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래는 이제 마음 놓고 웃고 싶다 절망의 끝, 가장 절박한 순간, 그 위기의 순간을 딛고 살아난 사나이. 경남FC 미드필더 이용래의 이야기다. K-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번외선수로 지명되어 연봉 1200만 원짜리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뼈를 깎는 노력으로 K-리그 정상급 미드필더로 성장하기까지, 이용래의 축구인생은 좌절과 극복, 시련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가로막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은 이용래. 이제는 소속팀 경남FC를 이끌고 K-리그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경남FC의 미드필드를 책임지는 이용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K리그 신인 드래프트 번외지명으로 가까스로 경남에 입단 이용래. 하지만 경남 입단 후 피나는 노력으로 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자리 잡았다. (사진=연합) 인터뷰실로 들어오는 이용래의 발걸음이 가볍다. 팀이 잘나가고 있는데다가 본인의 활약 또한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난다. 말 한마디에도 자신감이 묻어 있다. 선수는 개인 성적과 팀 성적이 모두 좋을 때 기분이 가장 좋다.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용래가 그렇다. 요즘 몸상태가 너무 좋다. 축구도 잘 된다. 소속팀 경남FC는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 유력하다. 자신이 팀의 상승세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한 이용래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경기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만큼 축구가 즐겁다. 2009년 K-리그에 첫 발을 내디딘 이용래. 데뷔 시즌에 6골 6도움(30경기)을 기록하며 100점 만점짜리 활약을 펼쳤다.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김영후(강원FC)와 유병수(인천 유나이티드)의 그늘에 가렸지만 이용래의 활약상 또한 놀라웠다. 하지만 이용래는 웃을 수 없었다. 경남FC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전북 현대에게 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개인 성적은 좋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용래는 2010시즌을 앞두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조광래 감독은 이용래를 중심으로 ‘패스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위의 기대가 큰 만큼 훈련은 혹독했다. 하지만 이용래에게 고된 훈련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다. 불과 2년 전까지 하더라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이용래.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만큼 끔찍한 시련이었다. 이용래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2년 전의 아픔을 상기하며 “이 까짓 고통쯤이야 그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이용래의 내면에는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의지가 숨어 있다. 신인드래프트 좌절 임경현, 유병수, 송호영, 임상협, 김신욱…. 2008년 11월 20일 오전 10시. 서울 홍은동에 위치한 그랜드힐튼호텔에서는 ‘2009 K-리그 신인선수선발 드래프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 상무를 제외한 K-리그 14개 팀 코칭스태프는 2009년부터 K-리그에서 활약할 신인선수 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원FC는 우선지명으로 김영후를 비롯한 14명의 선수들을 선발한 뒤였다. 14개 팀 감독들은 신인선수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1순위는 숭실대 임경현의 몫이었다. 그리고 전원준, 전태현, 유병수 등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됐다. 같은 시각. 강원도 정동진에서는 이용래가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이용래는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10시 10분. 아직 연락이 없다. 그로부터 10분, 20분이 지나도 핸드폰 벨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용래는 초조해졌다. 신인드래프트가 지연되고 있나 싶었다. 같은 날 오전 9시부터는 K-리그 6강 플레이오프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용래는 “감독 인터뷰가 길어지는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이상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근처 PC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신인드래프트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축구페이지에는 ‘임경현, 전체 1순위로 부산 입단’이라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이용래는 “아, 내가 1순위는 아니구나. 안타깝지만 2순위나 3순위도 괜찮지”라고 위안 삼았다. 하지만 이용래의 생각은 틀렸다. 2순위, 3순위…, 14순위까지 쭉 훑어봤지만 이용래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2라운드, 3라운드, 4라운드, 5라운드까지 모두 살폈지만 결과는 같았다. 혹시나 싶어 번외지명 선수명단을 확인했다. ‘이런, 맙소사….’ 그곳에는 있지 말아야 할 이름이 있었다. ‘182 이용래’.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자신의 이름이 확실했다. 가슴이 요동쳤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용래는 PC방의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용래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축구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 고려대 시절 당한 발목 부상으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던 이용래. 하지만 모든 것을 극복하고 경남에서 성공시대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 나, 이런 사람이야 이용래는 어려서부터 볼을 잘 찼다. 대전중앙초교에서 축구를 시작해 봉산중, 유성생명과학고를 거쳤다. 청소년대표도 단골로 드나들었다. 고교 1학년 때는 대한축구협회(KFA) 유소년 육성프로그램에 따라 프랑스 FC메스로 연수를 다녀왔다. 2004년에는 유성생명과학고를 금석배 우승으로 이끌며 전국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용래는 도움 1위를 기록하며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됐다. 한국축구를 이끌 재목으로 일찌감치 기대 받은 이용래였다. 시련도 있었다. 2003년 핀란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은 이용래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청소년대표팀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공을 이어간다는 대의적인 명목으로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16년 만의 U-17 월드컵 출전이라 더욱 기대를 모았다. 신영록, 양동현, 이강진, 이상협, 그리고 이용래는 대표팀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프레디 아두(아리스)가 이끄는 미국,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널)와 다비드 실바(맨체스터 시티)의 스페인에 힘없이 무너졌다. 이용래는 세계축구와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꼈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고려대에 재학 중이던 2005년 5월. 이용래는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에 차출됐다. 박성화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가 자신과는 맞지 않다고 느꼈던 이용래였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축구가 잘됐다. 대표팀 상황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대로라면 2005년 FIFA U-20 월드컵 참가가 유력했다. 하지만 U-20 월드컵을 앞두고 자체 청백전에서 사고가 터지는데…. “당시 몸상태가 정말 좋았다. 축구도 잘됐다. 선수들의 직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느낌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의욕이 너무 앞섰던 것 같다. 연습경기에서 태클을 하던 도중 발목이 돌아갔다. ‘이거, 큰일이다’고 직감했다. 발목의 아픔보다 U-20 월드컵에 대한 걱정부터 앞섰다. 이대로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이용래는 결국 발목 부상으로 6개월을 쉬었다. 축구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조차 힘들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다. 치료 후 축구부로 돌아왔지만 통증은 지속됐다. 볼을 차면 발목이 아팠고 상대 선수의 태클이 발목 쪽으로 들어와도 심리적으로 위축됐다. 축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3학년부터는 다시 정상적인 축구를 시작했지만 100% 컨디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용래는 정상 컨디션이 아니어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권순형(강원FC)과 함께 고려대 미드필드를 이끈 이용래의 실력은 대학무대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용래의 시련은 계속되고 말았는데…. “보통 드래프트를 앞둔 선수들은 드래프트 직전에 열리는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 당시 드래프트 참가를 결정한 대다수 선수들도 드래프트 직전에 열린 경기에 뛰지 않았다. 아무리 잘하는 선수들이라도 드래프트 직전 플레이가 좋지 못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 대회에 뛰지 말았어야 했다. 당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기분도 찜찜했다. 불안감을 안고 경기에 출장했는데, 결과적으로 독이 되고 말았다. 내 플레이는 한심했고 주위 반응도 좋지 않았다. 드래프트를 앞두고 불길한 징조였다. 결국 신인드래프트에서 번외지명으로 경남FC에 입단하게 됐다. 항간에는 ‘이용래는 1학년 때의 부상이 완치되지 않아 정상적인 선수생활이 힘들다’라는 소문도 들렸다. 선수와 사전접촉을 할 수 없는 K-리그 구단들은 몸상태가 나쁜 선수를 뽑을 수 없었을 것이다. 축구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다.” 경남FC와 함께 웃고 싶다 2008년 11월 20일. 이용래는 세상의 끝을 보았다. 번외지명이라니…. 이용래는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분들이다. 이용래는 결심했다. “나는 1200만 원짜리 선수다. 억대 연봉을 받는 선수들과 똑같이 운동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지금부터 죽을 각오로 뛰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1200만 원은 번외지명 선수들의 연봉이다. 이용래는 이보다 더 큰 시련은 없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경남FC에는 혹독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광래 감독은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라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맹훈련을 지시했다. 이용래는 죽을 각오로 뛰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이것도 못하면 축구할 가치가 없다”는 투지가 솟구쳤다. 2009시즌. 이용래는 경남FC의 주전 미드필더로 뛰었다. 그해 전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남FC와 재계약을 체결했다. 번외지명이 아니라 주전 미드필더로서의 기량을 인정받은 것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구단도 있었다. 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돈만 보고 팀을 옮길 생각은 없다. 아직 나는 돈보다는 경기 출장이 더 중요할 때다. 도전정신이 부족한 게 아니다. 난 한 경기라도 더 뛰고 싶다. 새로운 팀에서 적응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그리고 수도권 팀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선․후배들에게 들어보면 그곳은 개인사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라는 분위기가 조성된 팀도 있다더라. 하지만 경남은 정반대다. 서로 비슷한 아픔을 공유해서인지 ‘나도 네 아픔을 겪어봐서 잘 안다’라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경남은 서로 돕고 의지하는 팀이다. 우리팀 맏형 (김)병지 삼촌을 시작으로 요즘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윤빛가람까지 모두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다. ‘너를 이겨야 내가 산다’고 생각한다면 경남은 살아남을 수 없다. ‘네가 잘해야 우리 팀이 산다’는 마음을 갖고 뛰어야 한다. 이런 점이 바로 경남이 잘나가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2010년. 경남은 K-리그 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조광래 감독은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부임했다. 하지만 김귀화 감독대행을 중심으로 선수단이 하나로 똘똘 뭉쳐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용래에게 경남FC가 상승세를 유지하는 비결을 물었다. 그랬더니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희생이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모든 선수들이 팀의 주역이 되기를 원한다면 제대로 될 수 없다. 경남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 (김)태욱이가 고생이 많다. 스피드가 빠르고 킥력도 좋은데 나와 윤빛가람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고 있다. 수비에 치중하다보니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 같다. 태욱이뿐 아니라 공격수와 수비수, 주전과 후보 등 모두가 희생한다. 경남은 희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팀이다.” 세상의 끝을 봤던 이용래. 지옥에서 돌아온 이용래는 더욱 강해졌다. 아직까지 마음 놓고 웃을 기회는 없었다. 신인드래프트 좌절로 울었던 2008년, 6강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로 웃지 못한 2009년. 이용래에게는 항상 시련과 좌절이 존재했다. 하지만 2010년은 다르다. 이용래는 K-리그에서 가장 잘하고 있다. 경남FC 또한 K-리그 우승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용래는 이제 마음 놓고 웃고 싶다. 마음 편히 호탕하게 웃고 싶은 이용래다. 이용래를 웃게 만드는 길은 바로…. 그렇다. 경남FC의 K-리그 우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