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3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침기도
2월 23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저녁기도
2월 23일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일 끝기도
사도 성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제자인 성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또는 폴리카르포)는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Izmir)의 주교가 되었다. 성 폴리카르푸스는 정통 교리의 열렬한 수호자였고 특히 이단인 발렌티누스주의(Valentinianism)와 마르키온주의(Marcionism)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 1서 4장 3절을 인용하면서 그가 '사탄의 맏이'라고 부른 마르키온의 거짓 가르침을 반대하도록 역설하였다.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 기념
폴리카르포는 사도들의 제자였고 스미르나의 주교였으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함께 로마에 가서 부활 축제 문제에 관하여 아니체투스 교황과 회담했다. 155년경 스미르나 시내의 경기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희생 제물
불태울 장작더미가 다 준비되었을 때 폴리카르포는 그의 겉 옷을 벗고 허리띠를 헐겁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이 서로 먼저 그의 몸을 만져 보려 했기 때문에, 전에는 그렇게 해본 일이 없었지만, 자기 신발을 벗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도 자신의 선행 때문에 이처럼 신자들의 존경을 받은 것입니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1. 생애
뽈리까르뽀는 스미르나의 주교로서 초대교회 때부터 큰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그는 사도요한에게 직접 배웠고 그로부터 주교 임명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사도적 권위를 지니며 사도교부(使徒敎父)로 불리운다. 사도교부들이란 1세기와 2세기 초의 교부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12사도 또 그 목격자들로 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사도교부들의 가르침과 주장은 사도들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지닌다. 우리는 이미 로마의 끌레멘스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주교 등을 살펴보았는데 이들이 사도교부들에 속하는 분들이다.
뽈리가르뽀 주교에 관한 역사적 증언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의 순교록에 의하면 86세 되던해에 화형을 받아 순교하였는데 순교 연도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156년 경으로 보고있다. 110년에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가 남긴 일곱 서간 중에 마네시아, 에페소 두 서간에 뽈리까르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이냐시오가 스미르나 교회와 뽈리까르뽀 주교 개인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두 주교 사이의 친분관계를 알 수 있으며 뽈리까르뽀 주교가 당시 교회에 얼마나 비중있는 인물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가 110년에 이미 주교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50년 이상 주교직에 재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순교 직전 155년에 로마를 방문하여 아니체뚜스 교황(+166)을 만나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던 부활절 경축 날짜에 대해 논의 하였으며, 조직적인 영지주의자로서 당시 교회를 괴롭히던 마르치온에게 "나는 네가 확실히 사탄의 맏자식임을 알고있다"는 말로써 단죄하였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2월 23일에 지낸다.
2. 저서
2.1. 필립비 서간
14장으로 되어있는 [필립비 서간]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뽈리까르뽀의 작품이다. 이것은 뽈리까르뽀가 필립비 교회의 편지에 대한 답장인데, 필립비 신자들은 뽈리까르뽀에게 이냐시오의 서간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였었다.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보내면서 이기회에 뽈리까르뽀는 목자로서 정통교리와 교계의 가르침을 성실히 따르고 애덕을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그런데 이 서간은 내용상 저술연대에 문제점이 있다. 제 13장에서 이냐시오의 편지들을 보내겠다고 하면서 이냐시오의 순교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냐시오가 순교한 110년을 염두에 두고 있는것이 확실한 반면 제 7장에 언급되어 있는, 이단 문제 특히 [사탄의 맏자식]이란 표현은 130년대에 활약하던 마르치온을 염두에 두고 있어, 두 연대 사이에 20년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에 대해 학자들은 이 서간이 하나의 서간이 아니라 두 개의 서간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제 13.14장은 이냐시오가 순교한 110년 경에 쓰여진 첫째 서간이고, 제 1-12장은 130년 이 후에 쓰여진 둘 째 서간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 1서간이 제 2서간으로 전해진 경우이다. 이러한 착오는 양피지로 되어있는 고대 문헌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착오이다.
2.2. 순교록과 성인 공경
171년 이 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뽈리까르뽀의 [순교록]은 뽈리까르뽀 주교의 영웅적인 모습을 알리기 위해 스미르나 교회가 필로멜리움 교회에 보낸 서간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공공 경기장에서 여러 순교자에 대한 처형이 있은 다음,끝으로 뽈리까르뽀 주교의 차례가 되자 스다씨우스 과드라뚜스 총독은 주교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휴혹하였다. 그는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그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하며 거부하였다. 경기가 이미 끝난 뒤라 총독이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자, 군중은 장작더미를 쌓아 올리기 시작하였다. 포졸들은 그가 뜨거워 요동을 칠까봐 못질을 하려하자, 노(老)주교는 "염려말게. 이 불을 견딜힘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못박지 않아도 장작불 속에서 버티어 낼 힘을 나에게 주시리라"고 안심시키고 당당히 순교하였다.
한편 우리는 순교록 18,2-3에서 성인들의 유해 공경의 기원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후에 그분의 뼈를 모아드렸는데 이 뼈들은 우리에게 값진 보석보다 더 귀하며 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적당한 장소에 그 뼈들을 안장하였다. 주님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경건한 마음과 기쁨으로 함께 모여 순교자의 탄일을 경축할 것을 허락하실것이니 이는 먼저 싸운 이들을 기념하고 후에 싸울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위해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미르나의 신도들이 순교한 주교의 유해를 안장했다는 도의적인 차원을 넘어, 순교자에 대한 공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신도들이 성인의 유해(遺骸)가 모셔진 곳에 모여 기도하는 것은, 앞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리며, 어느날 갑자기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해야 할 날이 자기 자신들에게 닥치더라도 선배 순교자들의 용기를 본받고 순교의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초대 교회부터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진 곳 특히 까다꼼바와 같은 곳에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관습이 생겨났으며,박해가 끝난 시대에는 순교자들의 유해가 있는 곳 위에 성당을 짓는 관습이 생겨났다. 이 [순교록]은 성인들의 공경을 거북하게 여기는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에게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형우 신부님, 대구 대신학원 강의록,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교부들의 가르침 :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의로움 바탕, 신앙인의 실천적 삶 촉구
폴리카르푸스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의 주교였다. 그의 제자인 이레네우스는 사도들이 그를 주교로, 테르툴리아누스는 사도 요한이 그를 스미르나의 주교로 임명하였다고 한다. 이레네우스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나는 복된 폴리카르푸스가 요한과 주님을 본 다른 이들과 어떻게 교제하고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인용하였는지, 또한 그들에게서 주님과 그분의 기적과 가르침에 관하여 무엇을 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폴리카르푸스는 로고스(말씀)의 삶을 목격한 이들로부터 모든 것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성서와 일치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 20, 6).
이레네우스가 말한 요한이 사도 요한은 아닐지라도 폴리카르푸스가 사도들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 글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따른 그의 순교를 영웅적 모습으로 그려낸 ’순교록’은 그를 ’사도적 스승’으로 높여 부른다. 교회 전통에서 그의 가르침과 주장은 사도들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와 권위를 지닐 뿐더러 그는 당시에도 아시아의 스승으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폴리카르푸스는 155~160년경 스미르나의 경기장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사망한 지 1년 이내에 저술된 ’ 폴리카르푸스 순교록’ 9장 3절을 보면, 스미르나의 주교는 전집정관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든여섯 해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어떤 그릇된 행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를 구원하신 왕을 어떻게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술에서 당시 그의 나이는, 루가 2, 36~37의 여예언자 "안나는 남편과 일곱 해를 산 후 여든네 살까지 과부로 살았다"에 나온 햇수를 온 생애로 해석하듯이, 적어도 86세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폴리카르푸스의 편지의 주제는 의로움이다. 폴리카르푸스는 이 의로움을 바탕으로 윤리와 도덕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촉구한다. 그는 신앙인이 지켜야 할 과제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명백히 권고한다. 그가 추구하는 윤리와 도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계명, 곧 탐욕, 돈 욕심, 거짓 증언과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는 바울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행실이 아니라 은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은총으로 선택받았고 믿음에 따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폴리카르푸스에게 은총은 확실한 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신앙을 믿음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행동이라고 이해하였다. 곧, 믿음에 행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덕을 쌓으려면 이를 뒷받침해 주는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폴리카르푸스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당부하면서 마침인사로 편지를 끝맺는다.
폴리카르푸스 편지의 내용은 사목서간, 곧 사목에 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디모테오 전?후서, 디도서와 비슷하다. 사목서간은 바울로의 다른 편지들과 어휘와 문체, 역사적 상황, 당시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한 투쟁, 공동체 안에서의 서열과 직무, 신학적 내용 등에서 차이가 있다. 더욱이 사목서간이 전제하는 교회의 상황들은 바울로의 편지들보다 후대에 씌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2세기 중엽에 널리 퍼진 마르치온의 사상을 반박하고 있음도 보인다. 1디모 6, 20~21에서 맡겨진 것, 곧 선을 간직하고 불경건한 주장과 ’반론’들을 피하라고 경고하는데 이 ’반론’이라는 말과 마르치온의 주저인 ’대립명제’라는 제목이 같은 그리스어 낱말이라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서학자들은 사목서간의 저자가 바울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독일 개신교의 유명한 교부학자 캄펜하우젠은 이러한 유사성을 바탕으로 사목서간의 저자가 폴리카르푸스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폴리카르푸스는 생애 말기에 로마로 건너가 주교 아니체투스(154/155~166/167년)와 부활절 날짜, 단식 문제와 같은 교회의 여러 현안을 놓고 협의하였다. 아시아 지방의 대표로서 폴리카르푸스는 당시 서방의 관습과 달리, 사도 요한의 전통에 따라 과원절 전날인 니산달 14일에 부활절을 거행하는 ’14일파’를 변론하였다. 부활절 날짜 문제는 폴리카르푸스와 아니체투스의 주장이 서로 달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의 교회 공동체성은 깨지지 않았다. 아니체투스는 자신의 교회에서 스미르나의 주교가 성만찬을 거행하도록 허용하였으며, 폴리카르푸스는 아니체투스와 화해한 뒤 로마를 떠났다. 부활절 논쟁은 하마터면 당시 서방과 동방의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신학 문제였다.
그 뒤 로마의 주교 빅토르(189~199년)는 로마의 관례대로 부활축일을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하려 하였다. 그는 사도 요한의 전통을 따라 이를 반대한 에페소의 주교 폴리크라테스를 파문하였다. 이때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빅토르를 독려하여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유지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뒤로도 음력인 니산달 14일이 태양력의 언제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계속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이 문제는 교회에서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325년 니체아 공의회에서 모든 교회가 로마의 관례에 따라 부활축일을 지내야 한다는 규정을 교령으로 결정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교회가 한번 분열되면 일치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2천년 교회사의 여러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저마다 전통에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기도 하였지만 상대편의 의견도 존중하여 교회를 분열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갈라진 모든 형제 교회들은 일치를 위해 공유하고 있는 성서와 성전을 토대로 배타심이 아닌 대화,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는 깨달음, 상대방의 교의와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이 사건에서 배울 수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1월 17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17) 성 폴리카르포 주교
① 만인에게 모범이 된 위대한 순교자
정영식 신부·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엘리사벳·선교사
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뜨거움이 강하다. 불과 같은 신앙을 가진 사도들을 곁에서 모신 제자들도 누구보다도 뜨거운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성 요한 사도의 제자, 성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축일 2월 23일)도 은사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은 신앙의 용사였다.
성 폴리카르포의 제자인 성 이레네오는 리옹의 주교가 된 후 저술한 은사추상기(恩師追想記)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소년시절 소아시아에 있으면서 성 폴리카르포 선생의 슬하에서 배운 일이 있다. 나는 지금도 선생께서 앉아계시던 곳, 그 가르치는 모습이나 가르치는 말씀, 그 걸어 다니던 모습이나 용모 등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선생께서 성 요한과 기타 주님을 친히 뵌 이들과 교제하던 말씀이나 주님에 대해서 즉 주님의 성덕, 그의 가르치심에 대해 그러한 사람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 등은 아직 나의 귀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외에도 폴리카르포의 행적에 대해서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가 죽기 직전 그에게 보내 완덕을 칭찬한 이별의 편지에서, 또 스미르나 그리스도교 신자의 순교록에서 자세히 찾을 수 있다.
서산에 넘어가려고 하는 태양은 한 번 더 밝게 세상을 비추고 그 여광으로 만상을 아름답게 한다. 이와 같이 성 폴리카르포는 순교를 당하는 날 자기 덕행을 발해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56년 2월말 스미르나에서 12명의 신자가 체포됐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백성들이 “폴리카르포도 같이 죽여라”하고 외치자 법관은 즉시 병사들을 보내어 폴리카르포를 끌어오도록 했다.
병사들이 폴리카르포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폴리카르포는 순교할 준비를 위해 기도가 하고 싶으니 여유를 달라고 했다. 백부장은 기도를 올리는 폴리카르포의 존엄한 용모를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신과 같은 사람”이라며 감동해, 결국 체포를 다음날 아침으로 연기했다. 성인은 그날 밤을 하느님께의 헌신을 맹세하는 기도로 지새웠다. 이튿날 아침 폴리카르포가 법관 앞에 끌려갔다.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신성한 황제폐하를 조배하라! 그렇게 하면 석방해 줄 것이다.”
하지만 폴리카르포는 고개를 저었다. “주님께서는 무엇 하나 나에게 불의를 가르치신 일이 없고 도리어 많은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대 은인이신 주님을 어떻게 저주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형이 선고됐다. 군중들이 장작을 날라 산더미처럼 쌓았다. 폴리카르포는 의복을 벗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갔다. “화형(火刑)이라는 반가운 순교의 은혜를 주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이 고통을 참을 수 있는 힘까지 주실 것입니다.”
불은 거세게 타올랐다. 폴리카르포는 기도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고 찬미하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啓示)하신 성부여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시고 성자의 수난의 잔을 같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이날 이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진심으로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미 몸과 마음을 주님의 품에 모두 의탁했기에 그의 마음은 평안했다. 이때 화염이 성인의 몸을 피해 좌우로 갈라져 오히려 후광과 같이 아름답게 그의 몸을 장식했다.
뜻밖의 현상에 놀란 법관이 병졸에게 시켜 폴리카르포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도록 했다. 폴리카르포는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맡겼다.
신자들이 폴리카르포의 유해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법관을 통해 총독에게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이 폴리카르포를 제2의 그리스도로 공경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시체를 태워주시오”라고 외뢰했다. 이에 총독은 폴리카르포의 시신을 다시 태우게 했다.
초세기에 기록된 폴리카르포 순교록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우수한 교사였을 뿐 아니라 만인에게 모범이 된 위대한 순교자였다. 그는 고통을 감수 인내해 재판관을 이기고 불멸의 화관을 획득해, 지금은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전능하신 성부의 영광을 노래하며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시고 지도자이시며 전 세계 교회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3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18) 성 폴리카르포 주교
② 하느님이 준비하신 길 당당하게 걸은 목자
폴리카르포 성인이 지상 삶에서 쌓은 ‘만남’에 대해 알아보자.
성인은 20대를 갓 넘긴 나이에 요한 사도를 만난다. 여기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쓴 그 사도다. 이때 인생의 대전환이 이뤄진다. 이후 10년이 채 안돼서 요한 사도에 의해 소아시아 에페소 인근 지역인 스미르나(Smyrna)의 주교로 축성된다. 에페소를 비롯한 스미르나 지역은 바오로 사도가 이미 전교를 한 지역이다. 그래서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두 번째의 중요한 만남은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다. 폴리카르포 성인의 35년 형님뻘 되시는 분이다. 이 분은 폴리카르포와 같이 주교단의 일원으로 한 형제처럼 지냈다. 이냐시오는 체포돼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스미르나를 거치게 되는데 이곳에서 폴리카르포 성인과 감격적인 마지막 상봉을 하게 된다. 이때가 폴리카르포 성인의 나이는 40세쯤 됐을 때였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가는 백발의 노인 주교를 바라보는 젊은 폴리카르포 성인의 심정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순교의 염원을 불태웠을 것이다.
세 번째 중요한 만남은 이레네오 성인이다. 이레네오 성인은 폴리카르포 성인이 직접 제자로 선택한 분이다. 나이는 손자뻘이다. 폴리카르포 성인은 말년에 소년 이레네오를 직접 가르치며 교회의 미래를 다진다. 이레네오는 폴리카르포 성인에게 푹 빠진다. “참으로 모든 면에서 감동적인 스승이셨습니다”라는 글을 남긴 것에서도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두 성인은 영적으로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폴리카르포 주교는 요한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로부터 많은 것을 깨달았고 배울 수 있었으며, 그 진리를 그것을 자신의 삶 안에서 완벽하게 형성시켰다. 그리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이러한 그의 삶은 자연스레 이레네오 성인에게 이어진다. 이러한 폴리카르포 성인의 삶은 자연스레 155년 혹은 156년경의 순교로 이어진다. 순교할 당시 성인의 나이는 80대 중반이었다.
폴리카르포 성인은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인다. 화형을 당할 때 자신의 몸을 기둥에 결박하려 할 때도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성인은 자신의 순교가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미리 형성시켜주신 자신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초기 교회의 순교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을 되돌아보는데 큰 자양분이 된다. 폴리카르포 주교님 말고도 초대 교회때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다. 대표적인 분이 아녜스 성녀다. 아녜스는 로마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로마시의 시장 아들이 아녜스에게 반한다. 그래서 아녜스에게 청혼을 했다. 그런데 아녜스는 “나는 이미 그리스도라는 멋진 분과 결혼을 했다”며 청혼을 거절했고, 그래서 순교했다. 같은 동정 성녀이신 비비안나 성녀도 계시다. 이분은 아버지가 로마의 고관이었다. 그 아버지가 신자들이 잘못하는 것도 없는데 박해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고 황제에게 말했고 그 이유로 귀향을 갔다. 어머니도 감옥에 갇혔고, 결국에는 그곳에서 굶어 죽는다. 어머니는 그래도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계속 “황제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의로운 뜻을 따라가야지 오히려 의로운 백성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은 잘못되었다” 라고 말했다 한다. 딸이었던 비비안나도 계속 부모님을 옹호하다가 결국에는 납덩어리에 맞아 순교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이러한 피의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이러한 순교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 주위 사람들의 뜻에 휘둘려 살아가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형성해 놓으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하느님을 늘 경외하며 늘 하느님께 귀 기울이며 그 음성에 ‘예’라고 순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순교의 은총이 가능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꿋꿋이 당신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얼을 늘 마음에 담고 당신의 빛을 따르는 삶을 충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소서. 제가 당신 안에 걸어오리라. 아멘.”
[가톨릭신문, 2010년 2월 7일] |
첫댓글 2월23일 성 도시테우스는 이교도로 자라그리스도교 교리는 전혀 몰랐으나,게세마니를 비롯하여 예루살렘의 여러 곳을 방문하여 큰 감명을 받고수도원에 입회성 도로테우스의 지도를 받았다.수도자의 길을 걸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극복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최선을 다하여 높은 성덕을 얻게 되었다. 그는 매일 극히 소량의 빵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힘이들때면그는 주님께서 위로해 주실 때까지 땅에 엎디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기도하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또 여러 성인들의 환시를 보았다.성들께 저를위해기도해주십시요.기도함 성인 묵상
기도하는 기회를 놓치지말라고 하신 성인의 말씀깊이 새겨봅니다 .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