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손바닥문학상 당선작] 황예솔
■대상
유해동물 / 황예솔
비둘기는 한강으로 통하는 터널 안을 달렸다. 주황 불빛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궈놓은 듯, 급하게 붉은 발을 디뎠다가 떼었다. 쉼 없이 까딱거리는 목은 뒤에 오는 발보다 어떻게든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앞서나갔다. 빛에 반사된 목 뒤의 깃털들이 초록색이었다가 또 보라색으로 빛났다. 뒤뚱뒤뚱 달리는 비둘기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언제 저것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를지 몰랐다. 이곳은 터널 안이기 때문에 잘못 날아오른다면 분명 머리를 부딪치고 추락할 테다. 더러운 깃털과 병균을 나부끼며.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나는 비둘기가 정말 싫었다. 동그랗고 노란 눈도, 잿빛의 깃털도. 마음대로 보도블록에 앉아서 쉬는 것도 싫었고 예상치 못하게 날아올라서 놀라게 하는 것도 싫었다. 더욱더 싫은 것은 많은 개체 수만큼 죽기도 많이 죽어서 도시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사체를 내보이는 것이었다. 사체를 볼 때마다 기억하기 싫은 어떤 둔탁한 느낌이 떠올랐다. 뇌에 가장 강렬한 영향을 주는 감각은 후각이라고 한다. 나는 비둘기 사체를 보면 비린 냄새와 함께 그 시절 승이가 뿌리고 다녔던 섬유 향수 냄새가 기억났다. 고등학생 시절의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욕지기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터널의 끝까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비둘기와 어색한 동행을 했다. 비둘기는 터널을 나오자 힘차게 날아오르더니 얼마 못 가 잔디밭에 다시 내려앉아 걸어다녔다.
눈앞에 수많은 빌딩의 불빛과 나란히 줄지은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렸다. 혜성처럼 지나다니는 자동차 불빛을 등에 인 한강이 펼쳐졌다. 몇 번을 마주해도 황홀한 서울의 야경이었다. 자전거도로를 건너면 한강 근처 잔디밭에 지에스25 한강평화점이 있었다. 어두운 한강 풍경 속에 형광등 조명으로 빛나는 편의점은 종점에 도착한 심야버스 같기도 하고, 은하계 사이의 우주정거장 같기도 했다. 속도를 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유리문을 열자 휴대폰을 보고 있던 승이가 고개를 들었다. 또 왔네? 나를 보고 웃는 승이의 얼굴을 보며 애써 웃었다. 응, 우리 밖에서 잠깐 얘기할까? 오늘은 꼭 너의 기억 속에 내가 떠오르길 바라면서, 나는 내 가해자의 상담 치료를 시작했다.
어느덧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많이 무뎌졌지만, 적어도 이십 대 초반까지는 매일 상상했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과하는 승이의 얼굴을. 그런데 승이는 저번 주에 웃으면서 말했다.
― 어떡해, 미안해. 내가 기억이 안 나.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아니,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꼭 한 번은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퇴근 후 바람 쐬러 나왔던 한강 산책 중에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드라마틱한 만남을 상상했던 건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물을 사러 들어간 한강 편의점에서 내 카드를 받아든 승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승이는 많이 마르고 푸석푸석해 보였다. 상한 얼굴이었지만 사람 기죽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가볍지만 휘갈겨 때리면 더 아픈 재질의 눈빛. 더 쳐다보았다간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침을 뱉을 것만 같았다. 나는 차마 눈을 계속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다가 이런 스스로의 모습에 실소가 터지고 말았다. 나 지금 뭐 하지?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옛날 생각에 기가 죽은 건가? 그때 승이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 혹시 수화여고 나왔어요? 낯이 익는데.
나는 당황했다. 기억하지 못할 텐데?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나 누군지 알겠어? 내 대답에 승이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 진짜예요? 어떡해. 미안해. 나 기억이 안 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다니. 그 직후에 한 말은 칠백 원이야, 였다.
― 우리 친했어?
승이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승이와 내가 또 ‘우리’가 되었다. 우리 친해요, 그치? 승이가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그렇게 말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승이네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끌려가 맞거나 새벽까지 끝없는 욕 문자를 받아야 했으니까. 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승이는 대명사의 ‘우리’였을지 모르지만, 그 시절 나는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우리 안에 갇혀 살았다.
― 안 친했어.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승이는 제멋대로 영수증을 뽑아 구기며 그래? 그래도 자주 와, 하고 카드를 넘겨주었다. 편의점을 나오고 다리에 자꾸 힘이 풀려서 더 산책할 수 없었다. 뒷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다. 예민한 강바람이 이제 곧 가을도 지나간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그길로 집에 가서 노트북을 켜고 고등학교 이 학년 담임선생님에게 받았던 메일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예전에 썼던 메일주소로 로그인하니 스팸메일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받은 메일함 거의 밑바닥쯤에서 그때의 메일을 찾을 수 있었다.
‘여빈아, 미안해. 승이가 지금 많이 아파. 사고 이후로 해리성 기억 장애가 와서 학교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야. 학교폭력위원회는 어려울 것 같아. 선생님도 많이 힘들다. 미안해.’
메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분명히 고개를 들고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억지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숨쉬기가 답답했다. 당시에 나는 ‘해리성 기억 장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 병이 어떤 병인지는 상관이 없었다.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다니, 괘씸할 뿐이었다.
나는 열여덟 살 이후로 한 달에도 몇 번씩,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처럼 기억을 마주했다. 골목길을 걷다가도, 지하주차장에 내려갈 때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볼 때나 비둘기가 날아오를 때. 차에 치여 온몸이 부서지고 아스팔트에 머리가 깨지듯이 기억에 치였다. 불공평했다. 피해자는 트라우마 속에 사는데 가해자인 승이는 사고로 기억을 도려내었다니. 참 부러웠다. 모든 걸 잊는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었다. 승이가 학교를 자퇴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나는 고등학교 삼 학년부터 다시 학교에 갔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오히려 자유로웠다. 혼자 악착같이 공부해서 좋은 수능 성적을 받았다. 내 이름이 학교 정문에 큼지막하게 걸렸다. 졸업식 날에는 이 학년 반장한테 문자가 왔다. 여빈아, 너 서울대 갔다며. 축하해. 그리고 미안해. 그때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는 말에 구역질이 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날 먹은 모든 걸 게워낸 후에 문득 심리상담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통,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에게 이러는지, 왜 자기 인생 편하자고 남에게 똥을 주는지. 왜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가운데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지. 돌아보면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준 학창 시절의 인간들에게 조금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현재 나는 심리상담사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인간에 대해서 조금 알 것도 같다. 인간은 자기에게 유리한 기억만을 안고 살아간다. 그게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어 기술이었다. 승이도 일말의 죄책감은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운이 좋게도 그 사고를 겪은 것이다. 신이 주신 선물과도 같은 장애였다. 선배와 점심을 먹다가 물어보았다.
― 해리성 기억 장애를 치료하려면 꼭 약물치료가 동반되어야 하나요?
선배는 밥 먹다가 왜 일 얘기를 하냐며 투정을 부리다가 무섭게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 곧 대답해주었다. 환자의 심리 상태가 많이 불안정하다면 동원하는 것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꾸준한 상담을 먼저 시작해야겠지. 너도 알겠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 기억을 지운 거라면 떠올리는 것이 더 고통일 수 있잖아. 나는 개인적으로 환자의 현재 삶에 중요치 않은 부분이라면 굳이 치료해야 하나 싶을 때가 있어. 식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선배의 얘기를 들었다. 선배는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환자 이야기야? 나는 밥을 입안에 넣고 씹었다. 네, 제 환자요.
나는 맥주 두 캔을 사 들고 먼저 나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이제 공기에서 제법 겨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멀리 철교에서 지하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은 별 하나 없었지만 은은한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서울이 너무 밝아 캄캄해야 할 밤하늘마저 억지로 밝히고 있는 것 같았다. 승이는 한강 라면을 끓여 나오겠다고 했다. 맥주캔에는 응결된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그때 뭔가 킁킁거리는 개 같은 것이 내 발에 스쳤다. 탁자 아래로 고개를 내려 보니 비둘기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놀라다가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갈 뻔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면을 들고 오던 승이가 내 모습을 보고 몸도 못 가누며 웃고 있었다. 라면 용기에 국물이 출렁출렁 넘치다가 결국 쏟아졌다.
― 아 씨발, 뜨거워.
욕을 하면서도 승이는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웃었고, 잔디밭에 즉석라면 용기가 무덤처럼 뒤집혀 떨어졌다. 다시 해서 가져올게. 승이는 웃음의 잔해가 아직 남은 듯이 끅끅대며 라면 용기를 주웠다. 나는 승이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승이는 눈에 띄게 오른쪽 다리가 짧아져 있었다. 웃느라 휘청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절뚝인 거였다. 사고 났을 때 많이 다쳤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저 정도였나. 승이는 몇 분 후 다시 나왔다. 절뚝이느라 라면 용기에 여전히 국물이 출렁거렸다. 도와주러 다가갈 수도 있었지만, 가만히 앉아서 승이를 지켜보았다. 어쩐지 희열감이 들다가도 곧 서늘해지는 것은 강바람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내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어떤 눈빛을 느꼈다. 고개를 쉴 새 없이 갸웃갸웃하는 비둘기였다. 갸웃거리는 고개가 내 속마음을 비웃는 듯해 표정이 굳어졌다. 비둘기는 내 쪽으로 푸드덕 날아오르더니 떨어진 라면 위에 앉았다. 한 마리가 앉자 다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하나, 둘, 라면 웅덩이 쪽으로 모여들었다. 부리로 면발을 들어올리거나 콕콕 쪼며 각자의 식사를 시작했다. 어느덧 열 마리가량 모였다. 부리에 걸린 꼬불꼬불한 라면 면발이 마치 살아 있는 지렁이처럼 느껴졌다.
― 이것들, 파티 났네.
승이가 탁자 위에 라면을 내려놓았다. 출렁이는 라면 국물 아래 구불구불한 면발이 죽은 지렁이 사체 같았다. 승이는 나무젓가락을 뜯어 나에게 건네며 한강 라면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어, 빨리 먹어, 했다.
― 저거 안 치워도 돼?
나는 이제 얼마 안 남은 면발을 쟁취하려 서로 날개를 부딪치며 싸우는 비둘기 무리를 가리켰다.
― 뭐 하러 치워, 쟤들이 다 먹어주는데. 쟤들도 불쌍하잖아.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감정이입은 치료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더니 승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젓가락으로 면발을 집어 빨아들인 승이는 한 손으로 능숙하게 맥주캔을 따서 내게 건넸다. 자신의 캔도 따서 건배하더니 바로 들이켰다. 승이는 캔을 내려놓자마자 다시 젓가락을 들고 면발을 건져올렸다. 나는 한껏 오므린 승이의 입술과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면발을 지켜보다가 더럽다고 생각했다. 안 먹어? 승이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비둘기가 모여 있는 곳을 다시 보았다. 응, 속이 안 좋아서. 아직 비둘기들이 서로에게 위협적으로 날갯짓을 하며 모여 있었다. 저 유해동물이 불쌍하다니. 승이 같은 사람들이 문제였다. 자꾸 비둘기에게 밥을 줘서 쟤들은 살기 편해지고, 그러다보니 개체 수가 늘고, 결국 유해동물이 된 거 아닌가? 나는 비둘기가 싫었다. 아니, 비둘기를 혐오했다. 순간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지금 당장 돈 챙겨서 지하주차장으로 와.’
야자 중에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야자 1교시를 채 마치지 못하고 가방을 쌌다. 조용한 가운데 선생님이 야, 너 어디가, 했다.
― 배가 아파서요. 죄송합니다.
온종일 말하지 않았더니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은 큼,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나를 그냥 보내주었다. 내가 괴롭힘당하는 걸 알면서도. 가방을 메고 나와서 터덜터덜 걸었다. 승이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길과 우리 집으로 향하는 길 중에 고민했다. 동네는 따뜻한 오후 햇볕을 받아 늘어지듯이 긴 그림자를 하나같이 누이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돈이 없다고 맞을 테고, 집으로 가면 새벽까지 욕 문자가 올 거였다. 휴대폰을 끄면 승이와 승이 친구들은 집으로 전화했다. 엄마에게, 여빈이 친구인데요, 여빈이가 연락이 안 되어서요, 문자 좀 보라고 해주시겠어요? 했고 엄마는 그 문자가 욕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여빈아,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네? 바꿔줄까? 그럴 때면 문밖의 엄마도 승이 패거리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한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오도카니 교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집으로 가보자.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는데, 비둘기가 있었다. 따뜻한 오후 햇볕 아래 한 비둘기가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면 날아가겠지, 생각하고 걷는데 그 자리에서 가만히 나만 쳐다보았다. 마치 여기가 자기 자리인 것처럼, 나보고 돌아가라는 것처럼 버텼다. 그때는 비둘기가 아픈 건가, 하는 생각도 못하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발로 차면 날아가겠지 싶어 이를 악물고 오른발로 땅바닥에 돌처럼 놓여 있던 비둘기를 힘껏 걷어찼다. 순간 놀라 날개를 펼치던 비둘기는 그대로 한쪽 날개가 꺾인 채 골목을 구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가방 지퍼를 빠르게 열었다 닫는 것 같은, 끄그극 소리와 함께 푸드덕 날갯소리가 겹쳐졌다. 그때 알았다. 비둘기 비명은 지퍼 긁는 소리 같으면서도 사람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는 소리 같기도 하다는 걸. 잿빛 깃털과 골목의 먼지가 섞여 오후 햇볕을 타고 부유했다.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입을 틀어막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둘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날개가 꺾인 채 날아오르지 못해 쉼 없이 같은 자리에서 한쪽으로 빙빙 도는 비둘기는 지하철역 앞에서 파는 장난감 같았다. 뒷걸음치다 내 오른쪽 운동화를 보았다. 비둘기 솜털 몇 가닥이 운동화 끈에 붙어 있었다. 앞코에는 핏방울이 번졌다. 나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그런데 승이가 서 있었다. 골목 사이로 바람이 불자 승이가 항상 뿌리던 베이비파우더 향의 섬유 향수 냄새가 풍겼다.
― 야, 너 무섭다.
승이가 끅끅거리며 웃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는데 다시 뒤를 돌아보니 움직임을 멈추고 한쪽 날개만을 펼친 채, 노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비둘기가 가만히 죽어 있었다.
― 내가 수화여고 다녔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학교 기억 안 난다며.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물어봤다. 희미하게라도 기억이 남아 있다면 기억을 떠올리는 데 문제가 없다는 뜻일 수 있으니까, 중요한 문제였다. 승이는 물 맺힌 맥주캔을 쓰다듬고 손가락에 묻은 물방울을 튕기면서 말했다.
― 그냥 가끔 책장에 가정통신문이나, 서랍 깊숙한 데에 성적표나, 그런 거 있더라고.
― 친구들 얼굴이 희미하게 기억나기도 해? 나처럼?
승이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빛이 흐렸다. 세상 모든 불빛을 모아놓은 듯이 반짝이는 서울 야경 옆이었는데도 승이의 눈에는 단 하나의 빛도 스미지 않았다. 그러다 승이는 웃어버렸고 눈이 휘어졌다.
― 너도 몰랐어. 그냥 내 또래 여자한테 가끔 물어봐. 너같이 갑자기 나를 보고 멍한 표정 짓는 여자가 몇 명 있었거든. 그래서 물어보기 시작했는데, 네가 처음이야. 아는 척한 사람.
승이 뒤로 있는 철교 위에 지하철이 지나갔다. 불 켜진 지하철에 서 있던 사람들이 흔들거리며 실려갔다. 내가 반가웠겠구나. 상담의 기본은 공감이었다. 가식은 아니었다. 승이가 나를 반가워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승이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걸 계획했든, 너는 날 반가워했구나. 불쌍했다. 지하철이 지나간 여파인지 승이 쪽에서 바람이 불었고, 푸석한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갑자기 메슥거렸다. 승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 우리 안 친했던 거 알고 있어.
승이는 캔에 남은 맥주를 털어 마시다가 몇 방울을 입가에 떨어트렸다. 소매로 대충 닦고 캔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 기억 잃은 사고 이후로 학교랑 관련된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어했나봐. 엄마가 다이어리나, 컴퓨터 사진이나, 휴대폰 문자까지도 싹 다 버리고 지웠는데 어쩌다가 서랍 뒤로 넘어간 스티커 사진 한 장을 본 거야. 스티커 사진까지 같이 찍었을 정도면 친했을 텐데, 그 얼굴들을 보는 순간… 기절했어. 승이는 말을 마치며 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가벼워진 캔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캔이 넘어진 건데 승이가 쓰러진 것처럼 생각되어 흠칫했다. 만약 우리가 친했다면 네 얼굴을 보고 기절했겠지.
― 그 사진 속 친구들은 두 가지 상황일 거라고 생각해. 다들 죽었거나, 쌍년들이거나.
넘어진 캔이 바람에 흔들거리다가 탁자를 굴러 내 앞에 멈췄다. 승이는 잠시 담배 좀, 하고 흡연 구역 쪽으로 갔고, 나는 고민했다. 생각보다 사고 트라우마가 심한 편이었다. 승이의 트라우마는 함께 친했던 친구들의 죽음과 관련한 트라우마였다. 죽음에 심한 충격을 받아서 함께한 추억조차 기억하기 힘들어하는 경우. 담배 한 대 피우겠다고 절뚝거리면서도 먼 흡연 구역까지 가는 승이를 보다가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흘린 라면이 있던 자리에 앉아 두리번거렸다. 한발 늦었단다. 이미 면발은 조각나 사라졌고 붉은 국물과 비둘기 깃털 몇 개만 떨어져 있었다. 이제 와서 나의 상처와 승이의 상처를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너의 상처보다 나의 상처가 더 커. 네가 준 나의 상처. 그렇게 해서 사과받고 나면? 난 뭘 얻는 거지? 승이가 벤치에 앉아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뱉자 연기가 보랏빛 하늘에 번지다가 흩어졌다.
비둘기를 죽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렸다. 내가 그 통증을 느낀다는 것조차 너무도 끔찍하게 여겨져서 파스 뿌릴 생각도 못했다. 손이 떨려 아침밥도 걸렀다. 그 골목을 지나갈 수 없어 동트기 전에 나와서 먼 길을 돌아 학교에 갔다. 아픈 발목으로 평소보다 오래 걸었더니 걸음걸이가 불편해졌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 반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 책상 위에 죽은 비둘기가 있었다. 내 표정을 살피려는 반 친구들은 어떡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다들 멀리서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댔다. 비둘기 사체에서 풍기는 비린 냄새. 빨갛게 변해버린 노란 눈. 꺾인 날개. 내 숨이 닿았던 곳, 내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 내가 죽인 비둘기가 있었다. 사체가 올라가 있으니 책상이 마치 제단처럼 보였다. 승이는 함께 어울려 다니며 날 괴롭히던 다섯 명의 친구들 사이에서 웃다가 섬유 향수를 들고 가까이 왔다. 더러워. 비린내 위로 베이비파우더 향이 뿌려졌고 나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자퇴할 생각이었다. 다만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학교를 쉬고 싶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 언질을 주었는지, 엄마는 힘든 일에 대해 언제든지 말해줄 생각이 들면 말해달라고 했다. 엄마는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닫힌 방문 앞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의 소리 같았다. 여빈아, 승이가 문자 보내놨다는데? 하던 엄마의 목소리.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나. 뉴스에 우리 학교 이름이 나왔다. 수학여행 버스 전복 사고. 다섯 명 사망, 한 명 의식불명, 다수 부상.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은 즉사했고 그 앞에 앉아 있던 한 명 역시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많이 다치지 않은 학생들은 안전벨트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머, 여빈아, 어머, 여빈아, 다행이다. 엄마는 다행이라고 했다. 무엇이 다행인지는 몰랐다. 내가 따돌림을 당해서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저 버스를 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건가. 어쩐지 그 말을 듣자 엄마에게 모든 걸 말하고 싶어졌다.
뭐가 다행인데? 내가 매일 승이가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맞았던 거? 엄마가 준 용돈을 승이에게 줘야 했던 거? 매일 문자로 죽으라는 말을 들었던 거? 엄마조차 승이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라고 해서 밤마다 내일은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던 거? 엄마는 뭐가 다행이야, 응? 내가 죽지 않은 거?
엄마는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가해 학생들이 모두 죽었고 나머지 한 명은 위독한 상태라고. 그 한 명이 승이였다. 솔직히 벌을 받았구나 싶었다. 수십, 수천 번을 상상하던 상황이었다. 그 아이들이 죽었으면 좋겠다. 그게 이루어진 것이다. 내심 기뻤다. 담임선생님이 내게 따로 사과한다며 메일을 보내오기 전까지. 사과 메일은 막상 열어보니 변명에 가까웠다. 선생님도 제자를 다섯 명이나 잃었고, 안전벨트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했다. 선생님은 메일 끝에 승이는 다행히 살아났지만, 대신 기억 장애를 얻었다라고 전했다. 내 기도를 들어준 신이 잠시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선물 하나를 잘못 배송한 거다. 평생 기억 속에서 괴로워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승이라고요. 그때 오른쪽 발목에 갑자기 통증이 왔다. 아, 내가 비둘기 한 마리를 죽였으니 퉁치는 건가.
담배 냄새를 풍기는 승이가 다시 내 앞에 앉았다. 의욕이 사라졌다. 비쩍 마르고 상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승이의 모습을 보니까 복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승이의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나에게 한 잘못을 뉘우치게 하고, 내가 사과받는 것. 그것이 이제 와서 그렇게 중요한 건가. 자그마치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미 시간은 흘러버렸고, 그동안 나도 나만의 삶의 성숙을 쌓아갔다. 하고 싶던 직업도 가졌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섰다. 일하다보면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만난다.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오랜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지만, 완전한 극복의 단계로 넘어가려면 그것이 필요했다. ‘용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장애를 얻고 힘들게 살아가는 승이의 참회가 아니라, 승이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환자가 눈에 띄게 편안해진 얼굴로 앉아 웃으면 나는 말해주었다.
― 용서하셨어요? 그럼, 이제 환자님의 삶을 살면 돼요. 그 사람은 내 삶에서 떠났다고 생각하세요. 멀리 날려보내세요.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승이를 용서하고 나면 트라우마 또한 나를 치러 오면서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을까. 그 기억은 이미 과거이고 현재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때 어리고 상처받은 열여덟의 나는 죽고 없었다. 나는 승이의 상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상담 질문이 남아 있었다. 승이는 다 마신 맥주캔을 들고 더 할까?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 그래서 너는 요즘 어때? 학창 시절 기억이 없는 것 때문에 힘들진 않아?
이미 지금 완성된 퍼즐의 삶을 살고 있다면 굳이 사라진 퍼즐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승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찾았고, 문제없어.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는걸. 승이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였지만, 결국 똑같이 상처를 얻은 사람과 사람이었고, 지금 그 상처는 다 아문 흉터로만 남아 있었다. 그래, 이제 그만 일어서자. 어느덧 늦은 시간이었다. 간헐적으로 지하철이 지나다니던 철교는 잠자리에 든 듯이 조용해졌고, 한강에 빛을 흘려보내던 빌딩들의 불빛도 잦아들었다. 국물이 조금 남은 라면 용기는 내가 집어들고 승이는 맥주캔을 버리러 쓰레기통 쪽으로 향했다. 나는 승이의 걸음에 맞추어 조금 천천히 걸었다. 쓰레기통 쪽에 가자 비둘기 몇 마리가 모여 있었다. 하이에나처럼 뭐 떨어질 먹이 없나 노리는 것 같았다. 내가 비둘기 옆으로 가기를 머뭇거리자 승이가 나에게 말했다.
― 너도 비둘기 싫어하지? 아까 기겁할 때 알아봤다. 이리 줘.
승이는 내가 들고 있는 라면 용기를 들어 음식물통에 버렸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코끝에 스쳐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뚜껑을 닫았으면 했는데, 승이는 대뜸 맨손으로 면발 하나를 집어들었다. 승이가 집어올린 면발은 비둘기를 향해 던져졌다. 비둘기들은 익숙한 듯 날개를 펴고 달려들었다. 다시 속이 안 좋아졌다. 내 표정을 본 승이는 풋, 하고 웃었다.
― 나는 쟤네가 진짜 불쌍해. 아까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말 안 했는데, 사실 기억나는 학창 시절의 한 장면이 있어.
승이는 편의점 계단을 올라 우유 상자를 놓더니 그 위로 올라가 유리문을 잠갔다. 가자, 저 터널까지 데려다줄게. 승이는 내 옆에서 걸으며 말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 리듬에 맞추어 목소리가 떨렸다.
― 비둘기가 죽는 장면을 봤어. 차에 치여 죽은 사체를 보았거나,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이었어. 햇살이 가득한 골목이었는데 비둘기를 발로 차더라. 깃털이 막 흩날리고, 날개가 젖혀서 버둥거리는 비둘기. 충격적이었나봐, 그 장면이. 비둘기가 차에 치여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람한테도 치여 죽는구나.
승이의 말을 듣는 내내 어쩐지 승이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절뚝이며 흔들리는 얼굴을 보기 꺼려져서일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되뇌었다. 그런 사람도 많지. 내 환자들은 다들 사람에 치여 죽어가는 사람이야.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추웠다.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을 더듬을까봐 문장을 머릿속에서 고르고 골랐다.
― 그 사람은 기억나?
우리는 어느덧 터널 앞에 도착했다. 온통 어두운 한강 강가와 다르게 터널 안은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 응. 얼굴이나 이름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한 느낌은 어렴풋이 기억나. 나는 걔를 되게 싫어했어.
나를 보고 멈춰 선 승이에게서 그때 승이의 얼굴이 보였다. 승이는 승이였다. 나도 나였다. 나란히 서 있으니 우리 키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승이의 발을 확인했다. 짧아진 오른 다리 대신 왼 다리만을 디디고 서 있었다. 그러다 내가 또다시 승이의 앞에서 눈을 깔았다는 걸 깨달았다.
― 왜 싫어했는데?
고개를 들어 승이를 똑바로 보았다. 내가 여빈이라는 걸 모르는 승이에게, 왜 그때의 여빈이를 싫어했는지 물었다. 그때처럼 그냥,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말할 거니? 가슴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상처가 다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승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 너 비둘기 싫어한다고 했지. 왜 싫어하는데?
비둘기. 더러워서. 내가 가는 길목마다 있어서. 요즘은 잘 날아가지도 않아서. 나에게 유해한 동물이니까. 그리고, 내가 한 번 죽인 적이 있던 생명이라서.
― 너랑 똑같은 이유야.
승이와 헤어지고 터널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터널 속 내 발소리만 들렸다. 아스팔트를 딛는 내 운동화 소리가 터널을 타고 울리자 어쩐지 그 끝의 메아리는 구구, 구구,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터널을 나와 동네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한강공원 터널 입구 쪽에 내걸린 한 펼침막이 눈에 띄었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비둘기가 스스로 먹이를 찾아 생태계의 당당한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인간은 참 거만한 동물인 것 같았다. 신도 아니면서 마치 신인 양 행동하는 것이 우스웠다. 이 세상의 유해동물은 비둘기가 아니라 인간이잖아. 이때 비둘기 한 마리가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왜 또 날아가지 않고? 터널 앞으로 가서 뛰어가는 비둘기의 뒷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아, 비둘기가 눈에 띄게 무거워 보였다. 그 비둘기는 승이가 일하는 한강평화점 지에스25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도마뱀
도마뱀은 숨죽여 앉아 있었다. 민경은 척추로부터 흐르는 모든 신경이 보풀처럼 바짝 일어난 채 꾸역꾸역 진술서를 써갔다. 오랜만에 장시간 잡은 펜에 검지가 아릿해질 때쯤 목을 슬쩍 세워보니 김 팀장과 한 팀장, 유 대리의 숙인 뒤통수가 보였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뒷목을 저릿하게 타고 오른다.
-솔직히 쓰시면 됩니다. 어차피 현장 직원들에게도 다 받을 거예요. 익명성은 보장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소파에 몸을 기댄 감사는 다소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이 순간 도마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꼬리를 떼어간 진범이 어떤 놈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까?
도마뱀의 죄목은 참으로 유치하고 별 볼 일 없다. 법인 차량의 개인 용도 사용. 감투 쓴 양반들에게 대수롭지 않을 일이었다. 감사에 일러바쳐도 코웃음이나 안 치면 다행이라고, 민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도마뱀은 말이 없다. 그는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다.
감사는 도마뱀의 눈앞에서 직원들의 진술서를 취합하고 스캔하여 실장의 이메일로 송부했다. 도마뱀은 눈알을 굴리지도, 눈을 감지도 않은 채 본인에 대한 진술서들이 윗선에 보고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에 집중이 되는 날과 안 되는 날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멍하니 쉬고 싶다가도 일이 그릇에 낀 물때처럼 거슬려서 빡빡 문질러 닦아내어야 하는 날이 있고, 반대의 날도 있었다. 제철 메뚜기처럼 빳빳한 양복을 차려입은 감사는 곧 떠나버렸지만, 남겨진 자들은 불편한 고요 속에 남는다. 오늘은 불편하지만 묘한 들뜸과 두근거림으로 명백히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날이었다.
-다들 수고했어.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자.
한 팀장은 설익은 대봉이라도 베어먹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후 여섯 시가 되자마자 도마뱀이 말없이 퇴근 지문을 찍고 사무실을 나선 지 몇 분 뒤의 일이었다.
-팀장님, 출금 때문에 내일 출근하자마자 은행 좀 다녀올게요.
-나가는 김에 우체국도 들러 전표도 송부하면 좋고.
민경의 이야기에 한 팀장은 소소한 심부름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그것도 좋다. 할 일을 얹어주어도 번거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날이다.
-까아! 줘!
갓 15개월이 된 승현은 점점 고집과 떼가 심해졌다. 어제는 친구의 팔을 물어 이빨 자국을 만들었다고 한다. 퇴근하자마자 물린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해 사과해야 했다. 민경은 바닥에 누워 치어처럼 파닥거리는 승현을 보며 하품을 했다.
찹쌀떡 같은 탱탱한 볼을 부풀린 채 승현이 민경을 바라본다. 물먹은 이불처럼 소파에 늘어진 민경의 눈은 움직이는 텔레비전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보는 것이 아니라 덮어씌우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일일 수용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가변적일 것이다. 출퇴근 시간까지 하루 11시간, 이 시간을 듣고 보고 말하고 산출하다보면 민경은 언제나 수용치를 다 소진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일찍 퇴근하건 혹은 늦게 퇴근하건 그 패턴은 언제나 동일했다.
그리고 승현. 그리고 모성. 그것이라고 가변적이지 않을까?
어느 날 심성 뒤틀린 메피스토가 나타나 아이와 너의 목숨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민경은 두말없이 승현을 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작은 아기가 질리기도 하고 버겁기도 부담스럽기도 했다.
무화과를 먹으면 입안에 진득하게 남는 씨앗의 텁텁함처럼 첫맛부터 끝맛까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은 것이 육아의 현실이었다.
승현! 작고 고집 센 이 아이는 민경이 옷을 벗고 맨가슴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탐식하며 파고들 희고 둥근 엄마의 유방을, 마치 요망한 쌍두사라도 되는 듯 질색했다. 승현이 맨가슴을 보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민경은 깔깔깔 웃었다.
출산 96일. 승현은 아파트 옆 라인 1층의 가정 어린이집에 맡겨지고, 민경은 양배춧잎으로 유방을 감싸고 팔로델정을 먹으며 구역질을 해댔다. 승현이 그토록 엄마의 맨가슴에 질색하는 것은, 실리콘 젖꼭지를 거부하고 허겁지겁 엄마의 젖을 물었을 때 느껴진 강한 쓴 약의 맛에 세상 잃은 듯 울어대던 기억 때문이리라고, 민경은 생각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분유를 한 번 더 먹이고 재우면 승현은 잠이 든다.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과 툭 튀어나온 이마를 감상하며 그녀도 잠이 든다.
그리고 좀 더 밤이 깊으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손님이 찾아온다.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밤손님은 집주인들이 깰까봐 안방에 고개도 내밀어보지 않고, 조용히 샤워하고 머리를 감고 작은방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또 야근이야?
-나라고 어쩌겠냐. 내가 사장이냐? 네가 나 대신 우리 사장한테 좀 말해줘. 누구는 집에 가기 싫어서 안 가는 줄 아냐. 너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 스트레스 받아.
-나 진짜 힘들어. 일하고 육아하고 살림하고 진짜 몸이 몇 개라도 남아나지 않아.
-내가 주말에 도와주잖아. 야, 이러다 나 까딱하면 육아휴직 쓰게 생겼다.
-갑자기 육아휴직은 무슨 육아휴직?
-사정이 안 좋아 감원을 해야 하는데 애 있는 남직원들 대상으로 그런 거 권하는 분위기가 있어.
차라리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봤다가, 도저히 민경의 급여와 남편의 육아휴직 급여로는 적자를 면할 수 없다는 계산에 이후 말을 안 했다.
사랑. 어찌 가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민경은 여전히 제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샘솟는 사랑은 온천수처럼 매끈거리지 않는다. 쓴소리를 하며 푹푹 파내기도 하고, 되로 받아 푹푹 파이기도 한다. 이 밭을 일구기 위해서는 쟁기가 필요하고 땀이 필요하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돈. 돈. 돈.
-민경 주임, 오늘은 표정이 안 좋네?
다음날 출근해서부터 미수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한 팀장이 커피를 마시며 뒤에서 얼쩡거렸다.
-아침을 급하게 먹어서 좀 체했나봐요.
-애 밥 먹이고 준비시키고 출근하느라 정신없지? 나도 그맘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몰라.
그룹웨어를 뒤적이던 유 대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앗 하는 외마디를 내뱉었다. 올 것이 왔구나, 민경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팀장님 인사 떴어요!
민경은 슬쩍 비어 있는 지사장실을 바라보았다. 도마뱀은 몸살감기에 걸렸다고 오늘 연차를 썼다. 그가 이곳에 발령받은 지 3년 만에 쓴 첫 진짜 연차였다. ‘진짜’를 수식어로 붙이는 이유는 ‘가짜’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가령 가짜로 연차를 쓰고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룹웨어 공지사항에 붉은색 NEW 표시를 달아놓고 큼지막하게 떠 있는 ‘인사발령 19-25호’를 클릭했다. 로딩 시간이 꽤 걸리는 동안 사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한 팀장은 민경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번 홀짝였다.
-허어….
도마뱀의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한 팀장이 머리 아프다는 듯 미간을 누르며 제자리로 떠났다. 죄목이 징계위원회감은 아니기에 징계는 내려지지 않았다. 갓 꼭대기를 우스꽝스럽게 잘라버렸을 뿐이다.
직위 해제.
-내일이라. 책상부터 빼야겠네요. 사무실에 남는 자리 없으니 창고에라도 넣어야죠.
김 팀장이 미묘한 억양으로 정적을 깼다. 직위해제이나 발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윗선의 뜻이 명확하다는 이야기이다. 자리 없이 투명인간으로 버티든지 나가든지 선택해라. 공개적인 압박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뱉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진술서를 썼다. 이 사건의 공범이라는 말이다. 설령 백지로 내었건 쓸데없는 글만 끄적거렸건 무죄판결은 나오지 않는다.
도마뱀이 없는 점심시간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요즘 뜨는 TV 프로라든지 연예인 스캔들 이야기를 나누며 직원들은 하하호호 웃는다. 아무도 식사 시간이 무거워지기 원하지 않는다. 민경은 어쩐지 속이 메스꺼웠다. 도마뱀 때문은 아니다. 셋째가 늦둥이라 아직 고등학생이라던데, 퇴사하면 도마뱀은 뭐 해 먹고살까 따위의 쓸데없는 남 걱정 때문은 아니다. 누군가 말하기를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였다. 그러나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보아도 내 것이 아닌 남의 인생은 가볍게 씹어넘길 희극일 뿐이다.
조금 한적해진 오후, 어린이집 앱 알림을 확인해보니 문어 고깔을 머리에 쓰고 환하게 웃는 승현의 모습이 보인다. 뒤이어 어린이집 번호로 띠링 하고 문자가 왔다.
정부의 보육 방침 변경으로 지역 어린이집 전체가 파업한다는 문자였다. 불편하게 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이번 정부 지침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에 대한 호소문이 쓰여 있었다. 당장 내일부터였다. 민경은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의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항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이 내 일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비열해지기 마련이다.
-오늘 밤에 어머니한테 승현이 데려다주고 와.
-왜?
-어린이집 파업한대.
-언제까지?
-나도 모르지.
연애 시절의 미사여구는 무덤 속에 있다. 그들은 지쳐가는 어느 순간부터 단문의 메시지를 선호하게 되었다.
-짜증 나네
-그러게.
다행인 것은 시가가 집과 한 시간 거리여서 비상시에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애가 젖을 못 먹어서 약하네, 아이를 네 손으로 키우지 왜 맡기니 등의 잔소리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남편과 몇 번 싸우다보니 귓등으로 듣는 재능이 생겼다.
사실 처가는 시가보다 훨씬 가까웠다. 20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민경의 남편은 승현을 처가에 맡기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처가를 싫어했다. 민경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은 멸시에 더 가까웠다. 민경의 아버지는 5년 전 교직에서 퇴직했다. 흔한 명예퇴직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종종 손찌검하던 버릇을 시대가 바뀜에도 고치지 못한 탓이었다. 아들이 머리를 맞자 노발대발한 학생회장 엄마가 민경의 집까지 쫓아와서 욕을 퍼부었던 일이 생생하다.
-당신 자식이라도 이렇게 팰 거야? 이 미친 새끼야?
아버지는 당신 자식들도 잘못을 했으면 거침없이 매를 드시는 분이었다. 혁대와 파리채, 효자손, 구둣주걱과 운동화… 손에 잡히는 그 모든 것이 매가 될 수 있었다. 가장 심하게 자식들을 때렸던 때는 고작 2년 전이었다. 처음 듣는 종교에 빠져 병역거부를 하겠다는 동생을 이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후려쳐서 심지어 경찰이 왔다. 늦둥이 남동생은 감옥에서 1년6개월간 복역 후 출소했다. 가족들은 한 번도 그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남편은 장인이 승현이 버릇을 잡겠다고 밥을 굶기는 모양을 한 번 보더니 명절 외에는 처가를 찾지 않았다.
-내일 새 지사장님 오신다니 자리 좀 정리해줘.
-물건은 어디로 뺄까요?
민경의 질문에 한 팀장은 음 하고 잠시 달력을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우선 박스에 넣어둬.
-노트북은 그대로 두고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 문제군. 우선 회사 물품들은 놓아두고 개인 물품만 빼둬.
-캐비닛은요? 옷가지들이 걸려 있는데.
-놓아두고 그냥 책상만 깔끔히 치워줘.
민경은 노크 없이 지사장실에 들어갔다. 먹빛의 명패를 제일 먼저 상자에 넣고, 개인용 캘린더와 서적류도 넣었다. 살아 있는 자의 유품을 정리하는 기분이었다. 도마뱀이 갑자기 들어와 왜 내 물건에 손을 대느냐고 소리를 지르면 어쩌지? 일어나지 않을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옥돌 위촉패와 각종 대외 상장들이 눈에 띄었다. 훈장처럼 모아왔던 그의 자랑거리들을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지사장님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나가리지.
-노조에서 찌른 거예요?
-내치를 못한 죄지, 외치도 못했고.
-에이, 저번 지사장도 불법노동 행위라며 노무사 들락날락하던데 그걸 어떻게 통제합니까?
-법 위에 사람은 없는데 회사는 있거든.
김 팀장과 유 대리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민경은 지사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갑자기 코를 덮쳐오는 역한 냄새에 토할 것만 같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내용물을 확인하는데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 투박한 황색의 안경집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서랍을 열지 않아 냄새가 났던 모양이었다.
안경집을 열자 안에는 촌스럽고 알이 두꺼운 무테안경 하나가 있었다. 안경알 표면에는 먼지처럼 내려앉은 실금들이 보였다. 민경은 도마뱀이 3년 전 첫 발령을 받을 때 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터 아들이 새 안경을 선물해줬다며 지금 사용하는 안경을 차고 출근했다. 민경은 헌 안경집을 닫고 상자 틈새에 고이 넣어두었다.
-내일은 신임 지사장님 첫 출근이니까 우리도 빨리들 출근합시다.
한 팀장은 퇴근하며 민경과 유 대리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삑- 퇴근이 처리되었습니다.
남편은 오늘도 기대를 저버렸다. 가장 친한 선배가 끝내 사표를 썼다고 그는 술을 한잔하고 집에 들어왔다. 미친놈, 이기적인 새끼. 온갖 욕을 퍼부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는 승현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가 그런 욕을 들을 만큼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 아이가 많이 아파서요.
-오늘 지사장님 오시는 날이라 지시사항도 많을 텐데 좀 그렇긴 하네.
-오후에라도 나갈게요.
-아니야, 애가 아프다는데 어쩌겠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벌써부터 연차 쓴다고 하면 첫인상부터 안 좋게 보일 수도 있어.
-죄송해요. 오후에 뵙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곱 시 반에 한 팀장과 통화를 마쳤다. 선의의 거짓말이다. 어쩔 수 없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지렁이 같은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애를 본다고 하기에는 용건이 너무 길지 않은가. 오전에 남편은 점심시간을 빼서 아이를 시가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승현은 모처럼의 예상치 않은 방학에 신이 나는지 밥풀을 멀리까지 날려보내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은 오전 열한 시에 승현을 데리러 왔다. 그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기에 민경은 화를 풀었다.
민경은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먹고는 잠시 회사 근처 약국에 들렀다 출근했다. 인포메이션 데스크의 뒤쪽 휴게실이 열려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민경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손님용 테이블에 사무실 직원들이 앉아 있었는데 낯선 인물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민경은 이를 보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경리사무 보고 있는 오민경 주임입니다.
-아, 반가워요.
새로 온 지사장은 40대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였다. 이런 지방이 아닌 서울 여의도에나 어울릴 것 같은 검은 슈트와 은색 손목시계로 치장한 그 남자는 무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전임 지사장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안경이었다. 그는 지사 현황을 보고받기도 하고,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하며 오후를 보냈다. 오전에는 현장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던 모양이다. 민경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본사 분위기가 좋지 않아요. 특히 비용 절감 관련해서 아침 회의 때마다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예, 요즘 노조 일 때문에.
-한 팀장님, 그런 말투 좋지 않아요. 전에는 평직원들이 윗사람 눈치 보느라 바빴는데, 이제는 윗사람도 평직원들 눈치 봐야 하는 세상이에요. 세상이 바뀌었어. 구설에 올라서 노조한테 찍히면 우리 같은 관리자는 보호해주는 사람도 없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상… 상생을 해야 하는데, 참 어렵습니다.
-한쪽만 양보하는 건 안 좋은 거예요. 서로 한 발짝씩 양보하며 맞춰나가야지. 배고파 죽겠다는데 떡 한 쪼가리 안 줘서 주인에게 칭찬받겠다고 하다가 되레 토사구팽되는 거예요.
민경은 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갔다. 꼭 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숨을 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여느 때처럼 일하다 퇴근했다.
그리고 날 좋은 주말이 되자 오랜만에 홀로 병원을 찾았다.
-마지막 생리가 언제라고 하셨죠?
-한 달하고 일주일 되었어요.
-배란이 규칙적으로 되었더라면 아기집 크기가 더 컸을 텐 데요.
-아기집이 보이나요?
-네, 여기 하얀 테두리 보이시죠? 그런데 피고임이 있어 조금 불안정하네요. 일주일 뒤에 와보세요.
초음파비로 삼만천 원을 지출하기 전 간호사가 아기수첩을 내밀자, 민경은 다음에 받아가겠다고 사양했다. 온통 화려한 금박을 입힌 VIP 마이너스통장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시댁에서는 좋아하실 것 같다. 그런데 남편은? 민경은 생각했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우리 가족은 준비가 되었는가?
아니, 이미 생겼는데 준비라고 할 게 뭐가 있는가. 아기는 제 밥숟가락은 갖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회사에서 두 번째 출산휴가를 허락해줄까? 반년 전 세 번째 출산휴가를 쓰고 복직한 여직원이 왕복 두 시간 거리의 지사로 발령이 났다. 왕복 세 시간 거리 발령이 아니라면 실업급여도 받지 못한다 했다. 내가 잘리면 남편의 월급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남편은 이미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강요받고 있다고 한다. 한 번 쉬면 다시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학생 시절 벌였던 낙태에 대한 찬반토론이 생각났다. 선택. 그래, 어른은 아기를 선택할 수 있지만 아기는 의지 없이 낳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낙태에 반대했다. 나는 이 아기를 선택했는가? 아니, 선택하지 않았다. 생명!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수정의 순간은 아니다. 수정란이 인간이라면 많은 시험관 시술 병원은 비윤리적이다. 그렇다면 착상인가, 심장이 뛰면 그때부터 인간인가. 그렇다면 난소에 착상해서 심장이 뛰는 아기, 즉 자궁외임신 치료는 왜 낙태라고 하지 않고 치료라고 하는가. 대체 언제부터 아기는 아기인가. 나는 언제까지 결정해야 죄책감 없이 이 아이를 보내줄 수 있는가.
음부를 뚫고 들어오던 초음파 진료기의 차가운 감촉이 떠올라 민경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라텍스 콘돔을 끼운 기계의 삽입은 섹스의 느낌과는 천지차이다. 들뜨지도, 열기가 오르지도 않고 차가운 진료대에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차가운 기계가 삽입되는 것을 보면 실험실의 개구리가 된 느낌이 들었다. 낙태! 조금 이르게 결정하면 약물이면 되지만 늦게 결정하면 몸속에 기계를 넣고 아이를 흡입해야 한다. 그렇다면 약물로 죽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기계로 흡입하는 것은 인간인가. 민경은 메스꺼웠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 어린이집 파업이 장기화된다는 라디오 뉴스가 나왔다.
-오 주임, 이번 달 마감은 다 끝나가?
-네, 연말이라 좀 복잡하긴 하네요.
-지사 망년회도 한 번 해야 하는데 의견 취합 좀 해봐.
-네, 단톡방에 띄워볼게요.
네 개의 바퀴 중 하나가 불안정하면 세 바퀴도 영향을 받는다. 열두 바퀴 중 하나가 불안정하면 조금 덜하지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퀴가 수십 개 되면, 하나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느 평범한 날처럼, 어느 날도 그렇게 흘러갔다.
도마뱀은 새로운 집이 생겼다. 그는 이제 ‘도 지사장’이 아니라 ‘도 부장’으로 불렸다. 직책은 없고 직급만 있었다. 도 부장의 새로운 집은 인포메이션 데스크 뒤 휴게실 겸 탕비실이었다. 그곳에는 초라하고 낡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남의 시선이 쉽사리 닿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아주 조용히 생활했다.
-휴게실도 전처럼 못 쓰고 불편해 죽겠어.
-그러지 마, 불쌍하잖아.
-뭐가 불쌍해. 저렇게 놀고먹고 월급은 우리 두 배로 받아가는데.
여직원들은 말이 많았다. 일부는 도 부장을 불쌍하다고 여겼지만, 대부분은 노조를 눈엣가시로만 여기던 높은 양반이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 인과응보라고 여겼다. 때때로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는 도 부장을 보며 민경은 서글퍼지곤 했다. 그가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신임 지사장은 도 부장에게 인사는 해도 일절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한 팀장은 가끔 도 부장과 같이 퇴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창고 정리를 한다고 조용히 나선 도 부장이 떨어지는 서류철에 얼굴을 맞은 일이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쿵 소리에 처음 탕비실로 달려갔을 때 민경은 도마뱀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조각난 안경을 보는 도 부장은 굉장히 처참하고 곤란한 표정이었다. 노조에서 도 부장을 비난하는 글을 그룹웨어 익명 게시판에 올렸을 때도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투명인간다운 행실을 성실히 해내던 도 부장은 부서진 안경알 조각이 자기 인생이라도 되는 듯 심각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밤, 승현을 데리고 조금 일찍 들어온 남편에게 민경은 병원에 다녀온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남편은 기쁜 듯 너스레를 떨었지만, 민경은 그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끝내 축하한다는 말은 없었다. 그날 민경은 아주 오랜만에 남편과 승현과 한방에서 잤다. 남편은 밤이 깊도록 코를 골지 않았다.
-심장이 뛰지 않네요.
-네?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유산이란 말입니다.
그날 밤 민경은 차가운 병원의 진찰 의자에서 다시 초음파 검진을 받는 꿈을 꾸었다. 의사의 말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꿈속에서 빈 거리를 민경은 터덜터덜 걸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잠에서 깨자 창밖에 눈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찍 잠에서 깬 승현이는 제 검지로 창밖을 가리키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괴성을 질렀다.
-이렇게 같이 자는 것도 좋네.
-방 하나에만 불 넣으면 되니 가스비도 덜 들지.
-그러게. 이제 돈 더 아껴야겠네.
민경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어제처럼 속이 메스껍지는 않았다. 도 부장은 조금 늦었다. 출근 지문을 찍고 돌아선 그는 흰 안대라도 쓴 듯 김 서린 안경을 끼고 있었다. 오래전 쓰고 있었던 그 안경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섣불리 닦지 않고, 익숙한 탕비실로 더듬거리며 향했다. 찬 안경이 온기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앞이 보일 것이다.
-우리 지사에도 소급수당 받아야 할 여직원들이 있나요?
-가장 최근이 민경 주임입니다.
점심시간, 신임 지사장의 물음에 한 팀장이 민경을 슬쩍 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노조 게시판에 여직원 소급수당에 대한 승소 판결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출산휴가를 다녀온 여직원들이 일률적으로 전보다 낮은 연봉 등급을 적용받는 것에 대해 노조가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였다.
-그렇군요.
우주에 매달린 추가 된 기분으로 민경은 자신에게만 작용하는 중력을 견뎌내며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행히 그는 그것에 대해 민경의 의견을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급수당은 얼마쯤 나올까. 많지는 않더라도 살림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별로 기쁘지 않았다. 돈을 준대도 크게 기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양치를 마치고 민경은 손을 씻으며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늘어진 배가 몇 달 뒤면 남산처럼 볼록해질 것이다. 둘째는 더 일찍 배가 불러온다고 한다. 소급수당에 대해 묻던 지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생각 없이 물었을지도 모른다.
민경은 화장실을 나와 계단을 올라갔다. 속은 메스껍지 않았으나, 오늘따라 계단을 오르는 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는데 숨이 더 가쁘게 찼다. 창밖에서는 슬레이트판을 때리는 통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좋아 흩날리던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는 모양이었다.
-점심은… 드셨나요?
커브를 돌아 불쑥 튀어나온 도마뱀의 모습에 놀라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도마뱀은 한 손에 벌겋고 기름이 낀 국물이 담긴 컵라면 컵을 들고 있었다. 그의 안경은 더 이상 김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는 대답도 질문도 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더니, 민경을 지나쳐 제 길을 갔다. 그는 외로워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자유로워 보였다. 환청처럼 콧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도마뱀은 영락없는 도마뱀인 줄 알았으나, 도마뱀에게서 떨어진 꼬리였다. 그는 쓸모없어진 부품처럼 홀로 덩그러니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오늘은 그가 다시 도마뱀처럼 보였다. 꼬리가 떨어져 볼품없긴 하나 그는 여전히 네 발로 걷고 있었다.
민경은 사무실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컴퓨터들의 온기와 사람들의 소음에 둘러싸인 이 섬은 그녀가 점유하고 있었으나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민경은 자신의 삶이 부질없이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함부로 엉덩이를 뗄 수 없었다. 속이 메스꺼워야 했으나 메스껍지 않았다.
또 별 볼 일 없는 하루가 지났다. 따가운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민경은 오늘도 퇴근을 위해 버스에 올랐다. 노약자석에 자리가 났음에도 앉지 않았다. 쓸쓸하고 오지랖 넓은 노인들의 꾸중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민경은 생각했다. 척박한 자궁에 뿌리를 내린 것도 애초부터 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라난 꼬리일 뿐이다. 퇴근길 버스는 배려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말린 대구포처럼 매달린 민경의 몸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했다. 엉거주춤한 모습은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어설프고 우스웠다.
캐리어
여자는 아침에 쓰는 클렌징폼을 소개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며 여자의 출근길이 빠르게 지나갔다. 사무실에서는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아침에는 꼭 비타민을 먹어요. 여자는 비타민통을 화면에 가까이 보여주었다. 어떤 성분이 있는지, 효능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읽었다. 그러다 급하게 일어나서는 회의에 가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야말로 무해하고 다정한 영상이었다. 유튜브의 재생 목록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일상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연예인부터 직장인, 고시생,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영상으로 올렸다. 나는 지루하게 흘러가는 여자의 업무 시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번 역은 사당입니다. 2호선으로 갈아타시는 승객께서는….”
환승 소리는 잔잔한 음악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빽빽했다. 모두 정수리만을 서로에게 보인 채 출입문을 향해 밀어댔다.
“회사 앞에 있는 빵집에서 사온 샌드위치예요.”
아침부터 옆자리의 효진은 휴대폰 카메라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샌드위치 포장을 야무지게 뜯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둥글게 말며 웃었다. 효진은 종종 회사에서 브이로그*를 촬영했다. 점심시간에는 옆 테이블에 휴대폰을 두고 식사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 황 대리는 우리 뒤를 지나가며 헛기침을 했다. 효진은 깜짝 놀란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아마 저 부분에는 대리님한테 딱 걸렸어요! 같은 자막이 들어갈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글씨가 빽빽한 종이 뭉치가 있었다. 오늘 할 일이다.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나는 당연하게도 세 번의 임용고시를 준비했다. 그리고 결국 1년째 교육 출판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임용고시를 포기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중학교 국어 문제집을 출판하기 위해서 나는 몇천 개의 문제를 풀어보아야 했다. 어색한 내용은 없는지, 지문과 잘 어울리는지, 오·탈자는 없는지. 임용 문제집을 이렇게 풀었다면 아마 한번에 붙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농담이었다. 이곳에는 임용고시생이던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는 비슷한 고시원에서 같은 기출문제를 풀던 날들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왜 교사가 되지 못했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비슷한 이유일 테니까. 그리고 각자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소란스러운 틈 사이에 끼워넣곤 했다.
“나 다음달 휴가 때 블라디보스토크 가보려고.”
뒷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현 주임이 내 등을 톡톡 치며 말했다. 나는 느리게 뒤로 돌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SNS에서 보았던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지를 찾아야 했다.
“와, 정말요? 거기 해적 커피 마셔야 하는 거 아시죠?”
겨우 생각해낸 커피 이름을 장난스럽게 말하자 현 주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뭔데? 하고 물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스타벅스 같은 곳이에요. 엄청 싸니까 꼭 가세요. 현 주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역시, 하는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바로 나의 변명이었다. 운이 없어서, 라는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내가 임용고시에 실패한 이유.
“역시 영주씨는 안 가본 데가 없네.”
효진이 쓰레기통에 샌드위치 포장지를 버리며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에이, 아니에요. 내가 손사래를 치며 웃자 현 주임은 자리로 돌아갔다. 휴대폰 진동과 함께 항공권 사이트의 알림이 잠금화면에 떴다. 최근에 본 항공권의 검색 횟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빨리 구매하세요! 매번 검색만 하고 구매한 이력이 없는 회원에게는 무의미한 알림이었다. 나는 휴대폰 검색창에 블라디보스토크 해적 커피를 검색했다. 기억해낸 내용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작업은 섬세하게도 나를 괴롭혔다. 손바닥에서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임용고시를 3년이나 준비했는데 1차도 붙은 적이 없다고? 한심하다는 친척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패한 시간 동안 내가 해온 것은 오직 실패였다. 그러니까 나의 3년은 오롯이 실패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여행이라도 많이 다녀본 척, 시험 준비에 성실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여행을 다녔다고 말하는 나를 지금 와서 탓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다시 책상 위에 늘어놓은 문제들을 들여다보았다. 참 쉬운 문제들이었다.
효진은 회의 시간만 되면 조용해졌다. 카메라 앞에서 소곤소곤 잘만 말하다가도 이때는 고장 난 테이프처럼 말이 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회의 시간마다 보고해야 하는 실수가 너무 많았다. 꼼꼼하지 못한 탓에 오·탈자가 그대로 인쇄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 때문에 이미 발행된 문제집에 일일이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사건도 있었다.
“휴대폰으로 영상 같은 거 찍지 말고 제발 한글이나 똑바로 읽어요.”
화난 황 대리가 종종 하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딴청을 피우며 힐끔힐끔 효진을 엿보았다. 회의실 공기는 아주 미지근하고, 무거웠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씩씩거리며 나를 탕비실로 끌고 갔다. 작은 의자 세 개가 있는 탕비실은 사무실과 독립된 공간이었다. 효진은 문을 닫았다. 커피머신 때문에 눅눅한 공기가 답답했다. 효진은 커피 한 잔을 내렸다. 영주씨도 마실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하소연을 했다. 커피머신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2년 전쯤이었다. 사람들은 고시원에서 밤새 공부할 때면 외롭지 않냐고 묻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다닥다닥 붙은 고시촌에서는 밤만 되면 한숨 소리가 들렸고, 인터넷 강의가 나지막하게 벽에서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어떤 사람은 벽을 쿵쿵 두드렸다. 나만 그 시간까지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방문과 마주 보는 곳에 놓인 책상, 바로 옆에 놓인 냉장고, 옷장 그리고 화장실. 여섯 개의 층에 사는 모두가 같은 구조의 공간에서 서로 포개진 채 비슷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면 오랫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끝없는 생각을 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꼭 책상에 앉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들과 똑같이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어떤 강의를 듣고 있을까, 어느 파트를 풀고 있을까. 그런 이유를 알 수 없는 궁금증을 달래주던 것이 바로 효진이었다. 정확히는 효진이 공부하는 영상이었다.
그녀는 ‘같이 공부해요’라는 타이틀로 하루하루 영상을 올렸다. 구독자 수는 30명도 채 되지 않는 채널이었다. 나는 대부분 그렇듯이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영상을 틀어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반에서 1등을 하던 옆자리 친구의 교과서를 몰래 훔쳐보던 때가 떠올랐다. 허리를 뒤로 젖히며 목을 길게 빼던 그때, 아마도 나의 첫 관음이 시작됐던 게 아닐까. 미술 시간에 옆자리 친구와 비슷한 색을 찾아 색칠하고, 그렇게 훔쳐보고 따라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넘겨가며 오랫동안 문제를 풀었다. 한참 동안 볼펜 끝을 이로 물고 있기도 했다. 나는 영상 속에서 그녀의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문제집과 필기 노트를 힐끔힐끔 보며 공부했다. 그렇게 스톱워치의 숫자가 높아지는 동안, 우리가 함께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임용고시에만 전념하는 걸 포기하고 이 회사에 입사한 뒤로도 그녀는 계속 영상을 올렸다. 나는 피곤한 밤에도 그녀의 영상을 보며 책을 펼쳤다. 아직 버리지 못한 교재들이 자취방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것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입사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 회사에서 효진을 만났다. 묶어 올린 포니테일 머리를 보자마자 그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중고 신입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매일 밤 영상 속에서 나와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그녀가 왜 중고 신입인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얼굴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그녀 앞자리에 앉았다. 회의에 갈 때마다 준비할 것을 챙겨주고, 집에 가는 길도 비슷해서 함께 지냈다. 영주씨 덕분에 적응 진짜 빨리한 것 같아. 그녀의 말을 들으면 뿌듯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야근한 후 저녁을 먹으러 갈 때, 밤길을 그녀와 걷는 것이 하루 중 가장 상쾌하던 때도 있었다. 왠지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이가 된 듯한 착각. 어쨌든 우리는 고시원의 스탠드 불빛을 공유하던 사이니까 괜찮았다. 그녀의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조금 부끄러워서 말하려는 걸 미루었을 뿐이다.
“사무용품은 여기서 사면 돼요. 어? 여기 효진씨가 좋아하는 형광펜 브랜드도 있네.”
효진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멈칫했다.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어떻게 알아요? 약간 굳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더 당황했다. 머리에서 영상 속 그녀가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 장면이 반복 재생됐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아 계속 더듬었다. 어… 그러니까… 아까 책상에 있던 형광펜이 이거 아니에요? 그제야 그녀는 이해했다는 듯이 웃었다. 맞아요, 저 이 브랜드 엄청 좋아해요! 필기감 진짜 좋은데 영주씨도 써봤어요? 나는 뻣뻣한 목소리로 써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왼쪽 손으로 책상에 놓인 형광펜을 구석에 몰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효진의 공부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영주씨, 진짜 솔직히 말해봐요. 대리가 말하는 거 너무하지 않아?”
효진은 ‘대리’에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고는 커피를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커피 몇 방울이 테이블에 얼룩을 남겼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효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직접 본 나쁜 상황을 다시 듣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야단맞은 사람의 잘못이 크다면 더더욱 그랬다. 효진이 일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기도 했다. 요즘 뭘 하길래 공부 영상을 안 올리는 거지? 회의 준비도 안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효진은 커피에 시럽을 넣으며 말했다.
“아이디어고 뭐고, 나 모레 연차 내고 오키나와 가려고.”
나는 종이를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목요일인 내일, 밤 비행기로 떠날 거라고 했다. 월요일 새벽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엄청 피곤하겠죠?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모습에 나는 뒤를 돌아 탕비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댓글 보니까 왜 여행 브이로그 같은 건 안 찍냐고 해서.”
꽤 진지한 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서 무언가를 토해내고 싶어졌다. 나는 탕비실을 나왔다. 뒤에서 영주씨가 오키나와에는 뭐가 유명한지 좀 알려줘요! 하고 말했지만,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효진의 채널에 들어갔다. 새로 업데이트된 영상이 있었다. 황 대리가 또 효진을 불렀다. 그녀는 마시던 커피를 뒤로 숨기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영상 섬네일* 속 그녀는 우아한 모습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고시원의 괴담은 상상처럼 섬뜩하지만은 않았다. 1차 시험에 붙은 사람은 꼭 2차 면접 날에 방이 털리더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 책상을 어지럽혔다. 고시원에 처음 들어온 날, 그 사건을 처음 보았다. 짐을 들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같은 층의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방문과 마주 보는 책상에 온갖 노트와 문제집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바닥에는 형광펜이 쏟아진 채 나뒹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그것이 방주인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방에 살던 여자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매번 있는 일이라며 쉬쉬할 뿐이었다. 여자가 임용고시에 합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금방 방을 빼서 나갔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한 놈이 아닌 거지. 고 간절한 시험에 붙은 사람이 사는 모습 같은 게 궁금했나?”
아주머니는 혀를 차며 말했다. 고시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일어나던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낸 사람이 없는데도 참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도 차라리 1차라도 붙어서 방이 털리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다. 나는 효진의 영상을 틀었다. 같이 공부해요. 그녀가 쓰던 다이어리를 따라 골랐다. 글씨가 잘 써진다는 펜도, 스톱워치도. 다른 친구들이 SNS에 올리는 여행 동영상이라든지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았다. 이 시기만 지나가면 나도 그들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안주했다. 그리고 이 공간과 영상 속에도 나처럼 사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잖아.
사무실 책상 위 문제집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책만큼 닳아 있다. 귀퉁이가 접혀 있고, 뭘 흘렸는지 쭈글쭈글한 부분도 있다. 국어에서 문학은 전부 나의 삶 같은 다른 이의 삶이었다. 여기 사람들은 매번 그걸 반복해서 읽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주인공이 되어서 그 흐름을 계속 읽었다. 다른 사람의 생을 외워야 했다. 그걸 들여다보고, 누군가는 맞혀야 하는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나는 볼펜 끝을 이로 물었다. 주인공이 왜 아내를 두고 떠나야 했는지, 아들은 어쩌다 다리를 잃었는지 하는 것들이 반드시 중요해야만 했다. 이제는 제목만 보아도 그들의 삶을 알 지경이었다. 나는 그렇게 남의 삶을 교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효진의 여행에 나는 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까. 고시 공부를 하며 친구들의 여행 동영상을 스치듯 보았던 기억들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버려진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없었던 것들. 노트북으로 자기 삶을 편집하고 있을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영주씨, 점심 먹으러 가자.”
이제야 점심시간이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나왔다. 오늘은 뭐 먹을까. 메뉴를 정하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어차피 가는 곳은 항상 비슷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제육볶음 같은 것들. 식당으로 가는 길 담장에는 장미꽃이 피어 있었다. 담장이 너무 짧은 탓에 줄기가 많이 굽은 모습이다. 가장 위에 있는 꽃송이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에 핀 것들보다 더 커다랗고 색깔이 쨍했다. 효진은 천천히 걸어가며 장미꽃길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다들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저 내일 밤 비행기 타고 오키나와로 가요.”
효진의 말에 사람들이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뭐야? 연차야? 너무 부럽다! 나는 머리를 계속 쓸어 넘겼다. 사람들이 웃을 때 따라 웃었다.
“영주씨, 오키나와에서는 어디 가야 해?”
현 주임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온몸에 래핑이라도 된 것처럼 모든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속이 답답했다. 뭐… 물놀이해야죠. 아무 말로 얼버무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효진에게 옮겨졌다. 화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 닿았던 시선은 금방 사라진다. 그걸 붙잡아두려고 매일 밤 보았던 SNS의 카드뉴스가 떠올랐다. 오키나와의 관광지 정보가 기억나면서도 평소처럼 뻔뻔하게 말할 수 없었다. 얼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창백했다. 열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거울에 닦이지 않은 얼룩이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방금 먹은 제육볶음이 순식간에 소화된 것처럼 속이 허했다. 닫힌 문 밖에서 들리는 점심시간의 소란스러움이 낯설게 다가왔다.
자리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다른 화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연예인 A가 어떤 드라마를 찍었더라. 다른 팀 대리가 가방을 새로 산 것 같더라. 어제 야근하는데 누구 남자친구가 데리러 왔더라. 전부 자신이 바라본 남의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유튜브 재생 목록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일상을 떠올렸다. 하루를 압축시킨 자극적인 문장과 우스꽝스러운 표정들.
퇴근 시간에 맞춰서 효진과 나는 짐을 챙겨 들고 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내내 그녀는 여행 이야기를 했다. 집에 가서 짐을 쌀 거고, 오키나와에 유명한 수족관이 있고… 출근하던 길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아, 그렇구나. 그래요.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사람들이 또 어떤 거에 힐링을 느끼려나?”
나는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목구멍을 꽉 닫았다. 효진은 계속해서 말했다.
“좀 새로운 걸 올리고 싶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이제 임용고시 준비는 안 해요?”
내가 욱하듯 묻자 그녀가 큰 소리로 웃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접은 지가 언젠데? 2년은 넘은 것 같아요.”
환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가 공부하는 영상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몇 달 전까지 올라오던 영상들은 어떻게 된 거지? 영상 중에서 효진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모습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녀는 수많은 브이로그 속에서 우아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우린 이제 고시생이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효진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디 아파요? 아까부터 힘이 없네. 여름이 오는 듯이 미지근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퇴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그냥 좀 남들처럼 살아.”
내가 말하자 효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우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지하철이 금방 들어오는 듯 사람들이 뛰었다. 그녀가 입을 뗐다.
“이게 남들처럼 사는 거잖아.”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영주씨가 공부할 때 여행을 많이 다녔던 것처럼.”
나의 귀가 소음을 차단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집에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항상 다니던 길로 걸어갔다. 나는 눈을 깜빡이는지, 숨은 쉬고 있는지 아무것도 의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다녀온 것이 되어버린 여행지들의 이름은 저 먼 곳에서 낯선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그 부름에 응한 적은 없었다. 그건 다 남들처럼 살기 위한 변명이었을까.
고시원의 내 방에도 도둑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방은 난장판이었다. 책상에는 온갖 책이 이리저리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찢어진 종이와 볼펜 잉크로 낭자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책상에서는 스톱워치가 시간을 재고 있었다. 내가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도 기록은 계속되고 있었다. 괴담 속 내용과 비슷한 모습을 한 내 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열린 문 뒤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내 방을 한 번씩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 귀에는 이런 소리가 들렸다. 쟤 1차 떨어지지 않았어? 근데 왜 쟤 방을 털었지? 나는 문을 닫았다. 봉투를 꺼내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담았다. 볼펜 잉크가 손에 물들었다.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옆방에서 벽을 쾅쾅 두드렸다. 걸레를 빨아서 바닥을 닦았다. 책상을 정리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책상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어느새 나는 1차에 붙지 않았는데도 방이 털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것과 내지 않는 것은 다르다. 평소처럼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무리에 뭉뚱그려져 있던 내가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방이 털린 사람’으로 분류된 것이다. 마지막 시험이었다. 나는 방에 있는 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방이 털린 사람 모두가 그랬듯이 이번에는 내가 짐을 뺄 차례였다. 얼마 전 구매한 유명 강사의 교재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퇴근 후, 불이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것은 꽤 안정적인 일이다. 셀 수 없는 눈들이 돌아다니는 바깥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갈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나절 동안 비어 있던 집의 무거운 공기가 훅 나를 채웠다. 불을 켜고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오늘 하루의 나 자신이 한순간에 모두 죽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효진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이게 남들처럼 사는 거잖아. 나는 효진의 유튜브 채널에 들어갔다. 30명도 채 되지 않던 구독자가 어느새 5만 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제 새벽에 업로드된 영상을 재생했다. 그녀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친구와 대화하는 모습은 회사에서의 모습과 비슷한 듯 달랐다. 머리카락을 수시로 넘기고, 귀 뒤에 꽂았다가 다시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영상 속 음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자신에 대한 자막은 무엇을 기록하기 위함일지 궁금했다.
효진은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행에 대해 말했다. 금요일 저녁에 오키나와로 떠난다고. 리조트 이름을 말하며 사진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영상이 끝나고 나는 댓글을 열어보았다. ‘언니 뭐 가져가세요? 짐 싸는 영상도 찍어주세요.’ 그녀의 캐리어 속을 궁금해하는 이가 꽤 있었다. ‘벌써 짐은 다 쌌는데! 그럼 돌아와서 짐 푸는 영상 찍을게요.’
항공권 사이트에 들어갔다. 수많은 비행 스케줄이 떴다. 어제 본 것보다 몇 개가 줄어 있었다. 다음달에 써야 할 돈이 얼마나 있더라, 이번에 수도세가 얼마나 나왔지? 문득 나의 어두운 방이 고시원의 벽지 색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하얗게 칠해도 그 공기 때문에 칙칙해지는 분위기. 나는 그곳에서 여전히 살고 있었다. 제주도라도 떠난다면, 2박3일로 간다면 어느 정도의 짐을 싸야 할까. 깨끗한 펜션에 도착한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고 있다. 옆에는 누군가 있어도 되고, 없어도 좋다. 영상에서 본 것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와 그곳에서 햇살을 받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의 진동은 울리지 않아야 한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순간에 고요함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내가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여행의 짐, 모든 여행의 상징. 나에게는 캐리어가 없었다. 오늘은 임용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출근할 준비를 했다. 이어폰을 꺼내어 귀에 꽂았다. 나는 콘텐츠가 되어버린 것처럼 달콤한 음악에 맞춰 걸었다. 여름이 오는 느낌에서 멀어진 날씨였다. 바람이 불고 사람들의 우산이 바짓단을 적셨다. 짜증스러운 마음을 접어두고,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또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효진은 하얀색 캐리어를 끌고 출근했다. 도착하자마자 빗물이 묻을까봐 덮어둔 비닐 커버를 벗겨두었다. 흠집이 하나도 없는 새 캐리어였다.
“처음 가는 거라서 새로 장만했어요.”
그녀는 민망한 듯이 웃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효진의 캐리어를 구경했다. 어디 브랜드 거야? 이거 비싸지 않아? 얼마 주고 샀어? 온갖 호기심이 그녀를 뒤덮었다. 나는 그 틈에 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캐리어. 바퀴에 모래 한 알 들어가지 않아 매끄럽게 굴러가는 모습에 속이 울렁거렸다. 궁금증을 해결한 사람들은 자리로 돌아갔다. 효진은 자리의 구석에 캐리어를 두었다. 마치 원래 있던 것처럼 사무실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더 이상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저는 속이 안 좋아서 사무실에서 쉬고 있을게요.”
점심시간에 또 오키나와 이야기로 30분을 쓸 것이 뻔했다. 나는 최대한 눈썹을 찡그려가며 말했다. 사람들은 그에 화답하듯이 최대한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좀 쉬고 있어. 텅 빈 사무실은 컴퓨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블라인드를 걷어낸 통유리를 빗방울이 세차게 쳐댔다. 나는 효진의 캐리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떤 옷을 차곡차곡 개서 넣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예쁜 튜브를 사서 챙겼을까, 어젯밤 상상한 밀짚모자도 있을까. 그 많은 구독자는 그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손끝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캐리어의 자물쇠였다. 나는 버튼을 눌러보았다. 찰칵, 아주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나는 지퍼를 열었다. 조용한 사무실에 지퍼를 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캐리어를 열어보았다.
캐리어에는 내가 상상한 무엇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끈으로 묶인 디지털카메라가 전부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효진의 텅 빈 눈과 마주쳤다. 계절을 의식하지 않은 비가 한참 동안 창을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