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열린사진공간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자유게시판 스크랩 2011년 탐매여행 12 -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
눌인 추천 0 조회 183 11.04.29 22:50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2011년 탐매여행 12 -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

 

 

가사문학의 본 고장인 담양군에는 명매(名梅)들이 많이 있다. 앞에서는 지곡리 지실마을의 ‘계당매(溪堂梅)’, 창평면 해곡리 유종헌가옥(柳宗憲家屋)의 ‘와송당매(臥松堂梅)’를 소개드렸다. 이번에는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를 소개할까 한다.

 

 

죽림원림(竹林園林)에는 고매(古梅) 두 그루가 살고 있다. 두 그루 다 정매(庭梅)이며 만첩홍매(萬疊紅梅)인데, 한 그루는 창녕조씨 문중 사람들이 공부하던 죽림재(竹林齋) 앞에서 자라고 있다. 또 한 그루는 죽림원림을 창건(創建)한 조수문(曺秀文)의 부(父) 조유도(曺由道) 묘각(墓閣)인 세일재(歲一齋) 앞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곳의 매화 두그루가 모두 홍매이기에 세일재(歲一齋) 앞에 있는 매화를‘세일매(歲一梅)’, 죽림재(竹林齋) 앞에서 솟아있는 매화를‘죽림재매(竹林齋梅)’라고 명명(命名)해 본다.

 

 

죽림원림(竹林園林) 경내에 있는 죽림재(竹林齋)는 지정문화재이다. 우선 문화재청 홈페이지 우리지역문화재에 소개된 설명문을 읽어보자.

 

 

전라남도기념물 제99호 죽림재(竹林齋) 일원(5,440㎡) 1987. 1. 15. 지정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 338번지 소재

창녕 조씨 문중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죽림재를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죽림 조수문(1426∼?)이 세웠다고 전한다. 처음 세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인조 원년(1623)에 죽림 선생의 6대손인 삼청당 조부(曹溥)가 다시 지었다. 그 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48년에 다시 세웠다. 복원된 죽림재는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죽림재를 처음 지었다는 죽림 조수문(曺秀文)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수문의 본관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대전 뿌리공원>에 새겨진 창녕조씨 유래를 참고하여 소개한다.

 

 

신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始祖) 조계룡(曺繼龍)의 어머니이다. 창녕현 고암촌(高岩村) 태생인 예향(禮香)은 태어나면서부터 복질(腹疾)이 있어 백방으로 약을 구해 치료를 하였으나 잘 낮지 않았다고 한다. 화왕산(火旺山) 용지(龍地)에서 목욕하고 기도를 드려 완쾌되었으나 몸에 태기(胎氣)가 있었다고 한다. 겨드랑이에 조(曺)자와 같은 무늬가 새겨 있는 아들을 낳았고,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이 아이를 보니 풍모가 특이하여 조(曺)라고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고, 보국대장군상주국대도독태자태사(輔國大將軍上柱國大都督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면서, 창녕 조(曺)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 후 세계(世系)는 실전되어 알 수 없다. 신라 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내고 고려 태조의 딸과 결혼한 조겸(曺謙)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그래서 후손들은 조계룡을 시조(始祖)로, 조겸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창녕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창녕조씨는 그 후 대?소 수십개의 파(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등 - 로 분파(分派)되었다.

 

 

죽림재를 처음 지었다는 죽림 조수문(曺秀文)은 창녕조씨(昌寧曺氏) 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에 속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

 

 

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의 파조는 조준(曺濬)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시조(始祖)인 계룡(繼龍)에서부터 응신(應神))→수형(壽亨))→돈(敦))→흠(欽)으로 이어지다가 중시조(中始祖) 겸(謙)에서 다시 서(瑞))→연우(延祐))→한지(漢知))→지현(之鉉))→사전(思詮))→정린(正鱗))→중용(仲龍))→의문(義文))→자기(自奇))→대재(大才))→우(瑀))→송무(松茂))→전(錢))→효규(孝規))→한경(漢卿))→명윤(明胤))→조준(曺濬)으로 이어진다.

 

 

신라 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냈던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하자 토함산(吐涵山)에 운둔(隱遯)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千年王業一朝塵 천년 왕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니,

白首孤臣淚滿巾 늙고 외로운 신하의 손수건에 눈물이 가득하네.

借問首陽何處是 수양산이 어느메뇨 물어 본다네

吐涵山月自相親 토함산 밝은 달과 친히 지내세

 

 

조흠(曺欽)의 아들이자 창녕조문의 중시조(中始祖)가 된 조겸(曺謙)은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벼슬은 태악서 승(太樂署丞)을 지냈다. 조겸의 아들 조서(曺瑞)는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냈다. 조서의 아들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代)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그 뒤 6대로 소감(少監)을 배출하여 동방의 저성(著姓)으로 알려졌다. 조자기(曺自奇)와 조용기(曺用奇) 형제(兄弟)는 고려 현종(顯宗) 때에 거란(契丹)의 침입을 여러 차례 토벌한 공로가 있다. 박용운(朴龍雲)의『고려시대(高麗時代) 음서제(蔭敍制)와 과거제(科擧制) 연구(硏究)』(一志社)에는 조자기(曺自奇)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는데, 고려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왕대 미상(王代 未詳), 시년 미상(試年未詳)이라 되어 있다.

 

 

조자기(曺自奇)의 장남인 조원(曺元)은 장양공파(壯襄公派)로 세를 이어간다. 조원(曺元)의 9세손인 조저(曺著)의 시호(諡號)가 장양(莊襄)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수성수의충량보국공신(輸誠守義忠亮輔國功臣) 벽상삼중대신(壁上三中大臣) 문하시중(門下侍中)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에 이르렀고 연주부원군(聯珠府院君)에 봉해진 분이다.

 

 

조자기(曺自奇)의 차남(次男)인 조대재(曺大才)로부터 이어온 조준(曺濬)이 밀직사공파(密直司公派)의 파조(派祖)가 된다. 즉 고려조 명벌가(名閥家)의 후예이었던 셈이 되지만 조준(曺濬)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고, 조준(曺濬)과 조수문(曺秀文)과의 연결고리 역시 찾지 못하였다. 보첩(譜牒)을 찾으러 다닐 수도 없고...

 

 

창녕조씨대종회(昌寧曺氏大宗會) 홈페이지(http://www.chocy.co.kr/) 등 여러 자료에서 조수문(曺秀文)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조부(祖父)는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으로 개성직할시 개풍군 광덕면 만수산 두문동에 있는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 표절실(表節室) 순절반(殉節班)에 봉안(奉安)된 17위(位) 중의 한분이며, 부(父) 조유도(曺由道)는 두문동서원 표절실 항절반(抗節班)봉안된 31위(位) 중의 1분임을 알 수가 있었다.

 

 

조대운(曺大運)은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낸 분이라고 한다. 고려가 망하자 충절(忠節)을 지키기로 한 48인과 함께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에 있는 보봉산에 들어가 마음을 닦았다고 한다. 포은(圃隱) 정몽주가 억울하게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曺由道)를 시켜 원통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두 번씩이나 올리게 하였다고도 한다.

 

조대운(曺大運)의 아들 조유도(曺由道)도 두문동서원에 봉안된 분이다. 조유도는 목은(牧隱), 포은(圃隱)과 함께 수학한 분으로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다. 포은(圃隱) 피화(被禍) 후 창평(지금의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으로 내려와 정주학(程朱學)을 가르치다 향년 84세에 돌아가신 인물이다. 그와 그의 아들 조수문(曺秀文)은 이곳에 머물면서 폐쇄적 성격이 강했던 담양지역에 중앙의 새로운 문화를 옮겨주었다. 특히 조수문(曺秀文)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호남의 진짜 유학자(湖南眞儒)’라고 할 정도로 숭앙을 받으며 호남사림의 뿌리로 자리 매김한다.

보봉산(普鳳山) 기슭에 있었으나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옮긴 불일사5층탑(국보유적 135호) - 2007년 6월 촬영

 

포은(圃隱)이 피화(被禍)된 선죽교 - 2007년 6월 촬영

 

비슷한 시기에 담양 땅으로 낙남(落南)하여 지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준 또 다른 분은 서은(瑞隱) 전신민(全新民)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北道按撫使兼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그는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겠다며 담양군(潭陽郡) 남면(南面) 연천리(燕川里) 산음동(山陰洞)에 내려와‘독수정(獨守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무신(武臣)이었던 전신민은 이백(李白)의 소년자(少年子)라는 아래 시구(詩句)에서 이름을 따와 독수정(獨守亭)이라 지었다. 당시 명벌가(名閥家) 자제(子弟)들의 방탕함을 나무라고,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절개를 본받기를 권하는 시(詩)이다.

 

少年子 - 李白

 

靑春少年子 挾彈章臺左. - 청춘소년들이 탄환을 끼고 장화대(章華臺) 왼쪽에서 노네.

鞍馬四邊開 突如流星過. - 말 타고 사방(四方)에서 튀어나오니, 유성(流星)이 지나는 듯 달리네.

金丸落飛鳥 夜入瓊樓臥. - 금 화살로 나는 새 떨어뜨리고, 밤이면 아름다운 누각에서 잠을 자누나.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 -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어떤 사람이뇨. 홀로 서산(西山)에서 절개를 지키며 굶어 죽었는가.

 

 독수정(獨守亭)

독수정(獨守亭) 고매(古梅)는 백매(白梅)이다.

 

 

호남사림의 뿌리 조수문(曺秀文)

 

 

전신민(全新民)이 원림(園林)을 경영하며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킨 반면, 조유도(曺由道)의 아들 조수문(曺秀文)은 죽림정사(竹林亭舍)를 짓고 면학으로 일생을 보냈다. 중국 위(魏)?진(晉) 때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을 주고받고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을 죽림 7현이라고 불렀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근본 사상이었던 그들처럼 살고 싶어 한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문인이며 지식인이었던 이인로, 오세재, 임춘, 조통, 황포항, 함순, 이담지 등이 세상에 뜻을 잃고 詩와 술로써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내었다. 이분들은 해좌칠현(海左七賢) 또는 죽림고회(竹林高會)라 칭한다.

 

군자로 지칭되는 대나무를 심고 전원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겠다는 의미에서 죽림이라는 택호(宅號)를 사용한 것 같다. 이곳에서 그는 후학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삶을 즐겼다. 1762(영조 38년)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3위를 한 진사 박신극(朴新克)은 ‘호남의 유생(儒生)이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하였을 정도이다.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여 조수문(曺秀文)에 대하여 약술한다.

 

1426년(세종 8)∼미상. 조선 전기 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 장보(章甫). 호(號)는 죽림(竹林), 운곡(雲谷) 호(浩)의 아버지다.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면학(勉學)을 즐겼는데, 여덟 살 때는 부모에게 효로써 보은할 줄 알았다. 20살에 학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세조 무자년 생원을 하였으나 대과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곳에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짓고 부모를 봉양하며, 성리학을 탐구하고 강론하면서 일생을 마쳤는데 사방의 학자들이 운집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부친인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의 학맥을 승계하였으며, 점필제(?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 등과 교유해 학문을 넓혔고 호남(湖南)의 유학(儒學)을 발전시켰다. 또 역리학의 진퇴(進退), 길흉(吉凶)에 정통하였는데, 김국광(金國光;1415∼1480)이 귀찮을 정도로 물어올 때마다 수긍할 때까지 일일이 대답하여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465년(세조 11) 세조(世祖)는 최항(崔恒) 등에게 시켜 송나라 주희(朱熹)가 찬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해석서(解釋書)인『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를 펴내도록 하였다. 최항과 함께 참여한 김국광에게 많은 자문역할을 했다고도 한다.

『성학지남(聖學指南)』『작불론(作佛論)』들 저서가 전해졌으나, 1592년 죽림정사 화재 때 소장 문서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타계 후 죽림사에 향사(享祀)되었으며, 동복(同福)의 반계사(盤溪祠)에도 그를 모시고 있다.

 

『호남지(湖南誌)』, 『전북지(全北誌)』,『조선호남지(朝鮮湖南誌)』,『전라문화의 맥과 전북인물』,『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광주(光州)』등에 소개되어 있다.

 

 

조수문(曺秀文)의 후손(後孫)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奎106])에 보면 조수문의 아들 조호(曺浩)는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호남인물지(湖南人物志) 광주(光州)편』에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자(字)는 호연(浩然), 호(號)는 운곡(雲谷), 본관은 창녕(昌寧), 죽림 수문(竹林 秀文)의 아들, 김점필재(金?畢齋) 종직(宗直)의 문인(門人)이다. 성종(成宗) 11년에 진사(進士)하고 20년에 문과(文科)하여 교리(校理)를 지내고 함양군수(咸陽郡守)로서 청백(淸白)으로 알려지고 연산(燕山) 술오사화(戌午史禍) 후에 은거(隱居)하였다. 부제학(副提學)을 증(贈)하고 죽림사(竹林祠)에 향사(享祀)했다.

 

 

조호의 女는 소세양<蘇世讓;1486(성종 17)∼1562(명종 17)>의 배위(配位)이다. 소세양은 중종(中宗) 4년(1509) 기사(己巳)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였으며, 호당(湖堂)?한림(翰林)? 문형(文衡)?찬성(贊成)을 역임하면서 경세가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名文章)이기도 하였다. 1730여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는데, 동시기의 석천 임억령 다음으로 많은 분량이다.

 

 

죽림의 6세손 삼청당 조부(曹溥)는 1623(인조 원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다시 지은 분이다. 관직은 행제릉참봉(行濟陵參奉)이고, 품계는 선무랑(宣務郞)이다. 신종우(辛鍾友)가 지은『사원일람(祠院一覽)』에 죽림사우(竹林祠宇)에 제향한 분의 이름이 나오는데, 조부는 생원(生員)과 목사(牧使)로 증부제학(贈副提學)인 조호(曺浩)의 오세손(五世孫)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조병의(曺秉儀;1881~1960)는 1943년 화순(和順)의 반계사(盤溪祠)를 창건한 분이다. 조유도(曺由道)·조수문(曺秀文)·조호(曺浩)를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지은 사우이다. 이분들은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와 담양의 죽림사(竹林祠)에 봉안하였다가 반계사(盤溪祠)로 옮겼다고 한다. 한편 장성(長城)의 만수산(萬樹山) 밑에 있던 경현사(景賢祠)는 1935년 고려 종말기(終末期) 여러 현인들의 도학과 절의를 숭모(崇慕), 봄 가을로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지은 사당 (祠堂)인데, 배향문제로 물의가 일어나 곧 훼철되었다고 한다. 반계사(盤溪祠)는 1951년 소실되었으나, 1954년 재건하였다.

 

조병의는 1908년 이서면장, 동복향교 전교, 성균관 전의 등을 지냈다. 1944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시 전국 향교에 있는 놋그릇(鍮器)들을 일제가 공출(供出)하였을 때 이를 항의하였고, 부평 군수공장(軍需工場)에 가서 그릇들을 되찾아 왔다고 한다. 1958년 창녕 화왕산에 있는 창녕조씨 시조(始祖)의 배태지(胚胎址)를 직접 복원하였으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창녕조씨 대종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편저로 석인본인 『반계사지(盤溪祠誌)』가 전한다.

 

한편 반계사(盤溪祠)가 있는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안심리(安心里)의 하반동(下盤洞) 마을은 여러 성씨-전주李씨, 창녕曺씨, 남평文씨, 탐진崔씨, 광산金씨, 진주鄭씨, 장흥高씨, 동복吳씨-들이 섞여 사는 잡성(雜姓)부락이다. 창녕조씨는 화순 내남면 용리에 살던 조석구(曺錫玖;1824~1898)가 1845년경 이주해 오면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찾아서

 

 

담양군 고서면 소재지에서 약 2km 떨어진 분향리에는 무등산 줄기인 향백산(香栢山)이 있다. 그 아래에는‘잣정’라 불리는 창녕 조씨 동족 마을이 있다. 조수문(曺秀文)의 아버지가 조유도(曺由道)가 포은(圃隱) 피화(被禍) 후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아 누누세세 살아온 곳이다. 개기(開基) 당시에는 분향(芬香)이라 불렀으나 1793(정조 17)년 마을 동쪽 큰 잣나무 아래 정자가 있어‘잣정(栢亭)’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마을 남쪽 산기슭에 조수문(曺秀文)이 건립한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다. 대대로 창녕 조씨 문중의 강학(講學)장소로 이용된 곳이라 한다. 초창건물인 죽림재(竹林齋)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문적(文籍)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1623(인조 1)년 선생의 6세손인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簿)에 의해서 중건되었다. 그 후인 1708년 죽림의 아들 호(浩)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죽림사(竹林祠)가 건립되었고, 1751년 죽림재 자리에 죽림사(竹林祠)를 이건하였다.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8년에 복원되었다.

 

 

죽림사(竹林祠)에는 현재 창녕조씨 세분 - 조수문(曺秀文)· 조호(曺浩)· 조부(曺簿)와 영일정씨 한분을 배향하고 있다. 정민하(鄭敏河)이다. 그는 송강 정철의 5세손으로 정철의 3남 정진명(鄭振溟;1567∼1614)→정한(鄭漢;1599∼1652)→정광연(鄭光演;1624∼1677)→정흡(鄭?;1648∼1710)→정민하(鄭敏河;1671∼1754)로 이어지는 분이다. 타인의 손에 넘어갔던 계당(溪堂)을 인수하고, 1721년 서하당(棲霞堂)의 후손으로부터 식영정(息影亭)도 인수하였던 분이기도 하다.

 

 

식영정(息影亭) 2011년 4월 5일

 

 

죽림정사에는 죽림재(竹林齋) 외 강당(講堂)인 취사당(聚斯堂), 조유도(曺由道)의 묘각(墓閣)인 세일재(歲一齋), 조부(曺簿)의 정려각(旌閭閣)인 충효각(忠孝閣), 장서각(藏書閣) 등의 사우(祠宇)가 있다.

죽림재(竹林齋)

세일재(歲一齋)

장서각(藏書閣)

조부(曺簿)의 정려각(旌閭閣)인 충효각(忠孝閣)

 

 

죽림정사 입구에는 우리나라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형태의 연못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 연지 대부분은 이웃한 소쇄원(瀟灑園), 식영정(息影亭), 식영정(息影亭), 창평장전이씨고택(전남 민속자료 제41호), 다산초당(茶山草堂)처럼 네모꼴(方形池)이다. 이곳의 연지는 명옥헌원림 입구 연지(蓮池)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자주 보이는 타원형지(?圓形池)이다. 이곳 지형에 맞추어 연못 두개를 판 뒤 이어 만든 것 같다.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사이에 격벽(隔璧)을 둔 일도원형지(一島圓形池)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하지(下池)에는 둥근 섬 하나를 못 중앙에, 상지에는 호안(湖岸)을 돌출시켜 둥근섬을 붙여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마치 태극문(太極紋)을 연상케 하여‘태극형지(太極形池)'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역학(易學)에 탁월하였던 창건주 조수문(曺秀文)의 이력을 느끼게 한다.

 

죽림정사 연지

죽림정사 연지

죽림정사 연지

죽림정사 연지

 

연못 뒤에는 비석 5개가 열 지어 있다. 첫 번째 비는 마모가 심하고 시간이 없어 자세히 판독하지 못하였으나, 조수문(曺秀文)의 조부이자 고려(高麗)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산광(山狂) 조대운(曺大運)과 그의 자(子) 보문각 직제학 조유도(曺由道)를 향사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다음은 <증암수확계원영사비(甑巖水確?員永思碑)>, 그 다음은 <세일재중수실적비(歲一齋重修實績碑)>이다. 그 옆에는 <서정조공기적비(墅亭曺公紀績碑)>가 보인다. 아마 이화산업설립자로 동산초등학교, 대경중학교, 대경정보산업고등학교를 거느린 서정학원의 전 이사장인 서정(墅亭) 조명주(曺明珠;1907∼2006)도 이곳 후손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조상호장관덕업장앙비(曺相鎬長官德業?仰碑)>가 있다. 조상호장관의 업적을 우러러 칭찬한다는 비석이다. 제10대 국회의원과 대한체육회장 그리고 전두한대통령시절 체육부장관을 역임(1987. 7. 14∼1988. 12. 4)한 조상호(曺相鎬)도 이 집안사람인 것 같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주역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어 비음기(碑陰記)를 읽어보지도, 촬영 하지도 못한 점이 아쉽다. 이들 외에도 경내에는 죽림사유허비(竹林祠遺墟碑), 조원향기실비(曺沅享紀實碑)도 있다고 하나 찾아보지 못하였다.

 

죽림정사 입구의 비석들

 

 

비석들 뒤에는 대규모로 중수하고 있는 누각이 보인다. 현판에 ‘취사루(聚斯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뒤에서 보면 단층 건물이나 앞에서 보면 2층이니 누각이 맞다. 이름 그대로 문중(門中) 후손들을 모아 선조(先祖)의 뜻을 기리는 강당(講堂)인 셈이다.

강당(講堂)‘취사루(聚斯樓)’

 

강당(講堂)‘취사루(聚斯樓)’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 중‘세일재매(歲一齋梅)’

 

 

취사루 뒤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조유도(曺由道)의 묘각(墓閣)인 ‘세일재(歲一齋)’가 나타난다. 그 앞에 수형이 빼어난 고매(古梅) 한그루가 나타난다.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 중‘세일재매(歲一齋梅)’이다. 4월 4일 늦은 저녁 이곳을 찾았을 때 꽃들은 곧 터질듯 하였다. 그 중 한 두 개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나무도 온통 붉은 색감 인지라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감상할 만하다. 4월 16일에는 점심 후 바로 달려갔다. 죽림정사는 매향(梅香)으로 가득하였다. 만개한 꽃들의 향연을 볼 수 있었는데, 이 날이 절정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4월 4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4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4월 16일 세일재매(歲一齋梅)

 

 

죽림원림매(竹林園林梅) 중‘죽림재매(竹林齋梅)’

 

 

취사루(聚斯樓) 북쪽에는 죽림재(竹林齋)라는 편액을 건 건물이 보인다. 1987. 1. 15 전라남도기념물 제99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이 건물 뒤에는 앙지문(仰止門)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죽림사(竹林祠)가 있다.

 

앙지문(仰止門)

죽림재 남쪽, 앙지문(仰止門) 앞에 우뚝 솟아있는 고매(古梅)가‘죽림재매(竹林齋梅)’이다. 4월 4일 늦은 저녁 찾았을 때 ‘세일재매(歲一齋梅)’처럼 꽃은 곧 터질듯 하였다. 양지바른 곳이어서인지 만개한 꽃들도 한 두송이 보이기 시작했다. 4월 16일 다시 찾았을 때 반은 지고 있었다. 그러나 매향(梅香)은 멀리 떠날 때까지 가득 머묾을 수 있었다.

4월 4일 ‘죽림재매(竹林齋梅)’

4월 4일 ‘죽림재매(竹林齋梅)’

4월 4일 ‘죽림재매(竹林齋梅)’

4월 4일 ‘죽림재매(竹林齋梅)’

4월 16일 ‘죽림재매(竹林齋梅)’

4월 16일‘죽림재매(竹林齋梅)’

 
다음검색
댓글
  • 11.04.30 11:00

    첫댓글 탐매연구의 달인!

  • 작성자 11.04.30 19:39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 11.04.30 20:21

    매화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에 경의를 표합니다.
    나중에 잘 정리하셔서 책으로 발간 하여도 손색이 없을듯 합니다..

  • 작성자 11.05.06 22:44

    이제 시작입니다. 노력하겠습니다.

  • 11.04.30 23:12

    정말 이곳도 좋아 보이는 곳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덕분에 또 함 모든것을 잘보고 갑니다.
    아름다운 꿈을 꾸세영...^^^..~~~~~~~~~~~~ㅎ

  • 작성자 11.05.06 22:44

    항상 감사드립니다.

최신목록