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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 여행1 - 마르세유에서 부르고뉴의 본으로 가는 길에 리옹 시내를 구경하다!
5월 23일 아침에 엑상 프로방스 Aix en Provence 에서 7시 50분에 프랑스 국철에서
운영하는 Autocar 버스 를 타고 마르세유 Marseille Saint Charles 에
도착해 기차 시간이 남은지라 역을 나와 대로를 걸어서 마르세유 시내를 구경합니다.
다시 마르세유역 으로 돌아와서는 12시에 출발하는 파리행 떼제베 TGV 기차 를 타고
아비뇽 을 거쳐 14시 10분에 리옹 파르 디외역 Lyon Part Dieu 에 도착합니다.
이제 화이트 와인의 고장 부르고뉴의 본 으로 가기 위해 디종 Dijon Ville 으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는지라 모니터에서 시간을 확인하니 15시 16분 출발인데
시간이 있는지라 역 광장으로 나오니 이슬비가 내리는데.... 몇년 전에
여기 리옹에서 1박하면서 시내와 언덕 위에 성당 을 둘러본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
프랑스 제2도시 리옹은 트램 3개노선에 지하철 4개 노선 이 있으니 1회권 1.7 유로로 1시간
내에는 환승이 무료이며 버스와 케이블카(푸니쿨라) 도 공용 인데 One Day Free Pass
는 5.2 유로이니 신용카드로 1일권 교통카드 를 끊어 지하철 B선을 타고는 3정거장
Charpennes 역에서 A 선으로 갈아타고 3정거장 오텔 드 빌 Hotel de Ville 역에 내립니다.
오텔 드 빌 Hotel de Ville 역 앞에는 오페라 극장 Opera de Lyon 과 시청
Hotel de Ville 이 있으며.......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리옹 미술관
Musee des Beaux-Arts de Lyon 이 있는데 그리스, 로마 유적 부터 중세의
회화와 조각 및 이탈리아와 플랑드르파에 인상파 회화등을 소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바르똘디 분수 Fontaine Bartholdi 는 쇠로 만든 추상적 형태를 가진 조각이 눈길을 끄니
그 너머에는 론 강 le Rhone 이 도시를 양분하며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보는데,
리옹 Lyon 은 "론강과 손강의 합류점" 으로 BC 43년 푸르비에르 구릉에 건설된 로마
식민도시 루그두눔 에서 기원하며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령 갈리아 지방의 수도 였습니다.
2세기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이 로마가톨릭교로 개종한후
주교좌 가 설치되었고, 이후 게르만 부르군트족의 침략 을 받았으며 그후 견직업 과
출판이 발달하고 라블레등 인문주의자들이 활동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크레디리요네도 이 도시에서 발족했는데 사람들은 리오네즈 lyonnaise 라 불린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대한 저항운동 이 격렬했으며 현재 견직물
대시장으로 아시아에서 수입되는 생사 는 거의
이곳에서 거래되며 매년 4월에는 국제 무역박람회 가 열린다고 합니다.
다시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서는 메트로 C선을 타고 2 정거장 Bellecour 역에
내려 D선으로 갈아타고 1정거장 비외 리용 Vieux Lyon 역에 도착 합니다.
위로 오르니 교회가 보이는데 유서 깊은 "생장 대성당" Cathedrale St. Jean 인 모양이라
들어가서는 대성당 내부를 구경하는데 생 장 대성당 은 12세기에 건설이 시작된
수석 주교좌 성당 으로 건축물은 고딕양식으로 뒤쪽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남아
있으며 파사드에는 성서 일화를 소재로한 원형 조각 메디용이 300개나 장식 되어 있습니다.
생장 대성당 내부에 16세기에 제작된 천문시계 가 있으니 12, 15, 18시에 인형이 움직이며
야경 이 멋지다는데, 1245년과 1274년에는 리옹 공의회 가 열렸고 1600년에는 프랑스왕
앙리 4세 와 피렌체의 "마리 드 메디시스 (메디치) 의 결혼식" 이 거행된 곳이기도 합니다.
마리 드 메디시스 는 피렌체 메디치가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 딸이니 앙리 4세의 후처로
들어가 루이 13세 를 낳았는데, 왕이 죽자 섭정 이 되었으니 1614년의 삼부회에서
리슐리외 의 재능을 발견하고 고문관으로 발탁하였으나 1617년 아들인 루이 13세
에게 정권을 빼앗기고는.... 1633년 까지 항쟁을 계속하다가 블루아성 으로 추방 됩니다.
피렌체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의 왕비가 된 첫 번째 사례는 이보다 67년전으로 피렌체
메디치 가문 적장자의 후손 카트린 드 메디시스 는 1533년 앙리 2세와 결혼 했는데
부친은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 이며 어머니는 프랑스 왕녀 오베르뉴로
그녀가 출생하자 병약했던 어머니는 2주 뒤에 사망 했고.... 아버지도 곧이어 죽었습니다.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가 후견인을 자처하자 증조부 교황 레오 10세 에게 로마에서 보호
받다가 교황 사망후 쫃겨나지만 "삼촌이 교황 클리멘스 7세" 로 등극하자 부상하는데
하지만 클리멘스 7세의 실정으로 로마는 카를 5세 신성 로마제국 황제에게 점령 되고
피렌체에서 폭동 이 일어나 카트린은 베네딕트 수녀원에 의탁해 간신히 목숨을 보존합니다.
1533년 교황 클리멘스 7세 는 권력 회복후 카를 5세 황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왕국과
동맹 을 맺었고 카트린은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와 정략결혼" 하는데 결혼후
10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첫 임신 을 했으며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을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어 왕가의 적통을 이어 왕세자비로서 권위 를 회복합니다.
당시까지 프랑스는 포크 를 사용하지 않았고 과자 의 존재를 몰랐으나 카트린이 르네상스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하며 익힌 이탈리아의 예술적인 감각과 에티켓이며 요리 등은
당시 프랑스 궁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프랑스 궁중문화 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 는 이탈리아 예술을 흠모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여러 예술가
들을 파리에 초빙해 궁중건축과 장식을 의뢰하니 바로 프랑스 르네상스 입니다!
1546년 프랑수아가 사망하고 남편 앙리 2세 가 등극하나 왕은 애첩 디안에게 슈농소성
을 주는등 애착을 보였으나 1559년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에 출전하여 죽고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이 되자 섭정 을 하지만 정치는 구교파 기즈공 에 의해
좌우되던중 1560년에 투르에 집결한 위그노(신교도) 들이 블루아 성을 공격 해 옵니다.
구교 가톨릭파는 반격하여 대대적인 살육을 감행했으며 1562년에는 예배중인 신교도들을
무차별로 죽인 바시의 학살 로 인해 일어난 구교와 신교 종교전쟁을 "위그노 전쟁"
이라고 하니 위그노란 프랑스내 신교파 를 말하는데, 수장은 프랑스와 에스파니아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나바르 왕국의 앙리 드 나바르 ( 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 ) 였습니다.
이 와중에 왕세자 프랑수아 2세 는 병약해 1년만에 죽으니 스코틀랜드 공주 출신 왕세자비
메리 는 쫃겨나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귀족 단리와 재혼후 여왕 이 되었으나... 궁정
악사 라치오와 불륜 을 저지르다가 탄로가 두려워 남편을 죽인후 영국으로 망명 합니다!
당시 영국왕 헨리 8세 는 스페인 공주인 왕비가 딸 메리만 낳은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니
왕위계승자가 없으면 또 몇년전의 장미전쟁 같은 처절한 내란을 겪게될수 있는지라
아들을 얻기 위해 스페인 공주인 왕비와 이혼하고 시녀 앤볼레인과 결혼 하려다가
로마 교황청에서 파문 을 당하니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창시 했었습니다.
딸 엘리자베드 여왕이 가톡릭을 탄압 하자 가톨릭 교도들은 여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인
메리를 여왕 으로 모시려다가 탄로가 나니... 결국 메리 는 런던탑에서 죽지만 그녀와
단리의 소생인 제임스 스코틀랜드 왕은 엘리자베드 여왕 사후에 영국왕이 되었던 것이지요!
프랑스에서는 차남 샤를 9세의 즉위를 계기로 카트린은 실권을 장악 하고는 신교도
와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구교파 기즈가의 세력
사이에서 양다리 를 걸쳤으니 1572년 샤를 9세가 기즈가의 전횡에 반발해
신교파를 중용 하자 카트린은 숙적인 구교 가톨릭 세력인 기즈 가문과 결탁 합니다.
기즈의 가톨릭군은 나바르의 앙리 4세와 프랑스왕실 공주의 결혼식 연회 가 열리던 파리에서
방심한 수만명의 신교도를 대학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 하였으며, 나바르의
앙리는 4년간 파리에 구금 되었다가 탈출하니..... 다시 신구교간 종교전쟁이 재개 되었습니다.
1587년 신교도 위그노군을 진압 하기 위해 조아이유 공작 이 보병 6천, 기병 2천에 대포
6문으로 루아르강을 도하해 푸아투로 진격하자... 앙리 나바르 는 보병 3,500에
경기병 1,500 명 그리고 대포 3문으로 쿠트라 Coutras 를 선점 하고는 이에 맞섭니다.
앙리 나바르의 격려로 사기가 오른 위그노군 의 대포 3문이 불을 뿜자 다급해진 가톨릭군
기병이 공격하니 숫적 열세로 무느지려는 순간에 스코틀랜드 보병 소대 가 결사항전
을 하는데.... 이후 좌익 위그노 보병대대가 국왕군 연대를 향해 돌격을 감행하고
우익 보병대는 적 보병대와 싸우면서도 공격해온 국왕 경기병 연대에 총탄을 퍼붓습니다.
중앙 본진은 나바르가 콩데 공작 및 수아송 백작과 포진했는데 국왕군 중기병 이 돌진해오자
군목 이 시편 128장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를 암송하자 위그노군 전체가 합창을 하며 가톨릭 국왕군을 맞받아칩니다.
나바르 부대의 아르퀘부스 총이 불을 뿜자 국왕군의 중기병이 무느지면서 위그노군의
중기병대는 국왕군을 돌파 하니, 이 전투에서 국왕군 8,000명 중 2,0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000명 넘게 포로로 잡히니 전투는 "신교도 위그노군의 대승" 으로 끝납니다.
한편 프랑스 북부 전투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과 덴마크 프레데릭 왕이 돈을 대어
독일 개신교도군 1만 5천과 스위스 개신교도군 5천 이 프랑스 북부로 침입하자 가톨릭군
총사령관 기즈공작 은 1587년 11월 11일 오뉴를 급습 독일군 2천여명을 죽이고 대승을
거두자 국왕 앙리 3세는 스위스군을 스위스군 용병 으로 막으면서 돈을 주어 귀향 시킵니다.
승리한 기즈 공작의 위세 가 하늘을 찌를때 프랑스왕 앙리 3세는 여기 리옹에 와서는 10만
크라운 금화를 들여 예쁜 강아지 를 수집하고 원숭이와 앵무새 수집에 열중해 비난을
자초했으며... 신성동맹 영수 기즈가 파리에 세력을 심자 앙리3세는 불안을 느끼니
1588년 5월 8일 기즈 공작이 파리에 입성할 때 가톨릭 파리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 합니다.
기즈 공작 이 내켜하지 않는 카트린을 앞세워 루브르 궁전으로 앙리 3세를 방문하자 위험을
느낀 국왕 은 연대장들에게 민병대 소집을 지시하나 파리 시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자
국왕은 파리 교외에 주둔중인 4천명의 근위연대와 스위스 용병 을 시내로 불러
들이니 파리 시민들이 총궐기해 바리케이트 를 쌓고 시가전 끝에 "국왕군은 항복" 합니다.
승리한 기즈 공작이 국왕을 압박하자 앙리 3세 는 루브르를 나와 세느강변 튈르리 정원
을 산책하는 듯 하다가...... 별안간 도망쳐서 파리 서남쪽 사르트르 로 달아납니다.
이후 1588년 신구교 양측은 협정을 맺고는 10월 루아르 강변 블루아성
에서 3부회를 소집 하니 실권을 빼앗긴 국왕 앙리 3세 는
12월 23일 기회를 잡았으니, 마침내 "기즈 공작을 왕궁에서 암살" 합니다.
하지만 기즈공의 동생인 바옌느 공작이 신성동맹군을 이끌고 블루아성을 공격 해 오자
앙리 3세 는 적이었던 신교도 영수 앙리 나바르와 동맹 을 맺고 이에
맞서는데.... 가톨릭군의 공세에 대해 앙리 나바르가 신교도군 을 이끌고
구원하여 위기를 넘기나.... 다음해에 왕은 결국 "가톨릭 사제에게 암살" 당하게 됩니다.
파리의 가톨릭교도들은 기즈 공작을 죽인 국왕 앙리 3세를 가톨릭의 탈을 쓴 악마 로
생각했던 것이니 이로써 14세기 이래 계속된 프랑스 발루아 왕조가 단절
되는데... 그전인 1,572년 카트린 메디치 는 신구교 종교전쟁인 프랑스의
내란을 끝내기 위해 딸 마르그리트를 나바르공 앙리 4세와 결혼 시킨 바 있었습니다.
나바르의 앙리 4세 가 위그노(신교)에서 가톨릭(구교)으로 개종 하고 1589년 왕위에 올라
"낭트칙령" 을 반포해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줌으로써 종교전쟁 내란을 끝내는데,
앙리는 어머니 잔 달브레로 부터 나바르 왕국 을 물려받았으며 프랑스 쪽으로는 왕가인
발루아가 방계였던 아버지 로 이어진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구교도측이 외손인 스페인 공주를 여왕 으로 내세우는 가운데 앙리 4세 는 영원히 신교를
버릴 것을 다짐하고 "구교로 개종" 하여 저항하는 파리 시민과 구교 귀족들을 설득
하자 구교 귀족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종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나
전통적으로 왕의 대관식이 치러지던 도시 랭스 는 계속 앙리 4세를 의심 하였기 때문에....
앙리 4세는 1594년 2월 27일 사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 에서 대관식을 치루고 정식으로
프랑스 왕위에 오르니 “발루아 왕조”는 막을 내리고 "부르봉 왕조" 가 시작되는데,
그후 왕비 발루아 가문의 마르그리트와 이혼 하고는 후처 로 맞이한 것이 바로 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마리" 로 1600년에 "생장 대성당에서 결혼식" 을 올린 것이네요?
앙리 4세의 “하느님은 내 왕국의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이면 닭고기 를 먹길 원하신다” 는
말에서 유래하여 오늘날 까지도 "닭은 풍요로운 프랑스" 를 상징하게 되었는데....
언덕 위를 보니 거기 푸에르비에르사원 이 보이니푸니쿨라 를 타고 올라야 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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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