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부산 기행록
우리 재경 동기회에서, 2007년에 南道.西道 기행을 한 바 있고 2008년 4월에는 南道 기행을, 올 6월 전국 동기회 때는 길안과 청송 여행을, 이제 2008년 가을에는 또 慶南.釜山 여행을 하게 되었다. 함께 하는 여행을 통해, 구경도 좋았지만 우정을 다지고 웃고 떠들며 함께 한 자리의 소중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값진 기회였다.(다 들 여행 너무 좋아해 킬 났어!!!)
이번 여행에는 단순히 참여하기 싫어서 함께 하지 못한 벗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 가족의 건강 때문에 집을 비우지 못한 친구, 자신의 건강이 2박 3일의 여행을 허락지 않아 동행 못한 친구, 아직도 자기의 사업체를 바쁘게 운영하느라 시간을 못내는 친구 등,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동참을 못한 안타까운 친구들을 젖혀놓고 떠날 때는 마음이 무거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안용진, 전영택 등 친구들은 동행도 못하면서 협찬까지 해주어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 번 여행이 대성황리에 이루어진 것은 위대한 영도력을 갖춘 우리 정공자 회장님의 폭넓은 아우름, 그리고 이영자 총무님의 用意 周到한 준비와 집행 덕이지요. 두 분께 우리 여행 팀 일동을 대신해서 감사 드립니다.
우리 카페에다 전영택군이 먼저 잡힌 강의 관계로 동행 못한다며 시 한 수를 실어 주고, 정공자 회장께 시를 복사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전군의 부탁이 있어, 가는 차 중에서 전군의 시를 낭송했다. '우리네도 세월 못 속이고 단풍철이라고?' 이 대목에 모두들 공감하고 박수를 쳤다.
마음아, 같이 가다오
전 영 택
넘은 산이 어찌 數로 따지랴
건넌 강이 좀 많았던 가
평지라고 편안히 거닌 날이 많았을 리 없지
그리 칠십을 목전에 두도록 살아 온 벗들이
알록달록 옷 걸치고 遠足 간단다
산천은 섭리 따라 단풍이 제 철이네 그려
우리네도 세월 못 속이고 단풍철이라고?
아닐세, 아니다 말다
‘육십은 총각.새댁’, 조선일보 기사라네
벗들아, 홍안.건각으로 한바퀴 잘 도시게
.........................................(後略)
우리 카페의 벗들에게 이번 경남. 부산 여행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나, 부족한 글솜씨여서 조금은 겁이 나는구먼. 보시고 글 솜씨는 읽지 말고 우리들의 분위기만 함께 느껴주면 족하겠어요.
서울 대머리 김 정 태 드림
◇11월 6일(목)◇
기다리던 경남.부산 여행 출발일이다.
잠실 종합운동장역에서 권오기, 김맹모, 김정태, 남동완, 신영호, 이용걸, 윤형선, 장근식, 황동섭이 타고 궁내동 톨게이트에서 이영자, 김덕자가 타고, 죽전에서 김영길이, 신갈에서 이현식, 지우림, 최익창이 타고 안성에서 이길영이가 타고....모두 남자 14명, 여자 9명 도합 23명이 출발하였다.
너무 여러 곳에서 타다가 보니 사건이 터졌다. 김영길이가 죽전에서 타는 걸 버스 기사에게 미리 알리지 못했는데 죽전에서 영길이가 타고 신갈에서 현식 일행을 태우는 걸 기사가 깜빡하고(죽전을 신갈로 착각) 서평택 출구를 지나서야 아차 이걸 깨달았다. 기획자 정태에게 현식이가 전화를 했는데 뿔이 잔뜩 나 집으로 되돌아간단다. 어르고 달래서 신갈에서 택시를 타고 안성 휴게소로 오라고 해 안성휴게소에서 합류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아-----진땀난다.
우리의 보배 총무 이영자 선생님 보소!!! 매 여행 시마다 한 건씩 하신다. 이번에는 우리 동기생 23명에게 손수 미싱을 돌려 천으로 만든 이쁜 쇼핑가방을 한 개씩 나누어 주셨다. 지난 여행 때는 조각천으로 베게 카바를 한 쌍씩 만들어 주어 회원들을 감동시키더니만, 이번에도 또.... 감사, 감사합니다. 이영자 선생님!!!
南行 길은 멋지고 낭만이 가득했다. 수도권은 단풍이 한창이 지났지만 대전 이남은 이제 단풍이 농익어 "왼쪽 봐라, 와!!!" "오른쪽 봐라, 와!!!" 연달아 환성을 지르며 남행을 계속 했다.
맨 먼저 닿은 곳은 농월정(弄月亭), 이곳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이다.
강릉 도호부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부)가 지은 정자. 그러나 우리가 찾은 농월정은 바위 너럭만 펼쳐진 빈 골짜기였다. 어느 취객이 불을 질러 정자는 터도 없이 소실되고 너럭 바위들이 손(客)을 맞았다. 바위가 1000여 평이나 된다나? 그 바위에 후손들이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구之所) 라는 문구를 깊이 새겨 두었다.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부)선생이 지팽이를 짚고 거닐었던 곳」이란 뜻이란다. 하필 이 글씨를 찍은 사진이 잘못되어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점 심히 안타까울 뿐....
그러나 바위와 맑게 흐르는 물, 밝은 달이 흐르는 물에 비춰지는 걸 보고 물이 달을 희롱한다는 의미로 지은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만큼 너럭바위와 물이 주는 이미지가 딱 들어맞는 그런 정취가 물씬 나는 곳이었다.
※「也川 권오정의 역사 탐방」 36번 '농월정(弄月亭)의 달밤' 참조
여기서 메기 매운탕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손님이 아주 없는지 우리가 식사를 한 방에 거미줄이 주욱 늘어져 있었다.
≪자료 : 농월정≫
◎농월정(弄月亭)
예로부터 정자문화의 보고라 불리는 화림동 계곡의 정자 가운데 하나다. 조선 선조 때 강릉 도호부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부)가 정계에서 은퇴한 뒤 지었다고 한다.
농월정이라는 이름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다. 그 이름처럼 밤이면 달빛이 물아래로 흐른다고 한다. 농월정 앞에 넓게 자리하고 있는 반석을 달바위라고 부르는데, 바위 면적이 정자를 중심으로 1,000여 평 된다.
농월정의 관광 편의시설은 199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2,000여 평의 야영장은 모래땅 위에 조성되어 있어 배수가 잘 되어 비오는 날에도 야영이 가능하다. 이곳 화림동은 더덕구이, 백숙, 메기 매운탕이 별미로 알려져 있다.
다음 찾은 곳은 수승대(搜勝臺), 덕유산 자락에 있는데 너무나 경치가 수려해 「국민관광 단지」로 지정되어 개발이 된 곳이다. 기록자가 한 15년 전에 와 본 수승대는 간 곳 없고 말 그대로 개발된 수승대였다.
구연서원(龜淵書院) 의 출입문인 관수루(觀水樓). 그리고 거북의 머리와 흡사한 거북바위, 개울을 건너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 요수정(樂水亭)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창군에서 나온 文化解說師의 자상한 해설로 거창 신씨(愼氏)들의 내력과 집성촌에 대해서도 귀동냥을 하게 되었다.
≪자료 : 수승대≫
◎수승대(搜勝臺)
거창군 서북쪽 덕유산국립공원 안에 있으며 1986년 8월 국민관광 휴양지로 지정되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신라로 사신을 떠나보내던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수송대(愁送臺)라 불렀으나, 1543년 퇴계 이황이 이곳 의 산수를 보고 속세의 근심을 잊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고 격찬하며 수승대로 바꿔 부를 것을 권하여 이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힘이 약했던 백제 사신이 신라로 가면 살아올지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수송대(愁送臺)에서 눈물을 술잔을 받고 신라로 떠났 기에 수송대(愁送臺)란 한 것이란다.
퇴계 선생의 장인이 이곳에 살았는데, 퇴계선생이 장인의 회갑을 맞아 처가에 들렀다가 슬픈 이름인 수송대(愁送臺)를 버리고 빼어난 경치에 걸맞는 수승대 (搜勝臺)가 좋겠다고 하여 이름이 바뀐 거란다.
수승대는 본래 높이 10m의 커다란 천연 바위로, 덕유산에서 흘러내린 성천 ·산수천·분계천과 송계의 갈천이 위천으로 흘러들어 큰 못을 이루면서 생겨났다. 수승대 위에는 자고암이라는 암자를 비롯하여 요수정(樂水亭)과 관수루(觀水樓) ·구연서원(龜淵書院) 등이 수려한 경관 속에 어우러져 있다. 관광지 안에는 야외수영장과 야영장, 각종 놀이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주변에 송계사 계곡, 거창 조각공원, 금원산 자연휴양림, 월성 계곡, 거창 박물관, 화계 쌍계사, 남해대교, 한려해상 국립공원, 지리산 국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다음 행선지는 진주 촉석루(矗石樓), 어제 예보대로 비는 오지 않으나 짙게 낀 구름아래 어둑어둑한 날씨에 촉석루를 찾았다. 우리나라 4대 누각의 하나인 고색 창연한 거대한 촉석루 건물이 우리를 맞았다. 이 곳은 좀 외진 곳이라 우리 동기들이 대부분 처음 온 곳이란다. 너른 진주성 안에 여러 건물들이 배치 되어 있었다.
여성의 몸으로 왜장과 함께 남강에 뛰어든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기리는 의암사적비(義巖史蹟碑)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지금은 진주 遊燈祝祭로 더 이름나고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은 남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말없이 흐르고 .....
다음은 임진왜란 때 몸바쳐 진주와 운명을 함께 한 유명한 진주성 싸움의 장수 김시민 장군의 순의단(殉義壇)을 둘러보고, 한참을 걸어 진주 박물관에 입장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박물관은 일부분만 관람하고 부곡온천으로 출발했다.
≪자료 : 촉석루≫
◎촉석루(矗石樓)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8호. 정면 5칸, 측면 4칸. 고려 말의 진주성 (晉州城)을 지키던 주장(主將)의 지휘소이다. 1365년(공민왕 14) 창건된 것으 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였으므로 남장대(南將臺)라고도 하였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 (金 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 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 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73년에 재건된 팔작지붕의 와가(瓦家)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낙화(落花), 순국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7시가 조금 넘어서야 부곡온천, 우리의 숙소 부곡 「현대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남자가 방 3칸을 쓰고 여자는 2칸을 쓰기로 했다. 가방을 방에다 올려놓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온천 탕에 들어갔다. 온 나라가 매우 어려운 경제로 고통을 겪고 있어 관광객이 썰렁한 때라 욕실 안도 한산했다. 그러나 이름 값대로 온천 수질은 너무나 좋았다. 한때 부곡온천 하면 이름이 떠르르르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너무 먼 거리를, 그것도 장시간 달려와서인지 모두 오늘은 그냥 쉬잔다. 그냥 잤다.
◇11월 7일(금)◇
일찍 일어나 좋은 수질이 아까워서 다시 한번 지하 1층에 있는 탕(湯)으로 내려 갔다. 아침에는 제법 많은 입욕객(入浴客)이 있어서 어제 저녁 같이 을씨년스럽 지는 않았다.
≪자료 : 부곡온천≫
◎부곡온천(釜谷溫泉)
부곡온천의 생성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국여지승람의 영산현 조에 "온천이 현의 동남쪽 17리에 있더니 지금은 폐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오래 전부터 부곡에 온천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국통감의 고려기에도 "영산온정"이 기록되어 있어 태고 때부터 자연 분출되어 오늘에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부곡온천은 옛날부터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부곡이라 불렸고, 마을 (온정리)에 '옴생이'라고 붙여진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우물이 있다는 소문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옴 환자들과 나병 환자 등 피부 질환자들이 떼지어 와서 치료를 하였다하니 부곡온천의 수질이 다른 온천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1973년 신현택옹이 발견한 최고 78℃의 온천수를 하루 6천 톤을 채수할 수 있는 유황온천이 오늘의 부곡온천이다. 유황 이외에도 규소, 염소 등 20여종의 무기질을 함유하고 있어 호흡기질환, 피부질환 등에 효과가 크다.
숙박시설, 상가, 골프장, 병원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위치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 일원
*온천발견 : 1973. 1. 10
*관광특구면적 : 146만평('97. 1. 18지정)
이색적인 절집 영산정사를 찾았다. 시골길, 1차선만 뚫려 대형 관관버스가 겨우 지나가는 시골 좁은 길을 달려 영산정사에 닿았다. 한적한 곳에 대형 7층 탑 모양의 건물과 절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여기에 기네스북에 두 가지나 올라있는 성보박물관이 있었다. 하나는 100만과에 달하는 진신 사리이고 또 하나는 10만에 달하는 패엽경(貝葉經)!!!
고승에게서나 나온다는 진신(眞身) 사리가 모래처럼 많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사리를 수집했는지 정말 경이로웠다.
그리고 10만 패엽경, 패엽경이란 바나나 잎에 새긴 경전(經典)을 말하는데 한자말, 티벳어, 아라비아어 등 도무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문자인지도 모를 문자로 기록된 경전이 무수히 진열되어 있었다.
또 2,000여 점의 크고 작은 불상도 수집 진열해 놓았다.
마당에는 구린내가 나는 유황 약수도 좔좔 나오고 있었다.
≪자료 : 영산정사≫
◎영산정사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T : 055-359-5636
영산정사는 무안면 가례리에 위치한 조계종 사찰로 탑의 형태로 지어 진 7층 성보박물관이 있으며,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진신사 리 100만과와 10만 패엽경 그리고 2천여 점의 각 국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어 불교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높이 3.9m, 둘레가 8.5m, 무게 27톤인 우리나라 최대의 범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히 현재 축조중인 와불은 길이가 130m로 세계 최대의 와불로 건립되고 있어, 완공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음으로 간 곳이 사명대사 생가.
호가 사명당(四溟堂)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또 다른 호로 송운(松雲) 이란 것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사명대사 생가 현판에 송운대사 구택(松雲大師 舊宅)이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사명대사 부모님 시젯 날이라 제기를 반입하고 독경 소리도 들렸다.
생가를 나와 사명대사(泗溟大師) 기념관으로 갔다. 생가와 연이어져 있는데 골(谷)의 지형이 아늑하고 뚝눈으로 봐도 명당인 듯 싶었다.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맨 안쪽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영상실에 들어서니 자동으로 영상자료가 상영되어 끝까지 보았다.
기념관 자리가 여유 있고 넓어 유유자적하게 거닐며 마음까지 차분해지도록 조경이 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초현대적 디자인의 문이 대뜸 '이건 홍살문이다'라는 느낌이 나는 조형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료 : 사명대사 생가≫
◎사명대사 생가(泗溟大師 生家)
유정(惟政, 1544-1610년)은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 본관은 풍천,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으로 호 사명당(泗溟堂)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泗溟大師)라고도 부른단다.
경상남도 밀양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일찍 부모를 여윈 후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으며, 서산대사를 스승으로 하여 임진왜란 당시 승병 활동과 대일 외교를 통한 조선인 포로송환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의 노력으로 200년 조선통신사의 길을 열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으로 활동하여 권율과 함께 왜적을 무찌른
사명대사 또한 과연 무예가 뛰어났을까요?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 외에도 사명대사, 곽재우 등
승려 뿐 아니라, 평민들까지 왜적과 싸웠다.
그리고, 사명대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상을 하여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오는 데에도 성공하는 업적을 지니고 있다.
사명대사 생가를 출발하여 표충비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표충비(表忠碑)는 '땀 흘리는 비'로 더 이름이 나 있다. 사명대사비(泗溟大師碑)라 부르지만 국난을 앞두면 반드시 비신(碑身)에서 땀을 흘러 현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오게 예고를 한다니 신비 그 자체이다. 6.25 전에도 땀을 흘렸고.....
마당에는 수령(樹齡)이 300년이라는 우산 모양의 거대한 향나무가 눈길을 끌게 하고 있었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영정을 모시는 법회를 곧 연다고 하며 그 준비에 한창인 듯 했다.
≪자료 : 표충비≫
◎표충비(表忠碑)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사명 대사비(泗溟大師碑)라 부른다. 크기는 높이 약 4m, 너비 약 1m, 두께 54.5cm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어 왜병을 크게 무찌르고 일본 에 전쟁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3,000명을 환국시킨 유정(惟政:泗溟 大師)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옛 표충사(表忠寺) 터, 즉 표충 사(表忠祠)의 동쪽인 이곳에 1742년(영조 18) 대사의 5대 법손(法孫) 남붕(南鵬)이 경산에서 갖고 온 돌로 건립하였다.
비신(碑身)과 화강암의 비개(碑蓋)를 갖추었고, 경주석재인 빗돌은 까 만 대리석이며 좌대석(座臺石)과 이수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 는 휴정(休靜의 행장(行狀)이 새겨져 있고 측면에는 밀양 표충사에 대 한 내력, 그리고 기허(驥虛)대사의 비명이 명시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글씨는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쓰고 판중추 부사 유척기가 전서하였다.
이 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하여 비석 면에 땀방울이 맺히기 때문이다. 마치 구슬처럼 흐르는데 이것을 두고 밀양 시민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검이라 하여 신성시한다. 그래서 ‘땀흘리는 표충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여름날 농부의 이마 에서 흐르는 구슬땀처럼 맺혀 몇 시간씩 계속해서 흐르다가 그치기도 하는데, 이상한 것은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 혀 비치지 않는다.
이 신기한 현상을 기후 변화에 따른 외기 현상이나 비석 자체의 결로 현상으로 보는 등 과학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표충비 관광을 마치고 김해(金海)로 출발했다. 김수로왕릉을 찾기 위함이다. 김해시의 중앙, 도심에 자리한 왕릉은 인터넷에서는 웅장하거나 크지 않다고 했는데 경주의 왕릉의 봉분 보다 약간, 아주 약간 작은 듯 했다. 그러나 경주의 왕릉은 능만 우두커니 서 있는데 여기 김수로왕릉에는 제사지내는 사당에 따르는 여러 제청(祭廳) 등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다. 그것도 요즈음 금방 지은 건물은 하나도 없고 다 역사적 때(?)가 오래 묻은 듯한 상당히 큰 건물들이 위엄 가득히 서 있었다. 우리 일행 모두가 다 잘 왔다는 표정들이었다.
다음으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 왕비의 능으로 가기로 했으나 점심때가 되어서 생략하고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오늘 아침식사가 좀 부실해서 모두들 불만인 듯 한 표정이었는데 점심은 좀 거하게(?) 먹기로 했다. 이 기록자가 경남도청에서 발행하는 관광 홍보지에서 추천하는 김해의 식당 「흥동가든」(김해시 생림면 나전리 24-3 전화 055-337- 0220)을 예약했는데 우리 운전기사의 불만이 상당히 높았다. 이유인즉슨 왜 도심에서 먹지 그 먼 곳까지 시간 허비해 가면서 가느냐 이거였지. 족히 30분은 나가서야 식당을 찾았으니...그러나 우리 친구들에겐 大滿足인 식당이었다. 메뉴는 그저 그런 돼지 삼겹살이었지만 모두들 맛이 기가 막힌다며 맛나게 식사를 했다. 기사 포함 24명이 40인분의 고기를 먹어치웠는데도 여기저기서 "나 더 먹을 수 있는데...."라고 해서 좀 민망했다. 정말 맛좋은 삼겹살을 먹었다.
≪자료 : 김수로왕릉≫
◎김해 김수로왕릉(金首露王陵)
#소박하지만 위엄이 느껴지는 왕릉
김수로왕릉은 경주 왕릉처럼 웅장하거나 크지는 않지만 도심 속의 고분이라는 점에서 우선 색다른 느낌이 든다.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이며 가락국(서기 42년) 시조대왕으로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이다.
가락국을 창건한 수로왕을 모신 능침인 왕릉은 알 중에서 맨 처음 나왔다 하여 ‘수로’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입구에서 납릉 정문을 지나면 원형 봉토분 외형으로 거대하게 들어 선 왕릉을 볼 수 있다.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질 정도
납릉 정문에는 인도 아유타국(허황옥 왕비의 고향) 용왕을 표시하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채색돼 있다. 이 물고기상(像)으로 인해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김해의 도심 중앙에 위치했다는 잇점이 있지만 평일에는 왕릉을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오히려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극락왕생 기리는 동물상 이채로워
왕릉 양 옆으로 늘어선 인물상과 동물상들은 꼭 돌아가신 대왕님의 극락왕생을 기리는 것 같았다.
용맹을 상징하는 호랑이상, 충성을 뜻하는 말상, 그리고 부귀와 평화를 나타내는 양상이 슬픔에 젖은 듯 머리를 숙여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이 곳은 1580년(선조 13년) 영남관찰사 허엽이 수축해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췄고, 1647년(인조 25년)에 능비를 세웠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높이는 약 5m에 이른다.
1884년(고종 2년) ‘숭선전’이라 사호한 침묘를 개축했으며, 안향각, 신도비각, 석양 등을 설치했다. 능의 전면에는 가락루, 연신루, 회로당 등 건물이 있다.
허 왕비는 생전에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따르게 했다. 허씨 성이 유래됐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돼 왔다.
왕릉을 바로 앞에서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출입문을 막아 놓은 상태라 멀리서 바라봐야만 된다는 점이 아쉽다.
왕릉을 보기 위해 이 곳을 찾는 이유도 있겠지만, 왕릉 뒤편에 꾸며진 정원은 이 곳을 찾는 이들을 평온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또 뒷담을 따라 가지런히 조경해 놓은 대나무는 한층 멋을 더했다.
매, 란, 국, 죽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는 푸르고 꿋꿋한 기상과 절개를 뜻하며 예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식사를 하고 나니 벌써 두 시가 썩 넘어 있었다. 이젠 부산으로 출발이다.
부산에서는 우리의 호프(사범학교 3학년 때 운영위원장) 신화균군이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신군과 우리의 이용걸군은 각별한 사이로 서로 자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가끔 가족끼리 여행도 함께 하는 그런 사이라 용걸이가 전화를 해 우리의 여행을 알려주자 자진 안내역을 담당하겠노라고 하며 우리가 도착하면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 고맙기 그지없어라!!!
태종대에 닿아 신하균군과 조우(遭遇)를 해 열차를 타기로 했다. 서울의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차인데, 이 열차는 노인들은 무료 승차이지만 그냥 얼굴만 보고 태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단체의 대표자가 단체 전원의 신분증을 수합해 매표 창구에 드리밀어야 매표원이 일일이 성명과 생년월일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록하고서 개개인의 승차권을 발행하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 중 신분증을 차에 두고 온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일반인 요금의 승차권을 회비에서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게 승차까지 했는데 우리의 호프 신하균군이 태종대에서 우리와 함께 내려 저 밑 바닷가까지 내려 가 보기로 하고 차를 탔으나 차는 출발지 원점까지 와버렸다. 신군이 밖을 연신 내다보며 「태종대」표지를 찾았는데 그 「태종대」표지는 없고....태종대 있는 곳의 표지가 「등대」라는 표지로 바뀐 모양......
그래서 우리는 다시 계획에 없던 「용두산공원」엘 가기로 했다. 용두산공원 전망대(높이 120m)는 아파트 40층 높이와 맞먹는다고 하는 높은 탑으로, 부산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이런 걸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자료 : 부산 태종대≫
◎부산 태종대(太宗臺)
부산광역시 영도구(影島區) 동삼동(東三洞)에 있는 명승지.
부산대교를 지나 영도해안을 따라 9.1㎞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였다고 하여 태종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조선 태종도 이곳을 구경하고 갔다고 전해지며 가뭄이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낸 곳이기도 하다.
태종대유원지는 54만 2천 평의 면적에 해발250m의 최고봉을 중심 으로 해송을 비롯한 120여종의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으며, 해안에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굽이치는 파도와 더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청명한 날에는 약 56㎞거리인 일본의 쓰시마섬까지 볼 수 있어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옛부터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 때부터 오랫 동안 군 요새지로 사용되던 관계로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어 오다가 지난 1967년 건설교통부는 유원지로 고시하였고 뒤이어1969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1970년부터 총 연장 4.3㎞의 순환도로를 개설하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고 1974년에 태종대유원지 조성계획에 의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여 전국적인 관광지로 면모를 쇄신하였다.
영도의 최남단으로 뻗은 구릉지로 기암절벽과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룬다.
북쪽으로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朝島)와 오륙도(五六島)가 보이고, 맑은 날에는 쓰시마섬[對馬島(대마도)]이 보인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중턱에 너비 10m, 길이 4㎞의 순환도로를 따라 돌아가다 보면 중간쯤에 모자상(母子像)과 전망대가 있고, 전망대 동쪽으로 깎아지른 해안절벽 위에 영도등대가 서 있다. 그 아래로 신선바위·망부석이 있고 인공해수풀장인 <곤포(昆布)의 집>을 비롯한 위락시설과 바다 낚시터 등이 있어 해안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8호.
어둠이 깔릴 무렵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으로 가 회로 저녁식사를 했다. 회를 못 먹는(?) 다섯 친구는 매운탕으로 하고...우리도 부산의 명물인 자갈치 시장에서 회 먹었다 앙이가? 그것도 아주 만족하게...
≪자료 : 자갈치시장≫
◎부산 자갈치시장
부산광역시 중구(中區) 남포동(南浦洞)과 서구(西區) 충무동(忠武洞)에 있는 수산물시장. 전용면적 7243㎡에 부산어업협동조합·어패류조합 등 근대화된 어시장이 480여 개의 점포를 형성, 주로 연안이나 남해안에서 잡히는 대구·청어·갈치·조개·해조류를 판매하고 있다.
자갈치란 이름은 지금의 충무동 로터리까지 뻗어 있던 자갈밭을 자갈 처(處)라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부산시청 이 자리잡은 용미산(龍尾山) 동남쪽 해안과 남포동 건어물시장 주변이었으나 1930년대 남항(南港)이 매축된 뒤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889년 일본인들이 자국어민을 보호·조장(助長)하기 위해 인근에 부산수산주식회사를 세우면서 그곳으로 상인들이 몰리자 자갈치시장도 서서히 근대화를 모색하게 되었고, 1922년 자갈치시장의 상권을 노리고 발족된 부산어업협동조합이 남포동에 건물을 짓고 위탁판매사업을 시작함에 따라 부산의 어시장은 북항의 부산수산주식회사와 남항의 부산어협위탁 판매장으로 양분되었다. 그 뒤 부산수산주식회사는 국내 최대의 어시장인 현재의 부산공동어시장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남항에서 출어하는 영세어선들의 어획물을 다루는 영세상인들이 부산어협위 탁판매장 주변에 모여 지금의 자갈치시장을 이루었다.
이제 송도 해수욕장 부근 숙소로 가면 되지? 야!!! 송도 참 멀다!!! 부산 시내라지만 두어 시간은 달린 것 같다. 해운대도 써억 더 지나가야 하니까 말이지.
숙소는 「에이 플러스 펜션」. 도착 해 찾아가니 아뿔사! 대학생 MT하는 팀이 먼저 1층에 자리했는데 이놈들 소란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아, 대표자를 물러 12시 넘으면 우리 노인들 안면 방해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퉁명한 표정, 알아서 하겠지.
방은 우리 남녀 각 大 中 小 각 하나씩 있어서 별 불만이 없으나 세면장에 세면대도 없어 대야 하나씩 달라고 하여 해결...
짐을 내려놓고 신화균군이 큰 문어 한 마리를 삶아 썰어서 가져오고 또 덧붙여 안동소주까지 1병 가져와서 남자들 큰방에 모여 그 좋은 문어 안주에 쐬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한잔하고 거나한 분위기가 되자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바탕 푸닥거리를 했다. 신화균, 그대 너무너무 고맙구려!!! 얼굴 대하니 무척 반갑기는 하지만 신세 졌네!!! 언제 서울 오시면 연락 주시게나. 쓴 소주 한잔으로 원수(?) 갚을 기회 주구려!!! 고마우이......
◇11월 8일(토)◇
아침 7시에 기상을 하여 식사할 「달맞이횟집」을 향했다. 구수한 부산아지매가 반가이 맞아 주는데 그 아지매 참 인상도 좋고 넉살도 좋고... 우리들 비위를 자알도 달래가며 배식을 해 주었다. 아침상 먹거리가 아주 푸짐했다. 처음에 1인당 1만원인 매운탕이었는데, 우리가 자청하여 1만2천 원짜리로 Up 시켜 주문을 하였더니 생선을 넉넉히 넣어 조리한 모양이다. 우리의 친구 신영호 왈 "고기가 너무 많이 들어서 맛이 덜하네!!!" 원참 익살도 좋지???
식사 후 송도해수용장 앞 사장(沙場)을 천천히 거닐었다. 갈매기와도 벗했다. 여성 회원중 누군가가 작고 고운 목소리로 '물결 춤춘다 바다 위에서.......'노래를 부르자 여성 모두가 따라 합창을 하니 우리 듣는 머슴아들 그 목소리에 취해 모두 환장들 하는 모양!!! 야, 참 분위기 끝내주는구먼!!! 우리 나이가 지금은 모두들 열여덟 살로 돌아가 빼랬다. 아.........!!! 세월아, 가지 마라. 이 나이에서만 머물러 준다면 얼마나 좋을고? 우리 일행 여자 친구 왈, "우리 영감이 '여보, 70 전에 맘껏 놀러 다니시구려, 70 넘으면 노는 것 다 틀려버려.'라고 합디다." 이 말 쌔겨 들어라, 친구들아!!! 이 대머리가 차 안에서 한 말 기억하나? 오늘의 건강 유지하여 내년 여행에 절대 빠지지 말자고 한 말 말일세.
부산을 작별하고 경남 언양에 있는 자수정 동굴로 향했다.
자수정 광산을 폐광하고 나서 관광지로 개발한 곳. 이 기록자 개인의 소견으로는 '괜히 왔다'였다. 별 볼 것이 없는 곳이었다. 얻은 것이라면 '자수정이란 이런 거구나'이라면 너무 허무....밖에서 꽁짜로 주는 마를 이용한 음료 한 잔 얻어먹은 기억만 새롭구나.
≪자료 : 언양 자수정 동굴≫
◎언양 자수정 동굴
한국 자수정산업관광주식회사에서 운영하는 동굴공원이다. 울주군과 언양읍 일대는 세계적인 자수정 산지로 100여 개의 자수정 광산이 있는데, 이 중 한 폐광을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동굴 길이는 2.5km, 실내 온도는 10∼14℃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이러한 동굴의 특성을 이용하여 자수정전시관과 독도관·인류변천사 관. 이집트관 등의 전시관을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원시부족 풍물전 등을 운영하고 매일 5회의 이벤트 연다는데 오늘은 무슨 서어커스를 하는 모양인데 기다리기 싫어서 나와버렸다.
동굴 밖에는 사계절 내내 썰매를 탈 수 있는 썰매장과 폭포·산책로·도자기촌 등이 있으며 각종 놀이 시설도 들어서 있다.
통도사와 내원사, 밀양 얼음골, 표충사 등이 가까이 있다. 개장시간은 오전 5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이고 연중 무휴이다.
이제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비가 약간 부슬부슬 내려 세상이 컴컴해져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통도사는 석가여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절로 불보사찰(佛寶寺刹)로 유명한 大刹. 부슬비가 어쩌면 더 신비로움을 자아내게 해 주었다. 대웅전에 부처 없기로 유명한 절집. 부처님 앉을 자리 뒤편 바깥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가 세워져 있으니까. 우리 일행은 대웅전 뒤로 돌아가 사리탑을 한바퀴 도는 탑돌이를 했다. 어째 여늬 부도탑을 도는 것과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뭔가 더 신비롭고 위대한 힘이 내 속에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불자도 아닌데도... 나무관세음보살.....!!!
내려오는 길이 너무 좋았다. 가을과 가을 비, 그리고 뚜욱뚝 떨어지는 낙엽, 그것도 천년 대찰을 옆으로 하여 걷는 그 맛과 멋!!! 연신 셔터를 눌렀다.
≪자료 : 양산 통도사≫
◎통도사(通道寺)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 )사찰이라고 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 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 며 (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 (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 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 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은 대웅전과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극락보전(極樂寶殿) 외에 12개의 법당과 보광전 (普光殿) ·감로당(甘露堂) 외에 6방(房), 그리고 비각(碑閣) ·천왕문 (天王門)·불이문(不二門) ·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이 건물 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과 41년(인조 19)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대광 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세의 건물들이다.
이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대웅전이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 보물 제334 호인 은입사동제향로 (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471호인 봉발탑(奉鉢塔) 이 있고, 보물전시관에는 병풍·경책(經冊)·불구(佛具) 및 고려대장경 (해인사 영인본) 등의 사보(寺寶)가 소장되어 있다. 소속 암자로는 선원(禪院)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비로암 등 13개의 암자가 있다.
통도사를 하직하고 경북 청도군에 있는 운문사와 운문댐을 향하였다.
운문사(雲門寺), 와!!! 절 참 크다!!! 우리 수도권 친구들은 거의 다 이 운문사는 처음 와 본단다. 비구니 전문 강원이 있어 여승을 길러내는 승가대학이 있는 불교의 최고 여성 교육기관이 있는 절이다. 절집의 크기도 크고 건물도 여래 채이고.....
이 곳은 이제 단풍이 한창이라 절 주위의 산들이 온통 불바다인 듯 너무 좋다.
운문사를 출발하여 가지산을 넘어 운문댐 쪽으로 가는 산 길...... 이렇게 좋은 단풍은 첨인 것 같다. 중국의 장가계를 한국 사람들이 "와와산"이라고 했다던데 우리도 이 가지산을 오르면서 계속 "와,와!!!"라고 해서 누군가가 이 산도 "와와산"이라고 해야겠다고 해 웃었다. 넘는 길 정상에서 하차하여 단풍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오르는 길이 내려오는 길보다 훨씬 단풍 구경이 좋았다.
통도사를 출발해 운문댐 가는 길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식당 이름은 「부촌쌈밥」. 이 식당 주인은 고향이 울릉도인데 울릉도에 형이 살고 있어 「명이나물 : 命需나물」을 받아다가 식탁에 낸다고 했다. 쌈으로 싸 먹으니 독특한 향이 일품이었다. 두 번이나 추가로 더 달라고 해 쌈을 싸 먹었다. 명이(命需)나물이 들어가지 않은 쌈밥은 1인당 1만원인데 명이(命需)나물이 나오는 쌈밥은 11,000 원이었다.
*「명이(命需)나물에 얽힌 古事」 -고려시대(1157년)에 나라에서 공도정책 (空島 政策)을 써 섬에 사람이 살지 않다가 조선 고종 19년(1882년) 개척령으로 육지에서 100여명이 섬으로 이주하였는데, 겨울철이 되자 식량이 떨어져 굶게 되었는데 눈 속에서 싹이 나오는 명이(命需)나물을 캐 먹고 겨울 2∼3개월을 버티고 생명을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물을 「명이(命需)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修道僧이 자양강장 식물이라 즐겨 먹는 식물로 "행자 마늘"이라고 하여 고행에서 견딜 체력과 정력을 얻기 위해 먹는 비밀스런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자료 : 청도 운문사≫
◎청도 운문사(雲門寺)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신원리(新院里) 호거산(虎踞山 )에 있는 사찰. 560년(진흥왕 21) 창건하였고, 608년(진평왕 30) 원광 국사(圓光國師)가 중건하였다. 937년(고려 태조 20)에 중국 당(唐) 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통일을 위해 왕건(王建)을 도왔던 보양 (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후에 태조가 운문선사 (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하였다. 1105년(숙종 10)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고, 1690년(조선 숙종 16)에 설송(雪松) 이 중건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되었으나 현재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대웅보전(보물 835), 금당 앞 석등(보물193), 원응국사비(보물 316), 석조여래좌상(보물 317), 사천왕석주(보물 318), 삼층석탑(보물 678), 동호(銅壺, 보물 208)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있다. 부속암자로는 동쪽 에 청신암·내원암, 서쪽에 호거암, 남동쪽에 사리암, 북쪽에는 북대암 이 있다. 운문사는 오랫동안 비구 선찰(禪刹)이었던 연혁을 바꾸어 비구니전문강원으로 선정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자료 : 청도 운문댐≫
◎청도 운문댐
운문댐은 1985년 12월부터 1994년 9월까지 9년에 걸쳐 건설되어 대구광역시, 영천시, 경산시 및 청도군 등에 일일 37.6만㎥의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높이 55m, 길이 407m로 저수용량은 135백만㎥이다. 건설 당시 용수전용 댐으로 계획되었으나, 최근 기상변화로 인한 하류지역의 홍수조절 필요성이 부각되어 수문을 설치하였다.
하늘과 구름, 초목을 품에 안은 운문댐은 굽은 길가 어디쯤에서 선을 멈추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지니 한시도 눈을 떼어놓을 틈이 없다. 운문댐 입구에서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은 경주로 가는 길과 울산으로 가는 길로 나뉘어져 있다. 언제부터인가 댐 도로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경주 방면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댐이 끝나는 곳에서 왼쪽 길로 들어가면 정상약수터가 있다.
옛날 구룡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면서 지상과의 이별이 아쉬워 흘린 눈물이 떨어져 약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이곳 용천 약수물은 동맥경화증, 고혈압, 당뇨, 만성위장병에 효험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사 가는 길에 잘 생긴 민가들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들은 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지역인 순지 마을에서 물난리를 피해 이사를 온 경주김씨 종택과 재실로써 오고가는 길손들과 친구가 된지 오래이다.
물이 맑기로 유명한 동창천은 여름철 피서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운문댐 바로 밑에 있는 하류 보는 노천 수영장 역할을 톡톡 히 하고 있고, 하천 어디든지 앉으면 유원지가 되는 것이 동창천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삼족대가 있는 당호숲이나 지전숲은 해마다 늘어나는 피서객들로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제 계획된 관광은 다 끝났다. 운문댐을 지나 경산 IC에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서울로, 서울로 달렸다.
이제 차내에서 한판 놀자. 이 대머리와 황동섭군이 협력하여 기름(Alcohol) 注入 작전 돌입.... 신화균군이 선물한 문어가 남았기에 그걸 안주로 하여 삽시간에 쐬주를 3병이나 팔았다. 기름이 들어가면 반드시 시동이 걸리지. 쿵짝 쿵짝 쿵짜작 쿵짝.... 빠르고 신나는 음악이 연주되자 덩실덩실...출렁출렁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와우!!! 와우!!! 근 1시간 가까이 춤 추었다. 너무 오래 무리하면 노인들 신체 고장 날라, 음악이 멈춰지자 그제야 자리로 돌아갔다.
장근식군이 늦게 잡은 일(직업) 때문에 이런 여행은 처음 동참을 했는데 마이크를 잡고 하는 소감이
"야! 안사 11회, 비약적인 발전을 했네!" 라고 평을 하자
이영자씨 마이크를 얼른 뺏어들고 하는 댓꾸
"안사 11회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게 아니라, 장근식씨가 엄청난 후퇴를 한 거지요."라고 해 모두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근식이만 멀쑥.....
입장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어묵우동 한 그릇씩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승차 전에 차 트렁크에서 선물을 꺼냈다. 회원에게 멸치 1상자, 천마차 1세트씩 나누어 주었는데, 멸치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산 거고 천마차는 언양 자수정동굴 밖 매장에서 산 거다.
회원 누군가 하는 말
"왠 동창회가 이리도 좋노? 싫건 구경 시켜 줘, 먹여 줘, 놀게 해 줘, 끝에는 이런 선물까지...."
잠실 도착 해산이 계획에는 20:00인데 8분 늦은 20:08에 도착 해산했다. 말 그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이 대머리가 이번 여행의 기획을 했는데 너무 타이트한 스케줄이라 노인들(?)이 따라다니느라 힘 좀 든 것 같아 다음에 계획을 세울 때는 좀 루즈하게, 느슨하게, 여유작작(餘裕綽綽)하게 쉬엄쉬엄 다니도록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걸 반성해 본다.
끝말은, 다음 여행 때까지 건강, 오로지 건강하시기만 빌 뿐이다.
첫댓글 부지런한 대머리님 동기회일로 정력 넘 많이 소비하는건 아닌가요? 이영자 이름 많이 들먹여서 기분 상종가네요. "물결춤춘다" 도 이영자가 시작했다오.패품이용한 것도 한 건수가 되남요? 실은 여행때마다 빈손으로 가려면 왠지 허전하고 뭔가 손에 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라서 한 짓인데.., 다음에는 무엇을 만들꼬 숙제라예. 어쨋거나 저쨋거나 우리 동기 활기차서 큰 행복인듯 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합시다
메밀꽃이여! 그대가 있어 우리 동기들은 행복하다오. 참석 못한 죄로 더욱 감사드려요. 회장이며 정태를 비롯한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일주일 후 깁스를 풀면 마음 같아서는 펄펄 뛸것 같지만, 또 얼마간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니 아득 하외다.
이번 여행에 "할라꼬"사건은 없었나? 이실직고하렸다. 첫날밤 부곡온천에서 잠은 잘 주무셨는가. 듣건데 자다가 "거식이" 배위에 "거식이"가 "거시기" 하였다면서. 아뿔사!! 탈이 없어야 하는데. 혹여 한 달뒤 ㅅ,ㅂ,인과 들락거리는 친구가 있다면, 그건 좋은 일인가 ? 아니면 눈물의 씨앗인가? 그것이 햇갈린다.
이번 여행 시 화두는 "객사"와 "횡사"였다네. 뭔지 모르겠는가? 지난달 사랑방 모임에서 나왔던 야그인디....꼭 아시고 싶으면 「웃음이 묻어나는 글」307번 "그것 하다가...."를 참조 하게나.
대머리님 한마디 만 하겠다. "고맙다."
메밀꽃님께도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용진 건강은 어떤지 못난이는 문안을 가지 못해 미안해서 숨어들고 싶네. 친구들로 부터 전해 듣고는 안심을 하고 떠돌아 다니는 데만 정신 팔린 인간이라네. 용진이 미안 하이 댓글을 보고 활발한 모습 같아서 안심하네 사무실에 가면 만날 수있을까?
무사귀가 축하하며, 산천에서 묻혀 온 새로운 기를 살려 더욱 건겅들 하시게!
서울은 역시 서울 청춘들이 어울려 사는 특히 경상도 노총각과 노처녀들이 함께 한 여행의 멋을 즐기는 사람 사는 서울친구들을 보고 인생을 다시 한 번 느껴 보네, 대머리 님의 멋진 스냅사진과 적절한 설명에 나도 우리들도 함께 여행 잘 했다네.
나도 한 마디--- 나는 들었다. 나는 보았다. =가장 축복받은 여자. 얼굴 살이 안 빠지고 예쁜 여자. 엉덩이가 볼록한 여자, 앞 가슴이 아른다운 여자. 육체미가 아름답다고 엉덩이 흔드는 여자.. 하하야!!! 라고 큰 소리로 잘 웃는 여자. 홀로 잘 우는 여자- 행복한 여자. 축복 받은 여자--그 여자를 이번 여행에서 보았소. 보았어. ...그 여자는 바로 총무님 이 영자. ---산파 윤형선 올림---
허허 목사님이 못하는 소리 없데이, 오늘 또 천진 난만한 어린아이 되고 싶어서지 그렇다면 손한번 흔들어보지. 용용 죽겠지
내가 잘 못 썻나? 지울까? .내가 잘 못 썻다고,해도 , 그래도 ,그 여자는 웃을 꺼야. 그 여자는 순수하고, 잘 웃는 여자, 행복한 여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