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의 세력기반 후고구려>마진국>태봉국지역.(천안,청주,충주,죽령, 강원도 명주(강릉)까지 이어진다.)
충청[아산,홍성,천안,진천,청주,충주,제천/마진국],강원도[영월,원주,춘천,강릉,철원,태봉국/태백산맥 줄기인].
마진국[摩震國].
901년 궁예는 송악(송도>개경>개성)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904년 송악의 궁예는 청주일대의 마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마진의 청주호족 1천여 가구를 제천 죽령으로 옮기고 마진국(4년)을 거쳐
철원으로 이주시켜 태봉국으로 바꿨다.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마진국>태봉국으로 바꾼다.
그럼 마진인은 어느 지방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마진인의 선조는 직산 중마한인,익산 마한인과 백제 진씨 가문의 융합에서 나왔다.
직산[천안]목지국인 중마한국이 백제의 온조에게 망하고 익산 금마로 내려와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마한/하한)을 세운적이 있었다.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은 구태백제[동성왕(이잔계)~위덕왕(위구태백제)]에 멸망당한다.
백제에 망하자 다시 공주강 이북지역으로 흩어져 마진인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이당시는 금강이 있어 역으로 도망가는것이 사는 길이었다.
또 나라나 수성전에서 패전했을 때 역으로 도망가는 역사가 수없이 나온다.
백제는 호남 마한지방으로 밀려난 마진인들을 다시 금강(공주강)이북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킨다.
그리고 백제에 흡수되면서도 마진인은 그대로 이름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진인은 진한(辰韓)의 후신인 진국(辰國)의 후예를 진인(辰人)이라 하였고,
진시황의 진(秦)나라때 감숙성 만리장성 노역을 피해 반도로 들어온 진인(秦人)이 있었다.
중국 역사서에는 이것을 혼동하여 진인(辰人)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 많다.
왜냐하면 진시황은 절강성 소주에서 거병하여 강소성 남경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사람이다.
한마디로 강남사람인데 그당시 실크로드를 장악하기 위하여 북벌을 단행하고,
산서성 진성시 일대에있는 진한(辰韓)의 후신국인 진국(辰國)을 점령하여 하서시랑을 손에 넣고
부국강병을 이루면서 진국(辰國)이 쌓고있던 만리장성을 이어받아 진(秦)장성을 축조하게 된다.
bc213~210년에 걸쳐서 2년간 산서 서부에서 섬서성 유림시 유림관까지 쌓다가 곧바로 멸망해버린다.
실크로드 종착지였던 하서시랑(河西侍廊)은 그당시에도 금싸라기 땅이었다.
이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하여 춘추전국시대와 5호20국시대가 펼쳐지게 된다.
서역에서 들어오는 실크로드의 3대요충지는 감숙성 돈황시,장액시,천수시(비단길),
청해성 서령시(초원의 길)일대의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산서성 영제시,운성시일대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인 오르도스, 그리고 산서성 진성시에 있는 하서시랑이었다.
진성시에 진한이 있었고 진한이 망하자 bc323년에 진국이 일어났다.
그이후 진(秦)나라의 진시황이 진국(辰國)을 점령하고 진국의 이름을 빌려 한자만 바꿔서
진(秦)나라로 짓는 것이다.
진국(辰國)은 진시황에게 멸망당하기 이전부터 북방 흉노를 막기 위하여,만리장성을 쌓아 가고 있었다.
진국이 쌓은 만리장성은 산서성 동부 퇴행산맥[퇴항산맥]부터 섬서성 동부까지 쌓게 된다.
진시황은 섬서성 유림시 유림관 지역 일부를 bc213년부터 2년간 쌓다가 bc210년에 바로 멸망해버린다.
훗날 고구려로 성장한 고원족의 후예인 고려족이 섬서성 일대를 점령하고
산서성 서부 여량시,임분시(임둔군)를 점령하자,
섬서성 유림관에서부터 감숙성 가욕관(嘉浴關) 돈황시 안서현 옥문관(玉門關)의 하서회랑까지
만리장성을 쌓는다.
고구려 멸망기 때 감숙성 평양시(돈황지구/비단길), 청해성 서령시(초원의길), 산서성 중서부,
섬서성 북부,영하성 회족자치구 일대를 당에 빼앗긴 고구려는
광개토 때 구축해놨던 북발해만의 대련반도 일대로 들어와 당에 대항하면서 천리장성을 쌓게 되는데,
대련반도 여순(뤼순)남단 비사성에서부터 천리장성을 쌓고 당과 일전을 벌인다.
그래서 오녀산성 등 북으로 올라갈수록 임시적으로 급히 돌로 쌓은 산성들이 발견되는 이유이다.
진국(辰國)시대 때부터 장성 축조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반도로 이주해왔다.
진국시대 때부터 장성 축조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역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잘 몰랐던 것이다.
그 후 진시황에게 점령당하자, 만리장성 노역을 피해 반도로 많은 수가 이탈하여 들어온다.
진시황 때 이탈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훗날 신라지역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기록에 남게 되었다.
중국 역사나 세계사에서는 반도에 진(辰/JIN)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진(辰/JIN)이라는 나라가 바로 산서성 진성시 진국(辰國 bc323)에서 장성 축조를 거부하고
이탈하여 들어온 세력이 반도에 세운 나라다.
그래서 진인은 진국의 진인,진시황의 진나라 진인,그리고 백제의 진씨 가문이 있다.
마한국이 기원전 366여년부터 시작하므로 선주민은 마한인이다.
마한인과 융합한 사람들을 일컬어 마진인이라 하였던 것이다.
진한의 후예이자 진국의 후예인 진인들은 마한인과 융합하여 천안 직산 마한국인 중마한을 세웠다.
이 나라가 기준 조선의 상장군 기탁이 세운 마한국이다.
번조선의 기준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감숙성 평양시 일대에서 상마한을 세웠으나,
평양의 낙랑인들에게 패해 전투중 입은 부상으로 전사하였다고 청주 한씨 족보에 전한다.
일설에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을 억울해 하며 바닷물로 스스로 들어가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기준의 아들인 상장군 기탁이 감숙성 평양시에서 무리를 이끌고 한반도 평남 평양으로 들어왔다가
기준이 낙랑인에게 패한후 직산(천안)으로 들어와 천안 직산 마한국을 건국하였다.
그 후 온조계(백잔계)가 웅천(안성)까지 내려와 직산 마한국을 멸망시킨다.
직산 마한국이 망하자, 익산으로 내려와
익산 마한인과 연립하여 직산 마한국의 왕족(계왕)을 내세워 금마에서 연립정권을 수립한다.
그러나 다시 구태백제[동성왕~위덕왕]가 내려와 익산 마한 연립정권(하마한)을 붕괴시키고 돌아간다.
마진인은 직산 중마한국과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마한/하한)을 포함한다.
기준 마한국 마지막 왕 원왕>계왕 때 세아들 중 우평은 고구려 황룡국(유리왕)으로 볼모로 들어가
북원 선우씨가 되고,우성은 백제(온조)로 볼모로 들어가 덕양 기씨가 되었으며,
우량은 신라(탈해 이사금)로 들어가 상당/청주 한씨가 되었다.
익산 금마 연립마한국(하한)은 익산 금마, 왕궁, 황등, 함열, 여산 일대 지방까지였다.
익산 이남은 남마한[전라 연맹체 마한>전나국(전라국/전주 중심)]이었다.
전라 연맹체 마한[전주 중심]이 익산 마한인을 내세워 기준조선 왕족과 함께 연립 마한을 구성케하고
전면에 내세워 중원에서 들어오는 낙랑/후동진, 가야, 백제, 양나라망인, 신라 등을 상대하게 한다.
백제의 무왕 때 익산 왕궁으로 천도할 계획이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현재는 익산 왕궁터가 발굴조사로 실제 사비 백제 왕궁터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자 신라는 마지막 당군 축출을 위해 연천 매소성 전투에 참여한 대가로
익산 왕궁 일대에 안승 후고구려를 옮겨 살게 하였다.
보장왕 동생 안승은 익산 금마에서 보덕국을 세운다.
그러나 신라의 농간으로 대문의 난이 발생하고 보덕국 왕궁이 불에 타자,
안승은 금성으로 들어가 소판>이찬 벼슬에 만족해야했다.
고구려 백성들은 완주군 삼례, 익산 영등동과 군산 영흥동 일대로 들어가 고구려지명을 가지고
현재까지도 살아가고 있는것이다.
익산 마한인 중 기자>기준 조선 후예가 피신하여 정착한 곳 중에서 현재까지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전주 경기전 오목대 기자촌이다.[이에대한 반발로 기자 조선설을 밀어내고 위만 조선설이 나온 것임]^^
위만조선(BC194~BC108)은 한무제 유철(세종)에 멸망할때 서역으로 나가는 실크로드 비단길 출발점인
감숙성 돈황시 안서현 위먼관(위만관/옥문관)으로 달아난다.
후백제시대에 와서는
마진인들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의 오른팔로 뛰었다.
청주,홍성,공주 이북의 마진인들이 궁예의 전폭적인 등용에 힘입어 제천 죽령으로 이주하자
궁예는 나라 이름을 마진국으로 고친후 4년후 철원으로 옮겼다.
궁예는 원주,횡성,강릉일대의 태봉인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있었다.
궁예가 죽자 반왕건 기치를 내세우고 청주,홍성,공주일대 10주군현에서 가장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공주의 환선길이 반왕건 기치를 내걸고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당했고,
공주의 마선대장군 이흔암이 연이어 왕건을 제압하려하였으나 실패하고말았다.(마조선의 후예)
청주호족 임춘길이 환선길과 궁궐안까지 밀고들어가 왕건을 제압하려다가 실패하고 퇴각하여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궁예가 마진국에서 태봉국으로 바꾼 것은 철원인과 원주인,강릉의 태봉인(태백산맥줄기인)들에게도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바꾼 것이다.
권력의 힘이 마진인들에게 너무 집중되어있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판단된다.
궁예는 원주[북원]의 양길밑에서 세력을 키우고 독립하여 명주[강릉]로 옮겨 김순식등을 제압하고
휘하로 두면서 세력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그래도 궁예 사후 가장 격렬하게 저항운동을 펼친 지역은 청주,공주,홍성 10주군현이었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있는 이지역은 한동안 왕건을 괴롭혔다.
게다가 거란족의 침범으로 고려는 안팎으로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고려 송도정부는 전남 나주지방이 없었으면 멸망하고도 남을 처지였던 것이다.
거란족과 궁예의 마진인,원주,철원,강릉의 태봉인들이 앞뒤로 고려 송도정권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남세력은 그야말로 왕건에게는 천군만마였다.
그래서 고려정권은 나주,승주,영암,곡성등 전남정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광종 때 전남 공신 훈구파 숙청을 단행하여 전주 세력 유방헌 등이 출사하게 된다.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로 귀부하여 제2진으로 물러나 있다가 광종 때 전주 완산 세력이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다.
과거등 인재등용권과 인사권을 가진 지공거를 두 번씩이나 역임한 유방헌은 전주 출신이었다.
[고려로 귀부한 견훤은 왕건과 함께 병력(후백제 출신) 1천명을 배정받아,
광주[무진주]에서 후백제를 차지한 아들 신검 군대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싸우기도 한다.
후백제는 전주(완산/견훤),광주(무진주/신검),나주(오다련/왕건)세력으로 갈라져,
미니 후삼국으로 분열하여 패하는 것임].
고려 17대 인종 때부터 장흥 임씨가 등장하여 공예왕후 임씨가 왕후가 되자,
신라파들이 진출하면서 몽골 침략기를 제외하고 멸망할 때까지 공예왕후 후손으로 왕통을 이어간다.
전주 출신 이안사(목조)의 4대손인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면서 정도전의 주도로
20여 만의 고려 개성 왕씨와 장흥 임씨 일족 귀족들을 몰살시키고 조선을 창업한다.
고려 의종 무신시대 이후 명종 때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공예왕후 일파에 의해 제거당하였다.
이의방의 동생 이린은 이안사의 조부이고 이성계의 6대조(현조부)였다.-현조학생부군신위의 유래.
이안사는 충선왕이 심양왕이 되자 전주 경기전 오목대 기자촌에서 170여 가구를 이끌고
삼척을 거쳐 함흥(함주)으로 가서 목축하여 전투마를 몽골에 팔아 부호가 된다.
몽골군은 많은 전투마가 필요한 시기였다.
이것은 충선왕이 고려왕으로 5년만하고 심양왕으로 오래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전사그룹이 몽골에 충성하면 매국노이지만, 충선왕이 심양왕으로 있는한 문제는 다르다.
일국의 왕이 심양왕이된 마당이기 때문에 충선왕 시대에 몽골의 쌍성 총관부에 협력한 사람들은
별개로 봐야 한다.
충선왕 때문에 공녀 차출이 현저히 줄어들게 되면서 사라진다.
이 당시는 한양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아들 조휘가 영흥 쌍성총관부의 총관이었다.
조휘,탁청의 반란으로 몽골에 협력한 댓가로 총관이되었다.
그후 조휘의 4대손인 조소생이 총관으로있었다.
이들은 매국노이지만 조휘의 손녀와 결혼한 이자춘의 부친 이춘은 천호장직을 받았지만,
직접적인 매국노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충선왕이 심양왕으로 있었고, 충선왕의 조카 왕고가 심양왕을 이어받아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자춘이 천호장을 물려받고 공민왕에게 협력하면서 조선창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자춘과 이성계에게 매국 책임을 묻는다면 충선왕과 심양왕 왕고까지 매국노가 되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쿠빌라이의 딸(손녀)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몽골 황위 계승권자이기도 했다.
몽골 황위 계승에서 밀려나 부처 탄생지인 서장성 티벳자치구 샤카 지방까지
3년간 유배를 떠났다가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공민왕의 반원개혁을 거부한 쌍성총관부 4대총관 조소생 같은 자들이 매국노인 것이다.
조선의 소현세자 부부가 청에 볼모로가서 논농사를 일으켜 정묘,병자호란으로 잡혀간
조선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적이있었다. 게다가 돈까지 벌었다.
이것 때문에 소현세자는 죽게 된다.
청에서는 인조를 비아냥거렸고 소현세자는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청의 세수에도 큰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잡혀간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왕이나 다름없었다.
논농사를 지어 번돈으로 백성 500여명을 귀환시키는데 사용하였다.
왕권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민회빈 강씨에게 약을 먹여 죽여버린다.
명분은 소현세자 부부가 가져온 천주실의라는 천주학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대신들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것이다.
궁예가 기반으로 삼은 마진인은 마한인과 진국의 후예 진인,그리고
왜로 이주하지 않고 현지에 남은 백제의 진씨 가문과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금강 이북의 사람들이었다.
차령정맥과 소백정맥 사이에서 형성된 사람들이 이들이었다.
낙랑국은 산서성 진성시에서 최숭 일파가 번조선에서 이탈하여
한나라의 유방 때부터 유철(한무제)을 피해 발해만과 대련반도(요녕성 조양, 심양/선양)로 이주한 후
낙랑국을세웠고, 그 후예인 최리일파가 평양으로 들어와 낙랑국을 세우게 된다.
그 후 고구려에 밀려나자 해주로 내려와 살면서 함경도와 강원도로 이주한다.
함경도에는 말갈이 들어와 살고 있었고, 함북지방은 옥저, 말갈국,
말갈과 융합한 함경남도 지방은 동예, 말갈낙랑국이 세워진다.
해주에 남은 낙랑인은 강남의 동진이 망하자 황족 일행과 친인척들이 대련반도로 들어와
대련반도 조양, 심양에 남은 낙랑 잔류인을 복속하고 후동진국을 세운다.
그후 고구려 고국원왕에 밀려나자 해주로 들어와 낙랑인 숫자가 더 많아지자
동수가 낙랑왕을 자처하였다.
그러자 백제 근초고왕이 쳐올라가 백제의 제후로 떨어진다.
근초고왕은 동진 연호였던 태화를 4년간 사용한다.(동진을 눌렀다는 의미)
고구려의 사유(고국원왕)에게 해주 안악이 점령당하자,이들은 강원도지방으로 이주해 동낙랑이 된다.
일부는 신라지역으로 투항하여 들어간다.
나머지는 백제로 들어왔다가 익산 연립마한국(하한)과 침미다례(나주~여수,사천)로 남하한다.
춘천 지방에는 맥국이 들어서 있었다.
맥국의 선조는 예맥, 동예였으나 말갈이 들어와 융합되었다.
그 후 동낙랑인과 말갈낙랑의 남하로 말갈낙랑,동낙랑[강릉지방]으로 알려진다.
맥국인은 가야,백제와 동맹이었다.
그러다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한다.
마지막에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고구려를 무너뜨린다..
(김무력의 제천,단양,영월,영주일대 개별가야 복속)
그 후 후삼국 시대에 궁예를 도와 왕건에게 대항하다 몰락한다.
궁예가 북원(원주)의 양길과 손을 잡았다가 독립하여, 명주(강릉)에서 큰 세력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강릉이다.
그리고 제천, 철원으로 홍성,공주,청주 등 마진인을 이끌고 후고구려에서 마진국을 선포한후,
권력 안배 차원에서 강원도 지방을 고려하여 태봉국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車峴以南(차현이남),公州江外(공주강외), 피하주군인(彼下州郡人)은
천안,진천의 차유령 고개에서 공주강 이북지방을 말하며 청주,충주,남한강,북한강,조령,
죽령 단양,제천동부지방과 영월,철원,원주,횡성,강릉지방까지를 말한다.
즉, 차령정맥과 소백정맥 사이를 말하며 공주강 이북 충남 아산시 광덕산에서부터
천안,청주,충주 남한강,북한강,문경새재 조령이북지방,단양,제천의 죽령동부지방,원주 치악산,
영월 백운산,횡성 태기산, 철원에서 태백산맥 설악산 대청봉을 넘어 강릉지방까지
이어지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이 궁예의 후고구려>마진국>태봉국(태백산맥줄기인/설악산 대청봉의 강릉인)영토였다.
결국 궁예의 패인은 산악지방이라는 단점으로 인해 상업의 발전이 없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송도같은 상업적,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에 자리 잡았어야 하는데,
궁예는 그것을 무시하고 내륙인 철원에 도읍한 것이었다.(고려 송도 정권에 경제적 의존 구조)
안전만을 강조한 나머지 경제적 몰락이 빠르게 진행되어 멸망한 것이다.
그래서 대다수는 각종 무역과 소금,쌀,도기,개성인삼등 호남과의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왕건에게 달라붙었다.
[궁예는 미륵불 사상에 심취하여 후백제에 충성하겠다는 광주의 후백제 장수를 불태워 죽여
왕건,복지겸,홍유,배현경등 후고구려 장수들이 등을 돌림.
무장은 무장끼리 통한다는 진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함].
조선시대 동인을 대변하였던 정여립의 패인도 이상주의적 성리학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학문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경제부분을 소홀히 하여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대동계라는 강력한 민족주의,민본주의,신분타파주의,이상주의,도덕,윤리주의,무술훈련으로
무장된 단체였으나,경제부분의 취약으로 빠르게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평화시기에 외침에 대비하여 조선을 근대화시키기 위해 신분차별을 없애고 대군을 양성하며
가장 이상적인 신철학을 창조하였으나, 조선을 침공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국도 길을 알기 위해
정탐 나온 왜군 지리 정찰대를 진안 손죽도에서 물리친 일로, 풍신수길의 사전 정치공작에 걸려
동인 권력을 독차지하려 한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에 의해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정철을 내세워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을 것이다.
기축옥사를 견뎌냈더라면 왜군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고 물러갔을 것이었다.
궁예가 도읍을 요새적 입지가 강한 충주,춘천,원주 등지에 도읍하여 자리 잡았다면
북쪽에서 거란족이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라질 수 도 있었을것이다.
제2의 수도를 공주, 부여 등지에 마련해두고, 후백제와 교류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더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궁예는 도읍지로 단양,제천에서 영주를 잇는 죽령을 깃점으로 군사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로 보았다.
과거부터 죽령을 오르내리며 소달구지로 동해안의 수산물을 실어날라 주는 인력꾼과 장사꾼들이
흥했기 때문에, 제천 죽령에 마진국을 세웠다가 안전을 위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철원 태봉국으로 옮겨간다.
p/s
마진국[摩震國]에서 마[摩]는 [갈마,닦을마,연마할마,새롭게 고칠마]인데,
마[摩]는 범어로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뜻으로 진취적기상이 있는말이다.
창기병을 가지고 있는 기마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적을 아우르고 "병합"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마[摩]의 범천축국어 원뜻은 "가 ㅎ 리,가 ㅎ 라(가리,가라)"라는 뜻이다.
"가리,가라"의 뜻은 "기마대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병합"하라는 뜻이다.
그리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때 긴창을 장착한 기마병을 앞세우고 평정한데서
그 영향을 받아 탄생한다.
마[摩]에서 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문장인 어우를병/나란히할병[并]이 나왔다.
어우를병/나란히할병[并]의 선조어가 마[摩]이다.
즉,광개토비문에 나오는 문장인 어우를병/나란히할병[幷=并]은 범천축국어인 마[摩]에서 나온 것이다.
어우를병/나란히할병[원어(幷)=并]을 비석이나 호우병,기와에 새기기가 어려워서
조각가들이 우물정[井]자로 새기면서 우물정[井]과 구분하기위하여 우물정[井]자안에 점을 찍어
어우를병/나란히할병[幷=丼]자를 새긴 것이었다.
복속당한 국가들은 어우를병을 우물정[井]자로 이해하여 병합되면 한우물을 먹는 동족이 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사실은 정복당한 국가를 배려하여 우물정[井]안에 점을 찍어 어우를병/나란히할병[丼]자를 새긴 것이었다.
어우를병/나란히할병[幷=并=丼]자를 우물정[井]으로 이해하면 잘못된 것이다.
丼은 엄연히 어우를병/나란히할병이라는 뜻으로 병합/합병의뜻을 가지고 있으며,
병합당한 국가를 배려하여 나온 한자이며 병합당한 수위를 낮춰주어 강제 합병이아닌
"스스로 통합하여 속국(독자연호는 못쓰지만, 주권이 있는 제후국)"으로 넣었다는 뜻이 있는 한자이다.
幷=并=丼안에 점이 찍혀있는 또다른 이유는 병안에 곡식(낱알)이 들어있다는 뜻이며,
丼을 하사하는 입장에서는 병합하였으니 고구려의 곡식이 쌓인다는 의미이고, 받는 나라의 입장에서는
속국으로서 丼안에 곡식을 담아 잘 받치라는 조공의 의미가 있었다.
震[벼락진,우뢰진,천둥진,아이밸신,애밸신]
마진국[摩震國]- 다산으로 우뢰(천둥)처럼 일어나 모든 나라를 병합(합병)한다는 뜻이다.
마진인[마한인/馬韓人,진인/辰人]의 이름을따서 광개토의 기운을받아 후삼국을 병합하여 통합해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마진인[馬辰人]들에게 광개토의 기운을 불어 넣어준다는 뜻으로
마진국[摩震國]으로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미륵불 사상에 심취한 궁예로서는 고대시대의 광개토 대왕이라는 인물에 신성을 부여하고,
마진인[馬辰人]들이 그기운을 받아 후삼국을 통합해보려는 마음에서 한자만 바꿔,
마진국[摩震國]으로 국호를 지은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음].
-광개토 대왕은 청해성 서령시 서경 초원의길과 산서성 진성시 진평성,고평성 진평2군 하서시랑
경제 중심지와 하북성 서남부,북경 동부,발해만과 동북삼성을 장악했던 왕.
마[摩]는 무력에의한 강제합병(복속)이 아니라 한단계 수위를 낮춰 무력이 아닌 스스로 "통합"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용하는 말이며, 진취적 기상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비무력 무혈통합"을 뜻하는 한자이고, 범어로 기원전 2,300여년전에 나온 한자이며
그뜻은 "가리>가라"(앞으로 나아가라)였다.
[고구려의 선조들이 한때 "가리,가라인"으로 살았음>훗날 가야,왜로도 분화함,
충북지방은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 왜까지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통로로 대부분 전지역이
원래 개별가야(전기가야)였음].^^
-청원(淸原)이라는 지명이 감숙성 정서시 농서지방인 위원현(胃源县/옛청원/淸源)에서
평북 위원군(渭原郡)과 충북 청원군(淸原郡)으로 이주해와서 같은 곳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한자로 대체하여 생성되는 지명이었음.
충북 청원에는 큰 강물이 없으니 源에서 물수변을 빼고 같은 곳을 피하기 위해 새로 지은 것임.
그래서 선조들의 이동루트를 역사적 흔적으로 남겨 후대가 알 수 있도록 한 것임.
후백제는 국가vs국가간의 전쟁으로 통일한 합병(병합)지역이고 견훤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왕건에 귀부하여 우대를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광주의 신검과 전쟁으로 합병한 지역이지,
통합당한 지역이 아니다.
통합이라는 말은 같은 편으로 살며 싸우다가 하나가 되었을때 어느 한쪽이 통합당했다고 하는 것임.
제천 마진국은 충청인, 철원 태봉국은 강원도인을 중용했는데 개성의 왕건이 장악하자
경기도인이 장악해서 다툰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