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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어떤 곳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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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2천 여년 전 비류가 개국한 땅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기원 18년 경에 비류와 온조 형제가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하고 온조는 위례성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옛 미추홀 지역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번창하지 못하고 비류가 세상을 뜨자 온조가 세운 백제에 통합되어 백제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비류가 당시 개국한 중심지역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동사강목」,「여지도서」,「중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비류성터가 문학산에 있었다고 하니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현 관교동 일대가 옛도읍지라고 보여진다.
미추홀이 행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413~491)다. 고구려는 백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475)이곳에 '매소홀현'을 두었다. 백제의 성왕 29년(551) 백제와 신라(진흥왕) 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물리치고 백제가 한강유역 하루에 6군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한강상류 10군을 점령하였다. 553년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깨고 하류지역마저 점령하여 신라영토가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에 매소홀현을 소성현이라 바꾸고 율진군(과천)에 속하도록 하였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현종 9년(1018)에는 수주(부평)에 속하게 되었으나, 숙종때에 이르러 숙종의 어머니 '인예순덕 태후'의 출생지가 바로 소성현인 관계로 경원군으로 승격 되었다. 인종때에 이르러 인종의 어머니 문경태후 또한 이곳이 출생지가 되므로 '인주'가 되었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는 인천이 다시 '경원부'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모두 고려 왕실의 7대 어향이기 때문에 우대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조 원년에 (1392) '인주'로 다시 환원되었으나 태종 13년 (1413)의 지 방제도 개편으로 인천군이 되었고, 세조 6년(1460)에 이르러 인천군이 다시 '인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인천이 세조의 어머니 소현왕후 '심'씨(세종비)의 외가가 되었기 때문에 승격되었다고 한다. 영조시대(1725~1776) 인천부는 10개면으로 편성되어 개항 후 1914년 인천부의 행정구역 개 편 때까지 유지되었다.
고종 20년(1883) 인천이 개항되면서 개항장인 제물포에 감리가 설치되어 인천부사를 겸임 하게 되었다. 고종 32년(1895) 갑오개혁으로 지방제도가 개정되면서 조선 8도제가 폐지되고 전국을 23부 331군으로 통합하여 관찰사를 두었을 때 인천부가 되면서 감리를 폐지하고 인천부에 부평,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수원, 남양, 강화, 교동, 등 12개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1896년 다시 지방제도 개편으로 13도 1목 9부 329군으로 개편하면서 인천은 9부의 하나로 경기도에 속하여 다시 감리서가 부활되었다. 그 후 광무 10년(1906)에 감리서가 폐지되고 인천 부윤이 감리사무를 보게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우리 나라 주권이 상실되었고, 1914년에 부, 군, 면을 통합하면서 인천부의 행정구역이 개항장(부내면과 다소면 일부)으로 축소되었고 그 외 지역은 부천군이 생기면서 모두 부천군으로 흡수되었다. 1936년 인천부가 1차로 관할구역을 확장하면서 부천군의 문학면 일부와 다주면 일부를 편입하고 1940년 2차로 관할구역 확장 부내(계산동), 서곶, 문학, 남동 4개 면을 편입시켰다. 1949. 8. 15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천부가 시로 승격되었다. 1963. 1. 1 부천군의 작약도가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68. 1. 1 인천시는 행정구역을 중구, 동구, 남구, 북구의 4개 구로 개편하였다. 1988. 1. 1 남동구, 서구가 새로 신설되었다. 1989. 1. 1 김포 계양면과 옹진군의 영종면과 용유면이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95. 1. 1 인천광역시로 되면서 김포 검단면, 강화군, 옹진군이 편입되면서 계양구 연수구가 신설되었다.
대동여지도의 인천, 부평
부평은 옛 삼한시대 진한에 속한 한수 유역 '우휴모탁'부족의 지역이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백제가 강성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유역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58년(470)에 백제를 몰아내고 우휴모탁지역에 '주부토군'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부평의 뿌리가 되었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문무왕 8년(668)에 삼국을 통일하였고, 경덕왕 16년(757) 12월에 신라는 전 국토의 옛 지명을 모두 바꾸었는데 이때 주부토군은 '장제군'이 되었다. 장제군은 한주에 속한 군으로 4개의 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고려 태조8년(925) 장제군이 호족인 '이희목'이 고려조에 의해 개국의 공이 크다고 벽상공으로 추대되었다. 태조 23년(940) 3월 지방제도가 고쳐지면서 장제군이 수주로 격상되었다. 수주의 유래는 수소마을(현 목상동)의 호족인 '이희목'이 수소마을에 살고있기 때문에 이곳을 '읍'으로 정하게 되어 수주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종 9년(1018) 지방행정기구를 개혁하여 전국을 3경 4도호보 8목 56지주사를 두면서 수주는 56주의 하나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관할하게 되자 수주읍에서 교통이 편리한 배곶이(오류동)로 '읍'을 옮기게 되었다. 문종 23년(1069) 수주는 양광도에 편입되었고, 숙종 10년에는(1105) 소성현이 경원부로 승 격되어 분리되었다. 인종 5년(1127) 왕은 전국 56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치하니 '오리울'에 향교를 세움(부평 향교의 시초) 의종 4년(1150) '수주'가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의종 19년(1165) 안남도호부 청사를 '배곶이'에서 중구봉 아래 '온수골'로 이전하였다. 고종 2년(1215) 안남도호부를 계양도호부로 개칭하게 되었고, 이어 금천현이 분리되고 동성현과 수안현을 통진현에 통합시켜 분리시킴. 고종 6년(1219) '이규보'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부임, 후세에 많은 글을 남김. 충렬왕 34년(1308)에 계양도호부가 '길주'로 승격됨. 충선왕 2년(1310) 부평부로 강등되면서 양천현이 부평에서 분리되고 황어현을 부평부에 편입시킴.공양왕 3년(1392) 부평부는 '경기우도'에 편입됨. 태조 4년(1395) 6월에 경기좌도에 부평과 인천이 편입됨. 태종 13년(1413) 부평부 부평도호부로 승격, 부원현은 고봉현에 그리고 석천현은 서원현에 떨어져 나가고, 인주가 인천군으로 되어 부평부에 속함. 세종 17년(1435) 7월 23일 양천현이 부평으로 편입되었으며 인천, 해풍(개풍), 김포, 동진, 양천, 교동을 관할함. 세종 20년(1438) 부평도호부에서 '현'으로 강등되어 세종 28년(1446) 11월 1일 다시 '도호 부'로 승격됨. 세종이 부평지역에 있는 온천을 찾도록 명하였으나 온천을 발견못한 죄로 강등됨. 세조 원년(1455) 부평도호부에 중익진을 설치 병자절제사를 부사가 겸임. 이때 병영지를 현 병방동에 둠(세조 3년에 수원으로 이전함). 연산군 11년(1505)에 부평도호부 부평읍으로 강등되었다가 1년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고 중종 원년(1506) 9월 다시 도호부로 환원됨. 김순손이란 참판이 중죄를 범한 관계로 그의 고향인 부평도호부를 강등시킴. 고종 32년(1891) 부평부는 인천부에 속한 부평군으로 강등되었다. 고종 33년 건양 원년(1896)에는 경기도에 속함. 1914 부, 군, 면, 폐합 때 부평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부천군이 신설됨(부평군 내면'계산동' 의 부평군 청사를 폐하고 인천읍'관교동' 청사에서 부천군이 개청함). 1940년 제 2차 인천부역 확장으로 옛 부평지역이 대부분 인천부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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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역 섬 산행지
하얀 파도가 발아래 출렁이는 섬 산행. 바다를 끼고 있는 산은 어디를 가나 조망이 뛰어나다. 낯설기는 하지만 육지의 산을 오르는 것과 또 다른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여름 섬 산행은 바다, 섬, 산, 해수욕 등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 최근 들어 새로운 테마 여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덕적도 비조봉
덕적도에는 국수봉, 비조봉, 운주봉 등 크고 작은 봉우리가 이어질 듯 끊어질 듯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바다 쪽으로 붙어있는 비조봉(292m)은 옹진 섬 산행의 백미이다. 산행 코스는 정상을 중심으로 서포리 코스, 밭지름 코스, 진리선착장 코스 등이 있다. 어느 코스를 택하든지 2시간가량 소요되는데 트래킹하는 기분으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비조봉은 나무가 울창해서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삼림욕도 겸할 수 있다. 둥글레나 산나리 같은 자생식물들이 지천일 만큼 손때가 덜탄 산이다.
산 속의 고요. 어찌나 적막한지 마을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이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왼쪽 바다 오른쪽 바다를 번갈아 감상할 수 있다. 쉬엄쉬엄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조망점이 곳곳에 있어 산행은 지겹지 않다.
해풍에 실려온 바다 맛인가 내 몸에 흐르는 땀의 맛인가. 짭짜름한 소금기가 입에 스며들 때쯤이면 어느덧 정상이다. 꼭지점에 서면 확트인 발아래로 펼쳐진 쪽빛바다에 눈이 시리다. 굴업도, 백아도, 소야도, 문갑도… 옹기종기 딸린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배들이 흰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달리는 모습. 발가락처럼 툭 튀어나온 섬의 굴곡을 간질이는 흰 파도… 한 폭의 수채화가 그대로 그려진다.
비조봉 산행의 압권은 해질 무렵에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놓칠 수 없는 비경이다. 검푸른 바다에 진홍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장엄한 노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 숨을 멎게 한다.
무의도 호룡곡산·국사봉
무의도에는 섬 양쪽으로‘서해의 알프스’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호룡곡산(244m)과 국사봉(230m) 두 봉우리가 솟아있다. 고려바위, 마당바위, 부처바위 등 기암절벽이 있는 두 봉우리에 오르면 위쪽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내다보이고 서해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수많은 섬들이 줄지어 있다. 생태관찰로(340m), 산림체험로(4㎞), 전망대 등을 갖춘 삼림욕장도 있다.
샘꾸미선착장∼마을입구 등산로∼호룡곡산∼구름다리∼국사봉∼애기봉∼실미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는 쉬엄쉬엄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대이작도 부아산
대이작도에는 부아산과 소리산이 동서쪽에 나란히 솟아있다. 아기를 업은 듯한 모습을 띤 부아산(188m)은 선착장에서 700m정도 걸어 큰말을 지나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부아산의 산세는 언뜻 보기에는 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은 길을 잘 닦아놓아 누구나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아슬아슬한 80m 길이의 구름다리를 건너 정상에 오르면 ‘부아정’ 이란 이름이 붙은 정자에서 땀을 식힐 수 있다. 가까이에 신비의 섬 풀치를 비롯해 자월도, 승봉도, 소이작도, 덕적도가 도란도란 얘기하듯 바다 위에 떠 있다. 쾌청한 날씨에는 멀리 인천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바다 위로 떠오르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기에도 좋은 곳이다. 전망 때문이었을까. 19세기까지만 해도 해적들의 활동 근거지였다고 한다. 섬 이름도 해적들이 사는 곳이란 이적도였으나 이를 이작도로 바꿨다고 한다.
신도 구봉산
구봉산(178m)에 오르는 길은 7,300여 그루의 산벚꽃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임도를 따라 4km를 걸어 구봉정에 오르면 인천국제공항이 코앞이고 강화도, 김포반도 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까지 길이 잘 닦인 산악자전거 코스가 있으며 2시간이내 코스의 등산로가 여러 개 있다. 쉼터를 갖춘 구봉산 성지약수터도 유명하다. 밤에 구봉정에 오르면, 공항에서 펼쳐지는 빛의 마술쇼를 감상할 수 있다.
자월도 국사봉
해발 165m의 국사봉에 오르기 위해서 면사무소 옆길로 접어든다. ‘임도’와 ‘등산로’가 있는데 임도는 산의 옆구리를 끼고 한바퀴 돌며 오르는 길이다. 큰마을 해변부터 장골, 그리고 하늬깨에 이르기까지 섬의 동서남북을 눈으로 훑을 수 있다. 등산로는 조금 가파른 길이지만 계단식으로 잘 다듬어져 있어 10분 정도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살살 부는 해풍을 맞으며 마을풍광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번 하면 마음은 금방 세상을 품을 만큼 넓고 자유로워진다.
강화도 산여행안내
혈구산 기(氣) 체험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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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은 해발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 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또한 단군 왕검께서(BC2282) 민족 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춘추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근세에 이르러 융희 황제때까지 해방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부활되고 이곳에서 성화를 점화하였습니다. 성화채화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인화하거나 흐린날에는 부싯돌로 성화를 점화하는데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하실때 神女가 합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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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산은 291m로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끼리 등산하기에 적합한 산입니다. 봉천산에 오르면 고려때 나라에서 제천의식을 행했던 제단이었으나 조선중엽에 이르러서는 봉수대로 사용했던 봉천대가 있습니다. 또한 멀리 개성의 송악산 등 북한의 산야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펼쳐집니다. 봉가지는 하음 봉씨의 시조인 봉우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연못입니다. 고려 예종 때 봉천산 밑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하늘에 구름이 끼고 우레같은 소리가 나더니 수면에 석함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석함 뚜껑을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있어 이 아이를 왕에게 바쳤고 왕은 봉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커서 재상이 되어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고 이로부터 하음 봉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봉천산 아랫자락에는 이 노파를 닮았다는 석조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 입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큼직한 머리카락과 큰 눈 , 두꺼운 입술을 가지고 있어 소박하면서도 둔중한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석조여래입상의 옆 쪽에는 봉천사지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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