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한국은 모처럼 평화롭고 별일 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였다. 지난 10월 군정청은 크리스마스를 휴일로 지정하고 성탄 전야 하루 동안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특별히 크리스마스의 정취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일본자본 소유 백화점은 철수했고 화신백화점은 파업 중이었다. 전차의 운행은 날이 갈 수록 불규칙해졌고 쌀을 비롯한 먹거리는 더욱 귀해졌다. 일제가 해마다 일본으로 실어 내갔던 800만 석의 쌀이 남한에 그대로 남았음에도 시민들은 굶주림과 냉기와 싸우며 시간을 견뎌야 했다.
성탄 전날 군정청 큰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고 미군을 위로하기 위한 성가합창단의 연주회가 열렸다. 아놀드 전군정장관과 쉬크 헌병사령관 등 미군정 장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남대문 합창단 40여 명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성가를 불렀다. 홀의 정면에는 성모마리아의 초상이 걸리고 아름답게 장식된 5개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따뜻한 불빛을 반짝이며 미군정 첫해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가 들어온 때는 1884년으로 1890년대부터 크리스마스 문화가 확산되었다. 1896년 12월 24일자 '독립신문'에는 "예수 그리스도 탄신일을 맞아 조선 인민들도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의 성체가 안강하고 나라 운수가 여원하며 조선 전국이 화평하고 인민들이 무병하고 부요하게 되기를 하나님께 정성으로 빌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1897년 배재학당에서는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수백 개의 등불을 만들어 회당 앞에 걸어두었다. 한국 불교에서 소원을 비는 '등'으로 만들어진 트리는 한국의 전통과 서양 종교가 빚어낸 색다른 크리스마스 풍경이었다.
이처럼 1890년대 말에는 기독교인과 지식인 사이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진 상태였고 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보고 소위 ‘쉬는 날’로 인식하였음도 알 수 있다.
"요 다음 토요일은 예수 크리스도 탄일이라 세계 만국이 이 날을 일년에 제일 가는 명절로 아는고로 이날은 사람마다 직업을 쉬고 명절로 지내니 우리신문도 그날은 출판 아니할 터이요, 이십 팔일에 다시 출판할 터인즉 그리들 아시오."(1897년 12월 23일 독립신문)
개화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기독교를 포교하는 방법으로 크리스마스가 되면 예배당에서 여러 행사를 치르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1890년대 후반의 몇 년 사이 비교적 빠른 기간 동안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많은 곳에서 기독교를 대표하는 날로 자리잡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가 전개되고 1930년대 초부터 일본의 자본주의 유흥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경성 시내는 전등불을 밝히고 '불야성을 이룬 별천지'의 모습을 보였다.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백화점을 통해 새로운 소비의 유행이 시작되던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퍼졌다. 30년대 초 조선일보 기사에는 아기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전하며 "크리스마스에는 아가들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선물 증정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전야에 친한 지인들과 만나 유흥을 즐기는 문화 또한 활발해졌다. 1936년 조선일보는 '토산(土産)크리스마스'라는 기사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회사원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유흥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했고, 매일신보는 '기독교인에서 상인의 손으로 넘어간 크리스마스'라는 기사에서 크리스마스의 상업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세일, 크리스마스 디너, 크리스마스 파티 등등…. 어느틈엔지 크리스마스는 교회로부터 거리로 진출해서 신성해야할 이 하느님의 아들의 강탄절은 간약한 상인들이 보너스 덕분에 조금 무거워진 샐러리맨 제군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책(商策)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1930년대 크리스마스 풍경을 소개하는 위의 두 기사에서는 공통적으로 크리스마스 즈음하여 보너스가 지급되었다는 점, 또 이를 기념하여 술을 마시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1930년대에 크리스마스는 이미 종교기념일이라기보다는 연말을 맞이하여 소비하며 즐기는 날이라는 현재와 유사한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한껏 고조되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제가 유흥적인 크리스마스 행사를 금지하면서 주춤하게 되었다. 1938년 동아일보는 '산타클로스는 안 온다'라며, 크리스마스 행사 금지에 대한 내용과 일본군에게 크리스마스 위문품을 보내는 기사를 실었다. 물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수그러든 느낌은 있었지만, 소비적인 연말 분위기를 내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발달된 도시와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소비문화는 특권층과 일부 대중에 국한된 것이었을 뿐 도시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민에게는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연말문화는 낯선 남의 일이었다. 도시가 발달할 수록 빈민문제는 가장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일본 대자본의 투자와 개발이 확대되면서 경성은 개발이 집중된 지역과 그로부터 소외된 지역 간의 공간적 차별화와 양극화가 심해졌다. 1930년대 경성의 소비 유흥 문화 활황의 이면에는 어두운 절대 빈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식민지 자본주의 문명의 혜택은 그 효력의 범위가 절대적으로 제한적이었으며, 대다수 피식민 대중들은 소비의 권리를 박탈당한 채 천대받는 ‘구경꾼’으로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특히 그러했다.
해방이 되고 첫크리스마스였지만 일반대중에게는 더 혹독한 크리스마스였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본격적인 정치의 소용돌이, 반탁운동이 예비되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미군정 포고령이 법률상 효력을 상실하자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 크리스마스를 새롭게 공휴일로 지정하고 법적 명칭을 '기독탄신일'로 했다.
첫댓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서 그런가
날짜가 빠르게 지나는 것 같습니다..ㅜ
코흘리개 시절 어려웠던 생활이 디졸빙되는군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