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 여행 9 - 버스를 타고 북사탑에 내려서 오래된 유서깊은 절을 구경하다!
어제 2023년 10월 25일 쑤저우역 (苏州火车站)에서 지하철로 수향 마을 무두구전 (木渎古镇)
즉 목독고진과 동방지문 东方之门 에 샨탕졔(싼탕지에) 山塘街(산당가) 를 구경했습니다.
지금 계절이 늦가을 이다 보니 호텔에 돌아와도 술집에 가려고 외출하지 않는한 딱히 할
일이 없는지라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중국사 책을 펼치고는 오래
읽다가 잠들었는데.... 오늘은 10월 26일은 하루종일 쑤저우 시내 를 구경하려고 합니다.
쑤저우 苏州 는 상하이나 항저우와 달리 지하철 원데이 패스 가 없으니 대신에 시티투어
버스 인 하오씽 Tour Bus 好行 1号线 南线 버스를 이용하려는데, 하루 15元 으로
4대 정원 등을 도는데 북선과 남선이 있으며 졸정원 본점과 호구 북문이 출발지 입니다.
홈페이지에 보니 苏州好行目前上车单次票为 3元(1회), 一日卡(使用后24小时有效)
15元(하루) 이고, 网点购买 (티켓 파는 곳) 은 苏州好行拙政园 南停车场 과
拙政园 西游客中心、 虎丘北门/南门、 火车站北广场 客运站 二楼24号门
이라 나와 있으니..... 티켓 은 기차역 북광장 버스터미널 2동 24호 에서 끊기로 합니다.
남선 : 졸정원 - 사자림 - 쉬안먀오관- 관첸거리 서쪽 - 이원 - 창랑정(문묘) - 판먼 (반문
경구) - (펑차오풍경구 ) - (? ) - ( ?) - 한산사 - 서원 - 유원 - 산탕(산당가) -
산당가공교탑 - 호구북문 - (타이거힐북문 ) - 화차참 북광장 - 핑먼 - 북사탑 - 졸정원
북선 : 졸정원 - 사자림 - (쑤저우박물관) - 북사탑 - 핑먼 - 화차참북광장 - (기차역 ) - 호구
북문 - 산당가경구 - 유원경구 - 서원경구 - 한산사 - 펑차오 - 시루(석로) -
쉬먼 크루즈터미널 - 반문 - 창랑정(문묘) - 이위안(이원) - 관첸(쌍전가서) - 졸정원 환승중심
그런데 쑤저우 기차역 맞은편에 자리한 버스 터미널 인 화차참 북광장 커운짠 (客运站)
에 가서 아무리 살펴 보아도 好行 一日卡(15元) 표 파는 곳이 없는지라... 1,2층을
오르 내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기가 찰 노릇 입니다.
도로변에 커운짠(客运站) 버스 정류소 에 가서 운행판을 보니 여긴 분명히 하오싱 1호선 好行 1号线 버스
가 있기는 한데..... 운영시간은 8:25 - 17:15, 15분 간격이 아니고 10시부터 4시 까지이며 또 간격도
1시간 이라고 나와 있으니 그만 포기하는데 옛날 양저우에서는 버스 안에서 표를 산 기억이 있긴 합니다.
이제 더 찾지 말고 일반 버스 를 타고 북사탑 (北寺塔) 절로 가려고 하는데 중국 버스 안내판
이 한국 보다 훨씬 좋은 이유는 우리나라는 버스 정류소 안내판에 최종 종점만 표기
되지만...... 중국에서는 노선별로 중간에 거쳐 가는 정류소 들이 모두 표시 된다는 것입니다!
지하철 로 갈수도 있으니 쑤저우역에서 지하철 4호선 청색 1정거장이며, 도보로 가자면 강을
건너야 하니 터널을 지나거나 해야 하는데 Renmin Road 를 따라 1.3km 거리 입니다.
커운짠 정류소 에서 遊(유) 1 버스 를 타고 3정거장 만에 북사탑 北寺塔 The North
Pagoda 에 내리는데.... 주소는 1918 Renmin Rd, 平江区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吳)나라 황제인 손권 이 어머니의 만수무강 을 기원하면서 건립한 목탑으로 報恩寺塔
(보은사탑) 이라고 했는데 쑤저우성의 북쪽에 위치한지라 이후 북사탑 으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6세기에는 11층 이었으나 1130년 전쟁으로 소실되어 현재의 탑은 남송시대에 재건한 것으로, 76 m
높이(강남 최대) 의 9층 8각탑 이니...... 탑 정상 에 올라가면 쑤저우 전망을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해서 살펴 보노라니 지금은 올라 갈수가 없는 것 같으며 또 탑 뒤는
절이니 칠불보전 이 나오는데 지붕에 용 조각이 있으며 뒤쪽에 정원 도 있는데
정원이 엄청 넓고 전각도 무수히 많아 보이지만 시간이 없는지라 그만 발길을 돌립니다.
報恩寺塔(보은사탑) 은 9층으로 원래 11층이었다는데 보는 중에 문득 신라의 9층 목탑인 황룡사탑
이 생각나니, 황룡사 는 서기 553년(진흥왕 14년) 에 창건되어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로 삼한 통일을 염원 했던 사찰이니 결국에는 3국 통일을 이루었는데.....
1235년 몽고족의 침입으로불탑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인 동아일보 이소연 기자의 글이 떠오릅니다.
신라가 정말 삼국을 통일했을까... ‘일통삼한’ 시점 논쟁 재점화, 사학자 12명 함께 낸 신간서…
윤경진 교수 ‘7세기 성립설’ 반박, “통일전쟁때 ‘일통삼한’ 용어 없고, 7세기 성립설
근거로 제시됐던 ‘운천동 사적비’ 는 9, 10세기 에 세워.… 신라말 통일관념 생겨 고려때 완성”
7세기 중엽 나당 연합군이 백제, 고구려와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신라 명장 김유신
은 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 되면서 ‘삼국통일을 이끌었다’ 는 평가를
받는데, 이때는 822년 신라에서 ‘김헌창의 난’ 이 벌어져 내부 분열이 일어난 뒤였다.
‘7세기 중엽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삼국을 통일했다’ 는 건 상식으로 통한다. 물론 고구려 영역을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 만 얻었고, 외세의 힘 을 빌렸다는 부정적 평가는 있지만 통일 자체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논쟁이 오래 이어져 왔으니 1980년대에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
한건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을 뿐 애초에 고구려는 신라의 통합 대상이 아니었다 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출간된 ‘신라는 정말 삼국을 통일했는가’ 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해
관련 학계 논쟁을 정리했다. 각각의 주장을 펼치는 사학자 12명 의
논문을 엮은 이 책에서 윤경진 경상대 사학과 교수 의 주장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당대 삼국 통일을 뜻하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의식 은 존재했을까. 기존에는 이
의식이 7세기 전후 신라에서 성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지만..... 윤 교수는
“신라 말기인 9세기 무렵 성립돼 고려의 태조 왕건이 완성시켰다” 라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신라가 이른바 ‘삼국통일전쟁’ 을 벌였던 7세기 이전 사료에는 일통삼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고 했다. ‘일통삼한 의식 7세기 성립설’ 의 중요 근거 중 하나가 충북
‘청주 운천동사적비’ 다. 1 982년 공동우물터에서 발굴된 사적비에는 ‘合三韓 (합삼한·
삼한을 합쳤다)’ 이라는 문구와 686년을 뜻하는 당나라 연호 ‘수공 2년 (壽拱二年)’ 이 새겨져 있다.
윤 교수는 “수공 2년 이 등장하는 문장에는 ‘초가도 손질하지 못했다’ 는 내용이 나올 뿐 사적비가 이때 건립
됐다고 볼 만한 단서는 없다” 며 “686년은 비문이 아니라 사찰 건립 연도 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 했다.
비문에 고려 초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사해(四海)’ 라는 말이 나오고, 나말여초 비문에서 전형적
으로 나오는 아간(阿干)이란 직위 명단이 있는 점을 바탕으로 사적비 건립시기를 9, 10세기경 이라 주장했다.
보물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는 871년 신라 경문왕 때 이 목탑을 다시 만들면서
제작한 금동 사리함이다. 표면에 ‘果合三韓 (과합삼한· 과연 삼한을 합쳤다)’ 는 문구가 나온다.
일통삼한 의식의 형성은 신라 내부 상황 과 관련됐다고 윤 교수는 본다. ‘신라 성주사비 (聖住寺碑)’
는 건립 시기가 문성왕 재위 (839∼857) 때로 명확하고 ‘삼한(三韓)’ 이 언급된 사료 중
빠르다. 당시는 822년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웅천주 도독(都督) 김헌창이 반란 을 일으킨 뒤다.
윤 교수는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웅천주 에서 벌어진 반란은 백제의 복구 를 뜻하는
위협으로, 신라가 내부 분열을 막을 이념적 근거로 삼국통일 관념을 만들어
냈다” 며 “실제 정치이념으로서 삼국통일을 완성한 건 태조 왕건의 고려” 라고 했다.
기존 설에서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에 주겠다고 한 ‘평양이남 백제토지(平壤
已南 百濟土地)’ 를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토지’ 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윤 교수는 평양 이남 을
‘고구려 영토’ 로 해석하는건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하고 백제는 신라가 차지한다!)
“평양 이남이 곧 백제 토지” 이고 백제 영토 를 주겠다고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는 견해다. 적어도 전쟁 이전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까지 획득해 삼국을 통일 하고자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게 ‘신라는 정말…’ 을 쓴
학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 시기는 전쟁 이후인 7세기 중후반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중국의 절에서 보면 늘 느끼는 바이지만 향 냄새 가 진동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중국에도 수행에 전념하는
고매한 스님 도 있겠지만 대개는 내 선입견 탓인지 "직업으로 중 노릇" 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을 찾은 신도들의 모습 을 보면 우리나라 불자들 보다 훨씬 신심이 깊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절을 돌아가며 안치된 십여개의 불상마다 합장하고 절하며
절 안에서도 신심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아마도 저마ek 부처님께 비는 간절한
소원 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