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정여운 냉장고에는 과일이 많아요 사과, 복숭아, 배, 감, 귤, 오렌지, 포도, 멜론, 수박: 과일들은 모두 둥그렇습니다 냉장고에 야채들은 내 손길을 기다려요 양파, 감자, 통마늘, 콩, 단호박, 양배추: 채소들은 모두 둥그렇습니다 알들은 종류가 참 많아요 연어 알, 물새 알, 거북이 알, 개구리 알, 계란, 메추리알, 타조 알: 알들은 모두 둥그렇습니다 화단에는 꽃들이 많아요 채송화, 민들레, 란타나꽃, 나팔꽃, 국화꽃, 작약꽃, 수국, 장미꽃, 목련꽃, 무궁화꽃: 꽃들은 모두 둥그렇습니다 둥글어질 때까지 비바람도 많이 불었겠지요 폭풍도 가끔 닥쳤겠지요, 된서리도 맞았겠지요 뜨거운 태양에 온몸이 그을리기도 하였겠지요 언 땅에 뿌리 내리느라 발도 시렸겠지요 둥글게 앉아 있던 나는 태어날 때 둥근 머리부터 나왔는데 엄마의 자궁은 둥글었어요 엄마는 배를 잡고 돌고 나는 탯줄을 잡고 돌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은 둥글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둥근 해를 보며 한 세상을 사셨지요 돌아가신 후에 두 분은 둥근 봉분 속으로 나란히 들어가셨답니다
- 시집 『녹슨 글라디올러스』 (지혜, 2024)
* 정여운 시인 대구 출생.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3년 『한국수필』 수필, 2020년 『서정시학』 시 등단. 시집 『문에도 멍이 든다』 詩에세이집 『다알리아 에스프리』 2019년 불교신문 10·27법난 문예공모전 산문 부문 대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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