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의 혈통적 DNA, 그것이 알고 싶다.
한말 의병의 주축은 호남 의병이었다.
지난 11월 29일, 전남 영광문화원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참가했다. 내가 맡은 토론 주제는 “영광 내륙지역과 연해 지역의 한말 의병 활동”으로 (사)노령역사연구원 학술이사 김상욱 박사의 발제였다. 솔직히 한말 의병에 대해 알량한 지식으로 토론을 한다는 게 가당치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다. 이순신을 연구하며 틈틈이 공부했던 임란 의병을 배경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결과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말 의병의 주축은 호남 의병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임란 의병의 후손이었다.
발제자는 의병 활동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홍영기의 “의병이란 외환(外患)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초개처럼 버리고 무력 투쟁을 전개한 사람이나 집단을 의미한다.” 박은식의 “의병은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군이다” 또 “대체로 각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는데, 아직 상세한 사항을 알 수는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
박은식의 전라도 의병이 가장 많았다는 주장은 일제의 통계로 확인되었다. 한말 후기 의병인 정미의병 당시 1908년 전라도 의병이 일본 군경과 교전한 횟수, 교전에 참여한 의병 수는 전국 대비 25%와 24.7%였고, 1909년 전국 대비 47.2%와 60%를 차지하고 있다. 즉 1909년 전국 의병 수는 38,593명인데 이중 전라남도 17,579명(45.5%), 전라북도 5,576명(14.5%)으로 전라도 의병의 총수는 23,155명, 전국 의병 수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한말 호남 의병 활동’은 가히 ‘한말 조선 의병 활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제자의 마무리는 다음과 같았다. “일제는 영광을 포함한 호남 의병을 일소하기 위해 1909년 9월부터 55일에 걸쳐 잔혹한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후 이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 기간에 수천 명의 포로와 수백 명의 호남 의병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크게는 민족의 국권을 지키고 작게는 지역의 향토를 방어하고 수호하겠다는 호남 의병의 항일 투쟁은 지속해서 계승되어 그 뒤 3.1운동에서 발휘되었다.”
과연 한말 의병은 자발적·독자적·독립적이었는가?
의병을 연구한 최영희는 “의병은 민중들이 스스로 그 밑으로 모여들어 전투를 위한 자치 집단”이라 했고, 또 발전된 개념으로 “의병이란 「병(兵)」과 「량(糧)」을 스스로 감당하고 「국가를 위해 토적(討賊)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의병이란 ‘외적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병력과 군량을 감당하는 자치적 집단이라는 뜻이었다.
조원래는 ”의병은 조명(朝命)을 기다리지 않고, 비(非) 관인층(官人層)이 자발적으로 성군(成軍)하여 자력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민병(民兵)“으로 파악하면서 ”임란 초기의 의병은 자체에서 병기를 마련해 쓰고 병량도 스스로 해결하여 나라를 위해 토적(討賊)하는 집단으로 보았다.고 했다.
토론자 역시 임란 의병에 대한 인식과 개념은 대략 이런 범주에서 이루어졌다. 즉 의병의 상층부는 사족(士族)이자 지주(地主)이며, 하층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향촌의 농민(農民)이나 천인(賤人)이라 인식했다. 의병대장은 관군에서 벗어난 산군(散軍) 또는 전직 관리나 지방 호족(豪族) 유생들이고, 의병은 대략 농민이나 하층민의 자발적 참여라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한말 의병도 임란 의병과 같은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가?
임란 시 경상도 의병은, 국가권력이 상당히 개입한 흔적이 보인다. 예컨대 곽재우(郭再祐)를 제외한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 봉기에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권유가 있었다.
임란 시 의병장을 필두로 의병 조직은 자체적인 지휘체계를 보였으나 의병장이 관료로 임명되었고, 상당수 의병이 관군조직으로 편입되었다.
임란 시 의병 조직의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는 통로로써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조직을 적극 활용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상은 크게 달라 의병부대들은 군량과 무기가 부족해 큰 고통을 겪었고, 이 과정에서 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임란 의병들이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방법은 조정의 지원, 재지 사족의 지원, 초유사의 도움, 기부, 관으로부터 민간 재산의 이용권 획득, 자체 조달 등이 꼽히는데 이 중 관의 지원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1990년대 이후 의병의 주력과 구성원에 대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조원래는 “의병과 관군의 하부구조에 차이가 없었다고 하면서, 관인(官人)이 소모(召募)하면 모두 관군이 되고, 민간에서 성군(成軍)하면 모두 의병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수건은 병농일치와 국민개병제를 이상으로 추구한 조선에서 처음부터 관군과 의병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다고 전제하면서, 처음으로 산졸(散卒)의 존재를 지적했다. “열읍(列邑)의 의병장들이 당초 창의할 때 동원한 가동(家僮)이나 향리 장정(壯丁)은 그 수가 적을뿐더러,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각 의병장들은 의병진을 갖추는 과정에서 관군으로부터 이탈된 포장(逋將)·산졸(散卒)들을 규합, 초집(招集) 하는 데서 병력의 확보는 물론, 의병부대로서의 전투력을 발휘”했다고 주장했다.
정해은은 “의병이란 엄밀한 의미에서 관군(官軍)과 대비된 사병(私兵)으로, 국가의 공식 지휘체제에 속해 있는지 여부로 구분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군사 조직이 국가의 공식적인 지휘계통에 속해 있느냐의 여부가 관군과 의병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한말 의병의 모집 활동은 자발적이었는가, 조직 구성은 독자적이었는가, 병량 조달은 독립적이었는가 등등, 많은 숙제를 안았다. 하나하나 풀어야 할 과제이다.
호남 의병의 주축은 임란 의병의 후손이었다.
발제자는 호남 의병은 호남지역을 넘어 타지역의 의병 항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전라도는 한말 의병 활동의 중심 무대였다고 했다. 토론자 역시 임란 의병과 이순신의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연구하면서, 구국의 선봉에 섰던 호남인들의 처절한 항쟁과 희생, 그 숭고한 발자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발제자에 의하면 한말 호남 의병의 주축 인물은 다음과 같다.
호남지역 전기 의병은 을미사변 후로 호남 창의 총수로 활약한 장성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서 비롯되었다. 기우만은 19세기 호남 유학의 거장으로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킨 노사학파의 종주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였다. 기우만에 동조하는 기정진의 제자들이 장성 의병을 주도했다.
호남지역 중기 의병은 을사늑약 후로 전기 의병처럼 기우만의 영향이 컸다. 기우만,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등 전기 의병을 주도했던 이들이 다시 창의를 모색했기 때문이다. 최익현(崔益鉉), 백낙구(白樂九), 양한규(梁漢奎), 양회일(梁會一) 등이 가세했다.
호남지역 후기 의병은 정미조약 후로 1907년 10월에 봉기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주도한 기삼연이 주도했고, 김준(金準, 金泰元), 김율(金律) 형제, 김동신(金東臣),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日), 안규홍(安圭弘), 이석용(李錫庸) 등이 함께 했다.
영광지역 의병봉기의 선각자는 김용구(金容球)였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다음 해 1906년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무력 활동을 동반한 강력한 무장투쟁을 계획하였고, 김용구는 장성의 기삼연을 만나 방향과 기반을 조성하며 일심계(一心係) 창설을 주도했다. 일심계는 총 64명으로 이중 영광 출신이 38명, 무장 10명, 장성 8명, 나주 5명, 고창 2명, 창평 1명으로 영광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을 중심으로 한 의진(義陳) 간 연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구성이었다. 예컨대 법성포 주재소를 습격할 당시에는 기삼연, 김준, 이남규, 이대극 등이 연합했다. 이러한 작전은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순국할 때까지 지속했다.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일본인은 물론 이들에게 앞장선 한국인 밀정까지 처단하여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다.
과연 호남 의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디서 왔는가?
임란 의병에서 감명을 주는 이는 단연 호남의 수창(首倡)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다. 식년 문과 장원급제자로 나이가 60이었다. 정3품 통정대부, 동래부사까지 역임했던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高因厚)가 1592년 7월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장남 고종후(高從厚)가 2차 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과연 이들의 충의 정신은 어디서 왔을까? 아버지 고경명은 장원급제자, 장남 고종후와 차남 고인후도 병과 급제자로서 호남 엘리트 인재들의 순국이었다. 장흥고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감탄하는 것은 이들의 3백 년 후손이 한말 의병으로 일제에 항전하다 연곡사 전투에서 전사한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이다.
또 다른 호남 의병은 전라우의병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다. 해주최씨 일가의 의병 활동 또한 뜨거웠다. 최경회는 26세가 되던 해 광주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찾아가 두꺼운 학연을 맺는다. 기대승은 최경회에 5년 연상에 불과하지만 젊은 나이에 성리학의 깊은 경지를 열어놓아 이미 그 학명(學名)이 자자했고 그 무렵 고경명과 같은 호남의 소장 명유(名儒)들이 그의 문하에 출입하고 있었다. 따라서 최경회 역시 기대승으로부터 학문적 사상적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고 보인다.
기대승에게 사사받은 최경회는 진사·생원 양과에 급제한 후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했다. 백형 최경운(崔慶雲)도 진사시 급제했고, 중형 최경장(崔慶長)은 최경회보다 3년 전에 문과 급제했으니 3형제 모두 등과의 영예를 누렸다. 가히 임란 의병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엘리트 가문이었다.
호남 유림의 최고봉으로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 그 행주기씨의 3백년 후손 기정진, 기우만, 기삼연이 한말 의병의 주축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과연 임란에서 한말까지 호남 의병의 혈통적 DNA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에 항거했던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헌, 정문부, 고경명, 김천일, 최경회 등 임란 의병의 역사가 3백 년 후 일제 병탄에서 전국적 한말 의병으로 이어졌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고난의 역사에서 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南韓暴徒大討伐)>로 의병을 토벌하고 몰살했다. 아, 일제의 치 떨리는 만행은 천추의 한으로 몸서리친다.
비통함으로 토론의 일단을 접으며 임실 출신으로 영광을 무대로 활약했던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 대장 전해산(全海山, 全基泓)의 재판정 최후 진술, 일본인 재판장을 향한 일갈(一喝)에 가슴을 여민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떼어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끝-
첫댓글 한말 의병활동
서부경남 최후의 격전지가 하동 고성산성입니다
기정진 선생의 제자 월고 조성가의 일기에도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직계 제자가 무려 600여 명, 그들의 제자까지 포함하면 그의 문하생은 8천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역시 호남 유림의 최고봉 고봉 기대승의 후손입니다. 회장님께서 봉직했던 하동군 옥종면 고성산에 있는 고성산성, 동학농민군 구국 항일운동의 대격전지였던가 봅니다. ^^ 첫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호남 의병(1900년대 초)의 주축은, 임란 의병(1592~1598)의 후손이었다!.
국난때마다 수백년을 이어온 의병의 기막힌 역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단적으로, 임란 때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과 그의 둘째 아들 학봉 고인후, 당시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의병 6천 명을 모집 금산성에서 왜군과 맞섰던 부자가 장렬히 순절했습니다, 고인후의 11대 종손이자 고경명의 12대 후손이 곧 한말 일제가 반드시 잡아 없애야 할 폭도의 수괴라 일컬었던 좌도 의병장 고광순이었습니다. 대단한 혈통적 DNA입니다.
글을 읽는중에도 화가나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왜의 종자, 일본의 근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 개인적으로는 겸손한 척 그러나 민족의 문제, 국가의 문제로 들어가면 예외없이 도적의 근성, 탐욕의 근성, 악인의 근성이 드러납니다. 오죽하면 충무공 이순신이 "통분함이 뼛속 깊이 박혀서 이 왜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였습니다" 라고 .했겠습니까.
임철준
한국의 독립운동가조선 의병장풍천 임씨제천시 출신 인물1851년 출생1907년 사망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임철준
任哲準
자 / 호
증약(曾若) / 순초(筍樵)
본관
풍천 임씨[1]
출생
1851년 11월 13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남면 괴곡리
(現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
사망
1907년 7월 7일[2] (향년 55세)
경상북도 풍기군 죽령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51년 11월 13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원남면 괴곡리(現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괴곡리)에서 아버지 임백간(任百幹, 1811 ~ 1868. 1. 25)과 어머니 평창 이씨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의 제천의진(堤川義陣)에 입대한 뒤 참모장(參謀將)에 선임되었다. 이후 충주부 충주군·단양군·원주군, 강원도 영월군, 안동부 안동군·문경군 등지에서 크게 활약했다. 같은 해 제천의진이 해산되고 의병장 유인석과 그 부대원들이 청나라로 망명하자,
1907년 제천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 의진에 입대해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었다. 이후 충청북도 충주군·단양군·제천군·연풍군·청풍군, 강원도 원주군·영월군·횡성군·강릉군, 경상북도 문경군·안동군·예천군·영주군·봉화군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했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군 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벌해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같은 해 9월 16일 제천군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여 명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생포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불행히도 죽령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2년 9월 8일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 야산에 이장됐다
문득...고조 할아버지(임철준)가 생각나서...인터넷을 검색하니...위의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저는...충청도 의병의 후손입니다....ㅎ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ㅎㅎ
그렇군요^^ 존경합니다.명문가란 바로 일심님의 선조처럼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 전쟁터로 나가 희생하는 가문이라 생각합니다. 훌륭하신 선조님께 존숭의 예를 드립니다.
글 끝의 일갈이 대단히 장엄하군요. 伍子胥의 유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한말 전라도 지방의 의병은 아마 東學의 영향이 컷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전라도 지방에 더 유행하였으니까요..
저희 선조 한 분도 동학접주를 하셨는데, 이장하려고 보니 ○○가 없더라는 끔찍한 이야기를...
1894년 갑오 동학의병이 깊은 뿌라가 되었겠지요. 다음 해 부터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 이후 독립의병까지 울분의 역사 고난의 역사가 한스럽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의병에 대한 상세한 공부도 필요함을 느낍니다.
흔히 알고 있는.. 막연하게 의병 누구누구를 외우는 것보다도 훨씬 더 비중있는 공부가 됩니다.
잊어서도 안되고..잊혀져서는 더더욱 안되는 훌륭한 우리의 선조들을 우리가 자주 되뇌어야 한다는 것을 많이 배웁니다.
그렇습니다 임란의 비극이 한말의 비극에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를 바로 알고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를 익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공부 많이했습니다
늘 열공하시는 노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말 의병의 주축은 호남의병이고 그들 대부분은 임란의병의 후손이라는 글에서 확실히 DNA인자가 영향을 미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라가 어려워지면 나라를 위해 똘똘 뭉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근성도 그 뿌리가 같겠지요. 국가를 위해 자신을 바친 의병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겠어요.
존경하는 진해현감님^^
바로 핵심이고 요지입니다.^^
1월 13일 여수에서 뵈요^^
제가 알기로는 호남의 의병의 시작은 임란전의 정암조광조와 동기였던 15~ 16세기의 인물 학포당 양팽손의 3남 양응정을 주시해야 합니다.
재야 호국의 투톱인 양팽손과 양응정 부자는 자보향리, 향토방위, 유비무환의 체계로 왜침을 준비해 제자들을 양성하며 호국을 강조했다라고 전합니다.
이분의 제자들이 엄청났는데 바로 을묘왜변의 종군 시인이었던 백광훈,최경회,박광전, 최경창, 최경운, 이순신장군의 책사인 안중묵,정운,신립 등 양응정의 자녀와 조카들의 인맥으로 호남의 의병들은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함께 했던 인물들이 양응정의 제자의 제자로 그 맥을 같이 했습니다.
후일에 영조의 스승을 지냈던 덕촌양득중과 민족대표 33인 중 지강양한묵선생께 호국의 DNA가 전달된것 같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좋은 내용을 알려주셨습니다. 더 공부하겠습니다. 정말 호남 의병의 DNA 민족의 표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