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인 설교의 이해
Ⅰ. 구속사적인 설교
구속사적인 설교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명한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해서 하는 설교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성경 해석을 설교에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본 논문 연구의 중요 문제이다. 구속(救贖)이란 일반적으로 속죄라고 불리어 온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속죄는 하나님께서 아들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백성이 당할 저주의 진노를 내려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죄에서 구원하신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드려 피 흘림의 죽음을 당하신 희생적 헌신제사가 드려진 것이다. 그리고 구속(redemption) 개념은 값을 지불함으로써 해방을 보장하는 속량(贖良)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으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으로 말씀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마20:28).
1. 설교의 정의가 갖는 구속사적인 설교
곽안련은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우선 자기가 하려고 하는 그 일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파악하는 것이 극히 중요한 일이다. 만일 이를 잘못하면 모든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이요 때때로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설교는 더욱 그러하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그 이상과 목적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하다. 이런 사람은 열심히 일한다. 아니 지나치게 일을 한다. 그렇지만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라고 하여, 설교의 정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설교가 행해져야 함을 말한다. 사실, 설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가 아닌 자기 궤변, 교훈을 늘어놓고 있는 실정임으로 통감한다. 곽안련은 설교의 정의를 내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가장 좋은 정의로써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헤릭 존슨(Herrick Johnson)을 들고 있다. 헤릭 존슨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계획과 목적에서 사람을 감동하도록 권면하는 법 있는 종교적 강화(宗敎的講話)이다” 라고 하였다. 이 사실은 설교의 어원적 근원인 ‘케류그마’, ‘케류세인’, ‘디다케’라는 원어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다. ‘케류그마’는 전달자가 어떤 소식을 알리기 위한 복음, 전도, 설교, 선교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케류세인’은 케류그마보다 정돈된 의미의 말로 사용되고 있는데, 설교, 전파, 선교, 고지 등으로 번역되어 신약에서 설교라는 뜻으로 약 70회 정도 사용되었다. 또한 ‘디다케’는 교훈, 교육, 가르친다는 뜻으로 케류그마와 케류세인의 의미를 다 내포하고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적 권위로 강화(또는 강론) 되는 것으로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 신계시성(神啓示性)과 절대적 구원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화(강론)하여 전하는 설교는 “말로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서”이며(살전1:5), 또한 설교를 듣는 것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게 된다.”(살전1:6). 사실 설교는 전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에게 생명이요 곧 구원이었다.
이때 그 설교는 구속사적인 설교여야 한다. 성경의 기록된 역사는 두 가지 극점, 곧 하나님과 인간이 있는데, 그 역사에서 하나님은 항상 앞서 나오시고 하나님이 선제권을 가지시며 규칙들을 선언하시며 구원을 이루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역과 그 분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설교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말해야 하지,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기록된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으로부터 묘사되고, 그 범위 안에서 인간적 반응이 나타난다. 구약에 기록된 역사를 연구할 때 설교자가 물어야 하는 첫 번째의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며, 무엇을 의도하시느냐는 것이다. 또 그 시각으로부터 다음으로 설교자는 인간의 행동을 고려해야 한다.
이는 신약에 기록된 역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사람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때에도 예수님과 그 분의 사역과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느냐를 중심으로 삼아 그것으로부터 오늘 신자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면 되느냐의 문제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성경의 기록 목적이 분명히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설교에서도 이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행하신 사역인 구속을 설교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고 말하였으며,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이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된 것”(눅24:46-47) 이라고 한 후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8)고 하면서 사도의 직무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행1:22)라고 말하였다. 이는 성경의 모든 글과 이를 전하는 증인의 말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설교의 초점을 결정하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구속이다.
2. 구속사적인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중요성
구속사적 설교는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최고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영광이요 특권이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자라고 할 때,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 하셔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또한 알리게 하셨다고 할 때 정말 그렇다(엡1:8-9). 하늘에 속한 이 신령한 복으로 복 주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함께 찬미하게 하시는(엡1:3-6) 이 설교의 직무는 최고의 기쁨이요 자랑이요 영광이요 특권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곽안련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귀한 특권을 천사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목회자에게 주셨으니 어찌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완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자기 자신이 누리는 기쁨이나 자랑이나 영광, 그 특권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마땅하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계획하심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으로서 설교하게 하시는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목회자가 아닌 다른 것 곧, 천사에게라도 복음을 전하는 입을 열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변하시지 않는다. 불변하여 반드시 이루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대한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는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으며(마21:42), 사람들이 잠잠하여 외치지 않으면 돌들로라도 외치게 하신다고 하셨으며(눅19:40),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고전1:21)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설교는 그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 주도하심에 의해서이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는 말씀은 성경과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교도들의 경전과는 다른 것임을 의미한다. 성경은 ‘유기적 완전축자 영감설’로 말하고 있는 대로 기록자가 계시자이신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빠짐없이 기록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 주도하심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으로 모든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과 그 계획하심이 전혀 오류 없이, 그리고 가감 없이 다 완전히 이루어진다(마5:17-18).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서 운동력이 있으며 세세토록 있다(벧전1:23-24).
따라서 목회자가 설교함에 있어선 목회자 자신 스스로의 학식과 그 지혜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도록 조명하시는 역사에 의지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기록되어진 진리의 말씀이 믿는 자들 안에서 진리로 역사 되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다(요14:16-17).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인 믿는 자와 함께 계셔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신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신다. 과연 성령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요14:26). 이에 있어서 곽안련은 한 설교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성령의 힘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서 설교하는 목회자는 설교하는 그 직무로 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 설교하는 그 직무로 해서 교만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설교하여 봉사의 직무를 다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며,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좋게 하기 위하여 설교를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며, 참 복음을 설교하는 것으로 행하여야 한다.
그래서 설교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자신을 자랑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겸손함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세워져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내며 다른 복음으로 변질시키지 않고 지켜 나가게 된다(갈1:6).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설교가 성경적인 설교요 복음적인 설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설교여야 한다고 할 때 사사로이 행하는, 그렇게 정말 소홀히 행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구속사적으로 한다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특징을 가지는 동시에 구원의 특징도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 중에 일어나는 몇몇 재미있는 사건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세기 동안 구원을 이루어 오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의 길로 이끄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성경은 구속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적 위치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단지 그의 행동과 말씀을 기록하는 복음서에 한정되지 않고 구약에도 해당된다. 또 예수님의 중심성은 그 분이 승천한 후에도 계속된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을 말한다. 이상은 설교자의 설교가 성경의 어느 것에서 하는 것이든지 간에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구원과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설교자는 여러 방면으로부터 구원을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구속사적인 설교의 권위
설교하는 목회자가 권위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설교에 있다. 이때 설교하는 목회자가 권위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설교를 잘 한다’, ‘설교를 은혜롭게 한다’, ‘능력 있는 설교를 한다’ 등등에 사로 잡혀서 설교를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의해서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설교의 권위는 설교하는 설교자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설교를 들은 성도들에 의해서도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설교 그 자체가 권위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절대적 신계시(神啓示)와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서, 교회의 생명이 되고 구속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나 설교자가 설교한 설교 내용문과 방식 그런 것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구원의 복음으로 바르게 증거 되고 있는 데 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에 의해서 풀어 설명되어지지 않고 그대로 읽혀지는 것으로 설교되었다고 할지라도 권위가 있다. 성경은 ‘신언’(神言)으로서 곧, 신적 권위이기 때문이다(계1:1). 따라서 설교자가 그것을 얼마나 자세하고 은혜롭게 풀어 설교했느냐에 의해 설교의 권위가 세워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설교하는 목회자의 할 일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복음에 의지하였으며, 또한 성령의 가르침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 지식과 그 믿음으로 설교하였는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설교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설교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설교라고 하면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설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의에서 떠나 자의적인 생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설명하여 억지 이해를 구하려 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의 권위가 없다. 아무리 성도들에게 좋게 들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은혜로운 설교는 아니다. 설교가 성도들에게 좋게 들린 것하고 설교가 은혜로운 것하고는 전혀 다른 것인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 잘못 사용하고 있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설교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있다고 하면 설교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갈1:8). 그러므로 설교하는 목회자는 설교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시고 목회자로 세우신 데 대해 사명을 다해야 한다. 엄밀하게 보면 목회자는 ‘가르치는 자’요 ‘돌보는 자’인데, 그것은 교회를 운영력, 행정력, 조직력, 사업력 등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일을 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는 자이다(엡4:11-13). 그러므로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또한 성도의 신앙을 보호하고 양육한다.
설교하는 목회자가 설교자에 대한 인식, 곧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 설교의 권위에 의한 설교를 한다고 하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요소가 동반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에 의하여 설교가 행해지며(고후5:14), 둘째는 할 수만 있으면 자기가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라도 복음을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자에게 전하고자 하여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설교를 할 것이며(롬9:3), 셋째는 복음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진 교훈의 풍조에 위협받아 대적되거나 다른 복음화 될 때(엡4:14), 또한 그렇게 변질된 복음으로 설교되는 것에 대해 분연히 일사각오 할 것이다. 또한 설교하는 목회자가 육신의 권리를 인해 복음의 장애가 되게 하여 훼방하는 것에 대해서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랑스런 복음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고자 할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설교자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일이기 때문이며,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고전9:15-16). 설교하는 목회자로서 있는 것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구원에 이를 자를 인해서 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바울의 복음 설교에 관한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스스로 원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았다고 하면 주께서는 그런 자기에게 자기가 일한 데 상응하는 상을 주시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주께서 자신을 택하셔서 이 거룩한 임무를 맡기셨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함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데서 오는 기쁨으로 일한다고 하면서 복음을 설교하는 설교자로서의 직분을 맡은 것을 감사하였다(고전9:17-18).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명하셨다(고전9:14). 설교하는 목회자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한 복음 설교를 하는 것을 통해서 바른 설교를 하는 것으로 인해 고립되고 해를 입는다고 할지라도 비신학적, 비신앙적, 비목회적인 설교를 해서 설교의 권위가 손상을 입고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의 권위가 손상 입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곧 교회의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권위 있는 것은 교회 안에 성경이 권위로 있어서인데, 그 성경을 강화(강론) 하는 설교의 권위를 떨어뜨리면 교회의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설교하는 목회자는 자신의 생명을 설교가 설교로서 권위 있도록 하는 데에 두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로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성도에게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롬15:29).
Ⅱ. 구속사적인 설교와 성경해석의 원리와의 관계
설교는 성경을 그대로 낭독한다고 하더라도 권위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책으로서 하나님 자신과 뜻,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행하신 설교이다. 성경은 성경만으로 계시의 충분성을 충족하고 있으며 계시의 종결이므로 그 이상의 말씀을 더하시지 않는다. 성경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에 기록하신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사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만큼 성경은 더할 것이 없으며, 그렇다고 단 일점일획이라도 빼서도 안 된다(마5:17-20).
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낭독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는다. 계시 전달에 미흡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성경은 해석되어져 설교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난해하여서 어렵기 때문이거나, 높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문어와 문장으로 되어져 있어서 어휘나 문법적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거나, 어려운 낱말을 사용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신앙의 기능을 상실하고 이성이 신지식에 대해 어두워져 있어 전혀 무뢰한이었던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풀어 자세히 설명하여 깨닫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에 의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구원의 언약을 계시하신 책으로서 구원의 원리가 유기적으로 ‘축자 영감’ 되었으므로 구원의 원리를 해석하여서 풀어 설명함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밝혀 드러내게 하시는 유익의 방편이 되게 하시기 때문에 성경은 해석되어져 설교되어져야 할 필요성을 갖는다(행17:1-4, 엡3:1-13).
그리고 성경은 능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딤후3:15-16) 설교하여 가르치는 해석이 요구되어진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려는 목적에서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의하여 성경에 계시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려 주고 가르치는 일과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과는 별개가 아닌 같은 일이다. 성경 해석하여 성경의 뜻을 올바로 풀어 설명함으로써 설교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믿는 자들에게 밝히 인식되고 지식 되도록,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유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해석 하여 성경의 뜻을 올바르게 풀어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따라 복음이 바르게 설교되는가 하면 정말 엉뚱하게 다른 복음으로 설교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설교가 되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설교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현하에 있어서 설교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설교가 성경해석에 의해 올바르게 풀어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해석에 의해 성도들의 신지식이 오히려 혼란하고 혼미하여 무엇이 복음인지, 복음이 아닌지조차 분간 못하고 알지 못하도록 해 놨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경해석에 의한 설교가 아니라 인간 자기 궤변과 간사한 언어 술책에 의한 설교이니 참 설교가 아니다. 아무리 교훈적으로 하였다고 할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로서의 성경이 말하는 교훈이 아닌 세상 도덕과 윤리, 철학과 그와 같은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Ⅲ. 구속사적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 이해의 중요성
구속사적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은 성경 본문을 통해서 원리들을 제시해 주므로 해석자가 원리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혹은 주석)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파악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은 설교하는 목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요구되어진다.
해석자들은 비그리스도인 해석자들을 포함해서, 수없이 많은 곳들로부터 성경의 의미에 관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에 대해서,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이 찾아낼 수 없는 그러한 중요한 통찰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의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성경의 의의를 본다는 것은 믿는 자들에게 속한 문제이다. 칼빈은 성경 저자의 마음(mind)을 드러내면 성경의 마음(mind)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성경의 의의를 본다는 것은 곧 성경의 마음을 보는 것으로 믿는 자들만이 볼 수 있다. 여기서 성경의 의의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하신 일인 구속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24:26-27). 성경은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구속의 사역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독론적으로,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해석하 여서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하지 않으면 그 설교는 오석(誤釋)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성경해석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자칫하면 해석한다는 것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석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이 성경오석의 척추가 되어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설교들이 ‘복조리 신학’의 바탕 위에 성경오석을 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해석을 오석하는 것은 성경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시의 진전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시의 진전이란 차원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해석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기초한 진전이 있다. 구약은 그 자체 내에서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 형태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속에 구약의 인용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인용만이 아니라 해석적 인용의 양상을 띠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을 해석하면서 점진적 계시를 말씀한 것이다. 또한 신약 속에서도 바울 사도가 예수님 말씀을 해석한 것이나(반드시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한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서 이외의 부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해석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신약 속에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으로 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성경 자체 속에 성경 해석이 나오는데, 점진적 계시의 특성을 파악하여 그 이해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해석하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의 원래 의미를 가장 개연성 있게 나타내고 있다면 그 설교는 옳다고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설교는 구속사적으로 해야 하며, 설교를 구속사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하여서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여기에 구속사적인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의 원리 이해의 중요성이 있다.(*)
지금까지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한 설교에 관한 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구속사적 설교는 시대적 흐름에 의한 한 사조(思潮)가 아니며, 또한 설교의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도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참된 설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게 되는 것인데,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구속주가 되셔서 온 세상에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일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구속사적 설교가 아닌 다른 것으로서 설교의 내용을 삼는다고 하면,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되어져 가는 진리가 아닌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둘째, 설교자인 목사가 설교를 하려고 할 때는 선택한 성경 본문의 내용을 성경해석학상의 원리들을 좇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의미를 정확히 올바르게 파악하여 이해하고 있는 가운데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에 의한 설교가 가르쳐지기 전에는,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어린아이와 같은 시기에 있었을 때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내세워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영해’(靈解)한다고 하였었다. 영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해라는 것이 설교자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설교하고자 하는 성경 본문의 뜻을 알려주어서 알게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사실 설교자가 사사로이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해석의 원리들을 적용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영해에 의한 설교의 대부분은 알레고리적이며, 또한 성경 본문의 내용이 지닌 의미와도 전혀 동떨어진 내용을 설교한다. 문자와 문법을 무시하고, 역사적 이해와 상징적이고도 때로는 비유적이기도 하며, 또는 모형적인 특성을 무시하고, 단지 설교자가 임의로 의미를 부여하여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 본 논문의 연구에서 설교가 갖는 구속사적인 성경해석의 원리와 여기에 필요한 성경해석법과의 관계를 보면서 이 사실을 더욱 확인하며, 구속사적 설교의 중요성과 그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셋째, 그럼에도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가 어떤 것인가? 하는 실정은 설교집이나 교회의 주보 및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설교 내용 등의 각종 자료에서, 그리고 각종 집회 설교나 방송 설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설교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하는 경우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결과들을 토대로 해서 앞으로도 이 글에 관한 후속 연구가 계속되어질 수 있기를 위해 기대하면서 몇 가지 제언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설교자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른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감독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교회에는 항존직으로 말해지는 삼직이 존재한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이다. 목사는 설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한다. 그리고 장로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가는지를 살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보호함으로써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한다. 이때 장로는 비단 성도와의 관계에서 감독의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의 관계에서도 감독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목사의 설교를 살피는 일이다. 목사가 설교를 잘 하는가 또는 못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한 설교가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하였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순전함으로 전하는 것을 살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가 순결함으로 있도록 보호하는 감독의 역할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성도가 교회에로의 연합을 갖는 것은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들어 그 믿음에 있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감독자로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목사와 장로의 이 관계성은 교회 직분의 올바른 수행에 의해서 되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현하 우리나라 교회의 직분이 심히 잘못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교회 직분의 바른 회복이 우선적으로 해결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설교자인 목사가 설교를 성경에 대한 바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신학교의 상호 협력 관계의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칼빈은 교회 직분을 네 가지의 형태로 보았다. 즉 목사(pastores), 교사(doctores), 장로(presbyteri), 집사(diaconi)이다. 여기서 교사는 교회에서 목사의 조력자(助力者)로 있는 학생부나 주일학교 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신학을 전공한 교수로 선생 된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직분자를 세우시고 직분자를 통하여 일하신다. 그러기에 칼빈은 교회 직분에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다. 여기서 교사는 성경과 신학을 전공한 교수(선생)로 목사가 하는 설교에 간여하여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서 설명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1) 그리고 교회는 교사(교수)가 신학교에서 교회가 위탁한 학생을 성경으로 바르게 가르쳐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서 있게 하여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이단 사상으로부터 보호하며 올바른 신학 사상에 설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에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도록 돕는 배려를 해야 한다. 그것이 훗날 주님이 맡기신 양떼를 위하여 봉사하는 참된 목자를 수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셋째, 신학교(신학대학교)는 교과과정에 설교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해석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두어서 장차 신학생들이 목회 현장에서 봉사하게 될 때 성경을 해석하여 설명할 수 있는 진리의 성숙함에 있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이 어느 교회에서 시무하든지 간에 그 교회 성도들과 일치된 신앙에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현실을 보면, 청빙 받은 목사와 성도들의 신앙이 동질성을 띠지 않고 이질성을 띠고 있는가 하면, 같은 학교를 졸업한 같은 신학을 공부한 선후배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담임목사와 부교역자 간에도 믿는 진리의 내용이 다른 경우를 보게 된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더욱이 서로 다른 신학 사상에 서 있는 사이라고 하면 어찌 성도들에게 바른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의 자라남이 있어서 그들이 믿는 주님께 가진 신앙에 성숙하여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책임은 교회와 신학교가 함께 지는 것일 것이다. 교회는 교회의 일원인 학생을 신학교에 위탁하는 책임이 있으며, 신학교는 위탁받은 학생을 잘 교육하여 양성하여서 교회로 돌려보내 바른 복음의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이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나라의 교회와 신학교는 이 상호 협력적 관계를 가져나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신학교는 교회의 설교가 심히 왜곡된 복음으로 전해져도 외면해 왔으며,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목사를 받아들여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그만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설교를 하는 목사를 요구해 왔다. 이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신학교이다. 수 년 동안 배우는 많은 학문이 교과과정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히 다루며 가르쳐져야 할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요, 또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여서 구속사적 설교를 할 수 있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결국은 교회에 크나큰 유익을 끼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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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J. Calvin)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목사직을 처음 언급하였는데, 그는 교회에 시대를 초월하여서 항시 존재해야 할 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말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목사와 교사는 서로 분리된 직분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목사요 겸하여 교사의 개념을 띠었다. 사실 목사의 설교는 선포적 개념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성도를 교훈으로 양육하여 가르치는 교육적 개념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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