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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묵상글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가시나무의 교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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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가시나무의 교훈
오늘 독서 판관기는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떤 사람이 임금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왕을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동요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는 판관 대신 임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은 보통 훌륭한 사람은 되려고 하지 않고 가시나무처럼 못된 자,
그러니까 남을 풍요롭게 하지 않고 가시처럼 콕콕 찌르는 자가 외려
임금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가시나무를 예로 얘기하고 있지요.
저는 이 가시나무를 보면서 작정하고 한 말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대통령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적인 소견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니
제가 남북 간에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라는 우리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일치하지요.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북한을 주적으로 천명하고 대결 정책을 펴고 있음에
저는 지난번에 이미 이것이 비 복음적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더 극우적이고 분열적이며
냉전적인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광복절에 빈 인륜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고
보상치 않는 일본에 대해서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하면서
자기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에게는 반국가적인 세력이라고,
통일과 종전을 얘기하면 공산 전체주의라고 매도하였습니다.
동족을 적으로 몬 데 이어 우리 국민까지 적으로 몬 것인데
우리가 일본 압제에서 해방된 것이 이렇게 사분오열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래서 통합을 얘기해야 할 광복절에 분열의 기념사를 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이번 광복절 기념사는 오늘 가시나무의 으름장과 같습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자기를 반대하면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라니!
이런 반국가적인 세력은 없어져야 한다니!
이런 제왕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 지금 우리 대통령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대통령은 안 되고,
자기의 잘못을 볼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대통령은 안 됩니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고 국회 의석을 180석 차지하자
자기 잘못을 보지도 반성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전 정권이 권력을 잃었는데
지금 우리의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전 정부보다 더 지지받지 못하면서도
모든 탓을 전 정부에게 돌리기에 잘못을 볼 줄도 반성할 줄도 모릅니다.
그럼으로써 무능에다가 무책임하기까지 하고 권력에 취해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 교황을 위해 기도하듯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며 여러분도 이 기도에 초대합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우리 대통령이잖아요?
우리 국민을 향해 내부적으로 하는 잘못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든지 해결합니다.
그런데 외부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위태로워집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위험한 길을 가고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가시나무 얘기를 교훈 삼아
현재와 미래의 우리 대통령들을 뽑고 판단하고 죽비를 내리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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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인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 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주인은 애시 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 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임을 맗해줍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온 일꾼들의 몸 고생과 나중에 온 사람들의 마음 고생도 함께 돌보십니다.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가난하고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 사랑의 우선적 선택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능력과 성과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주시고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호의와 자비는 부족함이 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공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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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감사하라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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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사연의 노래 중에 ‘만남’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만남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나 영향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노사연의 노래는 그런 만남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편했고, 가르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고, 친구들의 영향도 있어서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느 조직보다 견고한 조직에 속해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갈릴래아의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 하혈하던 여인은 감히 말은 못하고 예수님이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절한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사울’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죄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만났던 그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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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한 가지 질문해 보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까요? 아니면 임종 전에 대세를 받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먼저 들어갈까요?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포도밭에서 일한 모든 사람에게 그 품삯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일한 사람들이 저녁 늦게 와서 일한 사람들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왜냐하면 늦게 온 이들에게도 주인이 품삯을 자신들만큼 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찍 온 이들에게 더 주던지, 아니면 늦게 온 이들에게 덜 주든지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일꾼들이 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내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대신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랑으로 걷는 길이 신앙의 길인데,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왜 나만 힘들지요?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있지요? 다른 사람은 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이런 것을 허락하시지요?’라고 하느님께 질문합니다.
이런 질문이 옳은 질문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나의 사이에 다른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필요도 비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보지 말고, 남과 비교하지도 마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내가 만나고 사랑하길 희망하십시오. 이것이 참 신앙생활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복음의 의미입니다. 남 따라서 연애하는 사람 없듯이 하느님과 나만의 만남을 키워가십시오.
만남 혹은 돌아옴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이세요?
얼마 전
식사 전 기도를 하며
사람과 음식을 축복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물어보십니다.
신부님이세요?
그리고는 반갑게 말씀하십니다.
저도 신자입니다.
저의 세례명은 oooo이고….
그러고는 ‘제가 쪼금 냉담 중입니다.’라고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만남은 돌아옴의 문입니다.
그냥, 편하게 집으로 돌아오세요.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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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교통사고 영상을 1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보여준 후,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략 5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영상을 또 다른 실험 참가자 10명에게 보여주고는 “운전자가 사망한 이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략 6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운전자가 사망했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본 영상 속의 차량 속도를 더 높은 것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정보를 통해 관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족에게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으면 아무리 올바른 행동을 해도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고 있는데, 다른 모든 이는 내가 틀렸고 상대방이 맞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저렇게 모를 수 있냐면서 화를 내지요. 그러나 우리는 틀릴 수 있으며, 그래야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만 맞다는 이기심 가득한 고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음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얼핏 보면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 모두 같은 품삯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오후에 나와 잠깐 일을 하고서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은 어떨까요? 주인이 틀렸다면서 자신이 받은 품삯을 돌려줄까요? 아닙니다. 그는 틀렸다는 생각보다는 감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이는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처사에 대해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 맞고 틀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감사 속에 있어야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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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바르게 파악하면 절반은 해결된 것이다(찰스 F. 케터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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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 삶의 축복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
쉴 사이 없이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참 부지런한 하느님입니다. 배밭사이 길을 걷다가 이마를 부딛쳤고 위를 쳐다 봤습니다. 흰별들처럼 주렁주렁 달린 흰 배봉지 열매들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 놀랍게 많이 컸습니다. 작은 배꼭지에 찰싹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열매를 보며 믿음의 배꼭지를 연상했고 이 또한 저에겐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가을 열매 익어 수확될 까지는 믿음의 배꼭지는 꼭 나무에 붙어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중심에 계신 정주의 하느님은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주 삶의 축복에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이 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하면 괴물이요 답이 없습니다. 현 시국을 대할 때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아침식사후 부지런히 불암산 계곡길을 걷는 것도 기쁨이요 얼마전 써놓고 재미있어 한 글을 나눕니다.
“산에 가고 싶을 때
산을 바라보며
산이 되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가 되네
강에 가고 싶을 때
강물처럼 걸어서
강이 되네
누가 알리?
이 행복, 정주의 축복
아마 하느님은 아실 거다”
늘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에서 산이 되어, 바다가 되어, 강이 되어 살아가는 정주 삶의 축복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라는 글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제 집무실을 수도생활 잘 하라고 하늘이 숨겨둔 천장암天藏庵이라, 또 제분수를 알아 만족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족암知足庵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장암은 불교의 대선사 경허스님이 머물던 충남 서산 개심사에 위친한 암자이고 지족암은 흔히 일컫는 암자 이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 삶의 신비를 엿볼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이나 오후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가 똑같은 급료를 받자 항의하는 일꾼,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권리에 대한 도전이요 월권입니다. 제 분수를 잃은 무례하고 무지한 이의 반응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요즘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도의 원조임을 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일하고 싶어도 심신의 허약이나 장애나 연로함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모두가 인간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매달 국가가 전국민에게 기본적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현될 때 복지국가의 완성이요 이런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복지사회의 완전한 실현의 모델이 우리 요셉 수도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동체가 소임에 무관하게 모든 이가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너그럽게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깊은 배려의 사랑은 늦게 온 사람의 속사정을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식솔이 딸린 무거운 짐을 진 가장이라면 일 시간에 개의치 않고 기본적 하루 생활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네가 뭔데?”, “너나 잘해!” 꾸짖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네 분수를 알아 네 자리에서 네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완전 고용을 위해, 모든 이들의 완전 구원을 위해 흡사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기다리는 주님을 연상케 하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에 충실하며 제대로 살았던 정주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나 이 짧은 생각의 사람은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가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역시 악순환의 반복의 인간 역사를 보여줍니다. 어제 기드온 판관의 등장으로 좋았던 분위기가 아비멜렉 임금 독재자의 등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 자초한 재앙으로 우리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요탐의 우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로 상징되는 이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기에 절대 임금이 됨을 사양합니다. 이래야 맞는 것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대책 불가능한 아비멜렉은 제자리를, 제역할을, 긍극적으로 자기를 몰랐습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살았어야 할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비멜렉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선택으로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참 유익한 공부가 되는 예화입니다. 제발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이런 공부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학하고 무지한 지도자 잘못 뽑으면 지옥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배도 바다의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중이 바다라면 지도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배와 같습니다. 민중의 바다가 노호하여 태풍처럼 휩쓸면 배는 흔적없이 사라짐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겸손히 공동체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동체의 뜻에 따라, 민심에 따라 자비롭게, 지혜롭게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분수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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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3.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
맨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생각지도 못한
한 데나리온을 받고
기쁨에 겨워 돌아간 후에
맨 처음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간 후에
일꾼들과 가족들이
하루의 고운 땀의 결실로
오늘 하루 삶의 이야기 곁들여
맛난 저녁식사를 즐기며
내일의 꿈으로 가득할 시간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아무도 없을 듯한 장터이지만
여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무도 사지 않은 일꾼들이 있을까
선한 포도밭 주인이 홀로 애타게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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