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날 밤 그녀 옆에서 조용히 잠을 자던 진우는 새벽공기가 창틈에 스며 들 때쯤 예환의 입술에 뜨거움만 남기고 돌아갔다.
연예면의 특별한 기삿거리가 없다가 갑자기 물이라도 만난 듯 진우의 스캔들은 두 사람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었다. 수진은 예환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지키고 있었다. 어제 잠시 얘기 나눈 재후의 부탁이 아니라도 그녀는 예환의 술 취한 말에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라진 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야.”
“왜?”
예환은 수진의 말에 무슨 뜻이냐는 눈짓으로 바라보았다.
“은호선배말야. 일부러 전화도 안 받고, 만나지도 않았거든. 특별히 내가 이 시간상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나의 행동반경이 다른 날과 틀려졌단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호 선배에게만 사라진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집에도 안 들어갔고,”
“그런 이유도 있었지. 어제 우연히 만났어, 우연이 아닌가? 난 우연인데 선배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여간 의사가 시간도 무진장 많아.”
“별 트집을 다 잡는다. 언제는 시간이 없어서 만나기 힘들다고 징징거렸으면서.”
수진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래 거리며 쇼핑카트 속으로 두부를 챙겨 넣고 있었다.
“오늘은 두부조림이나 해볼까? 그래서 그 시간 무진장 많은 의사가 뭐라고 하시던데?”
“여보세요. 얘기에 집중 좀 해주세요. 친구가 조금 답답하거든요?”
“네. 계속 말씀하시죠. 맥주도 사야겠지? 다 먹었던데.”
“은예환.”
“정리 했다면서. 그럼 마음도 함께 정리해. 우연히 만났으면 만난거지 그게 아닌 것 또 뭐야. 사랑해온 시간 보다 살아갈 일이 더 끔찍해서 앞으로, 더 이상 사랑 안한다고 끝 했으면 쿨하게 마음도 닫고 지워야지.”
“넌 그게 돼? 난 내가 그렇게 되는 인간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선배 보니까 아니더라. 마음이 아파. 빌고 또 비는데 내가 어쩜 이렇게 잔인한 인간 일까 하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잔인한 인간 안하고 사랑 계속 쭈욱 논스톱으로 가시겠다?”
“모르겠다. 갑자기 내가 천사가 된 것도 아니고, 사랑 아니면 죽는다 하던 애도 아닌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수진이 카트를 밀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예환이 그녀 앞을 막았다.
“앞날 눈에 빤하게 보이면 접어, 사랑이 뭐 별거야? 내가 기억하고. 내가 살아가고, 내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예환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기집애야. 너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눈에 다 보여. 사랑이 별거? 기억하고 살아가? 그걸로 사랑이 끝이야? 그러면서 왜 울어. 사랑을 몰라 바보이기는 너나 나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너만이라도 똑똑하게 살아.”
“나보고 잔인하데. 어떻게 그렇게 자를 수 있냐고, 그 세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자를 수 있냐고.”
“사람은 누구나 악마를 몸에 품고 살아. 그 악마를 깨우면 세상은 살기 편해지는 거야. 내 속의 악함을 누르려는 마음이 힘들게 살아가는 원인인 거야.”
할인점의 대형TV 화면이 진우의 얼굴로 가득 차자 지나가던 여학생들이 고함을 질렀다.
“예고편 보니까 비주얼은 최강이더만,”
“뭘 해도 잘 할 녀석이야. 저 녀석은. 아직 네가 저 녀석을 몰라서 그러는데, 독종이야.”
진우의 얼굴을 보는 예환의 눈은 이슬이 가득 맺혔다.
“감질 난다.”
“뭐?”
“내가 저 녀석을 잡으면 항상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잡고 나니까 저 녀석 보는 것이 더 어렵다. 화면으로 보는 거 이제 감질나서 못 보겠다.”
목이 메여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예환은 돌아선 순간 둔탁한 무언가가 그녀의 몸에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귓가에 혼자 다니고 있는 그녀를 향한 그의 고함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넋 놓고 다니니까 다치지 않냐는 고함소리가 귓전에 울리고 있다.
“예환아. 예환아. 괜찮아?”
- 예환아. 은예환. 괜찮아. 울지 마 이젠 괜찮아. 이제 내가 왔으니까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예환아. 예환아.”
“괜찮아. 잠시 멍해졌을 뿐이야. 괜찮아.”
그렇게 카트를 세게 밀고 다니면 어쩌냐고 수진이 아이를 향해 야단을 치고 있었고, 아이의 부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병원으로 가자고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딪치면서 긁혔는지 팔에서 피가 나오게 있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에 무슨 병원을요. 아이가 놀랬겠다. 꼬마야 다음부턴 앞 잘보고 다녀라.”
아이를 향해 싱긋 미소를 보이고는 대충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내었다. 흐릿한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진우의 옷으로 칭칭 싸매고 있던 그 손목. 손목의 상처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을 해보았다. 여전히 진우의 옷은 손목에 칭칭 감겨 있었다.
“정말 괜찮아?”
수진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가자.”
파랗게 질린 표정은 언제 지었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돌아 온 예환이 앞으로 걸어 나가자 수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일자리는 알아보고 있는 거야?”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일자리 보다 공부가 하고 싶어. 지난번에 간 와인바 말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더라. 그런 공부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해. 그럼 나중에 근사한 와인바 하나 할 수 있을 텐데, 지금 있는 오피스텔 팔고 적금 탈탈 털면 그 정도 나오지 않을까?”
예환은 와인바의 편안함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너 즉흥적인 거 별로 인 녀석이잖아?”
“다음 주 쯤에 여행가자. 그리고 그 다음은 다녀와서 생각하고,”
“점점. 내가 아는 은예환 맞긴 한 거니?”
“아마도,”
한쪽 팔에 여전히 수건을 감은 채 비닐 봉투 가득 물건을 나르던 예환과 수진은 집 앞을 서성이던 이준을 보았다. 휴대폰을 들고 버튼을 누르다 그녀를 보자 플립을 닫고는 그녀를 향해 활짝 웃었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많이 바빴나 봐.”
“좀 생각도 정리하고, 친구?”
그제야 생각난 듯 예환은 수진을 소개 했다.
“이쪽은 소이준씨. 사진 전문가야.”
“아! 그 기차. 말씀 많이 들었어요. 안녕하세요. 여수진입니다.”
“소이준입니다.”
“어쩐 일이야? 전화 하고 오지. 여긴 어떻게 알고.”
“기억 안나? 나 은예환스토커 한다고 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지.”
수진은 이준의 말에 예환의 짐을 받아 들고는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얘가 요즘 남는 게 시간이거든요. 오래오래 노셔도 됩니다. 그럼”
수진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어두운 복도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근처에 얘기할 만한 곳이 있을까?”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놀이터로 향했다. 깊어가는 여름밤의 뜨거운 열기는 놀이터에 꽤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게 했고, 소란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했다.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없어.”
“다쳤어? 팔에 피가 묻었다.”
“조금. 아까 마트에서 카트에 부딪쳤어.”
“병원 안 가도 돼?”
“이 정도 가지고 뭘 병원을 가. 바다의 푸른색이 붉게 물들 만큼의 피도 흘러 봤는데…….”
예환은 말을 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그녀는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기억을 들키지 않아야 했는데. 말이 잘 못 나와 버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야. 네 기억은 어디까지 인거야?”
“할 말 없으면 잘 가.”
이준의 말을 예환이 가로 막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돌멩이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내려놓았다.
“이건.”
“까치베개. 네가 내게 가르쳐 준거야. 너의 서랍에서 훔쳐가지고 있었던 거였지. 처음 사고가 난 이유가 나 때문이라 겁이 나서 도망 간 거야. 그래 바다의 푸른색이 네 피로 붉게 변해 버린 날. 네가 집으로 오기 전에 도망갔어야 했어. 겨우 10살이었어. 내가 뭘 알아. 피나면 다 죽는 줄 알았단 말야. 무서웠어, 그래서 도망쳤다.”
“애쓰지 마. 그러지 않아도 돼. 네 말대로 우린 그때 어렸어. 내기도 하고 싸움도 하는 그런 나이라고, 장난이 과했고, 싸움이 심해서 그래서 다친 것뿐이야. 그게 널 옭아매는 사슬이 될 필요는 없는 거야.”
어느새 이준의 눈가는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까치베개를 들고 혼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섬을 나와 엄마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무서움에 떨었는지 넌 모를 거야. 아니 아무도 몰라. 네가 흘린 그 많은 피들이 바닷물에 스며들어 바다색이 푸른색이 아니라 붉은 색으로 변할 지도 모른단 생각에 뱃머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었다고, 그게 내게 남아있었던 기억이었다. 까치베개를 만지면서 너를 기억하는 일이 내게는 전부인양 섬을 떠났어도 한참을 열병에 시달렸어.”
예환은 그의 말에서 그날을 되새기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날의 일들이 무슨 소용일까?”
“그렇기 때문에 너의 마음을 다치고 멍들게 하는 일은 절대 내가 용서하지 않아. 지금까지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절대 내가 그냥 두지 않아.”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언제나 내가 알아서 했어. 내가 알아서 하니까 오지랖 넓은 짓 그만하고 돌아가.”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는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으로 옮기는 그녀의 팔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너의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윤진우가 언제까지 모를까? 아니, 그녀석이 알기 전에 진우부모님들은…….”
“더 이상 기억 하지 않을 거야. 망각 속에서 잘 숨어 지낼 거니까 내 기억이 진우를 사랑하는데 장해가 된다면 말야. 잘 가라.”
예환은 이준의 팔을 뿌리치며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윤진우를 찾아간다면?”
이준의 말이 그녀의 뒤에서 울렸다.
“만약 그렇다면 푸른 바닷물이 붉은색으로 바뀔 만큼 다시 피 흘리는 은예환을 보게 되겠지.”
“여기서 접어, 그 마음 더 이상 다치기 전에, 그만하라고,”
“쭌아. 언젠가 본 영화처럼 할 수만 있다면…… 기억을 다 지우고 진우에게 가고 싶다.”
더 이상 할말을 잃은 이준은 예환의 축 쳐진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쭌아.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 쭌.”
그녀의 마음을 훔쳐본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얼마나 더 아파해야 하는 것인지 이준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느껴야했다.
19.
시작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아서였는지 [서킷]은 1회부터 눈길을 끌었다. 시작부터 자동차경주의 스피드와 화려함이 화면을 메웠고, 거친 사고 장면과 불타오르다가 폭발하는 머신은 그 사고로 정말 진우가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윤진우, 넌 대사가 어째 하나도 없냐? 기왕 멋지게 드라마 데뷔했으면, 이안에 너 있다. 이정도의 주옥같은 대사는 어려워도 그렇지, 에휴, 아니다. 너 같은 싸가지가 그런 대사빨은 좀 어렵겠지. 그럼 그렇지. 아니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라도 뭔 말을 해야 사랑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지 그렇게 답답해서야 어디 연애 하겠니?”
[어쭈, 혼자 잘 논다. 야! 은예환 첨부터 보긴 했냐? 인효는, 그 녀석은 사고로 말을 잃었어. 말을 하지 않는다고, 이 맹추야.]
“그러니까 답답이지. 네가 대사를 책 읽듯이 읽는 거만 아니면 작가선생님이 처음부터 널 대사 없게 만들었겠냐고, 그 멋진 캐릭터를. 인효 생각만 해도 진짜 멋지다. 남주 말야. 영우라고 했던가? 넌 역시 거기 게임도 안 돼. 연기력이 되는 배우는 뭔가가 틀려도 확실히 틀리다니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잖아.”
[아씨! 넌 겨우 힘들어 전화한 사람한테 꼭 그렇게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냐? 하여간 취미도 별나다니까.]
“윤진우씨. 지금 시간이요 새벽3시 하고도 30분이 지나간 시간이거든요. 이 시간에 전화해서 뭔 좋은 말을 듣고 싶으신가요? 자는 사람 꼭 이 시간에 깨워놓는 나쁜 놈이 누군데.”
드라마가 시작되고 촬영은 더욱 빡빡하게 돌아가 진우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잠시 틈나는 시간에 전화한다는 것이 요 며칠 매일 새벽 3시가 지나있었다. 그 시간까지 혹시 전화 올까 잠을 자지 못한 예환이었다.
[팬클럽 가입은 했냐? 1호 한다면서.]
“지금 이 시간에 팬 관리 하세요? 무척이나 한가하신 배우신가 봐요. 웬만하면 잠시 시간 줄때 좀 주무시죠?”
아닌 게 아니라 화면에서 보는 진우의 얼굴은 살이 쏙 빠진데다 눈까지 부어 있었다.
[내일은 촬영이 밤에 있데. 아침에 잠시 보자. 잘 자라.]
진우의 전화가 끊기자 모니터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진우의 얼굴도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디브이디로 다운을 받은 뒤 계속 돌려보고 또 돌려보는 탓에 수진의 핀잔을 들었지만, 계속 그렇게 돌려보며 예환은 인효의 모습에서 진우를 찾고 있었다.
“목소리가 작기나 하나, 어휴 내가 나가야지.”
“깼어?”
“지금 시간이요 새벽3시 하고도 50분이 지났거든요. 이 시간에 전화질 하는 무식한 인간이 있어서 잠이 다 달아나 버렸네요. 가뜩이나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못 일어 날 것 같으니까 미리 깨우는 건지, 방세도 안 내고 얹혀산다고 어찌나 구박이 심한지.”
수진이 투덜대며 일어나 눈을 비볐다. 모니터 화면은 진우의 상대 여배우가 진우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
“하여간 저 뺨 때리는 소리 한번 기가 막힌다니까,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정말 환상적으로 때리는 것 같아.”
수진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아프겠다. 얼마나 맞았을까? 저런 거 NG나면 정말 짜증나지 않을까? 윤진우 잘 참는다. 그치?”
고개를 절레 흔들던 수진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아침에 회의하고, 취재 갔다가 올 테니까 하루 종일 다시보기 하세요.”
“몇 시에 나가? 진우 아침에 온다고 했는데.”
“야!”
그녀가 수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활짝 웃는 웃음 저편에 눈물이 어려 있다는 사실을 수진은 느끼지 못했다.
몇 번의 촬영을 되풀이한 끝에 그날의 촬영은 새벽의 공기를 마시며 끝이 났다. 몇 분 되지 않는 씬을 찍기 위해 진우는 달리고 또 달렸다.
“형. 예환이 집 앞에서 좀 깨워줘.”
“오늘 계약하자고 연락 왔더라.”
“어쩐 일이래. 신인을 그것도 겨우 2회 밖에 안했는데.”
“너 분량 늘인단다. 앞으로 더 힘들 거다. 조만간에 대사치는 연습도 해야 할 지 몰라.”
“말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말한다고.”
“너 바보냐? 죽을 사람 살리는 것도, 살 사람 죽이는 것도 모두 시청자들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졸린 눈을 깜박이며 촬영장을 벗어나려는 그들의 차를 막는 사람이 있었다. 진우는 차문을 내리고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잠시 얘기 좀 하자.”
“지금 시간 없어. 이제 겨우…….”
“알아. 만 하루 반 동안 촬영한 거.”
이준이 자르듯 말해버리자 진우는 재후를 바라보았다.
“형 먼저 가라. 난 저 녀석 차타고 움직일 테니까.”
재후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이준이 그를 향해 찡긋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스튜디오의 우린이형한테 안가니까 걱정 마세요. 전 형하고 다르거든요.”
진우가 내려 이준의 차로 옮겨 타자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졌다.
“저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 문제야.”
“무시해 버려. 친구로 발표 날 테니까.”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속 쓰리지 않아?”
“예환이가 기다려. 차 안에서 얘기 끝내.”
앞만 보며 차갑게 내뱉는 진우의 말 속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섬에 가 본적 있어?”
“아니.”
“한번도?”
“어.”
“그럼. 여기서 접어. 예환이에 대한 니 마음 여기서 끝내.”
“소이준. 주제넘은 짓 하지 마.”
“내가 끝까지 방해 할 거야. 너 때문에 네가 다치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닌데, 예환이가 다치는 것은 못 보니까.”
이준이 옆으로 차를 세웠다. 뒤 따라 오던 재후의 차도 함께 세웠다.
“예환이가 다친다고 누가 그래. 함부로 말하지 마. 예환이 마음 열기까지 몇 년을 걸렸는데 내가 그렇게 쉽게 다치게 할 것 같아? 예전처럼 네가 나타나 방해만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상처 줄 일도 없다.”
“원수의 아들과 결혼해야 하는 예환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만약 그걸 모두 예환이가 기억한다면 네가 흘릴 눈물이 더 아플까 예환이 흘리게 될 피가 더 아플까.”
이준의 흐트러짐 없는 냉정한 말에 진우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렸다.
“너, 지,지금,”
“말 그대로, 원.수.의 아들이라고 했어. 설마 그것조차 몰랐다고는 말 하지 않겠지. 예전에 도망간 적이 있었다면서 그런 이유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준은 여전히 잔인하게 진우에게 비수를 꽂고 있었다.
“네가 지금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진우의 말은 똑똑하고 분명했다. 그런 이유로 흔들린다면 다시 와서 붙잡지 않았을 것이었다.
“분명 말 했지. 너 따위가 받을 상처는 신경도 안 쓴다고, 너로 인해 다칠 예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환일 잡았고, 예환이가 나를 선택했다면?”
“윤진우. 그만 해. 어설프게 시작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잖아.”
이준은 두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끝이 보이는 그 길을 굳이 가겠다는 녀석들을 붙잡아야 했다.
“내기 할래?”
“소이준.”
“그날처럼. 예환의 마음을 걸고 내기 하자. 내가 이기면 두 사람은 깨지는 거야. 내가 지면. 그럴 일 없겠지만 내가 지면 기억 따윈 버려주지. 예환이의 기억까지 함께”
“소이준. 내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말에 동의 할 거라고 생각해? 지금 그녀는 내게 있고, 나 또한 그녀에게 있는데 결정적으로 너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
진우는 안전벨트를 풀고 있었다. 차문을 열려는 찰라 이준의 말에 고개를 돌려야했다.
“지금 바로 은예환에게 가서 할머니가 누구에 의해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할머니?”
“그래. 예환이네 할머니. 무척이나 널 미워하셨던 할머니.”
할머니가 마당에 나오시면 마당 구석에서 놀다가도 진우는 장독대 뒤로 숨어야 했다. 예환이와 이준이가 눈치껏 감춰주며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가면 투덜대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었다. 예환이랑 함께 숙제라도 하려고 치면 할머니의 서슬이 무서워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을 이용해야 했고, 셋이 함께 공부하다가 조금이라도 이준이의 마음이 틀어진 날은 쪼르르 달려가 일러버리는 통에 숨도 크게 못 쉬었다. 왜 그렇게 할머니가 자신을 미워하는지 알지도 못한 체 안채에 들어갈 때는 조심해야 했다.
“할머니가 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진우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스치는 마음을 들킬까 애써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알고 싶지 않아 마음을 거둬 잠가 버린 것이 아니라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텐데.”
이준은 차가운 말투로 찔러대던 비수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들이 밀었다.
“그래서?”
“기억하지 못하는 가 본데 그날 내기에서 이긴 사람은 네가 아니고 나야. 그동안 그날의 상처를, 손목에 있는 깊은 상처를 다 지워버리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게도 기회를 줘야 하잖아?”
이준은 자신조차 이해하기 힘든 말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억지. 그것은 누가 들어도 명백한 억지였고, 웃기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준은 진우를 상대로 끝까지 우기고 있었다.
“그날의 상처는, 우리가 만든 거야. 예환의 작은 몸속에서 끝없이 뿜어져 나오던 붉은 방울들은, 우리가 그렇게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상처를 씻어 주는 일은 네 몫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이야. 평생 그녀 앞에 죄인처럼 살아도 그녀를 예전처럼 살게 할 사람은 네가 아니고 바로 나야. 나 윤진우 라고. 그게 예환이와 나의 운명이고, 필연이야. 넌 예환의 기억을 살리며 그녀를 아프게 할 만큼 나쁜 놈이 아니야. 만약 그녀가 기억한다면, 그조차 내가 감당해야 하고, 내가 감싸 안아야 할 운명인거다.”
“넌 그녀에게 아픔만 줄 거야. 너란 녀석은 계속 그녀를 아프게만 할 거라고. 그날의 상처역시 예환이가 너에게 줄 약초 찾으러 간 거였으니까. 네 녀석이 옆에 있으면…….”
점점 이준의 목소린 힘을 잃어 갔고, 진우의 낮은 목소리는 점점 더 침착해져 갔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놓아줄 수 없어. 절대. 놓을 수 없어. 이것이 내 집착이라고 해도 놓아줄 수 없다. 예환이는 이번 생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내 옆에 있을 거고, 다음 생이 있다면 그 다음 생에도 내 옆에 둘 거야. 딴 놈 옆에 있어서 행복하다고 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서 내 옆에 둘 거야. 그게 내 사랑 방식이야. 한번 주저 하고 멈칫 한 걸로 지옥은 충분히 경험 했으니까.”
진우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내렸고, 뒤에 대기 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 재후는 바로 차를 출발 시켰다. 백미러 뒤로 보이는 이준의 차가 멀어질 때쯤 핸들을 내리치는 그의 흐릿한 모습이 보였다.
“소이준. 네가 모르는 것이 있어.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미워하시면서 아무도 모르게 한없이 예뻐하셨다는 것을. 항상 내가 숨어 있는 곳은 같은 장소 이었으니까.”
그때는 몰랐었다.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아니 왜 그렇게 미워하는 척을 하셨는지. 알고자 했을 때에는 이미 만날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리셨고, 예환을 지켜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셨다.
그녀의 집으로 가는 동안 재후는 말을 걸지 않았고, 진우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감은 눈 사이로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렀다.
“형. 집으로 가줘.”
조용히 운전을 하던 재후는 눈을 감은 채 행선지를 바꾸는 그를 가만히 보다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속 운전을 했다.
“다 왔다. 일어나.”
진우가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자 그 앞에 예환이 서 있었다.
“이따가 시간 맞춰서 데리러 올게. 어른들의 몫까지 아픈 것은 반칙이라고 그랬지? 니들은 니들만의 몫만큼 사랑해라. 웃기는 개뿔 같은 소리 듣지 말고, 간다.”
언제 올까 고개 내밀며 내려다 보다 보이지 않아 답답함으로 아래층까지 내려야 있던 그녀를 향해 그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눈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20.
재후가 간단한 고갯짓만으로 차를 돌려 가버리자 주차장엔 덩그러니 두 사람만 남았다. 눈물 흘리는 진우의 모습을 보며 활짝 웃던 예환의 눈동자는 걱정으로 바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너 보고 싶어서 눈병 났나 보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르네.”
“안 어울리는 멘트라는 거 알지? 인효라면 또 몰라. 윤진우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그의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었다.
“그 멋진 인효라는 녀석을 연기하는 것은 나라는 것을 잊지 말아줘. 배고파.”
말없이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피곤할 텐데 바로 가서 쉬지.”
중얼거리는 예환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과 진우의 피곤한 눈을 보는 걱정하는 마음이 뒤섞였다.
“피곤하니까 피로회복제 먹으러 왔지. 내 피로회복제 여기 있잖아. 은예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비타민C와 E가 적절하게 들어가 있는 회복제.”
“그런 느끼한 말은 어디서 그렇게 주워듣고 오는 거야? 으악 미치겠다.”
두근거리는 맘이 점점 더 커지자 그녀의 뺨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식탁에 빽빽한 반찬들을 보며 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는 숨 막히는 식탁이네.”
“한 가지 한 가지 모든 접시에 젓가락 다 가야 하는 거 알지?”
“넌 아줌마가 차려주는 식탁 숨 막히지 않았어? 어떻게 그대로 살 수 있는 거지?”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젓가락을 밥알을 뒤적거리며 헤아렸다.
“습관이라는 것이 참 우스워서 혼자 살면 절대 안 그래야지 했는데 한 며칠 허전한 밥상을 차리다가 내 안에 허기가 자꾸 찬 듯이 허하더라, 그래서 반찬하나하나 다 꺼내서 차렸지. 그동안 빽빽한 밥상이 내 허기를 메워주고 있었나봐. 너도 여전하구나. 밥 먹기 전에 항상 하는 짓. 밥알 세고 있는 거. 웬만하면 이제 푹푹 좀 먹지?”
젓가락으로 멸치를 하나 집어 그의 수저 위에 올렸다.
“그 젓가락질로 반찬 집어준다고? 참아라. 네 반찬 기다리다가 밥 언제 먹으라고.”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한 밥상이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행복이었고, 꿈같은 행복이었다. 아무도 끼어 들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설픈 젓가락질로 진우가 싫어하는 반찬들만 골라서 먹였다. 다시 이런 시간이 오지 않는다면 잠시의 꿈이 기억에 존재하는 한 한참은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커다란 잔에 가득 찬 커피를 들고 식탁에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커피의 양이 얼마나 많은 지, 커피가 언제 식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하지 않던 그의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며 거실 바닥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잠이……. 아! 이리와 봐.”
갑자기 생각 난 듯 주머니를 뒤지며 무언가를 꺼내 예환의 손에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그가 준 것은 도금된 반지였는데 반지라고 하기엔 조금 독특한 모양이었다.
“캐스트 퍼즐. 네 개의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퍼즐이야. 소품인데 연습용으로 하나 더 달라고 했지. 본 적 없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못 풀었어. 이거 잘 풀어야 하는데……. 풀어 본 적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그러려고 했는데”
“이게 풀리긴 하는 거니?”
아무리 해도 절대 풀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 반지였다. 힘으로는 절대 풀지 못할 것 같았다.
“풀린데. 함 해봐!”
졸린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는 누웠다. 진우가 준 그 반지를 이리저리 맞추며 풀던 예환은 어느새 잠들어 버린 그를 바로 눕히고 그 옆에 살짝 누웠다. 창밖은 대낮을 알리며 빛을 보내고 있는데 며칠 잠을 설친 두 사람은 마주보고 누워 눈을 뜰 줄 몰랐다.
***
“누구세요?”
나들이 기획특집으로 몇 시간의 회의를 마치고 1차 장소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수진의 핸드폰에 낯선 번호가 찍혔다.
[사랑 찾아 헤매는 쓸쓸한 남자.]
“재후오빠?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고”
[진우, 아니 예환씨랑 관계되는 사람들 번호는 다 알고 있다고 하면 심한가? 절에 연락처 그대로더라.]
“바쁘신 분이 그렇게 까지 해서 전화하신 이유는요?”
[무지 까칠하네. 진우 데리러 8시에 갈 거야. 눈치 보지 말라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죠?”
[저녁 할래?]
“감사하지만 선약 있어요.”
[진우 너무 미워하지 마라. 힘들어 그 녀석도.]
“그 녀석 힘들면 예환인 더 힘들어요. 제 친구는 윤진우가 아니라 예환이거든요. 다음에 술이나 사주세요. 오빠랑은 밥 먹으면 체 할 것 같으니까.”
[그래.]
목소리가 쓸쓸하게 느껴진 것은 기분 탓일까. 수진은 종료버튼을 누르며 입맛을 다셨다.
“괜히 튕겼나? 돈 많이 버니까 근사한데 가서 밥 얻어먹을걸. 여수진 너 하는 꼴 보니까 아직 배가 덜 고팠나보다. 거절할 줄도 아는 거 보니까.”
****
하루 종일 잠만 자던 진우가 재후의 전화를 받고 칭얼거리며 촬영장으로 돌아가고 난 뒤 그녀는 열심히 퍼즐을 풀고 있었다.
술 취해서 들어온 수진이 때문에 잠시 그 퍼즐을 내려놓아야 했다.
“오! 마이 베스트프렌드 큭큭큭 안 주무시고 기다렸쪄요?”
수진은 혀가 마구 엉키는지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이렇게 마셨는데? 혼자 마시지 말라니까.”
“흠. 으음. 나뿐 놈”
고개를 푹 숙이고 수진은 나쁜 놈을 연발했다.
“누가?”
“은호선배. 나뿐 놈. 나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나한테 와서 독한 년이라고 욕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결혼 한다는 소문이 나는 거야. 남자란 인간들은 다 그런 거냐?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며칠 전 까지 너 얼마나 준비했어? 언제부터 준비했어? 나 잘라 내려고 그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계획한 거니? 그럼서 집 앞에서 울고불고 하더니 나뿐 놈.”
어디서 들었는지 떠나간 사랑의 얘기에 수진은 울먹였다.
“잘 됐네. 그 집에 들어가서 고상하신 사모님한테 도망가는 연습이나 잘 배워두라고 그래. 그럼 됐지. 너 이러지마. 이러고 있는 네가 아까워. 뭐가 아쉬워서 우는 거야. 울지 마. 여수진 네 눈물 너무 아깝다. 울지 마”
“마음은 그래야 하는데, 내 마음은 그렇다고 계속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기는 데 눈물은 아닌가봐. 자꾸만 흘러, 내가 울지 말라고 자꾸 닦아도 계속 흘러. 내 눈물샘이 고장 났나 봐. 이상 해. 자꾸만 자꾸만 흘러.”
수진의 눈에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예환은 한참을 같이 울어야 했다. 세월이 얼만데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그렇게 쉽게 돌아서지는 건지. 수진이 울다 지쳐 잠이 들고도 한참을 예환은 울어야 했다.
“으응?”
네 개의 고리가 달랑거리며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느새 풀어버린 반지를 수진은 예환의 눈앞에서 흔들고 있었다.
“샀어? 너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풀었어? 어떻게 풀어? 대단하다. 여수진.”
“간단해. 어렵게 생각하면 절대 안 풀리는데 나도 모르게 그냥 이리저리 만지다 보면 풀려. 선물이야?”
“소품이라는데 풀어야 한다네.”
“미친 놈. 그걸 지금 너한테 가져다 준거야? 그 녀석 바보 아냐? 아님 대본에 용도가 안 적힌 건지.”
수진이 거품을 물며 다시 네 개의 연결고리를 맞추어 끼우고 있었다.
“왜?”
“이거 다 풀어서 네 개의 고리가 달랑 거리면, 바람났어요. 내 마음은 이제 당신을 떠났어요. 이런 의미거든요? 그걸 지금 풀라고 가져다주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이거 왜 이렇게 다시 안 되는 거야. 에씨.”
수진이 거칠게 반지를 만지작거리자 예환이 그녀의 손을 감쌌다.
“애쓰지 마. 그냥 울고 싶으면 울어. 술 먹고 와서 우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 줄 테니까. 울어.”
“떠나간 사랑에 우는 것은 바보다. 여수진 말씀. 다시 연결 됐다. 밥 먹자. 오늘부터 바빠 기획특집 들어갔거든. 나 따라 다닐래?”
수진이 기지개를 펴며 화장실로 들어가자 예환은 다시 그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난 참 안되는데. 넌 쉽게도 되네.”
금색이 반짝거리는 그 반지는 그녀에게만은 절대 풀리지 않겠다는 듯이 계속 엉켜들고 있었다. 그 퍼즐의 의미를 알아채기로도 한 것인지 그녀의 캐논은 경쾌하게도 울렸다.
[야! 절대 그거 풀지 마.]
“왜?”
[지금 형 보낼 테니까, 그거 그대로 보내. 알았어?]
“푸는 방법 알았어? 수진이 잘 푸는데 가르쳐 주라고 그럴까?”
[아씨. 안 풀어도 되니까 그냥 보내, 넌 절대 손대면 안 돼.]
수화기 너머에 울러 퍼지는 진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다급하고 절실하게 들려 풀고 있던 한쪽 손을 내려놓는 순간 반지는 순식간에 풀려버렸다. 철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반지를 예환은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21.
크게 우는 소리에 놀라 화장실에서 뛰어나온 수진은 풀려버린 퍼즐을 어떻게든 연결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엉엉 울고 있는 예환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안 되어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하냐?”
“수진아! 이,이거, 이거 얼른 원상태로 해줘. 얼른. 내가 절대 푼 적 없는 거야. 절대 내가, 내가 못 푼 거야.”
“이게 갑자기 왜 풀린 거라니? 너 같이 왕초보한테. 이리 줘 봐, 그리고 풀렸으면 풀린 거지 왜 울고 난리야? 내가 한 말 땜에? 너 바보냐? 으이구. 내가 못살아.”
그녀가 퍼즐을 뺏어 들고 이리저리 끼워 맞추자 예환은 그 앞에서 계속 훌쩍거렸다.
“풀리면, 이게 풀리면 마음이 떠난 거라면서, 아닌데, 안되는데 내 마음이 떠나면 그나마 남아 있는 마음 떠나보내면, 다른 거 다 떠나보내도 진우에게 가는 내 마음까지 떠나 버리면 안 되는데, 그럼 진우는 죽어. 그 녀석 아마 못살고 죽어 버릴 거야. 그러니까 내 마음 떠나면 잡아야 해.”
“그만 울어. 초등학생도 아니고 질질 짜기는, 은예환. 너 점점 애기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제 됐다. 다시 연결했으니까 됐지?”
단단하게 연결된 고리가 가지런해지자 예환은 눈물을 닦았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인어공주를 읽고 내가 그랬거든 공주는 바보다고, 글로 적던가! 글을 모르면 손짓 발짓, 것도 모자라면 그 바닷가로 가서 다시 집어 넣어버리던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도 왕자의 마음이 예쁜 여자한테 가 있으면 칼로 왕자를 찔러야 한다고 어떻게 물거품이 되냐고 한참을 운적이 있었는데, 그때 진우가 만약 자기가 인어왕자이고 공주가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은 아마 물거품이 될 것 같다고 그랬어. 자신이 좋아한 사람의 마음이 떠나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아니냐고,”
멍하니 앉아 옛날을 되새기는 그녀를 보며 수진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인지 무지 조숙했네. 아그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러게.”
“말 나온 김에 우리 대화라는 거 함 해보자. 난 오지랖이 무지 넓어서 궁금한 것 못 참거든. 너 도대체 어느 부분을 어디까지 기억 한다는 거야? 네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면 왜 그런 건데?”
그녀 앞에 바짝 당겨 앉으며 수진은 대답을 강요했다. 며칠 전 혼자 잠시 사라졌다 나타나서는 하루 종일 걱정한 자신을 안고는 한참 울고 난 후부터 가끔 멍하니 앉아 있는 예환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있었다. 내용을 안다면 어떤 수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녀의 다그침에도 예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너 오늘부터 바쁘다면서? 안가?”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기 싫은지 고개를 돌리자 수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나갈 준비를 했다.
“같이 갈래? 특집으로 유네스코문화재 하기로 했거든. 우선은 서울에 있는 것부터 해서 오늘은 종묘 갈려고. 안 갈래?”“가자. 집에 있으면 뭐해 답답한데. 그럼 수원이나 경주는 언제 가? 서울 보다는 그쪽이 더 좋은 것 같다. 여행은 좋은 거니까. 내가 한 꼭지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나야 감사하지. 다음 주에 수원을 시작으로 쭉 돌까 싶어.”
대충 챙겨서 밖으로 나왔을 때 기다리고 있는 차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준을 보았다.
“수진아 오늘은 혼자 가야겠다. 일찍 올 거야? 저녁은 삼겹살로 먹자. 지글지글 거리는 것이 눈에 아른아른 하더라.”
수진이 눈치를 보며 이준에게 대충 인사만 하고 가자 그녀는 그에게 다가섰다.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었어?”
“이거.”
그가 내민 것은 잎이 떨어져버린 아카시아잎줄기였다.
“전화를 할까 말까 이렇게 한 개의 잎을 다 땄고, 나온다. 안 나온다. 이걸로 또 한 개. 들어갈까 말까 이게 마지막이었어.”
“그래서 결론은?”
“전화는 하지 마라. 안 나온다. 들어간다.”
이준이 피식 웃음을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잎을 털어 냈다.
“시간 괜찮으면.”
“시간은 안 괜찮은데 기다렸으니까 커피 한 잔하자.”
다음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앞장서 이준의 차문을 열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 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 만 보며 운전을 했다. 예환 또한 할 말이 없다는 듯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섬에서 살았어. 아주 오래전에, 내가 기억하는 단어가 선주라는 말이 맞는다면 우리 아버지는 선주님이라고 불렸어. 내 어릴 때 섬은 무척이나 컸는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 일까? 얼마 전에 가보니까 조그마하더라.”
예환이 천천히 입을 떼자 이준은 잠시 멈칫하다 잡고 있던 운전대에 힘을 주었다.
“첨엔 어는 곳에 있는 섬인지 몰라서 미리 알아보고 갔는데도 가서 보니까 내 기억과 다르게 섬은 아주 조그마해. 우리 집. 예전엔 기와집이었는데 지금은 펜션처럼 멋진 집이더라. 왜 네가 우리 집에서 갑자기 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집 기억나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자란 진우. 어느 날부터인지 갑자기 나타난 이준. 섬주인의 딸로 어려움 없이 말 한마디면 모든지 다 이루어지던 예환. 섬에 다른 아이는 없었고, 그렇게 셋은 항상 같이 다녔다. 진우는 예환이랑 같이 있으면 야단만 맞았는데 이준은 칭찬만 했었다.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준은 매일같이 손에서 절대 떼놓지 않고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말로는 예환이를 찍는다고 하면서 찍는 사진을 현상해서 보면 제대로 나온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어설픈 사진사였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넌 카메라랑 친했었나봐. 아빠가 매일 필름을 끼워 넣어줬는데. 그날도 그랬어, 카메라를 매고 바다를 찍겠다고 나랑 진우랑 같이 섬 반대쪽으로 매일같이 놀러가던 곳에 갔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둘이 싸움이 났어. 나보고 뭐라고 그랬는데 그 말까지는 기억 안 나, 왜 싸웠어? 아니 그게 중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매일 싸우는 녀석들이라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싸우고 돌아서면 금방 화해했으니까, 진우가 가던 쪽은 집과 반대쪽이었고, 이준이 가던 쪽은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기에 이준이 가던 길로 따라 걸었다. 집에 도착하고 저녁이 되어도 진우가 오지 않았다. 어른들은 섬에 있는 아이가 어디 가겠냐며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초저녁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자 그제야 걱정이 된 어른들이 진우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날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아직도 예환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진우를 미워하던 할머니가 그날따라 유난히 진우를 찾았다. 겨우 찾아온 진우는 온 몸에 비를 맞고 탈진해서 의식을 잃었다. 할머니가 안고 들어가 할머니 방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열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 어른들이 그러는데 섬 반대쪽 동굴위의 벼랑 끝에 약초가 있데. 그거 먹으면 금방 낫는다고 비 그치면 어른들이 간데. -
꼬박 하루를 눈도 뜨지 못하는 진우가 걱정되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에게 이준이 했던 그 말은 희망이었다. 다들 진우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섬 반대쪽 벼랑위로 올라갔다. 그쪽은 험한 골짜기라 가면 안 되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겨우 올라간 벼랑위에 약초는 고사하고 풀한 포기 없는 것을 보며 실망하고 내려오다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동굴 속에서 열이 나서 뜨거운 몸으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진우가 보였다. 손목이 너무 아프고 잠이 자꾸만 왔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던 진우가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뜨거움이 볼에 묻어왔다.
“눈을 뜨니까 병원인거야. 그때 난 상처야 이게,”
손목을 쓰다듬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뜨거움은 열에 들뜬 진우의 입김이었으리라, 잠들면 안 된다고 힘겹게 말하던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의 마음이었으리라.
“근데 그때 왜 할머니는 그렇게 진우를 애타게 찾았을까? 왜 넌 그때 약초가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 손목의 상처를 기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궁금했었어.”
갑자기 길옆으로 차가 급정거를 했다. 이준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라 붉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완전했던 기억이 아니었으니까. 처음엔 어설프게 조금씩 하나씩 살아나는 기억이 무섭기도 하고 두려워서 모른 척 기억하지 않았는데. 너의 그 거짓말도 내가 잘못 기억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가 무서워졌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네게 잘 못한 일이 없었거든, 왜 그랬는지 넌 생각나니? 너무 어릴 때 일이라 넌 기억나지 않을 수 도 있겠다.”
이준은 입술을 축였다. 말을 해야 하는데 목구멍에서 덩어리가 차올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은 진우가 내게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사라지던 날 조금씩 떠올랐어. 다른 것은 기억하지 말고 윤진우가 은예환을 사랑한다는 사실만 기억하라고 고함치던 날. 머리에 숨겨져 있던 모든 기억이 뜨겁던 그날 진우의 열기처럼 온 몸에서 깨어 나 버린 거야. 내 손목에서 끝도 없이 나오던 그 핏물들이 내 몸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진우의 작은 몸에서도 토해내던 것이었다는 것도 그날 알았어. 갑자기 이유도 모르고 떠나 버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나는 기억들을 움켜잡아야 했거든, 내 마음을 잡지 않으면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났을 때 또다시 피를 토할 것만 같았으니까. 진우가 다시 돌아 온 날부터 점점 더 선명해진 기억들이 그 이전의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을 되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난, 더 이상의 기억은 하지 않을 거야. 내 기억이 그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기억 따위는 버리는 것이 나아. 여태 몰랐던 것처럼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야. 그러니까 넌 기차에서 도움을 받은 그날. 처음 만난 친구야. 진우에게 내가 기억한다는 말로 상처 주는 일 없었으면 해. 부탁이야.”
이준은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에서, 떨림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다시 서서히 운전을 시작했다. 눈이 젖어들기 시작했는지 자꾸만 눈앞에 흐려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의 틈도 없구나. 너희 둘은. 하아!”
이준은 깊이 한 숨을 내쉬며 교차로가 나오자 차를 되돌렸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해도 좋아. 난, 네, 너의 친구니까.”
진우가 있는 촬영장 앞에서 휴대폰의 버튼을 누르며 이준은 힘겹게 친구란 포장지를 꺼내 멋지게 포장을 했다.
멀리서 갑자기 입구로 뛰어나오는 진우를 잡으러 재후가 뒤따르는 것이 보였다.
22.
자동차 경기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스피드웨어 주변은 어수선했다. 진우의 웃는 모습을 처음 보는 듯 카메라의 셔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표정을 잡아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저기”
예환이 벌써 한참 꽁무니를 보이고 달려가고 있는 이준의 차를 가르쳤다. 진우의 시선이 잠시 차를 향하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손에 자신의 팔을 맡기며 예환은 그날의 핏물을 떠올렸다.
하아. 하아. 울지 마. 예환아. 울지 마. 조금 있으면 어른들이 우릴 찾을 거야. 그러니까 울지 마.
너 입에서 자꾸만 피가 나. 무서워.
하아. 하. 울지 마. 잠들면 안 돼. 썰물이 시작되고 있으니까 자면 큰일 나. 하.
자신의 눈은 더 가물거리면서 진우는 열심히 예환을 깨웠다.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진우가 자신의 옷을 찢어서 묶어서 인지 더 이상 배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진우의 입에서는 자신의 몸에서와는 다른 피가 흘러나왔다. 점점 물은 차오르고 있었다. 앉아 있던 바위가 거의 잠기어 가는데도 어른들은 오지 않았다.
너 열이 아직 안 내렸네. 많이 뜨거워
자지 마. 절대, 저얼대. 잠……들……면…….
물에 잠기어 가던 몸이 추워서 움츠려질 때마다 진우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이를 딱딱거리며 덜덜 떨 때도 뜨거운 몸으로 가만히 안고만 있었다.
금방 따……뜻
잡고 뛰고 있는 진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도 그렇게 그는 손목을 꼭 잡고 있었다. 놓으면 큰일이라도 날까봐 잠겨 오는 바닷물을 상대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면 안 되는데, 넌 여기 얌전히 그냥 있어라. 난 여기선 말하면 재후형한테 죽어.”
씨익 웃으며 휴게실에 데려다 놓고는 세트장으로 달려가는 진우의 뒷모습을 보며 예환은 미소만 지었다.
“저 녀석을 처음 만난 게 작년 이 맘 때쯤 인가 봅니다. 사고 나고 병원에서 나와 술집을 전전하고 있던 저 녀석을 찾아 나선지 몇 달 만에 찾았으니. 이 술집. 저 술집. 외국에 사는 놈이 술집이란 술집은 다 찾아서 다니고 있더군요.”
“패주지 그랬어요. 남의 나라가서 흥청망청 쓰고 다니고 있다고.”
“실컷 패줬어요. 그래도 정신 못 차리던데요? 훗.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이 지갑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서 보더니 맞아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예환은 진우가 주는 커피를 받아들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패주라고 한다고 정말 패줬다고 말하는 재후가 은근히 미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 녀석에게 그랬죠. 네 녀석 눈은 니꺼 아니니까 울지 말라고, 그 눈에서 눈물 흘리면 그땐 정말 죽여 버린다고 그랬더니 더 크게 엉엉 우는 거예요. 그 녀석 사고로 다리만 다친 게 아니라 양쪽 눈까지 멀게 했거든요.”
그가 이식받은 눈은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떠나간 사랑의 흔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눈에서는 절대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수소문을 했지요. 예환씨 결혼한 줄 알던데요. 결혼안하고 아주 씩씩하게 혼자 잘 살고 있다고 하니까 못 믿겠다고 버텨서 몰래 귀국해서 숨어 예환씨 보고 갔어요. 그렇게 보고 와서 사람 꼴이 된 얼굴로 이제 뭐하면 되냐고 묻더군요.”
돌아갈 이유가 생겼다고 히죽거리며 미친 사람마냥 웃고 다녔다고 했다. 재활도 하지 않고 거의 방치 해두었던 다리를 절뚝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싫다며 죽을힘을 다해 재활치료를 했다 고했다. 가만히 재후에게서 그의 흔적만 듣던 예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혹시 기억나는 부분이 있어서 힘들더라도 진우에게만은 더 이상 아픔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 녀석 혼자서 아플 것 다 아픈 녀석이거든요. 레이싱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예환씨가 기억이 돌아오면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방법은 죽는 수밖에 없더랍니다. 그러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예환씨 소식을 한 줌 빛처럼 가지고 있었다고, 참 아이러니 하죠? 그 사람 때문에 죽을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정작 죽음의 순간까지 갔을 때는 그 사람 때문에 살고 싶더라는, 옆에서 본 진우는 그런 녀석입니다.”
갑자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휴게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트랙에서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우가 탄 듯 한 스포츠차가 스피드를 내며 계속 달리기만 했다.
“열 받은 인효가 혼자서 분을 삭이는 장면 이예요. 스포츠카를 거칠게 몰면서 달리고 또 달리다, 나중엔 눈물을 흘리게 되는 씬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녀석 한참을 달리고 싶어 안달이었는데 잘 됐네요.”
죽으려고 떠났었니? 더 이상 만나지고 않고 보지도 않을 작정으로 낙인처럼 가슴에 윤진우 이름 석 자 새겨놓고 그렇게 너 혼자 결론 내릴 거 다 내리고 혼자 아파하며……. 윤진우 너 어쩜 그렇게 바보니? 바보야. 바보. 혼자 폼생폼사로 그렇게 괴롭혀 됐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커다란 멍을 안고 어떻게 그 긴 세월 혼자 버텼어?
얼마나 달리는지 처음 3바퀴정도만 헤아리고 있다가 점점 차에만 시선이 고정되었다. 몇 시간을 달리기만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진우는 계속 달리기만 했다.
***
스튜디오로 돌아온 이준은 얼음물을 연거푸 석잔 을 마시고 소파에 그대로 덥석 주저앉았다. 예환이 보는 앞에선 쿨한 척 멋있는 척 하며 진우에게 데려다 줬지만 사실은 자신의 마음이 데려다 주는 마음만큼 아프다는 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너 열나는 거 같다?”
우린이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며 붉게 달아 오른 얼굴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이준에게 말을 건넸다. 아닌 게 아니라 머리가 뜨겁기까지 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프긴 하네. 짝사랑의 상처가 이정도도 아프지 않으면 억울하잖아. 좀 아파야지.”
“짝사랑? 소이준한테 전혀 안 어울리는 짓 했네.”
“그러게, 소이준이한테 전혀 안 어울리는 짓이라면 얼른 정신 차려야지. 다음 예약시간까지 한 30분 남았나? 정신 차릴 시간은 충분해!”
이준이 컴퓨터를 보며 확인하는 동안 우린이 걱정스런 표정을 커피를 탔다.
“자! 찐하게 아주 달게 탔으니까 정신 차리는데 도움이 될 꺼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심란한데 짜식 안하던 짓까지 해서 걱정하게 만들고 있어.”
커피의 단맛에 인상을 찡그리던 이준은 가만히 우린을 바라보았다.
“형도 실연당했냐? 왜 심란해?”
“소문 못 들었구나. 윤진우말야. 아차! 윤진우 말하면 너 화내지?”
“윤진우 애인? 그것 땜에 심란한 거라면 얼마든지 받아주지.”
“아니. 윤진우. 유학 간다고 하던데. 소문이 자자해. 셔킷이 아마 첫작이자 마지막 작이라고,
증권가 리포트니까 대충은 맞을 거야. 내 것이 아니라도 옆에 있으면 감상이라도 하지. 멀리 보내면…….”
“유학이라니. 윤진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유학이야? 어디서 나온 말이야?”
이준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야! 왜 나한테 소리쳐! 명진에서 흘러나온 말이야. 예일까지 다니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딴따라 시키기 싫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 맞이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은 스캔들 터지니까 내가 부모라도 보내겠다. 야! 소이준 어디가? 야! 다음…….”
우린의 다음 말은 더 이상 이준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20층 사장실입구에서 이준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뛰어온 터였다.
“자네가 여길 어떻게?”
이준이 인사를 하자 명섭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나에게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어디 들어나 보지”
미끈한 마호가니책상위 금박을 입힌 명패 속에 대표이사 윤명섭의 이름이 반짝거렸다.
“반나절만 걸으면 일주 하는 그런 코딱지만 한 섬 팔아봐야 얼마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수목원까지 파셨습니까? 그 수목원 예환이 몫이었죠. 죽은 사람이 양도해 줄 수는 없을 텐데요.”
“자, 자네가. 그걸, 어떻게”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수목원 양도된 날짜가 예환이 할머니 돌아가신 다음날 이라는 것을요. 죽은 사람 앉혀놓고 계약하셨습니까? 제 어머니가 수목원을 기억하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섬에 가는 길에 이리저리 서류를 좀 보았습니다.”
명섭의 얼굴이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두 사람 결혼 허락 하십시오. 예환이 눈에 더 이상 눈물 빼지 말란 말입니다. 기억하든 하지 않든 예환이가 진우를 선택했다면 그렇게 해야 행복하다면, 아저씨란 이름으로 사람 좋은 얼굴 하고 앉아서 뒤통수치는 그런 일 이제 그만 하시란 말씀 드립니다. 다친 아이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면서 술 마시고 운전하는 정신 나간 아버지는 세상에 없습니다. 더구나 그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더더구나 말입니다. 밝혀지라고 비밀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준은 이를 악물며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붉어졌다 다시 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명섭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커다랗게 뜨고 있자 이준은 마지막 비수를 던지며 다시 인사를 했다.
“소문을 듣자하니 진우를 멀리 보내 실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만 그러시지 마십시오. 조만간에 있을 결혼발표 기다리겠습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는 이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진동으로 해둔 핸드폰이 울려댔다.
[야. 너 지금 어디야? 너 죽을래? 니 스케줄까지 내가 지금 다 소화하고 있잖아. 힘들어 죽겠다. 얼른 안 튀어와? 30분내로 안 오면 너 오늘 제사상 받는 줄 알아.]
우렁찬 우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리자 이준은 미소를 지었다.
“형. 술이나 한잔 하자. 속이 텅 빈 것처럼 허하다.”
[야! 소이준]
폴더를 닫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다 주머니 속에 든 돌멩이를 꺼냈다.
“이제 이건 필요 없어진 건가? 은예환 넌 모르지? 네가 잊고 산 기억만큼 내가 다 기억하고 있었고, 그 기억만큼 내가 자랐다는 거. 그리고 내 첫 번째 어설펐던 작품이라는 거. 앞으로도 전부 다 나 혼자 가져가야 할 추억이네. 내 기억을 사랑했는데…….”
만지작거리는 돌멩이가 이준의 뜨거워진 심장 온도처럼 점점 따뜻해져갔다. 돌멩이를 버리려 휴지통으로 향하던 그를 붙잡은 것은 새하얗게 질린 명섭이었다. 순식간에 몇 십 년은 늙어 버린 사람이 되어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있었다.
23.
“얘, 하, 얘기 좀 하세.”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며 이준은 다시 인사를 했다.
“드릴 말씀 다 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된다면 더 이상 다른 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예환이도 진우도 그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약속드리죠.”
“그,그게 아니, 아니라네, 그게 다가 아니야. 그 아이들은 절대 허락 할 수 없어.”
“무슨?”
억지로 다시 끌려간 사무실에서 명섭은 덥석 소파에 주저앉고는 찬물을 연거푸 세잔을 시켜서 마시고는 비서실에 있는 비서조차 마음에 안 놓이는지 일부러 심부름 보내는 기색이 역력하게 회사 밖으로 외근을 내보내고 있었다.
“공자님 말씀만 줄기차게 얘기하던 선주님이셨네. 조용조용 어쩔 수 없이 집안의 가업을 물려받아 돈 버는 일을 하고 계셨지만 조선시대 양반으로 태어나셨어야 할 분이였다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있을 때가 허다했으니 말일세. 금슬도 좋았던 선주님부부에게는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없었지, 노마님의 은근한 압박은 선주님에게나 마님에게나 다 힘든 일었다네.”
무슨 말을 하는 가 싶어 이준은 가만히 듣고 있다 갑자기 눈이 크게 뜨였다.
“제가 들어서 안 될 말이라면 안 듣습니다. 입 밖으로 내서도 안 되는 말이라면 차라리 사장님 마음에 묻고 입 밖으로 내지 마십시오. 그게…….”
“그렇게 착하디착한 선비 같은 선주님의 마음을 배신한 것은 내 형이었다네.”
이준의 듣지 않겠다는 말을 무시하며 명섭은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갔다.
“노마님이 떼어준다는 열 마지기의 밭에 마음을 판 것이지. 어차피 받은 그 돈 얼마 못가 노름해서 다 날려버리긴 했었지만 말이지. 마님이 결혼10년 만에 낳은 아기가 예환이라네. 씨내리를 들여서 낳은 아기가 딸인 것을 알고 노마님은 대가 끊겼다고 앓아누워 한 달 만에 일어나기도 했었지. 아무도 모르게 진우랑 바꾸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예환이가 선주님 아이라는 의심을 절대 하지 않았을 거라네. 노마님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시더군. 진우와 바꾸자고,”
아기를 바꾸게나. 그럼 평생 먹고 살 만큼 해줌세. 은씨집안의 대가 여기서 끊기게 할 수는 없지. 어차피 그 여식도 자네 조카뻘이니 자네가 애기중지 키울 수 있지 않겠나.
“조카뻘. 그 말을 듣고 이해를 했지. 내형이 갑자기 어디서 생긴 돈으로 흥청망청 쓰고 다녔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네.”
노마님의 뜻대로 되지 않아 아기는 바뀌지 않았지만 진우를 향한 눈길은 거둬들여지지 않았다. 사람들 눈앞에서 은근히 아이를 더욱 힘들게 야단치기도 했고, 그러면서 친손자 끼고 키우듯이 아이가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안달 나게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손목사고로 아이의 피검사 하는 도중에 선주님이 알아버렸다네 예환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 되어 버린 거지. 며칠을 술을 드시더군. 물론 사고 났을 때는 술을 드시지 않았지만 며칠을 술에 절은 상황이 음주로 몰고 간 것이지.”
아이들을 태우고 말다툼을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침묵으로 아내를 몰아 부치고 있었고, 절대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던 사람이 눈에 질투가 올라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렇게 사고가 나 버린 것이었다. 조카뻘. 그 말이 귀에 자꾸만 걸려 아이를 어쩌지 못하고 데리고 와서 길렀다.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수목원 줄 테니까 진우 내 놓으시라고 고함을 지르시더군. 당신 손자는 오로지 진우뿐이라며, 끝까지 불쌍하신 양반이셨지.”
이준은 머리가 복잡해져 갑자기 멍해졌다.
“그 혼란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라네. 어차피 후손도 없이 유언 한 장 없이 끝난 운명들 내가 관리하고 있던 모든 것이 남의 것으로 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긴 얘기를 마친 명섭의 얼굴은 오히려 홀가분해보였다.
“그 아이들이 안 되는 이유일세. 절대 안 되는 이유”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에…….”
힘주어 말하는 이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네가 그 아이를 데리고 떠나주게. 그게 그 두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야.”
혼란에 사로잡힌 이준의 마음에 다시금 두 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돌멩이를 만지고 있었다.
“저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일입니다. 절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될 말입니다. 절대 저는 모릅니다.”
“세상에 절대란 없다네.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아이들이 사촌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사촌이라는 변함없는 사실.
“저는 이 일에 더 이상 관여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을 사람은 예환이지. 조용히 데리고 떠나게. 그 아이가 모르길 바란다면.”
거짓말! 여태 한 얘기들이 전부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마지막 명섭의 비굴해 보이는 눈빛에서 읽어버렸다. 이준은 순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동정을 유발하며 내건 그 얘기가 아마 그 둘을 떼어 놓겠다는 심사로 들려왔다.
“그러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꺼내며 자신의 일을 정당화 시키시려 하셨다면 제게는 실패입니다. 제가 아는 예전의 진우아버지는 항상 웃으시며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분입니다. 진우를 많이 사랑하셨고요. 그 녀석을 끔찍하게 위하던 그 모습이 어린 제게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십니까? 예전 그 모습의 아저씨만 기억하겠습니다. 이 시간은 제게 무의미한 시간이었습니다.”
점점 당황하는 명섭의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 실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신념이 보이듯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내게 그 아이 걱정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 아니었나? 그럼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 모름지기 사내란…….”
이준의 눈동자에 비웃음의 미소가 비쳤다.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냈다.
“추억 같은 거죠. 어린 날 내게 사진이란 걸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같은 분에 대한 의리. 그리고 같이 놀았던 어린 계집애에 대한 동경. 닿고 달아 이제 더 이상 닿을 때조차 없어진 낡은 이 돌멩이 같은 마음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시 만났을 때 잠시 애틋했던 마음. 이제 흥미 없어졌거든요. 그럼”
아무렇지 않은 채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이준의 마음은 분노로 얼룩지고 있었다. 이를 막 물며 떨리는 손으로 운전을 하며 심호흡을 해야 했다. 어쩌면 일부분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지만 진우에게는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갑작스런 벼락을 내려치게 될것 같았다. 미리 알고 대처 할 시간적인 여유가 그에게 필요했다.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어디야? 바뻐?”
[그건 알아서 뭐하게?]
“까칠하기는, 시간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술 한 잔 하자. 우리 정리할게 남았잖아. 예환이는 몰랐으면 하는데.”
[하고 싶은 말 없, 아니다. 몇 시?]
대충 시간과 장소를 말하고 끊고 나자 이준은 허기가 느껴졌다. 도대체 왜 그들 사이에 끼어 천하의 소이준답지않은 오지랖 짓을 하는지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형, 내 모습이 낯설다. 일시적으로 아픈 거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낮게 혼잣말을 읊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데 전화를 그렇게 받아? 승질좀 고쳐. 나니까 그나마 받아주고 있지 팬들이 그 모습 보면 조금 가지고 있던 정 다 떨어지겠다.”
예환이 플립을 신경질적으로 닫는 진우의 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없는 휴게실내부에 두 사람만 남아 커피 잔을 손에 들고 입구가 정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관없어. 팬들은 안 받아줘도 돼. 너만 받아주면.”
“어쭈. 말은 잘한다.”
“형이 왜 이리 안 오지? 배고프지? 촬영이 길어져서 말야.”
레이싱 장면 촬영을 위해 서킷을 달릴 때는 못 느꼈는데 막상 촬영이 끝나고 보니 시간이 너무 흘러 예환이 지루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봤어. 너 살아 있더라. 한 번도 그런 눈빛 본적이 없는 것 같아.”
말은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운전을 다시 하고 싶어 하는 지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도 지침 없이, 점점 길어지는 촬영에도 흔들림 없이 트랙을 돌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모니터를 통해 전해지면서 예환은 그를 느끼고 있었다.
“다시 하고 싶어?”
“겁나, 이제는. 서킷에 다시 서는 거 겁나. 그러면서 한없이 달리고 싶기도 하고, 이게 무슨 마음인가 싶다.”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그의 마음이 조심스레 전해지고 있었다. 가만히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따뜻함이 진우의 양어깨를 통해, 가슴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통해 전달되고 있었다.
“살아 있어서, 온전히 살아서 돌아와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시는…… 다시는 떠나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그에 의해 막혔다. 달콤 씁쓰름한 커피의 맛이 그녀의 입술에 묻혔다.
“다시는 떠나지 않아. 어떤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아.”
진우의 부드러운 저음이 예환의 눈물샘을 더욱 건드리고 있었다.
“자! 그만 하고 가지? 배고프지 않아?”
재후가 들어오며 능청을 떨었다. 예환은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길. 타이밍 한번 죽인다. 형, 연애 해본 적 없지?”
“얌마! 타이밍이고 연애고 일단 여길 벗어야 한다는 생각 안 들어? 여기서 다음 촬영 장소까지 이동하려면 예환씨 밥도 못 먹이는 수가 있어.”
“뭐야? 오늘 촬영 끝 아니었어? 내 촬영분 거의 끝난 줄 알았는데.”
진우가 입을 삐쭉거리며 주섬주섬 옷을 챙기며 예환을 잡고 휴게실을 나섰다.
“쪽대본 나왔어. 추가분이라고 오늘 밤 늦게까지 찍는단다. 시간 없어. 가는 동안 대본 외어.”
“나 약속 있어.”
“취소해. 밤새워야 할 거야.”
“우, 씨팔”
“욕하지 말랬지. 의도적으로라도 하지 마. 무의식에 나올 수가 있어. 공인은 항상 입조심해야 해.”
재후의 말에 예환은 웃음이 나왔다. 진우의 입에선 입만 열면 나오는 게 욕인데 그걸 어떻게 조심하라는 것인지.
“웃지 마. 씨”
재후의 인상에 진우는 다시 입을 다물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녀는 한참을 웃어야 했다.
저녁도 겨우 뜨는 듯 마는 듯 하며 다시 촬영장으로 향하는 진우를 보내고 예환은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 온다고 했던 수진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어둠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스레 지난 주 서킷을 돌려보며 진우의 모습을 더듬다 몇 시간 전의 입술느낌이 살아나 입을 가만히 만져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 할 거야. 네가 내게 준 그 마음만 기억할 거야. 어린 날 그 뜨거운 열을 내뿜던 너의 그 모습만 그렇게 기억하고 간직할 거야. 이제 아프지 마.”
24.
밤새 촬영은 계속 되었고, 진우도 점점 지쳐갔다. 카페의 요란스런 음악과 함께 사이키조명과 희뿌연 안개가 눈앞을 자꾸만 흐리게 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관계된 사람만이 있는 그곳에 이준이 들어선 것은 진우가 거의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새벽이었다. 말은 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눈빛으로 보여주는 연기가 제대로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신인으로 얼마나 힘든지 진우는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촬영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집중력은 더욱 떨어지고 있었다. OK사인과 함께 진우의 촬영이 끝나자 현기증을 느꼈다.
“다음 촬영시간까지 3시간 이야. 잠시 눈 부쳐.”
재후가 진우에게 피로회복제를 건넸다.
“잠시 볼 수 있을까? 10분 정도면 돼.”
“소이준씨 진우 상태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됩니다. 지금은 그냥 가시는 것이 좋겠군요.”
“잠시면 됩니다. 미리 예보된 태풍은 준비를 할 수가 있지만 예보되지 않은 소나기는 비를 그대로 맞게 되거든요.”
진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체 이준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차로 가자. 형 어디로 이동할까? 난 저 녀석 차로 움직일게.”
재후에게 간단하게 대꾸하고는 비틀거리며 이준의 차로 향하며 한숨을 쉬었다.
“힘들어? 아니다 물어서 뭐해 뻔히 다 지켜봐 놓고.”
“간단한 줄 알았다. 시작은 그래 뭐 별거 있을 까봐 그랬는데 갈수록 이게 아니다 싶다.”
진우는 들고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시고 종이컵을 찌그러뜨렸다.
“담배 필래?”
“기상특보가 뭐 길래 담배까지 필요해? 독하게 끊는 중이야 유혹하지 마. 촬영 때 피는 것만으로도 골초 수준이니까.”
피곤함이 가득 밴 진우의 목소리가 이준의 말을 더욱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시트 깊숙이 몸을 뉘이고 눈을 감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킷의 시높을 보니까 알고 보니 주인효가 서윤주와 사촌이었다. 이런 설정이 있던데, 드라마가 색다른 맛이 없게 멜로의 법칙 그대로 가냐? 그래도 대작이라는 이름을 걸고 나오는 드라마가 말야. 그 흔한 설정”
윤진우. 은예환이 알고 보니 사촌이다. 넌 이 희한한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 입에서 나올 말이 맴돌고 있었다.
“주인효가 서인효인게지. 그거야 작가 몫인데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 그 얘기 하자고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닐 테고 뜸들이지 말고 할 말 해. 눈이 무겁다.”
진우는 감겨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준을 노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알고 보니 윤진우와 은예환이 사촌이라면 관여할 맘이 생기냐?”
시트가 튕겨 나갈듯이 진우의 움직임은 빨랐다. 좀 전까지 거의 그로기상태의 모습은 어디가고 이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씨팔 이 새끼가 말이면 단줄 알아? 너 죽을래?”
“내가 생각하기에도 거짓말 같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아니다 거짓말이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얘기를 네게 한다면 네가 지금처럼 목을 조를 수 있을까?”
자신의 팔에 온 힘을 모아 진우의 팔을 떼어냈다. 졸려있던 목을 쓰다듬었다.
“네아버지야. 그 얘기를 내게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난 내 느낌은 거짓말이라 생각하지만, 아마 네게 그 얘기를 하며 예환이 단념하게 하실 것 같은 데 미리 대처해야지? 난 기상특보 해줬다. 배를 항구에 묶는 것은 네 몫이야.”
놀란 눈으로 멈칫한 진우를 다시 시트에 앉히고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굳어버린 몸은 한참을 되돌아오지 않았고 입조차 떼지 못했다. 단단한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기라고 한 것처럼 고정된 눈은 꼼짝하지 않았고 충격을 받은 세포하나하나가 다 죽어가고 있는 듯 굳어있었다.
“예보가 이정도인데 그냥 당했으면 넌 그대로 즉사겠다. 너 큰아버지 있었냐? 왜 내 기억엔 없는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파헤치자고 들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이기도 해. 증명해줄 만한 사람이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 섬에서 할머니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할 정도이니……. 윤진우 듣고 있어? 야! 윤진우.”
“세워. ……내려 줘.”
절대 결혼은 안 된다고, 절대 안 된다며 다른 이유가 있음을 내비쳤을 때 그저 죄책감이려니 했다. 재산을 가로챈 것에 대한 죄책감. 그걸로 인해 어린 날 받은 자신의 상처가 이제 겨우 다 아물어 가는데 이제 겨우 그녀 옆에 돌아왔는데…….
“정신 차려. 니가 이런다고 달라지는 거 있어? 설령 사촌이라고 해도 사랑이 접어져? 그 사촌이라는 말 한마디에, 것도 증명되지 않은 아무도 믿지 않는 그 말에 미친 듯이 보고 싶고 죽도록 사랑한다는 게 순식간에 종이접기처럼 확 접어지는 거냐? 너 그거 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
이준이 계속 떠들어 대지만 그의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윤진우.”
이준의 고함소리에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사랑이 접어져? 너 미쳤어? 그런 소리를 함부로 감히 내 앞에서 천하의 윤진우 앞에서 지껄여 대다니.
“시끄러 그만 불러. 네 말은 지금 우리아버지가 널 불러서 그 얘기를 했다는 건데 왜 우리아버지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을 너란 녀석에서 그런 얘기를 한 건지 그것부터 얘기해야 순서가 되지 않을까?”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이 냉철한 머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몇 가지. 그래 몇 가지 너희 아버지의 약점을 잡고 너 다시 내보내는 거 막았다.”
“다시 내보내? 누구 맘대로 그게 아버지 뜻대로 될 것 같으면 들어오지도 않았어. 어찌됐든 그 약점이 뭔지 알려줄 마음은 없는 거겠지? 나도 대충은 짐작이 가지만 말야. 이해 안 되는 부분은 네가 왜 그 아킬레스를 건드리기 시작한 거냐는 거지. 촬영장까지 예환이 데려다 주고 간 이유도 사실 알고 싶다. 왜 급반전처럼 돌아선 건지 너란 녀석이야 말로 종이접기처럼 사랑이 접어져? 며칠 전까지 만해도 길길이 뛰던 녀석이?”
“이제 윤진우로 돌아 온 건가?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렇게 침착할 수 있다는 것. 대단해.”
갓길이 보이자 이준이 차를 세우고는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진우에게 건넸다. 그리고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까치배게? 이게 왜?”
“예전에 한 여자아이의 책상에서 훔쳤어. 그리고 그 추억을 간직해 온 거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내 나라에 대한 향수, 아니 것보다 기억이었어.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아련한 느낌까지. 그걸로 끝이야.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내 어린 날의 기억일 뿐이었으니까 혹시 모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다시 생각을 했을지도 그런데 재미없더라고. 건드려도 반응이 있어야 재미있지.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추억을 훼손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약점 물었는데 되돌아 온 파장이 너무 커서 사실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미리 알려주는 거야. 이제 상황 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이제는…….”
이준이 말을 삼켰다. 이젠 정말 끝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진우의 주먹은 쥐었다 폈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차 안엔 정적만 흘렀다. 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터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두사람의 숨소리만 일정하게 나고 있었다. 정적을 깬건 이준이었다.
“생각 나? 굿판. 넌 더 잘 알겠다. 내가 처음으로 섬에 갔던 그 때 그날 그 굿판이 열리고 있어서 오랫동안 처음 본 영상에 충격을 받았었는데, 바닷가에서 열리던 그 굿. 뭔 할매인가가 내려오는 날이라고 비바람 눈보라가 아닌 살랑살랑한 봄바람이 불기를 기원하던. 항상 어떻게 햇살만 내리 쪄? 어떻게 만날 코끝 스치는 바람만 기대해? 바람도 불고 비도 내리고 폭풍도 몰아쳐야지 풍어가 된다고 그랬잖아. 단지 조금 약하게 스쳐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열리던 굿판처럼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예방이라 생각해.”
“뒤에 차 따라오고 있지? 세워. 말 안 해도 그 굿판은 나 혼자만 봐야 하는 거 알지? 그리고 이건 네 추억으로 간직해. 나중에 주고 싶은 사람 생기면 그때 필요 할 테니까”
조심스레 갓길에 차를 세우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멩이를 건네주고 진우는 내렸다. 애써 태연한 척했을 그 마음이 긴장이 풀린 듯 바들바들 떨림으로 되돌아 왔다. 뒤따르던 재후가 진우의 상태를 보며 보온 통을 꺼내 물을 한 잔 건넸다. 뜨거운 물이 목덜미를 넘어 온 몸에 흡수되자 그의 떨림은 심호흡과 함께 진정되고 있었다. 시트에 다시 깊숙이 몸을 뉘이고는 눈을 감았다.
“집으로 가.”
“시간 없어. 지금도 휘청하는 판에 눈도 안부치고 어디 간다고. 잠시라도…….”
“10분이면 돼. 10분이면 충분해.”
여전히 감은 눈으로 거친 숨소리만 내 몰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쥐었다 폈다 하는 손놀림이 진우의 상태를 가늠하게 할 뿐이었다.
“이유는?”
“그냥, 지금은 그냥 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 물어 버리는 진우에게 애써 묻지 못하고 삼성동으로 차를 움직였다.
새벽이라지만 거리가 제법 되는 지라 30분 이상을 차 안에서 보낸 뒤 삼성동에 도착했다. 시동을 끔과 동시에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진우는 용수철처럼 튀어 어느새 차 문을 열고 있었다.
“10분만 기다려. 그 이상도 아냐.”
정리할 시간. 10분의 시간도 아깝다.
커다란 담장과 육중한 대문이 가슴에 얹어둔 벽돌처럼 뻐근함을 유발하고 있었다.
잔디가 잘 다듬어진 뜰에서 명섭은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려다 그 모습을 보며 진우의 눈에는 분노가 일었다.
“더 이상 제 인생에 끼어들지 마십시오.”
“뭐? 이 녀석이 한 달 만에 본 애비한테 새벽에 기어들어와 고작 한다는 말이…….”
“큰아버지는 아버지가 어릴 때 돌아가신 걸로 압니다. 거짓말을 하시려면 좀 맞는 인물을 가져다 대시지 그러셨어요. 얘기 듣는데 얼굴 화끈거려 쪽팔려 죽는 줄 알았잖아요. 그렇게 재산을 지키고 싶으시던가요? 남의 재산 가로채 이 만큼 살았으면 이제는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할 연세가 되신 줄 알았는데.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개과천선 기다림 의미 없을 것 같습니다.”
명섭의 골프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윤이라는 성을 지우면 아버지 거짓말도 효력이 없어지겠군요. 이말 드리려 왔습니다.”
“이.이. 에이”
명섭은 손에 들고 있던 골프채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가가 붉어지며 온몸이 악에 바치기 시작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로지 저 하나 잘 살게 하려는 목적으로 다음 대에선 절대 가난 따위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며 살아왔는데, 바로 옮겼으면 살릴 수 있었던 선주님도 모른 체 숨이 다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병원으로 옮겼고 밤마다 그 죄의 시달림에도 꿋꿋하게 살아왔는데, 진우의 한 마디에 명섭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거실 창으로 뜰을 내다보고 있던 정심이 뛰어나와 말렸을 땐 그는 이미 이마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리에 감각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고, 어깨의 통증은 지독하게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 끝입니다. 이걸로, 이렇게…….”
이를 악물며 절뚝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던 재후의 품에 안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혀어엉. 가, 가, 가자. 이……제 끝났어.”
가물거리던 의식을 끝까지 잡고 있던 그는 재후의 품에서 의식줄을 놓고 말았다. 재후는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대문 저편에서 피범벅이 된 골프채를 꼭 쥐고 그 자리에 굳어 있던 명섭을 바라보았다. 진우가 재후의 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보고 명섭은 머리끝까지 오르는 혈압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그대로 쓰려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