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피어나기, 이것이 내가 내린 성공의 정의다.
To freely bloom-that is my definition of success......게리 스펜스
"미루는 습관을 바꾸는 방법"
왜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일까.
어째서 까다롭지만 엄청난 기회를 가진 고객을 만나기보다
쉽게 대할 수 있는 작은 구매력을 가진 고객을 만나는 것을 즐겨 할까.
후배나 동료에게 해야 할 얘기를 미루거나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할 시간들을 사소한 이유로 미루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지연 행동을 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대략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불쾌한 일을 할 때
△어려운 일을 할 때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이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유쾌하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자신을 긴장시키고 힘들게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피하면서 쉽고 간단한 일을 먼저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삶에서는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중요하고 성공에 가장 큰 기여를 한다.
나중으로 일을 미룬다고 해서 그 일 자체가 없어지지 않는다.
나중으로 연기하면 할수록 결과적으로 상황은 더 악화되고 심리적으로 더 초초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렵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을 꺼린다. 그러나 미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용감하게 착수를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고통을 줄이고 성공을 만드는 길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는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일에대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자기 자신이 일을 지연시키고 있는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서 그런 못된 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보자.
● 부담되는 일은 시간을 정해놓고 한다.
하기 싫은 일은 시간을 짧게 정하여 그 시간에 규칮거으로 하는 것이 좋다.
● 복잡한 일은 나누어서 작은 목표를 정해서 일한다.
일이 너무 크고 복잡하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목표와 일의 범위를 사전에 작게 쪼개어 놓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좀 더 수월하다.
● 최상의 상태를 기다리지 말라.
일을 할 기분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먼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시작하고 계속 진행시키다 보면 어떤 일도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짐을 알 수가 있다.
● 마감 기한을 정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마감을을 약속하고 공포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 요인이 된다.
즉, 자기를 그 일에 빠지도록 구속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려운 일의 시작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루지 않고 시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이루고 가질 수 있음을 알자.
● 결과 위주의 사고방식을 가져라.
시간관리의 핵심은 바쁘게 일할 수 있는 작업 목록(work list)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리스트를 만들어 실천하면
생산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러가지 일을 하는데 시간을 절약해주기도 한다.
● 중요한 일을 먼저 하라.
우리는 인생 목표, 연간 목표 그리고 한 달 목표를 수립하지만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즐겁고 편안하고 쉬운 일부터 하기를 좋아 한다.
하지만 진정 성공을 원한다면 중요한 일부터 시간을 할애하여 처리해야 한다.
● 시간 일자를 적어라.
우리는 습관적인 행동으로 무의식중에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 잘못된 습관을 찾아내어 없애기 위해서는 하루를 30분 단위로 시간활용계획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좋다.
모든 계획이 완전하게 적용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와
실천 행동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 종국적으로는 시간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자신이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 시간관리의 첫째 시작은 내가 노력만 하면
분명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병철,사회주의에 심취하다"
1929년 10월 초, 이병철은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 것 같은 부푼 마음에 들떠 있었다.
도쿄역에 도착한 건, 20시간이 지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하지만 머물 곳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적막했다.
이병철은 일단 하숙집 소개소를 찾아가서 하숙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때우고 시내 지리도 익힐 겸 해서 안내소를 나와 무작정 전철을 탔다.
그대로 한참 타고 가다가 내린 곳이 시타이누다이역이었다.
당시 역 근처는 개발되기 전이어서 드문드문 새집이 있을 뿐, 대부분은 숲과 밭이었다.
그는 발길 닿는 대로 마냥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청년을 본 이병철은 발길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혹시 조선 사람 아니십니까?”
이병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죠?”
청년도 반색하며 우리말로 되물었다.
청년은 와세다대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는 이순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하숙집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대학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하숙하면 좀 편할지는 몰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합니다. 자취가 오히려 편해요.”
이병철도 낯선 일본 땅에서 혼자 하숙하느니 한국 유학생이 있는 동네에서 자취를 하는 것이 마음 든든할 것 같았다.
이병철은 이순근이 자취하고 있는 근처에 자취방을 잡았다.
그 뒤에는 이순근과 함께 한국 학생들과 같은 자취방에서 룸메이트로 생활하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동포였다.
낯선 외국 땅에서 만난 식민지청년은 서로의 우정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우정은 그 뒤에도 이어진다.
이병철은 이듬해인 1930년 4월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경과에 들어간다.
그 무렵 미국의 월가로부터 금융공황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했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 안슈탈트 은행이 파산에 빠진 것을 계기로 유럽 은행에는 환불, 폐쇄 요구가 일어났다.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당시 주요 공업국의 생산 수준은 1908∼1909년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업 생산이 70%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수출이 37%나 줄어들고, 수입도 40%나 격감했다.
그에 따라 물가도 폭락해 쌀 생사 가격이 몇 사이에 반이하로 떨어졌다.
일본 기업들도 대대적으로 인원을 줄여나갔고 공장 문을 닫는 곳도 속출했다.
공장이 돌지 않자 갑자기 수십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몰려나왔다.
쌀과 같은 생필품 가격이 몇 달 사이에 반값이상 폭락했다.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고 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달았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한 현실을 풍자한 영화 <대학은 나와도>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에 오르고 있었다.
1930년대는 사회주의는 지식인들 사이에 화두였다.
대학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했다.
와세다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와세다 대학의 교정에서는 연일 집회가 열렸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학이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대학은 좌익과 반체제운동의 본산으로 변모해갔다.
와세다의 숲속에서도 집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와세다대학 시절 이병철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문헌들도 독파했고,
휴머니즘적인 톨스토이의 소설을 탐닉하기도 했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진지하게 책과 사귀고 사색에 감기면서 세계와 인생에 대해 고민했다.
한번은 데모대에 섞여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몇몇 학생들과 같이 연행돼 이틀 동안 경시청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병철의 절친한 친구 이순근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학생 운동가였다.
이순근은 이병철에게 같이 학생운동을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이순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사상 그 자체를 폄하하지도 않았다.
이병철이 학생운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가 부잣집 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병철은 고향집에서 매달 200원을 송금 받았다.
일본 중류층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며 상당히 큰돈이었다.
지주 계급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활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은둔가적인 가풍의 영향도 컸다.
이병철의 아버지는 한때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이병철 역시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나 끝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병철은 각기병(티아민이 결핍돼 일으키는 영양실조 증세의 하나)을 핑계삼아 2년만에 공부를 포기해 버린다.
그는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귀향한다.
어느 가을 아침 가방 하나를 들고 홀연히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너도 무슨 요량이 있겠지. 우선 몸조리나 잘하여라.”
“일에는 반드시 본말과 시종이 있다”고 강조해왔던 아버지의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이병철은 나중에 “무언가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병철의 아버지는 아마 허무하게 돌아온 아들에게서
그 자신이 젊었을 때 서울에서 허탈하게 내려온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 뒤 이병철이 삼성물산을 세웠을 때 이순근을 회사 지배인으로 임명했다.
이병철은 “조그마한 신설회사에서 경영일체를 지배인에게 맡긴다면,
뜻밖의 사태를 초리할지 모른다”는 주의의 충고를 모두 물리쳤다.
오히려 은행의 거액융자나 대량의 자재구입과 수주 등 극히 일부의 중요한 문제를 빼고는
어음 발행이나 인감관리에 이르기까지 회사의 대부분의 경영을 이순근에게 맡겼다.
오늘날 ‘전문경영인’ 체제를 일찌감치 시험한 것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가 급성장한 공도 이순근에게 돌렸다.
“삼성상회가 그 후 단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두터운 우정으로 보답해준 이순근씨의 힘이 컸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순근은 해방이 되자 여운영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기획부에서 일하다가 월북했다.
이병철은 이순근을 ‘청년다운 정열의 활동가’라고 평가하며 평생을 그의 행방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5~6년 동안 함께 지내다가, 해방을 계기로 본격적인 좌익운동에 투신했다.
월북하여 농림상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확실한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상주의자로 남달리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북의 현실에는 결국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 이순근을 향한 이병철의 신뢰는 사람과 인재에 대한 이병철식 경영철학의 뼈대가 됐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用人勿疑)'이 바로 그것이다.
‘의심이 가거든 고용하지 말고, 일단 뽑았으면 의심하지 말고 일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순근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의심을 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가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이 같은 사람 쓰는 원칙은 그 후 일관해 내 경영철학의 굵은 기둥의 하나가 됐다.“
젊은 시절 이병철은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 좁은 의미의 공동체 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썼다.
이병철은 한국전쟁 직전인 1948년, 갓 창업한 삼성물산공사에 종업원 주주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이윤의 공평한 분배와 주인의식 고취를 위해서였다.
요즘에는 사원주주제를 운영하는 기업들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매우 진보적인 조치였다.
이병철은 직원들에게 조금씩이나마 회사 지분을 가질 것을 권했다.
이병철은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여공애사(女工哀史)>라는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호소이 와키조(1897~1925)가 쓴 이 책은 1925년 출간됐는데 당시 일본의 공장 여공들의 참혹한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공들은 오전 3시30분에 출근해 저녁 6시까지 무려 14시간 30분이라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오후 6시, 일이 끝나고도 가로 90센티미터, 세로 180센티미터에 안 되는 작은 공간에 몸을 눕혀야 했다.
그녀들의 아침과 저녁끼니는 중국산 남경미로 지은 밥에 된장국과 채소반찬이 전부였다.
점심은 비료로 쓰던 정어리와 청어구이였다.
가혹한 노동과 형편없는 식사, 잠자리, 그들 대다수가 폐병에 시달렸고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여공애사를 쓴 호소이 와키조도 14살 때부터 공장 직공으로 일했고 제대로 먹지 못해
책이 출간되던 1925년, 28살의 나이에 젊음을 마감해야 했다.
부잣집 아들로 엄청난 거금이 들어가는 일본 유학길에까지 오른 호암에게
<여공애사>는 충격이라는 단어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받은 이병철의 충격은 훗날 그가 제일제당이나 제일모직 같은 공장을 지었을 때
사원복지를 최우선으로 삼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병철, 땅 투기로 쫄딱 망하다 "
이병철은 일본 와세대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그는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리고 훌쩍 서울로 올라간다.
서울에서 2여년의 동안 있었지만, 일자리를 찾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올라오는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무위도식의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도 그는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못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단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정주영처럼 살기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럭저럭 한평생 먹고 살만한 땅이 있었고 부자인 아버지가 있었다.
또 하나는 그가 막내라는 점이다.
이병철이 돌아온 뒤 그는 설자리가 없었다.
집안일은 아버지의 지휘 아래 형이 감당하고 있어 그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었다.
채소를 재배해보려고 일본에서 씨앗을 들여오고 개량 돼지와 닭도 길러보기도 했지만 이내 시들해졌다.
돈과 시간이 남는 부잣집 아들은 이내 노름에 빠져들었다.
노름은 한밤중까지 계속돼 지칠 대로 지쳐서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무위도식의 나날이 그 후에도 한동안 계속됐다.
이병철은 고향에서 3년, 서울에 보냈던 2년을 합쳐 5년을 폐인처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밤늦게까지 노름을 하다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달빛이 창 너머로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이병철은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날 이병철은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온갖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병철은 그날 달밤 아래의 기억을 ‘덧없이 보낸 모색의 세월 속에서 얻은 각성‘이라고 기획했다.
그는 ‘제1의 각성’이라고 표현했다.
각성, 깨달음이었다.
이병철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사람은 일생에서 몇 번의 전기를 맞게 마련이다.
스스로 그것을 만드는 때도 있지만 느닷없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 느닷없이 찾아오는 전기를 어느 날 맞게 되었다.”
나이는 벌써 스무 살 중반을 넘어섰다.
조금만 더 있으면 서른이다.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
그는 곰곰이 자신이 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따져 보았다.
하지만 식민지시대에 조선인 젊은이가 무엇을 하기에는 사회적인 제약이 만만찮았다.
공무원이 되는 게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관리가 되기에는 그는 제대로 된 졸업장 하나 없다.
스펙 미달이다.
게다가 당시 식민지 조국에서 공무원이 된다는 건, 일본의 앞잡이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그는 잃을게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대지주로 만족하며 지금처럼 살 것인가?
이것저것 궁리도 해보고, 고민도 해본 뒤, 새벽녘 그는 사업을 생각한다.
어차피 농사는 한물갔다.
조선에는 기업이 없다.
그는 사업의 길을 택한다.
꼼꼼한 자신의 성격과도 맞아떨어진다.
‘사업에 한번 인생을 걸어보자.
비록 졸업장은 없지만 사업에선 우등생이 되자.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돈은 또 얼마쯤 필요할까?
사업을 시작할 장소는?’
하지만 무슨 사업을 한단 말인가?
당시에는 큰 자본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었다.
공장시설도 일본인들이 몽땅 차지하고 있었다.
변변한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하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새웠다.
며칠 뒤 이병철은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에게 절을 올린 뒤 입을 열었다.
“아버님, 사업을 한번 시작해 볼까 합니다.”
“사업이라니?”
“하는 일 없이 몇 년 동안 놀면서 너무 허송세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사업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래 무슨 사업을 할 생각이냐?”
“정미소를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자신은 있느냐?”
“네. 자신 있습니다.”
“네가 사업에 자신이 있다면 사업자금은 대주겠다.
네 몫으로 쌀 3백석의 토지를 이미 떼어 놓았다.
그러니 유용하게 쓰도록 해라.”
그때 이병철의 나의 26살이었다.
300석분의 토지.
이병철은 그의 자서전에서 사업자금으로서는 대수로운 것이 못된다고 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쌀 3백석이면 그 당시로 쳐서 5만원이 넘는 큰돈이었다.
물론 시골에서는 큰돈이지만, 막상 큰 도시에서 사업하기에는 큰 자본은 아니었다.
이병철은 언론과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젊은 날의 방황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어떠한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고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려 가느냐에 있다.”
사업을 뛰어들기 전 이병철은 치밀하게 분석했다.
이병철은 정주영과 달리 첫 사업부터 직관보다 분석을 보다 앞세웠다.
이병철은 자신의 자본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작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한다.
일단 사업을 할 장소를 어디로 선택할지를 놓고 골몰한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고 싶었다.
사업업종을 선택할 기회가 많았고 사업만 잘되면 큰돈을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할 것 같았다.
부산과 대구, 평양도 사업대상지로 생각해 봤다.
그러나 당시 대도시는 이미 상권이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이병철이 최종 후보로 낙점한 곳이 김해평야를 배경으로 한 마산이었다.
마산은 항구도시였다.
경남일대의 농산물이 모두 마산으로 모여들었다.
마산에만 모이는 쌀이 매년 수백만석에 이르렀다.
쌀을 갖고 할 만한 사업을 알아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도정업이었다.
벼를 사다가 껍질을 벗겨 쌀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마산의 정미소 공터 곳곳에는 도정을 기다리는 볏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산에선 연간 수백만석의 쌀이 도정됐다.
도정료를 선불로 내고도 오랫동안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도정 시설이 모자랐다.
이병철은 이런 현상을 간파했다.
이병철은 마산 시내를 두루 돌며 정미소 현황을 살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규모가 컸지만,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보잘 것 없었다.
게다가 도정업은 자본이 있으면 하기에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일단 도정기계를 쉬지 않도록 미곡을 확보하면 그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병철은 사업을 혼자 할 것인지, 동업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이병철은 도정업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의 자본금을 모두 쏟아 붓기에는 아무래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서 그는 동업자를 찾았다.
합천 사람인 정현용과 진주 사람인 김정수와 손을 잡는다.
이들은 각각 1만원씩을 투자해 3만원을 자본금으로 정미소 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마산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최신식 기계를 설치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데 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미소를 갖추려다 보니 아무래도 자본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은행을 찾아다 대출을 신청했다.
은행에선 곡가의 변동과 일본시장 변동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병철은 돈을 빌려주기 싫어 괜스레 쓸데없는 질문만 하다고 지레짐작했다.
하자만 그건, 사업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병철은 그런 대내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해 결국 첫 사업은 실패하게 된다.
여하튼 이병철은 은행에서 설비자금을 대출받아 신식기계를 도입했다.
그리고 1936년 어느 화창한 봄날, 마산에 ‘협동정미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세 사람이 동업했기 때문에 ‘협동’이라는 상호를 썼지만,
‘조선인은 협동심이 없다’는 일본인들이 멸시를 보기 좋게 꺾겠다는 각오도 있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동업자와 함께 사업에 전념했으나 1년 뒤 결과는 ‘꽝’이었다.
이병철은 자본금 가운데 절반 이상을 까먹었다.
당시 쌀 거래는 인천에 있는 미곡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일반 미곡상들은 여기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양곡시세에 따라 거래를 했다.
미곡상들은 쌀값이 오를 기미가 보이면 쌀을 사들였다가
다시 쌀값이 내릴 기미가 있으면 쌀을 파는 방식으로 사업을 벌였다.
이병철도 같은 방식을 따라 사업을 했으나 결과는 엄청난 적자였다.
결국 동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정수가 손을 떼버렸다.
이병철은 곰곰이 원인을 분석했다.
지방에서 쌀을 사다가 도정업을 하던 이병철은
쌀값 시세에 관계없이 부지런히 기계만 돌리면 사업이 잘 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작 도정에서 오는 이익보다 쌀값이 오를 때 사다가
쌀값이 내릴 때 도정을 거쳐 팔았기 때문에 손해가 생긴 것이다.
그는 쌀값이 오를 때 쌀을 사다가 도정을 해서 쌀값이 떨어졌을 때 내다팔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냈다.
마치 주식투자에서 소문을 듣고 주식을 샀다가 쪽박을 차게 된 셈이다.
분석을 마친 뒤, 이병철은 그때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벌어나갔다.
쌀값이 오를 때 다른 사람들은 더 오르리라는 기대심리로 쌀을 사들였으나
그는 쌀을 내다 팔고 쌀값이 떨어질 때 쌀을 사들였다.
작전은 대박이었다.
적자를 만회하고도 상당한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 결산에서는 3만원의 출자금을 빼고도 2만원의 이익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금으로 다른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그는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필요한 화물차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그래서 운수업에도 손을 댄다.
화물량이 많았지만 운송수단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병철은 화물차 5대를 굴리던 마산 일출 자동차 회사를 사들였다.
또 신형 트럭 5대를 새로 구입해 본격적으로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운수업도 솔솔 잘 됐다.
이병철은 제법 돈도 벌었다.
그리고 사업에 자신감도 붙었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돈도 벌자, 이병철은 다시 옛 버릇이 되살아났다.
그는 남아도는 시간과 돈을 주체하지 못해 요정나들이를 다시 시작했다.
이병철은 요정에 가면 방 하나를 차지하고 사람 수에 맞춰 기생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요정 전체를 차지한 다음,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기생들과 어울려 놀았다.
당시 마산에는 8~9개의 요정이 있었는데, 모두가 이병철의 단골이었다.
거기에 근무하는 80~90명이나 되는 기생과 모두 낯을 익힐 만큼 그의 요정 출입은 빈번했다.
한번은 마산에 있는 기생 7~80명을 몽땅 예약한 적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경남의 일본인 경찰부장이 마산에 왔다.
마산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은 접대를 위해 일류요정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이병철이 마산의 모든 기생을 예약한 뒤여서 기생이 있을 턱이 없었다.
도정업에서 운수사업까지 재미를 본 이병철은 또 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
토지를 구입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는 땅을 사들이려 한 것이다.
이병철이 동업자인 정현용에게 자신의 계획을 넌지시 말했다.
“사업을 한 가지 더 해보는 게 어떻겠나?”
“어떤 사업을 하자는 거야?”
“토지를 구입하는 거야.”
“그건 돈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 아닌가. 갖고 있는 자본금만으로는 어려울 거네.”
“염려 말게, 은행을 이용하면 도니까.”
은행에서 돈을 빌려 땅을 사들인 뒤 소작을 맡겨 농사를 짓게 한 뒤,
쌀을 팔면 은행이자를 갚고도 이익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이병철이 땅을 사들이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쌀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지만, 땅값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젊은이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을 일손이 모자라게 되어, 저마다 농토를 팔려고 내놓았다.
이렇게 되니 쌀값은 자꾸 치솟는 반면에 땅값은 떨어졌던 것이다.
이병철의 땅 투기는 일제치하에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 확장과 성공에만 몰두한 그는 미처 우리 농민이 희생될 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첫 번째로 매입한 토지는 일본인 아마노가 내놓은 40만평의 땅이었다.
이병철은 계약금으로 그에게 만원을 건네주었고, 은행은 아마노에게 잔금을 지불해주고 담보등기를 끝냈다.
이런 식으로 이병철은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땅을 사들였다.
사업은 기대이상으로 잘 되어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만에 이병철은 가을걷이 때 1만석을 거둬들이는 200만평의 대지주가 됐다.
약관 20대에 경남 일대에서는 최대의 지주가 된 것이다.
토지매입도 김해평야에서만 그치지 않고 부산, 대구 등지까지 뻗혀 나갔다.
거침없을 것 같은 그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느닷없이 중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37년 3월 터진 중일전쟁으로 일본정부는 은행의 대출을 중단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중국본토를 침략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장기화되자
엄청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자금 동결령을 내린 것이었다.
이병철은 그때의 일을 청천벽력, 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전국의 쌀가게 문을 닫도록 해 정주영이 파산한 것과 같은 상황이 이병철에게도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이병철은 그동안 일으켜 놓았던 정미소와 운수회사마저 날려 버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동업자인 정현용은 모든 사업을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를 가버린다.
이병철도 마산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있을 때에는 귀찮을 정도로 몰려들었던 친구들마저도
그가 사업에 실패하자 한사람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삼성 로고 뿌리는 '별표 국수' "
200만평 땅 투기에 실패해 자신이 벌어들인 재산을 고스란히 날려버린 이병철은 훌쩍 여행을 떠난다.
부산에서 시작한 여행은 서울을 거쳐 평양 신의주 원산 흥남을 지나
만주의 장춘, 심양과 북경, 청도, 상해까지 이어진다.
멀고먼 대륙여행이었다.
두 달 동안의 긴 여행이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된 때가 아니었다.
기차는 연착을 하기 일쑤였고, 기차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여행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시장조사의 목적도 있었다.
머리를 식힐 겸 새 출발의 기회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여정기간 이병철이 관심 있게 지켜본 것은 물자의 유통 과정과 상인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사과나 건어물이 매우 부족했다.
사과와 동해의 건어물을 만주지방에 수출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역업을 생각한 것이다.
그런 물품을 조선 땅에서 가져와 중국에 내다파는 전문업자도 거의 없었다.
이병철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가 벌였던 땅 투기는 자신에게만 이익이 되는 사업이었다.
그래서 그 사업은 망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에게는 피해가 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무역업은 다르다.
국내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물고기를 잡은 어민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고,
만주 주민들 역시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시 국내에 돌아온 이병철은 중국시장에 가져다 팔 과일 작황과 어황을 끊임없이 조사했다.
작황이 안 좋아 가격이 급등할 때는 어떤 위험이 있는지,
또 물건은 필요한 양을 제때 대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본 것이다.
이병철이 중요하게 생각한 건, 입지였다.
사과와 건어물을 모아서 기차에 실어 만주로 보내는 곳을 찾아보았다.
바로 대구였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기착지였고 경북지역의 물산이 모이는 교통의 주요 길목이었다.
대구 근처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았고, 포항이 근처에 있어 건어물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이병철은 이렇게 치밀한 분석을 한 뒤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1938년 대구시 인교동 61-1번지, 서문시장 근처였다.
지상 4층, 지하 2층의 목조건물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삼성이란 브랜드가 처음 등장한 때였다.
바로 현재 삼성그룹의 모체가 되는 게 삼성상회였다.
삼성이라는 이름은 3이라는 숫자가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뜻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3이라는 숫자는 기업인들이 좋아하는 숫자였다.
3이라는 숫자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식되고 있어서다.
화로처럼 삼발이가 달려 있는 기구들이 쓰러지지 않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도 이 3을 좋아했다.
일본 미쓰비시를 한문으로 쓰면 삼릉(三稜)이다.
비쓰비시 그룹을 창업한 이와사키 가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던 세 개의 마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쯔이도 한문으로 삼정(三井)이라고 쓴다.
세 개의 우물이 있던 자신의 고향마을을 상징한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원이었다.
하지만 삼성상회 건물가격이 2만원이나 했다.
건물 가격은 2만원.
이병철이 갖고 있는 돈으로 사기에는 자금이 모자랐다.
그는 1만원을 선금으로 내고 1만원은 2년 안에 갚기로 하고 건물을 사들였다.
삼성상회는 대구 근처에서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사들여 만주와 북경에 내다 팔았다.
여기에 하나 더 새로운 사업이 추가됐다.
바로 국수사업이었다.
이병철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 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첫 출발은 과일과 국수 사업이었던 셈이다.
국수 브랜드는 ‘별표’였다.
3개의 별이 선명하게 새겨진 ‘삼성별표 국수’ 상표다.
이병철은 당시 3개의 별을 의미하는 삼성을 ‘三星’이란 한자로 쓴 로고를 썼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널리 사용됐다.
그가 국수사업에 나선 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심해지면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국수는 히트를 쳤다.
한 다발에 10전짜리 국수를 60다발씩 포장한 상자가 하루에만 100개 이상 팔려 나갔다.
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국수공장이 다섯 개가 있었다.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별표국수는 값이 가장 비싼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맛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병철은 여러 국수공장 중의 하나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품질에 승부수를 던졌다.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채우기 급급했던 때였다.
하지만 그는 값이 좀 비쌌지만 맛과 품질이 좋은 국수를 내다 파는 전략을 썼다.
결과적으로 그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 때 절친으로 지냈던 이순근을 삼성상회 지배인으로 데려다 앉힌다.
이순근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했으나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한 탓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삼성의 특징 중 하나인 전문경영인 시스템의 기초를 닦아 놓는다.
‘못 미더운 사람은 아예 쓰지 말고, 쓰거든 믿고 맡긴다’는 경영방침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의 회고를 보면, 당시 별표국수 공장은 24시간 돌아갈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그러나 이병철의 가족들을 데리고 공장의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잤다.
이병철도 공장 한켠에 종이상자로 칸막이를 만들고 잠을 잤다.
약속한 기일 안에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또 밤중에도 기계를 돌렸는데, 잠을 자다가 기계가 멈추면 기계를 점검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국수기계가 왕왕 돌아가는 소음과 밀가루 분진을 마시고 이병철과 가족들은 공장 안에서 2년을 보냈다.
이런 고생 끝에 이병철은 삼성상회 건물을 살 때의 빚 1만원을 2년이 채 안 돼 모두 갚았다.
삼성상회가 성장하자,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꺼리를 찾았다.
바로 주류사업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여덟 개의 양조장이 있었다.
일본인이 4개를 갖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4개를 갖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인 무네이가 경영하던 조선양조가 매물로 나왔다.
연간 7000섬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는 대형 양조장이었으나, 경영진의 내분으로 시장에 나온 것이었다.
이병철은 양조장을 12만원에 사들인다.
이병철은 양조사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제는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어 쌀이나 석유 등 주요 생필품을 통제하고 있었다.
단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만드는 술만은 통제를 하지 않았다.
전비확충에 혈안이 돼 있던 조선총독부가 세금수입 확보를 위해서였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세수확보를 위해 밀주 단속을 강하게 해 양조업자들은 재고가 부족할 정도였다.
1941년 6월3일 삼성상회는 주식회사로 등록했다.
개인 기업에서 근대적인 기업형태로 바뀐 것이다.
사업이 잘 되기 시작하면서 이병철은 다시 요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술 사업을 하다 만난 양조업자들과 어울려 요정으로 향했다.
돈과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밤마다 새벽 1시가 지나서 귀가하고
아침이면 10시가 지나서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이어졌다.
대구의 요정출입에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의 요정을 찾거나,
일본 규슈의 벳부나 멀리 교토지도 원정을 다녔다.
이병철은 8.15해방 전까지 요정출입은 이어졌다.
이병철은 그렇게 긴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사업을 했지만 사업가로서 뚜렷한 목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을 한 것이었다.
장사꾼은 돈을 버는 게 목적이지만, 사업가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 이병철은 진정한 사업가가 아닌 셈이었다.
게다가 1941년에는 그의 어머니가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늦둥이 막내아들이었던 이병철은 아버지 보다 어머니에게 심리적으로 더 가까웠다.
막내아들 이병철에겐 어머니의 죽음은 세상에 홀로 떠넘겨진 것과 같이 견디기 힘든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병철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암담한 정세 속에서 찾아드는 말할 수 없는 허전한 심정이
밤마다 발길을 주석으로 돌리게 했을 뿐이다.’
이병철은 삼성상회와 양조장 운영은 지배인 이순근에게 맡기고,
1942년 봄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고향에서 해방을 맞는다.
"이병철, 오징어를 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기업가에게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일본 자본과 일본 기술자들이 썰물처럼 일본으로 빠져나가 버린 건 위기였지만
새로운 터전에서 마음껏 사업을 펼쳐 볼 수 있는 것은 기회였다.
해방공간에서 정치는 물론 경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한 물가 부족으로 국민생활은 빈궁하기 그지없다.
해방은 이병철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동안 이병철은 사업가의 사회적인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산을 모으는 데만 신경을 썼다.
물론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상황에서 그가 기업가의 사명을 제대로 발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사명감 없이 사업을 벌여온 자신을 반성했다.
그리고 자문자답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능력과 장점이 있다.
능력과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방된 나라에 기여해 보자.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업이다.
그렇다.
내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사업의 길에 투신하는 것이다.”
이병철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사업보국’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다.
“내가 가장 잘 하는 사업으로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면 된다.
나라가 안정을 찾으려면 경제가 좋아져야 하고, 그래야 국민들도 편하게 살 수 있다.”
이병철은 스스로 사업에 뜻을 세운 것이 제1의 각성이라면 사업보국의 신념을 굳힌 것은 제2의 각성이라고 했다.
물론 이병철의 그런 생각은 세상 사람한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병철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각성은 그 후 기업을 일으키고 그것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일관된 나의 기업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사회일반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때로는 돈벌이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사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병철은 해방을 맞아 다시 대구로 온다.
해방 정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좌익과 우익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이 와중에 삼성상회 경영을 책임지고 있던 이순근은 좌익 활동에 투신한다.
이순근이 떠난 뒤 이병철은 지배인에 이창업, 부사장에 김재소를 영입했다.
대구에서는 좌익 활동이 맹위를 떨쳤다.
대구지역 공장에선 태업과 파업이 잇따랐다.
1946년 이른바 ‘대구 10월 폭동’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좌익 활동가 박상희가 피살됐다.
그는 박정희의 작은 형이었다.
이병철은 대구폭동 한가운데 있었고, 폭동 과정을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방을 맞아 이병철은 좀 더 큰 곳에서 새로운 사업을 펼쳐보고 싶었다.
설립지역을 대구로 할 것이냐, 아니면 무대를 넓혀 서울로 할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대구에서 애써 닦은 기반을 버리고 새 사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주위에서도 서울로 올라가려는 그의 생각을 한사코 말렸다.
하지만 이병철은 대구에서 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에 만족하고
눌러앉아 버리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전 그는 벌여놓은 사업에 만족해 요정 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해방 후에는 변해야했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혜화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막상 서울에 올라왔지만 당장 사업에 착수하지는 않았다.
이병철답게 경제계의 움직임과 국내외 정세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을 못해 생활필수품이 몹시 부족했다.
대신 일제의 통제가 풀리면서 수요는 계속 늘고 있었다.
갑자기 생산할 길이 없어 생활필수품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날이 치솟기만 했다.
이병철은 일상생활에 긴요한 물건을 수입해 들여오면 자신은 돈을 벌고,
사람들은 좀 더 싸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병철은 서울로 올라온 지 1년 반이 지난 1948년 11월 서울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현재 YMCA 건물)에 100여평을 빌려
‘삼성물산공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회사이름을 공사로 한 것은 당시 국내 무역상의 주요 거래선이
마카오 홍콩 등 화상이어서 이들에게 친근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삼성물산공사는 동남아시아에 오징어와 우뭇가사리 등을 수출하고 무명실을 수입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뒤엔 재봉틀, 실 등 생필품부터 철판 등 건설자재까지 수백 가지 품목을 수입하게 됐다.
처음에는 사장인 이병철이 75%의 돈을 대고 전무 조홍제, 상무 김생기 등 여섯 사람이 나머지 25%를 댔다.
하지만 이병철은 곧 원하는 사원들은 누구나 돈을 댈 수 있도록 했다.
지분에 따라 이익도 골고루 나눠주기로 했다.
이른바 ‘사원주주제’를 시행한 것이다.
직원들에게 ‘내 회사’라는 주인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많아지면 사원들은 더욱 즐겁게, 더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하고,
직원 스스로도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다고 이병철은 여겼다.
이병철의 회사운영 기본 방침은 크게 이랬다.
첫째, 일정한 자본금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 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거나 평사원이거나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물론,
능력에 따른 대우와 신상필벌의 규율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우대해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이병철이 사원대우를 잘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건, 대구폭동 사건을 본 뒤부터였다.
그는 폭동의 원인을 한마디로 ‘먹고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병철은 그때 “기업가는 돈을 벌면 사원들에게 배분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돈을 벌어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장사꾼이 아니라, 돈을 벌어 남과 함께 공유하는 기업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셈이다.
삼성물산공사는 회사 문을 연지 1년 만에 1억2000만원의 순이익을 올려
당시 상공부에 등록된 543개 무역업체 중 7위로 올라섰다.
수입상품은 일용잡화와 같은 자질구레한 것이지만 통관되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국내 시장 수요를 면밀히 분석해 수입했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비로소 기업 경영의 묘미를 알게 됐다.
무슨 일을 하든 쉽게 실패하지 않을 자신감도 생겼다.
이병철이 돈을 버는 재미보다는 기업을 경영하는 데 더 큰 재미를 느끼게 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가 수입해 보관하던 설탕 면사 한약재 염료 등 물건이 모두 불타버렸다.
이병철이 타고 다니던 시보레 자동차도 강제로 빼앗겨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이 타고 다녔다.
이병철은 또 재산을 모두 날리고 다시 알거지 신세가 되는 듯했다.
그동안 벌어놓았던 돈도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