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아트스페이스 관장이신 이주헌님의 글을 옮긴건데요..
저같이 시간이 없다하는 게으른 사람에겐 이런 글들이 많은 도움이되
죠
. 엎르린 여인 1917년.
녹색블라우스를 입은 여인 1913년
. 포옹 1917년.
팜므파탈(femme fatale)이란 요부를 뜻한다.
요부란 요사스럽고 요염하여 남자를 호리는 여자를 이르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여성을 비하하는 의식이 진하게 깔려 있다.
이와 유사한 남성의 관념은 찾기 어려운, 부정일변도의 여성상이기
때문이다.
팜므파탈이 특별히 예술 속에서 활발히 표현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이다.
이는 당시 유럽 사회 전체의 도덕적 붕괴와 급속히 이뤄진 여권 신장
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필립 줄리앙이라는 이가 ‘데카당스를 꿈꾸는 사람들’
이라는 글에 쓴 다음과 같은 글귀는 매우 인상적이다.
‘물신주의에 등을 돌렸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바람직한 모습
으로 남기를 원하는 여인들은 심미주의자들에 의해 저속하다는 비난
을 받지 않기를 원하는 한, 한 송이 백합이 되어야만 했다.
만일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여인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악마적인 욕
망을 일으켜줄 것으로 기대됐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쉴레는 이 요부상을 개성적으로 표현한 대표적
인 현대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난 요부들이 꼭 부정적으로 형상화된 것만
은 아니다.
오히려 쉴레는 그 요부상을 통해 요부들보다 더 부도덕한 자신의 시
대를 통렬히 비웃곤 했다.
1912년 5월7일 24일 간의 구류 끝에 쉴레는 재판정에서 미성년자 납
치 및 유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예술이란 이렇게 늘 쓸데 없는 소란과 ‘정력 낭비’를 추종자처럼
달고다녀야 하는 걸까?
쉴레는 복잡한 심회를 다소나마 달래보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곤 쉴레가 겪은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쉴레는 오스트리아 남부의 노이렌바흐가 창작에 몰두하기에 더없이
좋은 항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에 정착을 해 그림을 그렸다.
남녀의 나신, 특히 어린 소녀의 나신을 그리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쉴레는 ‘당연히’ 이 지역 소녀들을 자신의 작업실로 불러들였다.
성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하는 소녀들의 그 풋풋한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기면서 쉴레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이미지를 형상
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열네살짜리 타트야나 게오르게트-안나도 그 모델 중의 하나였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안 타트야나의 아버지가 경찰에 쉴레를 납치 및 유
인 혐의로 고발을 하면서 시작됐다.
어린 소녀들을 춘화의 모델로 쓰고, 그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나쁜 그
림들을 보였다는 게 해군장교 출신인 타트야나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4월13일 쉴레는 체포됐고, 판결이 있기까지 유치장 생활을 해야 했
다.
그런데 쉴레의 입장에서는 졸지에 얻게 된 피의자 신분도 견디기 힘
든 것이었지만, 막상 유치장에 갇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게 더없이
괴로웠다.
“마침내, 마침내, 마침내, 마침내 내 고통이 조금은 덜어졌다.
마침내 종이와 연필·붓·물감 등 화구들을 받았다.
정말 고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야만적이고 희미하고 잔인한 시
간들, 형태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잿빛의 단조로운 시간들, 모든 것을
뺏긴 채,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춥고 삭막한 벽에 갇혀 동물처럼 버
텨야만 했다.”
거듭된 항의 끝에 사흘이 지나 화구를 받아들고서는 그동안의 답답했
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토해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그림이란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삶의 의지처였다.
어쨌든 그렇게 버틴 끝에 그는 풀려났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벌거벗은
나신들을 찾아 나섰다.
소년 시절부터 어린 누이동생 게르티의 누드를 그렸고, 게르티가 성
숙한 뒤에도 계속 자신의 누드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쉴레의 누
드에 대한 병적인 집착은 일찍부터 예견돼 있었다.
사실 그런 관계는 오누이의 사이를 넘어선 것으로 의심을 받을 여지
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쉴레의 입장에서 관능과 소녀의 순수를 결합해 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예술적 주제도 없었다.
그것들은 대척점에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런 감
성이었다.
불가항력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미의 블랙홀이었다.
쉴레는 1890년 빈 근처 툴른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별세해 삼촌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아
공부했다.
어머니는 쉴레에게 냉담한 편이었는데, 이런 우울한 환경에서 그나마
즐거움이 있었다고 한다면 골똘히 공상에 잠기는 일과 어린 동생 게
르티의 누드를 그리는 일이었다.
16살 때 빈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한 쉴레는 3년 뒤 유명한 ‘키스
’의 화가 클림트의 도움을 얻어 전시를 갖게 된다.
클림트와 더불어 20세기 내내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빈의 에로
티시즘 미학을 여는 스타트라인을 이때 끊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이 무렵 빈에서 꽃피어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당시 오스트리아는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
다.
클림트·쉴레·코코쉬카는 이런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힘껏 화포에
쏟아부은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추종이나 부화뇌동이 아니었다.
사회가 그렇게 퇴폐하기까지 쌓이고 쌓인 모순을 터뜨리고 이에 반항
하는 선동자의 모습이 그들의 예술에는 배어 있었다.
특히 쉴레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처럼 반항자의 극단을
보여준 작가였다.
1909년 국립미술아카데미 3학년 때 학교측에 학생들의 자유를 보다
신장하라고 요구하는 진정서를 썼다가 ‘잘린’ 에피소드에서 쉴레
의 이런 반항정신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쉴레의 관능적인 인물상이 갖는 특징은 무엇보다 그들의 도발적인 제
스처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화가가 시키는 대로 그저 다소곳이 포즈를 잡는 그런 존재들
이 아니다.
관자를 의식하고 스스로를 의식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욕망에 취해 있다.
그들은 관자와 함께 그 성적 욕망을 나누고자 한다.
하지만 강압적이지는 않다.
퇴폐와 퇴영의 그림자를 안고 그저 취한 듯 비틀거리며 감싸안으려
할 뿐이다.
‘엎드린 여인’(1917) ‘다리를 벌리고 가로누운 여인’(1914) ‘포
옹’(1917) 등에서 그 자취를 생생히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곧 있을 1차대전과 2차대전에 대한 공포와 흔들림의
예언적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관능적이라 해도 쉴레의 인물상은 뼈마디가 강조되고 선묘가 도
드라져 무언가 딱딱하고 부러지기 쉽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과잉된 의식과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육체가 빚는 부조화의 긴
장이 화면 전반에 일종의 살기 같은 것을 더한다.
그의 누드는 결국 당시의 사회에 대한 저항 같은 것이었다.
1915년 모델과의 동거생활을 청산한 쉴레는 한 동네 처녀를 만나 결
혼했다.
그의 작품을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의 결혼생활이 비정상적이었
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겠지만, 생각밖으로 그는 성공적인 신혼생활
을 보냈다.
정서적으로도 많이 안정됐고, 그림도 점차 부드러워져갔다.
하지만 그는 역시 천재였다.
운명은 천재를 시기한다고 했던가?
1918년 유럽을 휩쓴 스페인 독감에 걸린 그는 같은 병으로 사흘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당시 임신 중이었다)을 따라 10월31일 나란히 숨을
거두었다.
겨우 향년 28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