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2023년 3월호 및 4월호 「김상옥 의거 100주년 특집 」
“내가 아주 단판씨름 하러 왔소”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한 몇 가지 논점 정리
(1)
1890.1 서울 어의동에서 구한말의 군관인 김규현과 경주김씨 점순 여사 사이에 2남으로 출생 1923.1 종로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왜경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1월 17일 재등 총독 주살을 재차 계획한 채 삼판통에서 추격한 왜경과 총격전을 전개한 후 이곳저곳을 신출귀몰하다가 1월 22일 종로 효제동에서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4, 5채 가옥을 넘나들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일기당천의 장렬한 격전을 전개, 수십명의 왜경을 살상 후 마지막 한발로 자결 순국 |
(2)
1889년 1월 5일 서울 효제동 출생 1923년 1월 22일 서울 효제동 최후격전현장에서 순국 배위 1895.10.20. 출생 1967.12.26. 별세 1923년 1월 3차례 서울시가전 전개/ 12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17일 삼판통 총격전 4명 처단/ 22일 효제동 대격전, 일본군경 천명 4중 포위, 3시간 교전 16명 처단, 자결 순국 |
여기에 제시한 것들은 딱 100년 전 “경성 천지(京城 天地)를 진동(震動)하던 중대사건(重大事件)”의 주인공으로 “항복(降服)은 절대불응(絶對不應)”하며 “최후순간(最後瞬間)까지 대항(對抗)”했던 김상옥(金相玉, 1889~1923) 의사의 마지막 항거 상황을 약술한 구절이다. 우선 (1)은 대학로 마로니에공원(동숭동)에 서 있는 ‘김상옥 열사의 상’에 부착되어 있는 ‘한지(漢𥭡) 김상옥 열사 약력’ 부분에 정리된 내용이다. 이 동상(조각 이승택, 글 글씨 최절로)은 사단법인 김상옥 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와 김상옥 열사 동상건립위원회가 세웠으며, 지난 1998년 5월 28일 제막되었다. 그리고 (2)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상옥 의사(정진주 합장)의 묘비석 후면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다.
여기를 보면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약간의 차이가 나는 항목들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우선 부친의 성함이 ‘김규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김귀현’을 잘못 새긴 것인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김상옥 의사의 출생년도가 ‘1890년’과 ‘1889년’으로 다르게 서술된 것이 그 중의 하나이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호외), 2면에 수록된 「불평불만(不平不滿)의 34성상(星霜), 순사총살(巡査銃殺)까지의 김상옥(金相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수 백 명의 무장경관을 대적하여 빗발같이 쏟아지는 탄환 속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은 김상옥은 어떠한 사람인가? 김상옥은 당년 34세의 청년이라,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경인(庚寅) 정월 초5일에 한성 동부 건덕방 어의동(漢城 東部 建德坊 於義洞) 일개 미천한 집에 출생하니 그의 부친은 당시 한국군대의 영문포수(營門捕手) 다니던 김귀현(金貴鉉)이요, 모친은 정씨(鄭氏; 어머니는 ‘김씨’이고 처가 ‘정씨’이므로 이는 잘못된 내용)이라.
여기에 ‘경인년 정월 초5일생’이라 하였으니 이를 근거로 의당 ‘1890년 1월 5일생’으로 통용되어 왔으나, 이정은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이 펴낸 『김상옥평전(金相玉評傳)』 (민속원, 2014), 51~52쪽에는 종로구청에서 발급한 「김귀현 호적부」에 ‘조선개국(朝鮮開國) 498년’으로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기존의 출생일자를 ‘1889년 1월 5일생’으로 새롭게 수정하여 서술한 바 있다. 따라서 1889년생이라는 주장은 아마도 이쪽의 조사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다음으로 세부내용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출생지를 ‘어의동’과 ‘효제동’으로 달리 적고 있는 대목인데, 그렇다면 ‘어의동’은 곧 ‘효제동’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 역시 아직은 엄밀하게 지명고증이 이뤄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또한 효제동 총격전 당시의 상황에 대해 한쪽에서는 ‘왜경 500여 명’이라고 적은 데에 반해 다른 한쪽에선 ‘일본군경 천 명’이라고 하여 그 규모가 배로 늘어나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더구나 왜경(倭警)이라고 하면 일제의 경찰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군경(軍警)이라고 하면 일본군대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그 뜻이 크게 바뀐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 역시 왜 갑자기 서술 내용이 변경된 것인지도 잘 알기 어렵다.
또 한 가지 빠트리기 어려운 내용은 최후의 총격전 때 김상옥 의사가 ‘수 십 명의 왜경을 살상’하였다거나 ‘일본군경 16명을 처단’하였다는 얘기의 사실 여부이다. 이것은 과연 어디까지가 맞는 내용인 것일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강렬했던 의열투쟁의 하나였던 만큼 김상옥 의사의 의거 그 자체는 결코 가벼이 여겨져서도 안 되겠지만 여기에 공연히 그의 공적을 부풀리거나 덧칠을 하여 되려 누가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도 안 될 줄로 믿는다.
세상만사(世上萬事)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에 아래에서는 김상옥 의사의 순국 100주년을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뜻에서 그의 의거와 관련한 몇 가지 논점을 따져서 문제제기를 겸하여 간략한 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논점 1: ‘어의동 생가터’의 위치는 어디인가?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가 “한성 동부 건덕방 어의동”이라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으나, 이것은 일제가 1914년에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시도하면서 지번체계(地番體系)를 도입하기 이전의 주소지 표기방식이므로 정확하게 지금의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를 가려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일찍이 ‘사단법인 김상옥 나석주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펴낸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金相玉 羅錫疇 抗日實錄)』 (1986)에는 ‘어의동(지금의 효제동)’으로 표시하고 있으며, 이정은의 『김상옥평전』 (2014)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을 아예 ‘효제동 72번지(최후 순국지와 동일 지점)’라고 단정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특별판)』 (2019), 124~134쪽에 수록된 「김상옥」 항목에서도 — 이 원고의 집필자가 동일한 탓에 —역시 ‘효제동 72번지(최후 순국지와 동일 지점)’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곳의 위치를 규명하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어의동’이라고 하는 동네는 한성 동서(東署; 1894년 갑오개혁 이전의 ‘동부’와 동일)에 있어서 제법 넓게 포진하고 있는 구역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방(坊)에서는 ‘어의동계(於義洞契)’를 이루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그냥 ‘어의동(於義洞)’으로 존재하는 사례가 도합 3곳이나 확인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황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청(京城府廳)에서 소장하고 있던 「각서방계동명(各署坊契洞名)」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어의동’과 관련된 흔적을 추출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정리가 된다.
각서방계동명(各署坊契洞名, 경성부청 소장자료)에 나타난 ‘어의동’의 분포 상황
구분 | 방명(坊名) | 계명(契名) | 동명(洞名) |
동서 (東署) | 창선방 (昌善坊) | 어의동계 (於義洞契) | 이교(二橋), 어의동(於義洞), 상북동(尙北洞), 연지동(蓮池洞) |
오교계 (午橋契) | 하대정동(下大井洞), 상북천변동(上北川邊洞), 상대정동(上大井洞), 하북천변동(下北川邊洞), 어의동(於義洞) | ||
이교계 (二橋契) | 연동(蓮洞) | ||
동학계 (東學契) | 도촌(島村), 양사동(養士洞), 동학동(東學洞) | ||
건덕방 (建德坊) | 어의동계 (於義洞契) | 내교(內橋), 저교(杵橋), 신교(新橋), 경기동(經基洞), 괴천동(槐泉洞), 장원동(長垣洞), 연지동(蓮池洞), 냉정동(冷井洞) | |
경이계 (景二契) | 독갑현(獨甲峴), 과동(果洞), 남미탑동(南彌塔洞), 반송정동(盤松井洞), 남장동(南墻洞), 북장동(北墻洞) | ||
숭신방 (崇信坊) | 경이계 (景二契) | 쌍계동(雙溪洞), 이화정동(梨花亭洞), 장생전동(長生殿洞), 토교(土橋), 하백동(下柏洞), 어의동(於義洞), 신대동(新垈洞), 상백동(上柏洞) | |
경일계 (景一契) | 토교(土橋), 혜화문내(惠化門內), 송동(宋洞) | ||
(*) 자료출처 : 경성부, 『경성부사(京城府史)』 제2권(1936), 444~446쪽 |
이를 통해 서울도성 안 동쪽 일대에만 ‘창선방 어의동계 어의동’, ‘창선방 오교계 어의동’, ‘건덕방 어의동계’, ‘숭신방 경이계 어의동’ 등 무려 4가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그 대상을 ‘건덕방 어의동계’로 좁히더라도 이 지역이 반드시 1대1 대응으로 ‘효제동’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예를 들어,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에 게재된 경기도 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京城府 町洞ノ 名稱 及 區域) 제정」(1914년 4월 1일 시행)을 보면 ‘종전의 어의동’은 ‘종로 5정목(지금의 종로 5가)’ 쪽으로 편입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당시 일제가 임의로 창안하여 새로이 명명한 ‘효제동(孝悌洞; 인의, 예지, 효제, 충신 등 유교의 덕목에서 추출하는 방식으로 만든 동네이름)’이 옛 건덕방 어의동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지만, 알고 보면 ‘종로 6정목(지금의 종로 6가)’과 ‘충신동(忠信洞)’ 쪽 역시 원래 건덕방 어의동계에 속했던 지역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의동’은 곧 ‘효제동’이라는 얘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볼 수 있다.
1914년 4월 현재 경성부 정동 명칭 구역 개정 내용(어의동 관련 지역)
명칭 | 구역 | 비교확인(옛 지명) |
종로 6정목 (鍾路 六丁目) | 저교동 일부(杵橋洞 一部), 양사동(養士洞), 동학동(東學洞), 도촌(島村) | 옛 건덕방 어의동계 + 창선방 동학계 일대 |
종로 5정목 (鍾路 五丁目) | 이교동 일부(二橋洞 一部), 연지동 일부(蓮池洞 一部), 어의동(於義洞), 하대정동(下大井洞), 하천변동(下川邊洞), 상대정동(上大井洞) | 옛 창선방 어의동계 + 창선방 오교계 일대 |
효제동 (孝悌洞) | 신교동 일부(新橋洞 一部), 내교동(內橋洞), 연지동 일부(蓮池洞 一部), 괴천동(槐泉洞), 상북동(尙北洞) | 옛 건덕방 어의동계 + 창선방 어의동계 일대 |
충신동 (忠信洞) | 경기동(經基洞), 장원동(長垣洞), 저교동 일부(杵橋洞 一部), 신교동 일부(新橋洞 一部) | 옛 건덕방 어의동계 일대 |
(*) 자료출처 :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27일자, 「경기도 고시 제7호」 |
그런데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를 ‘어의동’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적어놓은 기록도 엄연히 남아 있다.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3면)에 수록된 「파란중첩(波瀾重疊)한 그 일생(一生), 지장운단(志長運短)한 34세(歲)」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전기한 바와 같이 효제동에서 경관과 맹렬히 격투하다가 즉사한 김상옥은 원래 시내 종로 6정목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후에 시내 창신동(昌信洞) 480번지[487번지의 오류]로 이거하여 금일까지 살아오던 바 그의 부친 김귀현(金貴鉉) 씨는 본래 가세가 곤궁하여 나막신을 파서 생활하므로 아들은 3형제나 두었으나 공부를 시키지 못하고 …… (하략)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로 6정목’은 ‘효제동’과 마찬가지로 ‘옛 건덕방 어의동계’에 걸쳐있던 지역이므로 김상옥 의사의 실제 출생지가 이곳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 (1986), 168쪽을 살펴보면 “맏형 춘옥(春玉)은 특별한 기록이 없고 다만 일제시대의 호적을 찾아봤더니 경성부 종로 6정목에서 개국(開國) 490년에 출생했으나 …… 운운”하는 내용이 있는데, 먼저 태어난 형의 출생지가 정말 이곳이라면 김상옥 의사의 출생지인 ‘어의동’이 곧 ‘효제동’일 거라는 등식이 그대로 성립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고 하겠다.
더구나 『김상옥평전』 (2014), 148쪽에 정리된 자료를 재인용하면 부친 김귀현(金貴鉉, 1851~1918)의 경우, 호적부(戶籍簿)에 경성부 종로 6정목 210번지(호적지) → 종로 6정목 211번지(1915.6.1) → 종로 6정목 153번지(1916.8.10) → 창신동 551번지(1916.12.4)로 주소지 변동내역이 나타나 있다. 종로 6정목으로 표시된 지번들의 위치는 모두 옛 건덕방 어의동계에 속했던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만큼 이곳 역시 실제 생가터의 유력한 후보지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김상옥 의사 일가 관련 소유토지 분포현황
구분 | 『토지조사부』 (1912년) | 『경성부 지적목록』 (1917년판) | 『경성부 지적목록』 (1927년판) |
종로 6정목 211번지 (24평, 垈) | 김귀현(金貴鉉) | 김귀현(金貴鉉) | 오다카 츠네노스케 (大高常之介) |
창신동 487번지 (143평, 垈) | 이영훈(李永薰) | 이영훈(李永薰) | 김태용(金泰用) (487-3번지, 113평) |
창신동 493번지 (26평, 垈) | 김상옥(金相玉) | 김상옥(金相玉) | 국유(國有, 22평) 서계원(徐桂源, 4평) |
창신동 507번지 (46평, 垈) | 김상옥(金相玉) | 김상옥(金相玉) | 김상옥(金相玉) (507-1번지, 23평) |
창신동 511번지 (24평, 垈) | 한종률(韓鍾律) | 한종률(韓鍾律) | 김상옥(金相玉) |
(*) ‘김귀현’과 ‘김태용’은 각각 김상옥 의사의 ‘아버지’와 ‘아들’이다. |
아무튼 김상옥 의사로 출생지로 알려진 ‘어의동’이 곧 ‘효제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속단이며, 현재로서는 개략적인 후보지역을 유추하는 것만 가능할 뿐 아쉽더라도 구체적인 지번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논점 2: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진짜 범인’은 따로 있는 것인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에 종로경찰서 청사(옛 한성전기회사 사옥) 서편에 따로 서 있던 급사실(給仕室) 앞에서 폭탄이 터진 사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김상옥 의사가 행한 주요한 의거의 하나라는 것이 당연한 상식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그 현장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김상옥 의거터’라는 표제로 만들어 세운 역사문화유적표석(2016년 4월에 신형 표석으로 교체)까지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마당에, 이른바 ‘진짜 범인’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참으로 면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흘려듣기 어려운 흔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29년 3월 23일자에 수록된 「오개성상(五個星霜) 지난 금일(今日), 김상옥 사건에 의운(疑雲), 일시 세상을 진동한 김상옥 사건에 종로서 폭탄범은 다른 사람이라고,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은 타인(他人)?」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일시 조선 천지를 놀래게 하던 김상옥(金相玉) 사건이라 하면 벌써 만 5주년 전의 일이지만 사건이 워낙 세상을 경동시켰을 만큼 아직도 일반의 기억에 새로운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하여 최근에 한 새로운 사실이 발각되어 시내 모 경찰에서는 방금 그 천명(闡明)에 활동 중이라 한다. 김상옥이가 무덤에 들어간 지 5년 후인 오늘날에 새삼스럽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은 김상옥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진범인으로 지목받아 김상옥 사건에 유일한 공로자인 삼륜(三輪, 미와) 종로서 고등계 주임은 경관의 최고의 표창인 공로장(功勞章)까지 탔었는데 실상은 폭탄투척의 진범인은 김상옥이가 아니라는 것이 그 후에 우연히 발각되었으나 그 당시의 경찰부장이던 마야정일(馬野精一, 마노 세이이치) 씨는 공을 이룸에 급급하여 김상옥을 진범인 줄만 여기고 이때까지 지내왔으나 그 사실 진상이 차차 드러나자 필경은 모 경찰에서도 이 사건의 진상을 적발코저 방금 진범인을 수사 중이라더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라고 하며 이미 김상옥 의사의 소행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상태이고, 더구나 그 사건의 공로자로 종로경찰서의 경부(警部)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 고등계 주임)가 표창까지 받은 상태(『매일신보』 1923년 8월 14일자에 수록된 「양경관(兩警官)의 표창(表彰), 삼륜 율전 양씨」 제하의 관련기사를 참조)였으므로, 여기에 수록된 기사 내용은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을 참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들 만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람은 따로 있을 거라는 얘기는 1923년 사건 당시부터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어온 사항이었다.
1) 『동아일보』 1923년 3월 15일자(호외), 「폭탄사건(爆彈事件)과의 관계(關係)는 아직 판명되지 안했다고 경무국(警務局) 야마구치 고등과장 담(山口 高等課長 談)」 제하의 기사
2) 『조선일보』 1923년 3월 16일자,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폭탄범인(爆彈犯人), 상금(尙今) 누가 함인지 막연부지(漠然不知), 전기의 사실 내용을 볼 것 같으면 김상옥은 정녕 폭탄범이 아니다」 제하의 기사
3) 『동아일보』 1923년 5월 13일자, 「궁상(窮狀)에 동정(同情)하여 금백원(金百圓)을 주었을 뿐이요, 피고 윤익중 진술」 제하의 기사
이와는 별도로 『조선일보』 1923년 8월 14일자에 게재된 「잔소리」 코너에는 명확한 확인도 없이 공적명세서에 김상옥을 범인으로 기록하고 경무국에서 공로자표창까지 하였다면서 이러한 일제경찰의 행태를 꼬집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 지난 봄에 종로경찰서 폭탄이 떨어진 후로 연하여 삼판통 사건과 효제동 사건이 났으나 김상옥은 총에 맞아 죽은 결과 김상옥 사건의 연루의 공판이 끝이 나도록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더니
▲ 작일에는 이상 사건에 공로자로 삼륜(미와) 경부와 율전(쿠리다) 경부에게는 경무국에서 포창을 하였다는데 그 공적명세서에는 김상옥이가 그 범인인 것으로 기록하였다 한다. 본래 큰 사건이니까 범인도 많겠지만은
▲ 황옥의 밑에는 상해에서 김원봉에게 들었다는 말이 그 범인이 상해에 있었으나 자기 생명을 아끼여 못 잡았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한 의문이오, 연루자 공판 때까지도 그런 말은 조금도 없던 것이
▲ 공로자 포창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것을 보면 경관의 공로라는 것이 본래 비밀에서 많이 나는 것이니까 그러한지도 모르지만은 일반의 의심을 없게 하자면 김상옥이 죽던 날 그 사람이 종로경찰서 폭탄범이라고 세상에 발표한 것만은 아주 못하다고 하겠는 걸. 자기네가 포창을 하는데 그보다 더 큰 공로가 있다기로 관계할 일은 못되지만은 하도 말들이 많은 세상에 의심스러운 일은 자미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듣자 하니 역사학계의 한쪽에서는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의 당사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꽤나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측 정부위원(朝鮮側 政府委員)의 자격으로 제국의회(帝國議會, 1월 23일 개회)에 참석하기 위해 곧 일본으로 떠날 사이토 총독과 그를 전송할 총독부 고관들을 상대하여 경성역(京城驛)에서 저격 또는 폭살할 계획을 실행하려던 것이 김상옥 의사의 주된 목표였으므로, 이처럼 중차대한 거사를 앞두고 있던 찰나에 그 자신이 공연히 위험에 노출되는 상황을 자초하는 일을 벌일 까닭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러한 판단의 근거이다.
실제로 『매일신보』 1923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사이토 총독(齋藤總督), 17일 조(朝) 동상(東上)」 제하의 기사에는 사이토 총독이 경성역을 무사히(?) 빠져나간 상황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데, 이 날은 바로 삼판통 총격전이 벌어지던 바로 그 날이기도 했다.
사이토 총독은 예정과 여(如)히 17일 오전 10시 경성역발(京城驛發) 마츠무라 비서관(松村祕書官)을 수(隨)하고 동상(東上)의 도(途)에 취(就)하였는데 역두(驛頭)에는 총독부 각국부장(總督府 各局部長)을 시(始)하여 조선귀족(朝鮮貴族) 급(及) 기타 관민유지(其他 官民有志)의 전송(餞送)이 다(多)하였더라.
종로경찰서 폭탄사건으로 인하여 일제 경찰이 대대적인 범인색출과 검문검색에 나서는 상황이 촉발되었고, 결국 닷새 후에는 자신의 매제(妹弟)인 고봉근(高奉根, 1896~1961)의 삼판통(三坂通, 지금의 후암동) 집에 은신하고 있던 김상옥 의사의 신변이 탐지 노출되는 바람에 이곳에서 총격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토 총독이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경성역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이 삼판통 총격전이 벌어진 몇 시간 이후의 일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조선총독을 처단할 기회는 그것으로 저절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의 ‘진짜 범인’에 대한 마지막 기사는 『조선일보』 1929년 3월 26일자에 수록된 「종로서 폭탄범(鍾路署 爆彈犯), 최모(崔某) 잠입활동설(潛入活動說), 사오 년 동안의 운에 싸인 일」 제하의 기사인데, 여기에는 좀 특이하게도 그 주인공으로 ‘최 아무개’라는 청년을 거명하는 구절이 들어 있어서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부터 약 6개년 전에 시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아직까지 세상 사람의 기억에 새로운 터인 바 그때에 소관 종로서에서는 범인을 아무리 탐지하여 보았으나 종래 알 길이 없던 차에 마침 김상옥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폭탄사건의 진범인으로 인정하고 세간에 대하여 공표하여 오던 중 최근에 이르러 모 방면으로부터 그때 진범인은 김상옥이 아니고 실상은 최〇〇라는 청년으로 다시 해외로 도망하여 버린 것을 모르고 그리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요즈음에 전기 최〇〇이 다시 조선 안에 들어온 형적이 있다 하여 경찰당국에서는 그를 체포하고자 크게 활동중이라는데 일설에 의하면 최의 가족이 시내 모처에 아직 있다더라.
여기에서 지목하는 진범에 대한 후속기사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맺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잔뜩 궁금증만 남겨놓았을 따름이지 자세한 내막까지 확인할 재간은 없다. 그렇다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의거의 당사자는 과연 누구라는 것일까? 확실히 ‘진짜 범인’이 따로 있기는 한 것이었을까? 특히 마지막 기사에 등장하는 ‘최 아무개’라는 인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많이 늦었지만 지금에라도 우리가 하나씩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인 셈이다.
논점 3: 최후 총격전 당시의 ‘사살자’ 존재 유무는?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최후의 총격전이 벌어질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의 하나는 “수 백 명의 일제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수 십 명을 처단하고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식의 구절이다. 앞에서 인용했다시피 김상옥 의사의 동상에 부착된 약력사항에 “왜경 500여 명에게 포위되어 …… 수 십 명의 왜경을 살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며, 국립서울현충원의 묘비석에는 “일본군경 천 명 4중 포위, 3시간 교전 16명 처단”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1986년에 나온 『김상옥 나석주 항일실록』의 말미(213쪽)에 붙어 있는 ‘연보(年譜)’에도 “무장경관 1,000여 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으로 포위 …… 쿠리다 경부 외 15, 6명을 살상”이라고 적은 대목을 확인할 수 있다. 『김상옥평전』 (2014)과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특별판)』 (2019)에는 “군경 1000여 명을 동원 4중으로 포위 …… 16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찍이 1992년 1월에 국가보훈처가 김상옥 의사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것과 관련하여 공적사항(공훈전자사료관에 수록)을 정리한 것을 보면,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마침내 은신처를 탐지한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4백여 명(천여 명이라고도 한다)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경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서대문경찰서 경부(警部) 율전청조(栗田淸造)를 비롯한 수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다하였다. 이제는 항복하든가 자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생은 마치 상해를 떠나올 때 동지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마지막 탄환이 재인 권총을 머리에 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다.
여길 보면 사살된 일본인 경찰이 쿠리다 세이조(栗田淸造)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인 실명까지 거론된 쿠리다 경부(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 위의 인용문에 서대문경찰서라고 한 것은 착오)는 총알이 어깨에서 배를 뚫어 중상을 입었으나 실상 절명(絶命)에 이르지는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 『동아일보』 1923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중상(重傷)한 쿠리다 경부(栗田 警部), 총독부병원에 수용」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중상한 쿠리다 경부는 즉시 총독부병원으로 보내어 방금 치료중인데 생명에는 관계가 없을 듯하고 대략 30여 일간 치료하여야 전쾌되리라더라.
실제로 해마다 발간되는 『조선총독부 급 소속관서 직원록』을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서임(敍任) 및 사령(辭令)」 등의 관련 자료를 취합해보면, 1923년 이후 그의 생존사실과 더불어 대략 다음과 같은 경력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성동대문경찰서(1920.6 경부 승진) → 양주경찰서 서장(1924.1.11) → 정읍경찰서 서장(1925.11.4) → 이리경찰서 서장(1928.7.14) → 전라북도 경찰부 보안과 과장(1930.3.10) → 함흥경찰서 서장(1931.12.11/ 경시 승진) → 함경남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과장(1933.10.2) → 경성동대문경찰서 서장(1934.9.8) → 경성보호관찰소 보호사(保護司, 1936.12.21) → 의원면본관 퇴직(1940.11.22)
그는 멀쩡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김상옥 사건이 계기가 되어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그 말미에는 자신의 옛 근무처이자 효제동 총격전 사건의 관할관청이던 동대문경찰서의 서장이 됨으로써 금의환향에 버금가는 처우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퇴직 이후 시기에도 그는 동대문 경방단(警防團) 단장과 경성애마회(京城愛馬會) 고문의 직위도 맡았으며, 일제패망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르기까지 주소지를 ‘경성부 숭인정 178-1번지’에 두면서 여전히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면 쿠리다 경부 이외에 또 다른 사상자의 존재는 확인이 되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는 먼저 『매일신보』 1924년 1월 1일자(신년호)에 일지(日誌) 형식으로 정리된 「대정 (大正)12년(年) 조선사(朝鮮史)」 제하의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의 투탄 중경상자 7명
17일 용산 삼판통에서 김상옥에게 경관이 저격되어 사상 3명
22일 효제동에서 경관대가 김상옥 사살
여기에서 말하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때의 중경상자 7명은 때마침 그 앞을 지나던 행인들(매일신보 사원 5명이 포함된 세부 인적 사항은 『매일신보』 및 『동아일보』 1923년 11월 14일자에 수록)을 가리킨다. 그리고 삼판통 총격전 사상자 3명의 신상은 현장에서 즉사한 일본인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및 중상자인 이마세 킨타로(今瀨金太郞) 경부(종로경찰서 사법계 주임)와 우메다 신타로(梅田新太郞) 경부보(동대문경찰서 고등계 주임)인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에 있는 ‘효제동 총격전’에 관해서는 사상자에 대한 표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그 시절의 보도내용을 종합한 결과 이진옥(李鎭玉, 효제동 72번지)이라는 이웃집 노인이 유탄에 맞아 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추가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쿠리다 경부 이외에 또 다른 일본인 경찰이 죽거나 다쳤다는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한 사실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은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이다.
일찍이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는 초기에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열렸고, 1927년 5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다.
1935년에 이르러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어 시행되는 것으로 변경되긴 하였으나 이 행사는 근정전 용상을 제단으로 삼아 일제 패망 때까지 줄곧 지속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순직경찰관(제24회) 경방직원(제10회) 초혼제(1944년 10월 27일, 경복궁 근정전)’ 당시까지의 순직자(조선인과 일본인 모두 포함)는 경찰관이 403명에 소방수가 55명으로 총인원이 458명에 달했다.
그러니까 1937년에 발간된 『향사록』은 바로 그 해 5월 2일에 열린 초혼제 행사 때에 실제 사용된 것이며, 여기에는 바로 그 시점까지 누적된 순직자의 명단이 망라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리 살펴봐도 1923년 당시의 김상옥 의거와 관련하여 숨진 일제 경찰로서는 순사부장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단 사람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을 따름이다.
대정 12년(1923년) 1월 17일, 경성부 삼판통에서 잠복중 흉기를 소지한 불령선인(不逞鮮人) 김상옥을 체포할 제에 범인이 난사한 권총탄에 쓰러졌다.
이 대목에 있어서 일제 경찰이 자신들의 과오를 은폐하고자 고의로 이를 누락했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으나 딱히 이를 수긍할 만한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실제로는 1명의 중상자(즉 쿠리다 경부)가 있었고 그나마도 그 이후의 생존여부는 확인도 없이 사살자로 단정하여 그 이름이 거듭 등장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언제부터 이 숫자가 수 십 명이라거나 16명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둔갑하여 덧붙여지거나 늘어난 것인지 그 과정을 역추적하여 좀 더 엄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이 한번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도 싶다.
논점 4: 김상옥 의사의 최후는 ‘단발’의 ‘자결’이었던가?
김상옥 의사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한번쯤 다시 짚어보아야 할 대목은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남은 총탄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서술구조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신문보도에는 — 일제 경찰의 고의적인 사실은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 한결 같이 “범인 사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상옥 의사의 최후는 과연 ‘자결’인가, ‘피격’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김상옥 의사가 격렬한 총격전에 오가는 도중에 숨졌고, 더구나 일제 경찰이 명확하게 조준하여 사격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이므로, 자세한 검시보고서(檢屍報告書)와 같은 일차 자료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이를 명쾌하게 가려내어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만, 『매일신보』 1923년 1월 23일자에 수록된 「검사출동(檢事出動) 사체를 검시해, 전중환병원장과」 제하의 기사를 통해 타나카마루병원(田中丸病院, 서소문정 21번지)의 원장 타나카마루 지헤이(田中丸治平)에 의해 검시와 관련된 채증이 이뤄진 사실이 있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확인된다.
경관의 포위에 대항할 뿐만 아니라 육혈포를 두 자루나 가지고 난사하던 범인은 현장에서 즉사하였으므로 동대문서로부터 즉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급히 전화를 거는 동시에 지난 17일 아침 5시에 시내 모처에서 경관을 살해한 당시 검증한 주정(酒井, 사카이) 검사에게도 급히 전화하였으매 주정 검사는 식산(植山, 우에야마) 서기를 대동하여 동 9시에 현장에 급거 출장하는 동시에 시원(柿原, 카키하라) 검사정과 내량정(奈良井, 나라이) 차석검사도 현장에 급거 출장하여 전중환(田中丸, 타나카마루) 병원장으로 하여금 상세히 검증케 하였는데 검사정과 내량정 검사는 오전중에 돌아가고 주정 검사는 오후 1시까지도 현장에서 검증중이었더라.
[범인사체인도(犯人死體引渡), 유족에게 인도]
총살을 당하고 현장에서 엎더진 범인은 시체의 검사를 마친 후 상세히 그 도면(圖面)을 그리고 동대문 밖에 있는 범인의 가족을 불러 당일 현장에서 시체를 인도하였더라.
그런데 김상옥 의사가 어떻게 최후를 맞이하였는지는 그 당시부터 꽤나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던 사안이었던 모양이다. 이 문제에 관해 특히 『조선일보』 1923년 3월 20일자에 게재된 「잔소리」 코너에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거론된 내용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일전 밤에 시내 경성극장에서는 일시 경성 천지를 혼동하던 김상옥 사건의 자초지종 사실을 들어가지고 신파극을 출연하였다나.
▲ 그런데 김상옥이가 효제동에서 최후 일각까지 경관대와 격투하다가 몸을 마친 것은 세상이 다 아나 자살이라고도 하고 피살이라고도 하여 그 사실의 진정을 알 수가 없어 궁금하던 터인데 경찰당국자들은 피살인 것 같이 말하는 터이더니 연극하는 데에서 자살한 것이 분명하더라지.
▲ 쉬쉬하고 숨기는 일일수록 남이 먼저 아는 법이지만은 그와 같이 숨기던 일이 필경에는 연극장에서 공개까지 하게 되니 경관의 면피도 땅둡게가 아니면 좀 어떠한 생각이 있을 모양이지.
▲ 이번 그 연극은 무슨 생각으로 하게 하였는지 구경한 사람들의 비평은 좋지 못한 모양이던걸. 조선 사람이 보고 좋지 않은 비평을 한다 하면 감정이라는 혐의도 있겠지만은 일본 사람들이 보고 비평하기를 경관의 순직을 장려하기 위하여야 한다는 연극이 경관의 얼굴에 진흙칠을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하니 그 꼴도 가관이지. 참 세상 일을 다 잘하는 체 하는 그 양반네 일도 요런 일이 많단 말이야.
물론 김상옥 의사가 ‘자결’ 또는 ‘자살’했다고 드러내놓고 표기한 용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지만, 이것 말고도 『경성일보』 1924년 1월 12일자에 수록된 「상기(想起)하다 거년(去年)의 금야(今夜), 종로서(鍾路署)의 폭탄사건(爆彈事件), 어제 서원(署員)을 모아 격려(激勵)했던 모리 서장(森署長)」 제하의 기사에는 모리 로쿠지(森六治, 1923.3.30~1930.5.2 재임) 종로경찰서장과의 대담에 앞서 “권총을 난사하여 부상자를 발생하는 등 교전(交戰)하기를 약 1시간 뒤 도주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단념(斷念)하고 자살(自殺)을 했다”고 적어놓은 문장이 등장한다. 또한 『동아일보』 1935년 4월 5일자에 수록된 ‘창간 15년 특집판’의 「풍우 십오년(風雨 十五年); 대정 12년(서기 1923년)」 항목에서 “의열단 김상옥 사건 …… 경관 측에 사상자 5명을 내고 자기(自己)의 방총(放銃)으로 자살(自殺)하였다”는 표현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최후와 관련하여 약간 이색적인 흔적 하나를 소개할 수 있는데, 『매일신보』 1923년 3월 16일자에 수록된 「범인사살 당시(犯人射殺 當時)의 광경을 목도한 이태성의 딸 순로 양의 자세한 그 말」 제하의 기사 일부가 바로 그것이다.
범인이 총살되던 당시의 광경과 및 범인의 회중에 불온문서 칠십 장과 쓰다 남은 탄환 여덟 발과 또는 구연발 ‘모젤’식 권총 한 자루와 및 육연발 구식 권총 한 자루를 쥐인 채 죽었다 함은 그때에 적적히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범인은 항상 자기에 대한 경찰의 행동을 알고자 신문을 얻어 보던 중에 경성일보(京城日報) 한 장이 품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 (하략).
여길 보면 분명히 “쓰다 남은 탄환 여덟 발”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것이야 말로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는 서술구조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언급이 아닐 수 없다. 이미 100년의 세월이 훌쩍 흐른 상태이지만, 김상옥 의사의 강렬했던 의열투쟁과 관련하여 후대에 군살이 덧붙여진 기록들은 여러 모로 재검토의 여지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진 01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1998년 5월 28일 제막)이다.
사진 02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김상옥 의사(정진주 합장)의 묘비석 후면 모습이다.
사진 03 어의동(於義洞)의 개략적인 위치가 표시된 「경성도(京城圖)」의 일부이다.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한국건축조사보고』, 1904]
사진 04 ‘영덕철물점(永德鐵物店)’으로 사용되던 김상옥 의사의 옛집과 문패의 모습이다. 2층에는 중화요리점인 ‘동춘루(東春樓)’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16일자, 호외)
사진 05 동대문 밖 옛 영덕철물점 자리(창신동 487번지) 일대의 현재 모습이다. 김상옥 의사는 ‘창신동 493번지’에 먼저 가게터를 잡았으나 이곳이 도로확장으로 헐리면서 재차 철물점을 옮겨야 했다.
사진 06 폭탄투척사건이 벌어진 종로경찰서(옛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모습이다. 왼쪽에 보이는 낮은 건물이 투척 지점이다. (『동아일보』 1929년 9월 4일자)
사진 07 ‘최 아무개’라는 청년이 ‘진짜 범인’으로 지목되어 있는 『조선일보』 1929년 3월 26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사진 08 1923년 새해 첫날부터 종전의 ‘남대문정거장’은 ‘경성역’으로 개칭되었다. (『매일신보』 1923년 1월 1일자)
사진 09 삼판통 항거가 있던 바로 그날 아침에 사이토 총독은 경성역을 빠져나가 자기의 본국으로 향했다. (『매일신보』 1923년 1월 18일자)
사진 10 『경성일보』 1936년 2월 7일자에는 ‘시정 25주년’과 관련하여 쿠리다 세이조 동대문경찰서장의 김상옥 사건 당시 활약상을 소개하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11 쿠리다 경부는 멀쩡히 살아남아 1923년 8월 10일에 ‘경찰공로기장(警察功勞記章) 제17호’를 수여받기까지 하였다. (『조선경찰관순직사(부 현직경찰관공로집)』, 1933)
사진 12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에 기재된 타무라 쵸시치(田村長七) 순사부장의 이름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사진 13 김상옥 의사의 최후가 자결인지 피살인지에 대한 문제를 꼬집고 있는 『조선일보』 1923년 3월 20일자의 「잔소리」 코너이다.
사진 14 『매일신보』 1923년 3월 16일자의 보도내용에는 “쓰다 남은 탄환 여덟 발”이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첫댓글 이 글은 『민족사랑』 2023년 3월호와 4월호에 걸쳐 2회로 나눠 수록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