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물'과 '메물묵'에 얼힌 사연
(작성 중)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에는 ‘메물’과 ‘메물묵’이라는 농작물(農作物)과 음식물이 있다. 표준어(標準語)로는 ‘메밀’과 ‘메밀묵’이라는 말이다.
'메밀'에 대해서는 “화늘마 치바더보고 있다가 때 노칠라 천봉답에 ‘메물’하고 ‘죕씨’나 쫌 헐쳐노머 조을낀데(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때 놓칠라 천수답에 ‘메밀’과 ‘좁씨’나 좀 뿌려놓으면 좋을 건데)”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메밀묵'과 관련해서는 “'메물묵'이라 카머 짐치를 잘게 써린 거로 언저 묵끼나, 영념지렁을 뿌레 묵어야 지맛이 나능기라('메밀묵'이라 하면 김치를 잘게 썬 것을 얹어 먹거나, 양념간장을 뿌려 먹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메밀묵’의 원료(原料)인 ‘메밀’의 개요(槪要)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이하에서는 표준어인 ‘메밀’로 통일한다.
‘메밀’은 마디풀과의 한해살이풀로 다섯 가지 색깔로 이뤄져 있다. 꽃, 잎, 줄기, 열매, 뿌리 모두가 색이 다르다. 꽃은 하얗고, 줄기는 붉다. 잎은 푸른색에다 열매는 검고, 뿌리는 노랗다.
메밀밭
잎은 삼각형의 심장형이며, 원산지는 중국(中國) 북부라는 설이 있었으나 1992년에 야생 조상종(祖上種)이 발견되어 중국 남부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메밀’은 중국에서 천년 이상 재배되어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가꾸어 왔다.
열매는 주로 식용(食用)으로 이용한다. 메마른 땅에도 잘 적응하고, 병충해도 적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황무지(荒蕪地)에서도 쉽게 자랄 수 있으며, 구황작물(救荒作物)로서 5세기 무렵부터 재배되고 있다.
초가을에 흰 꽃이 피며, 세모진 열매는 가루를 내어 먹고, 줄기는 가축(家畜)의 먹이로 쓴다. 껍질을 벗긴 ‘메밀쌀’은 소주(燒酒)의 원료로도 쓰인다.
메밀쌀
‘메밀’은 서늘한 기후에 알맞으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산간지방(山間地方)에서 주로 재배(栽培)한다. 그리고 ‘메밀’은 생장(生長)이 매우 빨라서 씨를 뿌린 지 10~12주면 무르익는다.
농부들은 먼저 재배한 작물이 가뭄으로 고사하거나, 파종이 불가능할 경우 비상작물로 ‘메밀’을 심는다.
6-7월 하순(下旬)에 씨를 뿌리면 8-9월에 꽃이 피는데, 메밀꽃에는 특히 꿀이 많기 때문에 꿀벌의 좋은 밀원식물(蜜源植物)이 되기도 한다.
‘메밀’의 열매는 세모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완전히 여문 열매는 검은 갈색이며, 씨에는 약 70%의 녹말이 들어 있다. 옛적에는 ‘메밀쌀’로 그대로 밥을 짓거나 죽을 끓여 먹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루로 만들어 메밀묵·메밀국수·냉면 등의 원료로 많이 쓰인다.
‘메밀’은 탄수화물이 풍부하며, 단백질(蛋白質)과 지방을 약간 포함한다. 또한 철분(鐵分)을 비롯해 니아신, 티아민, 리보플라빈 등 비타민B 복합체(複合體)가 많이 들어 있다.
겨울밤이면 골목어귀에서 아련히 들려오던 ‘찹쌀~떡, 메밀묵 사아려!’. 사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찹쌀떡 장수를 놓쳐버리고, 입맛만 다시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구수한 목소리조차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졌다.
메밀묵 장수
‘메밀묵’ 장수는 일정시대(日政時代) 초기인 1920년대부터 생겨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서울의 밤거리에는 ‘도부꾼’이라는 ‘야참(밤참)’ 장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메밀묵’등을 나무상자에 넣고 자정을 전후해서 주택가를 왕래하였다.
이들이 “메밀묵 사아려!” 하고 외치고 다니면, 넉넉한 집안에서는 ‘행길(한길)’로 나 있는 창문(窓門)을 열고, 따끈따끈한 ‘메밀묵’을 사 들여 별도로 만든 양념을 해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메밀묵
그 이전인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기에는 야간통행금지(夜間通行禁止)가 엄격했기 때문에 이런 ‘야참’ 장사치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탐관오리(貪官汚吏)들과 지주들의 횡포와 착취가 극에 달해 일반서민들은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사먹을 만한 여력이 없었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파묻혀 살던 탐관오리들은 이런 비천(卑賤)한 먹거리를 입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야참장사’는 일정(日政) 때부터 생긴 것으로 추정(推定)이 되고 있다. 여기에서 잠시 어느 무명인의 ‘사라진 동네’를 게재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사라진 동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뛰놀던 동네에는
풀내음 물씬 풍기는 산과 들이
나와 함께 살았지
어제에는 그리움에
내가 자란 동네 가보니
산과 들은 간데 없고 빌딩만이
어디로 갔나 나의 추억들
별빛 아래 들리던 풀벌레 소리
달빛 아래 들리던 추억의 목소리
메밀묵 찹쌀떡 메밀묵 찹쌀떡
별빛 아래 들리던 풀벌레 소리
달빛 아래 들리던 추억의 목소리
어쩌다 가끔씩 생각이 나
고물장수 아저씨 가위 소리
흰 구름 내뿜던 소독차와
아이들 함성 소리
얘들아 놀자 얘들아 놀자
메밀묵 찹쌀떡 메밀묵 찹쌀떡
메밀묵 찹쌀떡 메밀묵 찹쌀떡
메밀묵 찹쌀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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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들이 서울로 올라온 1960년대 초에는 밤마다 ‘메밀묵’장수들이 밤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메밀묵 사려~ 찹쌀떡.” 긴 겨울밤 찬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던 메밀묵 장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스친다.
먹거리가 귀하던 그 시절 ‘메밀묵’과 ‘찹쌀떡’은 야식의 대명사(代名詞)였다. 더운물에 살짝 데워 양념간장에 찍어 먹던 소박한 ‘메밀묵’과 혀끝을 감치던 쫀득쫀득하고 달콤한 ‘찹쌀떡’ 맛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잊어지지 않는다.
메밀꽃송이
경상북도 ‘순흥(順興)’에 가면 ‘순흥묵밥’이라는 별미(別味)를 맛볼 수 있다. 소백산(小白山) 언저리에 위치한 ‘순흥’의 향토음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묵밥’은 가마솥에 장작불을 이용하여 ‘묵’을 쑤는 재래식(在來式)을 고수하여 깊은 맛이 우러난다.
채를 썬 ‘묵’에 잘게 다진 김치와 삭힌 고추를 넣고, 구운 김을 부숴 넣어 ‘조선간장’으로 맛을 내어 ‘국’같이 만들고, 좁쌀이 듬성듬성 섞인 밥을 말아먹으면 담백한 맛이 일품(逸品)이다.
매밀묵밥
그런데 이 ‘순흥묵밥’에는 ‘단종애사(端宗哀史)’에 얽힌 아픈 역사가 배어 있기도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숱한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나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영월에 귀양 보내 사사(賜死)하는 등 혈육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을 숙청한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때는 친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江華島)로 귀양 보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죽였다.
또 다른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로 옮겨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밀고로 발각되어 사사되면서 ‘순흥’은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변했다.
지금의 순흥 죽계천
금성대군에 동조(同調)하던 흥주도호부 지역의 수백 명의 선비들과 가족은 물론, 흥주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도륙(屠戮)을 당했다. 정통성 없는 권력의 속성이 불러일으킨 섬뜩한 살인극(殺人劇)이었다.
당시 참화(慘禍)를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관군(官軍)의 창칼에 죽은 양민의 피가 죽계천(竹溪川)을 타고 십 여리를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 마을’이라 부른다.
후일 이곳 사람들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신단(神壇)을 만들고, 해마다 그들의 원혼(冤魂)을 달래는 제사를 지낸다. 지금도 소수서원 맞은 편 죽계천 바위에 퇴계가 쓴 흰색의 ‘백운동(白雲洞)’글자 아래 붉은 색의 ‘경(敬)’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글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이 ‘정축지변’의 참화를 당한 뒤 밤마다 수장(水葬)된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 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어쨌든 ‘순흥’은 이때의 참화(慘禍)로 졸지에 산골마을로 전락했고, 주로 아녀자들만 남은 주민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메밀’을 심어 '묵밥'을 지어 먹고 살았다.
메밀국수
(필자 때는 이런 ‘꾸미’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꾸미’ 자체가 전혀 없이 그냥 메밀로 만든 면발에
'무청'으로 만든 김치를 썰어 넣고 끓여 먹었다.)
‘메밀’은 구황(救荒)식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거듭 되는 흉년으로 백성들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연명하자 조정에서는 ‘메밀’ 재배를 권장(勸獎)하기도 했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병충해(病蟲害)에 강하며, 생육기간이 짧아 한 해 두 번 수확도 가능하다. ‘메밀’로 만든 음식은 ‘메밀묵’과 막국수, ‘메밀전병’ 등 다양하며, 요즘은 다이어트 등 웰빙식품으로 인기가 오르고 있다.
메밀전병
(옛적에도 이와 비슷하게 만들어 먹었다)
여기에서 다시 그 시절 ‘메밀묵’장수의 뒷모습을 스치듯 그리고 있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를 잠시 일별한다.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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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메밀’을 심어보신 회원님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메밀’은 어느 곳에나 씨를 뿌리면 쉽게 거둬들일 수 있는 곡식이다. 파종(播種)부터 재배까지는 불과 두 달이면 된다.
번식력(繁殖力)이 강하기 때문에 잡초도 끼어들지 못한다. 특히 건조한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잘 적응한다.
메밀밭
‘메밀’은 주로 새로이 개간한 밭이나,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하지 못한 ‘천봉답’에 대파작물(代播作物)을 심는다. 하지(夏至)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천봉답’을 가진 농민들은 밤낮으로 하늘만 쳐다본다.
하루라도 빨리 비가 와서 모를 심어야 작년에 얻어먹은 ‘장리쌀’을 갚고, 아들아이 사친회비(師親會費)를 마련하여 계속 학교에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가 지난 지 열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자나도 천둥 한번 치지 않으면, ‘울며겨자먹기’로 대파(代播)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파(代播)란 토지를 일군 본래의 목적으로 심어야 하는 작물(作物)을 심지 못하고, 사정에 의하여 다른 작물을 대신 심는 것을 말한다.
말라 비틀어진 천봉답
(며칠동안 더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으면 '메밀'을 심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 ‘천봉답’에 모를 심지 못하면, 물이 없어도 자라는 밭작물을 심어야 하는데, 이때는 땅이 비옥(肥沃)하지 않아도 자랄 수 있는 종자(種子)를 선별하여 파종하여야 한다.
그리고 박토(剝土)인 ‘천봉답’에서 그런대로 생장(生長)하는 밭작물은 ‘메밀’과 기장, 조 등 서속(黍粟 ; ‘기장’과 ‘조’)이다. 그러나 다른 밭에 이미 ‘기장’과 ‘조’를 심었으면, ‘메밀’을 주로 심는다.
메밀밥
(순 메밀밥이 아니고, 메밀쌀을 섞은 밥이다)
‘메밀’을 주로 심는 이유는 무엇보다 ‘메밀’은 박토(剝土)에서 잘 자라 ‘기장’이나 ‘조’와 같이 다른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되었고, ‘메밀’이 어느 정도 자라면 거의 모든 잡초(雜草)가 나지 못해 그만큼 일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장’은 볏과의 한해살이풀로 알곡은 떡·술·엿 등을 만들거나 사료(飼料)로 쓰이며, 열매를 떨고 남은 줄기는 빗자루를 맨다. 그리고 ‘조’는 역시 볏과의 한해살이풀로 잘고 둥근 열매가 누렇게 익는다. 오곡(五穀)의 하나로 분류한다.
열무 메밀국수
(옛 것이 아니고 지금 것이다. 그때는 이렇게 만들 수가 없었다)
‘천봉답’에 대파(代播)를 할 경우 ‘메밀’을 주로 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기장’이나 ‘조’를 너무 많이 심으면, 처치(處置)가 여의치 않았던 탓도 있었다.
맛도 없고 갈무리하기가 여의치 않았으며, 시장에 갖고 가봐야 사 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메일’은 어릴 때 너무 ‘소잡게(비좁게)’ 뿌려진 것을 솎아내어 나물을 무쳐먹기도 하고, 뭐니뭐니해도 구수한 ‘메밀죽’과 ‘메밀밥’ 그리고 ‘메밀묵’은 별미(別味)에 속해 그만큼 인기가 좋았다.
메밀죽
그래서 당시의 ‘천봉답’ 대파작물(代播作物)은 거의가 ‘메밀’이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해 심하게 가뭄이 들었을 때였다.
두 달 가까이 비가 내리지 않아 필자네 천수답(天水畓)도 모내는 시기를 놓쳤다. 거북등처럼 갈라진 논바닥을 보시며, 아버지께서는 매일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야 관개시설(灌漑施設)이 잘 되어 웬만한 가뭄에도 모를 못내는 일이 없지만, 그 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늘만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이제나 저네나 비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물을 못 댄 논에는 죄다 ‘메밀’을 심었다.
가뭄에도 싹이 잘 트는 ‘메밀’이 벼 대신 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린 ‘메밀싹’은 베다가 끓는 물에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었다. 풋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된장에 무쳐낸 ‘메밀나물’을 먹어본 회원님들은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메밀 나물무침
그리고 이맘 때, ‘메밀’은 함박꽃을 피워 논뙈기마다 하얀 꽃동산을 이루었다. 꽃밭에는 벌들이 수도 없이 날아다니며 놀았다. 그 해 가을 필자네의 ‘천봉답’에서는 벼 대신 ‘메밀’을 수확(收穫)하였다.
값나가는 벼 수확을 하지 못하고, 대신 까만 ‘메밀’을 수확했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선 그나마 감사(感謝)하다고 하셨다. 그 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메밀국수 면발
(이 것도 지금 것이다. 옛 것은 이보다 배 이상 굵었다)
“사램은 기양 주그래넌 뱁은 업능기라, 이 가물에도 잘 크넌 ‘메물’이 있시이 얼매나 생광시럽노 말이다. ‘꽁’ 대신에 ‘달’이라꼬 이거도 고마분기다(사람은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가뭄에도 잘 크는 ‘메밀’이 있어 얼마나 보람스러우냐 말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이것도 고마운 것이다)”
끼니로 쒀먹었던 ‘메밀죽’과 ‘메밀묵’, 아버지의 타는 마음을 알아 밥투정을 못하던 어린 마음, 그 시절 ‘메밀묵’은 맛을 따질 대상이 아니었고, 주린 배를 채워주던 귀중하고 고마운 식량(食糧)이기도 했었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한겨울 밤중이 되면, 매일같이 “메밀묵 사려, 찹쌀 떡 사려!”라며, 골목을 누비는 장사꾼의 목소리에 향수(鄕愁)를 달래기도 했었다. 특히 동지섣달 긴긴밤에 뱃속이 출출할 때 사 먹었던 ‘메밀묵’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메밀묵
‘메밀’은 오방지영물(五方之靈物)이라 하여 신령(神靈)스런 식물이라 불리기도 했었다. 신령스런 곡식인 ‘메밀’은 이를 이용한 음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메밀국수’를 비롯해 메밀묵, 메밀전, 메밀전병, 메밀밥, 메밀수제비, 메밀죽 등 손재주가 있으면, 수없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
어린 시절, 필자들은 한 겨울에도 며칠씩 아침엔 ‘메밀밥’, 점심엔 ‘메밀국수’, 저녁엔 ‘메밀수제비’를 먹고 살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메밀’로 만든 음식을 먹을 때도 물리거나 질리지는 않았다. 다들 그 맛과 모양이 독특하고 다양(多樣)했기 때문이었다.
딸이 없었던 그 시절 필자의 가정에서는 ‘메밀묵’을 만들 때마다 형제들이 모두 나서서 어머니를 도와 ‘묵’을 만들었다. 60년 전의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 ‘메밀묵’ 만들던 순서를 대충 기억해 본다.
먼저 커다란 ‘버지기’에 물을 채운 후 ‘메밀’을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 후 통째로 맷돌에 가는데, 조그마한 ‘쫑구래기’로 물을 부어가며 간다.
맷돌에 갈아 낸 ‘메밀’은 ‘체’에 담아 몇 번이고 물을 부어가며 걸러낸 다음 웃물을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가마솥에 담고 풀을 쑤듯이 끓이는데, 이때 물기를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묵끓이기
주걱으로 계속 저으면서 물이 적은 듯하면, ‘쫑구래기’로 물을 더 뿌리고, 물이 많은 것 같으면, 불을 좀 세게 넣는다. ‘메밀’이 모두 익었다고 판단되면, 아궁이의 불을 끄고 잠깐 기다렸다가 바가지로 퍼낸다.
커다란 ‘버지기’에 역시 커다란 ‘삼베 바뿌재’를 ‘버지기’ 난간에까지 올라오게 깔고 바가지로 ‘묵’을 퍼서 차곡차곡 퍼 담았다가 완전히 굳어지면, 부엌칼로 한모, 두 모 잘라 즉석에서 양념‘지렁’을 뿌려 먹기도 하고, 남은 것은 물을 채운 ‘옹찰이’에 담아 뒀다가 두고두고 먹는다.
'묵'을 모두 퍼내고 가마솥에 눌어붙은 '묵 누룽지'를 '단 숟가락'으로 긁어 먹는 재미도 기가 막힌다.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똥찬 '요오표 메물묵' 한 번 만들어 우리 외동(外東) 향우회원 모두 모셔놓고, 시식회(施食會)라도 한 번 가졌으면 한다.
위에서 말한 ‘요오표’라는 말 중에서 ‘요오’가 무엇인지 처음 보시는 회원님들은 무슨 말인지를 모르실 것 같아 주석을 단다. 카페지기님을 비롯해 ‘정야’선배님 등 원조 회원님들은 다들 아시지만, ‘요오’는 필자의 외동읍식 이름이다. ‘용우’를 ‘요오’라고 부르곤 했었다. 그냥 '요'라고도 했었고, 바로 밑 동생 '성우(영지 7회)'는 '소오'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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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은 영양적(營養的)으로도 좋은 식품이다. 전분 함량이 많고 회분과 섬유질, 비타민 B1, B2, D 성분에다가 우수한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다.
특히 ‘메밀’ 속에 함유된 루틴(Rutin)이란 성분은 모세혈관(毛細血管)에 저항성을 강하게 하고, 고혈압(高血壓)으로 인한 뇌출혈 등의 혈관 손상(損傷)을 방지하는데 효과가 있다.
‘메밀’은 또 성질이 찬 음식에 속한다. 무더운 여름철이나 체질적(體質的)으로 열기가 많은 사람들이 ‘메밀’을 먹으면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예부터 여름철에 ‘메밀’로 만든 국수나 냉면(冷麪)을 즐겨먹고, 냉면을 먹을 때 식초와 겨자를 곁들이는 것은 ‘메밀’의 찬 성질을 보완(補完)해 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여기에서 다시 김가영이 부른 ‘메밀꽃 사랑’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메밀꽃 사랑
김가영
봉평들 메밀꽃은 철따라 피었건만
떠나가신 그리운 님 언제나 오시려나
손 모아 빌어보는 메밀꽃 아가씨
그 옛날 둘이서 사랑노래 불렀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나
저 달은 알리라 메밀꽃 사랑
메밀꽃 피는 뜻을 두견새는 알리라
못 오시는 님의 마음
그 얼마나 아프리오
오실 날 믿고 사는 메밀꽃 아가씨
그 옛날 마주앉아 다시 오마 언약했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나
저별은 전하리라 메밀꽃 사랑
메밀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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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은 소설의 소재(素材)로도 등장한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대표적이다. 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이 작품은 인간심리(人間心理)의 순수한 자연성(自然性)을 주인공 허생원과 나귀를 통해 표출하고 있는 낭만주의적(浪漫主義的) 소설이다.
애욕(愛慾)과 혈육에 얽힌 인간의 정과 그 신비성을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이 소설은 강원도 봉평장터와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메밀꽃이 흐드러진 밤길에서 펼쳐진다.
이효석이 작품 활동을 할 때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까지는 강원도(江原道)와 전라도에서는 ‘메밀’을 ‘모밀’이라 했다.
때문에 이효석의 소설도 초기 표지(表紙)를 보면 ‘모밀꽃 필 무렵’으로 되어 있다. 이런 사연 때문이지는 몰라도 옛적 ‘모밀’은 토속적(土俗的)인 향기가 났었는데 비하여 지금의 ‘메밀’은 가공공장을 거쳐 나온 듯한 기계적(機械的)인 맛과 느낌을 주기도 한다.
축제(祝祭)의 계절 가을이 되면, 강원도(江原道) 봉평은 ‘메밀꽃’ 축제를 시작으로 가을 축제(祝祭)가 시작된다. 이효석을 기리는 ‘효석문화제’가 열리고, 봉평 일대가 온통 ‘메밀꽃’ 세상으로 변한다.
‘메밀국수’의 본고장인 강원도 정선(旌善)에서는 ‘메밀국수’를 ‘콧등치기’라고도 한다. ‘콧등치기’란 말은 ‘메밀국수’를 후루룩하고 먹을 때 ‘국수발’이 콧등을 철썩 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국수그릇 속으로 입을 들이밀고, 국수발을 들이키면, 칼국수 ‘면발’보다 굵은 ‘메밀국수’ 면발이 콧등을 친다고 한다.
‘콧등치기’
(이 것도 옛적 것보다는 가늘다. 그때 것은 이보다 훨씬 굵었다)
우리들이 모두 잘 아는 옛적 동화(童話) 한 토막을 되뇌어보면서 파일을 접는다. ‘메밀’의 대궁은 붉게 물들어 있는데, 이 연유를 담은 전설(傳說)이다. 옛날 옛적 산속의 작은 오두막집에 홀어머니가 오누이를 데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안개가 많이 낀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5일장이 서는 강원도(江原道) ‘봉평’ 장터를 나가야 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강냉이 팔아서 맛있는 것 사올 테니 모르는 사람에게는 절대 대문을 열어 주지 말라”면서 신신당부를 하고 산 고개 넘어 장터로 향했다.
장터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고갯마루를 넘어 봉평 들녘이 바라다 보이는 개울가에 앉아 쉬다가 그만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화를 당하고 말았다.
단숨에 어미를 잡아먹은 욕심(慾心) 많은 호랑이는 죽은 어미의 모습으로 변장(變裝)을 하고 오누이가 있는 집으로 찾아갔다.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장(變裝)한데다 오누이를 감쪽같이 속이고 집 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늦게야 호랑이임을 눈치 챈 오누이는 너무도 놀라 집 근처 우물가에 있는 버드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호랑이는 오누이를 쫓아와 어떻게 나무 위로 올라갔는지 물었다.
오누이는 이리저리 둘러 대다가 그만 “도끼로 찍으며 올라왔다”고 얘기를 해버렸다. 어린 오누이는 호랑이가 나무 위로 올라오게 되자 하늘에 간절히 기도(祈禱)를 하게 되었고,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와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를 본 호랑이도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두레박이 내려와 이것을 타고 올라가던 중 과다체중(過多體重)으로 그만 밧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호랑이가 떨어지면서 아래를 보니 희뿌연 냇물처럼 보이는 곳이 있어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그곳에 풍덩 몸을 던졌다.
그러나 호랑이가 몸을 던진 그곳은 냇물이 아니라 ‘메밀꽃’이 만발(滿發)한 ‘천봉답’ 돌밭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호랑이는 피를 토하며 즉사(卽死)했고, 쏟아진 피는 메밀밭을 붉게 물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피가 지금까지 남아서 ‘메밀대궁’은 붉은 색을 띄고 있다고 한다.
붉은 메밀대궁
(하늘에서 떨어져 죽은 호랑이 피가 대궁에 묻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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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추억어린 얘기들이 줄줄이 가득하네요....맞습니다. 용우를 요오하고 했지요...그래서 저도 정순이를 정수이라 하고...옥순이를 옥수이 하는거 같아요..ㅎㅎ 메밀묵은 잔치할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고...외동에서는 ...잘게 쓴 실파가 들어간 초구장에 찍어 먹었는데....다른데서 파 간장에 찍어 먹데요..ㅎㅎㅎ 메물이라고 했던거 같네요..하도 오래되어 잊어 먹었던 거 같네요...참으로 향토 사투리 보존 국보급....마당입니다.ㅎㅎ .
대전에 가면 묵마을이 있습니다. 한동네 전체가 묵 음식점으로 변한 곳인데...원래는 할머니 한분이 묵을 전문으로 음식점을 열었다가 인기가 좋아저서...끝내 마을전체가 묵마을로 바뀐 곳이고...그것을 대전시에서 보호 육성하고 있는...구즉 묵마을......외동에서...마을 마다 두부집도 있었고...묵집도 있었을 것 같은데...우리 동네는 없었던거 같지만....묵은 참 좋은 음식이었습니다.
메밀꽃에 얽힌 사랑 얘기는 밤새도록 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여름 달밤에 .....단둘이 누워보면.... 하늘의 별만 눈감아 준다면...크다란 달만 모른쳑 해 준다면....세상은 다 둘만이 누리던 아방궁이 되었을 것이라..ㅎㅎㅎㅎ
우리 황보씨(皇甫氏)는 계유정난때 영의정 황보인(仁)일가가 폐족되어, 숨어 숨어 살다가 294년만에 영조22년(1746년)때 복권되어 지금도 성씨가 전국에 1만명이하로 성씨가 융성하지 못하지요. '버지기' '쫑구래기'등 오랫만에 들어보는 말이네요. 암튼 '요오표메물묵' 먹을날은 이성에서는 글렀는가 봅니다...
선배님, 삼복염천을 헤쳐 나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추측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황보(皇甫)씨의 내력이 끝내 ‘매물’과도 연관이 되는군요. ‘요오표 매물묵’을 저승에서나 기대하시겠다구요? 세상이 하수상하니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오곡이 모두 익은 늦가을, 청명한 날 골라 고향집 마당에 가마솥 걸고, 동네 멍석 모두 빌려 깔고, 거창한 즉석 ‘메물묵 파티’ 한 번 모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선배님, 항상 건강하십시오.
봉평 메밀꽃축제가 지금 한창이래죠선배님 가보고 싶네요...소시절 부무님 메밀농사 생각하면 목화꽃 피기전 몽오리 그때말로 다래 까먹으면 달콤하게 먹을만 했죠 건데 부무님들 하시는 말씀 다래 따 먹으면 문디이 된다고....먹을것이 귀해서....감나무골 노래 즐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