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 검은 자산어보
서안나
다산 잘 지내시는가
손암(巽菴)이라네
나를 감싸고 있는 바다는 오늘도 엄혹하오
그대는 멀고 먼 강진에 위리안치요
나는 그대가 천리만리 걸어야 당도하는 흑산에 있다오
흑산에서의 밤은 그리운 것들 투성이오
나는 밤에 기대어 조백(早白)한 머리를 가다듬고
바람 드나드는 낡은 서실(書室)에서
갑술년의 애틋한 봄밤을 읽고 있다오
흑산도라 하면 어둡고 두렵고 음침하기까지 하니*
어둠에 대적하는 내가 미약해진다오
마음이 신산스럽고 무너지기 일쑤이니
검다는 뜻을 지닌 자(玆)를 빌려 와 자산(慈山)이라 쓰려 하네
나는 자산 바다를 한 권의 서책처럼 아껴 읽는다네
어두워지는 해안에는 바람이 저녁을 깃발처럼 높이 쳐들기도 한다네
오늘은 별불가사리를 읽었다네
별불가사리는 그 모양새가 별을 닮아
뿔이 돋은 게 심사 자주 뒤틀리는 나를 닮기도 하였다네
별불가사리처럼 나도 몸에 별이 돋아 어진 것들의 밤하늘을 빛내고 싶네
오늘은 전복을 잡았다네
전복에도 이빨이 돋은 것을 아시는가
귀한 전복은 살이 깊고 맛이 달아 날로 먹어도 좋고 익혀 먹어도 좋다네
임금께 진상하는 귀한 생물이라 자산의 바닷일 하는 이들도
함부로 입에 대지 못하는 귀한 생물이오
전복을 보면 물살보다 낮게 몸을 내려놓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네
자신만의 보법으로 느리게 가는 모습이 어진 자산의 사람들을 닮았다네
하지만 어진 사람도 독을 품을 때가 있다네
조심할 것은 봄이나 여름에는 전복에 독이 많아 중독되면
고관대작도 기름진 몸에도
종기가 부풀어 오르고 살갗이 터지기도 한다네**
나는 자산과 자별(自別)하며 대적한다네
자산을 바라보면 마치 나의 심사를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서글퍼지기도 한다네
나는 어느새 검은색에 병이 든 것 같구려
검은 것을 바라보노라면 검은색 속에 녹아든 흰빛을 보기도 하지
검은 것은 모든 빛을 다 품은 색이 아닌가
검은 것이 번져가 흰빛을 품는 것이
곧 인간 삶의 모양새와 한가지가 아닌가
검은색은 음양오행으로 물을 뜻하며 방위는 북쪽을 가리킨다네
수덕(水德)을 숭상하는 진나라 사람들은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감고 다녔다고 하지 않는가
검은색은 오행에 화(火)가 많은 이들의 화를 눌러주기도 한다네
검은 것은 유리구슬처럼 그 중심이 없다네
별불가사리처럼 온몸이 뼈라네
내 흑산도에 자산이라는 검은 이름을 붙였으니
그 검은 흑산을 마주하고 서책에
바다에서 뭍으로 오른 생물을 불러들인다오
검은 것이 자신을 캄캄하게 낮추어
하늘과 바다와 사람의 심사를 깊게 해 주니
내 붓에는 지느러미가 있어
깊은 수심 속 검은 비린 것들의 모양이며 이름이며
그 슬픔까지 적노라
자산이 물길을 품는 것이 아니라
눈 어두운 생선부터 연약한 해초들이 검은 자산을 품고 있다네
자산어보를 적다 보면
인간의 매운 눈으로 검은 것과 부딪치다 보면
문득 어둠은 여리고 비린내 나는 것들의 정신에서
흘러나오는 힘이라는 생각을 해보네
검은 곳을 걸어 우리는 어미의 몸에서 걸어 나오지 않았던가
검은 것이 나의 최초의 목소리가 빛났던 자리가 아닌가
그래서 바다는 날마다 머리 풀고 죽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것을 나는 검은 것이라 부르기로 했소
이보시게 아우, 그대에게 검은 자산 한 자락을 베어 보내니
이 밤 검은빛으로 만장하시게나
*자산어보 머리말 중에서.
**자간어보 중에서 복어魚(전복) 내용 중 일부 인용.
서안나
1990년 《문학과비평》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발달사』,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