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의 이해 / 신정민 힘껏 잡아당겨 한없이 길어진 장방형 벽에 붉은 칠을 하고 있다 지우는 일인가 거듭나는 일인가 모든 벽이 문을 향하고 있음을 덧칠은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으깬 잇꽃과 잘 말린 암컷 연지벌레 양동이가 그를 따라다닌다 극한 상황에서 더 붉어진다는 안료 색은 색을 부른다 쉽거나 한가로워 아무것도 아닌 일 붉은색은 더 붉은색으로 조금 더 분명해진다 정신이라는 입체, 보지 못한 평면들을 위해 젖은 습자지 같은 오늘이 펼쳐지고 있다 칼에 찔린 짐승들이 뛰어다닌다 솟구치거나 낭자해진 시간들이 붓을 쫓아다닌다 까마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비린내 벽이 태어난다 면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펼치는 것이라고 서두르지 않는 의식 칠해야 할 벽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다 - 《시산맥》 2023년 가을호 --------------------------
* 신정민 시인 1961년 전북 전주 출생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티벳 만행』 『나이지리아의 모자』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의자를 두고 내렸다』 외. 2020년 최계락문학상, 2022년 지리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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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물체나 대상은 모두 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면들로 이루어진 어떤 도형과도 같다. 겉으로 보기에 면은 평면적으로 감지되지만, 면이 색이나 그림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 입체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면은 겉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처럼 단순하지 않다.
신정민 시인의 시 「면의 이해」는 면이 가지고 있는 평면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허물어 입체적인 삶이나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시의 중심 이미지인 면은 “힘껏 잡아당겨/ 한 없이 길어”지는 면이라는 점에서, 물리적 차원을 뛰어 넘어 추상적이며 상징적인 차원으로서의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화자가 바라보는 면은 누군가에 의해서 붉은 칠이 되고 있는 면이다. 그런데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관해보면, 여기서 붉은 색은 단순히 색상의 차원을 넘어 그동안 인간의 삶과 역사가 펼쳐온 질곡의 서사와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붉은 색은 “으깬 잇꽃과 잘 말린 암컷 연지벌레”의 생명이 담보된 색이기도 하고, “칼에 찔린 짐승들”이나 “솟구치거나 낭자해진 시간들”이라는 표현에서 느껴지는‘피’의 색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는 끝없는 전쟁으로 이루어진 피의 역사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벽에 붉은 칠을 하는 행위는 역사나 시간이라는 면 위에 생명이나 피의 서사를 그려나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2연에서 화자가 이러한 행위를 “지우는 일인가/거듭나는 일인가”하고 반문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 내포되어 있다.
“모든 벽이 문을 향하고 있”듯이 역사나 시간이라는 벽 역시 시작과 끝이라는 문을 향하고 있다. 화자가 붉은 색 안료를 “극한 상황에서 더 붉어진다는 안료”로 정의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 인류가 경험해 온 변화무쌍한 역사성을 암시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6연의 “색은 색을 부른다/ 쉽거나 한가로워 아무것도 아닌 일/ 붉은색은 더 붉은색으로 조금 더 분명해진다”는 진술은 피가 피를 부르던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어 오면서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는 점점 더 강화되어 온, 아이러니한 인류의 역사를 상기시켜 준다.
지금껏 인류를 지탱해온 “정신이라는 입체”는 아직 펼쳐지지 않은“보지 못한 평면”이라는 시간이 역사의 구체적인 색을 입고 이룩해놓은 것들이다. 화자는 이러한 질곡의 역사가 숨어있는‘면’을 통해서 “까마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비린내”를 느낀다. 이 시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시간이라는 면 위에 역사의 색을 덧입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벽과 면은 끊임없이 태어난다. 그런데 삶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칠해야 할 벽은 자꾸 길어진다. 그 벽에 무슨 색을 칠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영원히 인류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 박남희 시인(평론가) / 계간 <시인시대> 202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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