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들아이와 둘이 저녁을 먹는다.
아들아이가 주문한 핏자를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PC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PC. Politically Correct의 약자로,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번역한다.
내가 이해한 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과거 강한 집단에게 억눌려왔던 약자의 집단이 제 목소리를 내게 하자는 운동이다.
그 소수 집단은 남자에 대해 약자였던 여자이기도하고, 인종차별을 당했던 흑인과 소수민족이기도 하고, 남다른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핍박받거나 소외되었던 트랜스젠더이기도 하다 (넓게는 LGBTQ를 포함한다).
이런 의식을 강하게 갖는 상태를 WOKE라고 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깨어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보수진영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AWAKE를 내세운다.
정치적으로 깨어 있되 진보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전통적으로 백인이 맡았던 역을 흑인이 맡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발레 <지젤>의 주인공을 흑인 맡아서 화제가 된 적이 있고, 근래 개봉된 <인어공주>에서 흑인 여배우가 에어리얼 역을 맡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교육에서도 남녀의 역할이나 동성애, 흑인 문제 등을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를 두고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고 보수성향이 강한 플로리다에서는 주지사가 공립고등학교에서 흑인 역사를 가르치는 과목을 폐지시키기도 했다.
아들 아이가 PC를 꺼낸 배경은 아이가 다닌 학과의 교수진이 대폭 교체되었는데 그것을 주도한 측이 PC를 강하게 밀어부침으로써 별 자격이 없는 교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력 있는 교수들이 다른 학교로 대거 이동했고, 그 결과 학과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입학생 수준도 낮아졌다는 얘기다.
"PC도 그렇고 트랜스젠더 문제도 그렇고 그쪽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논리적이기보다 감정적인 반응이 많아. 가령 트랜스젠더에게 남자가 뭐라고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말로 반박하면서 정작 뭐라고 생각하는지는 얘기하지 않아."
아들의 불만이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아들아이는 또래에 비해 읽은 것도 많고 능력도 있는 편이라서인지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못지 않게 개인의 능력을 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아들 아이와 대화할 때 나는 일부러 약간 반대 입장을 대변할 때가 많다. 생각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다.
"PC의 출발점은 좋은 의도였는데 이제는 좀 과도하게 무차별적으로 나간 면이 있지. 그런데 트랜스젠더도, 흑인 등 소수민족도, 더 나아가 여자들 전체가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지. 과거에 분명히 차별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니까.
요즘이야 적어도 미국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는 분위기지만, 90년대 전에는 공개적으로 얘기하기 쉬쉬하는 분위기였어. 90년대 들어와서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분출될 시점이 되었다는 거였지.
그리고 아빠가 요즘 읽고 있는 미국 소설에서는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데도 여자 주인공이 여전히 일과 아이 양육을 병행하느라 지쳐서 자기를 잃어버린 듯한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와. 한국도 미국도 여자에게는 아직도 힘든 사회라는 거지.
그런 배경을 감안할 때 그런 피해자 또는 약자들이 가슴 속 깊이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봐.
다만 그것이 지나쳐서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히는 데까지 가면 문제가 되는데, 그럴 때 적절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원칙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많은 대화가 필요하겠지. 지금은 과도기인 것 같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처럼 남자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속좁은 아이는 아니다.
"역사는 늘 한 쪽 방향으로 쏠리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지. 그러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고. 한 쪽 극단이 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깨어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핏자를 입에 넣으며 아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름대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아들 아이는 장애인단체에서 하는 공연에도 스탭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런만큼 적어도 약자를 폄하하거나 그들에 대해 편견을 가진 아이는 아니다. 다만 피해의식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싶어하는 듯하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약자의 입장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지. 그러지 않으려면 적어도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지?"
"음. 그래서 요즘 방향을 좀 바꿔서 대중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곡을 써볼까 하는 중이야. 지금까지 이것 저것 배운 건 많으니까."
"그래. 곡을 많이 써라. 그 중 어느 것이 대중에게 어필할 지 모르는 거고. 또 요즘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도 많이 높아졌으니까."
아이는 남은 핏자를 마저 입에 넣고 식탁을 치운 후 설거지를 하러 일어섰다.
https://www.youtube.com/watch?v=P8-tPCowGdY
첫댓글 마치 소피의세계나 미움받을용기 같은 책을 읽는 것 같은 대화입니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네요. 훌륭한 아드님입니다. ^^
더 긴 대화였지만 짧게 추려서 올려봤습니다. 명절 잘 보내시구요.^^
어드밴티지든 핸디든 하나만 적용해야 하는데
지금 사회는 한쪽에는 어드밴티지를, 다른 쪽에는 핸디와 패널티를 동시에 주는 느낌입니다
정반합 이 무너지고 정 만 권력을 가지는 거죠.
취업도 그렇고 주거비용도 그렇고 살기가 팍팍해지니 한쪽의 어드밴티지가 다른 쪽에는 곧바로 페널티가 되는 상황이 되었네요.
동감이에요 최근 유타주에서 PC법을 폐기했다던데 이해가 가더라고요
@빨간꼬리여우 세월이 흐르면 상황이 바뀌고 법도 바뀌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죠. 같은 맥락에서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등을 우대하던 affirmative action도 백인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소송이 많이 제기되고 있고, 승소하는 사례가 늘고 있죠.
과도한 pc주의 영화들 다 폭망했죠. 인어공주, 캡틴마블..
본문에 언급하신 여교수도 그렇고..
실력이나 퀄리티의 뒷받침 없이 어떤 이즘?에만 편승한 것들의 당연한 귀결인 듯
디즈니도 돈이 안 될 걸 예상못한 건 아닐 테지만 그만큼 사회적 압력이 컸다는 방증이겠죠.
본문에
'요즘 일부 젊은이들처럼 남자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속좁은 아이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요즘 젊은 남자애들이 충분히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만한 환경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그들이 속좁다고 생각하지 않구요.
조금 전에 막 여성 작가의 소설 하나를 읽었는데 그들은 왜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공감하는 얘기에 대해(이를테면 남녀평등이나 여성의 사회단절 따위에 대한) 끊임 없이 문제제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제기는 이미 충분하고 이제는 말씀하신 것처럼(제가 잘 이해했다면) 방향과 정밀함, 속도의 문제를 다뤄야 할텐데 말이죠.
다시 읽어보니 표현이 좀 과했네요. 여기 청년들은 별로 없겠지만 혹시 이 글을 읽었다면 사과합니다.
젊은이들의 피해의식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고요.
하지만 동시에 조금 더 넓은 시각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야 서로 대화가 되니까. 역사적 맥락을 제쳐두고 현 시대의, 또는 자기가 처한 상황의 단면만 보면 남자도 여자도 자기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여성 작가들이 그런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도 남자로서는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들로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 생각해서겠지요. 하지만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수는 없으니 구체적인 것부터 해결해나가기 시작해야겠죠.
사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심각한 문제에요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비난받을 여지가 적어) 손쉽고, 구체적인 대안이나 중간절차를 제기하는 것은 (진영 내에서도 견해 다른 쪽에게 비난받기 쉬워) 주저되는 측면도 있을 겁니다.
가령 남자만 군대가는 것에 대한 이슈를 보더라도 군대 갔다왔다고 받는 이점(과거에는 군 가산점 제도, 최근에는 군 복무기간 호봉승급제도 등)에 대해 문제제기하긴 쉽지만 제대로 된 대안을 목높이는 사람은 적습니다.
장기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해서 남자도 군대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할 뿐, 모병제 전환 전까지 '중단기적으로'는 어떤 과도기적 정책을 써야 할 지는 언급하지 않는 식이죠.
이러면 군대 문제 해결 논의는 공허하게 흐를 뿐입니다.
@수돌예돌 모병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군인이 직업으로서 매력을 갖도록 경제적 지원을 하고, 인력과 장비 운용의 효율화를 이루어야겠죠.
@호중유천 네, '논의'는 장기적 적용을 목표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논의가 끝나 모병제가 시작될 때까지의 당장의 정책, 단기전략은 어찌 해야 할까요?
필요한 병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청년 남성인구가 곧 급감할 상황에서 (장기적으로는 모병제로 간다 쳐도) 어떤 '단기' 대책이 필요할까요? 북한과의 종전협정 등 군축의 전제조건이 될 평화정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전까지 필요한 병력을 남성만으로 충당할 수 없다면 단기적으로 여성의 군 징집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아가 모병제를 도입한다 쳐도 북한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면, 평소엔 모병제를 한다 쳐도 개전 이후에는 필요 병력수를 빠르게 확보하기 위해 남자 뿐 아니라 여자도 동원할 수 있을 지도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논의 없이 '장기적으로 모병제가 바람직해요' 노래만 부르면서 중단기 정책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모병제 전환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테니 군복무 관련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의지가 있는 것인지부터 의심스럽게 되겠지요.
@수돌예돌 군사 전문가가 아니니 그런 것까지 세세히 방안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논의를 한다는 건 그런 단기 대책까지 포함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분명한 건 당장은 돈이 더 들어갈 것이라는 거겠죠. 충분한 봉급을 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군에 다녀온 사람은 다 알겠지만 쓸데없이 낭비되는 예산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안도 포함해야겠죠.
지금으로서는 미국처럼 사관학교를 거친 엘리트 직업군인과 그렇지 않고 일정 기간 훈련을 거친 후 배치되는 일반 직업군인으로 대략 구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