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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글 스크랩 알이랑 민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만사형통 추천 0 조회 3 13.11.17 09: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알이랑 민족=아리랑민족 - (관심있게 읽어보고)
안찬수,
이글은 유석근 목사의 글입니다. 많은 부분 공감을 하면서 다른 분들 신앙에 입각한 생각을 해보시라고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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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이랑 민족

[1]아리랑민족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명난다
행마다 열자씩 4행 40자의 이 분장(分章) 가요. 이 노래를 우리는 ‘아리랑’이라고 부른다. 아리랑….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달래 온 노래도 없으리라. 슬플 때도 아리랑, 기쁠 때도 아리랑…. 아리랑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함께 민족의 한과 기쁨을 노래해 온 단 하나의 노래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녀노소 상하귀천 없이 입을 모아 불러 온 노래…. 들어도 들어도 싫지 않은 이 노래는 과연 언제부터 무슨 연유에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일까? 현재까지 아리랑의 비밀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연구가 거듭되어 왔으나 시원한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리랑은 매우 단순한 노래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굉장히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특별한 노래이다. 아리랑은 선택받은 종족인 우리 겨레의 직계 조상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이 홍수 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 험한 산과 높은 고개, 그리고 고원들(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창 10:21; 25; 30).
아리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모든 종류의 아리랑 노래에서 변하지 않고 쓰이고 있는 후렴구가 ‘아리랑’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아리랑’이라는 말은 특별한 뜻과 사연이 배어 있다는 증거다. 사실 한국인은 ‘아리랑’이라는 말 자체에 친근감을 느끼며 흥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리랑 연구가는 ‘아리랑’은 뜻이 없는 단순한 후렴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지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 한국인의 마음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로잡아 왔단 말인가?
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가 그렇게 알맹이 없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리랑’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아무리 궁구를 해보아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에 하나 그의 주장대로 ‘아리랑’이 단순히 "흥을 돋우고 음조를 메워나가는 구실을 하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라고 치자.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왜 하필이면 그것이 ‘아리랑’이라는 말인가?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아리랑’은 끝까지 해명이 필요한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 말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욱이 ‘아리랑’은 후렴구다. ‘아리랑’이 노래의 후렴구라는 사실은 오히려 ‘아리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후렴은 노래 곡조의 앞, 혹은 뒤에 붙여 반복해서 부르는 짧은 가사로, 대부분 그 노래의 중요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아리랑’에는 한국인의 원형과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아리랑’은 선민 한민족의 키워드(keyword)이다.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알이랑’은 ‘알’과 ‘이랑’으로 구분된다. ‘알’은 ‘하느님’을 의미한다. ‘하느님’이라는 신명(神名)은 처음에 ‘알’이었다. 그런데 ‘알’ 앞에 ‘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이고, ‘알’ 뒤에 ‘님’이라는 존칭명사를 붙여서 ‘한알님’이라고 했다. 그것이 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알’은 ‘하느님’이다('하늘'의 어원도 한알, 즉 큰 알(大卵)이다. 하늘은 둥굴기 때문이다. 한알→하날→하늘).
유대인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는 바로 이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알라’는 아랍어로 하느님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아랍 사람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즉 창조주 하느님을 뜻하는 인류 최초의 신명이 ‘알’이었는데, 노아에 의해 홍수 이후의 세대로 전해졌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언어학자들은 ‘토씨’는 6천년 이상 간다고 한다)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갑돌이랑 = 갑돌이와 함께, 갑순이랑 = 갑순이와 함께). 따라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말이다.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라는 종교적인 말이다. 놀랍게도 우리 겨레가 민족사를 '하느님과 함께'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시작한 제천민족(祭天民族), 곧 천손민족(天孫民族)이라는 사실이 '알이랑'이라는 말 한 마디에 담겨 있는 것이다.
[2]아리랑민족 
‘아리랑’은 본래 ‘알이랑’(알이랑→아리랑)이다. ‘알’은 성경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처럼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종교적’인 말이다.
고개를 넘어 간다
그렇다면 ‘고개를 넘어 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고대 한민족이 이란 고원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어 갔다는 말이다. 실로 많은 고개를 넘은 것이다. ‘파미르고원’을 지나(支那) 사람들은 총령(蔥嶺:파총, 재령)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국어 파(蔥) 마루(嶺) 그대로 파마루(파미르)이다. 지리학에서도 역시 파미르고원(蔥嶺)에서는 파(蔥)가 많이 야생한다고 한다. 파미르 고원은 ‘파마루’로서 파(蔥)가 많이 자생하는 산마루이기에 파마루(파머루) 고원인 것이다(한국인은 남자를 사내라고 한다. 사내는 원래 '산아이'가 산아이→사나이→사내로 변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고대에 산,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을 넘어 동방으로 왔기 때문이다).
‘파미르’라는 지명의 어원이 한국어 ‘파마루’이다. 이러한 언어적인 연관성은 우리 조상들이 참으로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산맥’을 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서 동방으로 이동해 왔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고학적 증거이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서 동쪽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시비리(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지고 밝익알(바이칼) 호수가 나온다. 우리 겨레는 이 ‘바이칼’ 호수를 거쳐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마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제일 높고 밝은 산인 한밝산(太白山=白頭山)에 이르러 배달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한알님(한알님→하날님→하늘님→하느님)께 천제(天祭)를 드린 후에! (이것은 대홍수 후 노아 할아버지가 알라랏 산정에서 거행했던 역사적 '제천의식'을 답습한 것이었다).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따라서 이 노래 가사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with God, with God, with God, just God.
Accompany with God, I will take over the mountains.)
‘아리랑’은 대홍수 후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욕단계 천손민족 우리 조상들이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천동(遷動)할 때에 수많은 산과 언덕과 고원들을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던 것이다. ‘아리랑’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그토록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온 민족이 숨결이며 역사의 맥박이기 때문이다.
[3]아리랑민족 - 3
아리랑은 원래 ‘알이랑’이다(알이랑→아리랑). ‘알’은 성경의 ‘엘(EL)’, 아랍인의 ‘알아(알라)’처럼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다. ‘이랑’은 ‘~와 함께’라는 토씨로서 영어의 ‘With’에 해당한다. 그래서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종교적인 말이다.
따라서 아리랑은 “알이랑 알이랑 알 알이요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부르던 노래로서, 가사의 의미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이요,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이다.
‘알이랑’은 선택받은 종족인 한국인의 직계 조상 셈의 현손(玄孫) 욕단 족속이 대홍수 후 동방의 산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오면서 부른 찬송가였다(창 10:21; 25; 30). 아리랑은 현존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찬송가인 것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누구를 뜻할까? 문맥상 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된다. 왜냐하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는 바로 앞의 가사는 “하느님과 함께(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으로서,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 곧 욕단 계열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찬송이며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란 하느님을 버린 자들, 곧 배역자들을 의미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 대한 악담이나 저주가 아니다. 만약 노래 가사가 “나를 버리고 ‘가는 놈’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고 했다면, 그것은 실제로 발에 병이 나라고 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사는 “가는 놈”이 아니고 “가시는 님”이다. 따라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는 것은 발병이 나서라도 더 떠나가지 못하고 나의 품으로 되돌아오라는 회귀원망(回歸願望)의 연정(戀情)을 노래한 것이다. 즉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린 자들을 향해 다시 순수한 하느님 신앙으로 되돌아 올 것을 사랑으로 촉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겨레의 노래 ‘알이랑’에는 ‘하느님을 위한 열정’과 ‘잃은 자를 위한 연민’이 함께 깊이 배어 있다.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얼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의 2절은 청천 하늘의 잔별만큼이나 우리 가슴엔 수심도 많다고 노래한다. 왜 알이랑 찬송을 부르며 동방으로 천동(遷動)하던 욕단 계열 천손민족(天孫民族) 우리 조상들의 가슴엔 그리도 근심이 많았을까?
그것은 1절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때문이었다. 즉 유일신 신앙(제천신앙)을 저버린 자들이 제천민족 우리 조상들의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상 근심과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근심’이었다(고후 7:10).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알이랑' 찬송은 욕단 족속이 동방의 산지를 넘어 이 땅에 오기까지 끊임없이 불리어졌다. 그리고 우리 겨레의 삶 가운데 계속 이어지고 있다.
[4]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성경상의 기원
우리 겨레의 근본 사상은 ‘알이랑 정신’이다.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다. 홍수 후에 그렇게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갖고서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천동(遷動)한 족속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의 가계이다.
창세기 10:21에 보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는 말씀이 있다. ‘에벨’은 셈의 셋째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였다. 셈은 아르박삿 외에도 네 아들이 있었고(창 10:22), 따라서 셈은 이 모든 자손들의 조상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을 먼저 언급하면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구별해 놓았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셈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혈통’이 선택된 종족이라는 것이다. 즉 셈의 하느님(창 9:26)은 이제 ‘에벨 자손의 하느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면 ‘에벨의 자손’이란 누구인가? ‘벨렉’과 ‘욕단’ 두 형제뿐이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따라서 신적 선택을 받은 종족인 ‘에벨의 온 자손’이란 곧 ‘벨렉 자손’과 ‘욕단 자손’을 말하는 것이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했으니 셈은 곧 그 두 형제의 자손들의 조상이 된다는 말이요, 하느님은 ‘셈의 하느님’이라 했으니(창 9:26) 곧 ‘벨렉 자손의 하느님’이시요, ‘욕단 자손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여기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선택된 백성이 하나가 아닌 둘인 근거를 분명히 예비하셨다! 선택받은 백성은 ‘벨렉계 선민’과 ‘욕단계 선민’ 두 계열의 백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셈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하려는 기회에 모세는 간단하게 서론을 시사하고 있다. 그런 서론은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이 계열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기 때문에 하느님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특별한 표로서 이 종족을 격리시키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이 모세가 특별히 그를 가리켜서 ‘에벨 자손들의 조상’ 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다. 그것은 셈의 복이 무차별하게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한 가족에게만 그것이 상속되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존 칼빈 원저, 「성경주석」, 서울: (주)성서원, 1999, P. 301)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으로만 부각시킨 까닭은 ‘에벨의 자손’이 선택된 종족이며, 셈의 복이 ‘에벨의 후손’에게만 승계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주목하라. 이 계시를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에벨은 24절에 나오며, 24절에 에벨이 나오기 전에 벌써 셈의 후손이 여럿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만 대고 넘어가면서 에벨만은 셈의 후손 꼭대기에다 올려놓은 것은 선민, 즉 ‘천손민족’이 에벨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에벨’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에벨은 셈의 4대손이지만 “천손민족의 조상”이기 때문에 21절에서 특별히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벨렉의 후손에서는 그의 6대손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음으로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탄생했다(창 11:10~32).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 10:30)
여기에서 ‘산’이란 히브리어로 ‘하르’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산맥’, 혹은 ‘일정한 지역의 산들’ 곧 ‘산지’를 가리킨다. 동양에는 큰 산들이 많이 있다. 즉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 고원→천산 산맥→알타이 산맥- 아시아로 천동했던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에벨의 혈통으로서 셈족 중에서도 특별 선택을 받은 셈족의 종가(宗家)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백성이었고,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 중심 사상, 신본주의 정신’이 가장 확고한 족속이었다! 따라서 욕단 족속은 셈족의 정통성을 승계한 백성답게 ‘하느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즉 ‘알이랑(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찬송하면서 동방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알이랑 민족 한국인의 성경상의 직계 조상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다. 따라서 동방의 한국인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감추어 두신 선민"이 바로 알이랑 민족 우리 한국인이다. (그러나 당신이 누구이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상실되었던 계시가 드러나고 회복되더라도 결코 그것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5]욕단의 후손을 찾을 수 있는 단서(1)
셈의 현손(玄孫) ‘욕단의 가계’는 다른 셈의 후손들과는 달리 그의 열셋 아들의 이름을 다 열거하여, 그 이름이 두 번이나 명백히 기록되어 성경에 남아있다(창 10:6~29; 대상 1:19~23). 왜일까? 에벨의 자손인 그들은 ‘벨렉의 가계’와 함께 신적 선택을 받은 백성, 곧 천손민족(天孫民族)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나라 백성일까? ‘욕단의 후손’은 처음 세대 이후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느님은 그들이 우리 알이랑 민족 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성경에 결정적인 단서를 남겨 두셨다. 그것은 창세기 10장 30절 말씀이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창 10:30)
바로 이 구절이 욕단계 선민이 누구인가를 찾는 데 결정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성경은 욕단의 거주지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메사’와 ‘스발’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동편 산’이란 어느 지역의 산을 지칭하는 것인지를 확인하면 또 하나의 선민 욕단계 천손민족이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성경 연구가들은 욕단의 아들 이름이 역사적으로 아랍 부족의 이름과 같은 스바, 오빌, 하윌라이며 더욱이 아라비아 남단에는 스바, 오빌, 하윌라라는 지명도 나타나기 때문에 욕단이 아라비아로 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욕단 족속은 아라비아 남단에 정착하여 현(現)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아랍 부족의 이름은 함의 가계인 구스 민족의 후손에 속한 것이다.
초기 아랍 민족은 구스 민족이 분명하며 그들은 셈족이 아니다. 함의 자손 구스의 맏아들이 스바였으며 손자 중에도 스바가 있었다(창10:6). 또 하윌라도 구스의 둘째 아들이다. 그들이 그 땅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이름을 따라서 지명을 삼은 것이다. 오빌도 스바와 하윌라 부근의 홍해 안에 있는 금산지로 알려진 곳으로서 솔로몬 왕을 방문했던 스바 여왕의 통치 지역이었다. 따라서 그곳도 역시 함 계통의 구스 민족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왕상 10:1). 흔히 이름은 가계에 관련된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고, 서로 분리된 후손들 사이에서 널리 되풀이되어 사용된다.
그리고 현(現) 아랍 민족은 이스마엘의 후손이 퍼져 있고(창25:13~18), 롯의 후손 모압과 암몬 족속(창 19:36), 그 밖에 셈의 아들인 엘람족, 앗수르족, 룻족, 아람족 등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욕단이 아라비아로 가서 아랍 부족의 선조가 되었다고 착각하는 성경 연구가들은 ‘메사’와 ‘스발’의 위치를 결코 찾을 수 없다. 한결같이 그들은 ‘메사’와 ‘스발’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라비아 주변에는 그런 곳이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기 때문이다.
‘욕단의 후손’이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창세기 10:30은 욕단계 선민이 동양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방 산
욕단은 아라비아로 가지 않았다. 성경은 욕단의 거주지가 ‘동방 산지’(창 10:30)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라비아는 본문이 의도하는 ‘동방’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산지’가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10:30의 ‘산’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단지 하나의 산(one mountain)을 뜻하기 보다는 ‘산맥’(mountain-range), ‘산지’(mountain-region) 등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본문처럼 단수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산맥’ 혹은 ‘일정한 지역의 산들’, 곧 ‘산지’를 가리킨다.
한글 개역성경은 ‘동편 산’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원문의 뜻을 충분히 전하여 주지 못한다. ‘동편 산’이라는 말은 ‘동편 산지’ 혹은 ‘동편 산맥’ 또는 ‘동방 산악지대’로 번역해야 원문의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공동번역 성경은 ‘동편 산’이라는 말을 ‘동쪽 산악지대’라고 번역하여 원문의 뜻을 정확히 전하여 주고 있다. 또한 일본 성서공회가 발행한 일본어 성경도 ‘동방 산지’라고 번역하여 한글 개역성경보다 원문이 의도하는 바를 더 잘 전달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욕단은 아라비아로 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라비아 남단에는 ‘산맥’이나 ‘산악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지도책에도 ‘산’이나 ‘산맥’ 또는 ‘산지’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아라비아는 지도상에 대부분 사막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아라비아에는 어떤 특별한 산이나 산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세가 말한 욕단 족속이 거주했다는 ‘동쪽 산악지대’라는 곳은 산맥과 산악지대가 많은 동양의 산들을 표시한 것이다. ‘동편 산’은 HAR HA KEDEM에서 변형되었다. 대개 KEDEM은 ‘동양’(Orient) 또는 ‘태평양과 맞닿는 아시아 동쪽 가장자리’를 뜻한다. KEDEM의 어원은 ‘가장자리’(Front)이며, 지리학적 의미로는 태양이 떠오르는 쪽에 있는 아시아의 해변 지역들을 언급한다. KEDEM은 또한 고대의 시작(시대의 가장자리, the Front of Time)이라는 어원도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곳에서는 ‘고대 동양’(Ancient Orient)으로 번역해야만 한다. 따라서 HAR HA KEDEM은 ‘고대 동양의 산’을 의미한다. 이 산은 고대 전승의 동양에 있던 어떤 특별한 산을 언급할 수도 있고, 전(全) 동양을 상징할 수도 있다. 분명히 동양에는 많은 큰 산들이 있다. 이것은 모든 욕단의 후손이 동양에 거주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고대에 산을 넘어 동양으로 갔던 것이다.
[6]욕단의 후손을 찾을 수 있는 단서(2)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창 10:30). 이제 ‘메사’의 위치를 확인해 보자.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곧바로 시날 평원으로 옮겨가 하느님을 대적하여 바벨탑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경을 정확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1장 2절은 홍수 이후 사람들이 바벨론 평지에 이르기 전에 먼저 동쪽으로 여행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동편으로부터(from the east) 이동할 때 그들은 시날 땅에서 평지를 발견하여 그들은 거기서 살았다.”(창 11:2 * 원전 직역)
한글 개역성경에는 ‘동방으로’ 옮겨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동방으로부터’라고 되어 있다.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은 원문에 맞게 ‘from the east’로 번역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에 시날 평지(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계곡 안에 있는 지역)를 만났던 것이다.
이것은 홍수 생존자들이 방주가 정박했던 아라랏 산지를 떠나 처음 이동했던 지역이 바벨론 평원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대홍수 이후의 사람들은 아라랏 산지를 떠나 먼저 동쪽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노아의 후손들은 바로 그 동방의 어떤 장소(중앙아시아 근접 지역)로부터 서쪽으로 옮겨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 홍수 생존자들의 바벨론 이전 시대의 이동 경로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욕단이 나중에 어느 경로로 이동하였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메사’의 위치를 찾는데도 단서가 되므로 주목해야 한다.
홍수 생존자들의 바벨론 이전 시대의 이동 경로는 이란 고원을 지나 바벨론 동부에 이르는 것으로 100년 이상 계속되었다. 창세기 11:10~16은 에벨이 벨렉을 낳기까지 홍수 후 101년이 지났음을 말해주며, 창세기 10장 25절은 벨렉이 바벨론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노아의 6대손 벨렉에 관해 창세기 10:25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에벨에게 두 아들들이 낳아졌다. 한 이름은 벨렉인데 그의 날들에(in his days) 그 땅이 나뉘었다. 그리고 그의 형제의 이름은 욕단이다.”(원전 직역)
성경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의 이름은 예언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 가령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허무하다)이나, 하느님과 온전히 동행하다가 산 채로 승천한 ‘에녹’(봉헌되었다)은 이름에서 그들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다. 이렇게 인명(人名)은 하나의 예언적 계시이다. 벨렉이라는 이름도 그러한 이름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이름은 ‘나뉘다’라는 뜻인데, 실제로 그의 때에(in his days) 세상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W.B.C.(Word Biblical Commentary) 주석은 ‘벨렉’의 이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벨렉은 ‘나누다’(???-팔라그)라는 어근에서 온 것이다. 보통명사로서 이 단어는 ‘운하, 수로’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 어원은 이 어휘에 보다 추상적인 의미(나눔)를 부여한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처럼 이 이름도 예언적이며 벨렉의 생애에 일어날 중대한 사건을 예시한다.”(고든 웬함 지음, 박영호 옮김, 「WBC 성경주석 창세기 상」, 서울: 솔로몬, 2001, p.423)
벨렉은 “나뉘다”는 뜻이다. 이 ‘나뉨’은 바벨탑 사건으로 세상의 언어가 여러 종족별로 나뉘어 더 이상 한 종족으로 살 수 없게 된 상황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벨렉이란 이름이 예시했었던 중대한 사건이다. 이는 벨렉이 언어 혼란으로 세상이 나뉠 때에 바벨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욕단은 벨렉과 함께 바벨론으로 가지 않았다. 욕단은 동쪽 지역에 거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시날 평지에 이르기 전에 무리와 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이었더라.”(창 10:30) 이동하던 무리들은 동쪽 지역으로부터 시날 평지로 접근하였다. 따라서 욕단이 동쪽 지역에 거하기로 결정한 사실은 그가 서부로 향하는 주요 집단과 헤어져 동양으로 이주 경로를 변경하였음을 증거 하여 준다.
벨렉과 욕단의 헤어짐으로 두 종류의 히브리 가계가 형성되었다. 즉 서부 아시아에 거주하는 서부 히브리 민족과 동양에 거주하는 동부 히브리 민족이다. 창세기 10장 21절은 셈이 ‘에벨 온 자손의 조상’, 즉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에베르’에서 ‘히브리’가 유래되었다. ‘히브리’(????-이브리:Hebrew)는 에베르(???)의 종족을 나타내는 말로서, ‘에벨’(Eber) 또는 ‘에벨의 계통을 잇는’(descended from Eber)을 뜻한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따라서 히브리 민족은 에벨로부터 나온 두 가계, 곧 벨렉과 욕단 계통을 잇는 자손이다. 즉 아시아 서쪽으로 간 벨렉계 선민은 서부 히브리 민족이요, 동양으로 간 욕단계 선민은 동부 히브리 민족이다. 욕단의 후손도 히브리 민족에 속한다.
우리는 창세기 9장 28절에서 노아가 바벨탑 사건 이후까지 생존하였으며 다른 홍수 이후 족장들도 그러하였음을 알 수 있다(창 11장). 따라서 만일 그들이 그 당시 바벨론에 있었다면 바벨탑 건설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바벨론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노아는 하느님 앞에서 은혜를 입은 자요(창 6:8), 의로운 사람이었기에(겔 14:14; 벧후 2:5) 분명히 바벨론의 사악한 행위와 니므롯의 왕국(창 10:8~10)에 반대했을 것이다.
니므롯은 함의 손자로서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옮기도록 인도한 사람이었으며, 그곳에서 바벨탑 건설을 선동했던 인물이다. 성경은 노아와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이 이 시기에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문맥 주석적 방식으로 유추할 만한 합리적인 결론은 그들이 욕단과 함께 아시아로 갔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시대나 배교가 극심할 때 참된 믿음을 지닌 소수의 무리를 항상 남겨두셨다. 그들을 ‘남은 자’(the Remnant)라고 하는데, 욕단 족속은 바로 그 시대의 ‘남은 자’였다. 셈족의 현저한 가지 욕단 족속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 니므롯에 의해 위협받는 셈계의 일신신앙을 보전(保全)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욕단과 그와 함께 한 다른 모든 홍수 후 족장들은 이란 고원이나 중앙아시아의 어떤 장소에서 서부 바벨론으로 이동하는 무리들을 떠날 순간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욕단 민족이 동양으로 정착하는 시점이 되었다.
그때에 인류는 대홍수 이후 첫 번째 이산의 역사를 경험했다. 니므롯을 따라 서부 바벨론으로 이동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욕단과 함께 알이랑 고개를 넘어 ‘스발’을 향해 가고자 동양으로 이동하는 거룩한 무리들로 홍수 생존자들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욕단은 동방의 산악지대로 이동했는데, 메사(Mesha)는 그 동양의 산악지대들(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의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지금 아라랏 산 동쪽 이란 북동부에 있는 메삿(Meshhad)이라는 곳이다. 욕단 족속은 이 ‘메사’로부터 ‘스발’을 향해 가고자 동양의 산악지대들로 대장정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성경 주석가는 ‘메사’를 ‘메소포타미아’의 옛말이라고 하나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 겨레의 노래 ‘알이랑’은 바로 그때에 욕단의 가계가 동방으로 이동하면서 불렀던 ‘찬송가’였다. 앞서 우리는 ‘알이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알이랑’은 ‘하느님과 함께’(With God)라는 뜻이니, 곧 ‘하느님 중심 사상’이요 ‘신본주의 정신’이다. 즉 욕단은 홍수 후 함족 니므롯에 의해서 셈족의 하느님 신앙이 강하게 흔들릴 때에도 결코 유일신 하느님을 섬기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도전받는 유일신 신앙을 보전하고자 ‘알이랑 정신’ 즉, ‘하느님 중심 사상’과 ‘신본주의 정신’을 갖고서 새 땅(스발=새발=새팔=새벌)을 찾아 ‘알이랑’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아시아로 멀리 천동(遷動)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존하는 인류 최고의 찬송가인 알이랑의 태동 배경이다.
[7]욕단의 후손을 찾을 수 있는 단서(3)
스발
욕단 족속은 ‘스발’을 향해 동쪽으로 옮겨갔으며 ‘스발’은 그의 목적지였다. 창세기 10장 30절을 히브리어 원문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는 당신이 메사로부터 새팔(새파르)로 가면서 동쪽에 있는 산이었다"(And their dwelling was from Mesha, as thou goest unto Sephar a mount of the east. KJV )
‘스발’을 히브리어에서 음역하면 ‘새팔’이다(우리말 성경 개역판의 히브리어 음역 표기는 고대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역으로부터 왔다). 여기에서 ‘새팔로 가면서'(as thou goest unto Sephar)라는 말은 욕단 족속이 동양의 어떤 특정한 산지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새팔’을 향해 계속 동쪽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새팔’의 위치는 어디일까? 어디가 욕단이 최후로 도달한 ‘새팔’인가?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새팔’은 결코 당시에 존재하거나 알려진 도시와 장소의 이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홍수로 인해 지워졌기 때문이다. 욕단이 천동하기까지 동양에는 아직 누구도 살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창세기 10장 30절에 언급된 ‘새팔’은 현실적인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예시적’인 지명이다. '예시'란 나중에 원형으로 구체화 될 어떤 진리가 미리 '암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새팔’의 원형에 해당할 수 있는 지명 및 위치를 찾아야 한다.
‘새팔’은 '새발'
예시적 지명 ‘새팔’은 어디일까? 일단 그곳은 아시아 동쪽의 어느 곳에선가에서 추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욕단은 동방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과연 어디를 뜻할까? ‘시베리아'이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좀더 이동하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고조선의 창건 무대인 만주 대륙이 연장된 땅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고향이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으로 멀리 천동한 욕단 족속은 남북 만주 및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동방의 새 땅을 '새발'이라고 하였다. ‘새발’은 ‘새벌’의 고어로서, ‘새 땅’ ‘새 벌판’이라는 뜻이다. 욕단의 목적지 ‘새팔’은 바로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 ‘새발’(시베리아~만주)을 예시한 것이다. ‘새팔’과 ‘새발’은 발음이 아주 유사하다. ‘ㅍ’을 약하게 소리 내면 ‘ㅂ’이 된다. ‘ㅍ’과 ‘ㅂ’은 모두 ‘파열음’으로서 한 계통의 소리이다. 따라서 자주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안팎’은 ‘안밖’이요, 동이족의 후예인 인디언은 ‘아버지’를 ‘아파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새팔’ = ‘새발’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새발’의 어원은 ‘새밝’인데 ‘새 밝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그 땅이 빛이 시작되는 새 땅, 곧 새밝나라(새光明國)이기 때문이다. ‘새발’의 ‘발’은 ‘밝’에서 가지 쳐 나온 말로서 원래는 ‘광명’의 뜻이었는데 ‘벌’ ‘들’ ‘나라’ 등의 뜻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새발’의 ‘발’은 곧 ‘벌’인 것이다. ‘밝’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그의 명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강조했듯이 우리 배달겨레의 사상의 뿌리를 이루는 본원적인 말이었다. 그것은 신(神)이며 신성(神聖)한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며 광명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배달’이라는 말은 ‘밝달’에서 나왔다. ‘배달겨레’ 할 때의 ‘배’의 뿌리도 ‘밝’이다. 그리고 ‘달’은 ‘아사달’ 할 때의 그 ‘달’인데 ‘땅’이라는 뜻이다. 곧 양달이 양지요, 음달이 음지요, 빗달이 비스듬한 땅이다. ‘밝의 땅’은 그래서 ‘배달’이니 이 말에는 우리 배달겨레의 얼과 숨결이 서린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말인지 모른다. 이 ‘밝’에서 가지 쳐 나온 말 가운데 하나가 ‘발’인데, ‘발’은 ‘밝’ 즉 처음에는 ‘광명’의 뜻이었으나 ‘벌’ ‘들’ ‘나라’ 등의 뜻으로 바뀐 것이다. 순수한 우리말로 된 옛 한국의 지명에는 ‘발’로 끝나는 땅이름이 상당히 많다.
욕단의 목적지 ‘새팔’은 ‘새발'인데 그것은 빛이 시작되는 새 땅, 곧 ‘새밝’으로서 ‘광명의 본원지’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욕단은 알이랑 고개를 넘어 빛이 시작되는 동방의 새 땅, 곧 시베리아로부터 남북만주에 이르는 ‘극동아시아’까지 아주 멀리 천동(遷動)했던 것이다. 만주 벌판이 연장된 땅인 시베리아는 우리 겨레의 역사의 고향이다. 한국인의 주류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다.
욕단 족속은 왜 그렇게 빛이 시작되는 땅인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까지 멀리 이동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욕단의 가계는 바벨탑 건설에 가담하지 않은 셈족의 진정한 장자였다. 그들은 ‘하느님 신앙’이 위협받던 그 암울한 시대에 ‘알이랑 정신’, 곧 ‘하느님 중심 사상’과 ‘신본주의 정신’을 끝까지 지켰던 단 하나의 천손민족이었다. 이렇게 창조주 하느님을 가장 공경했던 욕단계 선민 한국인의 조상은 타민족과 구별되는 천손민족다운 기질을 매우 많이 갖고 있었다. 그 현저한 민족성의 하나가 밝고 환한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섬기는 하느님이 밝고 환한 천국에서 빛 가운데 계시는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욕단 족속은 천손민족인 자기들의 삶의 터전으로 빛이 시작되는 땅, 곧 ‘새밝나라’인 ‘새벌’(새팔 = 새발)을 목적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 밝고 환한 동방의 새 땅을 찾아가서 신시(神市), 즉 하느님의 나라(천국)를 건설하고자 했다. 욕단 족속이 알이랑 고개를 넘어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땅 끝, 곧 ‘새벌’까지 멀리 천동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천손민족 에벨의 혈통 욕단의가계는 광명의 본원지인 ‘밝의 땅’(밝달)을 찾아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를(파미르고원→ 천산산맥→알타이산맥) 넘어 쉼 없이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알타이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좀더 가면 바이칼 호수가 나온다. 이 바이칼 호는 우리 민족을 포함한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주도한 유목민족들을 낳고 길러온 태반이다.
바이칼호수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대평원이 펼쳐지고, 호수 동남쪽에는 만주 벌판이 한반도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호수 북쪽은 북반구 북단이기 때문에 볕도 약하고 빛도 강하지 못하다. 그곳은 광명의 본원지가 아니다. 그래서 욕단 족속은 아침에 뜨는 해를 좇아서 호수 동남쪽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 동녘 해 뜨는 밝은 땅에서 가장(한) 밝은 산인 한밝산(太白山=白頭山)에 집결하였다. 이 가장 밝고 밝은 한밝(太百)은 땅이요 터이니(基, 垈) 곧 밝달(배달)이다. 즉, 광명의 본원지인 ‘밝의 땅’이다!
욕단 족속은 이 ‘밝의 땅’에서 ‘한밝산’을 발상지와 중심터로 삼아 한밝산과 그 변두리에 정착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동방에서 가장 빛 밝고 볕 밝은 땅인데다, 아시아 동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백두산은 셈의 후손인 그들이 산정제사(山頂祭祀)를 드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태백산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배달겨레의 성경상의 시조는 바로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다!
한밝산의 밝달 곧 배달은 빛밝(光明)고, 볕밝(暘明)아, 사람이 먹는 풀, 나무, 과일, 새, 짐승 등이 자연히 많아서, 아득한 옛적에는 그곳이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이며 터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이 배달을 낙원으로서 하느님이 점지(占指)하신 땅이라고 믿었었다. 하느님의 사람 욕단은 바로 이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밝달(배달)나라를 세웠다. 이 한밝은(가장 밝은) 배달에 욕단이 세운 나라는 가장(한) 환(桓)한 나라인 까닭에, 이것을 그들은 하늘나라(天國 = 한나라), 신의 나라(神國 = 神市 = City of God)라 하였다.
이제 우리는 욕단의 목적지 ‘새팔’의 위치를 확실히 찾았다. 예시적 지명인 ‘새팔’은 ‘새벌’(새발)이요, '새발'은 '새밝' 곧 ‘새 밝은 곳’인데 광명의 본원지인 밝의 땅(밝달) ‘배달’인 것이다! 그 땅은 우리 배달겨레가 처음부터 터 잡고 살아온 땅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선민 욕단의 후손이 누구인지를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존귀한 백성은 바로 알이랑 민족 한국인이다!
신적 선택을 받은 종족인 욕단 족속은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지극히 공경하여 광명의 본원지인 새밝나라(새발=새팔=새벌)를 찾아가려고 아침에 돋는 해를 따라 산을 넘고 들을 지나 쉬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시아 동녘에서 가장(한) 높고 밝은 산인 한밝산(태백산→백두산)에 올라 유일신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천지(天池)가 솟아 오른 산정을 새 출발의 기점으로 삼은 백의민족이다!
욕단의 후손이 처음 세대 이후에 더 이상 성경에 언급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손민족인 그들은 아주 먼 아시아 동쪽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새벌과 시비리
시베리아는 만주 벌판이 연장 된 땅으로서 만주와 같은 땅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는 곳이다. 그곳은 우리 배달겨레의 역사의 고향이다. 따라서 그곳을 부르던 우리의 땅 이름이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는데, 그것이 토박이말로 ‘시비리’이다. 이 ‘시비리’란 바로 ‘새발’(새벌)의 변음이다. 우리 한글의 홀소리 ㅏ가 ㅏ~ㅓ~ㅗ~ㅜ~ㅡ~ㅣ로 구울러 감에 따라, '새'가 또 사~서~소~수~스~시로 구울러 감이 보통이다. 우리말 ‘새’가 그 같이 여러 가지 소리(음)로 나타난다. ‘시비리’의 ‘시’는 ‘새’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시비리’의 ‘비리’는 벌(발)의 의미를 갖는 순수한 우리말이다<‘비리’는 부리(夫里), 벌(伐), 화(火), 평(坪), 불(佛), 불(不), 반(半), 비이(卑耳), 부여(夫餘), 원(原), 비(臂), 불이(不而), 부루(夫婁), 발해(渤海), 부여(夫如) 등으로 다양하게 바뀌어 쓰인 벌(판)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우리 겨레의 삶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널리 곳곳에서 쓰였었다>. ‘비리’와 비슷한 말로 ‘누리’가 있는데, ‘비리’는 ‘벌’만 뜻하지만 ‘누리’(온누리)는 땅덩어리, 곧 산과 계곡, 강과 바다, 벌과 들 등 땅 위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시비리’는 시(새:新)+비리(벌:平野)의 조어구조를 갖는 ‘새벌’과 같은 뜻의 말이다. 즉 시베리아의 가장 오래 된 옛 이름이 한국어 ‘시비리’이다. 이 토박이말을 우리는 잊고 있으나 북한의 조선말 사전(사회과학 출판사, 1992년)은 ‘시베리아 → 명사 씨비리’로 분명히 풀이해 놓았다.
‘시비리’가 ‘시베리아’로 불려지게 된 것은 고구려가 망한 후 방치되던 ‘시비리’를 16세기에 러시아가 불법강점(不法强占)을 하면서부터이다. 러시아족이 동침(東浸)한 이후 ‘시비리’는 그 신비한 모습을 세계사에 드러내게 되었는데, ‘시비리’를 강침한 러시아 사람들도 그 땅을 예부터 부르던 이름 그대로 ‘시비리’라고 불렀다. 그것을 영국인들이 듣고 마치 고려를 ‘코리아’라고 부른 것처럼 ‘시베리아’라고 부른 것이 오늘날 ‘시베리아’로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400여 년 이전까지는 ‘시베리아’라는 말은 지구상에 없었다. 오직 한국어 ‘시비리’가 있었을 뿐이다. 시베리아는 한국어 ‘시비리’에서 유래한 영어식 지명일 뿐이다. 오늘날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땅으로 되어 있지만 16세기에 러시아족이 우랄 산맥을 넘어서 동방을 침략해 오기 전까지는 그 땅은 러시아와 전혀 인연이 없는 땅이었다.
욕단은 홍수 이후 동양으로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가장 먼저 이동한 족족이었으며, ‘새발’(시베리아~만주)을 처음으로 개척 지배했던 동양의 선주민이었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고대에 시베리아와 중원(中原) 및 극동 지역을 가장 먼저 차지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말한다(임승국· 주관중, 「다물의 역사와 미래」, 다물민족연구소, P. 63). 그러므로 욕단의 후손이 한국인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더욱 없다.
그렇다! 한국인의 선조인 동이족은 고대에 알타이 산맥과 바이칼 호수 주변의 ‘시베리아’에 넓게 퍼져 살면서 극동으로 이주해 왔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이며, 그 정신적 고향은 북방, 특히 백두산과 바이칼호에 있다.
동이의 영역은 대체로 지금의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는 몽고와 연계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차이나의 만리장성 안 깊숙이까지, 북쪽으로는 ‘시베리아’로 뻗어 실로 광활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바로 그들이 ‘새발(새팔)’로 간 욕단 족속으로서 고대 한국인인 것이다!
에벨로부터 형제 벨렉과 함께 셈에게 내린 복을 상속받은 천손민족 욕단의 가계는 동쪽으로 긴 여행을 계속하여 동방 산악지대인 파미르 고원을 넘고 천산 산맥을 넘고 알타이 산맥을 넘어 ‘새팔’(새발) 곧 시베리아와 만주 대륙에 이르는 광활한 극동의 새 땅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백두산을 본고장으로 하여 남북만주(南北滿洲)로부터 현재 중국의 산동성 전체, 하북성 발해 연안, 하남성 동남, 강서성 서북, 안휘성 중북, 호북성 동쪽 모퉁이와 요동반도 및 한반도 전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뻗어나가 살았던 것이다. 바로 그들이 우리 한민족의 조상인 배달 동이겨레이다!
그러므로 알이랑민족 한국인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선민이다. 고대로부터 아시아 동쪽 ‘새벌’(새팔)에 살고 있는 그들은 신적 선택을 받은 종족인 에벨의 혈통 욕단의 후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8]밝달임금(단군) 욕단[1]
빛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던 천손민족(天孫民族) 욕단 족속은 빛이 시작되는 땅, 곧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들은 그 밝고 환한 땅을 찾아 가서 온 백성이 밝고 환한 흰 옷을 입고 창조주 하느님께 제사하며 삶을 영위하는 신시(神市= City of God), 곧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소망했다.
그래서 아침에 뜨는 해를 따라 알이랑 고개를 넘어 쉬지 않고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마침내 동해에 해 떠오르는 ‘밝의 땅’, 동방의 땅 끝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과 그 변두리를 근거지로 배달나라를 세운 우리 밝달겨레(배달겨레)의 조상이 되었다. ‘밝달’의 ‘달’은 ‘아사달’의 ‘달’로서 ‘땅’이라는 말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욕단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물론 ‘밝달임금’이라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욕단은 사람들을 ‘밝의 땅’으로 이끌고 온 ‘밝달족’(광명족)의 우두머리(Headship)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군’이 ‘욕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단군’이란 칭호는 ‘밝달임금’(檀國의 君長: king of Bakdal)의 이두식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단군’은 ‘밝달임금’ 또는 ‘배달임금’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동방(조선)의 고유의 호칭을 후세에 한자(韓字)로 의역(意譯)하여, ‘檀(박달)’ ‘君(임금)’ 이라고 표기하여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단군’이라는 칭호와 발음이 생겨난 것이다.
예수원 설립자 토레이(R. A. Torrey 대천덕)는 셈의 세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이 단군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제시한다:
“…창세기 10:25에 ‘에벨’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에게는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벨렉’이란 ‘나뉘어진다’는 뜻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욕단’은…알모닷, 셀렙 등 여러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편 산으로 갔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동방의 산지대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족속들이기 때문에 동방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욕단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욕단이 혹 단군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은 할 수 없지만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가 비슷한 연대입니다.”(대천덕,「우리와 하나님」, 도서출판 예수원, 1988, 163쪽)
그의 추측은 옳았다! 우리 알이랑민족사를 시작한 단군은 바로 성경상의 욕단이었다. 여기에서 그 타당한 근거를 살펴보도록 하자.
단군 칭호의 의미와 유래
‘단군’이라는 칭호는 그 이름 자체에 이 인물의 성격이 어느 정도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단군의 정체를 밝히는데 ‘단군’이라는 칭호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므로 단군 칭호의 의미와 유래가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단군 칭호의 의미와 유래라고 할 때에는 한자(韓字)로 표현된 ‘단군’의 본래 우리말이 어떤 것이며, 그 우리말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어원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것들이 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단군’의 ‘군’은 ‘임금’을 표시하는 우리말의 한자 의역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단 ‘단군’의 의미를 복원해 보면 ‘단 임금’으로 된다. 그러면 ‘단’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군’의 ‘단’자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에서 ‘제단 단(壇)’자로 쓴 외에 그 밖의 단군신화들에서는 모두 ‘박달나무 단(檀)’자를 썼다. 「삼국유사」정덕본 이전의 조선왕조 초기의 다른 여러 책들에서는 단군에 대하여 전하면서 ‘박달나무 단’자를 썼고, 단군신화를 전한 「삼국유사」이외의 모든 기록에서도 한결같이 ‘박달나무 단’자를 썼다.
‘박달나무 단’자는 그 자체만으로 ‘나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에서는 ‘단’자 밑에 또 ‘나무 수(樹)’자를 덧붙여 ‘나무’라는 말을 겹말로 중복시킨 것이 나온다. 바로 ‘신단수(神檀樹)’이다. 이것은 원래의 설화에 있었던 ‘박달나무’란 말의 ‘박달’만을 ‘단’자로, ‘나무’를 ‘수’자로 의역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단군’의 ‘단’자가 우리말의 ‘박달’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단군은 ‘박달임금’이라는 말이 된다.
‘박달’의 ‘달’은 ‘아사달’ 할 때의 그 ‘달’인데, ‘땅’이라는 말이다. 양달이 양지요, 음달이 음지요, 빗달이 비스듬한 땅이다. 이렇게 ‘달’은 ‘땅’이다. ‘박달’의 ‘박’은 ‘밝’과 통한다. 오늘날에도 일상대화에서 ‘밝’의 받침 ‘ㄹ’이 생략되어 ‘밝다’가 ‘박다’로 발음된다. 이것은 우리말에서 겹자음 받침을 가진 경우 앞의 겹자음 하나가 발음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음운법칙으로 되는 것과 관련된다(예: ?다→점다, 굵다→국다, 밟다→밥다, 진흙→진흑). 이로서 ‘박달’의 ‘박’이 ‘밝다’의 ‘밝’과 통하며, 그에 따라 ‘박달’을 ‘밝달’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군’은 ‘밝달임금’이라는 말이다. ‘밝달’은 ‘밝은 땅’이라는 뜻이다. 즉 단군(檀君)은 ‘밝은 땅의 임금’ 곧 ‘배달임금’이란 글자이다. ‘밝달(족) 임금’의 이두식 표현이 ‘단군’이라는 칭호인 것이다. 그것을 보기 쉽게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 밝달(檀): 밝은 땅
* 밝달임금= 檀君 = 밝은 땅의 임금 = 朴達那羅任儉 = 배달임금
단군은 '밝달임금'이란 보통명사
단군은 ‘밝달임금’또는 ‘배달임금’ 등으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우리 동방(조선) 고유의 호칭이었다. 이 토박이말을 후세에 한자(韓字)로 의역(意譯)하여 ‘檀’(박달) ‘君’(임금)이라고 표기하여 놓았기 때문에 비로소 ‘단군’이라는 칭호와 발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단군은 ‘밝달나라의 임금’(檀國의 君長: King of Bakdal)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 명사이다. 따라서 ‘단군’은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후손들 모두가 단군이라고 불리어 왔다. 그래서 단군이라는 한 임금이 1000여 년간 고조선을 통치한 것처럼 후세에 와전되어 버린 것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란 책에선 말하기를 “밝달(檀)은 배달(倍達)이요, 국(國)은 나라(那羅)요, 군(君)은 임금(任儉)이다” 하였다.¹ 와유록(臥游錄)이란 책에선 말하기를, “한밝산은 세속에서 박달(朴達)이라 일컫는데, 세상에서 밝달임금(檀君)이 내려오신 땅이라 이른다” 하였다.² 신단실기(神檀實記)란 책에서 말하기를 “밝달임금(檀君) 때에는 사람들이 밝달(檀)을 배달(倍達)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음이 구을러 박달(朴達)이 되었다” 하였다.³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선 말하기를, “배달(檀)은 나라 이름인 까닭에, 그 자손들은 모두 배달 임금(단군)이라 한다” 하였고,⁴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선 “단군이라 일컬음은 곧 배달 나라 임금의 칭호인 까닭에, 그 나라를 잇는 임금들(嗣君)을 모두 단군이라 일컫는다”라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때까지의 고찰로써 성경상의 한국인의 조상 ‘욕단’이 다름 아닌 민족시조 ‘단군’이라고 충분히 단정할 수 있다. 참으로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 홍수 후 알이랑 고개를 넘어 사람들을 이 동방의 땅 끝, 밝의 땅으로 인도해 온 우리 ‘밝달겨레’의 조상이라면, 사람들은 그를 부르기를 분명히 ‘밝달(나라) 임금’이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역사적 인물 욕단이 우리 배달겨레의 시조 '단군'이다.
단군의 정체를 정확히 해명하는 작업은 아직까지 학계에서 난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안다면 그것은 절대로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무슨 대단한 일도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이다. 우리 알이랑민족의 조상 단군은 의심의 여지 없이 성경상의 욕단이다.
[9]밝달임금(단군) 욕단[2]
성경상으로 볼 때 대홍수 후 알이랑 고개를 넘어 동방으로 와서 배달나라를 세운 우리 겨레의 시조 단군은 셈의 현손(玄孫) 욕단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과 욕단의 연대가 같기 때문에 더욱 신빙성이 있다.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기원 전 2333년이라는 설이 통용되어 왔다. 이 기원 전 2333년 설은 고려의 13세기 말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인데, 그때 이승휴는 자기 저서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를 지나의 요(堯)임금 건국 연대와 똑같이 무진년(戊辰年)으로 본 것인데, 그것은 실제 우리나라의 그 어떤 구체적인 자료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당시 요임금을 지나 한족의 시조로 보면서 -요임금은 동이족이었다- 그의 건국 연대가 우리 단군의 건국 연대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그런 논법을 세웠던 것이다.
건국시조 단군 때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후세에 살던 우리 선조들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연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고, 다만 단군이 매우 오랜 옛적에 나라를 세웠다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의 건국 연대를 자기들이 알고 있던 가장 오랜 옛 임금에 비교하여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이요, ‘요와 같은 시대’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실제 단군의 조선 건국 연대는 그보다 더 앞선 연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 건국연대를 기원전 3000년까지 소급해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단군의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삼국유사」등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와 동시에 즉위해 나라를 건국했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요와 순은 이상적인 통치시대를 펼친 인물의 대명사격이다. 특히 요는 공자가 성군으로 추앙하던 인물이다. 바로 그러한 요임금과 단군이 동시대에 즉위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즉 우리나라가 차이나와 대등한 시기에 건국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을 알리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부 학자들은 단군의 즉위 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내세우고자 했던 의식 세계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군의 시대와 욕단의 시대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통용되고 있는 주전 2333년인 단군기원이 성경상의 욕단의 연대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역추적하여 계산해 보면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타락 원년(元年)은 B.C. 4114년이 된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타락을 계속해서 온 땅이 강포와 죄악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큰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그 홍수가 발생한 연대가 B.C.2458년이다. 셈의 증손자 에벨은 B.C.2391년에 태어나 B.C.2357년 욕단의 형인 벨렉을 낳았고, B.C.1927년까지 살았다.
이 성경 연대는 성경 연구가에 따라 연대 계산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좀더 위로 소급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정확무오한 연대 산출이 아니라(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욕단의 연대가 바로 단군 시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백두산정에서 창조주 하느님께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조선을 건국한 단군이 성경상의 욕단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람 욕단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사실은 조선이라는 국명에서 드러난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원래 ‘주신’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의 지나(支那)식 표현이다. 한국인의 선조인 욕단은 그가 도달한 시베리아와 만주 대륙에 이르는 드넓은 동방의 새 땅을 하느님이 ‘주신’ 땅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을 ‘주신’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주신’이라는 말의 옛 음이 지나의 옛 글에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州愼), 조신(鳥愼), 주신(珠申), 조선(朝鮮)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 것이다. 즉, 한민족 최초의 나라 이름인 ‘조선’의 본 뜻은 ‘주신’이라는 순 우리말인 바, 하느님께서 그 땅을 ‘주신’의 ‘조선’으로서 ‘하느님이 주신 땅’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본주의적 국호인가?
흔히 아침 조(朝), 빛날 선(鮮)에 견주어 ‘아침 해가 빛난다’는 뜻에서 ‘조선’이라는 국호가 생겼다 하나 조선이라는 국호는 상형문자가 생기기 전에 이미 있던 국호이다. 그렇다면, ‘조선’이라는 말은 우리의 고대어로 무엇을 뜻하였겠는가? 바로 그것이 ‘주신’인 것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은 숙신(肅愼)이라고 하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숙신’의 옛 이름을 ‘주신(珠申)'이라고 하고, 주신은 소속 관경(觀境)을 가리키는 만주말이라고 했다. 이는 곧 지금의 말로 일정한 지역의 땅, 영토를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조선의 원의(原義)가 있다. 즉 ‘주신’이 ‘숙신’의 어원이요, ‘조선’의 어원이기도 한데, 우리가 터 잡고 사는 땅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라고 ‘주신(賜)’ 땅이라는 뜻의 ‘주신’인 것이다.
또한 욕단은 조선을 건국한 역사적인 그 날을 ‘하늘 문이 열렸다’, 즉 개천(開天)이라고 했다. 아마도 욕단이 조선을 건국하기 전 먼저 백두산 산정에서 하느님께 단을 쌓고 경건히 천제를 드렸을 때, 아라랏 산정의 노아의 제사를 ‘하늘 문을 여시고’ 응답하신 하느님께서 욕단의 제사도 그렇게 열납하신 것 같다. 그렇기에 나라를 세운 개국일을 ‘개천’(開天), 즉 ‘하늘이 열렸다’고 했을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개국일(開國日)을 통상적으로 ‘건국기념일’이라고 부르지만,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 한국인은 오늘날까지 ‘개천절’(하늘 문이 열린 날)이라고 부른다. 이 얼마나 선민(選民)다운 특별한 건국기념일의 이름인가! 이 같은 명칭은 세계에서 배달민족과 유대민족 외에는 없는 특이한 사항이다.
한국인의 조상 단군이신 욕단
창세기 10:2에 보면 백인종의 조상인 야벳의 아들들 가운데 두발(Tubal)과 메섹(Meshech)이라는 인명이 나온다. 서구 성경학자들이 쓴 책들을 보면 오늘날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Moskva)라는 지명은 야벳의 아들 ‘메섹’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메섹’이 그곳으로 가서 정착했기에 그의 이름이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랄산맥 동쪽에는 ‘토블스크’(Toblsk)라는 지방이 있는데, 그것 또한 야벳의 아들 ‘두발’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설명한다. ‘두발’이 그곳으로 가서 살았기에 그의 이름을 지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서양의 성경 주석가들이 무슨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의 모스크바나 토블스크로 가서 ‘메섹’과 ‘두발’을 만나고 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헌상의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메섹은 모스크바와, 두발은 토블스크와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악착같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그대로 수용한다. 왜냐하면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람 욕단이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를(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 넘어 동방으로 와서 밝달나라를 세운 밝달족의 우두머리였는데, 그를 ‘단군’이라고 단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단군이란 밝달임금의 이두식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욕단의 목적지 ‘스발’(새팔)은 광명의 본원지인 ‘새밝나라’, 곧 ‘새벌’(시베리아~만주)이다. 게다가 욕단의 연대와 단군의 연대는 같은 시대이다. 따라서 성경상의 한국인의 조상 욕단을 우리 한민족의 시조 단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결코 억측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타당한 결론이다.
그렇다! 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은 우리 알이랑민족사를 시작한 한국인의 조상 단군이시다. 알이랑민족 한국인의 기원은 셈의 가계, 그 중에서도 약 4300여 년 전에 동양으로 이주하여 우리 배달 동이겨레의 선조가 된 욕단의 후손, 곧 단군의 자손이다. 그리하여 동방의 한국인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또 하나의 선민인 것이다. 에벨의 혈통인 욕단의 후손은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손강림(天孫降臨)의 모티브가 된 것이다. 즉, 우리 한국인의 계보가 셈→아르박삿→셀라→에벨→벨렉과 욕단으로 이어지는 ‘천손민족’이라는 사실이 신화에 반영된 것이다. 건국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건국사실의 신화적 반영이다. 따라서 건국 역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史料)의 하나가 된다.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동방 ‘밝의 땅’에 당도하자 맨 먼저 백두산 산정에 올라 창조주 하느님께 천제를 드리고 조선을 건국한 역사적 인물로서, 성경상의 한국인의 기원은 노아의 작은 아들 셈의 현손(玄孫) 욕단, 즉 단군이다.
나무엔 뿌리가 있듯이 사람에겐 조상이 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생길 수 없을 뿐더러 잘 발육하기도 어렵듯이 조상 없는 사람은 생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잘 발전하기도 어렵다. 개인과 씨족에 시조(始祖)가 있듯이 민족에게도 시조가 있다. 우리 배달민족(檀族=밝달민족)의 시조는 단군이신데, 이분을 한자(韓字)를 빌어 이두문(吏讀文)으로 단군왕검(檀君王劍)이라 적고, 또 이 분을 간단히 ‘배달임금’(檀君) ‘한배검’ ‘단군’ 또는 왕검(王劍)이라 하였다. 그가 바로 대홍수 후 알이랑 고개를 넘어 동방의 땅 끝 ‘밝의 땅’으로 천동하여 밝달나라를 세운 셈의 현손(玄孫) 에벨의 둘째 아들 ‘욕단’이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 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 아바님은 단군이시니
-정인보 작시-
[10]복음의 마지막 주자 동방의 독수리
성경상의 기원으로 볼 때 한국인과 유대인은 뗄 수 없는 유대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조상 ‘에벨’(셈의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로부터 분리된 형제족속이기 때문이다(창 10:21; 25; 30, 11:10~32). 에벨의 큰 아들 벨렉의 후손이 유대민족이요(창 10:21; 25; 11:10~30), 알이랑(하느님과 함께) 고개(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방으로 천동한 작은 아들 욕단의 후손이 우리 한민족이다(창 10:21; 25; 30).
그런데 성경은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고 말씀한다. 형제란 자기의 형이나 아우가 위경에 처했을 때 끝까지 돕는 존재란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 하느님은 유대민족을 구원할 도구로 우리 한국 백성을 사용하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구약성경 이사야서가 말세에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전할 자들이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이다.
여호와 하느님은 마지막 때에 알이랑 민족 한국인으로 하여금 유대민족에게 능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어(롬10:10~15) 마침내 온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게 하실 것이다. 바울이 예언 한 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26)는 약속은 그렇게 성취될 것이다.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이사야 46:10-13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동방의 먼 나라’에서 시온으로 사람을 부를 것이라고 분명히 예언하고 있다.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12.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 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먼저 12절 말씀을 살펴보자.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여기에서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뜻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참조 10:2~4). 또한 “마음이 완악하여”란 말씀은 유대인들이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하).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느니라”(롬 11:7). 즉 12절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유대인들아 나에게 청종하라”는 뜻이다.
왜 하느님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게 청종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13절에 있는데,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여기에서 ‘나의 의’란 ‘하느님의 의’로서 ‘복음’을 뜻 한다: “복음에는 하느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즉 12~13절 전체의 뜻은 하느님께서 마음이 완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까이’ 가져가시어 그들을 구원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12절에 있는 “의에서 멀리(far) 떠난 너희여”라는 구절과 13절에 있는 “나의 의를 가까이(near) 할 것인즉”이란 구절은 ‘대구’를 이루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떻게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게 하실 것인가? 그 구체적인 하느님의 계획이 11절 말씀이다: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여기에서 ‘동방(the east)'이란 말과 ‘먼 나라(a far-off land)’라는 말, 두 곳에 밑줄을 치라. 하느님은 ‘동방의 먼 나라’에서 그분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냥 ‘동방’이 아니고 ‘먼 나라’ 동방이다! 즉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가 뜨는 ‘동방’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는 ‘멀리 떨어진 땅'(a far-off land)에 있는 동방의 나라다. 그곳은 어디인가? 한반도, 즉 코리아이다!
하느님이 ‘동방의 먼 나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중심해서 ‘정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가장 먼 땅’에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게 해석상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가장 먼 땅을 ‘땅 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행 1:8, 사 41:9). 세계지도를 펴놓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정동쪽’에 있는 땅 가운데 가장 먼 땅, 즉 ‘땅 끝’이 어디인지 찾아보라. 바로 극동의 한반도이다! 그러니까 11절이 의도하는 ‘동방의 먼 나라’는 우리나라를 지목한 것이다!
지나(支那=중국)는 본문이 의도하는 ‘동방의 먼 나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나는 영토가 광활하여 서쪽 국경이 이란과 국경을 같이 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동부 국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거리라면 이스라엘에서 결코 ‘먼 땅(a far-off land)’이라고 할 수 없다. 인도 역시 ‘동방의 먼 나라’로 해석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도는 국토의 대부분이 동방보다는 남방으로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처럼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땅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바사의 고레스 왕 때에 성취되었다고 해석해 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0절을 보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10절 이하의 예언은 문맥 속에서 해석할 때 ‘종말’에 성취될 예언인 것이다. 바로 알이랑 민족 우리 한국인을 통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 본문 11절이 의도하고 있는 ‘동방의 먼 나라’는 욕단의 후손이 살고 있는 나라, 코리아로 해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그들을 일컬어 ‘독수리’를 부른다고 말씀 하시는가? 어떤 하나의 성경 구절은 반드시 문맥 속에서 해석 되어져야 한다. 그 해답은 13절에 있다: “…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은 ‘빨리’ 구원 하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구원하시기 위해 시온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빨리’ 가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독수리’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큰 날개를 가지고 높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누구보다 빨리 이동하기 때문이다(애 4:19).
하느님은 ‘합당한 때’를 지키신다. 그러므로 때가 차면 ‘서둘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때에 하느님은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을 독수리처럼 빠르게 동방의 먼 나라, 즉 극동의 대한민국에서 시온을 향해 달려가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 52:7~10은 바로 이것을 예언한 것이다.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 다운고
여기 이사야 52장 7절에 기록된 ‘좋은 소식’ ‘평화’ ‘복된 좋은 소식’ ‘구원’ 이라는 말들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로마서10:10~15에 인용 되었다. 거기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전도자들이 가야 한다면서 이사야 52:7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구절은 앞서 설명한 이사야 46:10~13과 병행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도 역시 주석가들은 바사의 고레스 왕 때에 성취된 예언이라고 설명해 왔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을 해석할 때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느 하나의 성경 구절은 반드시 전후 문맥 속에서 해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이 7절 말씀을 문맥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면, 이것은 결코 과거에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제 10절을 살펴보자.
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박윤선 박사는 이 구절에 있는 “땅 끝까지도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는 말씀을 “이는 신약시대의 만민구원운동을 예언한다”라고 설명한다(박윤선 · 성경주석 이사야서). 그렇다! 모든 땅 끝까지 구원을 받는 것은 신약시대의 일이다. 물론 여기 10절에 언급된 ‘땅 끝’은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우선적으로 7절에 있는 ‘시온’, 즉 ‘예루살렘’을 뜻한다.
이것은 문맥상으로도 그렇지만 복음 전도의 마지막 과제로서의 땅 끝이 지리적으로는 예루살렘이요, 민족적으로는 유대 민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롬 11:25-26). 예루살렘에 다시 복음이 들어가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구원을 받을 때, 비로소 “모든 땅의 끝들이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10절의 예언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야 52:7~10은 신약시대에 성취될 예언인데, 그것은 말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는 전도자들의 아름다운 발길에 대한 회화적 묘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복음전도자들은 어디로부터 시온을 향해 가는 자들인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 앞서 살펴본 이사야 46:10~13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은 동방의 먼 땅, 즉 극동의 대한민국에서 시온으로 달려가는 복음전도자들인 것이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한국교회 성도들은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길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라는 복음성가를 부를 때, 그 가사에 등장하는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이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달려갈 욕단의 후손 우리 한국인 전도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자각하며 노래해야 할 것이다.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말세에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리라는 예언은 이사야 41:25~27에도 기록되어 있다.
25.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같이 밟을 것이라
26.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우리에게 고하여 알게 하였느뇨 누가 이전부터 우리에게 고하여 이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뇨 능히 고하는 자도 없고 보이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27.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먼저 27절 말씀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하느님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기쁜 소식’은 앞서 설명한 이사야 52:7의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 ‘좋은 소식’과 같은 히브리 원어 ‘basar’를 사용하고 있다. ‘바사르’는 현대 히브리어로도 ‘복음’이라는 뜻이다. 52:7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10~15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전도자가 가야 한다는 것을 교훈할 때 인용한 말씀이다.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공포하며 “네 하느님이 통치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 이미 도래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 위하여 산을 넘는 그 아름다운 발길은 바로 ‘동방의 먼 나라’ 사람들의 발길인 것이다(사46:10~13). 그 ‘동방의 먼 나라’는 물론 욕단계 선민의 나라인 우리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본문 25절에서도 역시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은 ‘해 돋는 곳’ 즉 ‘동방’에서 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북방에서 일으키며 그는 해 돋는 곳에서 오리라. 그는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 한글 개역성경은 25절 첫 부분이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북방에서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방에서 ‘일으키며’라고 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해 돋는 곳에서 ‘온다’는 동사를 3인칭 단수 남성을 받도록 사용하였을 뿐이므로 그를 반드시 사람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one)’로 번역하였다: “I have raised one from the north, and he shall come from the rising of the sun."(KJV) 따라서 이 ‘하나(one)’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나라’라는 뜻의 ‘고이(goi)’도 히브리어에서 3인칭 단수 남성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 25절이 말하는 ‘북방’이란 어디인가? 그곳은 ‘하느님의 처소’를 뜻한다(시 48:2, 사14:13, 시 75:6-7). ‘해 돋는 곳’이란 어디인가? 물론 그곳은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할 자들이 출동하는 땅이다. 바로 이사야 46:11에서 예언한 ‘동방의 먼 나라’ 곧 극동의 한반도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 해석의 기본 원리인 “성경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보라”(27절)고 한 말씀에 있어서 ‘그들’이라는 것이 누구를 의미함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바로 알이랑 민족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를 바사의 고레스로 보는 주석가들이 많다. 이러한 견해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왜냐하면 고레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닌데, 25절의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점이다. 고레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자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신 · 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믿음을 가지고 여호와 하느님을 찾고 따르며 예배하는 자를 말한다(창 4:26, 사 64:7, 행 2:21). 따라서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고레스가 될 수 없다. 본문이 의도하는 “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하느님께서 말세에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도록 “동방의 먼 나라”에서 보내시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통치자를 마치 회반죽을 이김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같이 하리라”(25절 하)고 하였으므로, 그는 강하여 군사적으로도 이스라엘을 도울 수 있는 자이다. 사탄의 한결같은 목표는 유대인을 이 땅에서 전멸시키고 이스라엘 나라를 없애버리는 것이다(시 83:3~4). 만약 어떤 나라가 사탄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이 구원코자 하시는 이스라엘을 히틀러의 독일이나 후세인의 이라크처럼 멸절시키려고 애쓴다면 그 나라는 신적인 징벌이 불가피하다.
바로 그 악한 나라들을 하느님은 알이랑 민족 대한민국의 군대를 동방에서 보내셔서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계시를 통해 장차 통일 대한민국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때에 우리나라는 주님의 은총으로 열방에 정의를 펴며 복음을 전하는 부국강민(富國强民)의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다.
한 민족(a nation)이 네게 달려올 것이니
하느님께서 말세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하도록 동방(the east)에서 보내실 백성은(사 46:10~13, 41:25~27, 52:7) 여러 민족이 아니라 ‘한 민족(a nation)’ 이라는 사실이 이사야 55:1~9에 예언되어 있다.
하느님은 먼저 1~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느님 앞으로 나아와 청종하라(listen to me ? NIV)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죄값을 치르셨으니 돈 없이 값없이 와서 거저 구원을 받으라는 것으로서(1절), 이사야 46:12의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자들아 내게 청종하라(listen to me ? NIV)”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그들의 혼이 살 것이며, 다윗에게 약속하시고 맺으신 영원한 언약의 혜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와 영원한 언약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며(삼하 7:14상; 히 1:5하),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이루신 새 언약이다(렘 31:31, 겔 36:24~27). 따라서 그것은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속죄 사역으로써 이미 성취가 된 것이다. 다만 현재 유대인들이 마음이 완악하여 메시아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음으로 새 언약의 효과 밖에 놓여 있으나, 그들도 장차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을 받으면(롬 11:25~27) 그 영원한 언약의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4절에서 말하는 ‘그’는 세상의 명령자와 인도자가 되시는 메시아를 뜻한다. 그런데 5절에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예언되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하느님의 구체적인 계획이다.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나라(a nation)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원문은 ‘못하던’이다) 한 나라(a nation)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느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사 55:5)
이 구절은 이사야 41:25~27, 46:10~13, 52:7과 병행구절로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민족(a nation)’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그 이방의 나라를 부를 것이며 그 ‘한 나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복음을 전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구절 가운데 있는 ‘나라’라는 말은 한글 개역 성경에 그냥 ‘나라’로 번역되어 있어 단수, 복수의 개념이 애매하나 히브리 원문에서는 복수형인 ‘고임(goim)’이 아니라 단수형의 단어 ‘고이(goi)’로 되어 단수의 ‘한 나라(a nation)’로 번역해야 정확한 의미가 된다. 영어 성경 NASB는 단수로 번역해 원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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