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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소안도[所安島]
소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의 본 섬으로, 면적 23.164km2, 해안선 길이 42km, 최고점 350m(가학산), 인구는 1,253가구 2,662명(2010년)이며 초등생 81명, 중학생 44명이다.
지명 유래를 보면 해남 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지만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이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한다.
소안군도 중심 섬 소안도
소안도는 완도에서 남쪽으로 19km 정도 떨어졌으며 소안군도의 중심섬이다. 주위에는 소안도와 크기가 비슷한 청산도, 보길도, 노화도 등이 있다. 소안도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섬으로 전통사회 당시에 해남에서 제주도를 오갈 때 풍선들이 순풍을 기다리고, 바람이 많이 불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완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청산도와 보길도만 생각한다. 보길도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섬이다. 아마도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등 교과서에 나온 시와 수려한 풍광 덕분일 것이다. 그 분의 유적과 아름다운 예송리의 자갈밭 해수욕장, 중리 모래 해수욕장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도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 섬으로 지정되면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보길도와 청산도의 유명세에 가려,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했지만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섬이 소안도이다. 그러나 소안도를 한 번 방문한 사람들은 역사와 풍광 그리고 먹거리에 놀란다. 매력이 넘치는 섬이 소안도다. 남쪽의 서중리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면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고,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는 미라리의 상록수림과 함께 자갈밭 해수욕장의 몽돌은 파도칠 때마다 달그락거리며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내보이고 있다. 소안도는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일출장소는 미라리 자갈밭 해수욕장과 가학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한 쉼터가 유명하다. 일몰은 서중리와 물치기미 쉼터가 아름답다. 가학산 정상은 해발 359m인데 여기서 다도해 풍경을 바라보면 황홀감에 빠진다.
무엇보다도 소안도의 자랑은 싱싱한 수산물의 보고라는 점이다. 전국 최고의 김과 전복, 미역, 톳 등은 어민들에게 높은 소득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남쪽의 소진 마을은 삼치잡이로 유명하다. 수십 척의 배들이 삼치 낚싯대를 우뚝 세우고 출어를 기다리고 있다. 가을 삼치는 지방이 가득해 부드럽기에 미식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다.
이웃 섬인 노화도와 보길도가 연도교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하지만, 소안도는 이들 섬과 연결되지 않았다. 소안도는 노화와 보길도에 밀려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노화도와 소안도 구도 사이에 연도교가 연결되고 있으며, 그 다리가 완성되어 소안도로 이어지면 그때 소안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깊은 소안도
소안도는 조선조 명종대(1546-1567)에 최초로 김해 김씨, 동복 오씨가 월항리에 입주하였다. 이때는 섬이름을 달목도(達木島)라 불렀는데 임진왜란을 피하여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1866년 청산진 설치로 행정과 군무를 청산진에서 관할하다가 1896년 완도군이 되면서 소안면이 완도군 소속이 되었다. 조선조 정조(1777-1800) 시대에 가혹한 세금 징수로 주민들의 삶이 극심하게 피폐해지자 1864년(고종 원년)에 소안도 비자리에 별장을 설치하고 주민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옛날 강진 탐진포와 해남 관두포에서 제주 내왕을 관장할 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진에서 제주를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소안도 월항리를 거쳐 오가도록 하였다.
조선후기 이곳은 육지-제주를 잇는 중요한 항구였다. 강진 마령에서 51km 떨어져 있는 소안도에 가면 재미있는 비석이 두 개가 세워져 있는데 제주도현감의 불망비이다. 면 소재지라고 할 수 있는 입구에 비가 있기 때문에 소안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 이 비석들은 육지인 강진 마량과 제주도 사이를 잇는 중간 기착지로 소안도를 발전시킨 것에 대한 감사의 징표라고 한다. 하나는 '제주목사백공락연영세불망비(濟州牧使白公樂淵永世不忘碑)'이고 하나는 '제주목사심공연택영세불망비(濟州牧使沈公賢澤永世不忘碑)'이다.
백락연은 고종 14년(1877) 정월에서 18년 5월까지, 심연택은 고종 20년(1883) 5월부터 21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다. 1977년에 발행된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들의 영세불망비는 소안도를 기항지로 만들고 지역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으로 소안도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소안도는 이런 관리들 덕택에 조선후기 대표적인 제주 육지 간 선박들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길목이란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候風處)를 말하는 것이다. 강진의 남당포나 백도(신전), 해남과 관두량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뱃길은 섬과 섬 사이를 따라 간다. 이 일대는 뱃길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날이 저물다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섬으로 피신할 수 있다. 지금의 완도항인 가리포나 완도 군내면 백일도, 횡간도, 넙도 등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모두 후풍처였다.
소안도와 보길도를 벗어나면 이제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다. 언제 어떻게 태풍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소안도에 배를 대면서 하늘을 보고 바람의 심기를 극진히 살펴야 했다. 섬사람들에게 육지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던 것 같다. 보통 30~40명 정도 되는 일행이 하룻밤을 묵어가면 그곳의 주막이나 여관 등이 재미를 톡톡히 봤을 게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이중의 일행은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 · 서리 2명, 남자 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 1명, 격군 8명 등 50명에 달했다. 또 제주에서 육지로 말을실어 나르던 공마선에는 격군만 소선 34명, 중선 37명, 대선은 43명이 올라탔다고 한다. 여기에 태풍이라도 불면 보통 일주일 이상은 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육지와 고립된 섬지역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을 것이다. 지금은 풍선에서 동력선으로 변하여 1970년대 들어서 육지에 나가는 일이 일반화됐다. 그 전까지는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돛배를 타고 다닐 적에는 육지에 나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안도를 집중적인 후풍처로 삼아준 제주 목사의 불망비를 세운 소안도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만하다.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이나,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는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치게 된다. 이것이 소안도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개매기 마을 월항리
입도조가 가장 먼저 들어온 월항마을은 바로 '소안팔경'의 한 곳이다. 여기서 보이는 건너편이 노화도 동천항이다. 인근 해안이 청정해역으로 김 양식이 일찍부터 행해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바다낚시터로 유명해 전국 각지에서 낚시꾼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안도 입주민 중 제일 먼저 도착한 마을이 이곳으로, 명종 대(1546~1567)에 김해 김 씨가 장흥에서 처음 건너와 입주하자 때를 같이하여 동복 오 씨가 입주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이곳은 면소재지가 있는 비자마을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1627년 이진진이 설치된 이후 이진에서 제주를 향해 출항한 배가 소안도에 기착한 길목 마을이었기에 그 당시 소안도의 지명 '달목(達木)'이라는 이름을 붙여 달목마을로 불렀고 달목을 차자하여 달(月), 목(項) 월항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직사각형으로 된 포구에는 가운데에도 방파제가 있다. 이곳 역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소안 어촌체험 관광단지 조성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특히 개매기 어업으로 유명하다. '개매기 어업'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한 전통 어로방식으로 말목이나 대나무를 이용해 수십 개의 지주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그물을 친 다음, 밀물 때 고기 떼가 들어오면 일제히 그물을 올려 물고기를 가두는 방식이다. 이것을 체험하는 행사를 매년 펼치고 있는데 올해로 여덟 번째였다고 한다. 철 지난 지금도 이곳에는 긴 장대들이 바다에 꽂혀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개미기 체험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한여름에 누구나 부담 없이 신나게 할 수 있다. 월항리에서는 7월에서 8월에 개매기 체험 현장을 운영한다. 물론 시원한 바닷물속에서 파닥거리는 고기를 맨손으로 잡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다. 개매기 체험은 어느 누구나 영원히 남을 추억의 놀이이다.
항일운동기념관
비자리의 초등학교 옆에는 보건지소가 있다.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여기서 오른쪽에 건물 한 채와 함께 기념탑이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다. 1990년 6월 5일에 세워졌는데 이 탑이 비자리의 갯돌을 쌓아올려 만든 것이다. 기념탑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의 성금으로, 검은 돌과 하얀 돌들을 높이 8m, 폭 4m로 쌓아 건축하였다.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하얀 돌은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세 갈래로 솟아오른 탑 모양은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기념탑 뒤에 있는 건물은 비자리 복지회관이다. 2층짜리 건물에는 각종 단체가 입주해 있다. 소안도의 항일 청년조직인 '소안배달청년회'를 비롯해 소안축구협회, 소안파출소자율방범대 등 대여섯 개의 단체가 입주해 있다.
기념탑 옆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된 각종 안내비석이 있다. 물론 항일운동에 대한 안내표지석과 건립에 동참한 명단 등 그에 따른 부속 안내문들이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자지도항일전적비안내'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자지도는 지금의 당사도를 말한다.
길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가학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미라리로 가는 길이다. 그 갈림길에 항일운동공원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공원 한가운데에는 대형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 좌우로는 항일을 상징하는 군상들의 동상이 있다. 단 아래에는 넓은 공간, 그 좌우로는 화강암으로 된 표지석이 두 개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는 '해방의 섬 소안항일운동성지' 그리고 왼쪽에는 '꺼지지 않은 민족혼 항일의 성지 소안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입구 쪽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비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자리는 원래 '사립소안학교터'란다. 그러니까 소안도 중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탑'이 서 있고, 가학리 옛 사립학교 터에는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면민의 성금으로 세운 것이 기념탑이고, 정부 지원으로 건립한 것이 기념관이다.
국가보훈처와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2003년 옛 소안사립학교터인 이곳에 항일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하고, 2005년에는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했다.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기념탑을 세우면서 옛 기념탑을 옮기자는 둥 새로 조형을 하자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옛 기념탑이 이미 소안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점을 고려해 같은 모양으로 새 기념탑을 짓기로 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공원이다.
항일운동 기념탑
기념관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사를 보여주는 시청각실과 전시실로 꾸며졌으며, 전시실은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88인의 사진과 공적사항,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19명의 얼굴이 동판부조로 만들어져 있다. 제단 아래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기념탑 좌우로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앞뒤로 성금기탁자 명단이, 오른쪽에는 최금동의 '소안선열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건립기(建立記)'가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사립학교였던 소안학교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남해의 외딴 섬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가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해방 후에 친일파가 득세한 나머지 독립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운동가들이 숨죽이며 살아갔다. 소안도 항일운동은 1990년도에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비자리에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이 되었다. 선열들의 고귀한 뜻이 항일운동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졌고,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야 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섰다. 해마다 항일문화축제와 도로 양편에 365일 태극기를 게양해서 선열들의 항일정신을 알리고 있다. 소안도는 우리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자랑스러운 항일의 고장이다.
천혜의 항구 맹선리
가학리를 지나면 바로 맹선리다. 마을 입구에 문화재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34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맹선마을 서쪽 해안가 언덕에 있는 상록수림이다. 전체 면적은 길이 약 300m, 폭 35m 정도인데 마을 사람들의 생업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수 백 년 수령의 각종 나무들의 숲이 병풍처럼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다. 국내 최대의 난대식물원으로써 수령은 200~300년으로 추정되며 후박나무를 비롯한 모밀잣밤나무 구실잣밤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스레피나무, 붉가시나무, 광나무, 보리밥나무, 감탕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종과 느티나무, 팽나무 등의 낙엽 활엽수종 등 21종 245그루의 상록수가 해안선을 따라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이 상록수림은 마을의 내지를 보호해주는 방어림 역할과 함께 마을의 미관을 더해주는 풍치림 구실도 한다.
맹선리 포구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좌우로 뻗어나간 방파제 역시 길다. 방파제 끝자락에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마을은 포구 뒤 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마을 뒤로는 밭이 약간 있어 농사도 겸한다. 가구 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남방파제 물양장 역시 다양한 어구들로 인해 분위기도 어수선하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방파제는 폭이 제법 넓다. 방파제 오른쪽에는 삼발이를 심어두었다. 태풍의 영향이 직접 와 닿는 부분이다. 여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보길도 백도의 글이 쓰여진 바위가 있는 그 지점이다. 이어 북쪽을 쳐다보면 소안항이 보인다. 그 앞은 온통 전복 양식장이다.
'맹선리'라는 지명은 해변에서 산세에 이르기까지 경관이 수려하며 지세가 신선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정종 때 조씨(曺氏)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설과 조선 인조 때 창녕 조씨의 입주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1500년경 진주 강씨가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상하 2개의 마을을 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이곳은 선박이 정박하기에 매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안면 맹선리와 진산리 사이에 '팬티고개'가 있다. 지금은 관광코스가 되었다. 소안도를 등산하면 '팬티고개'를 만날 수 있다.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옛길은 1980년대 초반 소안도 우회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던 고갯길이다.
진산리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객선도 타고, 학교도 가고, 행정적인 일도 볼 수 있는 맹선리에 갈 수 있고 맹선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는 것은 농토가 워낙 부족하여 진산리에 가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맹선리는 천연 양항이 있고 바다가 좋아서 어느 정도 살다보니 진산리 논의 절반은 맹선리 사람들의 소유였다. 이 고개는 약 2.4km, 높이는 고작 200m에 불과하지만, 이 고개에 사람들의 추억이 많다.봄에는 단체로 이 고개를 넘어가서 모내기를 하고 아이들도 단체로 가서 못밥을 얻어먹었던 길이다.
배가 많이 고팠던 가난한 시절, 사람들은 그냥 올라가도 힘든 고갯길을 지게에 물건을 이고 지고, 다니면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깃든 추억의 고개이다. 서부의 진산마을의 초 · 중학생들은 아침 일찍 서둘러 비자리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했다. 문제는 항상 가을이었다. 수확기에 벼를 일일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이 고개 정상에 올려놓고 다시 맹선리 마을로 내리는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면서 다녔는지 '팬티가 다 젖는' 또는 '팬티만 입고 다니던 고개'라 하여 '팬티고개'가 됐다.
어느 주민은 "가을만 돌아오면 수확한 나락을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팬티고개를 넘는데 한꺼번에 집에까지 오는 것이 아니라 고개 정상에 다올려 놓은 다음 날 다시 집까지 내린다" 하였다. 진산리 논에서 팬티고개 정상까지 6번 정도 오가면 하루가 가버렸단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팬티고개 정상으로 옮긴 나락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 지켰다 한다. 봄철에는 퇴비를 지게에 지고 소를 몰고서 고갯길을 넘어 다녔다.
필자도 이 추억의 '팬티고개'를 넘어가려고 시도를 했지만 숲이 우거져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얼마나 고생하면서 이 '팬티고개'를 넘어 다니며 농사를 지었을까? 너무 편리함에 젖어 사는 우리 후손들에게 이 '팬티고개'를 재현해서 빈 지게라도 지고 올라가 보게 했으면 한다. 이 '팬티고개' 지게 문화체험을 통해 선조의 근면과 끈기를 경험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이 고개를 복원하는 데는 돈도 들지 않을뿐더러 자연 훼손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항일 운동의 섬 소안도가 개매기 체험, 전복, 김, 낚시 등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났으면 한다.아날로그와 디지털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날로그는 삶이고 생활이며 정이 정말 묻어난다. 이 고개를 넘어 가면서 이제 조금 잘 산다며 너무 빨리 옛것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해수욕장이 있는 미라리 마을
소안도의 '미라리'라는 마을 이름은 아름다운 경치가 도처에 널려 있다 하여 미라리(美羅里)로 명명되었으며, '미라팔경'으로 유명하다. 1km의 백사장이 펼쳐진 이곳의 천연기념물 제339호인 상록수림 지대에는 후박나무, 노송 등 20여 종의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미라리 상록수림은 미라마을의 동쪽에 있는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상록수림이다. 이 상록수림은 주거지와 농경지를 보호하는 방풍림의 기능을 하고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낸다. 상록수림 앞으로는 펼치진 해수욕장은 검은 갯돌로 이루어져 있다.이 갯돌은 오랜 세월 속에 바위가 파도에 닳고 닳아 자연으로부터 형성된 이색적인 갯돌의 모습을 연출한다. 날마다 파도가 치면서 물결에 따라 갯돌이 움직이면서 부딪치는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은 풍부한 어족자원으로인해 바다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전국 각지에서 겨울 낚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심 산
완도 화흥포항
소안도항
노화도와 보길도를 연결하는 보길대교
소안항일운동기념비
▲ 소안항에서 멀지 않은곳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세워져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소안도 출신의 애국선열들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기위해 2003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3대 항일 운동지로 꼽히는 곳이다.
미라리해수욕장
전복양식장
▲ 소안항에서 멀지 않은곳에 소안항일운동기념관과 기념탑이 세워져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소안도 출신의 애국선열들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교훈으로 남기기위해 2003년에 건립됐다.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3대 항일 운동지로 꼽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