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현성당(藥峴聖堂 : 사적 제252호)
1. 약현성당 연혁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조선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1886년 프랑스와도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을 체결했다. 이것을 계기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포교를 시작했다. 포교는 곧 천주교 성당 건축을 수반한다. 그런 성당 중 약현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다.
약현성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광복 후 명동성당으로 개명함)이 조선정부와의 마찰로 공사가 늦어졌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은 1887년 부지를 매입하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조선왕실의 반대로 공사가 늦어져 1892년 기공식을 하고 1898년 5월 축성식을 했다.
약현성당은 1887년 약현에 일반인을 위한 교리강습을 위한 강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이곳의 신자가 늘자 두세 정 신부가 주교인 뮈텔신부에게 건의하여 1891년 약현 언덕에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891년 10월 정초식을 했고 1892년 11월에 준공했다. 설계와 공사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했는데 코스트 신부는 명동성당도 설계했다.
1891년 11월 두세 정 신부가 본당 신부로 부임하면서 공소였던 약현성당은 명동 본당에서 분리 독립한다. 약현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인천 답동성당(1883/1897성당신축), 전주 함열성당(1885/1959 현 성당신축), 대구 계산동성당(1886/1902 성당신축), 원산성당(1887), 수원 왕림성당(1888), 전주 전동성당(1889/1914 성당신축), 부산 절영도성당(1890), 대전 합덕성당(1890/1929 성당신축)에 이어 10번째로 본당이 됐다.
약현성당은 우리나라 교육에 큰 기여를 했다. 1895년부터 어린이 교육을 시작해 1901년 여자교육을 위한 가명加明학교를 세우고 1906년에는 남학교인 약명藥明학교를 세웠다. 1909년에는 교사를 신축하고 두 학교를 가명학교로 통합했다. 이 학교는 1925년 총독부로부터 보통학교로 인가 받고 남녀 각 6학급으로 운영했다.
한국전쟁 때 가명학교가 폐교됐으나 한국전쟁 이후인 1954년 폐교된 가명학교 건물을 이용해 성 요셉 자선병원을 건립했다. 이 병원은 1955년 가톨릭 대학 부속병원이 됐으나 1974년 8월 31일 명동 성모병원에 자선진료소가 설립되면서 폐원했다. 병원과 함께 1954년 5월 성요셉 간호 기술학교가 설립됐고 이후 1962년 가톨릭 의대 간호학교로 승격됐다. 1959년에는 성요셉 병원이 성모병원과 합병했다.
1969년에는 교회 부지인 중구 중림동 149에 중림동 성요셉 아파트를 건립했고 1973년 성요셉 병원이 철수된 후부터 진정한 종교공간이 됐다. 1974년에서 1975년까지 본당건물을 대대적으로 개수했다. 1977년에는 사적 제 252호로 지정됐다. 이후 1998년 2월 11일 행려자의 방화로 성당 내부와 지붕이 크게 손상됐다. 복원공사는 1999년 5월에 시작해서 2000년 9월 17일 끝났다. 이후 주변 녹화사업, 진입로 포장 등은 있었으나 성당건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2. 약현성당건물의 변천
가. 최초 약현성당 모습
약현성당은 1892년 12월 2일 지어진 후 몇 번 변화가 있었다. 처음 지어진 성당은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평면은 중앙 신랑(Nave)와 좌우에 측랑(Aisle)이 삼랑식 평면인 전형적인 바실리카 형식이다. 성당의 종은 1893년 3월 24일에 도착해서 종탑이 완성된 것은 1893년 4월 23일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성당이 완성된 것은 1893년이다.
처음 평면을 보면 지금 몸체 중앙에 있는 출입문이 돌출되지 않았다. 그리고 종탑도 지금처럼 뾰죽한 것이 아니고 로마네스크형 종탑이었다. 내부는 신랑이 첨두형볼트, 측랑은 배럴볼트다. 그리고 정면에는 장미창(Rose Window)가 설치됐다. 이런 상황을 보면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섞여있는 절충주의 형식이다.
특히 종탑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러시아공사관 전망탑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공사관이 1890년 건립된 것을 고려하면 종탑은 러시아공사관의 전망탑을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중석은 당시 모든 교회가 그랬듯이 남녀석(남자:북쪽/여자:남쪽)을 구분했고, 의자 없이 바닥에 앉았다고 한다. 이런 구분에 대해 당시 기록에는 전체적인 조화를 방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벽은 벽돌쌓기는 영식쌓기로 했는데 성당벽체는 1.5B고 종탑벽체는 2.0B로 더 두껍다. 종의 무게를 고려한 것이다. 기초는 벽돌 줄기초다. 종탑을 현재 형태로 바뀐 것은 1905년이다. 기존 로마네스크형의 박공지붕을 걷어내고 첨탑형식으로 바꿨다.
나. 1921년 개수
이때 측면에 출입구를 현재처럼 전실 형식으로 바꿨다. 출입구에 전실을 만든 것은 당시 신을 벗고 들어갔기 때문에 신을 갈아 신는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내부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 없앴고 2층에 성가대석을 만들었다.
2층에 성가대석은 세 칸 규모로 설치했고 2층 성가대석 채광을 위해 도머창을 한쪽에 두 개씩 모두 4개를 설치했다. 이런 변화는 늘어나는 신자를 수용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내부에 있는 조적기둥이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에 12개 기둥 중 10개를 석조기둥으로 바꿨다. 현재 내부에 있는 석조기둥은 이때 바뀐 것이다.
이후 1974년 대보수까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24년 9월 낙뢰로 인한 종탑이 손상돼 수리했는데 피뢰침을 설치하면서 종탑 높이가 조금 더 높아졌다. 이후 한국전쟁 때 피해를 본 종탑 벽돌을 교체 했고 1965년에는 풍화된 외벽 벽돌 일부를 교체 했다.
다. 1974년 대보수
1974년에는 본당을 해체 보수했다. 외벽의 0.5B 벽돌을 전면 교체 했고 북측 및 창 밑은 내부 벽돌까지 교체했다. 이때 외부 벽돌을 변색벽돌을 사용해서 외부 색감이 변했다. 창과 문도 전면 및 측면 내부 문을 제외한 모든 창과 문을 교체 했다. 그리고 내부 마루바닥을 인조석 물갈기로 교체했고 천정은 회반죽을 마감을 걷어내고 합판 위에 도장으로 교체했다.
이층 성가대석도 3칸이었던 것을 한 칸을 줄여 2칸으로 만들었다. 2층이 줄어들면서 올라가는 직선 계단를 돌음 계단으로 교체했다. 이런 변화는 과거 2층 용도가 회중석으로도 사용하였는데 규모를 줄이면서 순수하게 성가대 석으로만 계획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지붕에 있는 도머창도 2개에서 한 개로 줄였다. 지붕도 골함석에서 동판잇기로 바꿨다. 내부 제대도 다시 꾸몄고, 제단 뒤쪽 창문유리도 색유리로 교체했다.
이때 보수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현황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임의로 보수하여 개수 부분의 이전 현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보고서에서도 지하구조를 찾아보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1900년대 사진에 나온 굴뚝 때문이 아닐까 한다. 굴뚝이 있다는 것은 난방시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굴뚝이 없다. 제대로 조사를 했다면 어떤 시설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라. 2000년 화재 후 복원
1998년 2월 11일 행려자 방화로 성당 내부가 전소되고 종탑의 종도 손상됐다. 1999년 6월에서 2000년 11월까지 복원공사를 진행했는데 이때 원칙은 1974년 원형손실부분을 복원하는 것으로 했다. 이때 수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바닥 인조석 물갈기에서 장마루로 교체
2) 외벽의 변색벽돌 교체, 해체된 1894년 대 벽돌 중 사용가능한 벽돌을 모아 제단 및 입구 내벽에 사용하는 것으로 함
3) 내부 기둥 아치부분에 시멘트 몰탈 위 페인트였던 것을 시멘트 몰탈을 걷어내고 벽돌을 드러냄.
4) 2층 성가대를 계단식으로 만들고 원형계단을 철거하고 전실에 계단을 새로 설치함
5) 지붕 전체를 교체했는데 지붕과 아치사이에 공기순환하도록 공간을 두고 도머창을 2개소 추가함.
6) 천정은 과거 기법과 같은 회벽미장으로 함
7) 종탑은 최초 형태가 아닌 1905년 양식으로 함.
상기 내용을 볼 때 복원은 원형에 가깝도록 하려 노력했음을 느낀다. 그렇게 했음에도 벽돌 색상은 문제가 있다. 과거 벽돌은 색상이 지금처럼 밝지 않다. 그리고 생산 과정에서 태토나 굽는 온도가 일정하지 않아 색상 또 같지 않다. 그런데 요새 벽돌은 색상이나 품질이 균질하다. 너무 색상이 균질하다보니 인간미가 없고 너무 차갑게 느껴진다.
그에 비해 옛날 벽돌을 조금씩 차이가 있는 색들이 섞이면서 자연스런 조화를 이룬다. 명동성당 벽체부분이나 옛날 벽돌로 쌓았다는 제단 부분을 보면 부드럽다. 이런 것도 복원에 신경 썼어야 한다. 이런 문제는 한옥에서 사용하는 기와에서도 나온다. 균질한 기와색상이 한옥의 맛을 떨어뜨린다. 이 문제는 공사비에 관련된 문제기 때문 안타깝게도 앞으로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참고문헌
- 서울 약현성당 기록화 조사보고서/서울중구/2019.11
- 약현성당 정밀실측 및 수리보고서/중림동성당/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