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김종대 지음/
가디언/ 407면/ 2012/ 16,000원
저자 : 김종대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74년 공군 법무관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부산, 경남 지역에서 법관으로서 사회 갈등 해소와 분쟁 조적에 힘써왔으며, 2006년부터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임 중이다.
김 재판관은 충무공 정신을 약재로 복용한다면 양극화로 분열되고 갈등하는 이 사회가 치유될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이다.
책머리에
여론조사를 해보면 국민의 7할 가량이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을 꼽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존경의 대상인 이순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정신으로 살았기에 존경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벙어리가 되고 만다.
이순신을 존경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많은 사람에게 그의 생애와 정신을 정리해 알리는 일은, 이순신을 먼저 공부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책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쓰는 일 또한 그 책무의 일환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순신 공부의 한 매듭을 지으면서 그를 보는 나의 소견을 정리해 본다.
이순신은 첫째,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모든 공직자의 사표라고 생각한다. 셋째, 가장 성공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참스승을 찾아서(처음 이순신 평전을 쓸 때의 서문)
내가 충무공 이순신에 처음 매료된 것은 공군 법무관 시절인 1975년 여름부터이다. 그전에는 대부분의 사람처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정도밖에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다가 1975년 7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문고판 책을 교재삼아 공군본부 법무감실에서 정훈 교육을 했을 때부터 이 어른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충무공은 언제나 나에게 살아 있는 참스승이었다.
하늘은 조선을 위해 영웅을 내다(탄생)
서기 1545년. 조선조 인종 원년 3월 8일 자시에 한양의 건천동에서 덕수 이씨인 아버지 정(貞)과 어머니 초계 변(卞)씨 사이의 4남(형 羲臣, 堯臣 동생 禹臣)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 장군의 부모님은 참으로 특이한 분이셨던 것 같다. 네 아들의 이름을 중국의 고대 임금님 이름을 따서 그 신하로 이름지었으니 말이다. 이순신의 큰 형님은 희신으로 '복희임금의 신하'를 의미하고, 둘째형 요신은 말할 것도 없이 '요임금의 신하'를 뜻하고, 본인은 '순임금의 신하' 를 의미하고, 동생은 '우임금의 신하'의 의미다. 만약 아들이 한 사람 더 있었다면, 그 이름은 '탕신'이 되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전진문)
그의 어머니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 시아버지로부터 ‘아기가 나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 부르라’는 현몽을 얻었다. 그리고 그 현몽에 따라 아기 이름은 순임금의 순(舜) 자에 신하라는 신(臣)자를 더해 순신이라 지었으며, 커서는 자를 여해(汝諧)라 하였다. 순임금이 여러 신하 가운데 우(禹) 임금은 지적하며 ‘오직 너(汝)라야 세상이 화평케(諧) 되리라’고 한데서 여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이순신은 4대사화의 마지막인 을사사화가 일어난 1545년에 태어났다. ‘난세가 영웅을 탄생시켰다.’고 해도 좋겠지만, ‘하늘이 조선을 불쌍히 여겨 한 사람의 영웅을 준비했다가 세상에 내놓았다.’고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청소년 시절
어린 시절, 어느 날 군사놀이를 하던 중, 길에서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는 사람의 눈을 활로 쏘려 했고, 그때부터 어른들조차 어린 이순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순신은 21세 되던 해 8월,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한다. 방진은 본래 무인 출신으로 궁술과 병학에 일가견이 있어 훗날 이순신의 무예수련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아들이 없던 장인, 장모의 제사를 모셨다.
28세 되던 해, 드디어 이순신은 소년 시절에 살던 한양 훈련원으로 가서 별과 시험에 응시한다. 하지만 말을 달리며 기예를 부리는 시험 도중에 그만 말이 거꾸러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순신은 첫 무과시험에서 낙방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린다. 4년 후 재도전하여 겨우 병과로 합격했다.
이순신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고, 처음 과거에 응시해 낙방하고 합격할 때까지 10년이 넘는 고된 세월을 보낸다.
오직 바른길로, 제힘으로 시작하다
이순신이 32세 되던 해 무과에 급제하였지만, 권세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서인지 급제 후 1년이 다 되도록 변변한 보직을 얻지 못하다가 그해 섣달에 가서야 겨우 함경도 삼수 고을의 공구비보 권관(종9품, 소대장)으로 부임한다.
이순신이 훈련원봉사로 재직 시 서익이란 상관이 사사로이 이순신에게 인사청탁을 하자 이순신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래 있는 자를 건너뛰어 천거하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 공정하지 못할뿐더러, 특정인을 승진시키기 위해 임의로 법규를 고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완강히 버텼다고 한다.
이순신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로 사람을 보내 만호영 객사 앞뜰에서 오동나무를 베어가려하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나라의 물건이라 사사로운 용도로 쓸 수 없다. 또 심은 이의 뜻이 있었을 터인데 어찌 이 오래된 고목을 하루아침에 벤단 말이냐?”
강직한 성격 때문에 상관의 미움을 사 1582년 1월에 파직되었던 이순신은 그해 5월 훈련원봉사로 복직되었다. 파직되어 불우한 처지에 놓인 그는 유성룡이 율곡을 만나보라고 권했으나 거절했다.
“나와 율곡은 같은 집안이라 서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인사 책임자인 전상의 자리에 있는 동안은 옳지 못한 일이오.”
그랬기에 그는 제힘으로 하다가 일이 잘 안 될 때라도 남을 탓하거나 비방하고 원망한 일이 없었다. 23년간 군인 생활 중에 이순신은 세 차례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을 겪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남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첫 번째 백의종군
아무리 맡은 일이 일시적이고 가벼운 일이라 하여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수록 정성을 다하였으니, 때로는 키우는 말에게 이르기를, “네 비록 짐승일지언정 국록을 먹고 이만큼 자랐으니 국가를 위해 힘을 다하라.”고 타일렀다고 전한다.
그가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할 때 여진족들이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부사와 더불어 적에게 잡혀가던 조선 백성 6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그날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화살에 왼편 다리를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군사들의 사기를 잃을까 몰래 그 화살을 뽑아버리고 끝까지 태연하게 국토를 지키고 백성을 구했다.
조정은 전후 사정을 살펴보고는 이순신이 패전했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이순신에게 “백의종군해 다시 공로를 세우라.”는 명을 내렸다.
정읍현감 시절
1580년 둘째 형 요신이 죽었고, 3년 뒤에 다시 부친이 돌아갔으며, 1587년에 맏형인 희신마저 죽었다. 이순신은 부득이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자신의 처자뿐 아니라 두 형의 식솔까지 부양하는 장자의 책임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589년 이광을 따라 전라도로 내려간 이순신은 거시서 다시 군관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이순신은 선전관으로 잠시 상경했다가 12월에 정읍현감이 된다.
이순신은 노모와 함께 어린 조카들까지 20여 명의 대식구를 데리고 갔다. (친자식 아들 셋과 딸 하나, 첩에서 난 아들 둘과 딸 둘)
“내 비록 남솔(관장이 직계자손이 아닌 다른 식구를 많이 거느리는 것을 말하며, 파면의 사유가 될 수도 있다)이라는 허물을 쓰고 파직이 될지언정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조카를 어찌 내버릴 수 있겠는가.”
전라죄수사가 되다
유성룡은 이순신이 담력과 지략을 겸비한 발군의 장재임을 잘 알던 터여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별히 그를 전라좌수사로 천거했고, 그에 따라 이순신은 파격적으로 보임될 수 있었다.
유성룡은 보통 정승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 기간 내내 정승으로 군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위로는 선조를 달래고 아래로는 모든 관료와 군대를 지휘, 지도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그가 어떤 인재관을 지녔는지 잘 알 수 있는 글이 있다.
전라좌수사는 방답, 여도, 사도, 녹도, 발포의 5포에 있는 수군 5개 부대를 직접 지휘하고 순천, 보성, 광양, 흥양, 낙안의 5관을 관할했다.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앞날에 있을 큰 재난을 미리 내다보았기에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국난 대비에 착수했다.
거북선 창제
임진왜란 당시 육지의 전투에서 왜적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승승장구했다. 조선에 침입한 왜적은 모두 이 조총을 주력 무기로 무장한 반면 아직도 조선은 주력 무기로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총의 유효사거리는 활의 두 배 가까이 되었고, 날아오는 총알의 속도와 파괴력도 훨씬 빠르고 강했다.
왜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조총을 이길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서 거북선이 발명되었다.
본래 조선의 주력 군선은 맹선이었다. 그런데 당시 수군 주력인 왜구가 누각을 갖춘 판옥선을 이용하므로 조선 수군도 거기에 맞서지 않을 수 없어 1555년에 맹선을 버리고, 대형 판옥선을 건조해 주력함으로 사용하게 된다. 판옥선은 평선 위에 판옥을 한 층 더 만들어 올림으로써 배가 높아져 군선을 맞보거나 아래로 내려다보고 활을 쏠 수 있었다.
밀려드는 전운
일본의 봉건 영주 중에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 밑에 장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일본은 ‘명을 치기 위한 길을 빌리려 한다[假道入明]’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을 침략해온 것이다.
임진년인 1592년은 조선을 건국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4월 13일, 일본은 30여만의 대병력을 9개 부대로 편성하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를 통해 조선 땅을 침략했다. 이로서 7년간에 걸친 더없이 무모하고, 참혹하며, 지루한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두려움이 앞서 본영을 버리고 자신이 지휘하던 대소 군선 103척을 바다에 가라앉힌 뒤 근왕을 핑계로 평양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수영을 불태우고, 1만여 명의 수군을 해산시켰다. 이어 전선 60여 척과 대포, 군가 등을 모조리 바다 속에 버리고 부하들과 배 4척에 나누어 타고 우수영에서 200리나 떨어진 곤양 어귀로 달아났다.
이때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이순신이 조정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진영을 벗어날 수 없다고 거절하여 원균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개탄스러운 일은 개전 초 임금인 선조의 한심하고 못난 행적이다. 4월 29일 신립이 충주전투에서 패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중신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떠나 명나라를 향해 도망갔다.
임금은, “내가 천자의 나라(명)에서 죽는 것은 괜찮으나 조선에서 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왜적이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아마 과거의 전쟁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록일 것이다.
유비무환
9월 27일. 선조로부터 ‘원균과 합세해 적을 무찌르라’는 두 번째 유서를 받는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그 누구도 유비무환 정신을 빠뜨리지 않는다. 앞서 거북선을 만든 것에서나 여기서 출전에 앞서 한 여러 준비 행위에서 보듯이 유비무환 정신은 이순신 리더십의 근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출전 직전 이순신은 5월 1일 휘하의 모든 장병을 좌수영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진해루에서 경상도로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전 장수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벌였다. 이순신은 모든 장졸이 참여하는 민주적인 방법을 통해 주인의식을 갖고 정신 무장을 하도록 이끌어갔으며, 이것이야말로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면서 모든 장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옥포승첩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묵직하고 침착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이순신의 지휘에 따라 조선 함대는 질서정연하면서도 기세 좋게 옥포만 안의 적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옥포승첩은 옥포전, 합포전, 적진포전의 세 차례 접전을 통칭하는 것으로 적선 총 42척을 격파했다. 각종 노획품은 5칸 창고에 쌓고도 넘쳤다. 쌀 300여 섬은 노 젓는 군사와 활 쏘는 군사들 중 배고픈 이들에게 적당히 분급하고, 의복과 무명베 등은 모든 군사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다.
당포승첩
당시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이억기, 이 세 해군사령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자신보다 16세나 어린 이억기와는 서로 의기투합하는 반면, 원균과는 일찍이 함경도에서부터 알기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아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도 조선은 중국 진시대의 상수공법(上首功法)을 본받아 수급의 숫자로 공로의 우열을 판정하였는데 원균은 수급을 모으기에 바빴고, 이순신은 적을 죽이기만 하면 공을 인정했다.
제2차 해전의 네 접전에서 얻은 결과를 종합하면, 깨뜨린 왜선이 72척, 왜적의 머리가 88급, 사살한 적수는 137명이었다. 이순신은 주요한 노획품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고 쌀과 옷, 베 따위는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산대첩
7월 8일, 마침내 임진년 전쟁사 중 가장 눈부신 영광의 대승첩이 이루어지던 날이 다가왔다. 지형을 살펴본 이순신은 두 가지 이류를 들어 적을 한산도 넓은 바다로 유인해 섬멸시켜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원균은 견내량 쪽으로 나가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순신은 ‘그렇게 하면 반드시 패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원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적을 유인하기 위한 자신의 전략을 그대로 시행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무려 적선 59척을 격파하는 대승첩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 한산해전에서 사망한 왜적 수는 무려 9,000명에 이르렀고, 죽은 장수도 수십 명에 달했다.
전란의 고통에 빠져있던 조선 백성은 이제 이순신의 이름 석 자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같은 영향으로 존선 민중 일부가 의병으로 봉기해갔으니, 한산대첩이야말로 조선 백성들의 사기를 한순간에 높여준 독보적이고 획기적인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조선은 왜적의 철수를 틈타 1593년 4월 20일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고 한양을 수복했다. 반년 가까이 의주에 머물던 선조는 10월 1일, 1년 반 만에 폐허가 된 한양으로 되돌아와 월산대군의 옛집(지금의 덕수궁)에 행궁을 차렸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한산도로 이진한 이순신은 정유년인 1597년 2월 26일 체포되어 이곳을 떠날 때까지 무려 3년 8개월 동안 한산도 동쪽에 자리 잡은 견내량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러나 선조는 이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순신은 도무지 나아가서 적과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가 쓴 <난중일기>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3년 8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겪은 상황을 나날이 일기에 적었다. 만일 이순신이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후세에 큰 문화유산을 물려주지 못했음은 물론 자신의 전쟁 준비에서 시해착오를 거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은 한산도 진중에 있을 때에도 밤낮으로 경계를 엄중히 하여 전대를 푼 일이 없었다.’며, 적병과 대치함에 항시 긴장을 풀지 않고 생활했던 이순신의 한산도 진중 생활을 <징비록>에 적고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이순신은 그 성정이 엄한 이면에 심약해 보일 정도로 무척이나 다정다감한 인간성을 가졌고, 예술가적인 풍부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한산도가
閑山島月明夜(한산섬 달 밝은 밤에)/ 上戌樓(수루에 홀로 앉아)/
나는 '수루'가 한자로 '술루(술시방향의 누각)'인 줄을 예전엔 몰랐다.
撫大刀(큰 칼 옆에 차고)/ 深愁時(깊은 시름하는 차에)/
何處一聲羗笛(어디서 일성호가는)/ 更添愁(남의 애를 끊나니)
誓海魚龍動(바다 두고 맹세하니 어룡이 움직이고)/
盟山草木知(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
시련과 고난
원균은 자신이 이순신보다 나이도 많고, 벼슬도 먼저 얻었으며, 이순신의 공보다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보다 벼슬이 낮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매사에 이순신과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이순신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옥문을 나온다. 옥에 갇힌 지 28일 만인 4월 1일의 일이었다. 옥에서 풀려난 지 10일 만에 어머니가 83세로 별세했다.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충성을 다하려 했더니 죄가 이미 이르렀고/ 효성을 바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가버렸네....”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은 해군사에 치욕으로 기록될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원균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나무 아래에서 왜 병사의 킬에 맞아 58세로 생을 마감했다.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원균의 패전과 함께 삼도수군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다급해진 선조도 별 도리 없이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였다.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이다. 지휘관이 이순신으로 바뀌자 너나없이 이제 살았다하며 이순신의 휘하로 들어왔다. 이렇게 모여든 군사가 어찌 강군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명량대승첩
이순신은 명량(울돌목)이라 불리는 데서 바닷목이 좁고 물살은 무척 세고 빨라 조수의 흐름이 폭포와 같고 그 우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특이한 지역이다.
9월 16일! 동서고금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신비한 해전이 벌어진다. 울돌목의 폭은 300미터가 넘었지만 적선이 쉽게 항행할 수 있는 수역의 폭은 불과 12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순신은 대장선 한 척으로 울돌목에 들어온 수십 척의 적 선단을 일정 시간 막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조류의 변화가 온 것이다. 물살을 뒤에 업고 이순신의 선단은 일제히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조류에 밀려가는 적을 빠른 속력으로 쫓아 압박하며 지자, 현자포를 쏘아대는데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을 무찌른 명랑승첩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 되었다. 이순신도 이 전투의 승리를 일기에, ‘이것은 실로 천행, 천행이다.’라고 적고 있다.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적들이 보복으로 이순신의 본가는 물론이고 온 마을을 불 질렀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에 있던 막내아들 면은 비분함을 참지 못하고 적군 속으로 달려들어 싸우다 왜적 복병에 칼에 맞아 21살에 순국했다.
이순신의 승첩소식에 군사들이 모여들어 군량미를 조달하기 어렵자 이순신은 고심 끝에 해로통행첩(일종의 바다통행세)이란 것을 구상해 곡식을 거두어 조달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주둔하면서 수군 재건사업을 마무리했다. 그 결과 그해 가을에는 전선수를 85척으로, 군사의 수를 1만여 명으로 늘려 당당한 군세를 이루었다.
8월 18일 원흉 도요토미가 63세로 죽자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큰 별, 노량 바다에 떨어지다.
11월 18일, 무수한 적들이 노량에 닿았다는 보고를 받고 이순신은 장수들과 최종적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이순신은 진린의 제지를 물리치고 적을 요격하기 위한 나팔을 불어 공격을 명령하고 말았다. 이순신은 최후의 날이자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날인 11월 19일, 함상에서 맹세의 기도를 마치고 동쪽으로 노량바다를 향해 전진했다.
바로 그 때. 어둠이 걷히고 검붉은 태양이 노량바다 동녘으로 떠오르는 바로 그때, 어디선가 탄환이 날아와서 이순신의 왼편 겨드랑이 부근, 심장 언저리를 뚫고 지나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그는 54세를 일기로 함상에서 고요히 눈을 감는다. 1598년 11월 19일 이른 아침이었다. 영웅은 가고 성웅이 다시 오는 그 순간! 떠오르던 태양도 잠시 멈춰 장군의 죽음을 애도했고, 산과 바다는 새 성웅 탄생을 축하하며 진동했다.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은 분부에 따라 곡성을 내지 않았다.
이 해전을 끝으로 부산과 거제도에 집결해 있던 왜군뿐 아니라 울산, 하동의 적들마저 모두 퇴각함으로써 참혹했던 7년간의 전쟁은 끝을 맺었다.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제사하고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증직했다. 6년 후에는 선무일등공신으로 책록하고 좌의정을 추증함과 아울러 덕풍부원군에 봉했고, 1643년에는 충무 시호를 내렸으며, 1793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특히 정조는 이순신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서 내각에 명해 충무공의 행적을 전서로 편찬케 했다.
이순신의 묘 바로 밑에 정조가 만든 어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우리 역사상 제왕이 신하의 묘소에 비문을 지은 것은 오직 이곳, 이순신의 묘소 한 군데뿐이다.
우리가 자신을 희생해 나라를 구한 그의 이름 앞에 성웅(聖雄)이란 헌사를 바칠 수 있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니, 성웅이란 이순신의 이름 앞에 붙어서 참으로 아름답다 할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