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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찾으려고 한 떼의 느립찌기(노랑부리맵새) 새들이 날아온다. 그때 ‘착-’ 소리와 함깨 새들이 날아간다. 아이들은 달려가 푸득거리는 새를 꺼내온다. 밤에는 후레쉬를 들고 싸리나무로 엮은 둥구리로 초가지붕 밑에 잠자러 숨어 든 참새를 잡으러 갔다. 둥구리 속에 든 참새한테 물려 놓치기도 했다. 형들한테 혼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둔 밤하늘을 날아 새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때의 새들이 개울을 따라 날아오른다. 원동 대대울로 들어서서 쉬지 않고 ‘새덕고개’로 올랐다. 눈이 얼어붙어 헛바퀴가 돈다. 미끄러지기도 하며 올라간다. 다행히 산비탈을 따라 도는 구비는 모래를 뿌리고 또 햇살에 녹아 오르는데 어렵지 않다. 새덕고개는 춘천과 홍천의 경계이다. 매봉과 가리산을 잇는 능선이다. 해발 표지판은 보이지 않으나 가리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선인 걸로 봐서 꽤 높다. 고개를 올랐다 싶은데 곧바로 내리막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간다. 고개를 넘어가면 ‘조교리’다. ‘새덕’은 ‘가래울’의 막창에서 오르는 능선이다. 그렇다고 새덕골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눈이 깊이 쌓인데다가 군사보호지역이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옛길도 만나고 골짜기도 만난다. 개울가에 집들이 들어서있다. ‘대대울’은 ‘다대울’, ‘다대곡(多大谷)’이라 한다. 크고 깊은 골짜기가 많다는 말이다. 삼거리에서 막창까지는 참 길고 멀다. 물길은 가래울에서 시작된다. 대대울의 중심은 ‘가래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화전을 했다. 군부대가 들어오기 전에도 몇 가구가 살았다. 가래울 안에도 수많은 골짜기가 있으나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다만 가래울을 기억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난 것은 다행이다. 가래울어귀 얼음장 밑으로 흘러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니 골의 깊이가 짐작된다. 대대울에는 사람의 이름을 딴 골짜기가 많다. 새덕고개에서 내려오다 보면 ‘괴실’이 나온다. 괴실 아래는 ‘기봉에집골’이다. 기봉에집골에서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깊어지는 골짜기가 가래울이다. 가래울을 내려오면 ‘태봉에집골’이다. 가래울 막치기는 ‘새덕’이다. ‘큰멱자골’, ‘작은멱자골’, ‘밤나무골’, ‘서낭에뒷골’, ‘농막골’, 맞은편에 공동묘지와 ‘덕자리골’, ‘할미골’, ‘동회골’, ‘목골’, ‘부드래골’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나마 이름이 붙은 골짜기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조덕골’과 ‘대대울’의 삼거리에는 ‘해산골’이 있다. ‘삼거리’는 마을의 중심을 이루며 대여섯 채의 집들이 모여 있다. 삼거리에서 조금 내려오면 ‘다릿골’이다. 다릿골 안은 아늑하고 조용한 동네다. 다릿골도 깊다. 가리산 능선의 한축을 이루고 있어 골막까지는 한참 들어가야 한다. 다릿골안에는 ‘돼지골’, ‘해산골’, ‘밤나무골’이 ‘깃대봉’을 중심으로 갈라진다. 개울 건너 다릿골과 마주하는 골은 ‘떼끼리골’이라 한다. 뭔 뜻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집에 와 사전을 찾아보니 떼끼리는 일본말로 “てっきり”이고 ‘틀림없이, 꼭, 영락없이, 의심 없이’라고 나와 있다. 또 경상도에서는 ‘아주’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릿골’을 중심으로 마을이 나누어진다. 원동초등학교는 다릿골어귀에 있었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마을행사 때면 모여 축구도 한다. 지금은 문화체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래울과 ‘증밭치’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삼거리에서 만나고 다시 다릿골에서 흐르는 물과 합쳐 지명산 산 밑으로 돌아 흐른다. 비탈이면서 구릉을 이루는 원동의 옛길은 성황당이 서있는 고개를 넘나드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수로가 놓여있다. 가리산의 긴 능선이 가래울, 다릿골로 이어지다가 ‘갈미봉(노적봉)’을 이루며 ‘흙둔지’를 감싼다. 갈미봉 아래에는 ‘문봉리’가 있다. 갈미봉이 붓처럼 생긴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황당이 있던 ‘뒷골’은 ‘당골’이고 경로당 뒷골짜기는 ‘큰헌터울’ 그 아래골은 ‘작은헌터울’이다. 갈미봉으로 오르는 골짜기는 ‘깃대봉길’과 ‘먹석골’이다. 원동삼거리는 옛날부터 먹거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중 시골막국수는 지금도 성황을 이루는데 ‘먹석골’에서 시작된 술장사가 ‘광탄옥’이란 이름으로 다시 바뀌었다가 지금에 이른다. 원동삼거리를 지나면 ‘자은리’이다. 흙둔지와 원동 사이에는 넓은 뜰이 있는데 말 그대로 ‘너븐나들이(광탄)’이다. 44번국도가 너븐나들이를 가르며 지난다. 개울쪽으로는 논이 펼쳐지고 길 건너 산 밑으로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서있다. 큰길이 나면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고 지금은 한 계절에만 들어와 사는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흙둔지가 산밑의 둔덕이라면 너븐나들이는 평야다. 둔덕과 평야의 경계에는 ‘범바위’가 있다. 길이나면서 다 파헤쳐졌다. 아직도 범바위라 부르는걸 보면 산 어딘가 범이 숨어 있을듯하다. 정말 범이 있었을까? 우리가 말하는 한국호랑이는 백두산호랑이다. 높은 산의 숲이 우거진 곳에서 산다. 몸통길이는 173∼186㎝, 꼬리길이는 87∼97㎝, 귀 길이는 약 10㎝, 뒷발길이는 약 30㎝로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몸 전체 길이가 390㎝에 이른다. 머리가 크고 다리는 굵고 튼튼하며 귓바퀴는 짧고 둥글다. 등 쪽에 노란빛을 띤 갈색 털이 나고 24개의 검은 가로줄무늬가 있다. 배 쪽은 흰색이며 등 쪽보다 연한 빛깔의 가로줄무늬가 있다. 꼬리는 몸통의 반 정도 길이로서 연노랑 빛을 띤 갈색이며 8줄의 검은 고리무늬가 있다. 한국호랑이는 주로 해가 진 뒤부터 이른 아침까지 활동한다. 먹이는 멧돼지·노루·산양·사슴 등이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갑자기 공격하여 잡아먹는다. 여름과 가을에는 풀이나 도토리·머루·다래 등의 열매를 먹고 냇가의 물고기를 잡아먹기도 한다. 배불리 먹으면 오랫동안 굶는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바위굴에 보금자리를 만들며 나무를 잘 타고 헤엄도 잘 친다. 교미시기는 12∼3월이고 임신기간은 98∼110일이며 1회에 2∼4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4살 정도가 되면 다 자라며, 수명은 15∼25년이다. 예전에는 시베리아호랑이와 다른 종으로 분류했으나 요즘은 같은 종으로 다룬다. 최근에 경상남도 합천과 강원도 화천 일대에서 야생호랑이 발자국과 비슷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현재 과천동물원·용인에버랜드·치악산동물원·청주동물원·광릉수목원 등에서 약 30여 마리를 사육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멸종된 것으로 보이고 북한과 중국 둥베이지방, 만주, 우수리강 등지에 분포한다. 호랑이와 관련된 마을지명은 주로 바위다. 호랑이를 닮은 바위거나 바위굴에서 호랑이가 새끼를 치고 나갔다거나 호랑이가 바위위에 앉았다거나 사람을 잡아먹었다거나 하는 정도다. 실제로 호랑이를 보았냐고 하면 시퍼런 눈빛을 껌뻑껌뻑 거리며 나를 바라보더라는 정도다. 본 사람도 없다. 다만 그런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것이다. 흙둔지와 너븐나들이의 경계에 있었다는 범바위는 사라졌지만 마을사람들은 산의 형상이 호랑이라고 한다. 두촌면의 면소재지인 자은리는 진흙이 많이 나와 흙둔지라고 한다. 그러나 자은리에 대한 유래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자은의 뜻을 풀이해 보았다. 자은리는 한자로 自隱里이다. 자은(自隱)은 자회(自晦)와 비슷한 말이다. ‘자신을 숨기다’, ‘나를 감추다’, ‘스스로 감추고 나타내지 아니하는 것’으로 풀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감추려고 했을까? 숨겼다면 어디에 숨겼을까? ‘나’, ‘자신’이 뭘까? 이런 궁금증을 마음에 두고 경로당을 찾아갔다. 경로당은 두촌면보건소 옆이었다. 열댓분의 어르신들이 모여 육백을 치고 있었다. 고스톱을 치면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있다며 안친다는 것이다. 화투가 나오기 전에는 ‘진목’을 했다고 한다. 화투랑 비슷한데 주로 짓고땡을 했다고 한다. 금광에 대하여 묻자 한마디씩 입을 연다. ‘소림광산’이다. 홍천군의 지명유래에는 ‘자은 서북쪽 산에 있는 금광으로 1918년 일인 소림이 개광했다가 해방 후에 우리나라 사람이 맡은 뒤 홍천광산이라 개칭하였으나 현재는 폐광 상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소림광산을 찾아 나섰다. ‘소림광산’은 ‘미나리골’ 안에 있는 광산이다. 미나리골은 두촌초등학교 왼쪽으로 흐르는 골짜기다. 미나리골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매주골’, ‘터골’을 지난다. 매주골은 초등학교 뒷골짜기다. 매주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매주나무가 어떤 나무일까? 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들으니 야광나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야광(夜光)나무는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소교목으로 높이 10m정도 자란다. 동배나무, 아그배나무, 들배나무, 아가위나무, 당아그배나무로도 불린다. 새하얀 꽃이 밤에도 빛을 낸다 하여 야광(夜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북한에서는 매지나무라고 한다. 매주골 뒷산은 ‘진산이밑등’이라 한다. 개울건너 작은 골짜기는 ‘화채집골(시골)’이다. 매주골 어귀를 지나 올라가면 길가에 메주공장이 있다. 잘 뜬 메주 냄새가 훅 끼친다. 메주공장 앞에 개울을 건너 ‘터골’이 있다. 작은 골짜기다. 길은 양갈래로 갈라지는데 바른쪽은 ‘바른골’이다. 햇살이 잘 들어 부르기도 하지만 오른쪽에 놓여 있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비로소 ‘미나리골’이 나온다. 미나리골 안막으로 들어가면 ‘누더기골’이 있다. 미나리골에는 미나리싹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미나리싹은 ‘영아자’를 부르는 강원도 사투리다. 산기슭의 낮은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었던 나물이 최근에는 현대인의 기능성 건강채소로 주목 받고 있다. 특히 고기와 함께 쌈으로 먹으면 맛이 좋다. 줄기를 자르면 잘린 부위에서 흰 즙이 나온다. 잎은 독특한 단맛이 나며 흰 즙은 뽕잎 같은 향이 난다. 어귀를 지나 맨 안쪽의 골짜기로 들어서면 ‘광산굴’이다. 광산굴 맞은 편 산에는 지금도 아름드리 벚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때 심은 것이라 한다. 소림광산에서 금이 쏟아지자 전기가 들어오고 술집이 들어섰다. 장거리를 이루었던 자리가 지금의 우체국, 면사무소, 보건소, 경로당이 있는 자리로 길가에 길게 들어섰다고 한다. 미나리골에서 흘러온 개울물은 제련소가 있던 ‘호주말’을 지나 강으로 흘러든다. 호주말은 미나리골 어귀 건너편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호주(오스트레일리아)의 원조로 집을 지었다고 하여 생긴 마을 이름이다. 그 당시에 지었던 집은 없다. 호주말을 지나면 길은 강과 함께 긴 굽이를 돌아간다. ‘무들이구방’이다. 무들이구방에는 조그만 마을공원이 있고 그 뒤로 ‘가리산골’이 있다. 골막에서 능선을 넘으면 ‘천현리 모루골’이다. 흙둔지에 장거리가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자 흥청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마을은 전장의 중심에 들게 된다. 학교도 면사무소도 경찰서도 모두 불타고 장거리도 복구될 때까지 ‘증골(정골)’로 옮기게 된다. 당시를 그리워하며 ‘옛날에는 나도 날렸다’라는 말이 유행되기도 했다. 범바위에서 다리를 건너면 두촌중학교다. 강을 따라 내려오면 교회 아래 바위가 있다. ‘개쇠바위’다. 마을 아이들의 물놀이터였다. 바위가 개를 닮기도 하고 소를 닮기도 하여 부르던 물놀이터가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는 한적한 곳이 되었다. 그 아래쪽으로 자작나무를 심은 곳은 ‘도살장’이었다. 강을 따라 흙둔지 쪽으로는 제방을 쌓고 강 건너 44번국도 아래로는 산책로 겸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마을의 건강지킴이가 되고 있다. 흙둔지에서 놀만한 곳은 ‘항아리소’다. 지금은 보를 막아 많이 묻혔지만 항아리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두촌초등학교 교문옆에는 광복투사 이광훈 의사의 기념탑이 서있다. 이광훈 의사는 1924년 10월10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두촌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가을, 춘천중학교의 항일 학생 비밀결사인 상록회(常綠會)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학교 동료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독서운동을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전개한 독서운동은 상록회와 비슷하였으나, 상록회와 달리 겉으로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북돋우는 데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3월, 독서운동 회원이던 고제훈(高濟勳)·권혁민(權赫民)·김영근(金榮根)·원후정(元厚貞) 등이 일본의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에 분개해 춘천중학교 교정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대규모로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싸움의 규모가 커지면서 일본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한국 학생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학교의 독서운동 조직도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어 1년 동안 고문을 당한 끝에 1942년 5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단기 1년 장기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다음 여행지는 ‘정골’이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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