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토등안에 시인 박영희님의 시들을 많이 올렸다. 물론 JeA가 좋아하는
시인 이기도 하다.
눈물로 시를 키우는
시인의 시를 올려본다.
곰소 잔디다방 / 박영희
채석강 다녀오다 언 몸 녹이고 싶거든
곰소에나 한 번 들러 보게
그 곳에 가면 터미널 건너편에
다방 하나가 육십 년대 풍경을 하고 있나니
자네가 들어서면 아마
제대로 삭은 조개젓 마담이
얼른 커피 한잔 끓여 내주고는
프라이팬에 안주 볶느라 분주할 걸세
고만고만한 동네 여자들 죄다 불러 놓고
주방 옆 테이블에 제멋대로 둘러앉아
소주잔 기울여 가며 화투장 넘기고 있는 걸 보노라면
자네도 시커먼 커피 내치고
꼽사리 끼고 싶어 안달일 걸세
그래도 조심하게나
그 풍경에 넋이 나가 버스 놓친 사람 한둘 아니거든
아, 그리고 잊지 말게나
여기저기 구멍난 소파가 자네에게
뭐라고뭐라고 수작을 부려 올 텐데
그러거든 못 이기는 척 슬쩍 한 번 물어는 보게나
하룻밤 묵어 갈 여인숙이 어디 없겠느냐고
싱싱하진 않지만 곰소에는
갯바람에 곰삭은 조기새끼가 제법이거든
아내의 브래지어 / 박영희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박영희 시집 < 팽이는 서고 싶다 > 2001
*
박영희 시인은 민족운동을 위해 무단으로 북한에
다녀온 혐의로 7년을 감옥에서 보낸 별난 이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7년 동안 젖먹이였던 어린 딸애가 초등학생으로
자라났고, 긴세월 아내는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느라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그윽하게 담겨있는데
혹자는 이 시를 깊이 들여다보면 민족문제를 함께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의미심장한 시라고 고매하게
말하기도 하나 정작 본인은 아내 사랑 말고 다른 생각을
개입시켜 쓰지는 않았다 합니다
즐거운 세탁 / 박영희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 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중심 / 박영희
사람의 깊이를 모르겠다
어제의 얼굴이 다르고
오늘 얼굴이 다르다
저렇게 넓은 집에서 어떻게 시가 나올까
저렇게 윤기나는 밥상에서 어떻게 소말리아가 보일까
저렇게 멋진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어떻게 실직자들이 보일까
노을의 실체를 알고부터 였다
오랫동안 헤어져 지낸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저 삶이 정말 정당한 것인지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패랭이꽃에게 물었으랴
오죽했으면 사람의 깊이를
날아가는 새에게 물었으랴
오늘도 나는 잔가지만 잔뜩 보고 돌아와
꽃병 가득 꽃혀 있는 장미를 들어낸 뒤
꽃병 안만 들여다본다
눈물로 꽃을 키우다니…… !
셋방살이 다섯 식구 / 박영희
사람이 잠들면
코에서 찬바람이 나는 것인디
아이 글씨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 코에
살짜그니 손을 대본께
더운 바람이 나더란 말이시
가운데에는
자식놈 셋이 잠들어 있제
통통배 엔진처럼 가슴은 요동을 치제
암만 더듬어도
마누라가 있는 곳은 섬이더란 말이시
마누라는 그 섬에서
애타게 통통배를 기다리는디
그것이 워디 쉬운 일이여야제.
오만원 / 박영희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말>에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가.
원고료라고 받으면 늘 이렇듯
무엇이 되었든 하나를 남기려는 버릇이 있다
오천원짜리 오백원 깎아
머리핀 하나 사고
그래도 설레임 남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당신이야, 나야, 우리 오늘 만리궁성에 갈까?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5시, 아직도 한시간이 넘게
남았다
소주라도 한잔 걸칠까, 아니야,
지 엄마만 사줬다고 딸아이가 삐치겠지
남은 돈 계산하다 말고 내친김에
석 달 전부터 점포정리를 하고 있는 신발가게로 향한다
점포정리?
정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언론을 한번 보라지
정치하는 놈들은 또 어떻고
신발장 정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던가
값이 헐한 운동화 한켤레를 사면서도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밥 한그릇과
딸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값을 먼저 계산해둔다
짜장면 세 그릇은 어쩐지 서러워서다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박영희 시인
1962년 전남 무안 출생
1985년 문학무크지 『民意』3집에 「남악리」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시집
『조카의 하늘』『해뜨는 검은 땅』
『팽이는 서고 싶다』『즐거운 세탁』
박영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즐거운 세탁』은, 4부로
구성, 총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전 시집에 견주어 열 번 숨을 고른 듯한 깊은 응시와
절절한 사랑의 시학이 돋보인다.
“초기의 시집 곳곳에서 보이던 어긋난 세상에 대한 격한
목소리는 이제 안타까움과 애잔한 눈길과 넉넉하게 껴안는
품안으로 차분히 가라앉았다.”고 박남준 시인은 발문을
통해 말한다.
2001년 『팽이는 서고 싶다』(창비 刊)이후 6년여 만에
내는 이번 시집에서 재미있는 것은 박영희 시인의 살림이
손빨래에서 세탁기빨래로 바뀌었다는 것.
인구에 회자되었던 시, 「아내의 브래지어」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무슨 말인지 단박 알아챌 것이다.
아내의 브래지어를 손으로 빨며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에
눈시울 붉혔던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는 「즐거운 세탁」을
통해 속옷들이 “나란히 손잡고”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도는 세탁기를 들여다보며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
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다고
노래하고 있다.
두 편의 빨래시의 공통점은 헹굼시 꼭 피죤을 넣는다는 것.
그렇게 식구들에게 “향기를 전하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은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 (고물상을 지나다), “‘사랑’이라는
말 한 번도 입 밖으로 흘린 적 없건만// 옮겨가는 자리마다
꽃 피어나신다”(「어머니」), “종아리를 걷으라 한다
// …// 차알싹!/ 차알싹!// 수평선이 핏빛이다”
일상을 통해 저절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절창들과 막장의
탄광촌으로 북쪽으로 일본으로 만주벌판 중국으로
왜곡되고 버림받은 현대사의 질곡을 찾아 뛰어다니며
마디마디 뼈에 새겨 쓴 시편들은 우리 삶의 생명력과
행복에 대한 근원에 닿아 있다.
□ 책속에서
마지막 헹굼에 피죤을 넣다 말고
물끄러미 안을 훔쳐본다
그저께 벗어두고
어저께 벗어둔
속옷들, 너울너울 춤을 춘다
가느다란 어깨끈이 달린 피노키오 런닝구는
손바닥만한 분홍색 팬티와 한 조 되어
나란히 손잡고 빙글빙글 돌고
체크무늬 사각팬티는
초록색 수건과 허리 꼭 껴안고
휘엉휘엉 회전목마를 탄다
지난가을 해운대 아쿠아리움에서 본
물고기들의 춤이 저러했던가
땟국물 쪽 빠진 마알간 수족관에서
지느러미를 한껏 흔들어대는 것이
참 싱그럽기도 하다
- 즐거운 세탁 전문
□ 추천글
우리가 낯선 길을 가며 때로 잘라낸 듯한 풍경 속에 있거나
처음 가 본 도시의 정거장 마당에 서서 어디서 본 듯한,
혹은 전에 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곳이 마치 생의 한 가운데인 것처럼 투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박영희의 시편들이 그렇다. 그것이 별로 내놓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든 역사의 현장이든, 우리가 이미
지나친, 또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세상일지라도 그의 작품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것들이 갖는 정서의 재생과 성찰을
통하여 동류적 그리움을 갖게 하는 환기력을 지닌다.
우산을 쓴 그대에게/뛰어들기엔/내 옷이 너무 많이 젖어
있습니다. 그는 젖은 사람이다. 그의 이 ‘젖은 자’ 의식은
그가 담당하고 있는 현실과 세계에 대한 불편함이자
겸양이다. 그러나 그 겸양 속에는 눈물이 들어 있다.
/ 이상국 시인
박영희는 오늘도 밑바닥을 긴다. 저인망 어선이 밑바닥을
훑듯 세상의 바닥이란 바닥은 다 훑고 다니며 높고
번쩍거리는 것만을 좇는 세상을 향해 “봐라, 이런 삶도
있지 않은가! 이런 처절한 아름다움도 있지 않은가!”하고
항변한다.
박영희! 대구교도소 소년수 사동의 어두침침한 독방에서
그와 나는 만났다.
저 밑바닥 인생, 당당한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족보를 캐러
국경을 넘나들다가 예까지 왔단다.
그런 그가 때때로 누런 갱지에 가슴 찡한 글들을 연필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오곤 했다. 지금 이렇게 편한 의자에
앉아 읽는 시와 행여나 간수에게 들킬세라 숨죽이며
몰래 읽어보는 시가 어찌 같을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그의 시는 여전히 힘이 있다.
/ 황대권 생태운동가
□ 시인의 말
세상에는 한 인생을 망쳐놓은 꽃도 있었음을 진즉에
경험한 터라 네 번째 시집을 선보이는 봄이 은근히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데, 손바닥 싹싹 비벼가며 살 수
있겠나! 지상의 마지막 과제가 버거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생명과 평화 사이에
이가 빠져 있었다. 애써 그것이 ‘평등’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21세기의 꽃 兩極花는 그렇게
되살아났고, 얼씨구 좋다며 춤을 추어댔다는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래서 또 부끄럽다,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홍합 / 박영희
깡마른 장작 한 무더기 경운기에 싣고 감방에서 알게 된
준탁 형따라 홀아비 집을 나선다 잘 닦인 아스팔트에서는
눈엣가시던 경운기 밀썰물의 바다와 내통하는 외길로 접어들자
훨훨 추수 끝난 들판에 휘파람을 날린다
-오늘은 이짝쯤에다 자리를 잡아볼까? 동상은 쏘주하고 초장 챙겨
따라오소.
한 손에는 됫병 잎새주를 다른 손에는 초고추장 들고 엉그적 엉그적
오리궁뎅이 걸음으로 뒤를 따르자 바닷물 쪽 빠진 귀퉁이 바위들
둘러보다 말고 그 중 하나를 골라잡은 준탁 형 바위 밑에 삽날을 들이댄다
잘 먹히는 곳은 삽으로 잘 안먹히는 곳은 호미로 삭은 폐석을 긁어내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바위 밑구녘이 훤해진다
-다 되았네 인자 바닥에 납짝한 돌판 깔고 불만 놓으면 될 것 같은디
쏘주 가져왔제? 동상은 나하고 술이나 한고뿌 하세.
장작불 놓고 서너 순배 오갔을까 진도남녘에서 영변녘으로 진달래 불붙어가듯
바위에 촘촘히도 붙어 있던 홍합들 앗, 뜨거라! 앗, 뜨거라!
영락없는 그날 밤이다!
시집 <즐거운 세탁> 애지. 2007
첫댓글 세편만 읽었음. 더 이상은 한계에 봉착
피죤 한방울 만 이해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