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정찬주 삽화·송영방
어머니의 혼은 어디로 간 것일까
“범종소리의 여운마저 다 타버린 재처럼 스러지자 20년 전에 구광루에서 손가락이 없는 주먹손으로 분필을 잡고 법문하시던 일타 스님이 떠올랐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beopbo.com%2Farticle%2Fupfiles%2F1158107560.img.jpg)
가을은 해인사 가는 산길에도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붉고 노란 만추(晩秋)의 낙엽들이 산길에 점점이 떨어져 바람이 불 때마다 뒹굴었다. 산길 왼쪽으로는 홍류동 계곡물이 허연 반석 위를 차갑게 흘렀고, 계곡 가에는 낙락장송들이 능구렁이 같은 통통한 허리를 드러낸 채 우우우 소리치고 있었다.
평일이어선지 해인사 가는 길은 한산했지만 이따금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나타났다가는 급히 사라지곤 했다. 저잣거리의 빠른 속도가 산중의 산길에까지 전염된 느낌이었다. 아스콘으로 포장된 산길은 이미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나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는 나무다리를 이용하여 천천히 계곡을 건너갔다. 계곡 저편의 송림 사이에는 기와를 얹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사내는 벌써 20년이 지났건만 정자의 이름을 아직도 외우고 있었다.
농산정(籠山亭).
천여 년 전에 신라인 최치원이 가족을 이끌고 입산했던 것을 후세 사람들이 추모하여 지은 정자였다. 정자 앞의 계곡에는 화강암에 붉은 한자로 ‘최치원 선생 둔세지(崔致遠先生遁世地)’라는 표지석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둔세(遁世)란 세상에서 물러나 숨는다는 뜻이니 최치원은 가야산에 입산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시작하기보다 어려운 것이 일을 끝내는 것이고, 태어나기보다 어려운 것이 죽는 일이리라. 마찬가지로 누구나 앉고 싶어 하는 자리에 나아가기보다 그 자리를 미련 없이 물러서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지혜로운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물러나기를 거부하여 인생을 망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은 물러남의 지혜를 깨달은 현인(賢人)이 분명했다.
사내는 몹시 피곤하여 정자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노모가 운명한 날부터 삼우제까지 거의 숙면을 취하지 못하였으므로 몸은 땅에 박힌 바위덩어리처럼 무겁기만 했다. 그런가 하면 일주일 전에는 미국의 북동쪽인 로드아일랜드 땅에 있었고, 무려 17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닷새 전부터는 서울 땅에 있었기에 이동한 그 공간이 전생과 금생의 거리감처럼 멀고도 아득했다.
그런데 사내는 해인사를 향해 내려오면서 이상한 일을 겪었다.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영혼이 잠시 몸을 떠나는 것 같아 승용차 안에서 룸미러나 백미러로 가끔 뒤를 살피곤 했는데, 노모의 죽음에서 비롯한 충격과 허망함에서 연유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눈을 감은 채 노모가 묻힌 묘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했던 혼잣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혼은 어디로 간 것일까.’
노모의 혼이 사라진 곳을 알고 싶다기보다는 노모와 영영 이별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허전했던 까닭이었다. 혼이라도 잠시 붙잡고 싶은 절절한 마음이었다. 대학시절 윤리시간에 배운 바로는 혼(魂)은 하늘로 날아가는 기운이고, 백(魄)은 땅으로 들어가는 기운이라 했으니 영혼이란 것은 혼에 가깝고 썩어 사라지는 육신은 백과 비슷한 것일 터였다.
사내는 자신의 발끝에까지 날아와 우짖는 물까치 소리에 놀라 일어나 계곡으로 내려갔다. 물까치는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사납게 깍깍깍깍 하고 울었다. 사내는 두 손을 둥그렇게 오므리어 찬물을 떠서 얼굴에 뿌렸다. 여태까지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승용차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던 육신을 미처 따라오지 못했던 영혼이 돌아온 것도 같았다
‘아, 미국의 슈퍼에서 보았던 그 신문 기사 때문이었군.’
사내는 해인사를 내려올 때 백미러를 필요 이상으로 자꾸 보았던 이유를 그제야 알아내고는 싱겁게 웃었다. 아주 오래 전에 로드아일랜드의 한 지역신문을 보다가 휴식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어느 작가의 고정칼럼 난에서 인디언의 지혜에 관한 얘기를 인상 깊게 읽었던 것이다.
옛날의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내리어 뒤를 돌아보는 오래 된 의식이 있다는 기사였다. 인디언들은 자신이 달려온 지점을 향해서 반드시 한참을 뒤돌아보고 나서야 다시 말을 타고 달리는데, 그 이유는 지친 말을 쉬게 하거나 인디언 자신이 쉬기 위한 것이 아닌 너무 빨리 달려 자기 영혼이 말을 탄 육신을 따라오지 못했을 것 같아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는 글이었다.
이번에는 찬 계곡 물에 구두와 양말을 벗고 다리를 담그자 온몸이 부르르 진저리가 처졌다. 잠을 며칠째 온전하게 자지 못했지만 머릿속이 개운해진 것인지 영혼과 육신이 맑은 계곡 물에 빨래처럼 헹궈진 듯했다.
사내는 다시 나무다리를 건너 승용차에 올라탔다. 농산정을 갔다 온 사이에 낙엽들이 차창에 달라붙어 브러시를 작동했다. 해인사까지 가려면 아직도 5분 정도는 더 가야 했다. 사내는 차창을 열고 가야산의 축축한 공기를 들이키며 달렸다.
조금 올라가자 국립공원 매표소가 나타났다. 카키색 제복을 입은 직원이 손을 내밀어 승용차를 정차시키더니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해인사 종무소에 볼 일이 있어 갑니다.”
“신도 분이군요.”
제복의 직원은 턱을 들어 통과하라는 시늉을 했다. 사내는 출입제한이 엄격한 검문소를 통과한 것처럼 다행이라고 여겼다. 누구를 만나러 종무소에 가느냐고 물었다면 난처할 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내가 입장료를 내지 않기 위해 거짓말로 둘러댄 것은 아니었다. 노모의 영혼을 위해 불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해인사를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두 기둥에 지붕이 얹어진 일주문에 이르자, 그제야 삼삼오오 무리지어 오가는 참배객과 관광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경내는 깊어가는 가을 때문인지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처럼 적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일주문 앞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사내는 좌측으로 난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관광객이 오가는 정면의 길을 이용해 올라갔다. 종무소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경내로 깊숙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사내는 또다시 무엇이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허연 물체가 새처럼 허공을 스치는 느낌도 들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니 거기에는 자신과 인연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님들은 장삼 자락을 펄럭이며 절집의 일상도 바쁘다는 듯 총총히 오갔고, 20년 전에 보았던 가야산의 산자락들도 거기 그 자리에서 묵묵할 뿐이었다.
뒤쫓아오는 무엇이란 것이 사내의 영혼이 아닌, 노모의 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짧게 스쳤지만 사내는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물까치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간 잔영일지도 몰랐다. 노란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물까치 한 마리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종무소는 텅 비어 있었으므로 사내는 어정쩡하게 두리번거려야 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아가씨 한 명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슬리퍼 끄는 소리를 듣고서야 잿빛 개량한복을 입은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다들 공양 하러 가셨는데요. 누구를 찾는지요.”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약속을 하고 오셨습니까.”
“아니오.”
아가씨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으라고 단주를 찬 손으로 안내를 했다. 아무 스님이라도 만나기 위해 왔다는 사내를 보고 흥미 있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서울에서 왔습니다. 스님을 만나려면 한참 기다려야 합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오실 겁니다.”
아가씨가 커피를 한 잔 빼오는 동안 더 기다릴 것도 없이 40대 초반의 젊은 스님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모습으로 들어왔다. 눈망울이 또록또록 하고 얼굴빛이 맑아 왠지 기도를 잘할 것처럼 보이는 스님이었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면서 일어나자 스님이 호주머니에 찔렀던 손을 자연스럽게 빼내며 합장했다.
“저를 만나러 왔습니까.”
“네.”
자신 없이 대답하자 아가씨가 대신 말해 주었다.
“국장스님, 아무 스님이라도 뵈러 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국장스님의 소임이 포교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포교국장스님의 손님인 셈이지요. 호호호.”
젊은 스님은 해인사의 포교국장이었다. 스님도 사내가 호감이 가는 듯 저녁 공양부터 챙기는 말을 했다.
“공양은 했습니까. 절에서는 공양 목탁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굶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만 저녁을 먹지 않은지 오래됐습니다.”
“하하하. 우리 스님보다 낫습니다. 오후불식(午後不食)이군요.”
“감히 저 같은 자가 스님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있을 것이 아니라 내 방으로 가서 차나 한 잔 합시다. 시간이 괜찮겠습니까.”
스님의 방은 종무소에서 왼쪽에 있었다. 지붕에 풀이 듬성듬성 자랄 만큼 오래 된 가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옹색하게 사립문이 달려 있었다. 대여섯 칸 정도의 가람인데 해인사에서 소임을 맡은 종무소 스님들이 각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스님이 기거하는 곳은 두 번째의 방이었다.
스님이 자물쇠를 풀자 길쭉한 방 안이 드러났다. 스님은 음악을 좋아하는지 일본 제품의 앰프 좌우로 클래식 CD들이 가득했고, 스님의 목소리는 테너를 하는 성악가처럼 미성이었다. 방문 옆에 놓인 찻상을 끌어당기며 스님이 말했다.
“방이 지저분합니다. 신도 분을 상대하다 보니 방을 치울 새가 없습니다. 잠은 저 산자락 너머에 있는 지족암으로 올라가서 자고 내려오지요.”
“지족암이라면 일타 큰스님께서 계신 곳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무 차나 좋습니다.”
“날씨가 차가워진 것 같으니 따뜻한 발효차를 우리겠습니다.”
플라스틱 포트에 담긴 물은 금세 비등점으로 올라 끓었고, 스님은 능숙한 솜씨로 황금빛깔의 발효차를 우려내 찻잔에 부었다. 사내는 커피를 마시듯 홀짝홀짝 차를 마셨다. 그러자 스님의 말대로 차는 식도를 타고 넘어가 속을 따뜻하게 적셔 주었다. 차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목말라 하던 세포들이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느낌도 들었다. 스님이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무슨 일로 해인사에 오셨습니까.”
“사실은.”
“관광이 아니시군요.”
“그렇습니다. 사실은 어머니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삼우제를 지내고 바로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랬군요.”
“무슨 종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렀습니까.”
“천주교 장례미사도 보고 유교식으로 발인제사도 지냈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으로서 할 바를 다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어머니의 신앙대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머니는 원래 불교에 가까운 분이었습니다. 절을 정하고 다니신 적은 없지만 초파일이 되면 절을 찾곤 했던 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천주교 식으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치매에 걸리신 뒤 사촌동생들의 권면이 있었거나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치매요양원의 분위기 때문에 요셉피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유교식은 조문객 중에서 집안의 나이 든 어른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고요.”
“하하하.”
스님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돌아가신 보살님은 복이 많은 분입니다. 천주교에 유교에다 이제는 불교와 인연 맺으려고 하니 말입니다.”
그때였다. 범종소리가 방문을 잡아당길 듯이 가까운 곳에서 크게 들려왔다. 첫 번째의 범종소리에 스님이 사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저녁예불에 참석하려는 듯 방문을 열고 나갔다. 범종소리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스물여덟 번이나 계속해서 들려왔다.
사내는 찻잔을 들었다가 맥없이 놓았다. 범종소리의 긴 여운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의 눈물이 얼굴을 적시더니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뿐만 아니었다. 범종소리의 여운마저 다 타버린 재처럼 스러지자 20년 전에 구광루에서 손가락이 없는 주먹손으로 분필을 잡고 법문하시던 일타 스님이 떠올랐다.
〈계속〉
첫댓글 오늘부터 매일 옮겨 오것슴다. 잘보시를요 .
잘보겠습니다. 잘옮겨오셔요 ㅎㅎㅎ
열심히 공부해야지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