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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앙헬 페레스 데 사베드라의 희곡 <돈 알바로 또는 운명의 힘>
대본 피란체스코 마리아 피아베(초연판) /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개정판)
초연 1862년 페테르부르크 황실 극장(초연판) / 1869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개정판)
배경 18세기 중엽 스페인 세비야와 이탈리아(밀라노 개정판에 의함)
<2021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 190분 / 한글자막>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주빈 메타 지휘 / 카를루스 파드리사 연출
돈 알바로........................................식민지 잉카제국 왕족의 후예................................로베르토 아로니카(테너)
돈 카를로 디 바르가스..............칼라트라바 후작의 장남...........................................아마로투브신 엔크바트(바리톤)
돈나 레오노라 디 바르가스.....칼라트라바 후작의 딸. 돈 카를로의 여동생.....사이오아 헤르난데스(소프라노)
칼라트라바 후작...........................스페인의 귀족..............................................................알레산드로 스피나(베이스)
수도원장.....................................................................................................................................페루치오 푸를라네토(베이스)
프레치오실라.................................집시 여인.......................................................................아날리사 스트로파(메조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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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덕션 노트 ===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2021년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실황
시공간을 넘나드는 파드리사의 무대와 주빈 메타의 묵직한 지휘가 만나다
베르디 오페라 중에서 가장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하는 <운명의 힘>은 러시아 황실 위촉으로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지만 통상 1869년 개정판이 사용된다. 잉카 제국의 후손인 알바로와 스페인 귀족의 딸 레오노라 사이의 사랑은 그녀 부친의 우연한 죽음을 초래하고, 레오노라의 오빠 카를로는 복수의 일념으로 두 사람을 추적한다. 그런데 본 실황에서는 뜻밖에도 기계장치를 애용하는 카를루스 파드리사와 그의 사단인 라 푸라 델스 바우스가 연출을 맡아 시공간을 뛰어 넘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영화 <제5 원소>의 오페라 장면이 떠오른다고 할까? 하지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일찍부터 이 오페라의 최고 해석자였던 주빈 메타가 탄탄한 지휘를 펼치기 때문이다. 전통과 혁신이 제대로 만난 실황이다.
<운명의 힘>의 1869년 개정판은 베르디가 리코르디 출판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으로, 원래 대본을 안토니오 기슬란초니가 크게 수정하여 많은 차이가 있다. 서곡이 멋지게 확대되었고, 3막 2장의 결투 장면은 개정판에서 순찰병이 제지하여 중단된다. 4막 2장의 차이가 가장 큰데, 초판은 카를로와 레오노라가 운명적으로 마주쳐 칼에 찔린 레오노라는 알바로 품에서 죽고, 알바로는 절벽에 투신하여 세 주인공 모두 죽는다. 반면 개정판에서는 수도원장, 레오노라, 알바로의 마지막 삼중창 속에 알바로는 살아 남는다.
주빈 메타가 젊은 시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녹음한 <운명의 힘> 서곡은 대단한 명연이었다. DVD와 블루레이 시대에 접어들자 메타는 피렌체와 빈의 실황 영상에서 각각 지휘를 맡았고, 이번에는 피렌체에서만도 두 번째이자 전체로는 세 번째로 또 다른 <돈 카를로> 영상에서 지휘한다. 출연자 중 스페인 소프라노 사이오아 에르난데스(레오노라)는 레나타 스코토와 몽세라 카바예의 제자였으며, 로베르토 아로니카(알바로)는 베르디와 푸치니 오페라에 잔뼈가 굵은 이탈리아 테너다. 가장 주목할 출연자는 1986년생인 몽골의 젊은 바리톤 아마르투브신 엔크바트(돈 카를로)다. 유수의 콩쿠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현재는 유럽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바리톤의 한 사람이다.
바르셀로나 출신의 무대연출가 카를루스 파드리사(1959-)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오페라 연출가로는 스페인의 발렌시아 극장에서 주빈 메타 지휘로 공연된 바그너의 <반지 4부작>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기계장치와 첨단 설비를 이용한 현란한 무대와 동선이 그의 특기다.
=== 작품 해설 === <다음 클래식 백과 / 이진경 글>
운명의 힘
주세페 베르디(1813~1901)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 오페라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으로 《운명의 힘》은 초연부터 어마어마한 호응을 얻은 베르디의 성공작 중 하나이다.
가혹한 운명의 수정판
《운명의 힘》에 대한 베르디의 열정은 상당했던 것 같다. 그는 페테르부르크까지 가서 초연의 제작을 직접 감독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작곡가는 레오노라 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마음에 들지 않아 교체를 요구하며,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무대연습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초연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고, 베르디는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베르디는 이 초연작품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작곡가는 리코르디의 수정 권유에 동의하며 작품을 수정하였다. 수정본은 《아이다》의 대본가였던 안토니오 가슬란초니에게 부탁하였다.
오페라 수정판은 원전판과 많이 달라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서곡과 줄거리이다. 간략했던 서곡은 신포니아로 확대되었으며, 4막 피날레의 줄거리가 바뀌었다. 원작은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죽는 내용인데, 카톨릭 국가에서 사제인 알바로가 자살을 하는 결말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수정판에서는 알바로의 자살 장면이 삭제되었다. 이 결말은 세 명의 주인공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에서 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으로 덜 가혹해 보인다. 그러나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은 한 남자의 운명은 그의 미래를 생각할 때 훨씬 더 가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명의 기구한 운명: 우연이 만들어 낸 비극
이 오페라의 배경은 18세기 중엽, 스페인 세비야와 이탈리아이다. 스페인의 대 귀족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 레오노라는 집에서 연인 알바로와의 결혼 반대로 가출한다. 알바로와 함께 떠나는 레오노라 앞에 후작이 나타나 알바로에게 결투를 신청하며 그 과정에서 알바로는 실수로 후작을 죽이게 된다. 후작의 아들 카를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알바로와 누이 레오노라를 찾아다닌다. 도망 중 레오노라와 헤어진 알바로는 스페인 군에 입대하고 싸움이 붙은 카를로를 구해주게 된다. 전쟁 중에 다친 알바로가 치료를 받는 동안 카를로는 알바로가 맡긴 소지품에서 레오노라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그가 자신의 원수임을 알게 된다. 카를로는 알바로에게 결투를 신청하나 알바로는 오해임을 말한다. 순찰병이 그들의 결투를 제지하고 알바로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카를로는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알바로를 찾아내 결투를 신청한다. 카를로는 칼에 찔려 중상을 입는다. 알바로는 레오노라가 은신해 있는 동굴로 뛰어가 카를로의 중상을 알린다. 레오노라는 카를로를 돕기 위해 가지만 카를로는 그녀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다. 남매는 결국 모두 숨을 거두고 알바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무거움 속의 단비
여타 베르디의 오페라가 그러하듯 《운명의 힘》 역시 비극적이다. 여기에 세 주역의 목소리는 무거운 드라마틱한 목소리를 요구하여 오페라는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간다. 하지만 오페라가 막연하게 어둡게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베르디는 무거운 오페라에 웃음을 선사하는 단비 같은 역할을 하는 코믹한 조연을 넣었다. 전쟁터의 집시 여자 프레치오실라와 멜리토네 수도사가 그렇다. 이처럼 비극에 코믹한 역할을 넣은 것은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르 역을 넣은 것으로 이미 시도한 바가 있다. 〈운명의 힘〉 역시도 코믹한 역을 집어넣은 베르디의 과감한 시도가 엿보인다. 어두운 분위기에 맞지 않는 코믹 역할이지만, 대가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어색함 없이 녹아 들어가 작품에서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
서곡, 알레그로 아지타토 에 프레스토
이 곡은 기존의 형식을 완전히 무시하여 극중의 주제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드라마 전체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곡으로 연주회에서 독립적으로도 많이 연주된다.
2막 2장, 레오노라의 아리아 ‘성모님,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Madre, pietosa Vergine)’
알바로와 헤어진 레오노라는 수도원에 당도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이 아리아는 성모님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비는 극적인 소프라노 아리아이다. 아리아 중간에 반주로 깔리는 합창이 레오노라의 심정을 더욱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다. 절망적이고 슬픈 상황에서 호소력 있는 선율이 매력이다.
3막 1장, ‘오, 천사의 품으로 올라간 그대여(O tu che in seno agli angeli)’
도망 중 레오노라와 헤어진 알바로는 군에 장교로 입대한다.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된 알바로는 사랑하는 레오노라가 죽었다고 믿는다. 알바로는 이에 절망하여 자신의 불행과 희망 없는 앞날을 노래한다.
3막 1장, 카를로의 카바니타 ‘이 속에 내 운명이(Urna fatale del mio destino)’
아마도 이 오페라에서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일 것이다.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알바로가 수술을 받으러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홀로 남은 카를로는 알바로가 건네 준 상자가 열려 있는 것을 보며 상자 안에 수상한 것이 들어 있음을 직감하며 불안한 심정을 노래한다. 결국 상자 안에 레오노라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카를로는 알바로가 자신의 원수임을 알게 된다.
4막 2장, 레오노라의 아리아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Pace, pace mio Dio)’
수도원 뒷산에 위치한 동굴에 숨어 사는 레오노라는 알바로를 잊지 못하는 자신에게 죽음이라는 평화가 오기를 기도한다. 레오노라의 감정이 발산되는 리리코 스핀토 소프라노의 대표적인 아리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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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1년 8월 29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운명의 힘
스페인 작가 데 사베드라의 희곡 <돈 알바로 또는 운명의 힘>을 토대로 한 오페라
186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거의 모든 오페라는 운명의 힘에 휘둘리는 등장인물들의 기막힌 비극을 그려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운명의 힘]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작품은 운명으로 얽힌 젊은 주역 세 사람이 모두 파멸하는 가장 처절한 비극입니다. 스페인 작가 앙헬 페레스 데 사베드라의 희곡 [돈 알바로 또는 운명의 힘]을 토대로 한 이 오페라는 러시아 궁정의 의뢰로 186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작곡시기로 보면 [시몬 보카네그라], [가면 무도회], [돈 카를로]와 함께 분류됩니다. 가장 인기 있는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나 [라 트라비아타]에 비해 관현악이 훨씬 깊어지고 발전한 시기의 작품이죠.
이 오페라는 어떤 장면보다도 서곡이 유명합니다. 금관악기가 운명의 타격을 표현하는 듯한 장중한 음으로 곡을 열면, 현악기들이 휘몰아치는 운명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뒤이어 목관악기가 남자주인공 돈 알바로의 구슬픈 테마를 연주합니다. 그에 이어지는 현악기의 트레몰로는 여주인공 레오노라의 간절한 기도와 비극적 운명을 나타냅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곡은 점점 박진감이 넘치고 팀파니와 심벌즈 등의 타악기까지 가세해 밝고 힘찬 분위기로 전진해가지만, 결국 이 모든 역동성과 파워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운명의 힘의 승리를 말해줍니다.
운명의 첫 번째 일격 : 사고에 의한 살인
1막. 스페인의 대 귀족 칼라트라바 후작의 딸 레오노라는 잉카 제국 왕가 혈통인 돈 알바로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후작이 두 사람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자 레오노라와 알바로는 도망가서 결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알바로의 권총이 격발되는 사고로, 후작은 총을 맞고 죽어가며 딸을 저주합니다. 알바로와 레오노라의 사랑의 이중창을 통해 오페라에 흔치 않은 드라마틱 소프라노와 드라마틱 테너의 팽팽한 대결을 체험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2막.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는 아버지인 후작의 원수를 갚으려고 변장을 한 채 동생 레오노라와 알바로를 찾으러 다닙니다. 집시 여인 프레치오실라가 여관 손님들 앞에서 참전(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전쟁)을 독려하는 노래 ‘북소리에 맞춰'를 노래하는데, 카를로는 남장한 동생을 여관에서 발견하고 혹시 레오노라가 아닌가 의심하죠. 여관에 묵는 사람들이 신분을 물으니 카를로는 가짜 이름을 대며, 마치 친구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인 것인 양 꾸며 자기 집안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2막 2장에서는 교회음악의 장중함도 맛볼 수 있습니다. 레오노라는 자기 집안을 잘 아는 과르디아노 원장신부를 찾아 바위산 속 수도원으로 갑니다. 수녀원에 가면 오빠 카를로가 금방 찾아낼 것 같아서죠. 수도원장은 그녀의 신분과 가족사를 알면서도 수도원 입회를 허락하고, 레오노라는 남자 수도복을 입고 입회예식에 참례합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도자는 바위 동굴에서 혼자 수행을 할 것이니 접근 말라’고 다른 수도자들에게 일러둡니다. 레오노라가 부르는 아리아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여’와 라틴어로 부르는 수도자들의 합창이 어우러지면서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목숨처럼 사랑하던 사람과 생이별한 채 수도의 길에 들어선 여주인공의 고통과 상처가 관객을 전율하게 하는 음악입니다.
운명의 두 번째 일격 :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다
3막입니다. 이탈리아 전선에 와서 싸우고 있는 알바로는 자기를 떠난 레오노라가 틀림없이 죽었다고 믿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암담한 미래를 탄식합니다('오, 천사들과 함께 있는 그대여'). 오로지 죽음을 갈망하며 몸을 내던져 싸운 그는 어느 새 전쟁터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알바로는 과거를 회상합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스페인 정복자들의 손에서 민족을 해방시키려고 잉카의 마지막 왕족과 결혼했지만, 감옥에서 알바로가 태어난 뒤 아내와 더불어 처형되었습니다.
휴식시간에 병사들이 도박을 하다 싸우고, 알바로는 거기서 위기에 처한 장교를 구해줍니다. 그가 바로 레오노라의 오빠인 카를로지만, 알바로와 카를로는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모르는 채로 영원한 우정을 맹세합니다. 곧 다시 전투에 나간 알바로는 중상을 입고 돌아오는데요, 카를로는 알바로가 맡긴 편지상자에 기묘한 예감을 느껴 그가 수술 받는 동안 상자를 열어봅니다(‘이 안에 내 운명이'). 그 안에서 자기 여동생 레오노라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알바로의 정체를 확인한 카를로는 곧 알바로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그러나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고, 삶에 깊은 회의를 느낀 알바로는 군복을 벗고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한편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온 집시 프레치오실라는 이곳에서 다시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독려하는 ‘라타플란(Rataplan)’을 노래하며 극의 분위기를 띄웁니다. 이런 방식으로 베르디는 19세기 시민사회에서 ‘전쟁과 교회의 역할’, ‘기도와 세속적 소음의 대비’ 등의 주제들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운명의 세 번째 일격 : 추적과 재회 그리고 결투
5년이 지났습니다. 4막입니다. 알바로는 이제 수도원에서 ‘라파엘 수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알바로를 추적하던 카를로는 마침내 그를 찾아내 결투를 청합니다. 그러나 5년 간 수행을 하며 분노와 회한을 정리한 알바로는 서곡에 등장하는 알바로의 테마가 구체화되는 "어떤 위협도 욕설도 바람에 날려가리라"며 결투를 피합니다. 그러나 따귀를 때리며 모욕하자 결국 알바로도 칼을 빼들며, 둘은 결투를 하러 바위동굴 앞으로 갑니다.
오발된 권총의 적중,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마주치게 되는 우연의 연속 등의 설정 때문에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에서 ‘인물과 사건의 비현실성’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디는 이 전체의 내용을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현실의 메타포’로 간주했습니다.
레오노라는 그동안 바위동굴 안에서 빵과 물만 먹으며 명상과 기도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다른 수사들이 동굴 앞에 갖다놓은 빵을 가지러 나온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는 아리아 '주님, 제게 평화를 주소서'를 노래합니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알바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고, 이처럼 비참한 신세로 살아가는 것이 한스럽다는 내용입니다. 레오노라는 어서 죽음이 찾아와 평화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편 결투에서 알바로에게 찔린 카를로는 죽어가면서 종부성사를 간청하고, 알바로는 동굴 안에 사는 수사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레오노라는 알바로와 죽어가는 오빠 카를로를 함께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요. 레오노라를 알아본 카를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저주를 퍼부으며 여동생을 칼로 찌릅니다. 이때 수도원장 과르디아노 신부가 달려옵니다. 레오노라는 오빠를 용서하고 알바로에게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뒤 세상을 떠납니다. 과르디아노 신부는 ‘저주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허하게' 라고 노래하며, 세상을 떠나는 영혼을 위로합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공연되는 이 내용의 판본은 베르디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초연(1862년) 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 공연(1869년)을 위해 결말을 수정한 판본입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은 베르디는 이탈리아 가톨릭 교회의 종교적 검열과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당국의 정치적 검열을 벗어나 처음으로 아주 자유롭게, 원작 희곡에 충실한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르디는 운명의 ‘악의적인 타격’을 보여주기 위해 젊은 주인공 세 명에게 처절한 죽음을 안겼습니다. 돈 알바로는 레오노라가 죽은 뒤 수도원장과 수사들을 비웃으며 절벽에서 투신자살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베르디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내용으로 개정판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천 음반 및 영상물 (레오노라-알바로-카를로 순)
[음반] 레온타인 프라이스, 플라시도 도밍고, 셰릴 밀른스 등, 제임스 레바인 지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존 올디스 합창단, 1976년 녹음, BMG
[음반] 마리아 칼라스, 리처드 터커, 카를로 탈리아부에 등, 툴리오 세라핀 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54년 녹음, EMI
[DVD] 비올레타 우르마나, 마르첼로 조르다니, 카를로 구엘피 등, 주빈 메타 지휘, 피렌체 5월음악제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니콜라스 조엘 연출, 2007년 피렌체 시립극장 실황, TDK
[DVD] 갈리나 고르차코바, 게감 그리고리안, 니콜라이 푸틸린 등, 발레리 게르기예프 지휘, 상트페테르부르크 키로프 극장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엘리야 모신스키 연출, 1998년 마린스키 극장 실황, 스펙트럼(한글자막)
[네이버 지식백과] 베르디, 운명의 힘 [Verdi, La forza del destino] (클래식 명곡 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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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 <2011년 1월 19일 네이버캐스트 / 고 안동림 교수 글>
내 마음의 아리아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베르디 <운명의 힘>
베르디가 러시아 상크트 뻬쩨르브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 Saint Petersburg)의 마린스키극장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쓴 후 49세가 되는 해에 성공적으로 초연했으나, 그 자신은 너무 음산(陰散)하고 막이 끝나는 부분 등에 불만이 있어 7년 후에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려고 초판의 전주곡을 지금의 유명한 것으로 바꾸고 또 제2막 이후도 개정을 했다. 이 개정으로 음악극으로서 한층 다채롭고 명암(明暗)의 대조가 뚜렷하여 듣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작이 되었지만, 본래 우연한 부분이 많은 잡다한 대본 때문에 연극으로서의 약점이 오히려 조장된 점이 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초판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초연 극장에서는 초연을 복원(復元)하는 시도도 있었다. 여기 언급한 것은 개정판대로의 연주이다. 오페라는 전 4막이며 데 사아베드라(Angel de Saavedra)의 1835년 판 희곡을 피아베(Francesco Maria Piave)가 대본으로 썼다.
"죽음만이 나를 편안케 해줄 것입니다"
스페인 명문 귀족의 딸 레오노라와 잉카 제국의 왕족 피를 이어받은 돈 알바로가 함께 탈출한 날 밤, 권총이 폭발하여 레오노라의 아버지인 후작이 그 희생이 된 사건으로 이 비극의 주역들이 유랑(流浪)의 길을 떠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두 사람을 뒤쫓는 레오노라의 오빠 돈 카를로가 또 한 사람의 주역이 된다. 유랑 끝에 수도원에 들어간 알바로는 카를로에게 거처가 탐지(探知)되어 결투를 강요당하고 하는 수 없이 카를로를 찔러 죽인다. 그 후 카를로의 마지막 고백을 들고 임종의 자리를 지켜달라고 문을 두들긴 산속 바위굴에서 레오노라가 나와 다시 만난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레오노라는 오빠 곁으로 달려가나 죽어가는 오빠에게 찔려 죽는다.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가혹한 불운에
억눌려 괴로워하고 쇠약해져서,
첫날과 같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내 괴로움은 격렬(激烈)한 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랑한 건 사실입니다. 그 남자다움, 그 용기,
그토록 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 걸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 모습은
마음에서 씻어 버릴 수 없습니다.
숙명, 숙명, 숙명입니다!
한 가지 죄로 이 세상에서 헤어진다 해도
알바로여, 당신을 사랑하는 건 하늘도 알고 계신데
그 당신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다니!
오 하느님, 하느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죽음만이 나를 편안케 해 줄 것입니다.
여기서 이 나는 평화를 바랬지만 헛되었고,
오로지 고뇌뿐이었습니다.
빈약한 빵이 이 위로받지 못하는 목숨을
이어주려고 날라다 준다... 누가 왔나?
감히 이 성스러운 곳을 더럽히려는 자는
저주, 저주, 저주를 받으라!
레오노라가 고뇌보다도 죽음을 바라는, 리리코 스핀토 소프리노 최고의 유명한 노래이다. 아리아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오노라가 “감히 이 성스러운 곳을 더럽히려는 자를 저주”하지만 그 사람들은 단념할 수가 없었던 연인 알바로와 피를 나눈 오빠 카를로였다. 그리고 치명상을 입은 카를로의 검에 찔려 레오노라도 목숨을 잃는다. “죽음만이 나를 편안케 해줄 것입니다” 라는 소원은 연인을 다시 만나는 순간 뜻을 이룬 것이다. '평화'(pace), '숙명'(fatalità), '저주'(maledizione)'라는 말이 노래 속에 두세 번 되풀이 된다.
추천 CD 및 DVD
[CD] 세라휜 지휘, 밀라노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합창단(1954) 마리아 칼라스(S) EMI
세라휜(세라핀, Tulio Serafin)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능숙한 솜씨로 이 오페라의 다채로움과 극적 통일을 표현한다. 관현악의 절묘한 용법, 음악이 내뿜는 긴장감과 효과의 교묘함, 웅장한 스케일,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의 풍성한 음향 등 세라휜이 남긴 오페라 녹음 중 최고의 하나로 꼽힌다. 다만 칼라스 이외의 출연진이 각기 인물과 성격 표현이라는 점에서 들쭉날쭉하여 몰리나리-프라델리 지휘 반 같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6명의 주역이 팽팽하게 앙상블을 펼치는 가슴 벅찬 감동은 없다. 프리마돈나 오페라는 아니지만 칼라스의 노래와 세라휜의 오케스트라를 듣기 위한 음반이다.
[CD] 몰리나리-프라델리 지휘,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관현악단/합창단(1955) 테발디(S) Decca
한마디로 초호화 캐스팅의 명반이다. 아마 다시는 이만한 가수 진으로 음반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쟁쟁한 가수진의 노래에는 그저 압도될 뿐이다. 테발디와 델 모나코 그리고 시미오나토, 바스티아니니, 시에피, 코레나 모두가 전성기의 녹음이며 섬세하지만, 속에는 확고한 힘을 간직한 명창이 인상적이다. 44세로 아깝게 죽은 바스티아니니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듯한 열창(熱唱)도 가슴에 남는다. 이들을 몰리나리-프라델리의 장인적(匠人的)인 확실한 지휘가 오페라 전체를 정교하게 다듬어 나간다. 도중에 사소한 오케스트라의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있지만 그런 데에 개의치 않고 지휘자는 드라마의 정점을 향해 곧장 뻗어 올라간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참 맛을 만끽할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명반이다.
[DVD] 제임즈 레바인 지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관현악단/합창단(1984) 프라이스(S) 죤 덱스터 연출 DG
지금은 이탈리아 오페라계의 정상급 가수로 꼽히지만 아직 신인이었던 쟈코미니(Giuseppe Giacomini)가 눈에 띄는 리리코 스핀토로 알바로 역을 과시하고 있다. 또 누찌(Leo Nucci)도 그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돈 카를로 역을 노래한다. 아쉬운 것은 레오노라 역으로 한때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무대를 석권했던 프라이스(Leontyne Price)가 빛나는 목소리를 잃은 채 이 공연을 끝으로 은퇴한 점이다. 원래 독특한 노래 투로 청중의 기호가 갈렸던 소프라노이기는 했다. 연주와 연출은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오페라답게 전통적인 무대를 보여 주어 초심자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평화, 평화를, 나의 하느님 - 베르디, [운명의 힘] (내 마음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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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9.29 2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