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그 통증의 미학(펌)
‘아삭!’ 베어 물면 매콤함이 입안에 퍼지고 ‘이 정도쯤이야’ 생각하는 순간 혀에 통증이 온다. 혓바닥을 내밀고 손부채질을 해봐도, ‘스읍~ 습~’ 공기를 들이켜봐도 부질없다. 그저 흐르는 시간이 해결해주길 기다릴 밖에.
매운맛 좀 볼 텨?
달콤한 것도 아니요 고소한 것도 아니다. 외려 무기로 활용될 만큼 고통까지 주는 이것에 우리는 왜, 언제부터 빠져버렸을까.
[한국인이 날마다 먹는 그것]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 적도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간이 고추를 먹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000~8000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 원주민들이 먹던 이 매운 채소는 15세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으로 전파됐고,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생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과정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지금까지 통설로 굳어진 내용은 16세기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일본에 고추가 전해졌고, 임진왜란 무렵 한반도로 넘어왔다는 견해다. 콜럼버스가 고추를 유럽으로 전?했다는 주장과 시기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고추를 음식에 활용했다는 반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일본을 통한 유입설의 근거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남만초南蠻椒는 왜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세속에서 왜개자倭芥子라 한다”는 대목이다. 반면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의견은 ‘세계 각지에 고추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설과 일맥상통한다. ‘지봉유설’ 외에는 고추가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근거 사료가 없고, 도리어 일본에 ‘조선에서 고추를 가져왔기 때문에 고려 후추라고 말한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학자는 유럽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고추와 한국 고추가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생물학적 근거를 들기도 한다.
[한식에 혁명적 변화…한민족의 힘] 학자들의 논쟁이 어찌 됐건, 지금 우리는 ‘고추 없는 식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핵심 식재료로 자리 잡았다. 만약 임진왜란 무렵 들어왔다면 고추는 겨우 4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우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온갖 음식에 양념으로 들어가 맵고 달고 시기도 한 감칠맛을 내고, 허여멀겋던 김치를 맛깔스러운 붉은색으로 물?이며 가히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고추장이라는 훌륭한 발효음식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 발효식품인 된장에 들어가 독소를 제거해줬을 뿐 아니라 장맛을 나쁘게 하는 잡귀의 침입까지 막아줬다. 어디 음식뿐이랴. 귀한 자식을 낳은 집 대문 금줄에 걸려 잡귀를 쫓아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 집이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는 고추 입장에서 한 말이요, 사람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 짧은 시기에 이렇게 다양한 이용법을 개발해냈으니 우리는 참으로 놀랍도록 창의적인 민족이다. 고추가 전 세계에 보급됐지만 한국처럼 다용도로 활용하는 나라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볶음·조림·튀김·절임·고명·양념·장 등등. 그래서 고추가 들어간 음식은 어느새 한식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고, 해외에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은 고춧가루 팍팍 친 얼큰한 국물부터 찾는다. 오히려 동양에 고추를 전해준 유럽에 가서 고추가 들어간 음식을 보면 ‘서양 사람들도 고추를 먹네’라며 신기해할 정도다. 정작 우리에게 고추를 전해줬다는 일본에서도 고추의 쓰임새는 초라하기만 하다. 요리나 절임에 조미료로 조금 사용하는 정도다.
그래도 고추는 세계인이 애용하는 식재료임에는 틀림없다. 고추의 원산지인 멕시코는 고추의 종류도 많고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역시 고추를 향신료로 사용한 역사가 길며 헝가리, 중국 쓰촨성과 후난성,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등에서도 많이 소비되고 있다. 전 세계 생산량과 소비량만 따지면 고추는 같은 향신료인 후추의 20배가 넘는다.
[고통 주고 행복 주는 ‘캡사이신’] 1만 년 가까운 재배 역사를 가진 고추는 세계적으로 그 종류가 무지막지할 만큼 다양하다. 크기도 맵기도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데, 피망처럼 전혀 맵지 않은 고추가 있는가 하면, 방울토마토처럼 생긴 고추도 있다.
그중 우리가 흔히 먹는 고추는 청양고추·풋고추·오이맛고추·꽈리고추·피망 정도다. 매운 고추의 대명사 청양고추는 양념용으로 주로 사용하고, 풋고추는 아직 덜 익어서 푸른 빛의 고추를 통칭한다. 오이맛고추는 풋고추처럼 먹되 매운맛이 거의 없도록 개발된 생식용 고추다. 꽈리고추는 아삭함과 매운맛은 적지만 질감이 연해 익혀서 반찬으로 만들기에 알맞다. 피망은 매운맛이 전혀 없고 단맛이 난다.
고추엔 단맛·신맛도 있다지만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매운맛이다.
이 매운맛을 내는 물질은 캡사이신인데, 주로 고추 껍질에 들어 있다. 몸에 좋은 약초가 입에 쓴 것처럼 매운 물질 역시 유익한 점이 많다. 소화액 분비를 자극해 소화를 촉진하고, 감기와 기관지염에도 좋다. 캡사이신은 또 지방 축적을 줄이면서 지방 연소를 도와 체중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된 위 세포의 염증을 억제한다는 실험 결과도 있으며,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며 면역력을 강화한다고도 알려져 있다.
매운맛은 사실 맛이라기보다는 통증이다. 미각으로 느?는 게 아니라 혀와 입안 점막에 고통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통증을 주는 캡사이신은 역설적이게도 진통 효과를 낸다. 통증이 느껴지면 뇌에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자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엔도르핀은 통증을 줄이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매운 음식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팁. 매운 고추를 먹고 혀가 아플 때 물을 먹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캡사이신은 지용성이므로 차라리 식용유를 살짝 머금어 혀끝에 돌리면서 캡사이신을 녹이는 게 과학적인 방법이다. 매울 때 우유를 먹는 것도 같은 원리다. 우유 속 지방이 캡사이신을 녹여준다.
이 매운맛은 과거 전쟁터에서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추를 태우면 나는 매콤한 연기를 적에게 날려보내 적군이 눈을 못 뜨고 우왕좌왕할 때 공격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엔 캡사이신이 들어 있는 스프레이가 여성들의 호신용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청양고추보다 30배 매운 ‘귀신고추’] 우리에게 매운 고추의 대명사는 청양고추다. 너무 매워서 청양고추 하나를 다 먹지 못하는 한국인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 청양고추가 해외로 나가면 감히 명?도 내밀지 못한다. 고추가 맵기로 유명한 나라는 인도·태국·멕시코 등인데, 인도의 부트졸로키아가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로 2007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인도 사람들이 ‘귀신고추’라고도 부르는데, 맵기가 청양고추의 무려 30배에 이른다고. 태국의 하바네로 고추는 청양고추의 15배 정도, 그 밖에 방글라데시의 도셋나가, 태국의 쥐똥고추도 맵기로 유명한 품종이다.
물론 고추에 캡사이신만 있는 건 아니다. 비타민C가 감귤의 9배, 사과보다는 18배나 많다. 하루에 고추 3개만 먹어도 비타민 필요량을 섭취할 수 있는 셈이다. 빨갛? 익은 홍고추엔 비타민C가 더 많아져 사과의 23배가 된다고 한다. 그 밖에 라이코펜과 카로틴 같은 항산화물질도 들어 있고 엽산도 풍부하다. 반면 칼로리는 낮아 고추는 이래저래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채소다.
[고추보다 매운 인생살이, 고추로 스트레스 ‘확~’] 고추 고르는 방법은 종류별도 다르다. 풋고추는 과피가 두꺼우면서 연하고 짙은 녹색을 띠는 게 맛이 좋다.
손으로 꺾어봐서 툭 하고 끊어지면 신선한 고추다. 풋고추는 7월 이전 것은 매운맛이 강하지만 요즘 나오는 것은 덜 매운 편이다. 홍고추는 색이 균일하고 ?택이 강하면서 꼭지가 신선한지를 확인한다. 과피가 두껍고 통통한 것이 씨가 적다.
건고추는 표면이 매끈하고 주름이 없는 게 잘 마른 것이다. 색깔이 선명하며 윤기가 반지르르하고 꼭지가 잘 붙어 있는 것을 사면 된다. 꽈리고추는 매운 걸 좋아한다면 끝이 뾰족한 것으로, 맵지 않은 걸 선호한다면 끝이 동글동글한 모양을 선택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만져보는 것이다. 크고 단단한 고추보다 작고 말랑말랑할수록 덜 맵다.
비닐하우스 덕분에 고추는 1년 내내 시장에서 볼 수 있다. 그래도 모든 농산물은 제철에 사야 맛있고 값도 싸다.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은 뒤 한 번에 쓸 만큼씩 비닐 봉지에 공기를 빼고 밀봉해 냉장고에 넣거나, 살짝 쪄서 말린 뒤 밀봉해 냉장 보관하면 맛도 유지되고 비교적 오래 보관할 수 있다. 양념용 풋고추는 한꺼번에 사 어슷 썰거나 송송 썬 다음 키친타월로 물기를 없애 냉동실에 넣어두면 필요할 때마다 간편하게 쓸 수 있다.
매운맛의 대명사 고추, 하지만 그보다 더 매운 게 우리 인생살이 아니겠는가. 매운 고추 먹고 엔도르핀 팍팍 만들면서 화끈하게 스트레스를 날려보자.
[미니인터뷰 - 고추 재배농민 전동표 씨] 여름 고랭? 채소로 유명한 강원 홍천군 내면에서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는 전동표 씨는 마을 이장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대부분의 밭이 해발 650m 안팎으로 지대가 높아 유난히 더운 여름이면 ‘대박’ 나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지역 농작물이 불볕더위에 녹아내릴 때도, 해만 지면 서늘해지는 이곳 채소는 ‘싱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해 배추 농사가 괜찮았다는 전 이장은 올해는 더위보다 비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전한다. 동네 고추밭들이 바이러스 피해를 입어서 값이 높아도 내다 팔 물량이 많지 않단다. 그나마 전 이장네 고추밭은 300㎡(약 1000평)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아 집중 관리한 덕분에 병이 오지 않았다. 지난해와 올해는 여름채소 값이 좋아 동네 사람들 표정이 밝았지만, 출하량에 따라 값이 크게 출렁이는 농산물의 특수성 때문에 전 이장은 고추·양배추·오이·호박·산채류·오미자 등 여러 작목을 키우는 방법으로 위험을 분산하고 있다.
전 이장이 요즘 가장 신경 쓰는 일은 ‘마을 사업’이다.
“마을 길이 외길이라서 동네 사람들 불편함이 커요. 최근엔 마을에 귀농·귀촌 가구가 부쩍 늘어서 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요.” 전 이장은 “2차선으로 확장하는 일이 이장으로서 가장 큰 숙제”라고 덧붙인다.
[꽈리고추장아찌] 준비하기 - 꽈리고추 20개, 간장 ½컵, 설탕 ½컵, 물 ½컵, 식초 ½컵
만들기
1 꽈리고추는 깨끗하게 씻어 병에 담는다.
2 물·설탕·간장·식초를 팔팔 끓여서 뜨거울 때 ①에 붓는다.
3 일주일 뒤부터 먹는다.
[고추볶음] 준비하기 - 풋고추 5개, 말린 표고버섯 3개, 쇠고기 안심 100g, 고기 양념(간장 1큰술, 설탕 ½큰술, 후추 약간), 간장 1큰술, 설탕 ½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만들기
1 표고버섯은 불? 기둥을 떼어내고 갓만 잘게 썬다.
2 잘게 썬 표고버섯과 쇠고기에 고기 양념을 넣고 잘 섞는다.
3 풋고추는 씨를 털어내고 가늘게 채 썬다.
4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②를 넣어 볶다가 ③을 넣고 간장·설탕·다진 마늘을 넣어 한 번 더 볶는다.
5 참기름을 살짝 둘러준다.
[그릴드페퍼] 준비하기 - 오이맛고추 7~8개, 볶음용 기름 2큰술, 간장 2큰술, 맛술 2큰술, 청주 2큰술, 가쓰오부시 약간
만들기
1 팬에 기름을 두르고 오이맛고추를 돌려가며 굽는다.
2 ①에 간장·맛술·청주를 넣고 조린다.
3 접시에 담고 가쓰오부시를 뿌려준다.
[고추장물] 준비하기 - 풋고추 10개, 청양고추 3개, 중멸치 ½컵, 물 1컵, 멸치액젓 2큰술, 국간장 1큰술, 맛술 1큰술, 참기름 약간
만들기
1 고추는 모두 잘게 썬다.
2 멸치는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다.
3 팬에 멸치를 볶다가 ①과 물·멸치액젓·국간장·맛술을 넣고 푹 끓인다.
4 참기름을 조금 넣어 마무리한다.
[꽈리고추콩찜] 준비하기 - 꽈리고추 20개, 콩가루 ½컵, 간장 2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다진 파 1큰술, 깨소금 ½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만들기
1 꽈리고추는 씻어 콩가루를 골고루 묻힌다.
2 ①을 김 오른 찜기에 올려 3분간 찐다.
3 간장·다진 마늘·다진 파·깨소금·참기름을 넣고 잘 버무린다. /전원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