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15.- 토마스 만
이제 '말'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할까요?
말이란 감정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감정을 냉각시켜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솔직하게 말해, 문인이 문학적 언사를 통해 감정을 신속하게
대충대충 처리해 버리는 데에는 무언가 속셈이 있지 않을까요?
찬바람이 날 정도로 냉정하고 괘씸할 정도로 뻔뻔한 속셈 말입니다.
당신의 가슴이 너무도 벅찬 감격에 휩싸일 때가 있지요?
무언가 감미롭거나 숭고한 체험으로 인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감동에 휩싸여 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하지요?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문인을 찾아가십시오.
그러면 만사가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정돈될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문제를 분석하고 공식화한 다음 여기에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여 당신에게 전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문제가 영원히 처리되어,
당신은 여기에 다시는 관심을 가질 표요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도 그는 이에 대한 사례를 전혀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마음도 가벼워지고 열도 내린 상태에서 맑은 정신으로 집에 돌아가게 될 것이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제껏 그따위 문제를 놓고 그토록 달콤한 걱정에 휘말려 있었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이처럼 냉정하고 자만심에 찬 협작꾼을 진심으로 옹호할 작정이십니까?
일단 말로 표현된 것은 처리된 것이다, 이게 바로 문인들이 내세우는 신조입니다.
전세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으로 전세계는 처리되고 구원된 것이 되며
따라서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지요.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허무주의자가 아니기에..."
"당신이 허무주의자가 아니락요..."
리자베타가 끼여들었다.
마침 차를 뜬 스푼을 입에 가져가려던 참이었던 그녀는
그런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자, 진정하세요. 리자베타, 저는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감정과 관련하여 저는 허무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문인이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삶이란 말로 표현되고 '처리'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것,
부끄러움 없이 계속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제 아무리 문학이 삶을 구원하더라도 삶은 이와 관계없이 계속해서 죄를 범할 것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모든 행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죄이니까요.
이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리자베타.
제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일종의 고백처럼 저는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을 혼자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세상 사람들은 제가 인생을 증오한다, 무서워한다, 경멸한다,
혐오한다고들 말하기도 하고, 이에 관한 글을 써서 지상에 발표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말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쭐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런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삶을 사랑합니다.
웃고 계시군요.
리자베타, 왜 웃고 계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문학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쎄자레 보르지아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모델로 삼았던 지략이 뛰어나고 광포했던 정치가;역주)라든가
또는 그를 주창자로 떠받드는 여하한의 주정뱅이 철학도 머리에 떠올리지 않기 바랍니다!
쎄자레 보르지아 같은 인간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사람을 조금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어째서 그따위 괴상하고 악마적인 존재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숭배하려 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비록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물이긴 하지만
'삶'은 피로 얼룩진 거대한 전쟁터나
광포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삶'이란 비정산적인 인간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삶'이란 정상적인 것이고 존경할 만한 것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것으로 우리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세계입니다.
또한 평범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을 띤 것이 바로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