 구축하려는 AT&T 연구원들의 노력에서 출발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자유로운 연구 활동이 보장될 수 있었다는 점이 연구원의 창조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 유닉스의 확산은 자리에 앉아서 결정을 내리는 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 만들어졌기 때 문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마이크로 프로세서 기술의 지속적인 촉진에도 불구하고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PC의 경우 72년 인텔에서 만든 최초의 칩, 4004가 美 해군대학원 게리킬달 교수 손에 들어감으로써 최초의 본격 운영체제의 개발에 불이 당겨졌다. 4004에 PC/I라는 언어를 채택했고 다시 8008 칩에는 CP/M의 원조가 되는 PC/M이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후 CP/M은 79년 마이크로소프트와 IBM이 도스를 시장에 투입하기 전까지 업계를 주도하고 나가게 된다. 60년대의 실험적 시분할 시스팀이 70년대 확고한 상품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미국 전역을 통한 컴퓨터 시스팀의 통신이 증가했는데 특히 미국방성의 통신 표준인 TCP/IP는 특히 군대와 대학 컴퓨터 환경을 비롯해 널리사용되었다. 랜에서의 통신은 이서넷 표준에 의해서 실용화되고 경제적으로 되었다. 70년대 데이터베이스 분야는 RDB 기술을 실현하는데 역점을 뒀으며, 개방형 유닉스 시대가 열리는 70년 후반부터 80년대초에 걸쳐 전문 업체인 오라클, 인포믹스, 사이베이스 등의 업체가 생겨나는 등 상용 RDBMS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RDB기술은 이전 세대 기술처럼 재고 관리, 급여 등가 같은 기존 업무 데이터 처리 응용들을 위한 것이 고작이어서 다양한 형태의 응용을 뒷받침하기에는 불편함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업무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워드프로세서는 64년 IBM이 주요 단어를 마그네틱 테이프에 기록시킬 수 있는 타자기를 개발한 것을 시발로 보며, 마이크로프로 인터내셔날의 워드 스타가 78년에 선보이게 된다. 79년 브르클린은 스프레드시트와 회계분석 프로그램인 비지캘크-[Visible Calculator]의 약칭-를 출시 2~3개월만에 1만개가 넘는 판매를 기록해 패키지 소프트의 상품 가능성을 알리게 된다.
마.WP 전용시스템 - 왕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분야에서 최초로 선봉을 선 사람은 중국인 유학생 왕안이었다. 중국인 왕안은 전파상의 방한칸을 빌려 왕연구소(Wang Institute)라는 회사를 차렸다. 왕은 범용컴퓨터 시장에 매달리는 대신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왕의 아인\'b5助箏 스크린 상에서 먼저 문서를 편집해 사용자로 하여금 완성된 문서를 미리 보게끔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능을 위해서는 컴퓨터와의 결합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사용자에게 편리한 당야한 기능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영어권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체계를 준비했다. 왕의 아이디어는 대성공이었다. 다락방에서 출발한 왕연구소는 일약 컴퓨터계의 강자로 떠 올랐다. 1980년대 초에는 세계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30%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기존의 타자기는 서서히 값싸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워드프로세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가격 하락으로 개인용컴퓨터의 보급이 늘어났고, 가정에서 컴퓨터와 위드프로세서를 동시에 구입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다. 그러자 컴퓨터에서 워드프로세서의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Word-Star 같은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바.CP/M
킬달은 CP/M(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을 개발했다. 이는 8080 중앙처리장치를 위한 OS였지만, 처음에는 사용하는 하드웨어업체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같은 OS였다. 그러나 76년 미국에서 두번째 생겨난 퍼스널컴퓨터 업체인 임사이(Imsai)라는 괴상한 이름의 회사가 킬달에게 전화를 해오며 CP/M의 채용을 문의해 왔고, 당시에 유일한 OS였던 CP/M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같은 중앙처리장치를 써도 그 외의 부품이 서로 다른 하드웨어 사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회사는 OS를 곧 개발해 제공해 주겠다는 약속만을 하고, OS도 없는 HW를 판매하고 있었다. 결국 CP/M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HW사양에 맞도록 각 회사마다 모색을 하게 되었고 그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BIOS(Basic input/output system)와 CP/M을 분리하여 장착함으로서 이를 해결하였다. 기존의 CP/M은 BIOS에만 집중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킬달은 CP/M의 성공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고, 이를 기반으로 인터캘락틱 디지탈 리서치(후에 디지탈 리서치로 바꿈)를 설립하여 CP/M의 보급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사업보다는 단순히 CP/M의 보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킬달은 사회와 수요자의 반응에 둔감했다. 또 MS에 대해서는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즉 MS는 언어 위주의 사업을 할 것이고 DR은 OS위주의 사업을 할 것이라는 착각속에서 사업을 해나갔고 결국은 IBM PC의 OS 자리를 MS에 내주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BASIC의 개발은 CP/M의 개발과 비교해 뒤지는 것으로 생각해 PC용 PASIC의 개발은 일찍이 포기하기도 하였다. 다른 이유는 MS가 이미 개발한 상태이므로 조금더 혁신적인 분야에 투자하겠다는 생각도 큰 작용을 했다.
사.UNIX의 탄생
1968년 미국 벨 연구소의 컴퓨터연구 그룹에 있던 켄 톰슨(Ken Thompson : 뒤에 C언어의 개발자로 알려짐)과 그의 동료들은 MULTI CS라는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벨 연구소는 AT&T사의 지원 아래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전화 및 통신망에 관계되는 많은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다. 물론 컴퓨터도 그 일부분에 포함된다. MULTICS는 제너럴 일렉트릭사와 MIT 및 AT&T가 함께 추진한 것으로, 많은 사용자들이 동시에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충분한 계산 능력 및 저장 장소를 제공하며 사용자가 원할 경우 자신의 데이타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해주는 운영체계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MULTICS 시스템은 1969년에 그 초판이 GE645에 설치되어 실행되었지만, 1965년 실행된 이래 벨 연구소는 그 프로젝트가 의도했던 서비스를 만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발 목표를 언제 달성할 지 명확하게 예측할 수 없어 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MULTICS 계획이 끝남에 따라 켄 톰슨과 그의 동료들은 GE645의 편리한 기능들을 사요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Dennis Ritchie) 등 몇몇 연구원들은 그들의 프로그래밍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종이위에 개략적인 화일시스템을 설게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닉스의 초기 버전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개발 배경은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로그래머 및 사용자에 의하여 제기된 운영체계의 설계라는 점이다. 즉, 그 당시에는 회사의 입장과 회사의 운영 방향에 따라 상위층에서 운영체계의 규격 및 기능들이 결정지어져 수행되어 왔지만, 이 유닉스는 실제로 프로그래머들이 프로그래머의 필요에 의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되었으며 운영체계가 본질적으로 어떠한 역할 및 기능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토론을 한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배경에 따라 유닉스는 사용자의 입장을 존중하게 되었고, 그에 다른 수정 요구 및 기능 향상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 오늘의 유닉스가 생명력을 지니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톰슨은 위에서 제안된 화일 시스템과 Demand-Paging 환경하의프로그램을 흉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또한 GE645용의 커널을 구상하기도 했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Space Travel이라는 게임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한번의 실행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75달러가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중 그는 양질의 그래픽 표시장치를 제공하면서도 구석에 놓여져 사용되지 않던 PDP-7이란 컴퓨터를 발견했다. PDP-7에 Space Travel을 프로그램밍하면서 톰슨은 톰슨은 기계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 그러나 PDP-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운영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을 짠후 기계어로 출력하여 종이테이프를 통하여 PDP-7에 입력하여야 했다. 보다 나은 개발환경을 위해 톰슨과 리치는 유닉스 화일시스템의 초기버전과 프로세서 서브 시스템 및 몇개의 유틸리티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PDP-7내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새로운 시스템에 유닉스라는 이름을 주게 되었는데, 이는 동료인 브라이언 커니언(Brian Kernighan)이 MULTICS라는 이름에서 역설적으로 UNICS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같은 발음의 UNIX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유닉스 시스템의 초기버전의 많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제 프로젝트에 쓰이기 전까지는 그것이 가진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없었다. 1971년 벨 연구소의 특허 부서에서 사용할 문서 편집 시스템으로 사용되면서 유닉스 시스템은 PDP-11으로 옮겨졌는데 이 시스템의 특징은 크기가 작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16KB, 사용자 프로그램은 8KB, 512KB의 디스크 하나, 그리고 각 화일은 64KB로 제한되었다. 그것의 초기 성공 후에 톰슨은 새로운 시스템을 위한 포트란 컴파일러를 구현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BCPL에서 영향을 받은 B언어를 고안하게 되었다. B언어는 BASIC과 같은 방식인 인터프리터였으며 그러한 언어가 가지는 성능상의 제한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리치는 이것을 기계어 코드의 생성과 데이타 타입의 선언 그리고 데이타 구조의 선언 등을 허용하는 C언어로 발전시켰다. 1973년에 운영체계는 C언어로 다시 쓰여졌는데, 이 당시에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이것은 외부 사용자들이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벨 연구소에서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한 곳이 25군데로 늘어나고 내부적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하여 유닉스 시스템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당시 AT&T는 연방정부와 1956년에 체결한 협정에 의하여 컴퓨터 제품을 판매할 수 없었으나, 교육목적으로 유닉스 시스템을 요구하는 대학에 대해서는 그것을 허용해 주었다. AT&T는 협약을 잘 지켜 유닉스 시스템을 광고하거나 판매하거나 지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만 갔다. 1974년 톰슨과 리치가 Communication of ACM에 시스템에 관하여 논문을 한편 썼는데, 이것이 시스템을 수용하는 데 박차를 가해 1977년에는 유닉스 시스템을 설치한 것이 125개의 대학을 포함해서 500여 곳으로 늘어나게 된다. 유닉스 시스템은 특히 좋은 프로그램 개발 환경을 제공해 주고 네트워크 트랜잭션 업무와 실시간처리를 가능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전화회사에서도 인기를 얻게 되었다. 또한 유닉스 시스템에 대한 라이센스가 대학과 마찬가지로 상업기관에도 제공되어 1977년에는 사무자동화환경에 유닉스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인터랙티브 시스템즈사가 최초의 상업화된 제품을 Intedata 8/32라는 기계에서 작동하도록 발표되었다.
아.UNIX의 발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대중화됨에 따라 많은 회사가 유닉스 시스템을 새로운 기계에 이식하였으나, 또 다른 개발자들은 유닉스의 단순성과 명료성을 바탕으로 나름의 방법으로 시스템의 성능향상을 도모하여 기본 시스템의 몇 가지 변형이 나타나게 되었다. 1977년에서 198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벨 연구소는 몇 가지 AT&T의 변형을 모아 단일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닉스 Ⅲ이다. 벨연구소는 나중에 유닉스 시스템Ⅲ에 몇 가지 기능을 더 첨가해 유닉스 시스템Ⅴ이라고 발표하였으며, AT&T는 1983년 1월 유닉스 시스템 Ⅴ를 공식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에 반하여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도 유닉스 시스템의 변형을 개발하였는데 이것의 최신 버전은 VAX기계에에서 운용되는 4.3BSD로서 몇가지 새롭고 흥미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계통에서 나온 것으로 386BSD와 SunOS 등이 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립자인 빌게이츠도 유닉스에 관심을 두어 별도의 출자회사인 사타 크루즈 오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SCO제닉스를 발표하였다. 1984년 초에는 세계적으로 100,000대에 가까운 컴퓨터에서 유닉스 시스템을 사용하였으며,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 메인프레임에 이르는 다양한 처리 능력을 가지는 컴퓨터와 여러 회사에서 제작한 여러 기계에서 운영된다.
가.2세대 광섬유
제1세대 광섬유통신시스템은 모두 8백-9백 나노미터 파장의 범위안에서 운용되었다. 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석영섬유는 파장이 커짐에 따라 빛의 분산손실이 감소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정립했다. 이러한 특성은 신호를 보다 먼 거리에 있는 중계기까지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장거리 통신사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일정한 파장을 지닌 유리의 굴절률이 다양화게 변화하는 특성은 이른바 파장의 분산 현상을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한 파장을 지닌 빛은 파장이 다른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때문에 펄스를 일으키며 넓게 퍼져나가는 것이다. 파장의 분산은 주파수의 폭이나 신호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을 제한할 수 있다. 그것은 1천3백 나노미터에서 최소한의 파장분산과 특별히 넓은 대역폭을 나타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파에 관한 연구는 76년 일본에서 핵심 기술이 개발됨으로써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즉 일본은 1천3백 나노미터의 파장을 가진 빛이 km당 0.5데시벨 밖에 손실되지 않는 섬유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에 영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파장이 1천3백 나노미터되는 빛이 분산손실 0으로 나타나는 물질을 개발했다. MIT공대 링컨연구소 소속의 J J 시에와 동료과학자들이 77년에 1천3백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인듐비화갤륨 인화물반도체 레이저를 개발해 1천5백시간의 수명을 갖도록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때 나타난 장파는 1천3백 나노미터에서 석영검파기로는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검파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게르마늄 컴파기와 인듐비화갤륨의 합성반도체가 개발됨으로써 이러한 문제들이 신속히 해결되었다. 코닝사와 다른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1천5백50 나노미터, 즉 1.55마이크로미터의 파장을 지닌 광섬유도 역시 전망이 밝은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이의 개발사업에 착수하였다. 석영섬유는 1.55마이크로미터 이상의 파장에서는 빛이 멀리 전송됨에 따라 점차 약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정확한 특정 파장에서는 최조의 손실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본 NTT의 연구위원들은 1.55마이크로미터의 파장에서 km당 0.2데시벨의 손실만을 나타내는 단일형태의 섬유를 최초로 개발했다. 또한 그들은 7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동일 파장에서 km당 최저 0.18데시벨까지 손실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82년초 코닝사의 과학자들은 파장 1.55마이크로미터에서 km당 0.16데시벨의 손실을 기록하는 단일형태의 광섬유를 개발했다. 이것은 빛의 1%가 광섬유를 통해 77.5마일의 거리를 이동한 후 그대로 남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1천3백 나노미터에서는 없었던 빛의 분산현상이 표준적 광섬유에서 다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후 광섬유의 구성요소를 세밀하게 조정함으로서 1.3 - 1.5 마이크로미터의 파장범위 내에서는 낮은 분산률을 나타내는 광섬유를 개발했다.
나.프랑스의 미니텔
프랑스는 70년대 중반 오일 쇼크 이후 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전화선을 이용한 정보서비스 개발을 국가의 주요 과제로 다루게 된다. 75년 정부는 컴퓨터와 통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하고, 80년 55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전자전화번호부 서비스를 1차 실시한 이후 81년에는 이를 보완한 2차 서비스를 실시한다. 82년 2천5백가구를 대상으로 1백90개 정보에 대한 종합적인 마무리를 실시, 다음해 83년 텔레서비스가 실시된다. 현재 텔레콤은 초창기의 1백배에 달하는 1만7천개 정도의 각종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총 7백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도 제공되고 있으며 지난해말(전자신문 1356호 기준) 현대전자를 통해 국내에도 제공되고 있다. 또 서비스 개시 6년만인 89년 손익분기점에 도달, 흑자로 전환되기에 이르른다. 프랑스의 성공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통신시장 보호정책, 프랑스텔레콤의 추진력, 미니텔 단말기의 무료보급, 컴퓨터를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ONA(오픈 네트워크 아키텍쳐)를 채택하는 한편 상용화 이전에 실시한 사용자 대상의 실험 및 검증으로 그 성공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Desktop Network
1973년 제록스 PARC의 연구원 봅 멧칼프와 그의 연구팀은 컴퓨터와 레이저 프린터간의 연결 속도를 높이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다. 프린터와 컴퓨터의 처리속도는 당시로는 빠른 편이었지만, 이 둘을 연결하여 사용하려면 속도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그 원인은 이 둘을 연결하는 선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해상도가 600dpi였으므로 페이지당 3천3백만 비트가 전송되어야 했고, 컴퓨터는 초당 한페이지의 해상력을 가졌고, 프린터는 2초에 한 페이지를 프린트할 수 있었지만 이둘을 연결하면 자료를 전송하는 데에만 15분이 걸렸다.
새로운 전송장치의 개발에 뛰어든 멧 칼프는 새로운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했다. 이들이 개발한 프린터는 접속된 컴퓨터와 의사소통이 가능해 그 자체만으로도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 이러한 양방향 의사소통은 두개의 시스템이 동시에 기능할 경우, 데이터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십여개의 컴퓨터와 프린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면 그만큼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전화통화 방식처럼, 기계를 사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사용여부를 확인한 다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한 기계의 사용이 끝난 다음에 다른 기계가 사용하도록 고안된 장치가 이더넷이다. 초당 2백67만 비트의 데이터를 동축 케이블로 전송할 수 있는 이더넷은 600dpi 페이지의 전송시간을 15분에서 12초로 단축시킨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결국 이더넷은 2.67Mbps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와 프린터,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필수적인 장치가 되었다.
라.컴퓨터 통신의 진보
컴퓨터 네트워크의 개념은 종래의 전기통신망의 확장이 아니고 컴퓨터 시스템의 고유의 개념위에 데이타 통신망을 구축하는 네트워크 구조(network architecture)로 발전하였다. 이 대표적인 예가 1974년 IBM이 발표한 SNA(System Network Architecture)로서 컴퓨터간의 접속을 용이하게 하고, 이용 형태의 다양화, 복잡화에 대처하기 위한 체계화된 네트워크 방식이 있다. 1976년 국제전신전화자문위원회(CCITT : comit consultatif international pour telegraphie et telephonie)는 여러 프로토콜 시안중에서 X.25를 국제표준으로 정했다. 1980년 중반에는 이미 많은 컴퓨터와 통신기기들이 시장에 나와 있었고, 이를 이용하는 기업도 그 수가 급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기들의 호환성 결여로 한 기기에서 사용한 정보를 다른 기기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점점 더 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1985년 50개 이상의 컴퓨터 회사들로 구성된 컨소시엄 공개시스템공사(COS)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이 컨소시엄의 핵심목표는 공개시스템 상호연결(OSI : open system interface), 이른바 OSI프로토콜을 촉진하기 위한 데에 있었다. 컴퓨터 통신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은 1876년의 전화발명과 1984년 1월 1일에 취해진 미국전신전화회사(AT&T : American telephone and telegraph co.)가 미국 전화망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상실한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마벨(Ma Bell) 이라고도 불리웠던 AT&T는 보다 작은 회사들과 7개의 지역전화회사로 분산된 사건은 세계전역에 규제해제의 물결을 일으켜, 유럽, 일본, 캐나다, 오스트리아 등으로 그 파도가 밀어 닥쳤다. 규제해제는 경쟁을 고조 시켰고 컴퓨터 통신산업의 국제화를 촉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일반 기업체에는 각종 유용한 서비스의 혜택과 경쟁으로 인한 요금인하의 효과가 있었지만, 일반 가정에는 잘 이용하지도 못하는 다양한 서비스를 명목으로한 요금인상만을 가져와 불만을 사게 되었다.
첫댓글 정보통신의 개념인데 도저히 이해가 안됨. 정답이 뭔가요??
나 IC했는데 ㅋㅋ
문제에서 분명이 급격히란 말이 있었는데 .. 이거 미치것넹..
3세대
정답은 모르겠으나 상식적으로 본다면 본격적으로 정보통신을 활용한 세대는 4세대라고 생각되네요. 그런데 문제비율이 전산학개론쪽으로 너무 편중되었다는 느낌이...
3세대입니다..
세줄 요약이 필요 할듯
네~~ 4세대 맞습니다.... 처음 정보통신은 군사용으로 활용했답니다.
정보통신은 처음으로 군대에서 사용 알파넷인가?? 그럴껄여?
4세대!
이거 문제집에 똑같이 나왔는데 IC입니다..직접회로요...
2세대..
2세대
아마 3세대 이후나, 4세대 이후 데 전 3세대로 찎었조. ㅜㅜ,,, 2세대는 절대아니에요. 2세대라 칭함은 70-80년대인데,,, 그당시는 아시다시피, Lan이 겨우 적용대던때 아닌가요?? 정보통신이라함은, 인터넷이나, 초창기 모뎀통신이 시작 된때인데,, 아마 AT컴 이후의 모뎀통신을 이야기하는게 아닌까요?? ㅎ
그런데.. 이런 컴퓨터의 역사를 세기별로 분류짓는다는 것이 정말 우끼네요...... 각 책마다 컴세대 분류는 다들 다른데....
전 4세대..LSI로 했는데..ㅜㅜ
전 3세대 했는데...
저도 직접회로...보통 3세대로 알고 있는데...
직접회로가 아니라 집적회로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