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9 - 독도전망대에서 해무로 보지 못하고 내려와 독도 박물관을 구경하다!
울릉도 여행 사흘째인 8월 26일 아침에 도동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저동을 지나 봉래
폭포 정류소 에 내려 자연 에어컨이라는 동굴을 보고 전나무 숲 어덕길을 30분
을 올라 봉래폭포를 보고는 돌아와 도동 마을에서 케이블카로 독도 전망대에 오릅니다.
어제는 독도가 보였다는데 오늘은 짙은 해무로 보지는 못하고 내려와 독도박물관으로 들어가니 런던
대영박물관과 미술관처럼 입장료를 받지 않아 기분이 좋은데 자료들이 많은지라 천천히 둘러 봅니다.
조선 중종 1530년에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지도에는 세종실록지리지 영향 탓인지
우산도(독도?)가 울릉도 서쪽에 그려지기도 하는데, 18세기 작성된 정상기의「동국지도」
는 무릉은 왼쪽, 우산은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스페인에 전시된 '조선왕국 전도'
에서는 울릉도를 반릉도(Fan-ling-tao)로, 우산도를 천산도(Tchian-chan-tao)로 적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876년까지는 울릉도는 '다케시마(竹島)' 로 불렸고 독도는 '마쓰시마(松島/
송도)' 라고 불렸으니, 조선측 만기요람에도 “울릉과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왜에서 송도라 부른다.”일본측 은주시청합기에는 “일본에서 1박 2일
거리에 송도(독도)가 있고 다시 거기서 1일 거리에 죽도(울릉도) 가 있어 고려가 보인다.”
독도는 한국에서 '우산도', 일본에서는 '마쓰시마' 로 인식되었는데 안용복 이후 1696년 쟁계사건이
있었고 1849년 리앙쿠르호 이후 아르고너트호가 울릉도 측량 과정에서 위도, 경도 표기를
잘못 기재해 위치가 바뀐지라(?) 일본 명칭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다줄레(울릉도) 를
'마쓰시마' 서쪽의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 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성에 역수입
되었지만 메이지 정부는 옛날 대로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 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서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만들면서 "石島(석도)"를 죽도와 함께
울릉도 행정구역에 소속시키는데 한국에서는 이 석도를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에서 울릉도
에 인접한 관음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1899년 일본 해군 발행 조선수로지 전라남도
소안항 조에 석도(石島) 의 발음을 トヽクソム(토토쿠소무=>독섬) 로 했고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일지에“리앙코루도 암(岩), 한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도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마쓰시마/송도(松島)', 때로 '다케시마(竹島)', 조선말 고종이 말한 송죽도(松竹島)
대한제국의 석도(石島) 등등... 이 때문에 한국 측이 '이 섬은 독도다' 라고 하면 지칭하면, 일본 측에서는
'이 섬은 독도가 아니다.' 라며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이는 대개 죽도(죽서도) 라고 주장합니다.
현재 ‘돌(石)’ 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이전의 ‘돍’ 으로 니타카호와 조우한 한인이 한자 독(獨)으로
표기해 일본인들에게 알려주었고, 1906년 오키섬의 일본 행정관리들이 울릉도에 방문해 울도군수 심흥택
에게 사용하고, 심흥택이 일본인들이 사용한 명칭을 공식문서에 옮겨 적으면서 독도(獨島)의 한자 표기로
굳어졌지만, 울릉도민들은 1950년 까지도 '독섬' 이라는 한자 표기 이전의 고유 발음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618년 오야 진키치(大谷甚吉) 와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 는 동해 한가운데 있는
다케시마라는 섬에 도항하기를 요청했고, 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아 운행을 하게 됩니다.
“호키국(伯耆国) 요나고(米子)에서 몇해전 다케시마(울릉도)에 도항했다고 합니다. 요나고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와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의 도항 청원을 장군(쇼군)님께 여쭙자 승인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어 도항 허가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 1618년”
“다케시마(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주회 20정(町) 정도의 작은 섬이 있는데 초목이 없는 바위산
으로 25년전에 아베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님의 중개로 하사하여 도항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강치의 기름을 조금 얻고 있습니다. - 1681년(엔포 9년) 5월 오오야
(大谷) 가에 숙박한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큐에몬 가쓰노부(九右衛門勝信) 의 답변“
이때 도항을 한 기간은 안용복에 의해 저지된 1696년 까지로 일본은 78년이나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을 왕래
하며 물고기와 전복을 잡고 울릉도의 울창한 산림에서 나무를 베어내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것입니다.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소위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은주) 까지로 한다.-『은주시청합기』「국대기(國代記)」,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 1667년”
당시 일본 어부들은 섬(울릉도)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물고기 잡으러 가는 일본
밖의 무인도 정도로 취급한 듯 보이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해 조선인들의 울릉도 민간출입이 엄금되어, 근처 다른 국가들이 왔다 가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덕분에 오야, 무라카와 가는 울릉도를 일터로 삼았으며, 본의 아니게 조선땅을 무단점거해
버리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하지만 울릉도는 이미 조선 영토로 규정되어 있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에서 발급한 다케시마 도해 면허는 처음 부터 조선 측의 아무런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두 국가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태가 끝난 것은 1693년, 울릉도로 일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일본인들과
분쟁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오야 가문 사람들은
안용복등 조선인들의 난입(?) 때문에 전복을 잡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인
들에게 항의한 것인데...... 이때 조선기록에는 독도를 자산도(子山島)로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조선인대로, 일본인들은 일본인대로 "여긴 우리땅이야" 를 시전하며 분쟁
이 발생하였고, 오야 가는 안용복등 조선인 2명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본 정부에
항의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은 공도정책으로 민간출입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
이 밝혀지면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오히려 일본이 적극적인 반발을 실시하게 된 셈입니다.
3년이 지난 1696년 6월, 안용복은 사람을 모아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에서 일본인을 내쫓은뒤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슈 번주와 담판을 짓는데, 에도 막부는 쟁계 사건의 여파로 쇼군이
직접 나서서 안용복의 2차 도일 이전인 1월에 다케시마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고 도해를
금지한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이듬해인 1697년이 되어서야 조선으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마쓰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郞)가 이나바(因幡), 호키(伯耆)를 다스리던 때에 청원이 있었던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앞으로 금지를 분부하는 취지의 상의가 있으므로 이해하길 바란다.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 1696년”
도해금지 봉서에 대해 한국측에서는 울릉도 및 독도 모두 에도 막부가 도해금지령을 내렸다고 해석하는데
비해, 일본에서는“다케시마 ”도항을 금지한다고 했으니 일본은 당시 울릉도를 다케시마(죽도)
그리고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만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1789년에도 영국의 아르고노트 호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아르고노트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측량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로 실제 울릉도의 위치에서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
하였는데, 울릉도는 2년 전인 1787년에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측량하고 다줄레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상태였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아르고노트 섬이 나란히 등장한 것입니다?
1840년에 독일인 지볼트가 지도를 제작하면서 영국의 측량과 일본의 명칭을 받아들여 서쪽
의 아르고노트 섬을 다케시마, 동쪽의 다줄레 섬을 마쓰시마로 비정하면서
일본측에서 독도를 가리키던 '마쓰시마(松島)' 라는 이름은 울릉도로 옮겨가고,
정작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竹島)' 라는 이름은 그 실체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9년 뒤인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에 의해 독도가 측량되어 리앙쿠르 암초라고 명명되었고
1855년에 러시아의 올리부차호와 영국의 호네트호에 의해 독도가 정확히 측량되고 아르고노트 섬의
존재가 부정되면서 이전의 잘못된 지리 지식은 바로잡혔지만, 그럼에도 지볼트의 지도가 역수입된
일본에서는 서구의 해안 측량 결과를 맹신한 나머지 울릉도는 다케시마, 독도는 마쓰시마로 인식합니다.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일-메이지 정부)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울릉도를 마쓰시마로
서로 바꾼 다음에 다케시마(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는데.... 이름을 바꾼 이유를 생각해
보면 1618년에 호키번을 통해 에도막부는 죽도(다케시마) 도해봉서를 발급했는데,
울릉도는 조선땅이니 그럼 저 서류는 불법을 저질렀으니 무효인지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인 독도를 다케시마로 고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도해금지령이 유명무실해 지자 다시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의
일본 어부들은 빈 섬인 울릉도에 상륙해 움막을 짓고 고기를 잡고 산림을
벌채하다가 1881년에 검찰사 이규원에게 백 수십명이 적발되어 쫃겨나는데.....
일본인들이야 오랫동안 두 섬에서 조업한 기득권을 주장할테지만 한국은 실효지배
를 하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단지 네델란드헤이그 국제
사법재판소에 가더라도 재판에서 이길 자료와 논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혹시나 햇더니 역시 자료가 전혀 없으니....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의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 24대가 76개의 폭탄을 투하한 폭격 연습으로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 20척 가운데 14척이 침몰했는데, 당국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으니
어선 1척당 한명으로 줄여서 다르게 보도한 것으로 어민들은 “희생자가 3백명” 도 넘는다고 말합니다.
1950년 6월 8일 피격 2주년에 조재천 경북지사등은 “독도에 희생자 위령비” 를 세웠는데
"반미 감정" 이 대두되는 것을 꺼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석은 감쪽 같이 사라
졌지만 당시 분위기는 진상 조사나 다시 비석을 세우기 힘든 시대라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독도 박물관을 나오니 그 아래는 특별전시관이 있어 뭣하는 곳인가 싶어 둘러보니 독독박물관을 세운
분을 기념하는 개인전시관인데 ehrreh 박물관 입구에도 그분의 엄청 큰 동상이 보이더니 하신
일은 훌륭해 존경할만 하지만 그럼 이 전시 건물을 개인 자비로 했는지 아님 국고인지가 궁금해 집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거리를 구경
하고는 도동항으로 찾아가서는 항구와 부두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봅니다.
첫댓글 독도는 우리나라섬이 맞는데 일본은 자꾸 자기꺼라고 우기네요.
언젠가는.... 저 섬으로
한일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