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극락전 또는 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 무량수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 7년(1016)에 고쳐 지었으며 공민왕 7년(1358)에 외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서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수리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중간이 두껍고 아래와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이어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고려 시대 사찰 건축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국보 18호.
부석浮石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깨달음을 얻고자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마음을 두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해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많은 이교도가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神龍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래서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영원토록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깃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 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석등은 불을 켜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돌로 만든 등으로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한다. 보통 대웅전이나 탑 앞에 석등을 세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얹혀 있는 구조이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맨 아래에 네모난 바닥 돌이 있고 그 위에 3단의 받침돌, 화사석, 지붕돌이 차례로 놓여있는 모습이다. 바닥 돌의 옆면에는 꽃 모양의 장식을 새겼다. 바닥 돌 위에 있는 아래받침 돌에는 큼직한 8개의 연꽃잎을 표현하였다. 아래받침 돌 위에 놓인 팔각기둥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인다. 팔각기둥 위에 있는 윗받침 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8개를 새겼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만들었고 창이 없는 나머지 4개 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이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석등 앞에는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하는 향로를 놓았던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 시대 석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로서 각 부분의 정교한 조각 솜씨와 전체적인 비례감이 매우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화려한 듯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의 석조 예술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석등이다. 국보 17호.
부석사 삼층석탑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을 말한다. 한국의 석탑은 보통 바닥 돌의 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의 탑신부, 머리 장식인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은 2단의 바닥 돌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이다. 기단부의 바닥 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 위에 놓인 지붕돌은 밑면 받침을 5단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상륜부의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1956년에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이때 사리를 넣어 봉안하는 공간인 사리공舍利孔을 확인하였으나, 사리기舍利器는 없었다. 다만 기단부에서 소형 철제탑, 불상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탑은 법당 앞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석탑은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어 이채롭다. 보물 249호.
부석사 조사당
조사당祖師堂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법을 이어 온 조사 스님 또는 사찰 창건주 등을 기리려고 만든 전각으로 조사전祖師殿 또는 조당祖堂이라고도 한다.
부석사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처음 지은 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10에 단청丹靑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우왕 3년(1377)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21년(1490)에 고쳐지었다.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벽 안쪽에는 고려 후기에 그린 벽화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을 수리할 때 벽화를 떼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는 국보(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사찰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제석천·범천·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뜬 그림을 복원해 두었다. 조사당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사찰 건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국보 19호.
조사당 선비화
선비화禪扉花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擢玉森森倚寺門(탁옥삼삼의사문)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曹溪水(장두자유조계수)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빼어난 옥 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에 비꼈는데,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내렸다 스님이 일러주네.
석장의 끝에 혜능 선사 조계의 물 닿아있는가,
천지의 비와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