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기독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신학을 공부한 신학자로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야스퍼스는 니체 안에서 나타나는 기독교는 야누스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니체는 기독교적인 것을 사랑하면서 배척한다.
그는 예수를 존경하면서 예수를 경계한다.
이것은 그의 실존적 상황, 즉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자로서의 삶에서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정립하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니체가 해석하는 기독교는 좋음과 나쁨을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야스퍼스가 말하고자 하는 니체에게 기독교란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며, 발판이자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기독교는 이상적인 삶 중 내가 실제로 알고 있는 가장 최상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를 추종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부터 지닌 적은 결코 없었다고 믿는다”
“전반적으로 보아 유럽에서 지금껏 성서에 대한 경외감이 유지된 방식이야말로
도덕을 키우고 세련되게 하는데 있어서 가장 최상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유럽이 기독교에 입은 은혜이다”
야스퍼스는 그의 저서에서 기독교에 대한 니체의 긍정적 관점이 있었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에 대해 기생충, 독거미, 위선자들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관점도 역시나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니체는 기독교에 대해 혹독한 평가를 내렸을까? “신은 죽었다”는
문장 때문에 그를 무신론자로 단정 짓는 것은 니체의 철학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평가라고 생각한다. 니체가 신을 왜 죽었다고 말하는가?
니체가 주장하는 신의 사망 원인은 기독교이다. 왜 원인이 기독교인가?
그것은 몰트만이 지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플라톤화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본질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는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상실했다.
오히려 교의적 예수를 만들고 찬양하고 있음을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예수의 어떠한 가르침도 이론화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하거나 전달 가능한 학설의 형태의 가르침을 전달한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 가운데 학설을 전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은 이 땅 가운데 가장 약한 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바치기 위해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우리가 실천하기를 원하신 마음으로 그분의 가르침을 전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실천적 예수보다 교의적 예수에게 집중했다는 것이 니체의 비판이다.
교의적 예수는 진짜 예수를 죽인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죽은 것이며, 이 교의적 예수가 죽어야 진정한 예수가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니체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바로 첫 접촉에서부터 변질된 형태로 자기화 한 채 아주 다른
근원들에 의거해 생존하고 있다고 야스퍼스는 분석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예수의 존재는 실제로 존재하는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존재했다고 말해진 것들을 인식하고 믿은 예수의 존재이다. 말해진 것,
즉 교의적으로 정리된 예수를 인식하고 그것을 참이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가 종교화되어 있는 것이 근대의 기독교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기독교 자체를 비판했다기보다는 서구 사상 자체를 비판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서구 사상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니체가 ‘신’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비판했다고 보기 어렵다.
니체 바라본 ‘신’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시대적 세계관이 섞여 있는 매우 변질된 모습의
사상체 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니체의 이러한 세계관에 종식을 고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천 년이 넘게 서구 사상을 지배하였던 기독교 세계관과 뿐 아니라
시대적 세계관도 힘을 잃게 되었고, 그로 인해 허무주의와 회의주의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시대 변함에 따라 전 시대의 가치 상실로 인해 오는 허무감과 회의감이 바로 니체의 니힐리즘이다.
하지만 니체는 허무주의나 회의주의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니체에게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위기인 동시에 하나의 기회이기도 하다.
니힐리즘은 바로 새로운 가치가 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이자 시작인 것이다.
니체가 죽인 신이란, 서구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일회적이고 획일화된 사고이다.
초 감성적 근원을 지향하거나 하나의 정신 즉, 이성을 지향하여 절대화하는 사고, 단일성이라는
이념이 제거되면서 그것이 무(Nichts, 니힐)가 되고 니체에게서 새로운 사유가 탄생하는 것이다.
니체는 획일화된 사고보다 다양한 사고를 원한다.
즉, 니체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해석의 원리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탈근대적(post-modernity) 사유이다.
니체에 있어서 절대화되고 획일화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끊임없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뿐이다. 이로써 니체는 탈근대적 해석학의 시초를 제시한다.
니체의 경우에 진리는 힘에의 의지의 본질 속에서 정립된 하나의 조건,
즉 힘을 유지하기 위한 그런 조건일 뿐이다. 진리는 이러한 조건으로서 하나의 가치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사유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경험하고 해석하기보다는 이미
암묵적 해석으로서의 이해의 선구조 안에서 경험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과 사건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획일화된 진리는 없는 것이며, 일의적 의미를 위한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니체는 절대적 진리를 말하려는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니체의 경우에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가 진리라는 믿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기존 정통주의라는 명복 아래서 형성된 사고인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가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폭을 니체는 기독교가 막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데카당스, 즉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지지하는 사고방식을 기독교는 지지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은 불완전하고 허무하며 가치가 없기 때문에 희망을 피안의 세계에 연결해 살아가는
사고방식을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신앙을 고양시키기 위해 ‘이 세상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불멸의 신앙’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신, 진리, 빛, 정신, 사랑, 지혜, 생명과 같은 의미를 자신들의 표현
수단으로 독점했는데 그것은, 자신을 ‘현실 세계’와 구분 짓고 자신이 마치 거룩한 사람인
마냥 떠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표현대로 세상의 중심에서 실천 없는, 사랑을 외치는 교만함인 것이다.
기독교 안에 있는 율법주의를 그는 본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기독교인이란 조금 자유로워진 유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기독교의 율법주의화이며 교의적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유대인이 거행하는 의식이나 기도는 예수에게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런 의식과 기도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만 신에게 인도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행위 구원론이 아니다.
그는 실천하지 않는 교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도 우리는 이 말을 찾을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예수라는 인물은 기존 유대교의 관습과 전통 어쩌면 유대교가 최후로
가지고 있던 자기들만의 교의, 즉 가장 안에 있는 숨겨진 모순을 비판했던 사람이다.
관습과 전통을 이용해 약자를 착취하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마냥 외치는 교만,
그로써 예수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고 참된 자유를 맛보게 하기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른 것이
그의 가르침의 본질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인들은 '진리' 즉 정해져 있는 어떤 절대적 규칙이나
규범이 존재에 해야만 그것이 인간이 타락하지 않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결국 성직자들은 자신이 신이 되어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는 교의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기는 것을 니체는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데카당스처럼 바라보고, ‘생각하는 능력’을 망가뜨리며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피안의 세상만 바라며 살아야 한다면 삶의 물음은 너무나 단순해진다.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사고는 무뎌져 갔음을 니체는 지적한다.
그것의 원인은 잘못된 기독교의 사고방식에서 시작된 것이라 니체는 주장한다.
니체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기존의 관념과 관습 전통, 편견이 과연 우리 삶을 자유롭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퇴폐하게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우리에게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말로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던지지 않으면 무뎌진 우리의 사고가 반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티크리스트』에서
말하고자 하는 니체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
진리라는 포장 아래 맛 좋은 교의를 만들어 사람들의 영혼을 통해 피나 빨아먹는 기생충으로써의
기독교, 그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다시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의 책에서 말한 것처럼 후진 운동이 필요하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뒤돌아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걸어가 다시 수정하고 고치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함을 니체는 그렇게 고독과
질책 속에서도 그렇게 아우성을 외친 것이 아닐까?
니체와 야스퍼스의 사상에 대해 비판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
먼저 야스퍼스의 니체 해석은 지나치게 실존주의적 경향이 있다.
니체가 담지하고 있는 '관계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니체의 전기와 후기 사상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부족한 것도 보인다.
야스퍼스는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허무주의 즉 니힐리즘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잘 설명했지만
실존적 선택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대안이라고 결론짓는 한계가 보인다.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건 니체 안에서 담긴 관계성을 통한 창조로도 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이 실존주의 안에 담긴 한계를 극복하면서, 좀 더 포괄적인 해석으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변질된 모습을 비판하는 니체의 모습 속에서 신학적 단초를 발견할 수 있어
신의 부재를 말하는 실존주의와는 다른, 신학적인 메시지를 끌어올 수도 있다.
(물론 야스퍼스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야스퍼스의 말처럼 니체는
사유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이상은 아니라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 이상 니체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니체의 사유 실험에 참여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추종자가 되는 건
오히려 니체의 저주에 걸리게 될 것임을 야스퍼스는 시사한다.
니체의 사유는 엄청나게 방대하다.
지금 소개한 개념 외에도 영원회귀, 관점 주의, 비도덕주의, 계보학, 해석학,
생기 존재론, 등등 현대 사상을 이끈 엄청난 사유들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지금까지 한 니체의 해석은 하이데거의 해석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은 미학적 해석의 성격이 강하다. 니체에 대해 들뢰즈나 푸코,
데리다가 해석한 니체가 오히려 현대 사상에서 강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철학자들은 니체의 사유를 통해 정해진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해석학적
생성과정을 통해 진리가 나타나는 ‘진리의 효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어린 아이’의 개념이 이러한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니체의 철학은 야스퍼스가 말한 것과 같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내용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니체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 중에서 비판 받을 만한 점.
하지만 니체가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관점은 몇 가지 비판받을 수 있다.
첫째로 복음서 저자에 관한 그의 비판이다.
니체는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예수를 해석했기 때문에 복음서 자체도 만들어진 교의라고 본다.
그리하여 복음서 자체도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를 경험한 제자들이 저술했던 복음서가 예수의 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설득은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물론 복음서는 저술한 사람의 관점과 해석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의 모습을 완전히 왜곡시키거나 잘못된 예수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초기 공동체가 경험한 예수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으며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들의 고백이 결코 왜곡되고 잘못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복음서도 문자적으로 해석되어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연구해야 됨은 분명한 사실이다.
둘째로 니체는 예수의 인성과 역사성, 그리고 도덕성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예수의 인성과 그의 역사적 전황 그리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실천들을 절대로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만 집중하게 된다면 자유주의신학이나 인간중심주의, 도덕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다.
셋째로 그의 표현방식이다. 니체는 난해한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여 해석의 어려움을 준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표현들이 오해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니체 철학이 나치즘을 옹호하고 변증하기 위해서 잘못 사용된 예가 있다.
니체 철학은 그 안에서 수많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방법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만큼 잘못되게 해석되거나 잘못된 방법론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니체 철학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