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회 지도자들의 나라사랑
兪暻在(安洞敎會 元老牧師)
98년 역사의 안동교회가 간직해 온
그리고 앞으로 간직해 가야 할 뚜렷한 의식(意識)이 있다.
그 의식은 처음 교회를 창립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98년의 역사를 이어온 사람들의 의식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선비정신이다.
선비정신이 무엇인가를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청빈(淸貧)을 높은 가치로 여기며,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
옳다고 생각한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겠다.
안동교회를 부르는 별명이 ‘양반교회’였다.
그것은 당시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지도자급에 있었던 양반들이 주동이 되어 세운 교회였기 때문이다.
이 이름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특별한 교회임을 나타내는 별명이었다.
당시 사대문 안팎에 있는 장로교인 새문안․연동․승동․남대문 등의 교인들이
주로 서민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안동교회를 시작하고 주도하였던 인물들이 바로 북촌에 사는
영조․정조이래 고종 초까지 150년 간을 집권해 내린 노론의 양반들이었다.
궁내부 협판을 지낸 박승봉(朴勝鳳), 육군보병부령이었고,
강계부사를 지낸 한필상(韓弼相), 대지주였던 윤치소(尹致昭),
내부차관이었던 유성준(兪星濬), 내각서기관이었던 홍운표(洪運杓),
육군보병부위였던 이주완(李柱浣) 등 고위 문무관들이
예수를 믿어 안동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기에 양반교회란 별칭이 붙을 만 했다
양반이 다 선비는 아니지만,
양반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들 속에 더 강하게 선비정신이 자리잡게 되었다.
안동교회는 이런 선비정신이 투철한 양반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룩하면서
처음부터 신앙과 일치된 선비정신을 존중하였고 품위를 지키는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에 이렇게 활동한 교회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선비정신이다.
교회가 설립된 것이 1909년이었기에
그 시대적 상황에서 선비정신은 바로 나라사랑의 형태로 나타났다.
어떻게 보면 교회를 세운 목적 자체가 바로 기울어 가는 국운을 다시 살리겠다는
나라사랑에 있었다고 하겠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앞장 서 나가는
유럽 사회의 상류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식이 바로 선비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대체로 두 가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정신
첫째는 개혁 정신이다.
처음 교회를 시작한 유성준이나 박승봉은 당시 개화파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뒤쪽에 천연기념물 백송(白松)이 있는데,
그 자리가 한말 개화의 선구자 박규수(朴珪壽)의 집터로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김윤식 등이 찾아와 그 지도와 영향을 받았다.
김옥균의 집은 현 정독도서관 자리인 화동에 있었다.
북촌은 개화파 인사들이 몰려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유성준은 일찍이 자기의 중형인 유길준(兪吉濬)의 영향을 받아 일본에 유학을 하였고,
박승봉은 1895년 11월 공사 서광범(徐光範)을 수행하여 워싱턴에 2년여 머물면서
국제 정세와 새로운 지식을 배워 그의 정치사상은 일찍 개화되었다.
이들은 특히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면서 국권 회복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붓는 개혁적인 인물들이었다.
중앙학교의 전신인 기호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의 교장으로 봉사하는가 하면,
기독교 출판사인 창문사를 설립하고 기독교 서적들을 출판하였고,
민립대학(民立大學) 기성회를 조직하여 대학을 세우려고
열심히 활동을 하였던 훌륭한 지도자들이었다.
유성준은 1899년 9월 사면으로 귀국하여 있다가
1902년 ‘일본유학생 혁명혈약사건(日本留學生革命血約事件)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혔다.
여기서 그는 독립협회사건으로 이미 잡혀 들어온 이상재(李商在) 이원긍(李源兢) 김정식(金貞植) 홍재기(洪在箕) 이승인(李承仁) 이승만(李承晩) 이 준(李儁) 등과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벙커(D. A. Bunker, 미국감리회 선교사)가 넣어준 성경과 전도문서를 읽는
동안 그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그러다 마침내 1903년 12월 어느 날 중생의 체험을 한다.
1904년 1월 같이 있던 정치범들은 풀려났고,
유성준은 태(苔) 1백과 3년 유배가 언도되었다.
유배 중 황주읍 서리(西里)교회에 출석하면서 교인들의 자녀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05년 4월 감형으로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같은 해에 그가 저술한 <法學通論>이 출판되었고,
옥중 동지들의 권고로 연동교회에 나가면서 세례 받고,
당회장인 게일(James S. Gale)과 함께 국한문 신약전서를 ‘교작’(交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國漢文 新約全書>는 그 이듬해 발간되어 고종 황제에게 증정되었다.
그는 또한 「대한교육협회」 창설에도 참여하였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교육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부터 다시 관직에 나가 내부협판(內部協辦)까지 되었고,
의정부 법제국장(議政府 法制局長)까지 지냈다.
1907년 가을 일본 유배에서 돌아온 형 유길준에게 전도하여 예수 믿게 하였다.
1909년 2월에 기호학교(畿湖學校, 中央學校 前身)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육에 힘쓰고,
한편으로는 박승봉 김창제 등과 함께 기도처 모임을 가져 안동교회 창립의 기초를 놓았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도 계속 관직에 나갔으며,
1921년에는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김석태 박승봉 등과 함께 출판사 광문사(廣文社,
후에 基督敎彰文社로 개명)를 설립하여 한글도서 출판을 힘썼다.
1922년 봄에 안동교회 장로로 임직 되었으며,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장,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상무위원, 1924년 YMCA 농촌부위원, 흥업구락부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사회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6년에 다시 관직에 나가 충청남도 도지사가 되었고,
1927년에 강원도 도지사가 되어 1929년까지 일하다 은퇴하였다.
은퇴 후 조용히 교회봉사에 힘쓰다가 1934년 2월 27일 계동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08년 1월 서울, 경기,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모여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립할 때에 유성준 박승봉도 평의원으로 참여하였고,
박승봉은 초동에 있는 기와집 30간을 희사하였다.
이 학회는 동년 6월에 사립 기호학교(私立畿湖學校, 후에 隆熙學校와 합하여
中央學校가 되었다)를 개교하였다.
그 해 9월 13일에 박승봉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사(校舍) 마련에 전력하였다.
1909년 2월에 유성준에게 교장을 인계하고
그 해 3월부터 김창제 집에서 기도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기도 모임을 발전시켜 소안동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한석진을 청빙하여
1910년 가을부터 전도목사로 시무케 하였다.
그는 1911년 5월 17일에 장로로 피택되고, 그해 9월 10일에 장로로 장립 되었다.
그는 장로가 된 후 한석진과 더불어 교회 건축에 전력하여
1912년에 예배당을 준공하고 1913년에 헌당하였다.
1919년 삼일 독립만세 사건 배후에서 박승봉은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였다.
계동 135번지의 그의 집은 민족 지도자들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상재 이승훈 함태영 현 순 김필수 김도태 김지화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오세창 등이
그의 집에서 삼일 독립만세 거사를 계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동교회 교인이며
상해 임시정부 행정원장으로 일하던 최창식(崔昌植)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발행의 <독립신문>에 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1년 이상재 유성준 윤치호 이승훈 등과 함께 그는 광문사(廣文社)의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 1월 창립 총회를 열고 「조선 기독교 창문사」로 개칭,
창설하였다. 창설 후 월간잡지 <신생명>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YMCA 지도자들과 함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교육자립을 추구하였다.
안동교회 2대 목사였던 김백원(金百源)은 1919년 3월 12일
차상진 목사 등 12인과 함께 <十二人의 長書>를 만들어
한 통은 총독에게 보내고 한 통은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낭독하였다.
김목사는 이 때문에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김백원 목사는 박승봉 유성준 등과 함께 창문사 기성회에 적극 가담하여
모금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초대 한석진 목사와 2대 김백원 목사
그리고 창립멤버들의 이런 개혁적인 정신이
초기 안동교회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으로 “양반교회”라는 별명을 갖게 하였다.
청빈과 비타협 정신
둘째 특성은 선비정신의 가장 기본인 청빈정신이다.
청빈정신은 단순하게 가난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정신이기도 하다.
]이런 대표적인 인물로 김창제(金昶濟)가 있다.
그는 학교 교사로 강직하고 냉철하며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일생을 산 분이었다.
그가 남긴 일기 노트가 62권이 있는데,
예수를 믿은 후 매일 아침 성경 읽는 일을 죽을 때까지 거르지 않고
행한 기록이 일기에 남아 있으며,
창씨 개명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단호히 거부하였던 인물이다.
그가 안동교회에서 1930년에 장로로 선택되었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평생 직분 없는 평신도로 지냈다.
그런가 하면, 1929년에 안동교회 장로가 된
한글학자 이윤재(李允宰)는 비타협주의자로 소문난 분이다.
‘왜놈에게 단 5전의 전차삯도 보태기 싫다’고 하여
화동에서 연희전문학교까지 걸어서 다녔고,
그것도 총독부 건물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서소문쪽으로 돌아다닐 정도로 고집스러웠던 분이다.
환산(桓山) 이윤재는 1927년 마산 창신학교 시절 같이 교사로 일하던
김우현이 목사가 되어 안동교회 담임으로 오자 안동교회에 출석하였다.
그의 집은 교회에서 가까운 화동에 있었다.
1928년 1월 8일 안동교회 내 시온회가 창립되었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름을 「시온회」라고 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이즘(Zionism)을 생각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뜻을 담아 그렇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29년 3월 창립 20주년을 맞는 주일 오후에 장로로 임직하였다.
한글학자인 이윤재가 안동교회 장로가 되면서
안동교회는 한글학자의 집합소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는 시온회 활동을 비롯하여 당회 서기로서도 봉사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을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간행하였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보급에 힘썼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최현배 김윤경 등과 함께 검거되어
함경남도 흥원경찰서에 구금,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다가
1943년 12월 8일 새벽에 옥사하였다.
3대 목사였던 이강원은 땔감이 없어 겨울에 냉골에서 지내면서도
교회의 장작에 손을 대지 않았고,
끼니를 굶어도 교회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청빈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유길준의 둘째 아들이며 안동교회 집사였던 유억겸(兪億兼)은
연희전문학교 학감으로 일제 하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지키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는 월급을 모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어놓았다.
해방 후 군정 하에서 문교부장을 지냈으면서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집은 땔감이
없어 냉골이었고, 쌀이 부족하여 밤샘하는 문상객들에게 밤참을 내기 어려웠다고 한다.
안동교회 초기 역사에 나타난 지도자들은 그 시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이 사회의 지도자로 각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유치원, 중학교, 전문학교 각 교육 분야에서,
한글의 바른 사용과 보급을 위해서, 여성의 역할 증대를 위해서,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지도자들은 신앙적으로도 철저하였으며,
그들의 생활에 있었어도 남에게 모범이 되어 칭찬을 받았다.
이들의 나라 사랑은 단순한 애국이 아닌 선비정신과 신앙의 발로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이분들에게서 나라 사랑 방법을 많이 배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